<?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www.blogger.com/styles/atom.css" type="text/css"?><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ns:openSearch='http://a9.com/-/spec/opensearchrss/1.0/' xmlns:blogger='http://schemas.google.com/blogger/2008' xmlns:georss='http://www.georss.org/georss' xmlns:gd="http://schemas.google.com/g/2005" xmlns:thr='http://purl.org/syndication/thread/1.0'><id>tag:blogger.com,1999:blog-5499307429964195877</id><updated>2024-12-19T08:51:45.846+05:30</updated><category term="game"/><title type='text'>AS GT WARRIOR</title><subtitle type='html'></subtitle><link rel='http://schemas.google.com/g/2005#feed'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feeds/posts/default'/><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www.blogger.com/feeds/5499307429964195877/posts/default?redirect=false'/><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link rel='hub' href='http://pubsubhubbub.appspot.com/'/><author><name>ADMIN</name><uri>http://www.blogger.com/profile/02638522785814696466</uri><email>noreply@blogger.com</email><gd:image rel='http://schemas.google.com/g/2005#thumbnail' width='16' height='16' src='https://img1.blogblog.com/img/b16-rounded.gif'/></author><generator version='7.00' uri='http://www.blogger.com'>Blogger</generator><openSearch:totalResults>22</openSearch:totalResults><openSearch:startIndex>1</openSearch:startIndex><openSearch:itemsPerPage>25</openSearch:itemsPerPage><entry><id>tag:blogger.com,1999:blog-5499307429964195877.post-5544080403574196658</id><published>2023-02-20T00:06:00.000+05:30</published><updated>2023-02-20T00:06:39.027+05:30</updated><title type='text'>Ch20</title><content type='html'>&lt;p&gt;&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는, 유진 일행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유폐의 마왕이 ‘다음’을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 희망을 걸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디어 뜻대로 웃음이 나왔다. 유폐의 마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에 대한 시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유진과 동료들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이렇게 된 것이 유폐의 마왕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 발자크 루드베스의 배신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재의 도움이 있을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변수를 사랑한다. 그가 보내온 억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를. 멸망으로 수렴할 뿐인 운명을 흔드는 변수를 사랑한다. 변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일수록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마왕에 맞서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충천해 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절망하지 않고, 반항 의지를 박탈할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꿋꿋이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권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보여주며 절망을 강요했다. 포기할 것을,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거나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라던 절망을 줄 수 없다. 힘을 확인했다. 저들은 기어코 베르무트마저 구하고 말겠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이대로 끝을 내도 좋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엎드린 유폐의 마왕에게 마족들이 다가왔다. 판데모니엄에 잔류한 마군의 후발대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에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전쟁 승리 후 대륙을 무차별로 폭격하기 위해 개조한 전투 요새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폐의 마왕을 추락시킨 공격이 판데모니엄을 휩쓸어버리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판데모니엄은 폐허가 된 상태였다. 유진의 말을 따라 판데모니엄에 홀로 난입했던 멜키스가 마구잡이로 날뛰어댄 탓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괘, 괜찮으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가오는 마족들은- 상처가 적었다. 유폐의 마왕은 그 이유를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은 침입한 멜키스에게 대적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강단이 있는 마족은 이미 전장에 가 있다. 이곳에 남은 마족은, 승리 이후에 대륙을 침공하며 욕망을 채울 생각뿐인 저열한 놈들뿐이다. 그렇기에 후발대는 멜키스와 맞서지 않고 숨었다. 멜키스의 오메가 포스가 미사일 포대를 비롯한 병기들을 박살 내는 것을 숨어서 지켜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족들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은 저들의 눈에서 불안과 공포를 읽었다. 그리고 스멀스멀 번지는 욕망도 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은 이 전쟁이 당연히 헬무드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마왕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보라,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마왕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처참한 몰골로 추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패전에 대한 불안과 공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목에 대한 욕심.&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저열한 욕심은 형태가 다양했다. 누군가는 마왕의 목을 베어서 바칠 것을 욕심냈다. 그렇게 한다면 패전 뒤에도 영광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또 다른 누군가는 마왕의 옥좌를 탐냈다. 헬무드의 패배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마왕이 되어 도망칠 것을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러한 욕망에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실망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저들이 헬무드의 영광과 마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드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건국한 제국에 한 점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헬무드 제국을 세운 것은, 유예로 준 300년 동안 최적의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헬무드를 발전시키고 인간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 당연한 말이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후회하거나 잘못이라 여긴 적이 없다. 인간 친화적인 정책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 인간의 혼을 수급하기 위해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노림수는 훌륭하게 먹혔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간이 헬무드로 이주하고서 죽었다. 사후 노동이란 계약으로 저당 잡은 혼은 결국 헬무드 내에서 순환하며 ‘다음’을 위한 재화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전쟁에서 문명을 초월한 병기들을 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륙 주요국가의 수도를 폭격한 뒤에 자발적으로 포로가 되어 찾아오는 생명을 갈아서 다음을 위한 재화로 사용하는 것이 유폐의 마왕의 목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다음으로 넘어오면서 결론을 내렸다. 결국 고독히 넘어갈 이상, 인정은 자신을 마모시킬 뿐이다.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항상 인연을 최소한으로 두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다음을 보았을 뿐이고 아래는 내려보지도, 손을 뻗지도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소한으로 두었던 인연은 지금 시대에서는 모두 죽었다. 이번 전쟁에 동원한 마군도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는 백성이나 부하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지금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들에 아무런 실망도 느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꺼져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순간 마족들의 몸이 재가 되어서 무너졌다. 그들에게 부여했던 마력이 불꽃이 되어 몰살을 일으켰다. 유폐의 마왕은 마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아직 이런 방법을 쓸 수 있구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직 남아 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에 퍼트렸던 마력은 이미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장의 마군에 부여한 마력은 아직 거두지 않았다. 그 마력은 유폐의 마왕이 가졌던 마력에 비하자면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필요했다. 그마저 없다면 ‘더’ 싸울 수가 없다. 즉 유폐의 마왕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아직 더 싸우기로 했다.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이미 오래전부터 절망해 있다. 그가 더 싸우겠다고 생각한 것은, 시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니다. 이렇게 추락한 시점에서 시험은 이미 의미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도, 마력을 회수하면서까지 추하게 싸움을 계속하려는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망은 충분할 텐데. 납득도 하였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는 어둡지 않은 하늘에 유진이 서 있다. 그 또한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이그니션으로 폭주시킨 신력도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다. 육체를 치료해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은 멀쩡한 몸을 완벽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유진의 처지는 유폐의 마왕보다 훨씬 낫다. 그의 손에는 아직 거대한 빛의 신검이 있다. 빛을 휘감은 템페스트도 유진의 뒤에서 눈을 번득이고 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모론도 세냐의 부축을 받고 있으며, 유폐의 마왕의 눈은 성녀들의 모습마저 보았다. 지칠 대로 지친 두 성녀는 서로를 부축하지 않고 오히려 유진의 등을 받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는 다른 너를 질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이 싸움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령 유진이 유폐의 마왕 앞에 무릎을 꿇고서, 더 싸우지 못하게 될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유진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에게 살해의 의지가 있을지라도, 유진과 함께 온 모두가 유폐의 마왕의 의지를 가로막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면 성녀들은 앞다투어 목숨을 바칠 것이고, 모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직접 몸을 내세워 유진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다. 세냐의 마법이 유폐의 마왕이 의지가 실현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가로막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을 모조리 죽일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유진을 죽일 수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을 따르는 신군은 절대로 유진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유진의 신좌를 탐내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마룡의 딸은, 제 아비를 죽인 유진을 위해 죽음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유라스의 모든 신도는 순교를 부르짖는 광신도가 될 것이다. 대륙의 영웅들은 여태껏 쌓아오고 앞으로 평생을 누릴 영광을 포기하고서 죽을 것이다. 먼 옛날 벗을 배신했던 라이언하트의 후예들은 그 누구도 선조의 죄를 답습하지 않고서 목숨을 바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이 전투에서 마왕은 고독하며 유일한 악이 된다. 그리고 마왕에 맞서는 용사와 영웅들은 악에 맞서 목숨을 불사를 것이다. 먼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세상의 운명은 유폐의 마왕이 보아온 운명과 다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이 세상뿐만이 아니다. 전의 세상도, 그 전의 세상도, 항상 그래 왔다. 침략을 시작한 유폐의 마왕과 필연적인 멸망에 맞서던 존재들은, 언제나 저러한 각오로 운명을 만들었다.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꺼트리지 않고. 유폐의 마왕이 정했던 다음이 아닌…… 계속되는 미래를 주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여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이 손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아아아! 판데모니엄 바깥의 전장이 뒤흔들렸다. 전투를 멈추었던 마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검은 안개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서 허덕였고, 마물은 죽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망 없이 찬란한 빛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뽑아낸 마력은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 너무 밝은 빛 아래에 그림자가 번지듯, 마력은 지상을 달리며 유폐의 마왕에게 흘러들어왔다.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을 닫는 패배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검이 높이 들렸다. 빛이 세상에 기둥을 세웠다. 유폐의 마왕은 그 광경에 전율하면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래를 여는 승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뚝 세운 기둥을 이끌며 유진이 추락했다. 유폐의 마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철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 따위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진을 향해 유폐의 마왕이 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앙! 어둠과 빛이 부딪쳤다.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는 것은 어둠이었다. 유폐의 마왕이 이끄는 무수한 사슬도 함께 박살이 났다. 유폐의 마왕은 날아갈 듯이 뒤로 밀리며 휘청거렸지만 간신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는 웃음과 피를 함께 토하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휘두른 주먹이 빛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저 빛은 지금의 유폐의 마왕이 가로막기에는 너무나도 환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뒤에서 템페스트가 주먹을 들었다. 다시 폭풍이 왔다. 바람이 빛을 실어 섬광을 터트렸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붙들었지만, 빛의 폭풍은 어둠을 모조리 삼키고 사슬을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에서 퍼져나가는 힘이 성벽을 소멸시켰다. 폭풍 속을 날던 유폐의 마왕은, 소멸한 성벽 너머에서 신군이 진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힘을 잃고 주저앉은 마군의 숨통을 끊는 대신에 판데모니엄에 가까이 오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름이 연호되고 있다. 전장의 모두가 직감했다. 헬무드는, 마족은, 유폐의 마왕의 패배가 가까운 것을. 신군과 유진 라이언하트의 승리가 가까운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직감했다. 실감했다. 더 이상 유진은 자신의 신명을 의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의 기도. 전장을 울리는 이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확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의 끝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음을 닫고, 미래를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무엇인지는 유폐의 마왕이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유진도 그를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나먼 바다의 빛이 속삭였다. 유진이 쥔 빛의 신검이 찬란히 빛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호하는 이름은 지금의 것. 유진이 가진 모든 이름이 하나로 결속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타올랐다. 존재에 품은 레반테인이 완전무결한 신성을 갖추었다. 유진은 양손으로 신검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 불꽃이 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유폐의 마왕의 어둠을 불살랐다. 유폐의 마왕은 그 불꽃에 맞서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어둠은 더 이상 검지 않았고 사슬은 불꽃을 묶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 속에서 유폐의 마왕은 주먹을 내렸다. 그는 머리를 한 번 들어 하늘을 보았다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의 신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 어울리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이 무릎을 꿇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무릎을 꿇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섣불리 유폐의 마왕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무릎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굽히게 만들었다. 일어서지 못하도록 쓰러트린 적도 몇 번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때마다 유폐의 마왕은 다시 일어났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불사의 저주를 안은 대마왕은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서 앞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발.’&lt;/p&gt;&lt;p&gt;&lt;br /&gt;&lt;/p&gt;&lt;p&gt;헐떡이며 올라오는 숨을 삼키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발 일어서지 마라.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계를 한참 넘어버린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전신이 삐걱거리고 눈앞은 어질어질한 데다 머리도 몽롱한 것이, 더 이상 싸우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힘들다고 생각만 할 뿐 유진은 검을 놓지는 않았다. 제발 그래 주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번에도 유폐의 마왕이 일어서 버린다면. 저, 회복도 하지 못하고 너덜거리는 주먹을 쥐어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면. 유진도 당연히 마주해 나아가 검을 휘두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릎을 꿇은 유폐의 마왕에게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고서 앞으로 한 발자국 성큼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르륵……! ‘승리’라는 신명이 담긴 신검의 불꽃이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내려도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움찔 놀라서 자리에 멈췄다. 소멸한 성벽 저편에서 멈춘 신군이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다. 유진은 신군에게 힐긋 시선을 준 뒤에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부하들은 어떻게 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더니 자세를 바꾸어,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는 세운 무릎에 팔을 걸치고서 유진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뢰가 아닌 공포로 뽑아내고, 무지와 과실로 조련한 충성이다. 바벨이 무너지고…… 내게 패색이 짙어진 시점에서 나는 그들의 주군이 아니었다. 애당초 나는 처음부터 저들을 부하라고 여기지 않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 마족 중 누군가는 진심으로 내게 충성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유일한 예외였던 것이 가비드 린드먼이었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패배해서 마군이 몰살하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거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두었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주었던 마력과…… 그들이 지니고 있는 마력을 거두었지. 더 싸우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어라 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렇게 되었구나. 품위 없는 선택을 하고 발악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지는 않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날 선 대답에 유폐의 마왕이 빙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만,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다. 내가 죽을 때는…… 내 안에 처박은 광기가 완전히 역류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혹은, 내 목숨과 바꾸어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나 자신이 홀려버렸을 때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철그럭. 피범벅의 가슴에서 거무튀튀한 사슬이 튀어나왔다. 그 사슬은, 여태껏 유폐의 마왕이 보였던 모든 사슬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낡았다’. 가장 오래된 사슬. 마왕에게 최초로 ‘유폐’라는 이름을 주었던, 최초의 사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것을 느끼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사슬은…… 멸망의 마왕과 연결되어 있다.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나는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죽는다고 해서 멸망의 마왕이 죽는 것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 사슬을 통해 멸망의 마왕의 근원에는 가까이 갈 수 있다. 나는…… 그럴 수 없지만, 유진 라이언하트.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어지는 대답에 유진의 눈이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한 대답을 원하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사슬을 다시 가슴 안으로 집어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전투는 내 패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은 목소리. 하지만 저 선언은 연호 중인 모든 목소리를 압도하고 전장에 울려 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전쟁은 헬무드의 패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다시 말했다. 그 말은 아직 살아 있는 모든 마군을 절망시켰다. 대부분의 힘을 상실한 그들은 땅에 머리를 처박고서 절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군이 패배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그것은 이 전장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에 마군이 발악할지라도, 대부분의 마력을 상실해 버린 마군의 발악은 절대로 결과를 바꿀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유폐의 마왕은 모든 패배를 인정하겠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니 아직 목을 바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목적을 이루고자 할 때…… 나는 기꺼이 목을 바치고 내 피로 문을 열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 승리의 기쁨 같은 것이 아직 체감이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까지 나는 네 포로이자 노예로서 고개를 낮추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영토와, 제국민들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자가 패자에게 의견을 물을 필요가 있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되묻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패자의 모든 것을 갖는 것이 헬무드의 법이지. 네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패자인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에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헬무드를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릎에 걸치고 있던 손이 뒤집혔다. 활짝 펼친 손바닥 위에 사슬 뭉치와 놓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사슬은 이곳에 오지 않은 모든 마족의 혼을 묶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약은 상관없다. 헬무드는 유폐의 마왕의 영지이며, 그곳에 살거나 태어났던 모든 마족은 결국 유폐의 마왕의 권속이다. 유폐의 마왕이 300년 동안 제국에 베푼 마력은, 제국의 모든 마족에게 침식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이 사슬을 쥔 이상, 너는 모든 마족을 지배할 수 있다. 죽음을 명령한다면 모두가 죽을 것이고, 노예가 되어라 명령한다면 모두가 노예가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잘근 입술을 씹었다. 그는 마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300년 동안 마족의 태도와 인식이 달라졌다고 해도, 유진에게 있어서 마족이란 ‘적’이다. 하지만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서 제국에 남은 모든 마족을 몰살시킬 만큼의 증오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내 마음대로 하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사슬은 거부하지 않았다. 오늘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족의 본성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진은 손을 뻗어 사슬을 받았다. 죽일 생각도 노예로 삼을 생각도 없지만, 이 보험은 만약의 사태를 위한 통제권으로 받아두기로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받은 사슬을 품에 넣고, 유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씩- 실감이 찾아왔다. 전쟁에서 이겼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이겼다. 비록 당장 죽이지는 못했지만, 유폐의 마왕은 패배를 인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일 적부터 간절히 바랐던 승리다. 아가로트조차 얻지 못했던 승리. 몇 번이나 끝나고 새로 시작했던 세계에서, 언제나 군림하며 다음으로 넘어가던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를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입술에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큭큭 웃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유진을 크리스티나가 부축했다. 탈진 상태인 것은 성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육신을 움직이는 크리스티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고서 유진을 일으켜 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유진을 불렀다. ㅡ쿠웅! 뒤편에서 모론과 세냐가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비틀비틀 걸으며 유진을 부둥켜안기도 전에 세냐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얼싸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이겼어? 이긴 거야? 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간절히 바란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다. 하멜의 죽음 이후로 얼마나 이 순간을 바라왔던가. 뒤늦게 가까이 온 모론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하하! 하하하! 하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고함을 질러댄 탓에 목소리가 쉬었지만, 모론은 전투 중의 고함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동료들을 끌어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하게 번져가는 승리의 실감은 신군에게도 전해졌다. 곳곳에서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높이 치솟았다. 길레이드를 필두로 한 간부들이 소멸한 성벽의 자리를 넘어 유진에게 달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세, 만세, 만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잔해 속에 숨어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던 멜키스가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그녀는 머리 높이 든 양팔을 열심히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디어…… 드디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림한 템페스트도 빛과 폭풍의 거체를 떨며 전율했다. 그토록 바라던 북벌을 이루었다. 유폐의 마왕에게 일격을 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떨리는 손을 내렸다. 신검의 불꽃이 흩어져서 사라졌다. 사방에서 연호하는 이름. 승리.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 이 전쟁의 승리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아직 멸망의 마왕이 남아 있다. 베르무트를, 구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준비를 갖추고, 라비스타로 진군한다. 유폐의 마왕의 사슬을 쥐고서 멸망의 마왕의 앞에 설 것이다. 아가로트가 남긴 상처 위에 앉아서 멸망을 붙들고 있는 베르무트와 만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보았다. 순수하게 승리를 즐기지 못하는 유진의 모습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유폐의 마왕은,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베르무트를 구하겠다는 바람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멸망을 죽인다는 것은 베르무트를 죽인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상하게도 저 바람이 헛된 희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만 하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일까. 발악으로도 바꾸지 못한 완전한 패배에 마음이 꺾였나? 아니면, 저들이 말하는 억지스럽고 아집 가득한 이상에 감화되었나. 최후의 최후까지 배신하지 않은 결속 된 신뢰에, 추구하는 미래에, 희망에. 결국 홀려 버린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어쩌면, 바람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세상을 끝내 온 멸망의 마왕을-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폐의 마왕이 도저히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기에 타협하던 것을, 저들은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모두가 놀랍고…… 훌륭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울려 퍼지기 시작한 승리의 축가 속에서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목소리는 신군에게 전해지지 않고, 바로 앞에 있는 유진과 동료들에게만 들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내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내가 살아온 영겁은 너무나도 길었고, 그 영겁 동안…… 나는, 나 자신을 흔들고 미치게 할 만한 요인은 모조리 유폐해 왔다. 나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내가 흔들려서 절망하고 포기해서 죽음을 바라 버리면, 세상은 결코 다음을 맞이하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엷은 미소를 지으며 읊는 말. 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의 결속은…… 그리고, 너희가 말하는 미래는, 그를 위해 불태우는 희망은, 결국에는 나를 고꾸라트리고 말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라도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손의 떨림을 무시하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에 나를 죽여야 했다고. 내가, 오늘에 도달할 수 없게 해야 했다고. 후회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일 기회? 그런 것이야 유폐의 마왕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300년 전에도 그랬고,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유폐의 마왕은 유진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그러지 않았다. 마왕은 용사가 자신을 쓰러트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결국에는 무릎을 꿇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삶은 대부분이 후회로 가득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 라이언하트. 지금의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늘이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울려 퍼지는 승리의 축가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서는 다시금 웃음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록 이렇게 패배했지만, 신기하게도…… 후련한 기분이 드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 만족을 주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 나는 너를 절망시키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절망이라…… 나에게 그런 감정을 주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 내 만족을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는 말아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 말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에게 저딴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쓰러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유진의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너를 위한 기도가. 너희가 말하는 희망이, 내가 반복하고자 한 다음에 대한 열망보다 짙었던 것이지. 그 모든 가치를 다음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만…… 다음이 필요 없게 된다면,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자식.”&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세상은 내가 반복하던 운명과 다르다. 그 다름이 결말마저 다르게 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나는…… 너희가 바라는 희망과 미래에 기울여 보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 많은 사연과 사정이 있다는 것은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나는 너를 이해하지 않을 거다. 내게 있어서 너는, 몇 번이나 멸망과 함께 세상을 망쳐 온 마왕일 뿐이다. 네가…… 항상 세상을 처음부터 시작했을지라도, 나는 네게 감사하지 않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나는 너의 그 일관적인 증오에 감사한다. 만약 그 증오가 없었다면, 너는 오늘에 도달하지 못했을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아가리를 놀리지 못하도록 지금 당장 죽이지 못하는 것이 짜증이 날 정도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뿌득 이를 갈고서 시선을 거두었다. 더 이상 유폐의 마왕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시선이 거두어졌음에도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디 멸망의 마왕에게도 똑같은 증오를 갖기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시선이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 모론 루하르. 아니스 슬리우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에게 패배를 준 모든 이의 이름을 말한 뒤, 유폐의 마왕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의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마. 이 세상에 다음이 아닌 진정한 미래를 열기를.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한 신군의 함성이 멈췄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이 멈췄다. 패배한 마군의 절규가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를 끌어안은 모론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세냐는 더 이상 흐느끼지 않고서 눈을 부릅떴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가로젓던 아니스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로사리오을 움켜쥐었던 크리스티나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외면했던 시선을 높이 들었다. 유폐의 마왕조차도 경악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색이 번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한 것은 유폐의 마왕이었다. 그는 더 이상 미소 짓지 못하고 만면에 경악을 담았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어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어째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어지럽게 번지는 색. 이 세상에서 저러한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은 단 하나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왜? 왜, 멸망의 마왕이 이곳에 나타나는가? 300년 동안 멸망의 마왕은 베르무트와 함께 라비스타에 봉인되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라비스타가 아니다. 멸망의 마왕이 나타날 수 있는 이유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지금 하늘에서 번지는 어지러운 색의 향연이 멸망의 마왕의 전조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과 연결된 사슬이- 저 색의 중심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더더욱 유폐의 마왕을 경악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에서의 ‘흔들림’은 언제나 느끼고 있다. 멸망의 마왕과 베르무트에게 어떠한 영향이 있을 때마다, 유폐의 마왕은 사슬을 통해서 항상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멸망의 마왕이 이곳에 강림하는 것은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투에 집중해서? 불완전하고 약해져서? 아니,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림을 느끼기도 전에 이곳에 강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은 세상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다. 저것은 마왕이라 불리지만 멸망을 가져오는 현상이자 재앙이다. 봉인이 없다면, 저것은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인이 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유폐의 마왕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봉인에는 조금의 여유가 남아 있을 터다. 아무리 적어도 앞으로 몇 달은 버텨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징조도 없이 봉인이 풀려 버리다니. ……징조? 유폐의 마왕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저 봉인이 순수하게 유폐의 마왕만이 묶은 것이라면, 이렇게 갑자기 맞닥트리고 경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탄식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에 묶인 옥좌에 앉은 것은 베르무트다. 사지를 족쇄로 묶어 놓기는 했다만, 봉인의 주체는 결국 베르무트란 말이다. 봉인이 풀리고 멸망의 마왕이 강림했다는 것은…… 베르무트가 결국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멸망의 마왕이 이곳에 나타났는가? 그러한 사실은 차치하고서 다른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 없다. 유진은 물론이고 세냐와 모론, 성녀들도 마찬가지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가 끝난 것이 바로 조금 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에서의 폭주에 이어 현실에서 이그니션을 쓴 반동으로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만 같다. 어찌어찌 기절하지 않고 버티고는 있지만 전투는 불가능하다. 지금의 유진은 신력을 사용할 수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은 닫혔다. 간신히 메리만 들고 있을 뿐, 세냐도 연달아 펼친 기적과 마법으로 인해 심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다. 그럴지라도 마법은 사용할 수 있다만, 세냐 혼자서 멸망의 마왕을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그는 몇 번이나 전투에 몸을 갈아 넣었다. 그럴 때마다 목숨은 부지하고 상처를 치료했지만, 실상 지금 모론의 육체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사실 동료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성녀들이다. 그녀들은 격렬한 전투 내내 동료들이 죽지 않도록 기적을 퍼부었고, 그와 동시에 유진에게 쏟아지는 막대한 부하를 함께 부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찰나에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멸망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싸우겠다고 나갔다가는 수초도 지나지 않아 몰살당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군, 나를 따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진의 것이 아닌 아가로트의 기억. 갑작스레 강림한 멸망 앞에서 아가로트는 신군에게 진군을 명했다. 신군에게 죽음을 명령하고, 아가로트 자신도 죽음을 각오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그렇게 해야 하나? 의미가 있나? 신군을 모조리 진군시킬지라도 멸망의 마왕은 막을 수 없다. 간부들은 강하지만 멸망 앞에서 그 힘은 미력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오늘 멸망의 마왕과 만나게 될 것은 상상하지 못했기에, 이 절망적이고 끔찍한 조우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잡하게 섞이고 번지던 색의 중심에 시커먼 어둠이 고인다. 어둠이 점점 크게 번진다. 그 어둠은 중심에서 세상 무엇보다 불길하고 사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오오오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기가 흔들린다. 지면이 들썩거린다. 마나가 모조리 빨려들어 가서 색의 일부가 된다. 세상이 비명을 지른다. 어지럽게 얽히는 색 속에서 어둠은 점점 크게 번져갔다. 눈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고, 직시한 순간 정신을 오염시키는 광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은 더 이상 노래하지 못했다. 공포와 경악으로 침묵하고 있던 신군의 대부분은 이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거나 비명을 지르고 있다. 라이언하트를 필두로 한 간부들조차도 그 자리에서 얼어버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를 낸 것은 모론이었다. 모론의 밝은 눈은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존재를 보았다. 곧 유진과 세냐, 성녀들도 그 존재를 보았다. 하지만 유진은 모론처럼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할 만큼 경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일어서는 것은, 형태가 일그러져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300년 전에 아주 멀리서 멸망의 마왕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 멸망의 마왕은 온갖 색이 뒤섞인 모습이었지. 인간이나 마족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의 기억 속에도 그랬다. 그 시절에도 멸망의 마왕은 저런 모습은 하고 있지 않았다. 아가로트가 간신히 도달했던 멸망의 중심에도 저런 모습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저건 대체 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오오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멀스멀 일어서던 그것이 더 움직였다. 휘청거리며 앞으로 움직인 그것은 마치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질 것처럼 불안정했지만, 쓰러지지는 않고 휘청휘청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색이 미쳐 날뛰었다. 뒤엉키고 번지는 색들이 세상을 침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색은 중심에 나타난 괴이한 존재에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거죽에 어지러운 색을 두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천천히, 그것이 ‘더’ 움직였다. 색이 너무 어지러워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은 이쪽을 보고 있다. 손가락을 들어, 이쪽을 가리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투의 반동 때문에?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반동이 무겁고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유진이 움직이지 못한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과 눈이 마주치고서, 사고가 정지해 버렸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은 모론이었다. 도저히 빠르게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치명적인 살의, 움직이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모론은 지금 자신이 동료들을 끌어안고 있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굵은 팔이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를 강하게 안았다. 그는 이를 뿌득 씹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모론의 넓은 등은 품에 안은 것들을 지키기에 충분한 방패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아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파괴의 소리. 동료들을 끌어안은 모론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울컥 뿜어진 피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진이 고개를 들어 모론을 보았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 까뒤집힌 눈동자가 모론이 느끼는 고통을 증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비명을 질렀다. 착란에서 벗어난 크리스티나는 비명 대신 기도를 읊으며 모론의 등을 끌어안았고, 아니스도 급히 기적을 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으며 도달한 등. 살갗이나 피가 만져지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것은 울퉁불퉁한 뼈였고, 그마저도 점점 재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고함을 질렀다. 푸확! 간신히 일으킨 불꽃이 모두를 감쌌다. 세냐도 마법을 펼쳐 공간을 연신 도약했다. 그렇게 모두가 ‘저것’과 거리를 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지 않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강인한 모론조차도 일격에 사경을 헤맬 만큼의 위력. 정신을 잃었는데도 모론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아서, 유진은 억지로 팔을 열고서 모론을 붙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거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약을 멈춘 세냐가 숨을 헐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를 두었는데도 섬뜩한 불길함이 가시지 않는다. 어지러운 색을 휘감은 그것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 기어코 지상에 선 그것은, 바로 앞에 선 유폐의 마왕을 향해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폐의 마왕을 보지 않았다. 그것의 시선은 여전히 유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시선을 느낀 유폐의 마왕은 긴 탄식을 흘렸고, 그것은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서 유폐의 마왕을 지나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존재에게서 용납할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시선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도저히 저것과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모두를 감싸고 직격당한 모론의 상처부터 확인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이 날아갔다. 뼈는 간신히 달라붙어 있지만 점점 검게 부스러지고 있고, 내장도 마찬가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이 가느다란 호흡. 신력이 봉인 당한 유진은 모론을 치료할 수가 없었지만, 성녀들이 필사적으로 모론의 상처를 돌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떡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더듬더듬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싸울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것은 세냐도 똑같다. 지금은 일단 물러서야 한다. 하지만 물러설 수 있을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멸망의 마왕은 강림했고, 지금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아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서 들리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하늘을 날고 있던 라이미르아가 돌진해 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쾅, 쾅, 쾅! 라이미르아가 휘감은 마이스의 시그니처, 배틀 쉽의 포대가 연신 불을 뿜었다. 그리고 라이미르아도 입을 벌렸다. 대량의 마나가 일점에 모이더니 브레스가 쏘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브레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뒤엉키는 색들이 쭉 뻗어지더니 하늘을 뒤덮었다. 색이 마법과 브레스에게 닿는 순간 모든 것이 소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욱 전진한 색이 라이미르아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세냐가 급히 메리를 휘둘렀다. 마법이 공간을 뛰어넘어 라이미르아를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라이미르아를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다. 날개의 끄트머리에 빛이 스쳤을 뿐인데, 순식간에 번진 색이 라이미르아의 날개를 완전히 뒤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미르아의 위에 타고 있던 메르가 비명을 질렀다. 푸확! 메르가 휘두른 마법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라이미르아의 날개를 잘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파, 아파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쪽 날개를 잃은 라이미르아가 아래로 추락했다. 위에 함께 타고 있던 마이스의 마법이 간신히 라이미르아를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유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멸망의 존재감에 굳었던 템페스트가 바람을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러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괴성과 함께 템페스트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르! 전진하는 것은 폭풍뿐만이 아니었다. 머리 높이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던 멜키스도 악악 비명을 질렀다. 이미 모든 힘을 쏟은 것은 멜키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지금’ 먼저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막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코피와 피눈물을 흘리며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소환에 성공한 대지와 번개, 불꽃의 정령왕이 템페스트의 뒤를 따랐다. 대지가 뒤집히고 하늘에서 번개가 처박혔다. 뒤집힌 땅에서 불길이 치솟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다시 손을 들었다. 또다시 색이 번졌다. 내리꽂히던 번개가 다시 하늘로 되돌아갔다. 갈라진 대지가 재봉합되었다. 불길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푹 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풍이 그쳤다. 정령왕들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저 끔찍하고 허무한 색은 모든 정령왕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서 정지했던 라이미르아는 더 이상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브레스를 쏴 갈겼다. 이러한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든 저것의 전진을 가로막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발악하는 것은 라이미르아뿐만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의 등 위에서 전장에 기적을 내리던 신관들이 일제히 아래로 뛰어내렸다. 헬무드와의 전쟁을 목적으로 성유물을 이식받고 교련 받은 은광의 신관들이다. 높은 하늘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어내린 그들은 모두가 빛의 날개를 펼치고서 멸망의 마왕을 향해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다시 한번 더듬더듬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다. 라이미르아에게도, 템페스트에게도, 멜키스에게도, 은광에게도 진군하거나, 멸망을 공격하란 명령은 하지 않았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부의 은광이 유진이 있는 곳에 내려섰다. 그들은 간신히 서 있는 유진과 동료들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몇몇은 자기들의 손목을 베어서 모론의 상처에 피를 들이부으며 멸망의 마력을 정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디, 부디 물러서 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인가 본 적이 있던 은광의 성직자가 유진을 세우고서 울부짖었다. 유진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성직자가 홱 몸을 돌렸다. 멸망을 향해 돌격했던 동료 성직자들이 빛에 닿아 허무하게 소멸하는 모습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교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직자가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다른 성직자들도 연달아 순교를 외치며 멸망이 일으키는 색을 향해 돌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백 명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소멸하는 것에는 몇 분이란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몇 분 동안 저것은 그 자리에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쾅, 쾅, 쾅! 브레스의 폭음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미르아는 드래곤하트의 모든 마나를 뽑아낼 듯이 브레스를 쏴 갈겼고, 그 위의 마법사들도 피까지 토해가며 마나를 공급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러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미르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파엘로가 대장이 되어 이끌던 비행병대의 전원이 멸망의 마왕을 향해 돌진했다. 순교, 순교, 순교! 라파엘로가 내지르는 광신의 고함이 브레스의 폭음 속에서 쩌렁쩌렁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지도 진동했다. 유진은 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승리의 축가를 부르다가, 강림한 멸망이 전하는 공포에 경직되었던 모든 신군이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은 진형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고 악을 쓰며 달렸다. ‘저것’을 상대로 전술이나 전법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달리는지는 유진에게도 전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의 목적은 멸망의 마왕과 싸워서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멸망을 잠시라도 붙들고, 그 사이에 유진과 동료들이 도망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서의 승리라고 판단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런 것을 명령하지 않았다. 아가로트처럼 신군에게 아직 죽음을 명령하지 않았단 말이다. 하지만 저들은 유진을 구하고, 멸망을 잠시 막기 위해서 스스로 판단하여 죽음을 결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식간에 증식하며 번지는 죽음 속에서 유폐의 마왕이 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너에게 이끌린 것이구나,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서 사슬의 소리가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탄식과 함께 몸을 돌렸다. 어지러운 색을 휘감고서 전진하는 멸망과, 산화해 버린 은광이 남긴 빛과 재가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앞. 페가수스에 탄 라파엘로와 비행병대가 있다. 지상에서는 신군이 공포를 잊기 위한 악을 쓰며 진군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움직이지 못하는 유진의 모습을 보았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했다. 유폐의 마왕의 힘은 끝내 유진을 절망시키지 못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유진이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유진에게 충분한 절망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추구해 온 것이 허무하게 되었음에 절망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다시금 탄식하고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우러르던 이들이 앞다투어 목숨을 바치고 허무해지는 것에 절망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 유폐의 마왕이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타난 사슬들이 걸음을 따라 바닥에 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대 이길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멸망의 앞에는…… 결국 너도 절망해 버리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와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서는 유진이 승리했다. 하지만 지금의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이 전투의 결말을 너무나도 쉽게 예지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유진과 동료들에게는 더 이상 싸울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걸음을 멈췄다. 탄식이 아닌 탄성을 흘렸다. 지금 유진은 절망했을 것이다. 그와 동료들이 그토록 구하기를 바랐던 것이 허무해진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과거 유폐의 마왕도 그랬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그것을 정말로 목전에 두었지만, 최후의 순간에 쓰러져버렸다. 신뢰했던 동료가 마왕이 되었고, 구하고자 했던 세상은 멸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이 아닌 다음에 집착한 것이 아니다. 몇 번이나 다음을 새로이 맞이하면서, ‘이번에야말로’라고 생각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야말로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랐다. 멸망에 순응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 지금으로 멸망을 끝내기를 갈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실패했다. 많은 것을 잃고, 다시 많은 것을 채우고, 많은 것을 보고, 품으며, 다시 잃었다. 몇 번이나 혼자가 되었다. 절망하고 또 절망하면서 그러한 절망마저 자기 자신의 심연에 유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추구하던 갈망이 허무하게 무너졌을 때의 절망감. 유폐의 마왕은 그러한 절망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것이 쉽사리 떨칠 수 없는 것이란 것도 잘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포기하고 여기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공포에 질려 도망가지 않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지만, 고집을 부리고 악을 쓰며 불가능에 덤비는 것은 저 사내라면 할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씹은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절망으로 탁했던 눈동자는 다시금 빛이 일렁거리고 있다. 후들거리며 떨리던 손가락으로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유진의 발은 앞으로 향하지 않았다. 핏발 선 눈을 돌리지 않고 앞을 노려보면서, 유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히려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나가려는 세냐를 붙잡고, 크리스티나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쓰러진 모론을 일으켜서 부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다시금 탄성을 내질렀다. 눈동자에 더 이상 절망은 없다. 분노를 가까스로 통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패배를 선택하지 않았다. 명령 없이 스스로 나아간, 자신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모두의 염원에 부응하는 것을 선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유진은 그것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것에 유폐의 마왕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절망을 딛고 일어섰다. 다음이 아닌 지금의 미래를 열겠다는 갈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산화하는 수많은 목숨을 앞에 두고서, 그 죽음만큼은 절대로 허무해지지 않기를 다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유진이 절망을 떨쳐내지 못했다면. 증오와 결의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그렸던 형태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이번 세상도 폐기되었다고. 그렇게 판단하고서, 유폐의 마왕은 ‘다음’을 준비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의 세상은 폐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화하는 빛은 얼마나 눈부신가.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멸망과 죽음 앞에서도 저들은 결속되어 있다. 자신의 목숨조차 평등한 저울에 두지 않고, 보다 큰 가치와 영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불태우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광신도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영겁에서 신이란 대부분이 무능했고, 세상의 처음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신이란 작자들보다 유폐의 마왕 본인이 신에 가까웠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유폐의 마왕은 저 선두의 광신도들에게조차도 여태껏 주목하지 않았던 집념과 빛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 마왕이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뛰어넘어, 라파엘로가 선두에서 이끄는 비행병대와 멸망의 마왕 사이로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이 쉬어라 순교를 부르짖던 라파엘로가 놀라서 외쳤다. 유폐의 마왕은 그 외침의 다음을 듣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 끼리리릭……! 유폐의 마왕의 팔에서 무수한 사슬이 튀어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락! 하늘이 크게 갈라졌다. 유폐의 마왕이 흘려보낸 사슬이 공간의 문을 연 것이다. 그리 먼 곳까지의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머리가 핑 돌고 숨이 턱 막혔지만, 유폐의 마왕은 존재의 비명을 무시하고 다른 사슬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짓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아폴로의 고삐를 당겼지만, 유폐의 마왕이 일으킨 폭풍에는 거스르지 못했다. 번져오는 멸망의 색과의 침식을 앞에 두었던 비행병대가 모조리 사슬이 연 문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코앞에서 먹잇감을 빼앗았는데도 ‘저것’은 유폐의 마왕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애초에 저것은 처음부터 유진 외에 다른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들을 지워왔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쓴웃음을 머금고서 아래로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우…… 길게 숨을 삼킨 유폐의 마왕이 몸을 웅크렸다. 뚜둑, 뚜두둑. 혹사당할 대로 당한 몸뚱이가 붕괴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유폐의 마왕은 멈추지 않았다. 지상으로 떨어지던 유폐의 마왕이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유폐의 마왕의 양손이 지상에 닿았다. 그러자 대지에서 무수히 많은 사슬이 치솟았다. 사슬이 서로 얽히며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유폐의 마왕은 비틀비틀 일어서며 숨을 몰아쉬다가, 울컥 피를 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로 물러서던 유진은 바로 앞에 떨어진 유폐의 마왕의 등을 보았다. 유폐의 마왕은 연거푸 피를 토해내고서, 긴 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려온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숨을 헐떡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세냐와 성녀들이 흠칫 놀라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의 형상에 어지러운 색을 두른 모습. 사슬의 벽 앞에 선 멸망의 마왕은 그렇게 보이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저것에서 베르무트를 느꼈다. 저것이 베르무트라고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나조차도 느낄 수 없는 새에 봉인이 풀려 버린 것인지.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 끼리릭…… 멸망의 마왕이, 아니, 베르무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길한 색을 이끄는 베르무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유폐의 마왕이 일으켜 세운 사슬이 덜덜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자아가…… 결국은 잡아먹혀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저것’은 너에게 이끌려 온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자책을 느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자부해야 할 일이지. 하멜. 너는 아가로트일 적에 멸망의 마왕의 안에 상처를 새겼다. 멸망의 중심에 너라는 존재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 끼리릭. 유폐의 마왕의 몸에서도 사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몸에서 울리는 소리를 의식하며 다시금 긴 호흡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각인을 통해서 멸망이 너를 느낀 것이다. 너라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기에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니 자부해도 좋다는 것이다, 하멜. 멸망의 마왕은- 네 검이 자신에게 닿을 것이라고 직감한 것일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의 진군이 멈췄다. 그들은 갑자기 난입한 유폐의 마왕이 비행병대를 날려버린 것과, 돌연 사슬의 벽을 세워 멸망의 마왕을 막아 세운 것을 경계했다. 그러한 적의에 유폐의 마왕은 빙그레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쏟아지는 적의의 한가운데에서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너를 다시 인정하도록 하마. 네 검은 멸망의 마왕을 이곳으로 이끌 만큼 예리하다. 그리고 네 의지는 멸망의 불길한 광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네 동료들은 결코 너를 배신하지 않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끼릭, 끼리릭. 새로이 나타난 사슬이 유폐의 마왕의 팔을 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뭐 하려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력이 없는 것은 유폐의 마왕도 같을 터. 그런데도 저만큼의 힘을 뽑아낸다는 것은- 유진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쥐어 짜내는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결사코 포기하지 않았던,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영혼을. 저주에 의해서 죽지 않는 자신의 영혼을 산화시켜 마력으로 바꾸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인이 풀렸다면 다시 하면 될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나는 베르무트가 아니기에 수백 년이나 멸망을 붙들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바쳐서 하는 봉인이라고 해봤자 결국은 불안정한 임시방편일 뿐. 하지만 지금 너희를 살리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낮은 웃음소리와 사슬의 소리가 섞였다. 유폐의 마왕은 가슴을 한번 훑더니, 태초의 낡은 사슬의 일부를 뽑아 유진에게 건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 말했던 것처럼 내가 직접 인도할 수는 없게 되었구나. 하지만 이것으로 되었다. 그 사슬이, 너를 멸망의 심부로 인도해 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유폐의 마왕을 바라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지금 유폐의 마왕이 ‘왜’ 저런 선택을 하고 앞을 막아선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가- 유폐의 마왕의 마음을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입술을 씹은 뒤에 사슬을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고, 널 죽이겠다는 생각도 바꾸지 않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죽음이지. 안식이 아니어도 좋다. 소멸도 좋고…… 앞으로 영원히 죽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도 좋다. 멸망이 끝나고, ‘다음’을 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식이라 여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가슴에서 흘러나온 사슬을 손에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끼리릭.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사슬의 벽 앞으로 다가오는 멸망의 중심에도 똑같은 사슬이 나타났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과 멸망의 마왕을 연결한 사슬을 몇 번이나 손에 감으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위해 산화한 목숨을 허무히 두지 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냐의 등을 떠밀고, 모론의 거구를 어깨에 짊었다. 쿠우우웅! 하늘에 열렸던 사슬의 통로가 지상으로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을 들어 사슬의 문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퇴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낮은 목소리가 신군에게 전해졌다. 신군을 이끌던 길레이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길레이드가 손을 치켜들자 웅성거리던 신군이 문을 향해 전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마나 붙잡을 수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덜덜 떨리는 사슬을 단단히 손에 감은 유폐의 마왕은 한 번 더 피를 토하고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다시 올 때까지는 붙잡도록 하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확한 기한은 듣지 않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멸망을 붙잡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 싸워보았기에, 저 존재가 얼마나 무겁고 질긴지는 알고 있다. 게다가 유진도 오랜 시간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심신이 회복되면 곧장 이곳에 돌아올 생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지금은 물러선다.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사슬의 문으로 도약했다. 유폐의 마왕은 그 모습을 확인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콰르르르! 전장에 남아 있던 모든 마족이 유폐의 마왕에게 끌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 폐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그들은 허리에 감긴 사슬을 떨쳐내지 못했다. 가까워질수록 마족들은 비명이 아닌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은 유폐의 마왕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쏟아지는 욕설과 저주에 유폐의 마왕은 만족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는 이런 것이 어울리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제로 끌려온 마족들은 사슬의 벽을 넘어 멸망의 마왕에게 던져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퍽, 퍼억! 간신히 숨이 붙어 있던 마족들은 멸망의 마왕에게서 번지는 색에 닿아 곧장 소멸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영혼들이 유폐의 마왕에게 되돌아왔고, 사슬을 붙드는 힘으로 더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우우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중심으로 세상이 울부짖었다. 끼릭, 끼리릭…… 사슬의 벽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사슬을 붙든 유폐의 마왕의 손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감정이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멸망의 마왕에게 다가갔다. 유폐의 마왕이 가까이 갈수록 사슬의 벽이 점점 멸망의 마왕에게 좁혀졌다. 멸망의 마왕은 손을 들어 사슬을 향해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 묵직한 울림이 사슬과 유폐의 마왕을 흔들었지만, 유폐의 마왕은 멈추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네 감정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사슬의 벽을 통과해서 멸망의 마왕 앞에 섰다. 뒤엉킨 색은 너무나도 짙어서 베르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저것에게서 틀림없는 시선과 감정을 느꼈다. 유진이 사슬의 문을 지나 이 공간을 떠났기에, 멸망의 마왕은 더 이상 유진을 볼 수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사슬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따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양손으로 사슬을 움켜쥐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아직 그곳에 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너트린 사슬의 벽이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휘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문을 통과해서 도착한 곳은, 이번 전쟁에서 주둔한 네란이었다. 대부분의 힘을 소모한 유폐의 마왕이 문을 이을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였고, 오히려 유진은 그것이 잘됐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는 전장을 똑바로 볼 수 있다. 유진은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전장의 신군이 남김없이 사슬의 문을 통과하는 것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거대한 사슬의 돔뿐이다. 유폐의 마왕이 자신을 바쳐서 만든 마지막 봉인.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봉인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희미하게나마 봉인의 안쪽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득실거리는 살덩어리들. 누르다. 봉인은 가비드와 결투했던 콜로세움과 엇비슷한 크기인데, 외곽부터 누르가 가득 차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보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욱신거리는 눈가를 어루만지며 내뱉었다. 아무리 집중해서 보아도 봉인의 중심은 보이지 않고, 바깥에서부터 들여다보고 싶어도 누르가 너무 많이 득실거린다. 결국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거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처는 계속해서 치료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완치시키지는 못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대답에 유진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목숨을 건진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론만 다행인 것이 아니다. 모두가, 방금 죽을 뻔했다. 실제로 죽은 사람들도 많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았던 광경은 아직도 눈동자에 새겨져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개를 펼치고 멸망의 마왕에게 돌격하던 성직자들. 은광은 애초부터 결사대를 목적으로 조직했다. 만약 유폐의 마왕이 이곳까지 와주지 않았다면.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처음의 계획대로 간부들을 비롯한 소수 정예만으로 판데모니엄에 돌입했을 것이고, 그때 은광도 결사대로서 유진을 위한 빛으로 산화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런 식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투 중에서도 조금 죽기는 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모두가 멸망을 잠깐 가로막고서 죽었고, 그 광경에 신군 전원이 유진을 위해 진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썩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일 적이나 하멜일 적이나 전장은 질리도록 보았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죽는 이들을 보는 것도 처음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유진을 위해 돌진한 이들을 죽인 것은- 유진이 반드시 구하겠다고 결심한 놈이었다. 놈은, 유진조차도 죽이려고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베르무트가 맞긴 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움직이는 꼬라지를 떠올려 보면 자아는 없던 것 같다. 애당초 자아가 남았다면 그딴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유진은 여전히 눈에 아른거리는 광경을 억지로 지워냈다. 결국 가장 먼저 희생한 자들이 있었기에 유진은 살아남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병신 새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후려쳤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병신처럼 가만히 서 있지만 않았어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동으로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핑계다. 강림한 멸망의 앞에 굳었던 것은- 눈앞의 광경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떠올리는 것으로 속이 또 부글부글 끓어서, 유진은 다시 손을 들어 뺨을 한 대 더 갈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뻐억! 아무래도 따귀는 부족할 것 같아서 주먹으로 때렸는데, 너무 세게 때려버린 탓에 머리는 어지럽고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가득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병신, 뭐 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휘청거리다가 넘어지려는 유진을 누군가가 부축했다. 어지러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얼굴을 확인한 뒤, 입에 고인 피를 옆으로 퉤 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하긴, 병신 짓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면 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을 부축하던 손을 놓았다. 그는 피가 눌어붙은 유진의 얼굴과 몸을 살피고서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좀 씻기라도 하지 그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꼴이 말이 아닌 것은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핏물이 배여서 그대로 굳어버린 시안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질하며 끌끌 혀를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까이 오지 마라, 썩은 시체 냄새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몸에서 나는 냄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투덜거리던 시안이 성벽의 난간에 털썩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텅 빈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슬의 봉인. 아까 전 보았던- 이해할 수 없고 불길한.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시안은 내색하지 않고 무릎을 손으로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이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산 사람이 훨씬 많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겼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이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이 가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도중부터는 이성보다는 본능에 몸을 맡겼던 것 같다. 몇 명이나 죽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 처음으로 전장을 겪었을 때가 새삼 떠올랐다. 그때도 꽤 많이 죽였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전장과 큰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평생 이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유폐의 마왕에게 항복을 받아내지 않았다면……. 음…… 나는 아직 저기서 싸우고 있을 거야. 그렇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는 말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그리고, 네가 저기 하늘에 태양을 띄워주지 않았다면. 아군은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었겠지. 그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새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유진은 당장이라도 저렇게 말하며 재촉하고 싶었지만, 시안이 꾀죄죄한 몰골로 나름 진지하게 말을 잇는 꼴이 우스워서 잠자코 지켜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음…… 지금 무슨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는 조금은 짐작이 간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너는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나 경험이나…… 그래도, 일단은 내가 네 형이기도 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 마음대로 형이래, 어린놈의 새끼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발끈하고서 고개를 들었다가 결국 봐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 그것을 보니 오히려 시안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기분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나?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위로나 격려를 할 만한 상대가 아니잖나. 오히려 저런 것들을 간신히 살아남은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꺼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계속 말해봐. 형님답게 어디 아우를 격려해 보시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격려는 무슨. 멘탈 알아서 잘 잡은 주제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난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낯짝을 보니 멘탈은 내가 잡아야겠다. 어우, 아까 본 것.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쫙 돋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케 안 기절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에 한 번 느낀 것이랑 비슷해서 그런가? 그, 왜. 흑사자 성에 쳐들어왔던…… 하우리아에서도 느꼈었고. ”&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교가 안 되기는 했지만, 저 불길한 색은 망령의 존재감과 비슷했다. 그때 미리 겪어보지 않았다면 저항도 못 하고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라이언하트의 차기 가주가 싸우기도 전에 기절해 버려서야 체면이 안 서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오히려 시안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안 싸우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침 잘되기도 했잖아. 바로 앞이기도 하고…… 병력도 그대로 있으니. 너만 싸울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출전할 수 있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무섭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무섭지. 그런데 무섭다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 유진, 너…… 설마 지금 나 떠보는 거냐? 내가 겁먹어서 덜덜 떠는 걸 보고 약 올리려 하는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뭐로 보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쓰레기로 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떨리는 손을 슬쩍 뒤로 감추며 대답했다. 그러한 떨림은 유진도 진즉에 보았지만, 굳이 놀리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끼, 잘 컸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시안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시안은 질색을 하며 유진의 손을 밀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보면 지가 키운 줄 알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은 내가 키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씻고 잠이나 퍼 자. 저번처럼 반년 동안 퍼질러 자지는 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 좀 살펴보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을 성벽에 두고서 아래로 내려왔다. 물자를 점검하던 병사들은 유진을 보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고, 상당수는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을 슬쩍 들어서 화답해 주고 병동으로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으…… 아으으으…….”&lt;/p&gt;&lt;p&gt;&lt;br /&gt;&lt;/p&gt;&lt;p&gt;병동에서 가장 커다란 환자는 라이미르아였다. 그녀는 폴리모프도 풀지 않고서 병동 외곽에 몸을 웅크리고 끙끙 앓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 은자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다란 목을 품에 말아 넣고 앓던 라이미르아는, 유진의 기척을 느끼고서 즉시 머리를 들었다. 머리만큼이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자여어……. 보, 본녀의 날개가…… 날개가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이 아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프다……. 너무 아프니라……. 나…… 날개가 잘린 것은 처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을 잇던 라이미르아의 목소리가 뚝 멈추더니,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 이노옴!”&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미르아가 머리를 치켜들며 꽥 비명을 질렀다. 약과 붕대 따위를 주변에 잔뜩 띄우고서 병동을 바쁘게 뛰어다니던 메르가 화들짝 놀라서 그 자리에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이 났다!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본녀의 날개를 자른 것은 메르! 바로 너렷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명의 은인한테 감히 목청을 높이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는 근처에 있던 붕대 뭉치를 들어 라이미르아를 향해 집어 던지며 빽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멍청한 도마뱀! 내가 네 날개를 자르지 않았다면, 그 고약한 빛이 네 몸을 모조리 삼켜버렸을 거예요! 그럼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 모르겠느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몰라요? 꽥 뒈져 버렸겠죠! 바보 도마뱀 같으니. 고작 날개 하나 맞았다고 꼴사나운 비명이나 질러대고 아무 짓도 하지 않기에, 영리하고 이성적인 내가 나서준 것이에요. 알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날개 하나라니……. 본녀는 날개가 두 개이기에, 하나가 잘리면 반이나 사라지는 것이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엄살떨지 마요! 예전에 나는 말이에요, 둘씩밖에 없는 팔다리가 모두 떨어진 적도 있고 가슴부터 배까지 갈라진 적도 있어요. 그때도 나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의연했다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는 당당하게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 아크리온에서 해체되었을 때의 경험담이지만, 메르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몸이다. 물론 라이미르아는 그러한 사실은 지적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목을 다시 웅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 본녀도 사실은 아프지 않느니라. 그냥, 목이 간지러워서 소리를 냈을 뿐이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흥, 그렇다면 얌전히 닥치고 있도록 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인 메르가 유진을 발견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띄우고 있던 붕대와 약들을 근처의 신관에게 떠넘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유로워진 메르가 유진에게 후다닥 달려오더니 그대로 훌쩍 뛰어서 유진의 품에 안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소라면 메르가 이렇게 안겨도 유진은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버티겠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유진의 허리가 뒤로 꺾이고 다리가 굽혀졌다. 유폐의 마왕도 쉽사리 굽히지 못했던 무릎이 너무나도 쉽사리 땅에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윽…….”&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무릎을 꿇었지만 메르는 그것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품에 얼굴을 묻었던 메르가 홱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굴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불쾌감……! 메르는 질색을 하면서 얼굴을 부벼닦고 코를 틀어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 냄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뭔 냄새.”&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 냄새랑, 땀 냄새랑, 이것저것 썩은 냄새.”&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도 땀도 많이 흘리긴 했지. 시체 썩은 독 속에도 있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기 전에 꼭 씻으셔야 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그래도 지금 씻고 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메르를 옆에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황 파악부터 하고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병동을 떠나 관사로 들어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기사들의 인사를 받아준 뒤, 유진은 가장 먼저 별실로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왔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별실에는 동료들이 모여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중앙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유진을 힐긋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인은 어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봐도 중심부는 안 보여. 그러는 네 쪽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헤인야르에 남긴 결계가 불안정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지금 레헤인야르에는 누르의 출현을 억제하는 결계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라면 앞으로 일주일은 너끈히 버텨야 할 텐데…… 심상치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르가 나온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나오지는 않았어. 나오려는 것을 막고 있느라 불안정한 거야. 그렇게 둘 생각은 없지만…… 만약 결계가 부서지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누르가 쏟아져 나올지도 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원도 마찬가지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엎드려 누운 모론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 옆에는 아니스가 탈진하여 널브러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 안쪽에서 누르가 득실거려. 그것 때문에 터지지는 않겠지만…… 경계는 해둬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등에 상처는 없지만, 아직 정신은 차리지 못했다. 유진은 피범벅의 망토를 벗어서 옆으로 던져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회복에 얼마나 걸릴 것 같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모론의 정신력에 달려 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모론 말고 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말입니까? 저는…… 음, 글쎄요. 아마 이삼일 정도 쉬면 회복될 것 같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그쯤 걸려. ……환상의 마안 쪽은 잘 모르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멸망의 마왕 상대로는 환상의 마안은 못 쓸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곁에 놓인 보라색 보석을 힐긋 보았다. 깨지지는 않았지만, 보석의 빛은 퇴색되고 검은 얼룩이 끼어 있었다. 유폐의 마왕의 독기에 오염된 흔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력은 유폐의 마력보다 훨씬 지독하고 불길해. 눈으로 본 것만으로 미쳐 버리게 할 정도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본인도 라비스타에서 멸망의 마왕을 보고 압도되었을 정도다. 살아 있을 적에도 그 광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 못했는데, 불안정한 영체로 환상의 마안을 썼다가는 역으로 잡아먹힐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은 어떻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나야 뭐…… 이삼일은 택도 없을 것 같고…… 일주일 정도 쉬면 되지 않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겹게 몸을 일으킨 아니스의 눈동자가 얇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물어보나 했더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문이 틀렸잖아, 아니스. 싸울 수 있냐니? 당연히 싸울 수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물어봐야 할 것은, ‘이길 수 있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큭큭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옛날부터 베르무트에게 이기고 싶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첫 만남이 떠올랐다. 대뜸 베르무트에게 동료가 되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고 겨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졌다. 뭐라고 변명을 덕지덕지 붙일 수도 없을 만큼 깔끔하게 졌다. 압도적이었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옷깃 하나 베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대가로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한 번만 진 것도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 한 번도 베르무트를 이긴 적이 없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동료가 되고 나서. 초기에는 틈만 나면 베르무트에게 시비를 걸 대련을 청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길 수 있어서 대련을 청한 것이 아니다. 그냥 이기고 싶었다. 냉정히 생각하면 당연히 질 것은 알았다. 동료가 되고, 함께 싸우면서. 실감하고 싶지 않아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베르무트는 강했다. 하멜도 평생 싸움 하나만큼은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베르무트는 격이 달랐다. 수련을 하고 경험을 쌓아도 베르무트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생각하면 이기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 베르무트 그 새끼, 뒷주머니에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보면 지는 안 숨긴 줄 알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손가락을 들며 투덜거렸다. 반짝하는 빛이 세냐의 몸을 한 번 감싸자, 누더기나 다름없던 로브가 말끔해지고 피와 땀에 흠뻑 젖은 몸이 깨끗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뒷주머니에 엄청 많이 숨기고 있었잖아,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빤히 흘겨보는 시선에 세냐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요. 뒷주머니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당당했던 것은 저와 모론 둘뿐이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직복와 몸이 깔끔해진 아니스가 개운하단 표정으로 이죽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나는 왜! 나도 아무것도 없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없기는. 세계수의 현자가 말했잖습니까, 세냐. 당신은 마나와 마법의 총애를 받아 대수림에 인도된 것이라고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내가 어떤 멍청이처럼 전생부터 한 끗발 날리던 것은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휘황찬란한 전생을 가지고 병신처럼 죽은 멍청이와는 다르지요. 하지만 당신도 뒷주머니가 빵빵했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러는 너는? 너도 마찬가지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워있던 아니스가 기겁을 하며 양팔을 천장으로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정말로 잔인하군요, 세냐! 제 출생이 끔찍한 비극이란 것을 아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맙소사, 맙소사…… 마법의 은혜로 태어난 당신과 달리, 제 탄생은 추악한 광신과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천장을 향해 든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비통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한 외침이 이어질수록 세냐의 이마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 미안해…… 내가 실언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너무 작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이번에도 세냐가 졌다. 세냐는 슬금슬금 다가가서 아니스의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해……! 내가 잘못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까지 사죄하니 어쩔 수 없군요. 도량이 넓은 제가 용서해 드리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한 말이지만, 아니스는 화가 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냥 세냐를 곯려 먹었을 뿐이다. 아니스는 예전부터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곧잘 이용하고 팔아먹었는데, 그것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아무것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굵은 목소리. 엎드려 있던 모론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야말로 태어나서부터 맨손이었다. 또한 나의 고향인 설원은 혹독한 대지라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수림도 마찬가지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르다. 세냐, 넌 친절한 엘프들과 함께 자라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수림에 엘프만 있는 줄 알아? 몬스터도 많고 원주민도 많다고. 300년 전에 식인종이 얼마나 많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세냐, 네가 몬스터와 식인종과 같이 자랐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다 살아난 주제에 모론의 질문은 굉장히 날카로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건……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지라고 해서 다 같은 오지인 것이 아니다, 세냐. 나는 매일 눈보라를 맞으며 몬스터를 사냥하며 자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간신히 든 머리를 주억거리며 과거를 추억했다. 그러한 대화를 한심하게 보던 유진은 모론의 등 위에 털썩 앉으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 뭔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륙 도시에서 자란 당신은 이해 못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내륙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수도원을 나가지 못했고, 부모도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는 있었냐? 그리고 뭔 도시야! 내 고향은 튜라스 깡촌이었다고. 바로 옆 숲에 몬스터가 얼마나 많았는데? 애들이 고블린이나 오크한테 잡아먹히는 것이 일상인 시골이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모론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몸은 괜찮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프지만 버틸 만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끼,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네가 안 막았어도 알아서 피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네가 막지 않았어도 베르무트는 알아서 피했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죽다 살아나서 머리가 좋아진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음…… 아무튼, 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히 성을 냈다가는 놀림만 더 받을 주제라, 유진은 일단 감사로 대화를 끝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워 있었지만 대화는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라 치네, 너 기절해 있었잖아. 대화를 어떻게 들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절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쉬고 있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러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이길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질문에 세냐와 아니스가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턱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베르무트라면 손가락 하나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베르무트는 우리가 알던 베르무트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 놈이 드러냈다는 본성에는 유폐의 마왕도 제법 애를 먹었던 것 같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지금 베르무트한테 이성이 있긴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입을 열었다. 진즉에 나은 가슴의 상처에서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무덤에서 봤을 때보다 더 이상해 보였어. 적어도 그때의 베르무트는 ‘얼굴’은 보였단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에게 조종당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등에 앉아 있던 유진은 바닥으로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게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은 분명해. 그러니까, 우리를 공격한 것은 베르무트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 어쩌면 베르무트의 자아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걸지도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 보았던 베르무트의 모습. 불길한 색에 덮여 얼굴도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베르무트의 ‘몸’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선을 느꼈다.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서 베르무트의 자아를 느낄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인해 보지는 않았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사래를 치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어지러운 색을 치워버리면 베르무트도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지. 정신을 못 차리면, 그건…… 그때 생각하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을 차릴 때까지 두들겨 패면 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도 툴툴 웃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싫어도 정신 차릴 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정신을 안 차리면 제가 진혼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장례식을 치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아니스도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모두가 베르무트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과한 욕심이라고 말했지만, 욕심이 과한 것이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구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구하는 것만 생각할 뿐. 꼭 베르무트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들은 동료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쉬고 있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가주님 만나서 대충 상황을 얘기하고 올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쉬어야 하는 것은 하멜, 당신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 때보다는 버틸 만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냐는 레헤인야르의 결계를 살피고 있어야 하고, 모론과 아니스는 아직 움직일 수 없다. 그나마 상태가 나은 것은 유진이었고, 직책일 뿐이더라도 유진은 신군 총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꼴로 가면 오르려던 사기도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손가락이 유진에게 향했다. 꾀죄죄한 옷차림과 몸이 말끔히 씻기고, 떡 진 머리도 물에 한 번 푹 젖었다가 뽀송하게 말랐다. 한쪽에 구겨서 던져놓았던 망토도 붕 떠오르더니,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유진의 어깨를 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충 이야기하고 돌아와. 빨리 쉬어야 일어나는 것도 빠를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가 늦게 가는 만큼 유폐의 마왕이 개고생하는 것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늦게 가고 싶어지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헛소리 말고 빨리 다녀오기나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을 철썩철썩 때리는 재촉에 밀려 밖으로 나온 유진은, 복도를 얼마 걷지도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억…… 흐으…… 으으으..”&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도에는 보란 듯이 앉은 멜키스가 있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다가, 힘겹게 유진을 돌아보고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사해서…… 다행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의 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유진은 그녀의 손 근처에 떨어진 휴지 뭉치를 힐긋 보았다. 아무래도 코를 틀어막고 있던 휴지를 방금 뽑아낸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네가…… 네가 무사하다면, 희망은 미래로 이어져……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쿨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겹게 말을 잇던 멜키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몇 번 기침을 했다. 바라던 만큼 입에서는 피가 나와주지 않았다. 확 입술이나 혀를 씹어버릴까? 멜키스는 순간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했지만, 아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아…… 하아…… 나, 나는…… 너를 위해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숨을 헐떡거리며 죽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멜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유진은 멜키스를 향해 걸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세상의 빛…… 불꽃이야. 불꽃을 밝히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장작이 되어야 하기 마련.”&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대사는 좋았다. 멜키스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대사에 스스로 전율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그만큼 멜키스는 호흡에 감정을 섞으며,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늘어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눈부셔……. 나는…… 너를 위할 수 있어서…… 다행…….”&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나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이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도 더는 주지 않았다. 유진은 멜키스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매정한 태도에 멜키스도 연기를 집어치웠다. 그녀는 빽 고함을 지르며 유진의 발목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프면 신관한테 가세요. 여기 눕지 말고 침대에 누우시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감동적인 유언에 아무런 감정도 못 느낀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죽었는데 뭔 유언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너를 위해 죽으려고 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엄청 감동했는데, 여기서 이러고 계시니 감동이 박살 나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멜키스를 일으켜 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코피 다시 막으시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감동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감동했으면 나도 그거 해줘.”&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의 목적은 이렇게 대놓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연기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해달라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템페스트한테 했던 거 있잖아. 빛! 그거 템페스트 말고 다른 정령왕한테도 할 수 있는 거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막! 은혜를 내리고, 세례하고! 그러면 되는 것 아냐? 빛의 정령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거 정령 아닙니다. 신력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 세상에 빛의 정령이란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 대정령사님이 그걸 가리켜서 빛의 정령이다, 라고 말하면, 빛의 정령이 되는 것 아닐까? 내가 그렇게 정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래도 머리를 다치신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멀쩡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평소랑 똑같아 보이시네요. 아무튼 그건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뭐냐, 빛이 템페스트를 그릇으로 삼은 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릇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포기하지 않고 유진의 뒤를 따라가며 졸라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러니까, 제가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준다니까요? 정 하고 싶으시면 멜키스 님이 빛의 신교에 입문해서 열심히 기도해 보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 있어 신으로 섬길 존재는 마법의 여신인 세냐 님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세냐한테 해달라고 하시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님은 못하니까 너한테 해달라고 하는 거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고마워서 꼭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은데, 못하는 건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조르셔도 진짜 못 한다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고 똑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멜키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녀는 진한 아쉬움과 미련에 입술을 우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템페스트와 다른 정령왕들은 어떻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회복 중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인가. 멜키스 님도 괜히 싸돌아다니지 말고 쉬고 계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다. 그냥, 그 순간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뒷일을 따지지 않고서 멸망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자면…… 솔직히 두렵다.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 꼭 싸워야 하는 건가? 애당초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우면 이길 수 있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심스러운 질문에 유진은 먼저 헛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뭐,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싸웠습니까? 싸우다 보니 이긴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이번에도 싸우다 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싸워봐야 알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도망가도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고 싶으면 가셔도 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붙잡고 가라고 하니까 오히려 가기가 싫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와 함께 들어간 회의실에는 이미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던 간부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진을 보자마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피곤하실 텐데 뭐 하러들 일어나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을 내저으며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회의실 안에는 피와 약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신군 내에서도 최상위 실력을 가진 간부들이지만, 그들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유진은 붕대에 칭칭 감긴 카르멘의 양손을 힐긋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붕대에서 배어 나오는 피. 그냥 멋으로만 붕대를 두른 것이 아닌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 살아서 보기는 했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회의실 중앙의 테이블에 올라가 털썩 앉고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각자 상처 한둘씩은 가지고 있지만 중상을 넘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심각한 부상을 꼽으라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없는 데다 내상까지 입은 멜키스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 그리들 표정이 죽상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간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회의실의 문을 열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축하할 상황은 아니잖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로베리안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지금쯤 우리는 웃으며 축배를 들었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 * *&lt;/p&gt;&lt;p&gt;&lt;br /&gt;&lt;/p&gt;&lt;p&gt;붕대에 감긴 손가락을 쥐었다 펴던 카르멘이 유진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유폐의 마왕이 왜 그것을 가로막았고, 왜 우리를 도망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굴욕.”&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라파엘로가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유폐의 마왕에게 구해지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만 구해진 것이 아니니까 너무 발끈하지 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참, 발끈하지 말라니까. 따지고 보면 내가 더 굴욕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쨌든 전투에서 내가 이겼는데, 그 뒤에 유폐의 마왕 덕에 살아버렸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하자, 라파엘로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유진은 그런 라파엘로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저는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실은 적막이 감돌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함께 들어온 멜키스조차도 분위기에 짓눌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묵을 깬 것은 길레이드였다. 그는 마주 잡은 양손을 꾸욱 쥐면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 이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말은…… 나 자신도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유진. 나는…… 그, 멸망의 마왕이 다가올 때 말이다. 이상하게도…… 내 안의 피가 이끌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기온과 카르멘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씹었고,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야, 아까 나타난 것은 베르무트였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뱉은 말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 본인이란 말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웅성거림이 시작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 약속을 맺어 평화를 가져온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이야기가 바깥으로 퍼진다면 세상이 말 그대로 뒤집힐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그러고 싶어서 우리를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너무 오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어서…… 머리가 조금 돌아버린 거죠. 아마 흠씬 두들겨 패면 정신을 차릴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놈을 두들겨 패는 것은 제가 할 겁니다. 옛날부터 패고 싶던 놈이기도 했고. 지금 이 몸은 베르무트의 후손인 데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의 정체. 그리고 유폐의 마왕에 대해서 지금 말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잠시 고민하고, 결론을 내렸다. 피차 바라지 않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언제든지 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반복해 온 세상에서 단 한 번도 그것을 밝힌 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가진 이름처럼- 그냥 마왕이 되기를 바랐다. 이제 와서 과거와 사연이 알려지는 것과, 그로 인해 역사에 이름이 남겨지거나, 인정을 받는 것 따위. 유폐의 마왕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라지 않으니까 더 하고 싶기는 한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득 그런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그쳤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진의 추측이다. 사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유폐의 마왕이 저 ‘안’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잡하고, 엿 같고, 그런 사정들이 있어서……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말입니다. 정 축약해서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이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돌아올 때까지는 버티겠다고 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가슴을 몇 번 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몸상태는 확인했다. 신력은 봉인당했고, 마나도 제대로 안 움직인다. 간신히 몸은 움직이지만 싸움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푹 쉬고, 몸이 멀쩡해지면. 저는 바로 멸망의 마왕에게 갈 겁니다. 상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다른 것은 똑같습니다. 제가 이기면 아무 문제 없이 축제라도 벌이면 되는 거고, 제가 패배하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이 멸망하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말을 받았다. 그녀는 피가 배어 나오는 주먹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존재의 이름부터가 멸망의 마왕이니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를 것도 없네.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해도 세상은 끝나는 것이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온도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이번이 더 간절하고 의욕이 생기는걸. 이번이 진짜 마지막인 데다, 시조님까지 구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온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결코 희망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기온이 앞장서서 쾌활하게 행동하니 몇몇이 피식거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 참전하고 싶지 않으시면 제가 자는 동안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패배하면 세상이 멸망한다. 그것을 바라는 자는 없을 테니, 다들 싸울 수밖에 없지. 그리고 승리하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며 평생 영예로울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렇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정말로 끔찍한 것은 죽는 것이 아닐세. 내가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는데, 남은 자들끼리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지. 정말이지, 상상뿐인데도 끔찍하군.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겪을 수치심이 두려워 목숨을 끊을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알체스터 경은 도망칠 생각도 없지 않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르투스가 툴툴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솔직히 조금 혹했소. 멸망의 마왕은 잠깐 본 것만으로도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지워 버린 존재였으니 말이오. 하지만 경의 이야기를 들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은 못 치겠소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망토를 들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분명 말했습니다. 싸우기 싫으면 안 싸워도 된다고. 그러니 이번에 죽거나 다쳐도 제 원망은 하지 마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토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술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lt;/p&gt;&lt;p&gt;&lt;br /&gt;&lt;/p&gt;&lt;p&gt;“요란한 연회는 못하지만, 그래도 축배는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병사들에게도 술은 넉넉히 주시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토 안에서 잡힌 술병을 꺼내고서, 유진은 피식 웃어버렸다. 절반 정도 남은 술. 가비드에게 받았던 술이다. 유진은 술병을 찰랑 흔들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실 분 계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그 술을 마실 자격이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술은 네가 가비드 린드먼에게 승리하고서 얻은 것. 찬란한 승리의 사자여, 그때 네가 말하지 않았나?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그 술을 마시겠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사자에서 찬란한 승리의 사자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그 술은, 우리가 아닌 진짜 승리의 주역들과 나누어야 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실에서 쫓겨났다. 망토에 쟁여놓았던 모든 술을 다 털리고, 손에 든 절반뿐인 술만 들고서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술병을 몇 번 흔들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앗.”&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방에는 시엘이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잠든 세냐와 아니스, 모론에게 이불을 덮어주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 갔다 온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회의실. 그러는 너는 여기서 뭐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면 몰라? 이불 덮어주고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허리에 끼고 있던 베개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다들 자기 방을 내버려 두고 여기서 주무시는 거야? 심지어 침대도 아닌 바닥에서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랜만에 옛날 생각이라도 났나 보지. 원래 우리는 마왕 죽인 뒤에 그 자리에서 널브러져서 잤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 옛날 얘기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흘기며 쏘아붙이는 말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작지 않은 방이기는 하지만, 모론의 거구가 널브러져 있으니 바닥이 굉장히 좁아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깨우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다들 잘 주무시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나가기 전까지는 다들 멀쩡히 깨 있었어. 잠이 든 지 길어야 5분쯤 됐을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5분 전은 깨 있었어도 지금은 잘 주무시고 계시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퍽! 걷어찬 발길질에 모론의 몸이 흔들렸다. 한 번 걷어찬 것으로 모론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0번쯤 걷어차니 모론의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차서 깨워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으로 흔드나 발로 흔드나 그게 그거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쓰레기 자식…….”&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람답게 생각하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동안에도 유진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세냐와 크리스티나를 덮은 이불을 홱 빼앗고, 세냐의 뺨을 꼬집어서 당기며 반대편 손으로는 크리스티나의 옆구리를 찔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으…….”&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흑!”&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반된 신음과 함께 둘이 눈을 떴다. 젤리처럼 뺨이 당겨진 세냐가 졸린 눈을 끔벅이며 유진을 쳐다보았고, 크리스티나는 찔린 옆구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몸을 꼬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 무슨,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보고 쉬고 있으라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쉬고 있으랬지 자라고 하지는 않았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왜 쪼잔한 심술을 부리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얼한 어깨를 어루만지며 일어선 모론이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술이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에 든 술병을 흔들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 단 하나뿐인 술. 그 가비드 린드먼이 직접 제조했다는 술. 나 혼자 홀라당 마시려다가, 너희 생각이 나서 가지고 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놓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식간에 의식이 바뀌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니스가 후다닥 유진에게 다가와 술병을 빼앗았다. 그녀는 코르크를 열기 전에 술병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내부를 타고 흐르는 술의 움직임을 주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못해도 300년 숙성에 거창한 의미까지 담았던 술이 아닙니까? 후후, 맛이 없을 수가 없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다 깬 것에 화를 내려던 세냐와 모론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결국 네 명은 술병을 가운데에 세우고, 이불을 두르고서 모여앉았다. 아니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모두의 앞에 잔을 하나씩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병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가지 못하는 바람이 맴돌며 음울한 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에 감겨 텅 빈 중심. 그 바깥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괴물이 엉겨 붙어 있다. 놈들은 이중의 사슬 사이에서 서로 살이 달라붙고 뒤섞였는데,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는 덩어리임에도 눈동자만큼은 희번덕였다.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벽에 수백 수천 개의 눈동자만 데굴거리는 모양새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끔찍한 괴물의 벽은 안쪽 사슬벽의 바깥. 바람이 맴돌며 울어대는 안쪽.&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간신히 되찾은 의식이 다시 끊어질 것만 같다. 손이 덜덜 떨렸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일이 있었지? 뭘 한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한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문을 더듬었다. 고뇌할 필요 없이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 희미한 기억들이 연결됐다. 자신을 보던 시선들을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허탈한 웃음을 뱉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뇌 안쪽이 손톱으로 긁히는 것만 같은 감각. 그렇게 긁어서 떨어진 자국에 시커먼 덩어리가 맺히고, 점점 번지는 것만 같다. 그것은 베르무트라는 자아를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도 다시, 베르무트의 자아를 찍어 누르고 육체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를 욕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릇 따위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욕망이 없다. 그것이 육체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 육체가 자신에게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그런가? 베르무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것에, 멸망의 마왕에게 자아는 없다……. 처음에는 있었겠지만, 진즉에 붕괴했다. 이것은 단순히 멸망만을 바라는 재앙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왜 300년 전에 세냐를 공격했나? 그때.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봉인하기 위해 갔다. 침입자를 알아차리고 찾아올 세냐와 대화를 나누어, 목걸이를 받을 생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식이 흐려졌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는 이미 세냐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난 다음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인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에게 육체를 빼앗겼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모두를 공격하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한 모든 것이 베르무트를 두렵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에게 자아가 없다면. 300년 전 세냐를 공격하고, 오늘 이곳에 와서 모두를 공격한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을 바란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아니란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답해주는 이 하나 없는 사슬의 우리에서 베르무트는 조용히 오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에서는 깨어났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깊고, 달게 잠을 자서?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둘 다 맞기는 하다. 몸이 고될 대로 고되었으니, 어디 차가운 맨바닥에 나자빠졌어도 더할 나위 없이 단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이 누운 침대는 푹신하고 따스한 데다 은은하게 향기롭기까지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근차근 기억을 거슬러 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왜, 이렇게 잠을 자고 있는가. 대체 어떤 순간에 잠들어 버렸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들기 전. 모론과 세냐, 아니스, 크리스티나와 함께 술을 마셨다. 가비드가 직접 제조했다는 술. 놈과의 결투에서 승리하고 선물로 받은 술. 나중에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서, 놈의 시체 위에서 마시겠다고 대답해 줬던 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석하게도 유폐의 마왕의 시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니, 술은 마셔도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말고는 나중에 마실 만한 순간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 중 누군가가 죽거나, 혹은 유진 자신이 죽거나…… 그런 생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올라 버렸다. 갑자기 멸망의 마왕이 나타나 버린 탓에 승리의 기쁨이랄 것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고, 결의와 각오 같은 것은 다질 만큼 다졌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바라고 바랐던,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자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하고서 술을 마셨고, 맛은 굉장히 훌륭했다. 유진은 전생부터 술이란 것의 맛은 깊이 따져본 적이 없었기에 뭐라 총평은 내릴 수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술맛에 눈을 뜬 크리스티나와 본래부터 주당인 아니스가 서로 번갈아 가며 주접과 함께 홀짝이던 것을 보면 상당히 잘 만든 술이기는 하다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의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경지에 오른 전사와 마법사는 술에 취하기 힘들다. 아예 ‘취하겠다’고 의식하고서 마시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몸에 들어온 이상 즉시 해독되어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축배를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 심지어 죽은 가비드가 남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술. 그런 술을 취기도 없이 홀라당 털어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그래서 다들 처음부터 ‘취하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마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취해서 며칠 자고 일어날 거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신의 피로와 데미지도 상당했으니,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다음 문제가 생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문제인데, 인간과 마족은 몸뚱이가 다르다. 어지간한 주당이라도 몇 잔 만에 취해 버릴 고도수의 독주라도 마족에게는 그럭저럭 마실 정도의 술이 되어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술은 도수가 높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술을, 모두가 취기를 조절할 생각 없이 꼴딱꼴딱 마셔댔다. 그 술을 다 마실 즈음, 그곳에 남은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짐승들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가장 먼저 상처 입은 짐승이 쓰러졌다. 모론. 예전에도 도통 취하지 않던 놈은, 술을 다 마실 즈음에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져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구 하나 모론을 돌보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는 유진도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술이 한 병이라는 점. 심지어 절반뿐이고, 그마저도 전부 다 마셔가고 있다는 점이었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병을 다섯 명이서 나눠마신 것인데 이걸 누구 코에 붙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가져와!&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병이 텅 비었을 때. 짐승들은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어 울부짖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들에게서는 인간다운 이해를 바랄 수 없었다. 유진은 망토 안의 술을 모두 간부들에게 주고 왔으니 그만 잠드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지만, 그러한 애걸은 쥐뿔도 먹히지 않았다. 술이 없다면 새로 가져오면 되는 것이 아니냐며 성녀가 일어섰고, 마법사는 괘씸하게도 승리의 신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상처 입어 쓰러진 전사는 방에 버려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뒤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 문제가 찾아왔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모두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모론이 평소의 주량의 반의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취기와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듯,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다들 이미 한계를 아득히 넘은 몸을 정신력만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그래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에게 멱살이 잡혀서 방 밖으로 끌려 나왔다. 어딘가로 들어갔다. 다른 누군가의 방. 아마 세냐나 아니스의…… 어쩌면 유진의 방. 아무튼 그곳에서 붙들려 있다가, 아니스인지 크리스티나인지가 술을 더 가지고 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이 있으니, 더 술을 마셨다. 마시면서 점점…… 머리가, 이성이 녹았다. 뒤섞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앞뒤가 맞지 않는 헛소리와 농담을 지껄이다가……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절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에 바닥이었는지 침대였는지는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데, 지금 누워있는 곳은…… 일단 침대다. 술에 잔뜩 취해서 기절했는데, 입에서는 그럴 때 특유의 찌든 술 냄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옷…… 분명 옷을 마법으로 세탁하고, 몸도 씻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문제가 아니다. 옷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알몸이란 말이다. 왜? 자던 중에 더워서 옷을 벗어 던졌나? 유진에게는 평소 그런 잠버릇은 없지만, 으레 사람이란 술에 취하면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하기 마련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술에 잔뜩 취해서…… 자던 중에 옷을 벗어 던지고 잤다. 어쩌면 잠들기 전에 벗었던가. 벗는 김에 입에 남을 술 냄새도 지웠고, 어쩌면 자던 중에…… 자던 중에 지웠거나. 유진은 자기 자신을 아주 청결한 편이라 자부하길래,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는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기자신에 대한 것을 제쳐두고,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선…… 이곳은 어디인가? 이 침대는 대체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왜 옆…… 옆에서, 다른 온기가 느껴지는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하면 할수록 지옥이란 수렁에 빠지는 것만 같아, 유진은 모든 것이 두려웠다. 더욱이 두려운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온기가 하나가 아니란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 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모론일지도 모른다. 300년 전에도 모론이나 베르무트 옆에서 곧잘 자지 않았던가? 알몸으로 잔 적은 없지만…… 아무튼, 옆에 있는 것이 차라리 모론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유진도 잘 알았다. 살짝 닿는 살결의 부드러움은 절대로 모론일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유진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것은 거역하고 싶어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선 눈을 뜨기 전에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양옆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보다 진해졌다. 왼쪽이 뒤척였고, 오른쪽은 움찔 몸을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 흐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헛기침을 더 끌었다. 왼쪽이 이불을 슬쩍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른쪽은 숨을 죽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뿐. 누구도 그 이상의 액션은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유진도 마찬가지 아닌가. 눈을 뜨고 일어서서 입을 열어 뭐라고 말을 하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두렵기에, 눈을 뜨지 않고 헛기침만 끙끙거리면서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눈도 뜨지 않고 누워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리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바로 용기다. 눈을 뜨고, 저질러 버린 사건을 받아들일 용기. 현실을 직시하고 다음으로 나아갈 용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기를 내어서 눈을 뜨고 일어서려는 순간. 유진은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언제까지, 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언제부터? 넓은 침대의 양옆. 오른쪽과 왼쪽. 부드러운 살결. 술에 취해서 기절하듯 잠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각자가 누적된 피로와 데미지가 다르다. 한날한시에 쓰러져도 같은 순간에 눈을 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다른 누군가는 진즉에 눈을 떴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유진의 양옆에는 사람이 있다. 진즉에 눈을 뜨고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며 자리를 떠났어야 할 텐데, 아직도 사람이 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을 뜨고서 왼쪽을 보았다. 성흔 없이 새하얀 등, 살짝 갈린 이불과 풍성한 금발. 역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 나 일어날 때까지 계속 자는 척하고 있던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른쪽을 보았다. 어깨까지 발갛게 물들이고서 몸을 웅크린 세냐가 보였다. 그녀는 유진의 말을 듣자마자 경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 방금 일어났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가 유진 쪽으로 돌았다. 좀처럼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 아니스는 잘근잘근 씹던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말입니다, 하멜, 저는 정말로 지금 눈을 떴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영혼만 남은 상태인지라, 전투의 여파를 떨치기 힘이 들어서…… 거기에 무리해서 술까지 마셔버렸죠. 그래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고, 이, 일단 이 몸도 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결국 원래의 주인인 크리스티나를 거스를 수 없는 처지. 제가, 제가 눈을 떴는데 크리스티나가 이곳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멋대로 움직인 손이 아니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 하나의 육체 안에서 두 개의 영혼이 격투를 벌였다. 이윽고 입술을 틀어막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 거짓말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이틀 전에 눈을 떴지만, 시스터께서 피곤하다고 더 누워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시스터께서는 하인을 불러다가 방에서 식사까지 하시고 침대에 다시 누우시며 생활하셨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괜히 천장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람과 사람이 대화할 때는 얼굴을 보는 것이 예의겠지만, 지금 유진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지금 앞에 있는 것이 정말로 사람이기는 한지가 의심스러웠고, 그다음 이유로는- 단순히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옆에서 세냐가 입을 열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다시 천장을 보았다. 세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몸을 움츠리고 있지만, 발갛게 물든 어깨와 등의 곡선은 대놓고 보기에 민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흘 전쯤 눈을 떴지만 말이야, 일부러…… 일부러 누워 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움직일 수 있을 상태도 아니었고…… 조, 조금 더 휴식이 필요했거든. 그…… 그리고, 그리고 말이야. 네가 눈을 떴을 때, 아무래도 옆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기억이 떠오르고 있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고서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들기 전에 말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라고 더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등 돌려 웅크리고 있던 세냐가 홱 몸을 돌리더니 유진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거야. 알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읍…….”&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 일도! 없이, 그냥 침대에서 잤던 거야. 이 침대는 엄청나게 넓으니까! 알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이 틀어막힌 유진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세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움을 참고서 본 세냐의 얼굴은 당연히도 터질 듯이 새빨갰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는 결코 져버릴 수 없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의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세냐라면, 부끄럼을 무릅쓰고 간밤에 있던 모든 일에 집착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잘 기억하지 못한다면 귀싸대기를 갈기고서 억지로 떠올리도록 만들 것이고, 유치하고 뻔하고 지겹지만 ‘책임져’라는 식의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씰룩거리던 눈썹이 대각선으로 쳐졌다가 치솟고를 반복하더니, 결국 더는 버티지 못했는지 눈이 질끈 감겼다. 세냐는 좀처럼 열기가 식지 않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건…… 이런 건 싫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다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잔뜩 지쳐서! 술까지 취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고! 로맨틱하지도 않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도…… 혼자도 아니었고……! 술 냄새도 났고! 모, 몸도 안 좋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알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녀들은 그렇지 않았다. 둘은 진심으로 세냐의 말에 공감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감동까지 느끼며 양손을 하나로 모았고, 아니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히, 저도 이딴 것을 처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아니스는 진지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둘 사이에 낀 유진은 여전히 입이 틀어막히고서 강제로 천장만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윽고 아니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한쪽에 잘 개어둔 속옷과 성직복을 빠르게 입었다. 곧이어 세냐도 유진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속옷과 의복이 세냐의 몸을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깔끔한 로브를 걸치고서 메리까지 거머쥔 뒤, 세냐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버려 두십시오, 세냐. 하멜은 평소에도 잠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늘, 하멜을 깨우러 와서, 몇 번이나 흔들었는데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현실을 제멋대로 바꾸어서 떠들었다. 그런 둘을 잠시 동안 지켜보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아무 일도 없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 일도 없었…….”&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다닥 다가온 세냐가 유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바짝 다가온 얼굴, 가까이 있는 세냐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더니 눈물이 촉촉이 차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네가 그렇게 말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그렇게 생각해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뭔 개소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렇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라고 생각…… 아, 아니, 꿈은 안 돼. 아무튼, 그런 거야. 아무 일도 없었지만 정말로 없던 것은 아닌, 있기는 했는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유진의 어깨를 놓았다. 멀찍이 떨어져 선 성녀들은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유진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났으면 게으름 부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십시오,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 우리는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려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들으니 참으로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결전을 앞에 두고 이런 일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스, 우리는 아무 일도 안 했어. 그리고 우리가 결전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잖아, 멸망 그 새끼가 제멋대로 와버린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듣고 보니 그렇군요, 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후다닥 방을 나가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 방에 덩그러니 남게 된 유진은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다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섬주섬 옷을 입을수록 희미해 잘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 또렷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고서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서 방문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도에 나와 고개를 돌리고, 바로 모론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마침 이 방으로 오려던 모양이었다. 모론은 잠시 눈을 끔벅거리면서 유진을 빤히 보더니, 곧 너털웃음을 흘리면서 두 주먹을 유진을 향해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개의 엄지손가락이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축하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였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축하를 건네는 모론을 보고서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대체 뭘 축하한다는 거냐? 개소리하지 말고 꺼져. 너 뒤질래? 온갖 대답이 머릿속에 떠돌았지만, 유진은 일단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무슨 대답을 하건 모론의 함박웃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로 정확히 일주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언제 일어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틀 전에 일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왜 안 깨운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아무리 내가 너희의 벗이라도, 그 방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답지 않은 이성적인 대답에 유진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이번에도 유진은 더 대화를 잇지 않고서 입술을 닫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년을 잠들었던 때와 비교하면 일주일이면 양호하지 않은가?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있는데, 대마왕인 유폐의 마왕이 설마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 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다닥 걸음을 옮기는 유진의 등을 향해 모론이 물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쪽 상황 보러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나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퍼 자는 동안 너는 매일 봤을 것 아냐? 꼴 보니까 방금까지 보고 있던 것 같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변화는…… 있었다. 봉인이 더 커졌고, 안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르가 득실거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터지면 쏟아져 나오겠…….”&lt;/p&gt;&lt;p&gt;&lt;br /&gt;&lt;/p&gt;&lt;p&gt;투덜투덜 대답하던 목소리가 뚝 멎었다. 유진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복도 끝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멀리, 커다란 꽃다발이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앗.”&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려한 꽃 사이에서 멜키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곁의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축하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옆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도망칠 이유도 없지만, 그런데도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제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서 함박웃음과 함께 걸어오던 멜키스의 모습은, 그것이 눈동자에 각인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끔찍한 힘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휴.”&lt;/p&gt;&lt;p&gt;&lt;br /&gt;&lt;/p&gt;&lt;p&gt;붙들렸다가는 상상 속에서 멜키스를 백 번 죽여도 모자랄 살의를 느끼게 될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성벽의 난간에 서서 뒤를 힐긋 보았다. 다행히도 멜키스는 쫓아오지 않아,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건 눈으로 본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유폐의 마왕이 만든 봉인은 일주일 전에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커져 있었다. 과장 없이 평원의 반을 가르고, 방치되었던 판데모니엄도 모조리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이나 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봉인의 안을 노려보았다. 땅은 물론이고 봉인의 천장까지 가득 채운 누르의 숫자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저게 전부도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누르들은 어디까지나 멸망의 마왕에게 이끌려 나타난 것일 뿐. 본래 누르가 나타나던 레헤인야르를 떠올리며 유진은 눈썹을 구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별다른 말은 없었으니 그쪽의 문도 아직은 건재한 모양이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나마 건재한 것도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인이 열린다면 저 셀 수 없이 많은 누르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멸망의 마왕의 강림에 공명하여 레헤인야르에서도 누르가 쏟아져 나올 것이며, 세냐의 봉인은 더 이상 그를 붙들 수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막을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전쟁을 생각해 보았다. 유진과 세냐, 모론, 성녀들의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유폐의 마왕이 남긴 사슬을 따라, 멸망의 마왕의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의 마지막에 그랬듯, 그 순간에는 멸망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유진 일행이 멸망의 내부에서 붙드는 동안- 바깥에서는 신군이 저, 셀 수 없이 많은 누르를 막아야 한다. 만약 가능하다면 멸망의 안으로 들어가기 전 누르를 먼저 소탕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인이 건재한 이상 바깥에서 공격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저 봉인은 유진이 안으로 들어간 순간에 완전히 열리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위를 쳐다보니, 날개를 퍼덕거리는 와이번 위에 탄 시엘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늘하게 식은 목소리. 웃음기 하나 없는 딱딱한 어조. 노려보는 것과 다름없는 시선에, 생기가 하나도 없어 마치 죽은 것처럼 느껴지는 눈동자. 그것만으로 유진은 시엘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숨? 지금 저를 보고 한숨을 쉬는 겁니까? 제 얼굴을 보니 한숨이 나와 버린 겁니까? 유진 님이 그렇게 한숨을 쉬시면, 제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진짜 많은 사연이 있었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난간에 걸터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구질구질해서 못 하겠는데, 억울하고 서럽고……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세상 이치 어쩔 수 없는 그런 거대한 흐름이란 것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 버린 것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질구질하다 말한 주제에 뭐 그리 말이 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딱히 비난당할 일은 아닐 텐데 비난까지 당하고…… 세상에서 둘 뿐인 형제한테도 갈굼받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형제? 내가 너한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형제인 거 알아, 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북받치는 감정이 어조를 되돌렸다. 와이번 용용이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려서 유진의 옆에 선 시엘은, 숨을 씨근거리며 유진의 몸을 발로 퍽퍽 걷어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렸을 때는 자기가 누나라는 둥 그랬으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였으니까! 가능하다면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13살 때의 나한테 어쭙잖게 끼 부리지 말고 대놓고 들이대라고 충고하고 싶어. 겸사겸사 시무인 때로 돌아가서 질질 짜대지 말라고 싸대기도 갈기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에 시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말에는 유진도 적극 공감할 수 있었다. 유진도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여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왜 여기 앉아서 궁상떨고 있어? 더 누워나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까지 누워있었잖아. 정신을 차렸으면 당연히 일어나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래? 방금 정신을 차린 거구나. 난 또, 진즉에 정신은 차렸는데 침대가 좋아서 안 나오는 줄 알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억울하고 서러워서 화나고 눈물이 날 거 같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억울하지는 않은데 가슴 아프고 슬프고 서럽고 화나서 눈물 날 것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 그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 같아서는 계속 그러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네가 날 싫어할 것 같으니 안 할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너 안 싫어해. 이런 거로도 절대 안 싫어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좋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돌아온 질문에 유진은 눈을 끔벅거리며 시엘을 쳐다보았다.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시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을 말자. 대답도 하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자기 훅 들어오니 당황스럽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언제는 안 그랬어? 아무튼, 여기 앉아서 뭐하냐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면 알잖아. 저거 보고 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여기서 봐? 궁금하면 가까이서 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똑같아. 그러는 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까지 하늘에는 용용이라는 멍청한 이름을 가진 와이번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다. 유진은 멋대로 정해진 이름을 앞으로 평생 바꿀 수 없을 불쌍한 와이번을 힐긋 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 산책은 아닌 것 같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아니지! 정찰하고 온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찰? 봉인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쪽도 루트에 있기는 하지만, 중점으로 둔 것은 헬무드의 국경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표정을 찡그리며 손가락을 들어서, 봉인 건너편의 국경선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패배를 인정하고, 헬무드는 패전국이 되었으니 말이야. 유폐의 마왕이 모든 마족의 생사여탈권을 네게 부여한 것도…… 당연히 헬무드에 전해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인지 알겠다. 유폐의 마왕이 ‘사슬’을 준 것은 유진이고, 유진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생각도 아직은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양도할 생각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 자기 목숨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입장이니, 내가 잠든 사이에 암살 시도가 있을 법도 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있을 법도 한 게 아니라 몇 번이나 있었어, 몇 번이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빽 고함을 질렀지만,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턱을 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암살 시도야 교황청에서 자는 중에도 있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랑은 절박함이 다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참, 뭐 하러들 그랬대? 나는 마족을 몰살시키거나 그럴 생각이 없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시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전생은 바로 그 우둔한 하멜. 동화책에조차도 틈만 나면 마족을 혐오하는 면모를 보였고, 당장 마족들에게는 몰살의 하멜이라고 불리던 위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파 마족은 내가 손댈 것도 없이 유폐의 마왕이 알아서 죽였고, 지금 남은 것은 일단은 비전쟁파잖아. 남한테 피해 안 주고 평범하게 살겠다면 죽일 이유가 어딨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중에 제대로 성명을 내는 게 좋을 거야. 그래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은근슬쩍 유진에게 몸을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앉아서 무슨 생각 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안에 득실거리는 괴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떡하긴,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니까…… 나오는 대로 죽이면 되는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은 쉽지, 쟤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은 너도 알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르와의 전투는 하우리아에서도 겪어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괴물들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신경을 어지럽히고, 제멋대로의 생김새답게 변칙적으로 싸우면서 피조차도 독성을 띤다. 저것들은 멸망이 휩쓸고 간 시체에 마력이 깃들어 태어났다. 여태까지 스러진 시대에서 몇 번이나 생명을 몰살시키는데 일조한, 진짜배기 멸망의 권속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거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시조님을 구하고 나왔는데 말이야. 저것들을 내버려 둔다면, 세상이 조금은 망해 있을지도 모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보다는 많이 망했을지도 모르지. 누르는 계속 늘어날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이든 많이든, 망하게 두면 안 되는 거잖아. 설마 망했으면 좋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길 바랐다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툴툴 웃으며 대답했다. 그만두거나…… 편해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멸망이라지만, 유진은 못해도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누아르와 함께 영원한 꿈에 갇히는 것. 다른 한 번은, 유폐의 마왕과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안을 받았고, 선택했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더 이상 그런 기회는 없다. 패배하고 죽어서 멸망하거나, 승리하고 살아서 미래를 얻거나. 머릿속에서 떠오른 두 개의 길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어서라도 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러운 중얼거림에 시엘은 제대로 듣지 못해서 되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유진은 죽을 생각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그런 식의 각오는 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멸망을 쓰러트리고 베르무트를 구하겠다……. 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진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죽는 한이 있어도’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죽어서 환생하고, 이 개고생을 했는데. 나만 죽어버리면 억울해서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 구하고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이다. 거창하고 숭고한 사명감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일단 유진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 세상도 자신을 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방에 연락부터 해야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들 숫자 살벌하잖아. 신군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까, 후방에 증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올 만큼 와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말했지만, 유진은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 나 자는 동안 가주님이 요청하셨나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요청하기도 전에 알아서들 도착하던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게 마지막 마왕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의 대답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렸고, 멸망의 마왕만 남았잖아. 저것만 죽이면 전부 다 끝나는 거고, 죽이지 못하면 세상이 끝나. 여력을 남길 이유가 어디에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란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을 높이까지 도약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네란의 성벽 바깥까지 임시 막사가 가득했다. 난잡하게 꽂힌 깃발들은 신군의 것뿐만 아니라 대륙 모든 국가와 용병단의 것처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평생 이만큼 많은 군대를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대륙 전군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다 너 때문에. 그리고 너를 위해 모인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을 태운 용용이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유진에게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유폐의 마왕에게 이기고, 헬무드를 패전국으로 만들어서. 멸망의 마왕을 눈앞에 두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거대한 군대, 휘날리는 깃발이 유진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하늘의 모든 별을 땅에 모아둔 것만 같은 반짝임. 빠르게 번지는 불길. 그렇게 뒤섞여서 타오르는 빛. 지금 저 앞에 있는 것은 멸망을 거스르는 불빛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 유폐의 마왕과, 헬무드를 쓰러트린다는 생각을 말이야. 그런데 유진, 너는 해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스스로 말하고도 신기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아는 너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에는 많이 졌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해. 너랑 싸우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일주일 전 보았던 광경. 구역질 나는 불길함. 시엘은 주먹을 꽉 쥐고서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멸망의 마왕에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빛’에서 시선을 거두어 뒤를 보았다. 제법 멀리 있는 멸망의 봉인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무언가가 등을 떠밀었다.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유진은, 무엇이 등을 떠미는지 이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승리에 대한 갈망이다. 염원이다. 전쟁과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한 모든 감정과 의지다. 결국 모든 것이 추구하여 도달하는 끝은 승리이기에, 그 모든 것이 유진에 대한 신앙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정신은 순식간에 멸망의 봉인까지 도달했다. 육체를 초월한 정신은 견고한 봉인을 뛰어넘지는 못했으나,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았다. 득실거리는 누르의 군세. 그를 한참이나 뛰어넘어서 도달하는 ‘멸망’의 중심.&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적이다. 쓰러트려야 할 적. 패배시켜야 할 적. 그 적을 굴복시켜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게 전쟁인 이상, 무조건 그렇다. 대륙 전체의 신앙이 눈에 깃들어, 승리를 위해 쓰러트려야 할 ‘적’을 보여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남자의 모습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박살 내고 끊어낸 사슬의 잔해 중심에서, 양손으로 땅을 짚고서 웅크린 남자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길함은 여전했지만,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차분한 눈으로 ‘적’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 날.&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와 유진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대가 멸망의 봉인을 향해 진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괜스레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입을 열었다. 노골적으로 엄살이 섞인 소리라, 몇 걸음 앞에 서 있던 모론이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일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적잖은 긴장이 섞인 목소리. 그 모론조차도 긴장해서 언동이 굳을 수밖에 없는 상황.&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뜸 뱉은 엄살에 반응한 것은 모론만이 아니었다. 메리를 단단히 쥐고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세냐도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 갑자기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열렬한 반응에 입을 열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유진이 뭐라고 말을 잇지 않자, 뒤를 돌아보고 있던 모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갑자기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시하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쪽에 서 있던 아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었다. 철썩! 호되게 내리친 손바닥이 유진의 등판에 작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위기 파악 못 하고 헛소리를 하려던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위기 파악을 못 했다니, 그건 틀렸어. 나는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헛소리를 하려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변명도 거짓말도 아니다. 유진은 제법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중압감. 진짜 ‘끝’을 앞두고 있다는 긴장감이 모두의 숨을 틀어막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 시선도 그래. 대가리 뚫릴 것 같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평원의 끝. 성벽의 앞에는 신군을 필두로 한 군대가 배치되어 있다. 저 어마어마한 대군은 도시의 성벽을 빙 두르고도 한참이 남아서 후방까지 한참을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모든 병사들이 멸망의 봉인을 향해 가는 유진 일행을 쳐다보고 있다. 꽤 거리가 있는데도 뒤를 돌아본 것을 알았는지, 곳곳에서 깃발이 번쩍 들리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렁찬 고함에 평원을 쩌렁쩌렁 울리고 고막이 진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하멜, 당신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는 것인데.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그럽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민망하게스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손은 흔들어주었다. ㅡ와아아! 또다시 들린 함성에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기는 가득 차 있다. 적어도 군대에는 결전에 대한 긴장이나 두려움은 적어 보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은 저들 대부분이 ‘적’에 대한 실감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봉인은 건재하고, 누르는 쏟아져나오지 않았다. 유진은 군대에 시선을 거두어 하늘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 싸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평원의 하늘에는 유진이 신력으로 만들어낸 태양이 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 아침에 시엘의 도움을 받아 레헤인야르에 들러서 그곳에도 태양을 하나 띄워놓았다. 설원의 태양 아래에는 아만과 루하르군, 아이빅을 대표로 한 용병들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원 쪽이 조금 불안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만은 나의 후손이다. 내 피를 이었다는 것은 용감하고 강한 전사란 뜻이며, 그를 따르는 전사들은 바야르의 적통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가슴을 활짝 펴며 자랑스레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록 나는 그들과 함께 싸우지 못하지만, 나의 후손들은 누르가 산을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 걱정보다는 우리 걱정을 해야 하는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은 그렇게 하면서 너도 여기에 마법들 깔아두고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세냐는 눈을 흘기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남겨진 이들을 걱정하는 것은 세냐나 유진이나 마찬가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쪽에서 미리 안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함께 남아서 누르와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전투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뿐이다. 유진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 받았던 사슬이 보였다. 손바닥의 사슬이 바르르 떨리며 움직였다. 주먹에 쥐고 있을 때부터 사슬은 저렇게 진동했다. 마치 봉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공명하는 것 같았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고서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대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벽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을 쳐다보았다. 조금 앞에 서 있던 모론은 시선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뒤에는 세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외우던 영창을 그만두고 곁에 섰다. 마지막으로 등 뒤의 아니스를 보았다. 아니스는 로사리오를 거머쥐며 조금 앞으로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제외한 네 명이 똑같이 사슬의 벽 앞에 섰다. 손바닥의 사슬이 점점 더 강하게 진동했다. 먼 뒤에서는 끊이질 않는 함성이 울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빛의 반짝임이 등을 살며시 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을 앞으로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촤라라락!&lt;/p&gt;&lt;p&gt;&lt;br /&gt;&lt;/p&gt;&lt;p&gt;높다란 벽의 끝부터 사슬이 해체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로 엮였던 무수한 파편은 아래로 떨어지며 시커먼 재가 되어서 흩날렸다. 내부에 고인 불길함이 해방되었다. 하늘이 일렁거리더니 오염되듯이 색이 씌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정면의 사슬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유진과 동료들이 자리에서 움직이기도 전에, 열린 문이 모두를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무너지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봉인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누르도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태양도 달도 없는 백색의 공간.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발은 무언가를 밟고 있지만, 땅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늘과 마찬가지로 땅 또한 새하얗다. 몇 번이나 보았던 허무. 아가로트가 마지막으로 도달해 죽은 세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멸망의 마왕의 안이다. 온갖 색이 뒤섞여서 어지러운 형상이면서, 정작 그 안은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르게 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놀라지 않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홀로 서 있는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약 있는 기다림이란 것은 제법 할 만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정말로 ‘간신히’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굳이 서 있는 것은- 주저앉았을 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하는 것과는 달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리해서 만든 봉인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리고…… 내가 상태가 좋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본래부터 핏기가 적어 창백했던 얼굴이지만, 지금은 창백하단 수준을 넘어 파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을 쓰러트리는 데에, 지금 이상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싸움에서 네 역할은 끝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먼저 성큼 앞으로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우우우우…… 그 걸음을 느낀 것인지 허무가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몸이 유폐의 마왕의 곁을 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 서서, 구경이나 하면 돼. 네가 몇 번이나 반복하고, 몇 번이나 다음을 바라는 것으로 타협했던 것의 결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흔들리는 허무에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유진은 주먹을 쥐었다. 모론은 뿌득 이를 갈았고,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었고, 아니스는 탄식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구하겠다고…… 생각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몇 번을 묻는 거냐. 우리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능과 불가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붙드는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저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감상과 의견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접 보고, 느끼고, 판단하여, 답을 내리는 것은- 유폐의 마왕의 몫이 아니다. 유진의 말이 맞다. 유폐의 마왕이 할 것은, 결말을 보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이 앞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멸망의 중심에서 가장 이질적인 장소.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 그곳에는 아득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저 상처는 ‘그’가 멸망의 마왕이 되고서 처음으로 새겨진 유일한 상처이며, 앞으로 몇 번이나 세상이 반복되어도 저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멸망의 마왕이 되기 전에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는 용사가 되기를 바라였으나 용사가 되지 못한, 하지만 용사의 곁에 서는 것을 허락받은 남자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바라던 대로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린 순간. 남자는 용사의 등에 칼을 꽂았다. 하찮은 질투심 때문이었다. 마왕을 쓰러트리면 용사는 영원히 용사로 추앙받을 것이고, 동료인 자신은 용사만큼의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마왕의 옥좌는 남자의 추악하고 세속적인 질투를 부추겼고, 그날.&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로운 마왕이 태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처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보였다. 멸망의 마왕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놈이 마왕이 되기 전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유폐의 마왕의 기억을 보아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경 쓸 필요도 가치도 없는 기억이다. 멸망이 어떻게 태어났는지가 무어가 중요한가?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멸망의 기원이 아닌, 멸망의 죽음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이름?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것에도 끔찍할 정도로 관심 없다. 유폐의 마왕이 알고 있는 ‘베르무트’와 유진이, 모론이, 세냐가, 아니스가 알고 있는 ‘베르무트’는 다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용사다. 빛이 놈을 인정하지 않았고, 베르무트 본인이 자신을 용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다른 모두가 베르무트를 용사라고 인정하고서 용사라고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찮은 질투심으로 동료를 배신해? 그것이야말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남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알고 있다. 베르무트는 절대로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 아니. 300년 전에 함께 마경을 가로질렀던 5명 중 누구도,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동료의 영광을 질투하여 등에 칼 따위를 꽂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베르무트를 비난해야 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서 입을 닥치고 있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꿈에 나타나서 100년이 넘도록 고생시키기도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지도 않았으면서 제게 추모사를 적게 한 죄도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가슴이 뚫려서 진짜로 죽을 뻔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눈썹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손이 옆으로 들렸다. 화륵. 피어오른 불꽃이 유진의 몸을 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과를 하든가, 변명이라도 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상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중심 부근에는 박살이 난 사슬들이 널브러져 있다. 몇 번이나 보았던 의자의 위에 베르무트가 앉아있다. 일주일 전에 강림했던 ‘모습’과는 다르다. 그때 그것이 베르무트의 모습에 씌워진 멸망의 마왕이었다면, 지금 앞에 있는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술은 열지 않았다. 칙칙한 금색의 눈동자가 모두를 보았다. 이 무채색의 세계에서 저들은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요를 잊은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렸다. 일렁이는 감정이 점점 번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이 부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에 선 네 명에게 그리운 빛을 느꼈다. 이 허무에서 고독한 300년 동안 필사적으로 이성을 유지하게 해주었던 빛. 너무나도 그리워 다가가고 싶지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빛.&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렬한 감정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빛 중에서 오래전, 자신의 안에 처음으로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보지 않았다. 시선을 거두었다. 눈으로 본들 얻을 수 없으니. 지금까지 이성을 유지해 준 저 빛은,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감상 따위는 자아내지 못했다. 심연에서 울리는 절규는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깥을 보았다. 쏟아져나오는 권속들을 방치하면서 본신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유는, 안다. ‘저것’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단하다. 저것들을 죽이면 움직일 수 있다. 저것들을 죽이면, 심연에서 절규하는 ‘나’도 사라져서,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뒤에는? 그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음이 반복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에게 있어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이유 따위는 없다. 애당초 그는 진정한 의미로 세상을 멸망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완성을 앞두고서 항상 세상은 다음으로 넘어가 처음부터 시작했기에, 멸망의 마왕은-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끝까지 해내지 못한 것을 반복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진정한 의미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까?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를 반복해 멸망시켜 온 본능이 남자를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색이 뒤엉키며 베르무트의 몸을 휘감는다. 텅 비어서 탁한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살기도 마찬가지다. 놈은 살기 따위는 뿜지 않는다. 지독한, 정신이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함만을 쏟아낼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저것은 베르무트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 저 몸은 멸망의 마왕에게서 갈라져 나온 분신이었다. 하지만 저 몸은 베르무트의 것이다. 저 안에는 베르무트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을 열게 만들려면 정신부터 차리게 해야겠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이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휘청거리며 다가오는 베르무트에게 이지(理智)란 느껴지지 않았다. 초점 없고 칙칙한 눈동자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앞에 선 모두가 느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은 베르무트의 거죽을 뒤집어쓴 다른 존재란 것을. 저것이 베르무트의 본질이자 그를 낳은 원초라는 것을. 과거의 인연이나 정 따위를 아무리 호소해 본들, 저것은 절대 멈추지 않고 멸망이란 본성을 이뤄낼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한 번의 부름으로 베르무트를 깨울 수 있으리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놈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그 부름에 답을 하듯이 멸망이 팔을 들었다. 허무뿐인 공간이 뒤틀리더니 어지러운 색이 번졌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가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묵직한 소리. 모론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지금 모론의 손에 도끼는 없다. 그가 평생을 휘둘러 온 도끼는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모론은 마치 도끼를 쥐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유진과 모론 사이에서 불씨가 튀었다. 화신이며 대전사가 바라였기에 승리의 신이 직접 무기를 하사했다.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던 손에는 어느새 도끼가 있었다. 모론은 새롭게 쥔 도끼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멸망의 머리 위에서 도끼를 내리찍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는 공중에 가로막혀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모론의 거력이 도끼를 짓눌렀지만, 색이 뒤엉켜 만들어낸 장벽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충돌했는데도 소리는 퍼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방에서 세냐가 메리를 들었다. 반발로 엉키는 불꽃과 색이 해석되었고, 영력은 저 틈을 관통할 마법을 만들었다. 소리 없이 발사된 창이 모론의 곁을 지나 멸망에게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코앞까지 도달한 창이 폭발했다. 이번에도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장벽을 관통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세냐의 마법은 멸망에게 아무런 피해도 전하지 못했다. 마법은 사라졌고, 멸망의 시선이 세냐에게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움직인 것은 시선뿐. 이곳은 다름 아닌 멸망의 배 속이다. 시선만으로 현상이 일어난다. 세냐는 자신을 덮치는 죽음을 직감했지만,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이미 색과는 다른 빛이 반짝였기 때문이다. 불씨가 허무에 번졌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성녀를 날개로 삼고서 손을 들었고, 그것만으로 색을 꺼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선명하게 타오르는 신검을 손에 쥐었다. 먼 옛날, 아가로트는 이곳에서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며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공을 넘어온 염원이 유진의 검이고, 멸망을 바라지 않는 현재의 모든 의지가 유진의 등을 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 선을 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 처음으로 큰 소리가 났다. 색이 흩어지고 멸망이 뒤로 밀려났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멸망의 배 속에도 꺼지지 않는 빛. 유폐의 마왕은 저 빛이 무엇으로 밝은지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와는 다르다. 그가 가졌던 전쟁이란 신성은 결국에는 멸망의 안에서 오래 빛나지 못했으나,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은 전쟁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탄은 흘렸으나 결말을 확신할 수는 없다. 유폐의 마왕은 끊어지려는 의식의 끈을 잡고서 멸망을 직시했다. 사력을 다한 발악으로도 걸음을 멈추는 것이 고작이던 아가로트와는 다르지만- 멸망은 살짝 물러섰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쯧.”&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느꼈다. 아가로트 때와는 다르고, 일주일 전과도 다르다. 지금 유진과 동료들은 언제나 ‘멸망의 마왕’에게 느꼈던 불길함과 불안, 광기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저 끔찍한 마력의 침식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압도하는 것은 꿈에도 꾸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닿으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닿는 것만으로 신력이, 존재가 마모되는 것만 같다. 아니, 마모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들여보지만 베르무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미치기 싫어도 미칠 수밖에 없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러섰던 멸망이 다시 앞으로 왔다. 움직인 손이 색을 이끌었다. 정면에서 덮쳐오는 색에 맞서 불꽃이 일어섰다. 타오르는 불꽃의 빛은 즉시 색에 덧칠되어 사라졌지만,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다시금 빛이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엉키는 색을 베었다. 베어도, 베어도 색이 번져 앞을 틀어막았다. 퍼붓는 참격, 마법이 공격의 사이를 채웠다. 도달하는 순간에 소멸해 버리지만 세냐의 마법은 끊이질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함을 질렀다. 직접 외치기도 전에 모론은 이미 유진의 뜻을 이해하고 도끼를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신력으로 빚어낸 도끼가 모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맞춰 크기를 바꾸었다. 오직 ‘힘’ 하나만으로 신성에 근접한 사내가 모론 루하르다. 그가 전력을 다해 뽑아내는 힘은 유진의 신력과 어울려 기적을 체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래부터 커다랗던 도끼가 훨씬 더 거대해졌다. 하늘도 천장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도끼는 마치 하늘에라도 닿을 것처럼 높아졌다. 그 끝에 매달린 도끼날은 하늘과 대지를 가를 것처럼 커졌다. 그리고 모론의 양손은 거대해진 도끼를 잡고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잔뜩 힘을 준 모론의 얼굴은 시뻘겋고 전신에서는 혈관이 울룩불룩 솟았다. 뒤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챈 멸망이 고개를 돌렸다. 지성과 이성이 없지만, 저것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본능이 판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선이 움직이는 순간에 유진의 몸도 미끄러졌다. 그리고 멸망의 뒤에서 세냐가 마법을 퍼부었다. 덕분에 모론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꽉 다문 이빨이 으스러지고 잇몸에서 피가 튀고, 전신에서도 핏줄기가 솟았다. 힘을 견디지 못한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터졌지만, 도끼를 쥔 손은 풀리지 않았다. 육체가 무너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힘이 도끼를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느릿하고 무거운 움직임에 허무가 일그러지고, 깨지고, 찢어져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바깥’이 아니다. 세상 한복판이 아니란 말이다. 이곳은 멸망의 배 속. 저 도끼는 지금 멸망의 배 속을 가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멸망의 본능은 다시 한번 판단했다. 단순히 시선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막기는커녕 바로 앞의 방해마저 넘지 못한다. 그래서 멸망은 직접 움직였다. 동작과 소리도 없이 멸망은 도약하여 유진을 뛰어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고함을 질렀다. 빠지지직! 연달아 쏘아진 창이 멸망의 뒤를 쫓았다. 유진도 즉시 날개를 펼치고서 멸망의 뒤를 따랐다. 홱 뻗은 손이 마법의 창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손에서 옮겨붙은 불꽃이 창을 휘감았다. 서로 다른 신력과 신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륵! 손에 쥔 커다란 불꽃의 창. 유진은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잡아끄는 창의 힘에 즉시 허리를 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폭발하고 창이 쏘아졌다. 소용돌이치는 영력이 허무를 관통했다. 떨어지는 도끼를 막아서려던 멸망은 등 뒤의 섬뜩함에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지지지직! 멸망이 정지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마법들은 이번에도 또다시 멸망의 몸을 붙들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멸망은 초점 없는 눈을 들어 도끼를 쫓았다. 시선과 함께 색이 움직였지만, 이제는 도끼를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어지는 도끼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고동쳤다. 느릿한 떨어짐이 점점 가속되었다. 높고 커다랗던 도끼가 가속에 맞춰서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다. 힘이 압축되는 것이다. 그만큼 도끼는 다루기 버거워지지만 모론은 멈추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가슴 속 우주에서 레반테인이 불꽃을 일으켰다. 머나먼 바다의 ‘빛’의 존재를 느꼈다. 유폐의 마왕과 전투했을 때 이상으로 빛과의 공명이 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밖에. 저번 시대에서 거신과 고신들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멸망의 끝이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는 바로 지금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 그렇기에 빛은 자신의 모든 신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에서 뽑아낸 신력이 불꽃이 되어, 유진의 양손 사이에서 회오리쳤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력의 태양이 검게 물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클립스. 유진은 직감했다. 그가 여태까지 해온 전투, 그때마다 사용했던 이클립스. 심지어 누아르 제벨라의 꿈에서 만들었던 이클립스보다, 지금의 이클립스가 강하다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클립스가 전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숴, 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피범벅의 입술을 비틀어 씩 웃었다. 하늘까지 닿을 만큼 거대했던 도끼가 이제는 모론이 평소 사용하던 것만큼 줄었다. 이클립스가 도끼의 궤적에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날이 이클립스를 터트렸다. 폭발한 검은 불꽃이 도끼를 휘감았다. 그리고 도끼가 불꽃을 이끌며 바닥에 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적.&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런 색도 없던 지면에 균열이 번졌다. 지면을 찍고서도 모론은 더욱 도끼에 힘을 불어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허가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이이이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찢어지는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은 멸망의 배 속에서도 가장 특별하고 불완전한 곳이다. 처음으로 멸망의 마왕이 가진 상처. 심지어 이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물지 않았고, 오히려 멸망의 일부가 상처를 통해 떨어져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불완전한 상처에 새로이 공격이 처박힌 것이다. 뱃속을 가르며 떨어진 도끼가 상처를 더욱 찢었다. 함께 추락한 이클립스가 상처를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세냐의 집요한 마법에 붙잡혀 있던 멸망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을 휘감은 색이 요동쳤다. 그 흔들림은 허무에도 번졌다. 점점 격렬해지는 흔들림은 바닥까지 번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 저곳을 보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허무에서 바깥의 풍경이 흐릿하게 비추어졌다. 동시에 레헤인야르의 풍경도 보였다. 가득 널브러진 시체를 짓밟으면서 쏟아져나오는 누르의 진군이 신군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해서 쳐다볼 수는 없었다. 크게 균열이 번진 바닥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설마 바닥이 무너질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유진은 급히 모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덜거리는 팔을 늘어트리고서 주저앉았던 모론이 유진의 곁으로 옮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추락이 시작됐다. 활짝 펼친 날개가 모론을 보듬었다. 아니스의 손길이 스치면서 모론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모론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저 위에서 멸망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방금 그…… 목소리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었을까, 탄식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멸망’이 낼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상처에 한 번 더 처박은 공격이 멸망에게 제법 치명적이었나? 어쩌면, 지금의 공격으로 베르무트의 의식이 깨어난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로 떨어지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곁으로 다가온 세냐가 내뱉었다. 그녀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마법을 준비하면서 아래를 힐긋 보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기에 추락의 거리가 가늠이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추락하기 전에 있던 곳과는 느낌이 다르다. 깊어진다. 공기가 역하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마나가 불안정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어져도 되는 거 맞아? 오히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의심하지 않고 대답했다. 역한 공기, 불안정함, 광기, 그 모든 독은 유진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오히려 이래야 맞다고 생각했다. 이 마구잡이로 날뛰는 광기와 불길함이야말로 멸망의 마왕의 근원에 가깝다는 증거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추락이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에서 떨어지던 멸망은 보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안구가 쓰라릴 정도로 불쾌하고 오염된 기류를 넘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일그러진 지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에는 기괴하고 역겨운 모습의 덩어리가 있었다. 썩고, 그리고 싱싱한 살점이 누더기처럼 엉겨 붙은. 마찬가지로 거죽과 뼈가 뒤섞인, 마치 사악한 흑마법사가 고약한 취미로 만든 조형물 같은 덩어리. 절대로 살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느꼈다. 저것은 살아 있다. 살아서, 고동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떨어진 유폐의 마왕이 바닥에 내려왔다. 그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심장.”&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망토 안에서 낡은 사슬을 꺼냈다. 사슬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유폐의 마왕이 최초에 멸망의 마왕에게 묶은 사슬.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유폐의 마왕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초에 나는…… 멸망의 마왕이 앉았던 옥좌에 사슬을 묶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최초의 용사는 유폐의 마왕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옥좌가 심장이 되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멸망의 배 속에서도 가장 깊은 장소. 최초에 사슬은 연결했지만, 유폐의 마왕조차도 심장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심장이란 급소이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고, 가까이 가려 해도 갈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터트려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면 끝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을 부여잡은 베르무트의 모습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뱃속의 오랜 상처가 찢어지고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심부에서 벌어진 파괴는 멸망의 마력을 격렬히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과정에서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의식이 깨어났다. 베르무트는 숨을 헐떡거리며 아래를 보았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료들과……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유폐의 마왕이 이곳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이 가진 망집에 대해 안다. 저 남자가 용사로서 내린 결정은 세상을 이어가는 것이고, 마왕으로서 내린 결정은 멸망에 순응하는 것이다. 동료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결국 유폐의 마왕의 망집을 꺾었다는 뜻일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터트려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멸망의 심장이다. 최초에 마왕을 탄생시킨 옥좌. 끝이 찾아올 때마다 멸망은 세상 모든 존재를 죽였다. 그것은 유폐의 마왕과 함께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이 나고 다음으로 넘어갈 때마다 유폐의 마왕에게는 끔찍한 독기와 악이 쌓였다. 유폐의 마왕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심연에 유폐하였지만, 멸망의 마왕은 그러지 못했다. 멸망의 마왕의 마력이 마주한 모든 것을 미치게 할 정도로 불길한 것은 그 때문이며, 저 심장은 멸망의 마왕이 몇 번이나 죽여온 세상의 독기와 정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면 끝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페의 마왕은 베르무트에게서 심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300년 전이었다면. 멸망의 마왕이 완전히 강림하지 못하고서 통제가 가능한 수준이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의미한 가정이다. 애초에 300년이란 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졌던 것이 꼭 끔찍하고 부정적인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다. 300년의 시간이 흘렀기에 유진과 동료들은 유폐의 마왕을 넘을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그렇게 정면에서 패배했기에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멸망의 끝을, 세상의 미래를 바라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을 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 이곳에 도달했을지라도, 과연 심장을 터트리는 것이 가능했을까. 제 심장이 터지는 순간에도 멸망의 마왕은 과연 침묵했을까. 몇 번씩이나 세계를 멸망시킨 저것은, 과연 그 허무한 끝을 받아들였을까. 300년 전의 하멜과 동료들은 심장의 폭주를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을 믿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즉시 답을 내렸다. 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인간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폭주가 ‘다음’을 망가트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더욱 치명적이 되기 전에 빠르게 오류를 수정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럴 여력도 없거니와, 여력이 있더라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난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침묵 끝에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허공에 멈춘 베르무트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멜이 저러한 대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멜이라면, 아니, 하멜만이 아니라 모두가, 저렇게 되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정신이 아니었을지라도 평생을 소중히 간직해 온 목걸이를 강제로 빼앗고서 직접 가슴을 뚫어 죽일 뻔했던 세냐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용사라고 생각하며 믿어주었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 어떤 진실도 전하지 않고서 장례를 맡겼던. 결국 죽어 영혼만 남은 천사가 되어, 하멜의 뒤에 선 아니스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찬가지로 아무런 진실을 전하지 않고 이해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 100년이 넘도록 설산에서 정체 모를 괴물을 가로막게 시킨 모론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 모두가- 하멜과 똑같은 얼굴로 베르무트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만으로 베르무트는 오열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이 순간에 도달하는 것만을 추구했다. 용사가 아닐지라도, 멸망의 마왕의 분신일지라도, 세상을 구하는 것에 값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맞이할 마지막에 멸망의 마왕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삶과 이 존재에도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묻지 않아도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앎에도 물어야 했다. 돌아온 대답을 직접 정면에서 부정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나를 구하겠다는 거냐.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이해하지 않기를 바랐고, 내…… 내 행동을 납득시킬 생각도 없었다. 나는, 나는…… 너희가 차라리 나를 증오하기를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자코 듣고 있던 세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터진 웃음을 억누를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키득거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너희는 이제는 알고 있지 않나. 나는 용사는커녕 인간도 아닌 존재다. 300년 전과 다름없이, 너희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던 멸망의 마왕의 분신이 바로 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 웃음을 터트린 것은 아니스였다. 그녀는 묵묵히 곁에 서 있는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려가며 쿡쿡 웃었다. 나지막이 흐르는 웃음소리에 베르무트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너희에게 구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애당초 내가 그것을 바랐다면, 진즉에 너희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 아닌가? 대체 몇 번이나 말하게 할 생각이냐……! 나는 멸망의 분신이고, 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멸망의 마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웃음소리는 세냐나 아니스의 것과는 달리 시끄러웠다. 모론은 고개까지 젖혀가며 커다란 웃음소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요란한 웃음소리에는 지금의 베르무트조차도 얼굴이 벌게질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뭐가 우스운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안 웃기겠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끈해서 외치는 질문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병신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욕설에 베르무트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는 베르무트에게 유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납득시킬 생각도 없었고, 구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너를 구하는 거냐고? 그럼 씨X 너는 우리한테 왜 그랬냐? 베르무트 이 개새끼야, 네가 X대로 굴었으니까 우리도 똑같이 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도 네 이해 따위 안 바라. 납득시킬 생각도 없어. 그냥 우리가 하고 싶으니까 널 구하는 거다. 증오? 그래. 만약 네가 증오하고 싶다면, 우리한테 구해지고 나서 마음껏 증오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신검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뒈지고 싶다면, 일단 살아남아서 우리한테 업보 청산을 마치고 뒈지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알아먹지 않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동료들을 도저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하기에 저 말은 감정의 헛된 호소에 지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가 무엇을 바라건, 하멜, 네가 무슨 말을 하건……! 내가 멸망의 분신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멸망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이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나 하나를 구하고자 멸망을 죽이는 것을 망설이겠다는 거냐?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서는 멸망의 권속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밖에는 내 후손들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후손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고 괴물을 가로막을 것이다. 전사와 기사는 나와 하멜, 베르무트, 우리 셋을 동경하여 무기를 쥐었다. 마법사는 세냐를 동경하여 책을 들었다. 성직자는 아니스를 동경하여 기도를 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네가 만든 300년 동안 세상은 성장했다. 너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이제는 장성하여 멸망의 앞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씩 웃으며 도끼를 쥐었다. 그 말에 베르무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건, 저는 300년 전에 당신께서 유라스를 행진하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용사가 아니시라고, 멸망의 분신일 뿐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절망스러운 시대에서 당신은 틀림없는 희망이고, 빛이고, 용사셨습니다. 만약 그때 베르무트님을 보지 않았다면, 저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부디, 자신을 모멸하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이 자신을 부정하는 모든 말씀은 300년 전 당신을 희망이자 빛이자 용사라 보았던 모두에 대한 모독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크리스티나는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에 양손을 모으고 베르무트에게 기도를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던 때, 세상을 구원하고자 일어선 용사. 그것이 크리스티나가 배우고 자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에. 기억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쓴웃음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경에서 말이야. 진짜 개같이 힘든 날에, 우리는 가끔 미래에 대해 떠들곤 했지. 모론은 언제나 왕이 되고 싶다고 했고…… 아니스는 별말을 하지 않고 술만 퍼마셨지만, 난 이제는 아니스가 어떤 미래를 바랐는지 알아. 베르무트, 넌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말이야, 어디 한적한 시골에서 술집을 열고 싶대. 여관도 겸하는 그런 거. 하멜은 주제에 맞지 않게 뭔 아카데미를 세우고 싶다고 했고. 나는……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 지금 와서 보면 꿈을 이룬 것은 모론 뿐이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우리가 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너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대답을 피했었지. 그래서 우리는 네가 어떤 미래를, 어떤 꿈을 바랐는지 들은 적이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그 절망스럽고 끔찍한 나날에서, 세냐는 매일 저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 누구보다 우리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우리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해. 당연히 그래야 하잖아. 우리는 300년 전에 세상을 구했고, 지금도 세상을 구하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우리 중 누구보다, 베르무트, 네가 행복해져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3명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었을까?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지도 못했을 것이다.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300년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은 끝낼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리지만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을 향해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베르무트, 너도 구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가능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씨X 우리가 언제부터 가능한 일만 했냐? 너야 이것저것 숨기고 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겠지만, 처음 살육의 마왕에게 덤빌 때! 너 빼고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베르무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씨X, 네가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해도 우리는 널 구하고, 멸망을 죽일 거야. 뭐? 네가 멸망의 분신? 멸망을 죽이면 너도 죽어? 그거야말로 개 X같은 소리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이 개새끼야. 우리한테 있어서 너는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고. 용사가 아니어도 돼. 멸망의 분신이어도 돼. 그런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숨도 쉬지 않고 쏘아붙이던 유진은 크게 숨을 한 번 삼켰다. 북받치는 감정을 조금 억누르고, 떨리는 양손으로 신검을 강하게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우리가 알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마라. 멸망을 죽이고 나서. 우리는 너를 존나 팰 거다. 우리한테 처맞기 위해서라도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러니 멸망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라.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생각만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이랑 똑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심장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마왕을 죽인다. 마왕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베르무트 너는, 우리랑 같이…… 마왕을 죽이는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베르무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온 평생을 멸망의 분신이란 자각과 함께 살았다. 멸망의 마왕과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았다. 바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저 말.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너’는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말. 그 말에 베르무트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모론, 세냐, 아니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바보에, 멍청이다. 아니. 병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런 욕을 하는 것은 처음 듣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욕을 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 보십시오, 세냐. 베르무트 님도 결국 사람이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병신 정도면 욕 중에서도 급이 좀 낮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넷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베르무트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두근.&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릿하게 뛰던 심장의 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유진과 동료들이 심장에 너무 다가갔기 때문이다. 심장은 가까이 온 위협을 느끼고서 저항을 준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바라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 다시 일어난 색이 베르무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멸망은 심부에 침입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금 베르무트의 몸에 색을 씌워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너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우리를 공격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알아. 지금부터의 네가 베르무트가 아니란 것도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부터 우리가 팰 것은 베르무트, 네가 아니다. 그러니까. 너는…… 살아서 더 맞을 생각이나 하면서, 그 안에서 싸워라. 얌전히 휘둘리지 말고 발악이나 하란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뛰는 색이 베르무트의 몸을 집어삼켰다. 베르무트는 초점이 사라져가는 눈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병신 자식.”&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이 돌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심장으로 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멸망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지직! 코앞에서 부딪친 마력이 불꽃과 함께 산화했다. 유진은 머리카락의 끄트머리가 재가 되는 것을 힐긋거리며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새끼는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앞에 있는 멸망에게 더 이상 베르무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눈은 아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초점 없이 탁했고, 전신을 휘감은 색과 마력이 불꽃을 대신해서 활활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혼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나서려던 세냐가 움찔 멈춰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는 아니지. 아니스랑 크리스티나도 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신검을 밀어냈다. 저 발언을 증명하듯 유진의 날개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빛은 곧 불꽃의 세례가 되어 멸망을 덮쳤다. 하지만 멸망은 불꽃에 삼켜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마력과 색을 일으켜 불꽃을 밀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멸망의 화신이 되었던 망령과는 이전에 싸워서 승리했었지만- 저것은 화신의 격을 초월했다. 베르무트의 육체를 빼앗아서 지배하는 멸망의 분신, 아니, 멸망의 마왕 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존재를 유진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신명이 ‘승리’라는 것은 지금 저리 나서는 것에는 관계가 없다. 유진이, 하멜이 저렇게 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게 이긴 적이 없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돌렸다. 잠시 멈추기라도 했던 세냐와는 달리, 모론은 멈추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우직하게 정면으로 돌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괴성과 함께 모론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과연, 심장도 침묵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뿌득, 뿌드드득. 심장의 표면에서 부서져 갈라지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뭉쳐서 모론에게 쇄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도끼가 떨어졌다. 큼직한 날이 마력의 덩어리를 끊어냈지만, 그 순간에 폭사한 색이 모론을 덮쳤다. 그 순간에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법을 펼쳤다. 둘 사이의 거리가 뭉텅 잘려 나가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모론이 세냐의 곁으로 옮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식한 새끼! 혼자 나가지 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널 믿은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대답해 버리니 세냐는 더 이상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모론의 성격상 입에 발린 말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론은 세냐가 자신을 보조해 줄 것을 진심으로 믿고서 우직하게 나아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어, 알았으니까, 먼저 가지 말고 있어 봐. 저걸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좀 봐야 할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눈을 얇게 떴다. 쩌저적…… 심장의 표면을 덮고 있던 뼈와 거죽 같은 것이 계속해서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서는 썩은 고기 같은 보라색과 검붉은 살덩어리가 뒤섞여서 꿈틀대는데, 피를 대신해서 가지각색의 마력이 흘러넘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겨워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래전부터 썩은 시체는 헤아릴 수 없이 보았다. 어지간한 광경에도 토악질은커녕 풍경 삼아서 티 타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단련된 비위지만, 저 심장을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뒤집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큼 저것이 보기 역겹기도 했지만, 흘러나오는 마력과 색의 영향이기도 했다. 저 심장 안에 뭉치고 고인 것은 유폐의 마왕의 시독보다 훨씬 더 고약하고 끔찍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구역질을 참으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일주일 전의 전투를 거쳐 신성은 훨씬 더 강해졌다. 그만큼 마력에 대한 저항력도 늘었지만 완전히 면역이 된 것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지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서 들리는 폭음이 세냐의 염려를 끊었다. 생각할 시간조차 아깝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은 30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 모를 적.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럴 때는 항상 모론을 먼저 보내곤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가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씩 웃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세냐는 모론이 심장의 저항에 어찌 응전하는지를 살피면서 뒤를 힐긋 보았지만, 힐긋 본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버거웠디.&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과 색이 어지럽게 얽히는 것만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이런 식으로 베르무트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젠가 제대로 결투해서, 이제는 누가 더 강한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오늘은 아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멸망이니 마왕이니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평화로운 일상 중에…… 대단한 결의나 신념 따위 갖지 않고, 당연히 승리한 뒤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베르무트가 풀이 죽어 있다면. 승자의 여유를 갖고 놈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면서. 너라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같은…… 승자가 할 법한 대사를 해주면서 술이나 마시러 가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툴툴 웃으며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쓱 닦았다. 유진은 지금 자신과 싸우는 상대를 베르무트라고 여기지 않았다. 베르무트와 싸워서 이긴 적이 없으니까, 라던 말은- 결국에는 자신을 다잡기 위한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초에 이건 일대일도 아니잖아.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엄밀히 말하자면 하멜, 우리 쪽이 3명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시스터, 저는 유진 님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상대는 유폐의 마왕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왕이며, 철저하게 쓰러트려야 할 악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슬쩍 놀려대는 아니스와는 달리 크리스티나는 진지하게 유진을 옹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크리스티나…… 지금의 당신이라면 하멜이 길바닥에 똥을 쌀지라도 그 이유를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은 길바닥에 똥 따위 절대 싸지 않으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똥을 왜 싸?”&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앙! 조금 떨어진 앞에서의 폭발에 유진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뻗었다. 가슴에서 흘러나온 빛이 즉시 이클립스를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3명이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클립스는 폭발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퍼져나가던 힘은 모조리 이클립스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다시금 폭발했다. 그렇게 터진 폭발은 방금의 몇 배나 되는 위력으로 허무를 뒤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은 바로 근처에서 검을 들었다. 놈은, 검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그 검은 유진이 알던 검과 아주 비슷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으로 떨어져나온 베르무트가, 자신의 마력을 뽑아내어 만든 검. 멸망의 마왕이 월광검을 사용할 이유 따위는 없을 터. 하지만 아까부터 베르무트는 월광검을 만들어서 휘두르며 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성이 없을 텐데도 공격에 어색함이 없다. 아까의 멸망은 마력과 색을 움직이거나 팔을 움직이는 정도의 단순한 공격밖에 할 줄 몰랐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격돌이 이어질수록 놈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클립스의 폭발을 양단해낸 멸망이 유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까는 하지 않았던, 아니, 하지 못했던 것. 하지만 몇 수 전부터 멸망은 저렇게 움직이는 법을 깨우치고, 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유진을 공격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멸망의 뱃속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베르무트는 원하는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성이 깃든 직감에 몸이 움직였다. 유진의 머리가 있던 곳에 월광검의 참격이 그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격은 피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허공에 그어진 색이 꿈틀거리니 사방으로 폭사했다. 프로미넌스의 공간도약은 이곳에서는 쓸 수 없다. 유진은 번져오는 색을 피해 물러서며 신검을 뽑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공격은 그 전의 공격보다 예리하다. 직감이 없었다면 참격부터 피하는 것이 난항이었을 것이다. 저 방식의 이동에 익숙해지고, 공격을 가미하고 있다. 지성이 없을 텐데 어떻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장하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리 생각할 것이 없다. 놈은, 멸망의 마왕은- 그릇으로 삼은 베르무트의 오성을 사용해서 지금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원래 베르무트가 할 줄 알았던 전투법. 그를 바탕으로 해서 유진을 상대하며, ‘베르무트라면’ 할 법한 대응으로 성장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놓은 결론을 확신했다. 흐느적거리며 움직인 멸망이 유진을 보았다. 다시 한번 멸망이 유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새끼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망령의 때도 그랬지만, 베르무트도 아닌 새끼가 베르무트처럼 싸우는 것은 언제나 유진을 열받게 한다. 하멜일 적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것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언젠가 ‘진짜’ 베르무트와 싸워서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기로 다짐했는데,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맞닥트릴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그 언젠가에 베르무트에게 승리할 때 누릴 기쁨이 엷어질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작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감이 경고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놀라서 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유진은 아까처럼 경고를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다.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베르무트가 할 방법으로 성장해서 덤비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에 쥔 신검이 불꽃이 되어 무너졌다. 이 ‘거리’는 검을 휘두르기에는 간격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유진의 양손에 신화가 휘감겼다. 그리고 멸망이 나타났다. 놈은 아까보다 더욱 예리하고 치명적인 위치에서 월광검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을 휘감은 주먹이 움직였다. 목을 노리던 월광검의 참격이 유진의 왼팔에 가로막혔다. 불길한 마력은 신화를 소멸시키고서 유진의 팔뚝을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이 팔을 파고드는 순간. 주먹을 쥔 오른손이 멸망의 뺨에 처박혔다. 꽈앙!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과 함께 멸망이 아래로 내리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리 알아버리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뻐근한 주먹을 털면서 내뱉었다. 왼팔. 뼈까지는 잘리지 않았지만 제법 깊이 베였고, 흐르는 피는 뜻대로 멎지 않았다. 멸망의 마력이니 바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이 잘렸으면 어쩔 뻔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붙여줬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붙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잘리기 전에 때렸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먹이 처박히는 순간. 완벽하게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감촉이 덜했다. 몸을 덮은 저 색이 충격을 흩트린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쯧 혀를 차면서 손을 펼쳤다. 주먹으로 두들겨 패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들인 노고에 비해 결과가 영 좋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 마력에 언제까지고 저항할 수 없는 노릇. 전투가 길어지면 이쪽이 먼저 마모되어 쓰러질 터. 유진은 뒤를 힐긋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마력의 덩어리를 썰어대는 모론과, 그렇게 열린 길에 마법을 퍼붓는 세냐가 보였다. 하지만 고화력의 마법이 연거푸 처박히는데도 심장에는 이렇다 할 흠이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저것은 수천, 아니, 그 몇 배는 족히 될 시간 동안 멸망의 심장으로 있던 것이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쌓인 마력은 고스란히 심장에 깃들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너도 성장하고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이 바닥을 양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표정 없는 얼굴. 주먹을 처박은 뺨에는 붓기도 없고 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공격이 다음, 다음, 다음으로 갈수록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상대할 수 있다. 놈은 베르무트의 오성과 경험만으로 싸우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놈이 성장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몰아치면 된다.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 공격하면 된다. 유진은 프로미넌스로 이그니션을 준비하면서 몸을 낮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4명.”&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 마저 하지 못했던 말. 지금 멸망과 싸우는 것은 유진과 성녀들뿐만이 아니다. 멸망의 공격 도중, 손끝의 미세한 떨림을 보았다. 전투에 영향을 주는 순간은 아니었지만, 멸망의 움직임에는 놈이 의도하지 않은 것만 같은 떨림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병신 머저리 자식이 드디어 유진과 동료들의 말을 알아먹은 모양이다. 오늘 여기서 죽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멸망의 분신이니 떠들지 말고, 자신을 혐오하고 부정하지 말라고 했다. 함께 싸우자고 했다. 얌전히 휘둘리지 말고 발악하라고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떨림은 베르무트가 발악하고 있다는 증거다. 저 안에는 베르무트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몇 번 보았던 것. 전처럼 직감에 의존하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자리를 떠나서 신화를 일으켰다. 두 자루의 신검이 양손에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발적인 성장 속도를 웃돌아야 한다. 오성과 경험만으로 대응이 버거울 정도의 난격을 퍼부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순간, 유진의 기억은 머나먼 과거를 보았다. 베르무트와 벌였던 몇 번의 결투. 그중에서도 베르무트가 가장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몇 번인가 승기에 근접했던 공격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라광살.”&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자루의 신검이 참격의 난무를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초고속으로 휘두르는 검은 오히려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두 자루의 신검은 찰나에 수십, 수백 번 움직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참격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고 그어서 만든 참격은 휘두른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신검이 뿜어낸 불꽃이 참격을 확실한 형상으로 남겼다. 그렇기에 마냥 피할 수는 없다. 직접 깨부수지 않는 이상 불꽃은 번지고 커지기만 할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월광검은 움직였다. 더해 넣은 마력이 창백하고 불길한 달빛을 내뿜었다. 직접 휘두른 검기(劍技)는 유진에게는 익숙했다. 그는 생애 꽤 많은 패배를 겪었고, 그 패배의 대부분은 베르무트에게 당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유진은, 하멜은, 자신이 ‘왜’ 졌는지에 대해 항상 복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어떻게 나를 패배시킨 것인지. 놈의 검기가 얼마나 예리하고 드높았는지. 어느 시점에서 흐름의 맥이 끊기고 패배로 치달았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기억하고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리고서 전투를 그려왔다. 비교적 최근에는 실제로 겪어본 적도 있다. 하우리아에서 싸웠던 망령은, 베르무트의 기억을 받아 놈의 검기를 다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무는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호흡까지 멈추고서 모든 힘을 검에 쏟아부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불꽃이 멸망을 압박했다. 놈은 물러서지 않고 월광검을 앞세워 정면 돌파에 나섰다. 오직 검만을 휘두르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다. 검을 쥐지 않은 왼손에 두른 마력이 참격을 짓눌러 소멸시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새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라광살을 이어가는 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억하는 마지막 대련에서 베르무트가 저렇게 했다. 물론 그때 베르무트는 월광검이 아닌 다른 검을 쥐었고, 왼손에도 마력 대신에 백염식의 불꽃을 둘렀지만, 그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면 지금 멸망의 대응은 베르무트와 똑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짜증 나게 흉내 내고 앉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흉내.&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그 정도다. 단순 힘이나 속도 같은 것은 옛날의 베르무트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멸망이 베르무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힘이 강하고 속도가 빠를지라도, 그것을 어찌 조합하고 다루느냐가 중요한 법이다. 조건반사에 지나지 않을 대응만 해대는 것을 강하다고 할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단순하고 무식한 공세를 파훼하고 발라먹는 것이 무어가 어렵단 말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베르무트의 육체를 그릇으로 삼고, 놈의 경험과 사고를 끌어다 쓴 것은 멸망의 실책이다. 저것은 결국 인간의 육체이기에 전투법이 제한된다. 심지어 그 제한된 전투법이 유진에게는 익숙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유진은 이러한 대인전에 통달해있다. 베르무트 본인이 와서 직접 판단하고 싸워도 지금의 유진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인데, 지금의 멸망은 베르무트 본인의 대응보다 열등하다. 성장? 받아먹어 성장할 수 있게끔 싸워준다면, 그래, 꽤 고생하게 되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아니다. 성장할 시간 따위 주지 않는다. 후욱. 호흡을 내쉬고 삼켰다. 심장이 뻐근했다. 끓는 피가 가속했다. 시야가 활짝 열렸다. 두 자루의 신검의 불꽃이 격렬히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강렬한 의지가 기적이 되어 검에 깃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부터 멸망은 참격을 쫓지 못했다. 월광검은 연달아 꽂힌 참격에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났고, 왼손은 더 이상 불꽃을 억누르지 못했다.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던 것도 더 이상 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씩, 조금씩. 멸망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밀려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면 깊이 베인다. 제자리에 있어도 깊이 베인다. 그렇다기에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러서면 베이지 않는가? 그것도 아니다. 참격은 집요하게 쫓는다. 최적의 대응을 선택해도 마력과 색이 깎여 나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순간부터 멸망은 월광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했다. 바짝 몸에 붙여서 방어 일변도로 돌렸다. 그렇지만 부족했다. 막고 싶었지만 전부 다 막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사방에서 스친 참격에 마력이 피처럼 터졌다. 그 직후 두 개의 신검이 동시에 정면에 꽂혔다. 방어로 세웠던 월광검은 그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들지 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격 사이로 속삭여주었다. 멸망은 그 말 자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것을 상대로 ‘검’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베르무트의 사고로 이해했다. 검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충분히 성장할지라도 검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멸망은 급히 마력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속삭여 주었다. 꽈직! 처박은 참격이 마력을 터트렸다. 어지럽게 얽히던 색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진은 따로 움직이던 양손을 하나로 모았다. 두 자루의 신검이 하나의 대검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 위로 들어서, 아래로 그었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거미줄처럼 얽혀있던 불꽃들이 모조리 신검과 연결되었다. 빠져나갈 틈 없는 참격의 우리가 멸망을 옭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륵! 마력과 색이 불꽃에 깎여 나간다. 그만큼 신력은 마모되어가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신력이 마모되는 것보다 마력과 색을 깎는 것이 더 빨랐다. 이 흉흉한 멸망의 뱃속에서도 승리를 바라는 세상의 기도를 들었다. 그렇기에 신력의 바닥은 한참이나 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가 없다. 집요한 불꽃이 색을 붙들고 늘어져 놔주지 않고 있다. 아니,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단순하게 육체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있다. 근육이 멋대로 경직되고, 관절이 뻣뻣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놔.’&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내 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릇의 목소리. 오래전에 입은 상처에서 멋대로 떨어져 나간 분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름은 알고 있다. 최초에 멸망은 저런 이름을 가진 인간이었다. 이제 와서는 저 이름에 대한 자각도 감상도 남아 있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내가 갖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둑, 뚜두둑. 잘 움직이지 않던 팔이 이제는 다른 의지로 움직였다. 정면에서의 공격을 막기 위해 두었던 것이 멋대로 위로 들렸다. 그렇게 방어가 열려 버렸다. 빠직! 기다렸다는 듯이 처박힌 검에 멸망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방금 멸망의 움직임은 분명히 이상했다. 떨림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유진을 위해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베르무트다. 놈의 저항과 발악이 멸망에게 확실한 영향을 준 것이다. 유진은 씩 웃으며 신검을 뒤로 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검의 중첩이 신검을 덮었다.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멸망은 본능적으로 저 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처 떨쳐내지 못한 불꽃이 아직 몸을 붙들고 있다. 이동을…… 멸망의 시선이 움직였다. 뒤늦게 깨달았다. 이동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불꽃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동할 수 없다. 베르무트다. 그가 자신의 몸이 사라져서 나타나지 못하게끔 단단히 붙잡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억지로 열린 입술 사이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유진은 베르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검이 멸망의 몸에 가까이 갔다. 콰르르르! 쏟아져나온 마력과 색이 불꽃과 함께 산화했다. 밀어내지는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검은 가로막는 색을 모조리 불사르면서 점점 멸망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공검의 불꽃이 멸망을 완전히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허무가 뒤흔들렸다. 격렬히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멸망이 허우적댔다. 불꽃 속에서 색과 마력은 계속해서 쏟아져나왔지만, 그 즉시 재가 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유진은 숨을 몰아쉬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먹을 쥐자 불꽃이 크게 폭발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진은 계속해서 이클립스를 터트렸고, 그때마다 멸망이 크게 비틀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편에서 끊이지 않고 울리는 폭발음. 하지만 세냐에게 뒤를 돌아볼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좀처럼 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심장을 공격하는 것만으로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심장에 마법을 처박았지만, 간신히 내부로 파고든 마법은 원하는 만큼의 파괴를 일으키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조금씩 반응이 오고 있다.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에 불규칙한 삐걱거림이 섞였고, 쏟아져 나오는 마력과 색도 처음만큼 반발이 강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모론도 심장에 근접했다. 괴성과 함께 휘두르는 도끼는 마치 나무를 베듯이 심장의 표면에 처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 쿵, 쿵. 연이어 찍어대는 도끼질에 심장이 푸들거리며 떨리고 마력과 색이 피처럼 쏟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의 폭발음이 전보다 크게 울렸을 때. 메리를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지만 세냐는 당황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가 된 고대의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 세냐는 이곳에 없는 현자의 손이 자신과 닿는 것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이 지금이란 말인가? 세냐의 눈동자에 환한 빛이 어렸다. 무한하게 확장된 의식이 눈으로 보지 않은 것들마저 이해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거세게 저항하고 있다. 멸망은 더 이상 자신에게서 떨어져나온 분신을 통제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연이어 터트리는 신화는 베르무트에게 깃든 멸망을 소각하고 있고, 그 모든 것이 심장에 직접적인 부담이 되었다. 마력이, 색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자신의 마법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길게 뻗은 메리가 심장을 겨누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야말로 염원의 종착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를 통해 현자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멸망의 끝을 보겠노라는 염원이 드디어 오늘에 이르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나먼 대수림에서 세계수의 힘이 메리로 흘러들어왔다. 화아악! 메리의 넝쿨이 마치 활처럼 펼쳐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넝쿨 사이에 영력의 현을 걸었다. 파직! 메리를 통해 넘어온 세계수의 정령들이 하나로 모였고, 세냐의 영력은 그들을 감싸 화살을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등골이 찌릿할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냐가 그랬듯, 모론도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괴성과 함께 도끼가 높이 들렸다. 커다래지지는 않았지만, 심장까지 길을 열었을 때와 같은 힘이 도끼에 집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날카로운 마력과 색이 쏟아졌다. 하지만 모론은 도끼를 휘둘러서 공격을 치우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여전히 도끼를 높이 들고서,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아직 도끼를 휘두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위를 놓았다. 녹색의 빛이 허무를 관통하고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모론은 드디어 도끼를 내리찍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발하는 색과 마력은 우직하게 찍어누르는 도끼의 힘에 모조리 아래로 처박혔다. 꽈지직! 도끼는 심장의 외벽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고 박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상처에 화살이 처박혔다. 영력과 함께 해방된 세계수의 정령들이 심장의 안으로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하! 현자의 웃음소리가 정령들을 이끌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두근거리는 소리가 찢어지는 비명으로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비명도 함께 터져 나왔다. 아직까지 이클립스의 폭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멸망이 머리를 붙잡고서 바닥을 굴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는 베르무트의 것이지만,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은 베르무트가 아니었다. 저 육체를 차지한 멸망이 고통에 반응하는 것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베르무트의 목소리로, 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비명을 듣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진은 멸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놈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비명을 질러대는 주제에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희미하게나마 잡히는 초점. 탁하고 색이 바랬지만, 그럼에도 눈동자 깊은 곳에는 불꽃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을 불사르던 신화가 완전히 걷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멸망이 펄쩍 뛰어올랐다. 놈은 유진을 공격하지 않고, 여전히 터질 듯이 부풀어 있던 심장을 향해 이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당연히 요격하려고 했지만, 움찔 놀라서 마법을 거두었다. 모론도 더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유진에게서 보내라는 뜻을 들었기 때문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수라고 생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찍이서 전투를 지켜보던 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본능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만큼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에게도 중하다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계속해서 공격했다면, 멸망의 마왕이라도 우습게 여길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죽였다면 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베르무트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겠지.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가능성일 뿐. 베르무트가 아무리 바라여도, 저렇게 삼켜진 이상 더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손가락이 심장을 가리켰다. 그곳에 도달한 베르무트의 육체가, 심장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심장을 노려보았다. 터질 듯 부풀었던 심장의 형태가 변모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쏟아져나오는 마력이 색을 두르고 바닥을 짚었다. 뚜둑, 뚜두둑. 심장에서 뽑혀 나온 살점과 뼈가 흉측한 손발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봐라,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탄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괴물을 죽일 자신이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을 중심으로 삼은 괴물이 머리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연스럽게 저것과 닮은 짐승이나 몬스터를 떠올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대한 몸, 크게 벌어진 입에서 보이는 촘촘하고 날카로운 이빨. 불규칙하게 돋아나 바닥을 짚은 팔다리. 손톱과 발톱은 갈고리처럼 휜 것도 있고, 칼처럼 길게 튀어나온 것도 있다. 등에도 제멋대로 돋아난 날개와 팔다리가 붙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다.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닮은 것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 연상할 만한 짐승이나 몬스터는 없었다. 저것은 제멋대로 생긴 괴물일 뿐이었지만, 키메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서로 다른 것을 억지로 연결한 것이 아니다. 저 자체가 하나의 생물이다. 불길하고 끔찍한 마력 그대로 형상화한 괴물. 유진은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유진이 상대했던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들은 대부분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저것은 그런 모습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유진은 저것에서 진하게 ‘마왕’이라는 이름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낭비가 없는…… 효율적인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해 온 존재. 그에 마땅한 불길하고 사악한 마력이 저 괴물에게서 가득 느껴진다. 이곳은 멸망의 뱃속이지만, 저것이야말로 멸망의 본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은 땀에 찬 손을 움켜쥐면서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을 완전히 죽인다는 것은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는 뜻.&lt;/p&gt;&lt;p&gt;&lt;br /&gt;&lt;/p&gt;&lt;p&gt;“재 뿌리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도움이 될 생각은 없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너덜거리는 양손을 들어 보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올 때까지 목숨을 불사르며 멸망을 붙잡아주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죽을 목숨을 태운 것뿐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죽음을 바라기는 한다만, 대놓고 그리 말하는 것은 참으로 뻔뻔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흔들며 헛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석하게도 나는 저것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내 마력은 진즉에 고갈되어서, 더 이상 끌어낼 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투에 도움이 되라는 것이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끄러미 향해 온 시선에 유폐의 마왕은 몇 번 눈을 깜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유페의 마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아까처럼 허망하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진심으로 놀람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웃음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더 이상 유폐의 마왕을 보지 않고서 고개를 돌렸다. 저 웃음에 섞인 감정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유폐의 마왕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기도 했다. 머리를 든 괴물의 거대한 입이 이쪽을 향해 쩍 벌어졌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대단한 욕심쟁이로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의 중얼거림. 웃음에 섞인 감정보다 확실한 대답. 유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화륵! 거대한 신검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천천히 뒤로 끌었다. 어차피 죽음을 바라는 몸. 가능하다면 이 전투의 마지막을 보고서 죽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지막을 보지 못할지라도, ‘미래’를 위해 최후를 바치는 것도 좋지 않은가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은 고갈되었다. 싸울 수 없다. 그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길고 긴 세월을 살아온 대마왕의 영혼은 완전히 저물기 전에 한순간이나마 멸망의 마력을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래야 한다면.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멸망에게 산화할 의지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죽어버리면 훌륭한 자기만족은 가질 수 있겠지만, 유진의 욕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기적을 만들고 싶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 스스로 읊조린 말에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기적이라니, 그 단어부터가 새삼스럽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가 유진 라이언하트가 만든 기적이다. 유폐의 마왕이 최후까지 관측해야 할 것은, 과연 이 모든 기적이 신화로 완성될 수 있느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껴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르게 뛰는 심장이 뻐근하다. 달아오른 피의 흐름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감각이 열렸다.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려 괴물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를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아가리가 쩍 열려 있다. 하지만 저렇게 크게 벌리고 있는데도 입의 안쪽은 들여볼 수가 없었다. 저곳에 존재하는 것은 꿰뚫어 수 없는 시커먼 어둠뿐. 멸망의 마력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가 알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끓는 마력이 넘실거리며 새어 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빨이 마력에 덮였다. 곁으로 다가온 세냐와 모론에게서 긴장을 느꼈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기도를 잊고서 괴물에게 압도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이 지나도 엷어지지 않은 라이언하트의 피. 이 육체는 베르무트의 후예. 마력은 띄지 않지만, 라이언하트의 피는 멸망의 마왕에게서 비롯된 것. 그렇기에 유진은 지금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끓는 피로서 알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괴물의 중심에 있는 심장. 그 안에 베르무트가 있다. 놈은 심장에 빨려 들어갔지만 의식은 잃지 않았다. 막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베르무트를 보내주었다. 베르무트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은 절망에서 벗어났다. 멸망과 함께 죽겠다며 생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유진과 동료들이 바랐던 것처럼, 멸망의 분신이 아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서 함께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베르무트는, 저 끔찍하고 불길한 마력의 중심에서 자신을 깨우치고 저항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작 그랬어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쩍 벌어진 거대한 아가리 앞에서도 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흘러넘친 마력이 일점으로 모이고 있지만, 유진의 눈은 똑바로 그 중심을 보았다.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둠. 하지만 지금은 그 중심에서 자그마한 불씨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하얗게 타오르는 작은 불씨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아앙! 일점에 모인 마력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마력은 마치 드래곤 수천 마리가 동시에 브레스를 쏴 갈긴 것 같았다. 아니, 그조차도 우습게 여길 만큼의 힘이다. 더 이상 불씨를 응시할 수는 없었다. 유진은 숨을 삼키면서 신검을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지막한 속삭임. 머나먼 바다에 앉은 빛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만을 바라며 쌓아 온 모든 신력이 유진에게 연결되었다. 그것은 유진의 정신마저 뒤흔들 정도로 거대했으나, 두 성녀의 기도는 이 끝없는 힘을 보다 유연히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검에 레바테인이 깃들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빛과 함께 거대하게 부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신검이 마력을 양단했지만, 베어낸 마력을 모조리 불사르지는 못했다. 타지 않고 남은 마력이 다시 괴물에게 환원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아. 알고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빠르게 내뱉었다. 유진은 쥐었던 신검을 모론에게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호흡만으로도 치명적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밖에 나간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내부에서 공격하기에 심장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못 견디겠다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면- 심장까지 도달하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과의 싸움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죽기 전에 먼저 죽이면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손에 쥔 신검을 도끼로 바꾸면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 괴물이 무수히 많은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이쪽을 향해 전진했다. 유진은 각자 움직이는 지네 같은 팔다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너는 저 새끼 팔다리 잘라라. 가능하면 몸통도 썰어보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너는 저 새끼 등을 노려. 마력 돌려막지 못하게 방해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은 쉽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론과는 달리 세냐는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말만 그렇게 할 뿐, 세냐는 즉시 높이 날아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몸을 낮추던 모론이 물었다. 유진은 양손에 신검을 하나씩 쥐면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아가리부터 찢어버리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말한 것처럼, 내뱉은 것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란 자각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거대한 괴물에게서는 유폐의 마왕 이상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유폐의 마왕에게서 승리했기에 유진은 멸망의 마왕에게 압도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압도되지 않았을 뿐. 저 힘마저 얕잡아 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 사실은 유진만 아니라 모론도, 세냐도,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구 하나 주저하지 않고 괴물에게 전진했다. 더는 물러설 곳은 없다. 저것만 쓰러트리면 된다. 그것은 멸망에 맞서는 이유로서 충분히도 차고 넘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깥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은 사람이 죽었다. 죽은 사람들에 버금갈 정도의 누르가 쓰러졌지만 전황에 큰 영향은 없었다. 놈들에게는 오직 인해전술만이 존재했고, 사기란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막아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 뜬 거대한 문 앞에서 로베리안이 고함을 내질렀다. 활짝 열린 판테온은 이미 내장하고 있던 모든 소환수를 쏟아냈지만, 전선은 점점 밀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정말로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누르가 기어코 신군의 전열을 침식해 버린다면. 이곳 전선에 최전선이니 후방이니 하는 것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해버린다면. 그때는 마구잡이의 학살이 시작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막는다……. 언제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로베리안은 숨을 몰아쉬며 전선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사에 다시는 없을 만큼의 대군이 이곳에 모여 있다. 상대는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마지막 마왕이자,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켜 온 마왕이다. 이곳에 모인 군대는 역사에, 전설에, 신화에 이름을 남기고자 온 자들이다. 세상을 구한다는 찬란한 대의에 매료된 자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은- 그들의 눈에 믿음이 있다. 하늘에 뜬 신력의 태양이 찬란하고 밝기에, 신군은 공포를 느끼지 않고 있다. 바로 곁에서 아군이 죽어도, 정체 모를 괴물의 이빨과 발톱이 자신에게 꽂혀도. 모두가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진군을 외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물러서려 해도 물러설 수가 없다. 그 자세한 내막은 신군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멸망의 마왕’을 목도한 전원이 본능적으로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이어펀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메가 포스로 거인이 된 멜키스가 주먹을 휘저으며 날뛰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재하는 멸망에 맞서 세상을 구하는 대정령사! 멜키스는 그 영광에 흠뻑 빠졌다. 발자크 루드베스는 흑마법사이면서 마왕을 배신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으로 전설이 되었지만, 멜키스는 오늘 자신이 쌓을 위명이야말로 드높은 전설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이야말로 신화의 중심. 오늘 살아남는다면 그녀는 영원불멸 전설의 대정령사가 될 것이다. 미래영겁 멜키스 엘하이어 이상의 정령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썬더볼트킥!”&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르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끝없이 쏟아져나와 멜키스에게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들은 하우리아 때도 겪어보았다. 막강한 화력을 앞세우는 멜키스에게 있어서 누르는 불꽃에 뛰어드는 불나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불나방도 이만큼 날아들면 결국은 불을 꺼트리기 마련.&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초조함을 느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의 산화가 거슬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라붙은 누르는 불태우거나, 지지거나, 으깨거나,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그 과정에서 흩어지는 마력이 멜키스의 마나를 불사르고 정령과의 공명을 어지럽혔다. 당장이야 버틸 수 있지만, 계속된다면 오메가 포스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독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은 누르가 쏟아내는 마력. 그것들이 독이 되어 퍼지고 있다. 시체가 늘어날수록 독기가 강해질 것이다. 멜키스는 하늘을 힐긋 올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상에서 멀어진다면 독기를 피할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아아아! 태양 근처를 날고 있는 라이미르아와 배틀쉽이 브레스와 포격을 퍼붓는 것이 보였다. 라파엘로가 이끄는 비행병대는 누르를 상대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가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닌 앞이다. 이 흉측한 괴물들을 쏟아내는 모체. 멸망의 마왕. 움직이지 않고 멈춘, 저 뭔지 모를 색의 덩어리를 공격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은 했지만 실현은 쉽지 않다. 세상을 위한다는 달콤한 명분으로 이곳에 왔지만, 진짜로 세상을 멸망시켜 온 마왕에게 직접 덤빈다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도 불굴하여 나아가기 위한 각오를 다지려 할 때. 멜키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빼곡한 누르의 머리 위. 그곳에서 연달아 나타나는 어둠. 암전의 마안의 권능이다. 시엘이 마안을 연속으로 사용하여 멸망의 마왕에게 접근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둠을 건너 이동하는 것은 시엘 뿐만이 아니다. 카르멘을 필두로 한 라이언하트의 정예가 멸망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같이 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비명과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누르를 밟으면서 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선두에 선 카르멘은 가슴을 움켜쥐며 멸망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악에서 태어난 이 피가 정의를 원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멸망을 목전에 둔 모든 라이언하트가 카르멘과 똑같은 두근거림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안에는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라이언하트의 시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헤븐제노사이드에 불꽃이 휘감겼다. 이 일권은 멸망의 마왕에게 결코 치명상은 입힐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제대로 된 공격조차 안 될 수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카르멘은 멸망에게 주먹을 던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엉킨 색의 안까지 울리도록 멸망을 두드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자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룡기사단을 이끌던 알체스터가 당황하여 멸망의 마왕 쪽을 보았다. 카르멘이 내지른 일격은 멸망의 마왕에게 닿고 소멸했지만, 뒤엉킨 색에 아주 조그마한 파장을 만들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광경에 알체스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불길하며 흉악스럽게 강한지를 보았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다. 갑작스레 강림한 멸망의 마왕은 멜키스 엘하이어의 오메가 포스를 즉시 소멸시켰고, 수백 명에 달하는 성직자의 산화에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보라. 지금 카르멘의 일격은 확실하게 멸망의 마왕에게 닿았다. 저 기괴한 색의 얽힘에 아주 작은 파장을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일주일 사이에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보다 더 강해진 것일 수도 있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이 강해지면서, 그에게 서임 받은 성기사들에게도 힘이 전해진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지금’의 멸망의 마왕은 불완전하다. 적어도 일주일 전 강림했을 때보다는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는 어찌하여 그런 것인지를 이해했다. 멸망의 마왕의 안으로 직접 들어간 영웅들. 그들이 분전하고 있기에 멸망의 마왕은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바깥의 공격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불완전해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장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황을 눈치챈 부관이 외쳤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꼽을 때 항상 이름을 올리는 백룡 기사단이지만, 끝없이 쏟아지는 데다가 죽여도 죽여도 주저하지 않는 괴물의 군세를 상대로는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 * *&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씩이나마 전선을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백룡 기사단의 선두에 알체스터가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가 이곳을 이탈한다면 즉시 전황이 바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백룡 기사단 전원이 두려움을 모르는 눈으로 알체스터의 등을 떠밀었다. 알체스터가 제아무리 초인이라 할지라도 줄지 않는 군세에게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다 보면 지치기 마련. 그렇다면 아직 힘이 건재할 때 괴물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멸망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승리를 위한 일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록 그사이에 자기 자신이, 많은 동료가 죽게 될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는 자신에게 향하는 부하들의 눈에서 결사의 각오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룡 기사단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전장의 모두가 결사의 각오를 품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히 빛나는 용사의 이름.&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백 년을 뛰어넘어 환생하고, 기어코 신좌에 오른 남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란 이름과, 300년 전의 영웅담을 듣고 자란 모든 이가 이곳에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먼 과거 자신들을 패배시켰던 유폐의 마왕을 기어코 쓰러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세상 그 누구도 맞서지 못한 멸망의 마왕에게 도전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전장의 모두가 그 신화에 매료되었다. 신화의 완성을 보고 싶고, 완성에 힘을 보태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도 마찬가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 황가를 섬기는 기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기사로서의 삶을 황가를 위해 바치리라고 오래전 맹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갈망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을 만나고, 유진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몇 번이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듣기 전부터 알체스터의 가슴에는 불꽃이 일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젊은 용사에게 검을 바치고 싶다는 열망.&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마왕과 싸우고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열망.&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사가 아닌, 알체스터 드라고닉이란 남자는 언제나 그렇게 갈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야말로 열망에 몸을 불사를 때다. 알체스터는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거대하게 부푼 공검이 누르들의 목을 단번에 양단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검강 아래에서 수십 개의 목과 거무죽죽한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알체스터는 절단한 머리를 밟고서 다시금 앞으로 도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 꼬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힐긋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녀는 피범벅에 너덜거리는 손을 쥐었다 펴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라이언하트에 흐르는 피의 업을 청산하는 곳이다. 외인인 네가 굳이 도울 필요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유진 님에게 직접 검을 가르쳤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는 똑같이 웃으며 화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것은 가르쳤다고 자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가문의 비기인 공검만큼은 저에 의해 유진 님께 이어진 것입니다. 비록 제게 라이언하트의 피는 흐르지 않지만- 유진 님을 위해, 이곳에 서는 것에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아들이 아직 어릴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꼬마라 불렸던 제가 아들을 둘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자랑스러운 아비가 되지 못한다면, 제 아들은 어른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이 뻐근할 정도의 불길함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묵하는 멸망의 마왕은 공격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카르멘의 팔이 너덜거리는 것은, 멸망을 때리면서 역류한 마력에 당한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멸망의 마력은 건재하고, 반발력만으로도 몸을 상하게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 멋을 부릴 때가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언제나처럼 불은 붙이지 않았지만, 흐르는 피에 젖은 시가는 피의 비린 맛과 젖은 담뱃잎의 퀴퀴한 맛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와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개를 돌려 멸망의 마왕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릉! 길레이드와 길포드, 기온이 함께 휘두른 검이 멸망의 색을 깎아냈다. 하지만 일격만으로 둘의 불꽃은 흐트러지고 입에서는 피가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세상을 있게 한 영웅들이 저곳에 계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손을 쥐어 주먹을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도 저곳에 계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을 열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알체스터의 검에서 거대한 공검이 치솟았다. 카르멘은 말없이 자신을 지나쳐서 멸망의 마왕에게 돌진하는 알체스터의 뒷모습을 힐긋 보며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꼬마가 많이 컸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먼 과거, 코흘리개에 목검을 휘두르던 알체스터를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꼬마가 일국의 기사단장이 되고, 아들을 둘 만큼의 시간. 그 시간을 준 영웅들이 저 안에 있다. 먼 과거 그랬듯, 세상에 미래를 주기 위해 싸우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까지 그들에게만 기댈 수는 없다. 카르멘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열망과 결의는 모두가 같은가. 전장을 넘어 이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300년 전 과거의 영웅들이 아닌, 지금 시대를 살던 이들. 후대에 영웅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초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는 입가의 피를 닦으면서 카르멘의 곁으로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순간이었지만, 검이 파고드는 순간에- 피가 끌리는 것을 느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빛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온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고개를 끄덕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시조님과…… 동료들은 절대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또한 그리 바랍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을 고생만 하셨는데, 다들 살아서 행복해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온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피를 토해내는 길포드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째 형님은 행복이 너무 과하셨습니다. 검 한 번 휘두르고 그 모양이시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나는 은퇴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방계로 나가셨다고 해도 한창일 나이에 은퇴라니. 행복에 겨워 검을 게을리하신 핑계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가문을 위해 진즉에 놓은 검을 쥐고 사지에 온 내게 너무 각박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포드는 억울하고 서러워서 토로했다. 카르멘은 휘청거리는 길포드의 등을 철썩 후려치고서 앞으로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떠들 여유가 있다면 다시 백염식을 일으켜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찢어지는 기합과 함께 불꽃과 번개와 폭풍과 지진을 동반한 공격이 멸망의 마왕을 덮쳤다. 카르멘은 거세게 흔들리는 색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의를 위해 도움을 받지만, 저 안에 계시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시조님이시다.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후예 유진 라이언하트도 있다. 또, 그 유진과 사실혼이라 할 수 있는 세냐님과 크리스티나 성녀도 계시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돈어른의 큰 조상님도 계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 모두가 라이언하트의 혈족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먹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전투는 세상을 위한 것도 맞지만, 라이언하트와 혈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300년 동안 고통받으신 시조님을 생각했다. 그분께서 최후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그 순간에 라이언하트가 아닌, 저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의 우짖는 소리를 가장 가까이 들으신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죄스러웠다. 카르멘은 고통을 떨치고서 주먹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울림을 느꼈다. 땅을 뒤흔들 정도로 거세지는 않지만, 유진의 감각은 잔잔한 울림을 확실하게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에는 베르무트인가 싶었다. 심장과 함께 저 괴물의 안에 있는 베르무트가 저항하며, 이곳을 가득 채운 허무가 흔들리는 것일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지나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울림은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밖에서 전해져 온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썩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빠진 몸을 일으키며 욕설을 내뱉었다. 땅을 짚으면서 일어서려고 했는데- 선 순간에 몸이 휘청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단한 이유였다. 왼쪽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잘 피했다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잘 피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유진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통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다리를 살피면서 미간을 찡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 유진 님, 다리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호들갑 떨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하나 남은 다리로 껑충 뛰면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이 잘렸다면 곤란하겠지만, 다리는 사실 괜찮잖아. 내가 발길질하는 것도 아니고, 이동이야 날아다니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냉정하게 판단해서 그렇게 답을 내렸다. 다리가 잘린 것은 지금 전투에서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린 다리는 당장 재생할 수 없지만, 전부 다 끝나고 요양하는 동안에 멀쩡히 재생할 것이다. 다행히 고통도 느껴지지 않고, 피도 흐르지 않는다. 상처를 통해서 마력이 역류하지도 않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다행히도 다리는 아주 깔끔하게 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심은 안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제대로 피해지 못했을 뿐이다. 낮게 날아오른 유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괴물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도끼는 저 지네처럼 많은 팔다리를 몇 개나 썰었다. 등짝에서 휘둘러대는 손은 세냐의 마법이 폭격했다. 유진도 저 거대한 아가리의 이빨을 분쇄하고, 눈알을 터트리고, 얼굴을 난도질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공격을 퍼부어도 몰아붙이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공격할수록 저 색과 마력을 깎아냈지만, 그만큼 이쪽의 힘도 깎여 나갔다. 더 이상 재생력을 과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괴물은 그렇지 않았다. 썰어도, 썰어도 금세 멀쩡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포기하지는 않았다. 공격이 얕기에 재생하는 것이라면 더, 더, 깊고 무겁게 공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에 괴물의 공세가 바뀌었다. 나부끼던 색이 순간 정지했고, 마력은 잔잔하게 가라앉아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발했다. 그것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막 몸을 일으키는 모론을 향해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지는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은 모론치고는 의외의 것이었다. 왼쪽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렸다. 난사되는 마력과 색을 막아내기 위해 왼팔을 내준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는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오른팔을 몇 바퀴 돌려 보이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봤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리 날아갔던 세냐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돌아왔다. 그녀의 몸에 상처는 없었지만, 메리의 꽃잎 중 상당수는 재가 되어 무너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을 새로 짤게. 방금 공격은 더 이상 안 통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막을 수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라. 최대한 해볼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조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대답했다. 유진에게서 뻗어 나온 빛이 세냐에게 연결되었다. 세냐는 보태지는 신력을 받아들이면서 아니스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쉴 시간을 안 주는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대한 신검에 관통된 대가리를 처박고 있던 괴물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리가 잘리기 직전에 꽂아 넣은 신검이 솟구치는 색에 변색 되어서 소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벌어지는 입에서 마력이 끓는다. 등 위에서 흔들리는 수백 개의 손이 일제히 하늘로 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펑, 펑 펑…… 모든 손에서 응축된 마력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이쪽을 향하는 수천, 수만 개의 공격에 세냐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 막을 수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세냐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침묵했다. 아니스도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둘은 저 무자비한 공격을 어떻게 결계를 조합해서 막을지에 대해 잠시간 고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 최대한 피해보는 것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모론은 뿌득 이를 갈면서 앞을 가로막았다. 최악의 사태가 직면한다면 자기 하나로 끝내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보이니까 꺼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욕설을 뱉으며 모론의 옆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음산한 울음과 함께 괴물의 아가리에서 마력과 색이 흘러넘쳤다. 유진은 양손에 신검을 쥐고서 괴물을 노려보았다. 벌써 움직여봤자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에 본능과 직감에 따라 활로를 열겠다고 판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변은 갑자기 일어났다. 괴물의 거체가 돌연 휘청거리더니, 등판의 손들이 붙잡고 있던 마력의 덩어리가 흐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버버버벙! 휘청대고 흐트러졌다고 해서 공격이 시작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수만 개의 공격은 유진 일행을 노리지 않고 엉뚱한 하늘과 다른 곳으로 쏘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황한 세냐가 빽 고함을 질렀다. 무작위로 쏘아댄 것만 같은 공격이지만 워낙 숫자가 많았던지라 일부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그리고 아직 저 아가리에서는 강력한 마력이 들끓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벌어졌던 입이 닫혔다. 터지려던 마력이 역류하면서 오히려 괴물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그 광경에 유진도 놀라서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가 날아갔지만 그 공격은 괴물 자신의 마력. 본래 머리가 있던 곳 바로 옆에 새로이 머리가 튀어나왔다. 카아아아아! 놈은 입을 쩍 벌리면서 처음으로 크게 포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포효에서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방금의 이변은 괴물의 의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두 개의 신검으로 정면으로 오던 색의 방향을 틀어버리면서 씩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0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이곳에서 ‘나’라는 존재를 깨치고 깨어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은 아득히 오랜 시간 동안 광기와 오물이 쌓인 쓰레기통과 다름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대로 무언가가 태어날 수 없는, 허무로 가득 찬 멸망의 뱃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태어난 것은- 정말로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래전. 베르무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태어난 직후의 그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알지도 못했고, 인격이란 것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라는 존재는 멸망의 뱃속에서도 몹시 이질적이었으나, 이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던 멸망의 마왕은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존재를 자각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각할 수가 없었다. 온갖 것이 득실거리는 뱃속. 태어났지만 꿈틀거리지도 못하는 존재는 몸속의 세포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랫동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뱃속에서 웅크렸다. 이곳은 그가 태어난 장소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이곳을 어머니의 자궁이나 요람 같은 안락한 장소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세포라 규정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는 멸망의 마력으로 이뤄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아가 뚜렷해질수록 이곳에서 불편함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누구고, 왜 이곳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어느 순간 그는 저러한 의문들을 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랜 고민 끝에 답을 깨달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곳에 남은 커다란 상처. 기나긴 시간이 흘러도 메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 이 뱃속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갈수록 괴롭기만 했으나, 이상하게도 저 상처만큼은-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곳에서는 안락하고 그립다는 기분마저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처에 대해 자각한 것이 그의 존재를 각성시켰다. 의문 외에 다른 것을 느끼지 않던 그에게 분명한 인격이 깃들었다. 그렇게 자아를 갖추니 하나씩 기억이 스며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저 상처를 만들었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베르무트는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멸망의 상처에서 태어났다. 그라는 존재는 상처를 그은 신검이 일으킨 기적의 산물이지만, 베르무트는 도저히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가 없었다. 기적으로 태어났다고는 해도 베르무트가 멸망의 분신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아를 획득함으로써 깨우친 기억들. 멸망이 살아온 역사.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 베르무트와 멸망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이성의 유무였다. 본성만 남아 세상을 멸망시킬 뿐인 마왕과는 다르게, 베르무트는- 이 끔찍하게 역겨운 뱃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답게 살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라는 존재의 시작이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거슬러 오른 기억의 첫 장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다. 꺼지기 직전에 잦아드는 불씨가 있었다. 간신히 상처를 긋고서 자리에 주저앉아, 절망 대신에 저주를 퍼붓는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죽음과 결국은 멸망해 버릴 세상을 앞에 두고서 남자는 오직 살의만을 품고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욕망에 홀려 배신하고 최후에는 욕망에 잡아먹히며 가증스러운 후회를 남긴 남자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텐데. 돌이킬 수 있다면. 그러한 후회와 함께 휩쓸리고 잡아먹힌 남자의 이름이 바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베르무트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한 기적을 잇기 위해. 추하고 가증스러운 후회를 남기고 죽은 옛 베르무트와 달라지기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주를 남기고 살의를 품고 죽은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느꼈기 때문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음으로부터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베르무트는 아가로트가 이 세상에 환생한 것을 확신했다. 아가로트가 남긴 상처와 기적에서 태어난 베르무트는 운명적으로 아가로트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칙칙하고 축축하고 끈적한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베르무트는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결국은 멸망의 분신이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고, 운명에 개입했기에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용사 흉내를 내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랬어야 모든 것이 원활히 되었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동안 베르무트는 수백 수천 번 저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용사로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멜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설 수밖에 없던 이유를 계속, 계속 생각했다. 나는 강하다. 멸망의 마왕에 대해 알고 있다. 유폐의 마왕과 협상할 수 있다. 멸망의 마왕을 죽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다른 마왕들을 죽이는 것에는 크게 활약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하멜은 약하다. 신성을 각성하지 못했다. 용병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지금의 하멜은 고위마족과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는 용사가 필요하다. 억지로라도 성검을 쥐어서 용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이 희망을 갖게 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가 필요하다. 함께 마왕과 싸울 동료. 하멜을 도울 수 있는 동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내가, 어쩔 수 없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핑계다. 베르무트는 줄곧 외면해온, 자신의 원초적인 욕망들이 무엇인지를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초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용사의 동료가 아닌, 자신이 용사가 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에서 태어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하멜과 함께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미약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나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의 고동이 점점 빨라졌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점점 번지며 별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나를, 그냥 베르무트라고 말해주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하얗게 타오른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탁했던 눈동자에 또렷한 빛이 번득였다. 이곳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금색으로 빛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쿵, 쿵, 쿵. 거대한 울림. 베르무트의 심장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그가 동화된 멸망의 심장의 울림이다. 베르무트는 숨을 몰아쉬면서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 쿵, 쿵, 쿵…….&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의 울림이 점점 더 강해졌다. 불꽃이 밝혀 희미해지는 어둠의 건너편에서 바깥이 보였다. 괴물을 앞에 둔 동료들. 피범벅에 상처투성이이지만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았다. 승산이 희박하단 것을 알 텐데도 절망의 기색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두가, 베르무트가 아는 것이었다. 저 눈빛을 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저런 눈빛을 하고서 사선을 넘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숨을 헐떡거리며 조금 더 앞으로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 쿵, 쿵, 쿵…… 베르무트가 움직일수록 심장의 울림은 강해졌지만, 그와 함께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이 섞였다. 베르무트의 움직임이 괴물과 심장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있어야 할 곳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아니스가, 세냐가, 모론이 말했다. 함께 싸우자고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 어린 성녀는 베르무트에게 직접 기도를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아니스를 빼닮은 어린 성녀의 눈빛이 무엇인지 알았다. 베르무트에게 있어서 그러한 눈빛은 한때 아주 익숙하고 일상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를 보는 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 희망을 품은 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이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뿌득 입술을 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장에 그득한 마력이 베르무트의 불꽃과 반발했다. 불에 탄 마력이 재가 되어 소멸했지만, 불꽃의 희미해지지 않았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분명한 자각은 불꽃을 꺼트리지 않았다. 본래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란 선언이 허무뿐이던 심장의 안에 파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걸음과 함께 나아가던 손이 무언가를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오래된 사슬이었다. 머나먼 옛날에 묶인 사슬.&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멸망과 함께 죽기를 바라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을 통해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질문에 실린 의도는 간파했다. 연속되는 멸망과 운명에 절망해 버린 최초의 용사이자 마왕은 언제나 세상을 시험하고 다시 절망해 왔다. 하지만 지금 유폐의 마왕이 던지는 질문은 절망에 깔린 시험이 아니다. 절망뿐인 영원을 살았던 유폐의 마왕은- 지금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모두와 함께 멸망을 죽이기를 바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사슬을 뽑아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손이 사슬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ㅡ빠드드드득!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혀있던 사슬이 베르무트의 손에 의해 뽑혔다. 길게 뽑혀 나온 사슬이 어둠 속에서 출렁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완전히 뽑아낸 사슬이 꿈틀거리더니 베르무트의 팔을 휘감았다. 베르무트는 당황하지 않고 사슬에 팔을 내주었다. 뚜둑, 뚜두둑. 단단히 감긴 사슬이 팔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이 필요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유페의 마왕의 목소리가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과 동시에 베르무트의 손에서 검이 나타났다. 원초부터 심장을 묶었던 사슬이 베르무트를 위한 검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베르무트가 일으키는 불꽃은 마력과 반발했고, 사슬에서 태어난 검은 심장의 마력에 잡아먹히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손에 감기는 검의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갑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과 싸우기 위해, 죽이기 위해 검을 쥐었던 것이 얼마 만인가? 검을 쥔 것으로 베르무트는 보다 확실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이란 자각은 괴롭고 끔찍했다. 하지만 지금, 마왕을 죽이기 위해 검을 쥔 자신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이 어둠을 갈랐다. 수백 년 전 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휘두를수록 불꽃이 번졌다. 심장은 이제는 고동보다는 삐걱거리는 비명과 같은 소리를 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르! 작게 열린 상처에서 베르무트와 마력이 함께 쏟아졌다. 휩쓸린 격류는 베르무트의 정신을 흔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깊이 침식하려고 들었다. 300년 동안 몇 번이나 찾아온 충동과 광기가 베르무트의 이성을 두드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식하게 두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금색의 눈동자로 어둠의 너머를 노려보았다. 멸망의 심장과는 달리 뛰는 자신의 심장 고동을 들었다. 그곳에서 뿜어지는 피의 뜨거움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리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베르무트의 이성을 보다 또렷하게 붙잡았다. 집요하게 침식하려던 충동과 광기가 역으로 떠밀려서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위대한 베르무트. 격류 속에서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란 이름을 좋아했던 적은 없다. 베르무트도 그 동화책은 읽어보았다. 당연히 누가 쓴 것인지도 눈치챘다. 세냐와 아니스. 그렇기에- 도저히, 그 동화책을, ‘위대한 베르무트’란 이름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었다. 이유를 알려달라 호소하던 동료들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에 돌아와 공작위를 받고, 수많은 후보 중에서 가장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은 여인을 골라서 혼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이 끝나고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평생은 절대로 위대하지 않았다. 사랑 없는 혼인 뒤에는 ‘라이언하트 가문’을 완성하기 위해서만 살았고, 동료들과는 인연을 끊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자신에게 ‘위대한 베르무트’라니. 세냐와 아니스가 어떤 마음으로 동화책을 썼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내심 생각은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틀림없이. 위대한 베르무트라는 이름은 고약한 조롱일 것이다. 진짜 나는 결코 위대하다고 불릴 자가 아니다. 용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생각하지 않았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검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가 결코 그럴 리 없다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한 점의 조롱도 없었다. 동료들이- 부르는 것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뱃속이 아닌 바깥에서. 많은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괴물의 가슴이 갈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낯 뜨겁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쓴웃음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질이라도 온 것처럼 난동을 부리면서 사방을 향해 마력을 쏘아대던 괴물의 거구가 파르르 떨리더니 정지했다. 놈에게 커다란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날뛰어대던 놈이 전원이 뚝 끊어진 것처럼 멈춘 것에 유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숨을 몰아쉬던 모론이 홱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 정지한 괴물에게 공격을 퍼부을지를 묻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일단 그렇게 말했다. 괴물이 정지한 것은 기회. 하지만 상태가 이상하다. 괴물의 상태야 아까부터 이상했고, 지금 유진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의 두근거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푸확! 부른 이름에 호응하듯이 괴물의 배가 갈라졌다. 마력과 색이 피처럼 쏟아졌고, 셀 수 없이 많은 다리가 푸들거리더니 관절이 꺾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쩍 벌린 아가리에서는 비명과 같은 울림이 토해졌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마력과 색은 바닥에 고이거나 퍼지지 않고, 떨어지는 대로 소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재가 되었다. 짙은 마력과 색의 안에는 전혀 다른 불꽃과 빛이 있었다. 내부에서부터 태우는 불꽃과 빛의 중심에 금색이 빛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란 세냐가 이름을 외쳤다. 모론은 이번에는 유진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뛰쳐나갔고, 유진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르릉! 세냐가 쏘아낸 마법이 괴물의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서 폭발했다. 연달아 터진 녹색 불길에 괴물의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모론은 앞을 막은 다리들을 도끼로 쳐냈고, 그렇게 열린 길로 유진이 뛰어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격류 속에서 베르무트의 모습을 보았다.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여태까지 ‘유진’이 보았던 베르무트와는 확연히 달랐다. 환생하고 나서 보았던 베르무트의 눈동자는 언제나 색이 탁했다. 300년이란 시간 동안 광기에 마모되어 빛을 발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지금 베르무트의 눈동자는, 마치 300년 전처럼. 함께 마왕들과 싸울 때처럼. 함께 마경을 가로질렀을 때처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만나서 동료가 되어달라고 말했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베르무트에게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자신에게 향하는 손을 보았다. 300년 전에- 하멜과 처음 만났을 때. 하멜은 결투에 패배해 쓰러졌고, 베르무트는- 약속대로 동료가 되어달라며 손을 뻗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나에게 몇 번이나 손을 뻗어주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약속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베르무트의 손이 유진의 손을 잡았다. 화악! 강하게 당기는 힘에 베르무트의 몸이 격류를 빠져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히죽 웃으며 던지는 질문에 베르무트는 보란 듯이 검을 들어 보였다. 형태는 전혀 달랐지만, 유진은 그 검에서 유폐의 마왕의 사슬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유진은 손을 확 잡아당기며 베르무트의 몸을 뒤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괴물의 배 아래에 남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쩍 갈라진 배의 상처가 보였다. 내부에 장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통해서 심장을 느꼈다. 그것은 아직 저 안에서 불규칙한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유진은 호흡을 삼키며 신화를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아악! 빛의 의지가 유진의 신화에 깃들었다. 유진은 손에 나타난 길쭉한 창을 괴물의 뱃속을 향해 집어 던졌다. 콰지직!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 창이 마력과 색을 가르면서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쪽으로 날아오는 베르무트는 맞이하기 위해 모론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방금까지 괴물의 안에 있었고, 그전부터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으니 일단 부축이라도 해주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중에서 모론과 베르무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으로 모론은 깨달았다. ‘지금’의 베르무트에게 부축 따위는 필요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씩 웃으며 하나 남은 오른손을 끌어 도끼를 들었다. 날아오던 베르무트가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렸다. 베르무트의 양발이 모론의 도끼를 발판으로 삼았다. 후웅! 도끼가 허공을 갈랐고, 베르무트이 몸이 높이 치솟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베르무트는 단숨에 괴물의 머리 위까지 뛰어올랐다. 세냐의 마법에 젖혀지고, 신화의 창에까지 관통된 괴물은 아직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무트는 금색의 안광을 번득이며 오른손의 검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악! 허무를 가로 그은 참격이 괴물의 목을 잘랐다. 마력과 색이 분수처럼 솟구쳤지만, 그것이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베르무트의 검이 연속으로 움직였다. 퍼붓는 참격이 괴물의 머리를 산산조각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뱃속이 꽤 편했나 봐? 아까보다 훨씬 낫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키득키득 웃으며 베르무트의 곁으로 날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싸우자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 뒤에서 구경만 할 수는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흥,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무리하지는 마. 지금의 너는 우리보다 훨씬…….”&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하잖아. 세냐는 그렇게 말하려던 것을 꿀꺽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과 몇 초 전에 베르무트가 괴물의 머리를 썰어버리지 않았나? 아무리 지금 괴물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지만, 저 강인한 몸뚱이를 파괴하기 위해 세냐와 모론이 얼마나 고생했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왜 이리 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레 자식의 폭력은 부모에게 치명적인 법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은 세냐의 상상을 초월했다. 세냐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정신을 잡고서 다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노, 농담으로 말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저것을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은 내가 저것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모론, 세냐의 힘은 멸망의 마력에 상쇄된다.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이쪽의 힘도 빠르게 마모된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공격은 아무런 낭비 없이 멸망의 마력을 가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어디까지나 공격이 잘 들 뿐. 기교면에서는 너희를 따라가기 벅차다. 그리고- 내 손으로 멸망을 끝내는 것도 불가능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 잘린 목의 단면이 부글거리며 끓었다. 몸을 관통했던 창도 소멸했다. 더 이상 괴물의 배에서는 마력과 색이 쏟아지지 않았다. 꺾였던 다리의 관절도 다시 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괴물이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라면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다. 멸망의 심장을 파괴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들의 곁으로 돌아온 유진은 그것을 확신했다. 유진이 가진 ‘승리’의 신성이 괴물을 겨누었다. 승리까지 향하는 길은 쉽지 않겠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승리가 지금은 희미하게나마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글부글 끓던 단면에서 수십 개의 머리가 치솟았다. 괴물은 마치 히드라처럼 수십 개의 머리를 갖고서 입을 쩍 벌렸다. 허무가 쩌렁쩌렁 울리며 마력이 들끓었다. 유진은 피부가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악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렬한 마력의 파장을 정면에서 버티던 유진이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방된 마력이 괴물의 몸을 뒤덮었다. 저것은 더 이상 ‘괴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확실한 멸망이 되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얽히는 색을 보던 유진의 곁으로 베르무트가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은 네가 부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가주지. 지금의 네가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을 온존하라는 뜻이다.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 쿵, 쿵…… 바깥에서의 진동이 허무를 흔들었다. 저쪽에서도 멸망의 마왕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물었다. 베르무트는 잠시 눈을 감고 진동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함께 돌아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툭. 유진은 베르무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서 신검을 들었다. 베르무트는 짧게 어깨를 떨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개의 머리가 이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즉시 쏘아진 마력과 색이 정면을 뒤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기도를 외웠다. 세냐가 메리를 뻗으며 마법을 펼쳤다. 콰르르릉! 기적이 더해진 결계가 멸망의 포격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전해지는 부담은 가볍지 않았다. 세냐는 울컥 치솟는 피를 입술을 씹으며 삼켜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막을 수는 없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에서 현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멸망의 마왕이란 이름처럼 저 힘은 세상을 손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 아무리 세냐가 마법의 신좌에 앉았어도, 저러한 공격을 몇 번이나 막을 수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억지로라도 막아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의 숨통을 끊는 것은 용사다. 세냐는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용사의 검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를 위해서 벼려낸 검이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자의 속삭임과 함께 메리가 빛을 발했다. 시들고 저물었던 넝쿨과 꽃잎이 다시금 펼쳐졌다. 세냐는 메리에게서 전해지는 힘을 느끼고서 움찔 놀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에 넘기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필요한 순간에 건네야만 의미가 있는 것. 약속이나 하거라, 후배여. 나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너와…… 아가로트가 멸망을 끝내는 것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자, 비슈르 라비올라는 멸망에서 세상을 이어가고자 세계수가 되었다. 세계수로서 평생을 바랐던 것이 멸망의 끝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아가로트를 믿는다. 마법의 총아인 너를 믿는다. 너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을 믿는다. 그러니…… 내가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 믿고서 잠들도록 하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을 바라온 것을 직접 보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현자는 자신이 눈을 뜨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양손에 쥔 메리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세계수에서 전해진 생명력이 메리에 가득 담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자식들이 당신을 맞이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앙! 메리가 빛을 뿜었다. 결계를 열고서 쏘아낸 빛이 마력과 색을 소멸시키고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마력과 색을 뿜어대던 멸망의 머리 수십 개가 빛에 휩쓸려 소멸했다. 세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억지로 발을 앞으로 뻗었다. 아직은 쓰러지기에 이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서 뿜어진 빛. 하지만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냐와 세계수가 열은 길이다. 유진은 먼저 그 길로 몸을 날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것은 옛 이름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라지지 않은 빛의 길에서 숲을 느꼈다.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세계수의 정령들이 유진의 등을 밀었고, 앞에서는 누군가가 유진의 손을 잡아 끌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녕, 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희미하게 사라져가는 현자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 유진을 보았을 때와 같은 쓸쓸한 미소는 짓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가로트라는 남자를 잊지 못했지만, 더 이상 아가로트에게 미련을 갖지 않았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미련보다 미래에 바라는 것이 컸다. 그녀가 바라는 미래에 쓸쓸한 미소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자, 비슈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진도 똑같이 웃어주었다. 그 미소와 인사에 비슈르는 만족했다. 아하하하…… 멀어지는 미소에 심장이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 앞에서 똑같은 것을 바라며 다른 선택을 하였던 빛은 먼저 잠든 오랜 벗의 이름을 불렀다. 추모는 하지 않았다. 긴 세월, 잠이 들었을 뿐이다. 과거의 신들이 보지 못했던 미래. 그런 미래가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울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마, 아니, 반드시. 유진은 우주를 붙잡으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이 마지막 이그니션일 것이다. 내가 죽던가, 멸망을 죽이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개의 머리를 잃은 멸망이 휘청거리면서 팔다리를 휘둘렀다. 모론이 괴성을 지르며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는 세냐와 유진 쪽으로 날아들던 공격이 모론의 도끼가 잘려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그니션의 발동. 폭주가 궤도에 오르고 폭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 그 시간 동안 공격을 쳐내 주는 것은 베르무트와 모론에게는 익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두근.&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바깥에서 전해지는 울림과, 멸망의 심장에서 울리는 것과는 다른 울림. 어떤 형태로든 간의 끝을 결정하는 울림.&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에게 막대한 부담을 주는 대신에 싸움을 끝내는 필살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결국 몸을 망가트리기에, 베르무트는- 저 이그니션이라는 기술을 도저히 좋아할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하멜은, 이그니션을 쓰고서 패배한 적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위 마족이나 마왕과의 전투에서 항상 이그니션을 쓰고서 승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코 이길 수 없는 격차가 있던 가비드를 물러서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뚱이로도 이그니션을 사용해 유폐의 방패를, 유폐의 지팡이를 죽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록 최후에는 하멜 자신마저 죽어버렸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안 죽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유진은 죽을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곁에 있는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 불꽃은 백염식에서 태어났지만 이젠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선명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저 불꽃이야말로 아가로트의, 하멜 다이너스의,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를 증명하는 신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끼며 베르무트는 유진을 쳐다보았다.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던 안광으로 멸망을 노려보던 유진은, 옆에서 향한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새끼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히죽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질문에 베르무트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베르무트는 오래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서 짧게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 말이 네게 그리도 상처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래 때린 새끼는 잘 기억 못 해. 맞은 놈만 아파서 오래 기억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널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말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하멜은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이죽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위해서는, 씨X. 대뜸 와서 뒤통수 뻑 때리고서, 잘 좀 하자 새끼야, 이런 건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는 그런 식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유진이 눈을 깜빡거릴 차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히. 당시에 저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몹시, 몹시 엿같았지만- 저 말을 들었기에 머리에 피가 올라서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이 온당 베르무트 덕분인가? 대뜸 뒤통수를 처맞았는데 주저앉기는커녕, 저 새끼 언젠가 조지고 만다, 라고 결심한 그때의 하멜이 잘한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저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추해질 뿐이란 것을 유진은 잘 알았다. 그래서 유진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멸망을 노려보았다. 그 결의에 찬 옆얼굴을 보던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동료들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모론의 어깨를 툭 치고서 앞으로 나갔다. 그는 유진을 힐긋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너는 내가 훨씬 먼저 가도 즉시 따라올 수 있을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도 그 말에 껄껄 웃었다. 흉악스러운 마력을 내뿜는 멸망의 앞에서 셋은 함께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땅을 박찼다. 앞으로 달려나간 모론이 도끼를 옆으로 눕혔다. 멸망의 팔과 마력은 즉시 모론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도끼를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던 세냐가 마법을 쏘았기 때문이다. 굵은 빛줄기가 마력과 팔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덕분에 모론은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서 멸망의 몸뚱이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 그곳에서 휘두른 도끼는 마치 거목을 일격에 베어내는 것처럼 멸망의 굵은 다리를 잘랐다. 나부끼는 마력과 색 속에서 모론이 몸을 팽그르르 돌렸다. 연이어 휘두른 도끼는 연거푸 멸망의 다리를 잘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도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서 멸망의 머리들까지 도달했다. 지금 베르무트의 검은 반발 없이 멸망의 목을 베어낼 수 있지만, 수십, 수백 번 베어낸들 멸망은 죽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해진 심장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생각한 것은 유진도 똑같이 생각했다. 하지만 노린다고 해서 꿰뚫어 부술 수 있는 것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도 그랬다. 신화를 벼려 만든 창은 멸망의 몸을 완벽하게 관통했지만, 심장에는 닿지 못했다. 베르무트가 찢고 나오면서 약해졌다고는 해도, 저 불길하며 흉맹한 마력은 포기하지 않고 심장을 보호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해서 베는 수뿐이다. 두꺼운 마력을 계속해서 베어가면서, 감춰진 심장에 신검을 처박아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지않았다. 유진이 간절히 바라는 ‘승리’가 직감했다. 베르무트가 나온 것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심장이 가까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지않은 것은 멸망의 마왕뿐만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멸망의 뱃속. 장기전을 벌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단순히 붙잡아 버티는 것이라면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겠지만, ‘죽일 생각’으로 덤비는 이상 신력의 소모도 빠르다. 당장 등 뒤의 세냐는 이미 한계다. 쓰러지고 싶은 몸을 억지로 붙잡으며 마법을 쏘아대고 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숨을 헐떡거리며 내뱉었다. 눈앞이 어지럽고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난다. 속은 텅 빈 것만 같다. 메리를 잡은 손에도 감각이 안 느껴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메리가 무겁다. 마법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무겁다고 느끼는 것은 정말로 위험하다는 것. 하지만 세냐는 멈추지 않았다. 지팡이의 무게야 300년 전에도 몇 번이나 느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 살아온 평생 중 최악인가? 아니다.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억지로 메리를 움직였다. 더 이상 현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세계수에서 전해지는 영력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누아르에게 받은 마력도, 세냐 자신의 마나도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최악은 아니다. 세냐는 다시 생각했다. 지금은 결코 궁지가 아니다. 넘을 수 있는 시련이다. 보라, 힘은 고갈되고 육체는 더디고 무겁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은 맑다. 사고가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어느새 머리의 어지러움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르르릉! 세냐가 쏘아낸 마법이 멸망보다 높은 곳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멸망의 등에서 수천 개의 팔이 치솟아 마법의 폭우에 저항했지만, 스며든 마법은 멸망의 몸에서 연거푸 폭발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쿨럭. 세냐는 피를 토하며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앞을 보았다. 눈이 조금 더 흐릿해졌다. 하지만 뭉개지고 흔들리는데도 여전히 불꽃은 선명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 가까이 오려는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느꼈기에, 세냐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치료하려 해도 할 수 있는 종류의 부상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게다가 여력이 없는 것은 성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지금 유진이 폭주시킨 신력을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보고, 돕고 싶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쓰러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은 격렬한 불꽃이 보였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것을 밝힐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유진은 베르무트와 모론보다 늦게 움직였지만, 그는 이미 베르무트와 같은 곳에 서서 멸망의 머리를 베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과 불꽃이 어우러지는 것을 보았다. 베르무트가 먼저 베고, 유진이 그렇게 열린 길에 신화를 처박았다. 때로는 유진이 먼저 베고, 베르무트가 그 뒤를 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저 모습들을 너무나도 잘 안다. 언제나, 그녀는 저 등을 보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유진과 베르무트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부터 항상 그랬지 않나.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적. 설령 그것이 마왕일지라도, ‘하멜’과 ‘베르무트’가 함께 싸운다면 이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세냐의 신성은 승리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유진만큼이나 승리를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남은 마력을 모조리 긁어서 메리에 집중시켰다. 지금 전투에서 쓸 수 있는 마지막 마법. 세냐는 앞으로 들었던 메리를 위로 높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무릎을 꿇으면서 메리를 내렸다. 토옥. 메리가 허무로 가득 찬 지면에 똑바로 섰다. 지팡이를 휘감은 넝쿨들이 아래로 쏟아지고 꽃잎이 낙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태어났다. 생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풀과 꽃, 나무가 세냐를 중심으로 치솟았다. 허무만 존재하는 멸망의 뱃속에 숲이 태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의 여신, 세냐 메르데인이라도 절대로 펼칠 수 없을 마법. 그렇지만 오직 그녀만이 가능한 ‘기적’이 멸망의 뱃속을, 불길한 색이 아닌 생명의 색으로 물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희미하지만 분명한 의지가 목소리가 되어 마법을 시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아악! 셀 수 없이 많은 봉오리와 나무의 꽃이 만개했다. 가득 찬 향기를 느끼며 세냐는 흐릿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우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득한 생명 속에서 멸망의 모든 다리가 꺾였다. 주저앉는 멸망에게 물러서던 모론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이 마법은 세냐가 일으킨 기적이다. 모든 꽃과 풀과 나무가 멸망의 마력을 삼키고서 시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이 마지막 마법이다. 세냐는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고, 싸울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족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툴툴 웃으며 중얼거렸다. 끝이 머지않은 것은 모론도 마찬가지다. 잘린 팔이 문제가 아니다. 맹독이나 다름없는 멸망의 마력에 최선두에서 노출된 것이 모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선을 다했다. 필사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 싸웠는가? 떠오르는 의문, 모론은 껄껄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처를 가르고 심부까지의 길을 열었다. 그것뿐이다. 심장은 직접 파괴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멸망의 팔다리를 잘랐지만, 그것도 대단한 전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위에서 하멜과 베르무트가 함께 싸우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들과 함께 싸운 전투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언제나 선두에 선다. 할 수 있다면 직접 공격을 해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모론이 맡은 역할은 공격을 ‘받는’ 것이다. 모론이 공격을 받아내기에 하멜과 베르무트는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적’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 하멜과 베르무트가 편하게 벨 수 있게 돕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이해했다. 모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도끼를 들었다. 꽈지직! 주저앉은 멸망의 다리가 썩둑 잘렸다. 이전이라면 즉시 재생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재생조차 더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모론은 하기로 한 일을 강행할 수 있었다. 남은 힘.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격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뿌드득. 가득 쏠려서 집중된 힘에 모론의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고 부들거리며 떨렸다. 빠직! 그 힘은 손에 쥔 도끼마저 으스러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부수고 끊어내는 도끼가 아니다. 그러한 의지에 도끼를 이룬 신화가 호응했다. 화신으로서 끌어낸 신력이 모론의 몸을 뒤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 모론의 발이 땅을 찍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멸망의 머리를 자르는 유진과 베르무트와 눈이 마주쳤다. 모론은 둘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당장은 하나뿐인 팔. 멀쩡히 둘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이리된 이상 어쩔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기울어진 멸망에게 다가가며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두두둑…… 굽혀진 손가락이 멸망의 몸을 잡았다. 거대해도 너무 거대한 멸망의 몸뚱이에서 모론이 잡은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잡은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힘’은 멸망 전체를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드드득……! 꽉 다문 이빨이 박살 났다. 모론의 눈과 코, 귀,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하지만 모론은 멈추지 않았다. 주저앉았던 수많은 다리는 억지로 끌어내리는 힘으로 산산조각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우웅! 모론의 손이 멸망의 몸을 기어코 땅에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루하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진 힘을 모조리 쏟았다. 아니, 쏟은 힘 이상의 ‘힘’을 일으켰다. 이 또한 기적인가. 모론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보아야 할 것은 위가 아니다. 모론은 그것을 느끼고서,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이 기적은- 오직 유진의 신성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투에서- 먼저 쓰러질 수는 없는 역할을 맡았다. 동료들을 위해서,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승리를 위해서, 모론은 항상 피범벅이 되어서라도 서 있어야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억지로 버틸 때마다 하멜이 다가와 ‘등신’이라고 불렀다. 억지로 선 모론을 뒤편에 던져버리고,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하멜처럼 험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베르무트가 그래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마경에서 돌아온 뒤에는 절대로 쓰러질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본래부터 있는 것이 적었던 혹독한 설원은 전쟁의 여파로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모론은 족장이자 영웅으로서 부족을, 설원을 재건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왕이 되었다. 자신을 추앙하는 모든 백성을 위해서라도 힘들다고 하여 쓰러질 수가 없었고, 레헤인야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쓰러져도 괜찮을 것이다. 모론 혼자만 모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꿇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쓰러지고, 모론이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 두 성녀는 유진의 날개로서 저 모든 것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들이 쓰러지는 것. 성녀의 역할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막는 것이지만, 지금 이 전투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둘은 철저하게 유진의 힘을 보좌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스터, 유진 님, 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목소리는 헐떡이는 호흡이 가득했다. 동시에 울먹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유진의 등을 밀어주면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이 성전이, 모두의 승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목소리도 똑같았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티나를 한 손으로 받쳐 안고, 다른 한 손은 베르무트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리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기 다른 읊조림. 하지만 기원하는 것마저 다르지 않다. 성녀들은 승리를 바라는 세상의 기도를 들었다. 경배 가득한 찬송을 들었다. 불꽃이 더욱 타올랐다. 그곳에 빛이 있었다. 유진의 시선이 베르무트에게 향했다. 베르무트도 똑같이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리가 부서진 멸망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지만, 등 위의 수많은 팔과 머리들이 일제히 유진과 베르무트를 공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을 밀어주는 따스한 빛. 저토록 격렬하게 타오르는데도 따스하게 연결되었다. 과거 성검을 쥐었을 때에 억누르던 격통과는 전혀 다르다. 베르무트는, 충만한 신성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다고 느꼈던 힘. 도저히 쫓을 수 없던 움직임은 어느새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과거 수없이 합을 맞추었을 때처럼, 둘의 검은 막히는 일 없이 공격을 베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이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 된 성녀들의 목소리가 베르무트에게 속삭였다.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뱃속에서 보았던 빛. 휩쓰는 격류에서도 ‘나’를 잊지 않게 해주었던 목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나본 적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도 ‘알고 있다’. 저들은 베르무트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이다. 오직 하멜만을 위해 만들었던 가문이, 라이언하트가, 유진과 베르무트의 이름을 함께 외치고 있다. 수백 년이 흘렀는데도 변질되지 않은 특성. 잿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그리고,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쪽 가슴의 사자 문양.&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양팔을 휘두르는 여인이 보였다. 악을 쓰며 검을 휘두르는 남자와,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이 보였다. 마안을 심어준 후손은 충혈된 눈으로 피눈물을 흘렸고, 그 옆의 오라비는 누이를 부축하며 젊은 기사들을 이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눈길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배제했던 방계.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방계조차도 지금은 시조의 이름을 외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키옐의 문양을 새긴 남자가 거대한 검강을 휘둘렀다. 그 외에도 다른 왕국의 문양들, 용병단의 깃발도 보였다. 기사와 전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 우클라스산에서 본보기 삼아 학살했던 대수림의 원주민들. 그들의 젊은 대족장은 수많은 시체를 뒤로하고서 멸망의 앞에 서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 있어야 할 마법사들마저 겁 없이 선두에서 싸우고 있다. 멸망의 색에 뒤덮이면서 비명을 지르지만, 대정령사는 계속해서 멸망을 향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붉은 로브의 대마법사는 더 이상 부릴 소환수가 남지 않았음에도 물러서기는커녕 다른 색의 마법사들을 이끈다. 하늘에서는 아직 장성하지 않은 어린 드래곤이 마법사와 성직자들을 태우고서 브레스를 뿜어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 모두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누르는 세상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있다. 멸망을 막겠다는 대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군대가 누르의 앞을 막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조금 더 먼 곳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에게 홀로 맡겨두었던 세상의 끝. 그 새하얀 산은 지금 붉게 물들어 있다. 멸망의 마왕이 강림한 곳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군대. 그곳에서도 누르는 똑같이 쏟아져 나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르는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눈이 붉게 물들 만큼 수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모론의 후예는 절망하지 않고 군대를 이끈다. 눈 가득한 대지보다는 바다에 어울릴 법한 그을린 피부의 기사와 용병들도 똑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 당신의 후예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 세상은 멸망해야 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죽었을 것이고, 유폐의 마왕은 다음으로 넘어가 텅 빈 세상에서 새로이 시작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세상이 멸망하지 않은 것은,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바쳐 멸망의 마왕을 다시 봉인했기 때문이다. 300년 전에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기에, 그때 유예를 얻었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뇨, 베르무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예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고개를 들어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아니스와 닮은 젊은 성녀는, 300년이 지나고 태어난 후대의 대표로서 베르무트에게 기도를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 당신께서는, 세상의 미래를 여신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세상의 모든 것은 베르무트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은…… 너희는, 나를, 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닦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로 여겨주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쩍 벌어진 수십 개의 아가리가 보였다.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에게서 받은 사슬의 검을 먼저 휘둘렀다. 그 검으로 모든 머리를 베어낸 뒤에, 베르무트는 검을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다시 검을 쥐었다. 새로이 쥔 검은 유폐의 마왕에게서 받은 검이 아니었다. 끊이질 않는 연호. 부드럽게 등을 밀어주는 빛과, 베르무트 자신의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 빛, 그 모든 것이 검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세상을 구하고 미래를 연 용사의 검이 길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연 길의 끝에서, 베르무트의 손이 유진의 등을 밀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네 차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을 밀어주는 손을 느꼈다. 천천히 앞으로 밀려 나가던 유진은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쓰러지지 않게끔 날개가 되어서 받쳐주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오르는 불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베르무트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멸망을 붙들고 쓰러진 모론은 저 아래에 있었지만, 유진은 등 뒤에 모론이 있음을 느꼈다. 멀리서 주저앉은 세냐도 느낄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 있는 모두를 생각하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재앙 그 자체인 멸망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느꼈다.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 의지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네 차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미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들은 순간에 이해했다. 300년 전에 베르무트가 세상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유진의 차례일 뿐이다.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차례를 넘겨주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는 멸망에게 상처를 내고 죽었다. 아가로트가 멸망을 붙들었기에 현자는 세계수가 되었고, 거신과 고신들은 빛이 되었다. 그렇게 여태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시작되었다. 상처에서 베르무트가 태어났고, 동료들을 모았다. 결국 패배했지만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이란 시간은 의미가 없지 않았다. 세상은 멸망을 막기 위해 하나로 모일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차례’가 유진에게 이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더 이상 뒤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등을 미는 수많은 손을 느꼈다. 더 이상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기도는 이미 거대한 의지가 되어 유진의 안을 가득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를 든 멸망이 유진을 보았다. 그토록 베어냈음에도 놈에게는 아직 수십 개의 머리가 있었고, 등에는 수백 개의 팔이 있었다. 촤라라락! 수백 개의 팔이 유진을 향해 튀어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동자가 금색의 빛을 발했다. 허우적거리는 수백 개의 팔에는 그 하나하나가 존재를 멸망시키기에 충분한 힘이 실려 있었다. 멸망이 세상의 의지를 이끄는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으며 신검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과거 아가로트는 멸망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300년 전의 하멜은 멀리서 본 멸망에게 절망을 느꼈다. 불과 일주일 전의 유진은 멸망에게 공포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못 막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과거일 뿐이다. 아가로트도, 하멜도, 유진도. 심지어 멸망조차도. 그때 사라지지 않고 지금에 도달했다. 몇 번이나 시대를 삼켜왔던 멸망은 지금만큼은 삼킬 수 없다. 유진은 그를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그러한 절대와 확신이 신화를 더욱 불살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한 번의 참격이 팔의 절반을 불태웠다. 멸망은 비명과 같은 울음을 토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놈의 본능은 물러서기를 원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쓰러진 세냐가 남긴 마법이 멸망이 다리를 일으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쓰러진 모론이 뻗은 손이 아직 멸망을 붙들고 있다. 바깥, 멸망의 본신을 두드리는 울림이 심부를 쿵쿵 울렸다. 모든 기도가 일으킨 거대한 의지가 멸망을 멸망이 아니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신검을 양손으로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으로 폭주시킨 우주는 유진 자신에게 막대한 부담을 준다.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폭주시킬 것이다. 유진에게는 그럴 각오와 의지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아직 남은 멸망의 손이 다시금 유진을 향해 움직였지만, 다시 휘두른 신검의 불길에 모든 손이 불타서 재가 되었다. 그 순간에 수십 개의 머리가 입을 쩍 벌렸다. 유진의 다리를, 모론의 팔을 사라지게 한 그 공격.&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을 막아줄 세냐는 쓰러졌다. 하지만 세냐의 의지는 확실하게 유진에게 깃들어 있다. 뿜어진 빛은 유진에게 가까이 도달하지도 못하고 결계에 가로막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는 아무것도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에게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러한 의지가 결속되어 신념이 된다. 거짓으로 점철된 존재로 태어났던 망령조차도 신념을 갖고 죽었다. 몇 번이나 세계를 넘어온 유폐의 마왕에게도 신념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에게 그러한 신념이 있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괴물. 놈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에는 자기 나름의 신념조차 없다. 그냥 세상이 있으니까 멸망시킬 뿐이고, 멸망하지 못해서 계속 멸망을 반복할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네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에게 태어난 베르무트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멸망의 마왕은 그런 베르무트를 완전히 삼켜내지도 못했다. 각오도, 의지도 없는. 배가 고프니 무언가를 집어먹는 것 정도의 단순하고 뻔한 본능만을 가졌을 뿐인 괴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에 유진은 놈의 본질을 이해했다. 저것은 ‘멸망의 마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추하기 짝이 없는 질투와 편협한 욕망에서 태어난 괴물이다. 최초에는 마왕이 되고자 했을지 몰라도,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힘에 잡아먹힌 괴물. 세계가 반복되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진 우연한 재앙이 바로 저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언제나 실패만 해왔다. 욕망대로 마왕이 되려고 했으나 마왕이 되지 못했다. 굶주림에 홀려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갈라져 나온 베르무트를 되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지금. 놈은 바로 앞에 있는 유진을 죽이려고 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마저도 실패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검을 높이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로 한정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지금 유진이 쥔 신검은 오직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저것 앞에 스러진, 스러지지 않고 버틴, 지금 이 순간에 멸망을 부정하는 모든 의지가 검에 깃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개의 머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발악하기 위해 모든 머리를 하나로 합쳤다. 세상을 한입에 삼켜 버릴 것만 같은 아가리는 시커먼 심연처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유진에게는 저 시커먼 심연이 엷은 것을 넘어 투명하게 보였다. 저 거대한 아가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 무엇도 삼킬 수 없는 허세로 느껴졌다. 끝없이 깊을 심연조차도 지금의 유진에게는 도랑보다 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에 비해 유진이 쥔 검은 신검은 어떤가. 이것은 세상 전부를 밝힐 만큼 환하고 태양만큼이나 크다. 저것은 절대로 이 신검을 막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확신했고, 그것을 결정하고자 신검을 내리 베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대한 머리가 허무하게 갈라졌다. 그렇게 베었지만 신검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잘린 머리가 마력과 색이 되어 무너지고 사방에 흩날렸다. 유진은 신검과 함께 몸을 기울여 앞으로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속삭였다. 화아악! 사라지는 날개 속에서 아니스가 유진의 등을 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부터 언제나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았던 단어가 바로 구원이다. 한때 빛을 원망하고 자기 존재를 경멸하던 아니스는, 마경에 향함으로서 비로소 성녀가 되어 구원을 바라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 아니스가 보았던 그 어느 순간보다 구원이 가까웠다. 아니스는 멀어지는 유진의 등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의 마지막에 유진의 곁에 남은 것은, 순수하게 유진에 의해 존재의 구원을 얻은 크리스티나였다. 하지만 그녀도 더 이상 버티는 것은 힘들었다. 그것이 슬퍼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이후 어떤 일이 결정될지를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성녀로서 그것을 기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나, 언제나…… 승리해 온 자신의 신에게. 성녀란 운명에 귀속되어야 할 그녀에게 미래를 주었듯, 용사는, 신은, 세상에게도 미래를 줄 것이다. 그것을 믿고서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등을 밀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날개는 없지만 추락하지는 않았다. 나부끼는 마력과 색의 사이에서 유진은 바람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것을 잃은 괴물은 더 이상 머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추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만이 움찔거리고 있을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거대한 몸에서 어디를 베어야 하는지 알았다. 아직까지 멎지 않고 간헐적으로 두근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심장. 그토록 망가졌음에도 심장은 계속해서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찮다. 신념도 목적도 없이 살아 있으려고만 하는 심장을 왜 그토록 두렵다고 여겼을까. 왜 저것을 볼 때마다 불길하다고 생각하며 광기에 몸서리쳤을까. 유진은 피식 웃으며 신검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로 내리그은 신검이 마력과 색을 양단했다. 움찔거리던 괴물의 육체는 조금도 신검에 저항하지 못했다. 심장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가 먼저 심장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이 품고 있던 마력과 색을 모조리 내뿜었지만, 무엇 하나 불꽃을 뚫고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겹겹이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마력과 색이 소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신검이 심장을 갈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아아악! 갈라진 순간에 불꽃이 크게 일어났다. 유진은 물러서지 않고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끝을 확실하게 보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울리지도 않는 ‘멸망의 마왕’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재앙이 소멸해갔다. 심장이 재가 되면서 거대한 몸뚱이도 함께 재가 되었다. 유진은 그 중심에서 모든 것을 관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근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비명 같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쿵, 쿵, 쿵, 하는 소리. 바깥에서 이곳까지 전해지도록 두드리는 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두커니 서서 멸망의 소멸을 지켜보던 유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볼 것은 없었다. 이것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단말마도 없고 유언도 없다. 허무뿐인 놈의 최후는 마찬가지로 허무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야만 했다. 놈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허무’가 아니었던 부분은 더 이상 놈에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흩어지는 불꽃에서 나온 유진은,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론을 먼저 부축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크리스티나도 일으켜 세워 어깨에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들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어볼 것도 없는 말이지만, 유진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론도, 크리스티나도, 그녀의 안에 깃든 아니스도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기절해 버렸으니 나가고 나서 모양이 안 살겠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뻗었다. 멀찍이서 정신을 잃고 있던 세냐가 유진 쪽으로 옮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모든 동료를 챙긴 뒤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을 잃지 않은 베르무트에게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심장은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그것으로 멸망의 마왕은 ‘죽었다’. 아직 바깥의 본신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없이 쏟아져 나오던 누르와 함께 소멸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오래지 않아…… 똑같이 소멸할 것을 느꼈다. 불에 타서 재가 된 멸망의 심장은, 결국에는 베르무트의 심장이기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끝. 하지만 베르무트는 만족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멸망의 마왕을 죽였다. 반복되는 멸망을 끝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죽는 것을 바랐다. 이것 이상으로 기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동료들과 함께 싸울 수 있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 살았던 삶에 의미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이 알려주었다. 스스로 용사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정작 모두가 그를 용사로 여겨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와…… 모두가 있었기에, 나는…… 나는, 최후에 인간으로…… 용사로 죽을 수 있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베르무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부축하고 있던 모론을 조심스레 눕히고, 연이어 세냐와 크리스티나도 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과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내게는 더 이상 시간이 남지 않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말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너를 구하겠다고 말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이뤄졌다. 나는, 모두에게 구원받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도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이상의 행복이 있을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씁쓸히 웃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바라는 모든 것을 이뤘다. 너희와 함께 싸울 수 있었고,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렸다. 세상에게도 내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런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으면 무슨 소용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베르무트의 앞에 털썩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구구궁…… 허무가 뒤흔들리고 있다. 멸망의 마왕이 죽었기에 이 공간마저 사라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것은 무시하고 베르무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 끝났다고 유언 따위는 지껄이지 마. 우리는,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언제나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마운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불가능하다. 베르무트는 천천히 재가 되어가는 몸을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으면 무슨 소용이라……. 그래. 한 번 죽었고, 많은 미련을 두었던 네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그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짓궂은 질문을 하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너지는 허무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련이 없을 수는…… 없지. 초연하고 싶어도 결국에는 미련이 남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로 인해 존재했다는 세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해버리는 것만으로도 미련이 강해진다. 결국 동료들과 함께 가지 못한다는 것이 미련이 되어 사무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들을 직접 듣고 싶다.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읊조린 말들에 유진의 뺨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슬픔을 떨치기 위해 억지로 짓는 미소일까. 저 짓궂은 재촉마저 하멜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마지막 순간까지 저럴 필요가 있나? 순간 베르무트는 진심으로 그런 의문을 느꼈다. 최소한 베르무트는, 하멜이 죽는 순간에 슬퍼해 주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 우리가 마경에서 떠들던…… ‘나중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고 싶다. 평화로이 여행을 다니는 것도, 설원의 온천에 가보는 것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말해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는 씩 웃더니 불쑥 손을 뻗어 베르무트의 오른손을 거머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은 베르무트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베르무트는 흠칫 놀라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새 그 손에는 낡은 사슬이 쥐어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약이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네게 물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거리는 사슬 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멸망과 함께 죽기를 바라느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유폐의 마왕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유진과 동료들에게 패배하고, 며칠 동안이나 멸망을 붙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로 인해 유폐의 마왕은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유폐의 마왕에게는 그런 기색이 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스스로 걸었다. 등 뒤에 사슬의 망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이 손에는 하나의 사슬이 쥐어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모두와 함께 멸망을 죽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유폐의 마왕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사슬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그 사슬은 베르무트가 손에 쥔 사슬과 연결되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검, 이라고 대답했고, 나는 검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육체에 심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육체는 멸망과 함께 죽었고, 소멸해 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 그러하듯 마왕은 바람을 이뤄주지. 대가를 바친다면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이 바라는 대가는 오직 하나. 영혼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신으로 태어난 네 육체는 멸망의 마왕과 함께 죽는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던 용사는. 네가 ‘다르다’고 결정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혼은- 계약의 대가로, 나, 유폐의 마왕이 갖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계약은 베르무트의 의지에 달렸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멸망의 분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면. 멸망의 마왕과 함께 죽는 것을 바랐다면. 그랬더라면 베르무트의 혼은 완전하게 독립되지 못했을 것이고, 계약의 사슬은 결코 베르무트의 혼을 묶지 않았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계약의 사슬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이 아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영혼과 묶여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지 않다면 살아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재가 되는 베르무트의 가슴을 툭 밀면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돌아가기로 했잖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혼을 단단히 묶은 사슬을 느꼈다. 이윽고 베르무트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으로 태어난 육체는 멸망의 마왕과 함께 소멸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 영혼은멸망의 분신이 아니게 되었다. 본래라면 육체와 함께 소멸을 맞이해야겠지만, ‘계약’으로 인해 영혼이 사슬에 묶여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 이것을 노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널 죽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간절히 바라면 무언가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을 안배했던 것은 아니다. 유진은 베르무트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고, 전투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그 간절한 바람이라는 것이 방법을 만든 거다. 내가 바랐고, 네가 바랐고…… 모두가 바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돌려 머나먼 저편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가 말하는 ‘모두’는 멸망의 마왕에 맞서는 모두였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을 잊지 않는 이들. 그를 줄곧 용사라고 여기던 이들. 멍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 기적이라. 베르무트는 내뱉은 단어를 되뇌며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게 있어서 ‘기적’이란 언제나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라는 존재를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듭된 실패와 300년의 고독은- 그 ‘기적’이라는 말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베르무트는 기적을 희망이나 구원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바란들, 정작 자신은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가까운 곳에 서서 베르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네 권속으로 살게 되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왕과 계약을 맺고, 영혼을 건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베르무트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마왕이 해방할 때까지 영혼이 박제될 수도 있고, 마왕의 격에 따라서 권속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된 영혼에 자유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나는 널 권속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줄곧.”&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너지는 허무의 하늘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줄곧, 무엇을 바랐는지. 그것은 베르무트, 네가 잘 알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몇 번이나 절망하여 마모될 대로 마모된 유폐의 마왕조차도, 지금 이 순간 몰려오는 감정은 버겁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절하게 바라왔기에. 그렇게 바라면서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잠시 침묵하며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이 세상에서, 멸망의 마왕과 유폐의 마왕은 죽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젠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젠가 멸망의 마왕이 죽을 것을 기대하며 살았다. 그것을 바라며 세상을 몇 번이나 다음으로 넘겼다. 자신은 절대로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었기에. 그래서 멸망에 앞서 세상을 시험할 대마왕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은 더 이상 다음으로 넘어갈 이유가 없다. 내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중얼거림 뒤에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고개를 낮췄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베르무트와 시선을 마주하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평생 죽음을 바랐지. 그리고…… 이제야 죽을 수 있게 됐어. 베르무트, 너는 무엇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네 혼을 권속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고, 너를 거느리며 앞으로 더 살 생각이 없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나는 죽고, 계약을 맺은 네 혼은…… 내 육체에 깃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베르무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뿐이다. 베르무트, 네게 마왕의 좌를 남긴다는 뜻은 아니다. 한 줌의 마력도 남지 않은 내 육체가, 너의 혼이 깃들 그릇이 될 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육체가 그릇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고 최선이라는 것은 너도 알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이 아니게 되었다고 해도 베르무트의 영혼은 특별하다.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그릇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아예 베르무트에게 맞춰 그릇을 새로 만들어야 하나? 전례는 있다. 아멜리아 머윈이 만들었던 하멜의 데스나이트. 본래의 시체를 잃고서도 썩 잘 맞는 육체를 새로 만들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혼의 크기가 다르다. 아무리 특별한 그릇을 준비한들 베르무트의 혼에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육체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베르무트 본인부터가 다른 인간의 몸을 빼앗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예 죽어버리고, 나중에 환생하는 것은? 그것은 논의할 가치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바라는 것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시 침묵하던 베르무트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마다할 처지도 아니다. 그런데도 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 당신이 지금을…… 얼마나 고대하였는지는 알고 있지만, 정말로 만족하고서 죽을 수 있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련 따위 있을 것 같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 있어 삶이란 지긋지긋한 것이었지. 이제 와서 가벼워진 처지로 새 삶을 즐기겠다는 생각은 없다. 어쩌면, 아니, 분명하게 세상은…… 내가 보았던 것과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런 세상을 내가 굳이 볼 필요가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나와는 다른 신념을 가졌다. 나와는 다른 미래를 선택했다. 그것을 관철하여 나를 쓰러트리고, 멸망의 마왕을 죽였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승자인 너희가 누려야 할 것이며, 패자인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 베르무트와 연결된 사슬이 유폐의 마왕 쪽으로 이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 죽도록 하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더 이상 유폐의 마왕의 뜻을 묻지 않았다. 최초의 용사이자 세상을 위해 대마왕이 되었던 그는, 이 모든 것은 만족하고 안식을 바라고 있다. 그 의지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유폐의 마왕의 대답에는 어떠한 기만도 들어 있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슬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 나는 그 이름을 버리고, 네 육체에 깃들어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 살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답에 흔들림은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의 환한 금색 눈동자를 보고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먼, 과거에, 알았던 얼굴을…… 대입하지는 않았다. 한때 유폐의 마왕이 친애하여 벗으로 두었던 남자는 우연한 재앙으로서 죽어 사라졌다. 지금 앞에 있는 것은 300년 전에 세상을 구하고, 오늘 동료들과 함께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린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바라는 삶을 살기를 기원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그 유폐의 마왕에게서 덕담을 듣게 될 줄이야. 베르무트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멸망과 함께 죽은 육체가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는 사슬을 통해 넘어오는 베르무트의 혼을 육체란 그릇의 안으로 인도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죽여주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묵묵히 유페의 마왕을 응시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유폐의 마왕이 허튼짓을 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유폐의 마왕에게는 배신할 이유가 없다. 최후의 최후에 무언가 미련이라도 생겨서 삶에 집착한다면, 그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살아온 영겁과 추구한 신념에 대한 모독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유진은, 그것을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죽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만족뿐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련도, 집착도 없는 대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식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지옥에나 떨어져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겁을 살아온 대마왕. 세상을 구하기를 바랐다. 구할 수 없음에 절망하고 다음을 반복했다. 수많은, 정말로 수많은 목숨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멸망의 마왕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폐의 마왕에 의해 죽은 존재도 세상을 가득 채울 만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진은 안식을 바라지 않았다. 마왕이 누울 곳은 오직 지옥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기를 바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도 똑같이 웃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구구궁…….&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을 마지막으로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푹 숙인 유폐의 마왕에게 생기(生氣)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모론과 세냐, 성녀들을 가까이에 두고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이 무너지고 있다. 머지않아 이곳은 완전히 사라지고, 유진과 동료들은 밖으로 나가게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혼자 서 있으면 진짜 모양이 안 사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다리를 힐긋 보았다. 다행인 것은, 멸망의 마왕이 죽은 덕에 다리가 재생되었다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밖으로 나갔을 때의 모습이 신화이자 전설이 되어 길이길이 전해지게 될 텐데, 그 순간에 외다리로 엉거주춤 섰다가는 후대에 남을 조각상도 외다리로 만들어질 것이고, 나중에 천 년쯤 흐르면 우둔한 하멜이나 찬란한 유진이 아닌, 외다리 유진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좀 일어나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가까이 누운 모론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절한 세 명을 부축하고 혼자 멀쩡히 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싫다. 그러고 싶지 않다. 유치한 고집이지만,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윽…….”&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 더 따귀를 후려치고 나니 모론이 입을 벌려 앓는 소리를 냈다. 유진은 환히 웃으며 모론을 억지로 앉힌 뒤에, 세냐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파…….”&lt;/p&gt;&lt;p&gt;&lt;br /&gt;&lt;/p&gt;&lt;p&gt;열 대쯤 때리고 나니 세냐도 정신을 차렸다. 멸망의 마왕이 마력과 함께 소멸한 덕에 다들 정신을 차리는 것도 빨랐다. 유진은 흐릿한 눈을 껌벅이는 세냐도 앉혀놓고, 마지막으로 크리스티나의 뺨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일어나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따귀를 때릴 필요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재빨리 눈을 뜨고서 유진의 손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니스 님도 제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유진 님, 제 뺨은 때리지 않으셔도 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턱이 아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둑, 우두둑. 삐걱거리는 턱을 끼워 맞추며 모론이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퉁퉁 부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던 세냐가 꽥 비명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어딨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거 말고 물어볼 것이 더 있지 않냐? 멸망의 마왕이 어떻게 됐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어련히 잘 죽였겠지! 그래서 베르무트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열심히 싸워서 멸망을 쓰러트린 나보다 베르무트가 더 걱정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들으면 지만 열심히 싸운 줄 알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그냥 싸우면 진즉에 싸웠을 것을, 우리가 왜 개고생을 사서 더 했는데?! 베르무트 구하려고 한 것 아냐! 네가! 베르무트 구하고 싶다며! 그런데 그 베르무트 어딨냐고 묻는 것이 뭐 잘못됐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앞에 있는 내 안부보다 베르무트를 먼저 찾으니까 그냥 막 짜증이 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악, 퉤. 유진은 고개를 돌려 침까지 뱉으면서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거야 네가 멀쩡하게 내 앞에 있어서…… 아니, 너 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설마 질투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친구끼리 질투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투하는 거 맞는 거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씨-발 질투를 왜 해? 너 베르무트 좋아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친구로서는 좋아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해? 좋아한다고? 이런 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그럼 친구로서 싫어해? 그럼 너는 베르무트 싫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지, 존나게 싫어, 개새끼. 여기 나가면 진짜 언제 한 번 날 잡고서 두들겨 패버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하던 말을 뚝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푹 숙이고 침묵하고 있던 ‘유폐의 마왕’에게서 호흡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흡을 느낀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 유폐의 마왕이 저희 앞에서 이러고 앉아 있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이쯤 되니 죽기 싫다고 친한 척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와 세냐가 말을 주고받으며 이죽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르륵……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폐의 마왕의 머리색이 바뀌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잿빛으로 바뀌는 모습에 세냐와 아니스가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 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더듬거리며 그 이름을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두둑…… 유폐의 마왕의 육체가 새로이 깃든 영혼에 맞게 변형했다. 고개를 든 베르무트는 몇 번 눈을 깜빡인 뒤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목소리조차도 모두가 아는 베르무트의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베르무트를 끌어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부터 들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뻐서 씩 웃기는 했지만, 유진은 일단 그것을 물어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내가 못 할 말은 안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나를 얼마나 두들겨 패고 싶은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웃으며 물었고, 유진은 대답 대신에 가운뎃손가락을 슥 들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베르무트 님이 유폐의 마왕이 되어버린 겁니까? 아, 아니,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 님이 된 것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세냐와 아니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대답 대신에 무릎을 짚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서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저앉은 상태로 밖에 나가 버리면 꼴사납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그게 중요합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중요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으름장을 놓으며 세냐와 아니스를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일단 그 육체는 크리스티나한테 넘겨. 그리고 너는 천사로 뒤에 서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 마지막까지 크리스티나 안에 숨어 있을 셈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게 뭐가 나쁩니까? 저는 딱히 세상에 알려지고 싶은 마음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싫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도 싫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크리스티나가 동시에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가 고생한 것처럼 너도 고생했는데, 세상도 그걸 알아야 할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아니스 님 덕분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 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흔쾌히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태까지 크리스티나의 몸을 빌려 이래저래 추하다고 생각될 법한 짓을 했었는데, 이제 와서 사실은 크리스티나의 몸 안에 천사로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300년 동안 잘 구전되어 온 ‘신실한 아니스’라는 이름에 오점이 생기는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억지로 끌어내기 전에 빨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이미 다 무너졌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뻥 뚫린 천장을 가리키며 꽥 고함을 질렀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멸망의 마왕 본신이 소멸하면서, 바깥의 풍경이 흐릿하게 겹쳐지고 있다. 얼추 보아하니 이미 누르는 죄다 사라졌고, 모두가 이곳을 둘러싸고서 영웅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요즘은 우리 때와는 달리 기술이 좋잖아. 나온 우리 모습들이 그대로 마법으로 추출되어서 세상에 알려질 거야. 사진이 되어서 신문이건 중계건 뭐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까지 와서 공명심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내가 나만 좋자고 이러냐? 우리 모두 다 같이! 돌아왔다는! 그걸 남기고 싶은 거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게 할 줄이야! 부끄럽고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에 말을 그렇게 할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유진 님, 어쩜 그리도 마음이 아름다우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환희에는 아니스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스는 진심으로 하멜이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육체의 주도권을 크리스티나에게 넘긴 뒤, 천사의 모습이 되어 그 뒤를 날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헛기침을 뱉으면서 은근슬쩍 유진의 옆에 달라붙었다. 자연히 그 반대편에 서려 했던 크리스티나는 짧은 웃음을 터트리곤 세냐의 옆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무트의 이름을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의 곁에 서시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내 옆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을 구하겠다고 이토록 고생했는데,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했으며, 베르무트 님마저 구해냈다는 것을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직까지 주저앉아 있는 베르무트의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를 들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옆에 선 모론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내게 도끼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는 뭐 하러 들어? 누구 죽일 것도 아닌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는 하멜, 너도 누구 죽일 것도 아닌데 신검은 왜 꺼내 쥐고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가운데잖아. 검이라도 높이 들고 있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네가 시무인에 남긴 신상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로 촌스럽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유진의 이빨 사이에서 소리가 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는 너는 네가 왕국 수도에 남긴 석상은 안 촌스러운 줄 알아? 씨X 나는 왜 끼워 넣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희생을 기리고자 수도의 이름도 네 이름을 따서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루하르에 있는 네 동상들! 도끼 높이 든 거! 그거도 존나 촌스러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그거니까 조용히들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는 아닌 줄 아네, 야! 세냐, 그 녹색 광장 말이야. 너도 거기서 지팡이 쳐들고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모델로 선 적은 없어! 자기들이 알아서 만든 걸 왜 나한테 지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듣다 못한 크리스티나가 내뱉었다. 그녀는 점점 짙게 보이는 바깥의 풍경을 응시하면서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어깨동무라도 하시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깨동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바라던 대로 함께 돌아오지 않았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몸소 시범을 보였다. 세냐의 어깨에 걸치며 넘어간 팔이 유진의 등허리를 부드러이 쓸었다. 유진은 부르르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일단 손을 들어 세냐의 어깨를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더 붙어야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슬쩍 몸을 기울여 세냐의 뒤에 섰다. 그녀는 어깨동무를 하는 대신 유진과 크리스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졸지에 세냐는 그 가운데에 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도 유진의 목을 넘어 어깨를 감싸야 할지, 아니면 서 있는 왼쪽 어깨에만 살짝 손을 얹을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며 유진의 반대편을 힐긋거리다가 크리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군말 없이 유진의 어깨에만 살짝 손을 얹었다. 모론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완벽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완벽한 것 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크리스티나의 사이에 껴서, 등 뒤에 아니스까지 둔 세냐만이 의문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망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환호성. 완전히 밖으로 나와버렸다. 유진은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모습이 사진으로 남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용사와 동료들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없이 쏟아져 나오던 누르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고, 그 뒤에는 모두가 똑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득한 시체들과 함께 평원을, 설산을 가득 메우던 모든 누르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사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며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들도, 전선이 밀려나지 않도록 뒤에서 받쳐주던 이들도, 단 한 마리도 벗어나지 않게끔 하늘을, 땅을, 설원을 장악하던 모두가 갑작스러운 누르의 소멸에 따른 이유를 이해하는 것에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전장 여기저기서 똑같은 중얼거림이 나왔다. 이윽고 중얼거림은 커다란 함성이 되었다. 살아남은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끝났다. 이름처럼 세상을 멸망시킬 것처럼 나타난 마왕의 군세가 완전히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호성을 지르던 모두가 멸망의 마왕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더 이상 기괴하고 불길한 모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어지럽히는 색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마력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억…… 헉…….”&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끊어질 것만 같은 의식을 간신히 붙잡았다.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고 호흡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헤븐 제노사이드는 진즉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에게 용사자라는 이명을 주었던 갑옷도 마찬가지다. 무기가 그 꼴이 되었으니 맨손도 무사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주먹이 쥐어지지도 않는 피범벅의 손을 축 늘어트리고서 멸망의 마왕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점점 희미해지는 색에서 흐릿한 인영들이 보였다. 다섯…… 아니, 여섯? 카르멘은 어지러운 눈에 힘을 주어 색을 꿰뚫어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여섯 명인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러진 검을 간신히 쥐고 있던 길레이드가 물었다. 웩웩거리며 피를 토하던 알체스터도 고개를 들어서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저 안에 있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 들어간 영웅들은 유진을 포함해서 넷이다. 유진 라이언하트, 세냐 메르데인, 모론 루하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바라던 대로 위대한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저 안에 서 있어야 할 것은 다섯 명과…….&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저히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주일 전에 스스로를 바쳐 멸망의 마왕을 일시적으로 봉인했던 유폐의 마왕까지. 그렇게 해서 여섯 명인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으로 셈을 하던 기온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자릿수의 이름조차 제대로 셈이 되지 않을 만큼 정신상태가 좋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끄, 끝난 것은 맞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온은 절실히 바랐고, 그것은 모두의 바람이기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유폐의 마왕이 저토록 가까이 붙어 있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서 내려온 로베리안이 의문을 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당한 의문이었다. 계속해서 옅어지고는 있지만, 색 너머에서 영웅들의 모습은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림자일지라도 저들이 ‘어떻게’ 서 있는지는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깨동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주저앉았던 이바타가 중얼거렸다. 어깨동무? 그 말에 라파엘로가 아폴로에서 훌쩍 뛰어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께서 마왕을 복속시키셨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는 벅차오르는 신앙심을 견디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속이라니? 대뜸 튀어나온 외침에 모두가 두 눈을 얇게 뜨고 그림자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쪽이 무릎이라도 꿇고 있으면 모를까……. 당장 눈에 보이는 여섯 명의 그림자 중에서 누구 하나 무릎을 꿇은 사람은 없었다. 아마 라파엘로는 고통과 피로로 인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날개는 크리스티나 성녀일 테고…… 저 거구는 모론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한 명은 누구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각자 추측에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안에서 유폐의 마왕과 친해질 걸 수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말이 안 돼? 이 정도 싸웠으면 전우애가 싹이 틀 수도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히리두스가 핀잔을 주었지만 벌러덩 누워 있던 멜키스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추측할 필요가 사라졌다. 보이는 것들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짝짝짝.”&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소리를 낸 것은 카르멘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너덜거리는 자신의 손으로는 도저히 원하는 만큼의 박수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직접 입을 벌려서 목소리를 냈다. 길레이드는 바로 옆에서 카르멘이 입으로 박수 소리를 내는 것에 흠칫 놀랐지만, 그것을 도저히 기행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길레이드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과 함께 감동해 버렸다. 이 순간에 가장 가슴 아픈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카르멘일 것이다. 세상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박수를 치고 싶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길레이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번쩍 양팔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짝, 짝, 짝!&lt;/p&gt;&lt;p&gt;&lt;br /&gt;&lt;/p&gt;&lt;p&gt;양팔을 크게 벌리면서 치는 박수가 전장의 하늘을 울렸다. 뒤이어 기온과 길포드가, 그리고 라이언하트 전원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시작된 박수는 순식간에 전장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전장의 모두가 소멸하는 멸망의 마왕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박수를 쳤고, 환호성을 내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성에서 맴도는 이름은 통일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유진 라이언하트를, 누군가는 세냐 메르데인을, 누군가는 모론 루하르를, 누군가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외쳤다. 그렇게 외치는 이름 중에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의 이름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박수갈채와 환호성 속에서 영웅들의 모습이 드러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짝짝짝짝…….&lt;/p&gt;&lt;p&gt;&lt;br /&gt;&lt;/p&gt;&lt;p&gt;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점점 멎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나타난 영웅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어린아이도 지금 영웅들의 모습을 보고 생각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저러고 있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짝짝짝……!&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물을 수는 없었다. 의문과 당혹보다 감격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서서히 멎어가던 박수갈채와 환호성에 다시 힘이 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견디기가 힘든 것은 오히려 유진이었다. 그는 경직된 미소를 지우고, 양옆에 얹고 있던 팔을 내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베르무트가 옆으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세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고집스레 유진의 어깨를 안았고, 세냐를 사이에 두고 있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니, 앞으로 천 년은 족히 전해질 사진에서 이 관계를 확실하게 선언해 두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가 하자고 해놓고서 왜 빼고 지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언제 이렇게 하쟀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가 부끄러운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뭔 개소리야? 쟤들 표정 안 보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유진 님의 얼굴만 보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뺨을 살짝 붉히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명 달콤한 말인데 왜 이리도 몸이 오싹한 것일까. 유진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이라고 말한 덕에 환호성과 박수는 멎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가까이 있는 간부들 중에서 몸이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들은 상처를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유진과 동료들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사방을 빼곡하게 둘러싼 많은 사람도 간절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묻고 싶은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멸망의 마왕은 정말로 죽었는가?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 외에 많은…… 유진은 슬쩍 시선을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모두가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아니, 절반 넘게 이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그들은 유진과 베르무트를 보면서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슬쩍 옆을 보았다. 뭐라고 말이나 한마디 하라고 건넬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 이상으로 베르무트의 표정이 진실했다. 금색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아른거렸고,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떤 기분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게 있어서 ‘라이언하트 가문’이란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다. ‘용사’도, ‘위대한 베르무트’라는 이름을 즐겁게 느꼈던 적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시커먼 멸망의 심장 안에서 베르무트가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과의 대화 때문만은 아니다. 저들 모두가 베르무트의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을 맺어 전쟁을 끝낸 후, 키옐 제국으로 돌아온 ‘위대한 베르무트’는 다른 동료들이 그러하듯, 연회나 사교회 따위는 일절 즐기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른 결혼과 수많은 첩을 들였지만 ‘가문’을 벗어난 추문 따위는 일절 없었다. 마치 강박처럼 가문을 키우고, 우클라스 산에 흑사자 성을 세워서 국경을 노려보던 키옐의 대공. 위대한 베르무트가 아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남자가 어떠한 인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혈(鐵血)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남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고, 라이언하트도 마찬가지다. 그-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먼 후손들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힘겹게 말을 이으며 눈을 감았다. 아른거리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잊지 않아주어서…… 고맙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감히 물을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눈물을 흘리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베르무트에 의해 시작된 라이언하트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가슴에 문양에 손을 얹으며 베르무트에게 예를 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를 따라서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하나.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슴 대신 베르무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어디 보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부터 말해야 하지? 유진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이 가장 절실히 바라는 것은 깨끗이 씻고, 누가 들어오지 않게 문을 잠그고, 침대에서 푹 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자야 할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다시피, 멸망의 마왕은 죽였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아아아! 당연히 환호성이 터질 수밖에 없는 선언이었다. 유진은 몇 분 정도 진득하게 환호성을 들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도 죽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어디로 갔는가? 유진은 나중에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선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붙잡은 것으로 유폐의 마왕은 모든 힘이 다했고…… 우리가 안에 돌입했을 시점에서 놈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맙다고 말하고 죽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긴 세월 대마왕으로, 그리고 헬무드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해 온 유폐의 마왕의 죽음. 비록 그 전에 전쟁에서 패배해 황제의 직위를 반납하고, 승자에게 복종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유폐의 마왕의 진짜 ‘죽음’은, 모두의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여기…… 어……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체에 대해 추측할 수밖에 없게 만든 여섯 번째.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뒤에서 떠 있는 아니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얘는 아니스입니다. 아니스 슬리우드.”&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 저를 보내주셨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박수갈채와 환호성이 멎은 전장. 아니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녀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라파엘로와 성직자들을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오래전부터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야 세상에 내려와 기적과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래전 죽은 제가 천사가 되어 세상에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기도가 간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영혼의 자매라고 할 수 있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의 믿음이 신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00년’ 만에 만나게 된 벗들이 기적을 바랐기 때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을 떠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자신이 진즉부터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세상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여태까지 크리스티나의 몸을 통해 벌였던, 가령, 나이트마치 때의 광신 행위와 유진과 관련된 추문 등. 그것들을 일절 끌어안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아니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미소를 유지하면서, 크리스티나에게 모든 추태를 떠넘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역시……! 제 머릿속에 울리던 목소리는 아니스 님의 것이었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놓고 오물을 독박으로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 이미 어엿한 뱀으로 자란 크리스티나는 혼자 죽을 생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몇 번이나 아니스 님의 목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아아, 역시, 역시 그랬던 것이군요. 제가 저답지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가 아니스 님의 목소리에 홀렸기 때문이었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홀리다니……! 저는 당신을 홀리는 계시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제 입술이 저도 모르게 열려 당신의 계시를 말하게 하지 마소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 하려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님이 누구의 침대에 눕기를, 누구의 온기를 원하였는지를…… 아아, 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말을 하다 말고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고, 아니스는 비명을 지르며 크리스티나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게 끝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통제가 힘들 정도로 웅성거림이 번지고 있다. 유진은 필연적인 혼란을 느끼고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힘드시겠지만…… 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에 맞서 싸운 모두가 힘든 것은 당연한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멸망의 마왕의 안에서, 놈의 숨통을 끊은 우리들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힐긋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만든 태양이 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차마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라이미르아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슬쩍 세냐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다. 그 뒤에, 유진은 라이미르아와 시선을 맞대고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어트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에 태운 마법사와 성직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라이미르아는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길게 머뭇거리지 않고 유진의 뜻을 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란 비명과 함께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땅에 처박을 수는 없으니, 뒤따른 용언과 마법이 떨어지는 이들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것과 동시에 유진은 신력을 해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뒷수습은 황제랑 교황이랑 다른 높은 분들이 알아서 하라 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태양을 통해서 쏟아지는 신력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 화악! 세냐가 펼친 마법이 유진과 동료들을 라이미르아의 위로 이동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잠깐! 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가 기겁하며 손을 뻗었지만, 유진은 그 말을 무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디로 가느냔 말이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만 아니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쯤 뒤에 슬쩍 돌아오면 수습은 끝났겠지.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벌러덩 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드래곤은 빨랐다. 넓은 전장이 순식간에 멀어지기 시작했다. 베르무트는 이쪽을 향해 계속해서 들려오는 고함을 미처 떨치지 못하고 힐긋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저기 더 있고 싶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것은 아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숨긴 것이 많고, 안고 있는 괴로움도 많았지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남자는 그리 사교성이 훌륭한 성격은 아니다.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려버렸지만, ‘그다음’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는 베르무트에게도 굉장한 난제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상황에서 대뜸 유진과 동료들에게 이끌려 드래곤의 등에 타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래곤…… 베르무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타고 있는 것이 ‘드래곤’이라 생각하니 더욱 묘한 기분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멸망의 마왕이 드래곤을 거의 몰살시키지 않았던가? 물론 베르무트는 더 이상 자신을 멸망의 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 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300년 전에도 그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베르무트의 관점일 뿐이잖은가. 몰살당해버린 드래곤 쪽에서는 원한을 가질 수 있는 일이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드래곤뿐만이 아니다. 베르무트는 세냐와 유진 사이에 앉아서 헤헤 웃는 자그마한 소녀를 보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소녀는…… 세냐, 네가 만들었던 사역마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메르라고 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베르무트를 향해 눈을 빛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름은 메르고, 성은 일단 아직은 메르데인이에요. 메르 메르데인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만간 메르 라이언하트가 될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가 활짝 웃으며 유진과 세냐의 팔을 끌어안았다. 유진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한 번 감았고, 세냐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하멜에게 품었던 감정은 300년 전부터 모두가 알던 사실. 베르무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드래곤은…… 그…… 300년 전에 생존한 드래곤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안배하고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진은 감았던 눈을 뜨고서 라이미르아의 비늘을 어루만져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자키아 기억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잊을 리가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룡 라이자키아. 헬무드가 제국이 되고 난 뒤에도 인간을 배척하고, 공작위를 받은 뒤에는, ‘흑룡공’을 자처한…… 인간 혐오의 극에 달한 드래곤. 그 시절에 베르무트는 ‘나중’을 위해서 라이자키아를 미리 죽여놓을지 말지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얘는 라이자키아의 딸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오, 위대한 베르무트시여, 본녀는 라이미르아라고 하느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화책에서 몇 번이나 읽었던 위대한 베르무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에 라이미르아가 밝은 목소리를 냈다. 유진과 라이미르아의 대답에 베르무트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는 지금 몇 가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마족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불렸는지 알고 있다. ‘절망’의 베르무트. 흉흉한 별명이 붙을 만큼 마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신을, 왜 라이자키아의 딸이 저토록 경애를 표하는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자키아는 죽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죽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생각하면 흑룡공은 죽을 만했느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미르아도 태연히 대답했다. 애초에 혈육의 정이랄 것도 없었던데다, 라이미르아는 흑룡공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억지로 이해했다. 당장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등에 태우고 있는데, 종족을 몰살시킨 대상의 분신을 등에 태우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하멜, 저들이 우리를 아직까지 부르고 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귀도 밝다, 이미 한참 멀어졌는데도 들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베르무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멜키스를 필두로 한 몇몇이 저 멀리서 추격해 오고 있었다. 유진은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서 세냐에게 눈짓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어트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추격자의 선봉이 멜키스라는 것은 세냐로 하여금 망설임을 버리게 해주었다. 세냐가 쏘아낸 빛이 멜키스에게 작렬했다. 끼아아악…… 기다란 비명과 함께 멜키스가 아래로 추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래도 되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이 모든 것이 베르무트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식에 구애받는 것은 베르무트가 멜키스 엘하이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유진은 혀를 쯧쯧차며 베르무트의 등을 철썩 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너 구해준 거야.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삼스레 무슨…….”&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에게서 구해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수치심과…… 그런 것에서 구해줬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 아롯에서 멜키스와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영웅들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나? 마법사라면 당연히 ‘현명한 세냐’를 이야기하겠지만, 그때부터 멜키스는 별종이었다. 멜키스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영웅이 ‘위대한 베르무트’라고 대답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유인즉슨, 베르무트가 바람의 정령왕 템페스트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은 위대한 베르무트를 전사와 기사라고 말하지만, 멜키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대한 베르무트는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대정령술사다……. 멜키스가 템페스트에게 그토록 집착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무트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린 시절부터 존경해 온 베르무트를 실제로 만난다면? 유진은 멜키스가 어떤 광란을 일으킬지를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우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어 있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더 이상 추격자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결이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이란 것이 이겼다! 하고 끝나냐? 수습해야 할 것 많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당연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당연해! 나는 그런 거 하기 싫어. 내가 잘하는 것은 싸우는 거랑 마왕 죽이는 거지, 뒷정리나 정치…… 그런 건 질색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가 현장에서 싸우는 동안 교황과 황제 등은 영토에 남아 있었지요. 이후의 고생은 그들이 맡아야 할 소임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의 말에 동감했다. 모론과 세냐, 크리스티나도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도망친 것이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동료들의 얼굴을 돌아보고서 헛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는 위풍당당한 개선을 기대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나 뒈지고서 너희 하고 싶은 개선 했잖아.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멍청이가 혼자 뒈져 버리는 바람에 기쁜 개선은 아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들으란 듯이 투덜거렸지만, 유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베르무트, 너 없는 동안 나는 몇 번 비슷한 거 했거든. 질려서 하기 싫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광란의 마왕을 죽였을 때도, 하우리아를 해방했을 때도. 닭살이 돋을 만큼 부끄러운 개선 행진을 했었다. 유진은 본가 구석에 처박혀 있을 플래티넘 라이온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우리 다 같이 하는 것은 처음이니까, 하고 싶고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과의 전쟁은 진짜 끝났다. 옛날부터 바랐던 대로, 모두가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쉬움은 금세 떨칠 수 있었다. 저곳에서 함께할 개선 행진은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한 규모의 행진이 될 것이 틀림없었고, 행진의 선봉에는 플래티넘 라이온이 있을 것이다. 유진은 절대! 빌어먹을 플로트의 위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싶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하고 싶지는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떤 기분으로 임했느냐는 둘째치고서, 300년 전에 질리도록 참가했던 행사들은 베르무트도 질색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 어떡하실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를 살피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통째로 이동시킨 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은 폐허가 된 채 지상에 방치되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밀어버리지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판데모니엄에 헬무드의 상징인 빌딩의 숲은 없다. 전쟁에 참전했던 마족은 유폐의 마왕이 모조리 죽여버렸기에, 저 아래에 있는 것은 생존자가 없는 을씨년스러운 유령도시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헬무드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토 나누기는 좀 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 수준도 아니고 제국이다. 위치도 애매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덩치만으로 국왕이 된 것은 아니다. 모론은 턱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탁자에 올린다면 대륙의 왕들이 앞다투어 나이프를 들이밀겠지. 우리가 있으니 전쟁으로 발발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 틀림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 황제가 욕심이 많기는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근히 향하는 시선들을 느낀 유진은 즉시 정색하고서 손을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보고 왕 비슷한 거 하라는 말은 관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표정이 말하고 있잖아. 난 절대 안 해. 정 필요하면 헬무드에 남은 마족들 있잖아, 걔들 중에서 한 명 뽑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는 마족은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있겠냐? 발자크가 죽은 게 아쉽네. 살아 있었으면 헬무드 왕이나 하라고 시켰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발자크랑 약속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새 진지한 얼굴이 된 세냐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약속?”&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화책 써주기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전설의 발자크라는 이름 붙여주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어떻게 알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죽거림을 들은 세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정말로 ‘전설의 발자크’라는 이름을 남길 생각인가. 우둔한 하멜보다는 낫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멋진 이름이네. 죽었으니 따질 수도 없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흉한 발자크, 이것보다는 낫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전설의 발자크 해라. 아무튼, 나는 헬무드 다스릴 생각 없어. 너희 중에 하고 싶은 사람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유진은 혹시나 싶어서 베르무트를 힐긋 보았다. 저 육체는 일단 유폐의 마왕의 것이니, 베르무트가 헬무드를 다스리는 것도 제법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싫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우리는 신경 끄도록 하자.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을 통제하는 사슬은 유진이 지니고 있으니 폭동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바벨은 조금 아쉽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 님이랑 약속했거든. 바벨 선물해 드리기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엘프와 드워프들에 의해 엉망이 된 라이언하트의 본가. 차마 뒤집어엎지 못하고 끙끙 앓는 애니실라에게 그런 약속을 했었다. 바벨이 통째로 붕괴해 버렸으니, 이제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로 만들어드리지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터는 봐둔 곳 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숲이 있고 강이 흐르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근엄한 얼굴로 대답하는 유진의 옆구리에 세냐의 주먹이 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저희, 어디로 가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직복의 안쪽에서 슬쩍 술을 꺼내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술이 꺼내진 것만으로 모두가 바짝 곁에 붙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사람 없는 곳 가서 좀 쉬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부터 꺼내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이 전장에 나서기 전에 망토 안에 술을 챙겨놓았던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베르무트가 급히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리 챙겨놓았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문제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나를 구하기…… 아니, 멸망의 마왕과 싸우기 전에. 술병을 미리 챙겼다는 말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끼, 수백 년 처박혀 있으면서 옛날 일 다 까먹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쯧쯧 혀를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옛날에 안 그랬냐? 마왕이랑 싸우기 전에 술은 항상 챙기고 갔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기 전에 마시든가, 죽이고 나서 마시든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렇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히, 옛날에는 그랬다. 하지만 세상의 존망과 동료를 구하는 마지막 싸움을 앞에 두고, 술부터 챙겨놓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안 마시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면…… 마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 지금은 안 줄 거야. 술판 벌일 거면 나중에 벌여. 지금은 간단하게 한 병만 나눠 먹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번의 술판은 유진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지금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술을 마셨다가는 역사가 반복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쉬고 나서, 어디로 갑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니스가 먼저 술병을 열었다. 아니스는 먼저 술을 한 모금 마셨고, 연이어 한 모금 더 마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지도 않은 술을 왜 너 혼자 두 번 먹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술은 크리스티나가 꺼낸 술입니다. 그리고 저는 두 모금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 한 번, 크리스티나 한 번. 알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의 몸을 공유한다는 점은 이럴 때 좋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세계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한 모금 마신 술병을 옆으로 넘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사는 했지만, 그래도 보고는 해야지. 그다음에는 라구르야란…… 머나먼 바다도 가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깊은 잠에 든 비슈르를 떠올리며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먼 곳에서 빛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헤인야르는 한번 살펴야 한다. 내 후손들이 그곳에 있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에게서 넘겨받은 술병은 모론이 받았다. 그는 술을 들이켠 뒤에 베르무트에게 건네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능하다면 라비스타도 살피고 싶다.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고 싶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비스타. 베르무트가 200년이 넘도록 봉인되어 있던 곳. 그곳에 살며 멸망의 마왕과 계약한 마족들은 이미 소멸했고, 봉인된 마물들은 하우리아 전쟁에 동원되어서 죽었다. 이제 라비스타는 바다에 동떨어진 작은 섬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알지만 직접 봐두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다음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뭐 더 하고 싶은 것 없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아카데미를 세우고 싶다고 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집보다는 낫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꿈에 불만이 있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진 꿈이라고 생각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가는 이야기들에 베르무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하고 싶은 것은,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은 이미 이뤘다. ‘다음’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이상 베르무트를 속박하던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도 마찬가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은 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린 직후에 사라져 버린 영웅들의 목격담은 대륙 곳곳에서 들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먼저 레헤인야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분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만 루하르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본래부터 험상궂었던 얼굴에 몇 개의 흉터가 더해져 있다. 누르의 진군을 최선봉에서 가로막으면서 입은 흉터다. 아만은 이 흉터가 영광스러운 승리의 훈장이라고 생각했기에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굉장히 힘들었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을…… 허허, 하긴, 그건 우리만 그랬던 것이 아니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껄껄 웃으며 말하던 아만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으로 건너온 소식을 통해 멸망의 마왕이 죽었다는 것은 알았네. 그래서 기지로 돌아가던 길이었지. 위대한…… 베르무트가 돌아왔다는 것도, 그분들이 전장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음, 그래. 하지만 미리 들었어도 갑자기 앞에 내려오시니 나로서는 놀랍고 감격할 수밖에 없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만이 막았던 곳은 대륙의 최북단. 멸망의 마왕이 강림했던 전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그 정도 거리는 드래곤을 탈것으로 이용하고, 온갖 마법의 도움을 받는다면 몇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기는 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존경해 마다하지 않는 나의 시조께서, 내 어깨를 안으시며 말씀하시더군. 고생했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아만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만 그런 것이 아니야. 나와 함께 선봉을 책임진 오르투스 경은 아예 눈물까지 뚝뚝 쏟았지. 아이빅은 주저앉지도 눈물도 흘리지 않았지만, 왜 그가 고집스레 하늘만 노려보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허허, 아무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위대한 베르무트께서 말씀해 주셨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맙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위대한 베르무트께서, 우리 모두에게 고개를 숙인 걸세. 허허, 허허허…… 음? 그다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만은 눈을 끔뻑거리며 앞을 보았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대륙에서 정보 길드 연합의 총수다. 전쟁이 끝난 지금. 정보 길드는 ‘전쟁’을 이야기로 엮어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면에서 움직이는 것은 정보 길드 연합이지만, 저 모든 것은 대륙 국가들의 동의와 협력이 있다. ‘동화책’이라는 애매한 역사만이 남은 300년 전과는 달리, 이번 전쟁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약속이 있기에 루하르의 국왕인 아만이 직접 총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그런 약속이 없더라도 아만은 취재에 응했을 것이다. 존경하는 영웅들에게 노고를 치하받았다. 아만은 그것을 자랑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그…… 다음이라. 다음이랄 것은 없는데…… 우리를 치하하신 뒤, 그분들은 다시 날아가 버리셨거든. 레헤인야르의 봉우리를 넘어, 라구르야란까지 말일세. 어디로 가신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고…… 어흠, 그것보다 말일세. 나와 방어군이 얼마나 용맹하고 처절하게 설산을 지켰는지에 대해서 말해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록 멸망의 마왕에게 직접 도끼를 처박지는 못했어도, 세상의 존망이 달린 전쟁에서 활약했다. -바로 저것 때문이다. 레헤인야르를 지키는 것은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멸망의 마왕과 직접 싸웠던 것은 아니니,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아무래도 활약상이 덜 적힐 수밖에 없는 노릇. 총수는 영웅들의 행방 외에 다른 이야기는 그리 듣고 싶지 않았지만, 흉터가 그득한 아만의 얼굴을 앞에 두고서 차마 ‘싫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해의 시무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사실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칼리아 아니머스. 한때 그녀는 시무인을 대표하는 격랑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기사단의 꽃이자 공주 기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년 전의 이야기다. 그녀는 이미 검을 내려놓고, 기사 작위도 반납했다. 그렇다고 공주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칼리아 공주는 신앙에 빠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신앙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곳 시무인은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이 최초로 ‘종교’가 된 곳이며, 수도의 광장에는 광란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돌아온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스칼리아 공주는 매주, 아니, 매일 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릴 만큼 신앙적이어서, 시무인 왕족들은 언젠가 스칼리아가 진짜 ‘성녀’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대까지 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날도 저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지요. 아, 저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전장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기사와 병사들의 가족…… 그리고 유진 님을 신앙하는 신도들과 함께였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스칼리아는 공주 기사라고 떠받들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모아 쥐고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아아, 하늘에서 빛이 내려온 겁니다. 저의 신께서는 모두의 기도에 부응하고자 오셨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은 다를 것이다. 이미 그곳에 모인 다른 신도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유진 라이언하트는 노골적으로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고, 다른 동료들은 신상과 유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정보 길드 연합이 파악한 영웅들의 성격을 통해 추측하자면, 그들은 단순히 하늘을 지나다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놀리기 위해 내려온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머나먼 바다에 다녀오셨다고 말입니다. 이유……? 신의 행사에 제가 어찌 이유를 묻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후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겁니까? 조심스레 묻는 질문에 스칼리아의 얼굴이 엄격하게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께서는 어디에도 계시고 어디에도 없으십니다. 지금 저희가 이야기를 나누는 이곳에도 신은 계십니다. 그러한 믿음이 바로 신앙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른다는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후의 목격담은 일주일 뒤에 들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마르 대수림의 조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확한 일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들은 며칠 동안 대수림에서 지냈던 모양이오. 세계수…… 엘프의 영지에서 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수림의 모든 부족을 일통한 조란은 이미 제국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영토를 지녔다. 하지만 저 젊은 대부족장 이바타 자하부는, 스스로 황제라 일컫지 않고 아직 ‘대부족장’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아직 대수림 부족에 남은 ‘제국’과 ‘황제’라는 단어에 대한 반감 때문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의 왕들과의 약속으로 독대를 허락했지만…… 흐흐, 먼저 말해두지. 세계수의 위치를 묻는다면 나는 그대의 팔을 자를 것이오. 묻지 않고 그대의 쥐새끼들을 숲에 풀어놓아서, 세계수와 엘프 영지의 위치를 찾으려 든다면…… 그대들이 수군거리는 ‘야만인’의 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씩 짓는 미소와 함께 얼굴의 문신이 꿈틀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의 무력이 대륙의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란 것은 이미 전쟁에서 확인된바. 총수는 탐색을 위해 대동한 길드원들은 그대로 데리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너무 걱정은 마시오. 약속은 약속이니, 내가 만나서 들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숨기지 않을 것이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나의 ‘벗’, 유진에게 허락을 구했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는 ‘벗’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세계수에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소. 자세한 사정까지는 묻지 않았지만,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에 세계수의 큰 도움이 있었다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는 대수림 원주민들과 엘프들이 숭배하는 신앙의 대상이다. 영웅들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세계수가 단순히 토속 신앙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관해 내게도 당부를 남겼지. 뭐, 별것은 아니오. 숲을 아끼고 가꾸어 달라더군. 하하, 그거야 우리에게는 일상과 같은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상이라? 총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광경들을 떠올랐다. 험상궂은 전사들이 묘목을 옮겨심고, 비료를 뿌리던 모습…….&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들이 궁금한 것은 유진과 영웅들이 어디로 갔느냐, 아니오? 하하, 나는 들어서 알고 있소. ‘벗’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는 다시 ‘벗’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라비스타로 간다고 했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이 끝나고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지만, 영웅들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총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 마음이 급할 테니 이해해 주지. 하지만 지금 간다고 해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의 말대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랴부랴 조란을 떠났다. 연속으로 워프 게이트를 타고서 헬무드로 넘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제가 많았다. 유폐의 마왕이 죽은 뒤. 헬무드는 대륙 국가들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럴지라도 헬무드에 새로운 지도자는 필요하다. 전쟁을 거부한 온건파 마족 중에서 후보들이 나섰고, 익숙하지 않은 선거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헬무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전에 누리던 압도적인 기술들은 정지했고, 대부분 가게는 문을 닫았다. 각국에서 파견된 정예 기사들은 혹시 모를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거리에 서 있고, 마족 후보들은 소중한 한 표를 주십사 선거 활동을 벌이며, 그 너머에서는 인간 이민자들을 주축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마족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민자의 인권을 보장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혼란스러운데, 더욱 총수의 머리를 아프게 한 것은- 라비스타가 헬무드에서도 으뜸가는 오지라는 것이다. 직행으로 이어진 워프 게이트도 없다. 가장 가까운 워프 게이트를 타고서도 지상을 며칠 더 이동하고, 배를 타고 바다에서 며칠을 더 이동해야만 라비스타에 도착한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앞이 막막해질 정도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막 워프 게이트를 지나고,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도시와 마을들을 지나서 바다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비스타? 그 섬은 며칠 전에 사라졌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를 띄우려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상의 파악은 의외의 장소에서 들을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제국 유라스의 이단 교도소.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한 신관이나 성직자, 유라스가 인정하지 않는 사교도 등을 가두는 곳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보 길드 연합이라더니. 이름만 거창한 것은 아닌 모양이야. 눈과 귀가 꽤나 밝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총수가 만난 것은 교도소장이 아니었다. 혈십자기사단의 단장, 크루세이더 라파엘로 마르티네스. 그는 소년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총수를 안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으니 오해는 하지 마. 그녀는 신앙을 배신한 죄인이다. 과거 세냐 님과 거래를 한 탓에 죽이지도, 사로잡지도 않고 풀어놓았지만…… 이번 일에 있어서는 유일한 목격자이니 말이야. 그래서 잡아두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 같아서는 반발하고 싶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영웅들의 목격 정보는 정보길드를 통해 모든 국가가 공유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총수는 실제로 반발할 수는 없었다. 크루세이더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광신도고, 이곳은 유라스의 이단 교도소다. 지금 크루세이더가 총수의 목을 자를지라도 바깥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헤모리아. 이름은 알고 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다. 한때 ‘단두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유라스 이단심문국 말레피카룸의 에이스. 하지만 타락하여 아멜리아 머윈의 종이 되었고, 하우리아 해방전 이후로 종적을 감췄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직접 그년을 풀어놨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파악할 수 있는 낙인을 찍어서 말이야. 쥐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살라고 말했는데…… 괘씸한 것이 악의를 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쇠창살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감옥 안쪽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헤모리아가 악을 써대며 창살을 잡고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의라니! 나는, 나는 그런 것이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닥쳐라, 사악한 것. 세냐 님이 아니었다면 난 널 풀어놓지 않았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가 눈을 번득이며 내뱉었다. 까득거리며 이빨을 갈던 헤모리아는, 창살에 머리를 들이박으면서 토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억울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억울하다는 것이지? 라비스타가 어떤 곳인지는 너도 알지 않나. 그곳은 멸망의 마왕이 잠들었던 곳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앙! 라파엘로는 창살을 걷어차며 말했다. 전해지는 충격에 얻어맞은 헤모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아멜리아 머윈과 라비스타에서 숨어 지냈었지. 멸망의 마왕의 부활을 고대하며 사악한 의식이라도 벌였나? 아니면 그곳에 남았을지 모를 마력을 탐냈나? 작금의 헬무드 상황에 분노한 과격파들을 라비스타에 불러들여 폭동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상병자 같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헤모리아가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개 같은 낙인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었을 것 아냐?! 내가, 내가 라비스타에 간 것은 전쟁이 끝난 뒤야! 그 전의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골목길을 전전하며 지내던 부랑자의 삶.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모리아가 완전한 뱀파이어가 아니기에, 식사를 흡혈로만 할 필요가 없다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흡혈의 충동은 있었다. 인간의 피를 마실 수 없게 됐으니 시궁창의 쥐새끼나 같은 처지의 부랑자 마족의 피를 빨면서 살았다. 언제 어디서 유라스의 사냥꾼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숨죽여서 살았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이 시작됐고, 끝났다. 혹시 유폐의 마왕이나 멸망의 마왕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기대를 안고서 숨어 지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헬무드는 패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란스러운 헬무드에서 헤모리아가 지낼 곳은 줄어들었다. 각국에서 파견된 기사들. 그중에는 유라스의 성기사와 전투신관들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히 ‘힘’을 겨룬다면 대부분이 헤모리아보다 약하겠지만, 문제는 어깨에 찍힌 낙인이다. 그녀가 죄를 범한다면 반드시 추격대가 올 것이다. 낙인의 존재는 성기사들도 감지하고 있기에, 뒷골목의 어둠은 더 이상 헤모리아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떠올린 곳이 바로 라비스타다. 멸망의 마왕은 죽었다. 마족들도 없다. 마물도 없다. 그곳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다. 누군가 찾아올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숨어 지내기에는 좋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헤모리아는 라비스타로 건너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칠 대로 지치고 몰릴 대로 몰렸다. 평생, 라비스타에서 살자. 죽은 땅이지만 밭을 일궈보자. 농사를 짓고, 나무를 심고, 과일을 키우고, 물고기를 잡고…… 가축 같은 것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흡혈의 충동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단심문관으로 살았을 적에는 피 따위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참고 견딘다면 충동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롭게 태어나자. 새로운 삶을 살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나는 억울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헤모리아는 바닥을 긁으며 오열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저것을 바라여 라비스타로 넘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이 죽은 덕일까. 라비스타의 땅은 마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면 언젠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무지를 괭이로 갈면서, 낚시를 하고……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냈을 즈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서 악마들이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헤모리아가 느끼기에 그들은 악마와 다름없었다. 즉시 알아보고서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려던 헤모리아는, 악마들에게 사로잡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시발 여기서 뭐 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헤모리아의 인생을 망친 원수, 유진 라이언하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물어왔다. 겁에 질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있으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또 이빨 갈고 지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도 억울했다. 무서워서 이빨이 저절로 부딪칠 뿐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말은 믿을 가치가 없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는 심드렁한 얼굴로 총수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과 영웅들은 라비스타의 상황을 보기 위해 오셨던 거다. 멸망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신 거지. 걱정하시던 일은 없었지만…… 라비스타. 그 장소가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셨기에, 섬을 통째로 침몰시키셨다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헤모리아가 꿈꾸던 안락한 보금자리는 바다 깊은 곳에 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계집은 유진 님이 해안가에 던져두고 가셨다. 아, 물론 우리는 저것이 라비스타로 거처를 옮긴 것을 알고 있었어. 뭘 하는가 싶어 잠시 내버려 뒀지. 그런데 대뜸 해안가로 돌아와서 쓰러져 있으니, 어쩌겠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로잡아서 이곳 이단 수용소에 가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며칠 뒤에 내보낼 거야. 죽일 수는 없고…… 이곳에 가둬두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저것에게는 더 큰 형벌일 테니까. 아, 네가 궁금해할 것은 저것의 처지가 아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는 피식 웃으며 총수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나? 하우리아 해방 전 때, 한 마리의 드래곤이 유진 님을 찾아왔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드 드래곤 아리아르텔. 그 드래곤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가진 보물고를 열어 귀중한 무구들을 베풀었고, 인간 마법사들에게도 협력해 주었었다. 드래곤이 직접 유진 라이언하트를 찾아와 조력해주었다는 일화는 후대에 전해질 전설 중 하나가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의 말에 따르면, 누군지 모를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유진 님과 함께 있었다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는 턱짓으로 헤모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비스타를 침몰시킨 후 유진 님들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드래곤의 거처에 함께 가셨을지도 모르지. 아, 물론 드래곤의 거처는 나도 모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답답해하며 침묵하는 총수의 귀에 라파엘로의 이죽거림이 이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래곤의 거처를 찾아보던가, 아니면…… 라이언하트 본가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던가. 하하, 후자가 더 힘들 것 같군. 자네도 들었겠지? 키옐 황제가 라이언하트를 방문하려고 하자, 가주 부인이 직접 앞을 가로막았다는 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이 끝난 후. 위대한 베르무트와 유진 라이이언하트를 숭배하는 행렬이 라이언하트를 찾아갔고, 모두가 가모 애니실라에게 가로막혀 쫓겨났다. 치하를 위해 방문한 황제도 예외는 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특히나 지금 라이언하트 본가는 한창 이사 준비로 바쁠 테니…… 어디, 힘써서 드래곤의 둥지나 찾아보시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큭큭 웃어대는 라파엘로의 웃음소리 너머로 헤모리아는 울면서 이를 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 제국의 변경, 볼라뇨.&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의 집은 이 한적한 시골에 있다. 물론 볼라뇨의 이웃들은 아리아르텔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이웃들은 아리아르텔을 낙향한 귀족으로 알고 있고, 그 외의 사실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레 시골 사람은 이웃, 그것도 일가족 한 명 없이 혼자 사는 젊은이에게 과할 정도의 호기심을 갖기 마련이지만, 그런 것은 아리아르텔에게 해당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 때문이다. 당연히 아리아르텔은 인간 이웃과 사교적인 활동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오래전부터 자신과 저택에 인식저해 마법을 걸어 두었고, 덕분에 그녀의 저택은 아주 조용하고 한가로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 가까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던 유진 일행에게 있어서, 편히 머무르기에 이곳 이상으로 완벽한 장소는 없었다. 예전에는 레헤인야르에 있는 모론의 동굴에서 머물렀었지만, 더 이상 누르가 출현하지 않게 된 이상 굳이 산속에 처박힐 이유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말없이 거실 한복판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따스한 조명이 비추고, 아리아르텔이 좋아하는 향기가 언제나 맴돌며, 가끔 커피나 홍차와 함께 독서를 즐기던…… 또는 이제는 충분히 성장한 리우 드라고닉의 일상을 바라볼 수 있던, 아리아르텔의 취미를 위한 공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때의 이야기다. 끔찍하고 무례한 손님들을 저택에 들인 후로, 아리아르텔이 사랑하던 거실은- 아니, 그녀가 살던 저택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 저택에서 온전히 아리아르텔만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그녀의 침실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치미는 서러움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잡아 부수거나,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 대신에 주먹을 꽉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러움에 몰려 눈물이라도 쏟아버리면 드래곤답지 않은 추태이고, 무언가를 부수거나 집어 던진다면-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이 현명한 드래곤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실은 난장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이 애용하던 소파에는 부스스한 금발의 여인이 널브러져 있다. 아끼던 러그 위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근육질의 거한이 자빠져 누워 있다. 커피와 함께 독서를 즐기던 안락의자에는 술병을 무릎에 올려둔 마법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소파와 안락의자의 사이에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사내가 낑겨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실에 잔뜩 굴러다니는 술병과 남은 안주들을 마법으로 정리하면서, 아리아르텔은 ‘후회’라는 감정에 매몰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 전쯤 있었던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과의 전쟁.&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서…… 라는 대의에 몸을 바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약속을 어길 수 없고, 아리아르텔에게는 요람을 수호해야 한다는 약속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최악의 사태가 온다면. 마왕이 승리한다면. 아리아르텔이 해야 할 일은, 그녀가 수호하는 드래곤의 유산들이 마왕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약속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의 목적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만약 두 마왕의 목적이 세상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멸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드래곤들은 결코 그런 약속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아르텔도 대의를 위해 전장에 투신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즉, 아리아르텔은 전쟁이 두려워 숨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저 비루한 모습으로 웅크려 잠든 침략자의 괴수는 아리아르텔의 사정은 헤아려 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쨌든 너 안 왔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을 먼저 찾아간 것은 아리아르텔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들은 패배했다. 이제 세상에 더 이상 마왕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헬무드에는 여전히 수많은 마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흉포성은 용사가 쥔 사슬에 묶여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완전무결한 승리. 축복해 마땅한 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드래곤의 대표로서 유진 일행을 찾아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에 사라진 그들은 대륙을 떠돌고 있었지만,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하는 동족만 찾으면 되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찾아가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온갖 비아냥을 듣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을 내달라기에 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지 말아야 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정리를 계속했다. 한쪽으로 모은 술병은 그 숫자만 해도 수십 병이다. 저 모든 술병은 아리아르텔의 애장품이고, 하룻밤 만에 비워진 것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와 후회한들 어쩌리. 청소를 마치고, 이불 한 장 덮지 않고 잠이 든 망나니 4명의 몸 위에 이불까지 덮어주었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르텔은 흠칫 놀라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빠르게 펼쳐진 마법이 아리아르텔의 얼굴에 엷은 화장을 덮었다. 그렇게 준비된 아리아르텔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절망은 남아 있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나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우아하게 몸을 돌리며 방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실의 입구에는 말끔한 모습의 베르무트가 서 있었다. 망나니 같은 4명과는 달리, 베르무트는 자신의 방에서 잠든 것이다. 그는 애초에 이 거실에서 펼쳐진,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를 죽이기 위한 술자리를 도중에 탈출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은 자가 한 명도 없는 거실을 보니, 이른 새벽에 방으로 도망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닙니다, 위대한 베르무트. 그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위대한 베르무트. 아리아르텔의 눈동자에 달콤한 꿀이 차올랐다. 그녀는 헤츨링일 적부터 동화책을 읽었고, 대부분의 이들이 그러하듯 위대한 베르무트에게 매료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제로 만난 우둔한 하멜과 현명한 새냐, 용감한 모론, 신실한 아니스는…… 많건 적건 아리아르텔이 품었던 환상을 박살 냈지만, 위대한 베르무트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리아르텔이 상상하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남자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리아르텔. 저택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며칠째 이렇게 엉망으로 쓰고 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제로 그랬다. 베르무트는 몇 번이나 음주가무를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동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제지하려는 베르무트의 사지를 붙잡고 입에 술을 퍼붓는 것을 즐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을 깨울 필요는 없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위대한 베르무트.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용기를 내어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 같아서는 정원의 화단에서 향긋한 홍차라도 마시면서 그가 이룩한 전설들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저 악마들이 언제 일어나 배를 긁으며 정원에 나올지 모르는 일.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아예 저택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권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해야 할 준비들이 있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은 분명한 호의를 품고 있다. 감사한 일이지만, 베르무트는 그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인즉슨, 아리아르텔이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멸망의 마왕에게 부모를 잃은 드래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 어떤 준비 말입니까? 필요한 것은 제가 모두 마련해 드렸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벌써 일주일이나 이곳에서 신세를 지고 있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머물렀다가는 아리아르텔, 당신이 아끼는 술들을 모조리 비우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저희는 오늘 저택을 떠나려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아리아르텔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디어 저 악마들을 내보낼 수 있다. 그렇게 아리아르텔은 그리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악마들이 떠난다는 것은 굉장히 절실하고 반가웠지만- 위대한 베르무트마저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그렇군요, 위대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로 돌아가는 것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쉽군요……. 나는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았습니다. 저 시끄러운 자들의 목소리가 낮았다면, 그대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요. 언제고 바라신다면, 제가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드리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건넨 말에 아리아르텔은 가슴에서 찌르르 울리는 통증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감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리아르텔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정의하기가 버거웠지만, 저 말을 들은 순간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바란 것은 하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약속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저는 드래곤입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위대한 베르무트, 드래곤은 약속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예, 알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게 있어서 ‘약속’이란 단어는 지긋지긋하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평생 약속이란 것을 맺고 싶지 않을 정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상대는 멸망의 마왕에게 부모를 잃은 드래곤. 그런 상대라면 결코 맺고 싶지 않은 약속이라도 맺어줄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르텔. 당신과 맺은 약속이 제 생애 마지막 약속이 될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아리아르텔은 머리를, 가슴을, 영혼을, 망치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느끼며 비틀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 약속’. 그 말은 베르무트가 전한 의도와는 다르게 아리아르텔의 심신을 흔들었다. 마지막 약속이라니! 그 말은 즉…….&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이구 머리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숨을 헐떡이던 아리아르텔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유진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소파와 안락의자 사이에 낑긴 몸을 일으키면서, 뻐근한 허리와 목을 좌우로 돌리고 꺾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 너희 왜 그러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벌써 시간이 늦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아리아르텔이 주저앉아 버린 것일까. 베르무트는 그것에 대해 의문을 느꼈지만, 술이 덜 깨서 미간을 꾹꾹 누르는 유진을 보니 더는 아리아르텔에 대해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각자 돌아가기로 했을 텐데. 설마 잊은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안 잊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끈거리는 머리를 몇 번 흔들자 쓰리고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고 두통이 사라져 정신이 말끔해졌다. 유진은 입을 쩝쩝 다시면서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잊지는 않았는데, 막상 돌아가려니 돌아가기가 싫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 본가에는 네 아버지도 있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는 한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아서 말이야. 내가 앞으로 한 일 년 돌아가지 않아도 크게 서운해하지는 않으실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기 자신이 ‘효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집에서 지낸 시간보다 밖에서 지낸 시간이 많던 점? 그거야 ‘세상을 구한다’라는 대의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자식이 큰일을 하겠다는데 하나뿐인 진짜 혈육인 아버지가 저것 하나 이해해 주지 못하실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깥을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주제에 연락은커녕 신변파악조차 제대로 안 되는 점?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버지도 별걱정은 하지 않으실 거다. 유진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자신이 어디 밖에 나가서 맞고 다닐 놈이 아니란 점을 아버지에 열렬하게 피력해 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아버님’은 네가 돌아올 때마다 항상 눈물을 펑펑 흘리시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엉망인 머리카락을 마법으로 정리하던 세냐가 유진을 힐긋 보면서 쏘아붙였다. ‘아버님’…… 유진은 그 단어에 실린 힘과 무게에 영혼이 움푹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 와서 저런 것을 지적하거나 신경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 아버지가 나 어릴 적부터 눈물이 많으셨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이 탓도 있겠지. 원래 남자는 나이 먹으면 눈물이 좀 많아지고 그래. 저기 모론 봐라, 저 새끼도 툭하면 눈물 펑펑 흘리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직까지 바닥에 엎어져 있던 모론을 발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이자 친구들이 나만 남겨두고 전부 죽어버리고, 후손들과 떨어져서 100년 넘도록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괴물을 잡다 보면 누구나 눈물이 많아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서 말했다. 그 말에는 모두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베르무트는 침묵을 넘어 몸까지 파르르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 미안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으려 할 때가 돼서야 모론은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하다니, 베르무트,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사과는 필요 없다. 네가 당시에 의존할 수 있던 것은 나뿐이었고,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었지 않나?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껄껄 웃으며 베르무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말에 베르무트는 감동하여 모론의 얼굴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하멜, 우리는 언제 베르무트를 패는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나온 질문에 베르무트의 얼굴에서 감동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게. 언제 패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베르무트르 두들겨 패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 없이 합의된 사항. 베르무트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한 달여 동안 유진과 동료들은 베르무트를 팬 적이 없었다. 그냥 함께 대륙을 떠돌며, 술을 먹고, 떠들고, 자고, 그런 한량 같은 생활을 보냈을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생각에, 여기서 패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베르무트 님을 패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닙니까?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베르무트 님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패고 싶습니다. 아주, 아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 그걸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저희끼리 있을 때 패버린다면 그건 몰래 패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베르무트 님이 저희에게 처맞았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뭐가 문제라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아니스는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베르무트 님을 팬다면, 그 모든 사람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 위대한 베르무트가! 옛날에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로 인해 저희가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베르무트 너, 역사에 그냥 돌아온 용사, 돌아온 전설, 숭고한…… 뭐 이런 것만 적히길 바란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안 돼. 아, 물론 우리는 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그냥 너를 줘팰 거고, 그걸 본 사람들은 네가 처맞은 이유에 대해 많은 추측을 남기겠지. 그거면 충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와 유진, 세냐가 완벽한 호흡으로 베르무트를 몰아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무어라 항변조차 할 수도 없었다. 모론에게 도움을 바랄 수도 없다. 지금 모론은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베르무트를 주먹으로 때릴지 발로 때릴지 도끼로 때릴지를 고민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일 생각은 아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심스러운 질문에 유진이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안 죽이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왜 죽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 제국의 라이언하트 본가는 전쟁이 끝난 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로원주와 길레이드, 카르멘 등 가문의 어른들은 각국의 지배자들과 함께 전쟁의 수습에 매진하느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택에 돌아오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상황에서 가문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가 바로 가모 애니실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에서의 승리. 모든 마왕의 죽음. 그리고 위대한 베르무트의 귀환. 그 모든 것은 대륙에 있어서는 무궁한 영광이겠지만, 당장의 애니실라에게 있어서는 노이로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 각지에서 찾아오는 정보 길드원과 기자들. 차마 황궁의 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모양인지, 그들은 라이언하트의 저택 앞에 진을 쳤다. 거기에 또 각지에서 찾아온 추종자들. 돌아온 베르무트를 추종하는 자들까지 합친 인파가 저택의 담벽 앞을 빼곡히 채웠을 때, 애니실라는 드레스가 아닌 갑옷을 입고 부채가 아닌 검을 들고서 저택의 문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꺼져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 자리에서 애니실라가 보여야 할 것은 무궁한 영광을 누리게 될 라이언하트의 가모다운 패기와, 그러면서도 가문을 안팎으로 보듬는 자애로운 귀부인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래서 애니실라는 검을 차되 검은 뽑지 않고, 기사들을 대동한 채로 조용히 연설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설의 내용을 축약하자면,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사유지이니 귀찮고 시끄럽게 굴지 말고 꺼져달라는 뜻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제, 아니, 대륙 모든 지도자들을 더한 것보다 큰 위상을 갖게 될 라이언하트 가문. 그곳의 가모이자, 차기 가주의 친모가 바로 애니실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가 직접 갑옷을 입고 나와서 사유지에서 물러가 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데 어찌 물러가지 않고 배길 텐가? 그 순간에 애니실라가 뒤에 배치한 기사들과 엘프들, 그리고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뭔지 모를 물건들과 멀리서 매연을 뿜어대는 용광로 등은 애니실라의 발언에 아주 작은 힘을 실어주었고, 사유지를 무단으로 점거하던 인파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다음으로 애니실라는 부산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계의 분위기를 통제했다. 방계의 몇몇 힘 있는 가문들은, 위대한 베르무트도 귀환했으니 라이언하트가 아예 제국에서 독립하여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주장을 보내왔다. 혹은, 300년 전에 위대한 베르무트가 거절했던 공국이라도 이번에야말로 건국하자는 주장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러한 주장들은 애니실라도 제법 구미가 당겼지만- 아무리 본가의 가모라도 저런 문제들에 결정권은 가질 수 없다. 애니실라는 하멜의, 아니, 유진의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하다는 것은 십수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책임한 잠적 이후로 한 달. 탁상에서 나눌 수습은 얼추 끝났고, 이제는 진행할 것들만이 남았다. 전쟁이 벌어졌던 평원은 그 전역이 국가 중립의 호국원이 되어 거대한 추모비와 더불어서 여러 시설이 건립될 예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라이언하트 본가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은 끝났다. 엘프 종족을 괴롭히는 마병도 사라졌다. 그 말은 즉, 더 이상 라이언하트 본가에 엘프들이 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엘프 사냥꾼과 노예 매매상? 라이언하트의 이름이 신만큼, 아니, 신이 라이언하트에 있다. 누가 감히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가 비호하는 엘프를 건드리겠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엘프족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사마르 대수림에 돌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바타가 대족장으로 있는 조란은 대수림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고 엘프를 예우한다. 지금 대륙에서 엘프를 소유하고 있거나 해를 끼치려 한다는 것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기가 되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라이언하트 본가 숲의 엘프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라이언하트의 숲과 엘프들은 공생을 넘어 한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도 이해하고 있다. 일찍이 심어놓은 세계수의 묘목도 묘목이지만 엘프들이 정령과 조화를 이뤄, 지금 숲은 생명력과 마나가 가득하다. 이것은 미래에 라이언하트의 기사들을 키울 든든한 밑거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 드워프들은 떠나지 않는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은 끝났다. 드워프들은 라이언하트 저택 근처의 공방을 철수하기는커녕, 매일같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며 용광로에 쇳물을 끓이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전쟁의 공적으로 키옐의 시민권을 요구했기에, 시무인에서의 송환령도 소용이 없다. 애당초 시무인의 국왕은 라이언하트의 눈치를 보느라 드워프를 불러들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애니실라가 앞장서서 드워프들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이러니저러니 해도 드워프 명장 수십 명을 가문 부지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특혜다. 스스로 나간다면 붙잡지는 않겠지만, 떠나라고 등을 떠밀 수는 없다는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해서 확장되는 숲과 공방. 그만큼 저택의 부지는 줄어든다……. 당장은 몰라도 지금 같은 현상이 수십 년 이어진다면, 라이언하트는 기사 가문이 아닌 숲지기나 대장장이 가문으로 바뀌어버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는 결단을 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도 돌아왔고, 전쟁도 끝났다. 그러니 300년 동안 굳건했던 본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떠날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의, 아니, 대륙 제일의 명문가. 라이언하트가 어디로 본가를 옮길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사를 결심했지만, 애니실라는 위치까지는 정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치를 결정할 사람은 모든 책임에서 도망친 시조님과 유진이어야만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명한 세냐 님이 아롯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는 피톤치드가 가득한 정원에 앉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뿜어지는 매연을 응시하며 차를 마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저택보다 거대해진 공방은 한시도 거르지 않고 열기와 매연을 뿜어댄다. 다행인 것은 마법사들이 공들인 정화 마법 덕에 매연이 대기 중에서 정화된다는 점이지만- 눈으로 보이는 연기는 선명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방에서 연기가 안 나오면 작업하는 맛이 나지 않는다는 드워프들의 고집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롯에 돌아오신 세냐 님은 다인돌프 아브람 국왕과 대마법사들과 면담을 가졌고, 녹색 광장에서 연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향후 일정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아마 높은 확률로 라이언하트에 오시지 않을까 싶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테이블의 옆에는 애니실라와 함께 가문의 내실을 담당하는 집사장이 서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같은 시간, 신실한 아니스 님과 신령한 크리스티나 님이 유라스에 돌아오셨습니다. 두…… 분 역시, 교황청에서 교황과 추기경들과 면담을 가진 뒤에 백색 광장에서 연설이 예정되어 있으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 토벌의 한 축이었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령한 크리스티나’. 저 신실한 아니스가 몸에 깃들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의적인 별명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 일찍이 라이언하트 저택에서 크리스티나를 보았던 가솔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 껄끄럽고…… ‘아!’ 하는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찬가지로 모론 님도 루하르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분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돈…… 으흠, 아만 루하르 전화와 면담 뒤에, 하멜른 광장에서 연설하시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집사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언제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니, 약 4시간 전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비슷한 때에 돌아오셨다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 시조님과 유진은 돌아오지 않는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들었지만,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서 불법침입자들 앞에 섰을 때 이상으로 예리한 기백을 내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황궁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자코 옆에 앉아 있던 길레이드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습이 얼추 마무리되고서 저택에 돌아온 지 사흘. 길레이드 역시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함께 고민하고 역할을 분담할 신군의 간부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길레이드는 가문에 홀로 남아 모든 것을 조율한 애니실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조님이라면 몰라도, 유진 그 아이가 제 발로 황궁에 찾아갈 리는 없지요. 그럴 사람이었다면 길레이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망치지도 않았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인, 도망이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도망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장의 모두가 너무 흥분해 있었소. 그럴 수밖에 없었지. 수천 년 세상에 군림했던 ‘마왕’이란 존재들이 모두 죽었고, 마족은 더 이상 인류에 위협이 아니게 되었으며, 세상 모두가 듣고 자란 영웅들이 눈앞에 현신해 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길레이드는 그 순간의 감동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꾹 쥐고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그분들이 떠나지 않고 남았더라면, 과도하게 흥분한 수십, 수백만에 달하는 군중이 다른 문제를 벌였을 수도 있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문제?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제가 듣기론 유진의 말 한마디로 모두가 침묵했다 들었습니다. 유진 그 아이의 능력이라면 수백만의 군중이라도 침착하게 말을 따랐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든 영웅들을 비호하고 싶었지만 총명한 아내를 속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분들은 많은 일을 해내셨소. 몹시 지쳐 계셨지. 반면에 우리는 그분들이 베푼 은총으로 부상과 피로를 떨칠 수 있었고. 그래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지쳤어도 그 자리에서 도망쳐서 한 달이나 잠적한 것은 너무한 일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음…… 부인. 유진 그 아이는 저번에 반년이나 잠들었잖소?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긴 시간 잠들지 않을까 싶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장에서 사라지고 며칠 후에 대륙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솔직히 말하자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떠나지 않고 남았다고 해도 수습에 별 도움은 되지 않았을 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을 운영할 때만 해도 그랬다. 대부분의 업무는 간부들 선에서 마무리했고, 유진이 한 것은 결정을 내리는 것과 마왕과 직접 싸우는 것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분들은 몰라도…… 유진은…… 음……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리고 사실 영웅님들은 정무의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지……. 그렇지 않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을 듣고 나서야 애니실라는 납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저는 유진이 황궁에 갔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리고 황궁에 갔다면 진즉에 저희에게도 연락이 왔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환영이 거북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를 감안해서 연회 준비는 하지 않았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롯과 유라스, 루하르에서는 이미 귀환한 영웅들을 위해 대대적인 축제가 준비 중이다. 수도 광장에서의 연설이 끝난다면 즉시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도 마땅히 그래야 할 테지만, 문제는 유진이 요란한 연회와 축제를 즐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도 연회는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애니실라는 황궁과 방계의 인사들도 부르지 않았고, 지금 라이언하트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모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기온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몰래 저택에 들어와 있을 수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도 안 되는 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온의 농담에 웃으며 대꾸하려던 애니실라가 그대로 굳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쌍둥이 중 시안은 몇 시간 전, 약혼자인 아일라 공주와 함께 루하르로 떠났다. 아일라는 용감한 모론의 직계 후손이고, 몇 년 후에는 루하르 왕가와 혼약으로 맺어질 사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시엘과 제하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최근 시엘은 별채에 머무르면서 제하드에 곰살맞게 구는 등 점수를 따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 한 시간 전에 애니실라가 티타임의 의향을 물었을 때도 시엘은 제하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둘은 ‘준비를 마치고 나가겠다’라고 대답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라고 해봐야 별것 없을 텐데, 이건 너무 늦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니나는 어디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뿐만이 아니다. 시종장인 니나의 모습도, 그녀를 보좌하는 나리사와 레베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셋의 공통점은 유진의 전속 시종이라는 점. 니나야 지금은 저택을 총괄하는 시종장이지만, 유진이 저택에 있을 때는 시종장보다는 전속 시종으로서 유진을 담당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농담으로 말했던 기온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감은 적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가 옆의 별채. 눈물을 훌쩍거리는 제하드의 앞에 유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리사와 레베라는 제하드의 옆에서 계속 손수건을 넘기고 있었고, 니나는 의자에 앉은 베르무트에게 차를 따르고 있었으며, 시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게 무슨…….”&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으로 보고 있지만 이해하기 힘든 상황. 별채에 온 셋은 일단 베르무트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 시조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유진을 힐긋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뻔한 전말은 이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도한 환영을 원치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초의 눈을 속이는 것이야 둘에게는 쉬운 일이었고, 베르무트는 왜 자신이 라이언하트 저택에 들어오는데 좀도둑처럼 담을 넘어야 하는 것인지 납득이 잘되지 않았지만- 어쨌건 둘은 몰래 담을 넘어, 라이언하트로 들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와 애니실라를 찾아가기 전. 유진은 제하드의 얼굴이 아른거려 먼저 별채에 들렀다. 제하드와 시엘이 막 별채를 나가 정원으로 가려던 참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하드는 유진을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니, 유진은 일단 자리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들이 뭐 못된 짓 해서 감옥 갔다가 돌아온 것도 아니고. 마왕 죽이고 세상 구하고 왔는데 대체 왜 얼굴 보자마자 우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격스럽고 대견해서 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하드는 벌겋게 부은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장에 가지도 못한 내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 나한테 너 같은 아들이 태어난…… 음……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네가 자랑스럽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심스레 움직인 시선이 베르무트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일단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베르무트의 주변에는 까마득한 본가의 후손들이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 가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을 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는데,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하드의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조…… 베르무트를 대하는 본가 식구들의 태도가 유진은 조금 불편했다. 족보로 따지자면 유진 라이언하트는 베르무트의 까마득한 후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렇다고 유진이 베르무트를 시조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나뿐인 아버지가 시조님 운운하며 눈물을 쏟는 것은, 유진의 입장에서는 집에 데려온 친구를 보고 가족들이 극존칭을 하며 눈물을 쏟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새끼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조님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저거 다 따지면 아버지 아들인 제가 저 새끼보다 더 대단한 근본을 가지고 있다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전생에 무엇이건 지금은 내 아들이잖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뭐랍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예, 다녀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면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길 와서 피곤한데 일단 방에서 쉬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근슬쩍 방으로 도망치려던 유진을 가로막은 것은 애니실라였다. 그녀는 부채를 꽉 잡으면서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은 일이 있었잖니? 네게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고, 식구끼리 나눠야 할 이야기도 많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뭐…… 저 말고 베르무트한테 들으면 되지 않을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 입을 연 것은 베르무트였다. 유진이 꼬이고 꼬인 족보에 어색함을 불편함을 느낀다면, 베르무트는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후손들과의 해후가 어색하고 민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혼자서 도망쳐 버린다면? 베르무트는 후손들에게 둘러싸여 끔찍하게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유진은 무조건 이 자리에 남아서 조율자가 되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이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일단 밥이나 먹죠. 본가 식구들끼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 님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안 계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필 오늘 흑사자성에 가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거기서 식사를 하셨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온다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질 것 같다. 안 부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유진은 순간 들었던 생각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안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일단 권유라도 해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이 권유지, 카르멘이 거절할 리가 없다. 그녀는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고, 당장 흑사자성에서 워프게이트를 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무조건 베르무트를 붙들고 자신이 누구인지, 라이언하트의 피가 어떤 광인을 낳았는지를 베르무트에게 각인시킬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1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가의 넓은 식탁은 이런저런 요리가 가득 올라왔다. 대륙 각지의 특산물, 지역을 대표하는 진미,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 기본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향토 요리들까지. 식사의 흐름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좋을 대로 음식을 골라 먹는 뷔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 카이네스. 그녀는 라이언하트에 시집을 오기 전까지도 키옐에서 유서 깊은 명문 귀족가의 영애였다. 어린 나이부터 신분에 마땅한 교육을 받아온 애니실라는,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종류의 식사는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즐기지 않는다. 아니, 즐기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싫어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이런 종류의 식사를 좋아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접시에 음식이 몇 점 덩그러니 올려지고 주변에 소스만 점찍듯이 뿌리는 플레이팅도, 간에 기별도 안 가는 한입 크기의 음식이 순차적으로 나오는 것도 싫다. 그래서 본가에 갓 양자로 들어온 어린 시절, 유진은 본가에서 밥을 먹고 와도 꼭 별채에서 한 끼를 더 먹곤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이야기다. 나이를 먹고 충분한 발언권을 갖게 된 뒤, 유진은 애니실라를 설득해서 본가의 식탁에 간섭했다. 어차피 매일 먹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밖에 나가 지내다가 가끔 돌아와서 집밥을 먹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가 성격이 죽지 않은 옛날이라면 애니실라도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도 먹으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애니실라는 옛날처럼 까탈스럽지도 독기에 차 있지도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도 넘볼 수 없는 본가의 안주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여유.&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식들은 모두 자랐고, 시안은 차기 가주로 확정된 데다 루하르 왕국의 금지옥엽과 약혼까지 맺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이 쓰이는 쪽은 시엘이지만…… 세상에 오르지 못할 나무가 있을까. 애니실라는 딸의 가능성을 믿었다. 오르지 못한다면 열 번 백 번이라도 찍어서 넘어트리면 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점들이 애니실라의 성격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특히 애니실라가 가장 자애로워질 때는, 지금처럼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챙겨줄 때다. 이 넓은 식탁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수십 가지의 디저트들은 사실상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먹이기 위해 애니실라가 준비한 것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입술에 묻었잖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만 해도 애니실라는 두 꼬맹이의 곁에 서서 챙기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라이미르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수 닦아주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애니실라가 딸, 혹은 손녀처럼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듬는 저 두 꼬마가 사실은 애니실라보다 몇 배는 나이가 많아 최소 200살이 넘는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 방의 수십 명 중에서 누구도 저 불편한 진실을 지적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명.&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 수십 명이다. 식탁에 앉은 것은 베르무트와 본가의 식구들뿐이지만, 이 방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있다. 음식과 식기를 나르고 음료를 채우는 시종들뿐만 아니라, 식탁 뒤의 벽에는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의 대장들. 심지어 은퇴한 원로원의 노인들까지 있었다. 그들은 식탁에 앉는 것을 정중히 거부하고, 단지 벽 뒤에 서 있기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야 뻔했다.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조. 3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돌아온 전설. 위대한 베르무트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다. 사실 보는 것이야 한 달 전에도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짧은 만남에서 만족을 거둔 사람은 아무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장들만 있는 이유? 아무리 라인이언하트의 만찬실이 넓다고 해도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 수백 명이 들어오는 것은 분명하다. 위대한 베르무트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많고 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계급순으로 자른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자신에게 꽂히는 선망 가득한 시선과 더불어 식탁의 요리가 어색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상하게도 베르무트의 앞에는 길고 긴 전통을 자랑하는, 특히 북쪽 루하르 왕국과 키옐의 향토 요리, 거기에 보양식이 잔뜩 몰려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만에 돌아왔으니 옛날 음식들을 그리워할 것이라 생각했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는 동안 음식도 못 먹고 기력이 쇠했을 테니 보양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이유는 어찌 납득이 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럴 필요는 없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베르무트는 그러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왜 그러고 나온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평온한 얼굴로 식사하는 동안, 유진은 내심 각오했던 질문을 맞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오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질문을 들으니 숨이 턱 막히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유진이 정면을 보지 않고 접시의 음식을 노려보자, 맞은편에 앉은 시엘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꺼낸 것은 잘 접힌 신문이었고, 그것을 힐긋 본 유진의 얼굴은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신문은 당연히 유진도 알고 있다……. 한 달 전에 대륙 전역에 호외로 나간 신문.&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뭘 할 줄 알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거 보여줄 거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보여줘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배시시 웃으면서 신문을 활짝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문의 1면은 단 하나의 사진만이 게시되어 있다. 누구나 인정할 올해의 사진. 향후 수십, 아니, 수백 년. ‘시대’를 증명하고 대표할 사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구한 영웅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쓰러뜨리고 나온 6명의 영웅들. 사진 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선 6명은- 다시 봐도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이처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자 엉거주춤 서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름대로는 환한 미소라고 지었겠지만 어딘가 인위적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누가 하고 싶었던 건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벗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는 없으니 함구하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하자고 한 거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라니까. 베르무트가 하자고 한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로 옆에 있는 베르무트의 이름을 팔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무트가 하자고 했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라이언하트에서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그런 말 한 적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새야,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마고 겪은 고생이 얼만데, 내 말에 좀 맞춰주면 덧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그래도 우리 보는 앞에서 시조님한테 욕을 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핀잔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길레이드와 다른 식구들은 물론이고, 식사를 지켜보던 기사단 대장들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하멜, 네게 많은 빚을 졌다. 그렇지만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중얼거렸다. 뿌득. 유진의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를 종이처럼 구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내가 하자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하고 싶은 건 나였는데, 구도 정한 것은 내가 아니야. 크리스티나가 정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짓말이 아니다. 사진이 찍힐 테니 다 같이 모이자고는 했지만, 어깨동무를 밀어붙인 것은 바로 크리스티나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즐겼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즐겼는지 안 즐겼는지 네가 어떻게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알기는? 사진에서 웃고 있으니 알지. 안 즐겼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때로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거 알아? 가주님이 이 사진을 커다랗게 새로 만들어서 거실에 장식하실 거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가뿐만이 아니라 흑사자 성이랑, 방계 가문들도 그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길레이드를 쳐다보았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마시던 길레이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진 사진이잖느냐. 기념비적인 사진이기도 하지.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했다는 증명이다. 앞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로 저 사진을 떠올릴 것이다. 대륙의 아이들이 배우는 모든 교과서에 저 사진이 실리겠지. 그리고 라이언하트의 모든 후손은, 저택에 장식된 영웅들의 모습을 보며 미래의 자신을 그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의 막힘없는 대답에는 한 치의 모욕이나 조롱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저 사진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생각하기에, 가끔…… 길레이드는 미적인 부분에서 남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차마 그 감상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십여 년 전, 길레이드가 하멜이 멋지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식할 사진을 원하신다면 다시 찍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이미 생생한 순간을 기록하였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득이 불가능하다. 유진은 눈을 감고서 한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키지 않는 이상, 저 사진이 미래로 이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럴 줄 알았다면 병신 같은 미소를 짓지 말고 근엄하게 입이라도 다물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조차 늦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세상의 거대한 의지에 순응하기로 결심한 순간에, 카르멘은 말없이 베르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로원과 흑사자 기사단을 대표하여 베르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카르멘 외에 누가 베르무트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겠는가? 한 달 전의 전쟁에서 그녀는 주먹이 부서질 때까지 멸망을 때렸다. 카르멘이 생각하기에 그곳에서 멸망에게 가장 많은 공격을 퍼부은 것은 자신이었으며, 만약 멸망의 안까지 ‘소리’가 울렸다면 그중 가장 큰 소리는 주먹이 부서지는 소리였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 가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 님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입이 열렸다. 드디어. 베르무트는 마음을 가다듬고서 시선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 동안 대륙을 떠돌면서, 동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 중에서 ‘카르멘 라이언하트’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유진이 의도적으로 카르멘의 성격에 대해서 감췄기 때문이지만, 베르무트는 그러한 사실은 알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격 같은 것을 떠나서 베르무트가 카르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유진을 제외하면 라이언하트의 최강자라는 것. 베르무트가 의도하여 남긴 백염식의 한계를 간파하고 그러한 깨달음을 라이언하트에 전파했다는 것. 그리고 외모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녀가 가주인 길레이드의 고모이며 독신이고, 라이언하트 가문의 최고 연장자라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씀을 낮춰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에 제 후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가 무슨 자격으로 300년이 흐른 지금 나타나서 시조랍시고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씀은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자격이라니요? 시조님이 없으셨다면 라이언하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 님.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지금은 어떻게 전해졌을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저는 자상한 남편도, 훌륭한 아버지도 아니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의 저는 오직 필요를 위해 가문을 세웠습니다. 본가와 방계에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된 죽음으로 모두를 속였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 님과 다른 분들이 저를 라이언하트의 시조라며 존중해 주시는 것에는 큰 감사를 느낍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을 후손이라고 하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필요를 위해 만들었던 라이언하트를 지금까지 가꾼 것은 여러분이 있었기 때문이고, 멸망의 뱃속에서 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이 저를 불러주었기 때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것인지 베르무트의 대답에는 막힘이란 것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식사는 어느새 멈췄다. 시종들조차 움직임을 멈추고서 베르무트를 응시했다. 벽 쪽에 선 원로들과 대장들은 감동한 얼굴이었고, 길레이드와 제노스, 제하드 등은 어느새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서 무릎 위에 양손을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조님은 저희의 목소리를 들으셨던 것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시커먼 어둠이 끈적거리는 멸망의 뱃속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덕에 제 자신을 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멸망을 흔드는 울림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울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르멘이 반응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울림…… 어떤 울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의 본신을 공격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이! 멸망의 마왕의 안까지 울렸던 것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그렇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조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릎에 올라왔던 양손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카르멘의 양손은 이미 치료가 되어 하얗고 매끈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주먹은 그때 부서졌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 전. 저…… 사진이 찍히고 난 뒤. 주변에 몰려온 라이언하트의 후손과 만났을 때. 가장 앞에 서 있던 것이 카르멘이었다. 확실히, 그때 그녀의 주먹은 부서져서 피범벅이었던 기억이 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주먹으로 멸망의 마왕을 직접 쓰러트릴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드래곤클로가 부서져도, 헤븐 제노사이드가 부서져도, 제 뼈가 부서져도, 저는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래곤 클로와 헤븐 제노사이드가 대체 무엇일까.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지만, 베르무트는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카르멘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하는 것. 미래를 여는 것에 이 주먹을 더하고 싶었습니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시조님이 ‘울림’을 들으셨다면…… 그중에는 틀림없이 제 주먹이 부서지며 전한 울림도 있었을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 라이언하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르멘이 따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베르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직접 걸음을 옮겨서 카르멘의 옆으로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들은 울림에는 필시 카르멘 님의 주먹이 전한 울림도 있었을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식탁을 빙 둘러서 카르멘의 옆까지 다가가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제가 라이언하트에 돌아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카르멘 님과 다른 모두가 피를 흘려주었기 때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조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부름에 베르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베르무트는 카르멘의 곁에 서서 그녀의 주먹에 손을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라이언하트의 시조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분에게 언제나 ‘시조’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저는 그렇게 불리고 싶습니다. 똑같은 라이언하트의 일원이자, 여러분의 가족으로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먹에 손이 얹어지는 순간. 카르멘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면서, 떨리는 눈으로 베르무트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족…… 가족……!”&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우리는 가족이지 않습니까? 똑같은 라이언하트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버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더듬 내뱉은 말에 베르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버지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족…… 이지 않습니까? 시조…… 아니, 베르무트 님은, 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저의 머나먼 아버지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틀린 말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제가 카르멘 님에게 아버지라고 불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베르무트 님을 아버지라고 여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은 모든 라이언하트의 아버지십니다. 아아, 그때 부서진 주먹이 이렇게 나은 것은…… 이렇게 아버지의 손을 마주 잡기 위해서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주먹에서 전해지는 혈육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베르무트 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렸다. 방금까지의 대화에서 왜 이런 흐름이 된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저 간절한 눈길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모든 라이언하트의 아버지라는 말이 베르무트에게 은근한 설득력을 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것을 바라신다면, 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버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더 이상 주먹을 쥐지 않고, 베르무트의 손을 꽉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의 친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도 위대한 베르무트가 새로이 아버지가 된다면 천국에서 기뻐하실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아버지와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딸인 제가 직접 술을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머뭇거리다가 슬쩍 유진 쪽을 보았다. 이 난감한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건네달라는 무언의 요청이었지만, 히죽이며 웃어대는 유진의 얼굴을 보니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에 다른 것이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가온 것은 도움의 손길이 아닌 새로운 술잔이었다. 베르무트는 식탁에서 미끄러져 온 술잔을 받으며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딸도 생기고 좋겠다 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잡한 얼굴로 카르멘에게 술을 받는 베르무트를 보며 유진은 짝짝 박수를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2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아롯에 돌아오고 나흘. 그녀는 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첫날에는 국왕과 마탑주들을 만났고, 그 직후에는 녹색 광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연설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물과 환호 속에서 이어진 연설이 끝나고서 수도 펜타곤에서는 축제가 시작됐다. 이튿날, 세냐는 축제의 행렬에 참가하여 펜타곤의 곳곳을 행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 날. 네 개의 마탑과 마법사 길드에서 뽑힌, 다음 세대의 리더를 꿈꾼다는 젊은 마법사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가벼운 식사로 시작된 자리였지만, 참석한 젊은 마법사들은 음식보다 세냐의 잔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이것이 문제다, 라는 말로 시작된 잔소리는 결국 개개인의 지도편달로 이어졌으니, 결국 모두가 만족한 자리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흘째인 오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으로 아롯 왕가와 의회의 회의에 참석했다. 저들은 이후의 일정을 조율하려 했지만, 세냐는 단호한 태도로 모든 일정을 거절했다. 나흘이나 시달려 주었으니 해줄 만큼은 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곧 죽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아무리 못해도 백 년은 넘게 살 텐데. 왜 이리 난리를 떠는 거야? 그래, 내가 너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대신 그거 다 한 뒤에는 앞으로 아롯 땅은 밟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롯과 평생 척지겠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더 강요하겠는가? 그렇게 오전의 일정을 마무리한 후.&lt;/p&gt;&lt;p&gt;&lt;br /&gt;&lt;/p&gt;&lt;p&gt;녹색마탑의 최상층. 본래 이곳은 새롭게 녹탑주가 된 라이나인 보어스의 집무실이지만, 요 나흘 동안은 세냐가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라이나인은 마탑 최상층보다는 자신의 저택을 통째로 내주겠다고 말했고, 세냐가 바란다면 아롯 왕궁조차도 통째로 쓸 수 있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냐는 이곳, 녹색마탑의 최상층이 마음에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박물관이 되어버린 저택과 더불어, 이곳은 300년 전에 세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널찍한 의자에 앉아서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로 금이 갔던 환상의 마안. 그 후로 사용하지 않고, 꼬박꼬박 영력을 부어준 덕에 환상의 마안은 말끔히 회복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으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을 거두고, 누아르 제벨라의 영혼을 마안에 봉인했다. 당시의 세냐는 그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누아르가 죽어서 사라진다면, 그녀는 영원한 악몽이 되어 유진의 마음에 눌어붙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누아르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환상의 마안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세냐는 자신이 아무리 용을 써도, 본래 주인이던 누아르 제벨라만큼 환상의 마안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것을 진즉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과적으로 내가 옳았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웠을 때. 누아르를 사용해서 환상의 마안을 제어하지 않았다면 과연 승리할 수 있었을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럴 가능성은 몹시 낮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전투에서 모두의 전력은- 유폐의 마왕에게 미치지 못했다. 환상의 마안으로 꿈과 현실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유폐의 마왕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아붙일 대로 몰아붙여서, 유폐의 마왕이 가진 힘을 모두 쏟아내게 만든 덕에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독이 발동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마왕이 죽었으니, 앞으로 환상의 마안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봉인하는 것이 깔끔한 결말이기는 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고작’ 전투로만 국한하기에는 환상의 마안이 가진 힘은 너무나도 크다. 마법사적인 욕망으로는, 환상의 마안의 권능을 완전하게 마법으로 재현하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욕망만으로 환상의 마안을 봉인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법’조차도 핑곗거리일 뿐. 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대로 마안을 봉인한다면, 누아르는 유진의 악몽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유진이, 하멜이 어떤 성격인지를 잘 알았다. 누아르를 죽이는 순간. 유진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품었던 감정은- 아가로트에게만 영향을 받은 감정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유진은 자신과 누아르의 전생을 ‘떠올렸다’. 그리고 둘은 악몽 속에서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건 호소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에게 눌어붙은 ‘누아르 제벨라’라는 악몽은, 결국 서로가 이루지 못하고 진득하게 고여 버린 감정이다. 그러한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는커녕 더, 더 진해질 것이다. 평소에는 떠올리지도 않을지라도, 언젠가…… 돌발적으로 떠올라서 유진을 괴롭게 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끝났는데 환상의 마안을 봉인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정말로 그것뿐인가? 누아르가 죽는 순간. 세냐가 느꼈던 감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가 악몽에서 속삭였던 말. 세냐는 ‘절대로’ 누아르와 유진 사이의 교감에 도달할 수가 없다. 서로를 애증하여 죽일 수밖에 없고, 죽음으로서 서로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파괴적인 관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관계 따위 세냐는 바라지 않지만, 둘의 마지막에서…… 세냐는 질투란 감정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대로 누아르는 죽고, 어쩌면…… 아니, 반드시, 언젠가 환생할 것이다. 이 ‘두려움’에 대해서는 누아르가 직접 세냐에게 이죽대기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 하멜 사이에는…… 아주 진한 운명의 끈이 존재하죠. 언젠가 환생한 나는, 반드시, 하멜을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 부정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세냐는 그 순간에 느꼈던 부정조차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죽는 순간에 느꼈던 질투. 언젠가의 두려움.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의할 것을 모두 정의하고 나니 하나의 감정이 남는다. 세냐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정심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의 마녀의 환생. 몽마로 태어난 누아르 제벨라. 전생의 감정을 이루기는커녕, 유진과 무조건 죽고 죽일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누아르 제벨라를 동정했다. ‘죽이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에 도달했는데도 죽이는 것을 선택한 유진을 동정했다. 그래서, 누아르의 혼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했는데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에서 유진과 약속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누아르 제벨라의 혼을 해방하기로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으로는 세냐의 마음이 편치 않다. 세냐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며 환상의 마안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주색 안개 속에서 누아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세냐를 응시하다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조금…… 시간이 흐른 것 같고. 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아주 멀쩡해 보이고. 이곳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에 봉인되어 있는 동안에는 바깥을 관측할 수가 없다. 누아르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사의 방…….]&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변을 살피던 시선이 책상의 명패에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녹색마탑주, 라이나인 보어스…… 아하하. 내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녹탑주 자리는 공석이었는데. 그녀가 새로 녹색마탑주가 된 모양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말이 많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상황을 설명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뭐예요?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죠? 당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 승리했다는 것일 테고…… 흐흥, 당연히 하멜도 죽지 않았겠죠? 하멜이 죽었다면 당신도 따라 죽었을 테고. 어쩔 수 없어 죽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얼굴일 수는 없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냐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이 세냐의 통제하에 있는 이상, 누아르는 절대로 환상의 마안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영혼일 뿐인데도 요염한 빛을 발하며 세냐의 눈동자를 들여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다, 끝난 모양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그런 것 같은데요? 유폐의 마왕이 쓰러졌다고 해도 멸망의 마왕이 남아 있었는데. 흐흥, 내 도움 없이 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린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건방 떨지 마. 네 도움은 필요하지도 않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응, 그럴 것 같기는 해요. 내 능력은 멸망의 마왕과는 그리 상성이 좋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유폐의 마왕과 싸울 때는 내 도움이 필요했잖아요? 설마 그것마저 아니라고 하지 않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지난 이야기로 생색내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앞으로의 이야기를 할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세냐에게서 물러선 뒤, 마치 자신의 방인 것처럼 근처의 소파에 편안히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어쩔 생각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나에게 꽤나 복잡한 감정들을 가진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어요. 설마,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죠? 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당신 생각 이상으로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툴러.]&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 편안한 죽음은 사치스러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누아르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죽은 네가 유진의 악몽이 되게 두지 않을 거야. 언젠가 네가 환생해서 찾아오게 두지도 않을 거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네 혼을 해방하지 않을 거야. 많은…… 생각을 했어. 이미 죽은 너를 어떻게 해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네 ‘죽음’이 유진에게 악몽이 되지 않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누아르는 살아 있을 적과 똑같은 미소를 머금고서 세냐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그 시선에 꿰뚫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툭.&lt;/p&gt;&lt;p&gt;&lt;br /&gt;&lt;/p&gt;&lt;p&gt;활짝 열린 공간에서 떨어진 것은, 인간과 똑같은 크기를 가진 구체관절인형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혼을 여기 처박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사이에 네크로맨서가 된 거예요? 영혼을 다른 것에 처박는다니. 흐음, 내가 아는 흑마법사 중 그런 재주에 능통한 계집이 하나 있었죠. 아멜리아 머윈. 그러고 보니, 당신이 아멜리아 머윈을 가지고 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멜리아 머윈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박살 났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아멜리아 머윈의 기억을 통해 흑마법을 이해했죠. 그녀에게서 마력도 뽑아내서 사용했고. 그러면서 흑마법에 홀라당 빠지기라도 한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흑마법도 결국은 마법이야. 그리고 나는 마법의 여신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 편의주의적이군요. 뭐 좋아요, 당신이 그러겠다면야. 그래서? 나를 저 장난감에 처박고,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모든 걸 보게 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어진 말에 누아르의 뺨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은 평화로워졌어. 모든 마왕이 죽었고, 더 이상 위협은 남아 있지 않아. 이제 남은 것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뿐이지. 누아르 제벨라. 너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지켜보게 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했지? 네게 죽음과 환생은 사치스럽다고. 나는, 네게 그 모든 것을 박탈하는 거야. 너는 죽을 수 없고, 환생할 수도 없어. 너는 계속해서 저 인형의 몸에 갇혀서…… 나와 유진이 행복한 것을 지켜보게 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세냐를 응시했다. 세냐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벌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침묵 뒤에 누아르의 입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나에게 벌을 내리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하하…… 제쳐두도록 하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세냐 메르데인. 제가 아까 말했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투르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이건…… 정말, 이기적이고, 지독하고, 모욕적인 자비로군요. 그리고 굉장히 효과적이에요. 확실히, ‘완벽한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있어서, 이것 이상의 형벌은 없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생각은 어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소파에 기댄 머리를 돌려 뒤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도 마음을 다잡고서 시선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 앞에 유진이 서 있었다. 문밖에서부터 대화를 들었다. 도중에 참지 못하고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듣고만 있었다.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은 해방하기로 약속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답은 설명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납득하지 못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내 고집에 어울려 줘.”&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려움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건 너도 알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중얼거림에 유진은 눈을 감았다. 어두운 침묵이 흐르는 중에 누아르의 키득거림이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꼴사납고 촌스러운 구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 세냐의 손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는 소파에 앉은 누아르와, 눈을 감고 선 유진을 번갈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어서 그리워하는 것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서…… 살아서……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것과 비슷하게 남은 것이 훨씬 좋잖아.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경험담인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이죽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당신을 하멜에게 투영하고 있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빽 고함을 지르며 다시 한번 책상을 두드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은 상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주 엿 같은 기분이거든……! 나는 유진이 그딴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워할 생각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그래야지!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 너도 알잖아. 가끔, 꿈을 꿀 수도 있다는 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닥에 널브러졌던 인형이 둥실 떠올랐다. 세냐는 그 인형을 누아르의 옆에 던져놓고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너희에게는 이기적이고, 지독하고, 모욕적이고, 꼴사납고, 촌스럽다는 거. ……됐어, 싫으면 관둬. 당장 인형도 박살 내고, 저 갈X의 혼을 해방해 버릴…….”&lt;/p&gt;&lt;p&gt;&lt;br /&gt;&lt;/p&gt;&lt;p&gt;“10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0년은 네 고집대로 해. 그쯤 있으면 나도 미련 같은 거 남지 않을 것 같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의견은 상관없는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옆에 앉은 인형을 이리저리 관찰하던 누아르가 인형의 팔을 잡아 흔들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0년이라, 시간이 애매한데. 기왕 할 거면 100년은 어때요? 어차피 당신들 100년은 살 거 아니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닥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살아 있을 때보다 태도가 더 차가운 것 같아. 아하, 혹시 그거예요? 정을 떼는 거? 하멜, 당신도 알잖아요? 미운 정도 정이라는 거. 차라리 만족해 버리는 것이 미련이 남지 않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족?”&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를 들면, 나랑 같이 잔다든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파격적인 대답에 유진과 세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안 되겠어요. 나랑 자면 오히려 미련이 더 많아질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질색하고 중얼거렸다. 세냐도 똑같이 욕설을 쏘아붙이려 했지만, 진지한 얼굴로 인형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누아르의 모습에 말문이 막혀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나 해서 묻는데요, 제가 이 안으로 들어간다면. 이 밋밋한 인형의 모습이 되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혼의 모습대로 투영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자주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세냐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이 인형에는 생식기능도 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질문에 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그는 당연히 세냐가 험한 욕설을 내뱉을 것을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세냐의 표정은 굉장히 미묘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는 못 낳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의 머뭇거림 뒤에 돌아온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고, 누아르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만 못 낳나 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런 쓸데없는 기능을 처넣은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이것도 하나의 창조잖아……. 내 마법을 더 진보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훌륭해요. 세냐 메르데인. 당신은 정말로 천재, 아니, 마법의 여신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인형의 팔을 들어 짝짝 박수까지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미쳤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갑자기 왜 찾아온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중얼거림은 들었지만 무시했다. 세냐는 착잡해 하는 유진의 얼굴을 힐긋 보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래는 내가 오늘 찾아가려고 했는데. 혹시 무슨 일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이야 있긴 한데, 너만큼 어이없는 일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무슨 일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본가를 옮길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세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키옐 라이언하트 본가가 이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몇 주일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곧 세냐의 눈동자가 샐쭉 휘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날 찾아왔는지 알겠네. 이 세냐 님의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지? 하긴, 저택 부지를 통째로 옮기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돼? 숲을 통째로 뽑아서 옮겨 심으면 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흘 동안 본가 어른들과 이사를 두고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에는 본가 식구들만 이사를 가고, 저택부지는 엘프들이 편하게 사용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러한 계획은 엘프들이 거절했다. 시크나드를 필두로 한 엘프들은 이미 바깥 생활에 적응해 버린 탓에 세계수가 있는 대수림에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기나긴 삶의 일부를 라이언하트에게 은혜를 갚는 것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워프들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따라오겠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지금이랑 별다를 것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보다 훨씬 더 큰 영지로 가면 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의 묘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숲과 엘프들. 계속해서 확장되는 드워프들의 공방. 그 모든 것을 옮기고서도 본가의 생활권을 침범하지 않을 만큼의 거대한 영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도 주인이 되지 않은 텅 빈 땅.&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 본가의 새로운 터전은 바로 판데모니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2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밀어버리지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을 내려다보면서 유진이 했던 말이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판데모니엄은 밀리지 않았다. 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헬무드는 더 이상 ‘제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판데모니엄은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에서 제일 강성했던 제국의 수도다. 제국은 몰락했고, 판데모니엄은 본래 위치한 자리에서 뽑혀 나와 유라스와 헬무드의 중립지역에 떨어졌다. 한때 판데모니엄을 상징했던 불야성과 콘크리트의 빌딩도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밀어버리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판데모니엄의 상공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너진 성벽. 대부분의 건물도 무너졌다. 그 파괴의 대부분은 멜키스가 벌인 일이고, 살아남은 것들은 멸망의 마왕의 강림과 이후의 전투에 휘말려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때. 뭐 좀 알겠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툭 던진 질문에 곁에 서 있던 베르무트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잠시 판데모니엄을 내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면을 반전시켰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의 도시는 이 공간의 이면에 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손가락이 허공을 긋자, 살짝 벌어진 공간의 틈을 통해 다른 풍경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높다란 콘크리트의 빌딩. 유진이 전에 보았던 판데모니엄의 풍경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밀어버리고 새로 만든 줄 알았더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팔짱을 끼고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없는 후보지 끝에 판데모니엄을 라이언하트의 새로운 터전으로 정했다. 사소한 문제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가 키옐의 영토와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인데……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황제와 담판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욕심 많은 황제는 라이언하트의 가주에게 키옐의 대공 작위를 내리고, 현재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판데모니엄을 대공의 영토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판데모니엄을 ‘라이언하트 공국’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되면 키옐 제국 입장에서는 여전히 라이언하트를 품 안에 둘 수 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이점을 얻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재 판데모니엄은 헬무드의 변경, 유라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판데모니엄이 라이언하트 공국이 된다면, 키옐은 황실은 아주 간단하게 유라스를 경계하면서 공화국으로 변모 중인 헬무드의 내정에까지 간섭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리 욕심이 많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타깝게도 황제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과적으로 라이언하트는 대공 작위를 거절했고, 이 거대한 땅덩어리는 온전히 라이언하트의 땅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존의 도시는 너무 과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이 불야성이자 빌딩의 숲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유폐의 마왕의 막대한 마력 때문이다. 물론 유진의 힘이라면 헬무드 전역은 몰라도 판데모니엄 하나는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겠지만- 유진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은 기형적인 도시였다. 그 모든 지식은 유폐의 마왕이 몇 번이나 세계를 넘어오며 축적된 것. 유진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도시를 복원해서 유지해 봤자 머잖아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의 디자인은 내가 할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득키득 웃음이 섞인 목소리에 유진은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에는 팔짱을 끼고 선 누아르가 있었다. 세냐가 말했던 것처럼, 인형의 몸은 누아르의 영혼에 맞게 변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황혼의 마녀의, 아리아의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인형의 몸은 누아르가 살아 있을 적과 똑같은 모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황혼의 마녀 아리아가 아닌,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로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이 있다면 순식간에 건물을 일으킬 수 있죠.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세냐 메르데인의 협력이 필요하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유진에게 몸을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제벨라 시티를 기억하죠? 그거, 전부 다 내가 만든 거예요. 제벨라 시티를 만들 때는 아직 내 격과 마안이 부족해서, 직접 현장을 지휘하곤 했죠. 하지만 지금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뚱한 얼굴로 누아르를 바라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의 폐허를 모조리 밀어버리면 황무지만 남는다. 새로 도시를 세우려 한다면, 어디서든 인력은 빌릴 수 있다. 뭔가를 새로 만들고 싶어서 몸이 잔뜩 달은 드워프들. 거기에 아롯 마법사들과, 대륙 각국에서 인력을 지원받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솔직히 가늠도 되지 않았다. 유진은 ‘이런 일’에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영지의 크기를 생각해 볼 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년은 걸릴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이제 와서 나쁜 일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은 당신도 알잖아요? 애당초 나는 당신과 세냐 메르데인에게 반란을 일으킬 수도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누아르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영혼은 당신들의 것이니까요. 나도 기왕 이렇게 된 것, 현재를 즐기고 싶다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허튼짓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네…… 감각이 신용이 안 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각? 맙소사! 하멜, 다른 것은 몰라도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라서 물어요? 하멜! 당신은 항상 똑같은 옷만 입잖아요! 그 다홍색 셔츠. 그리고 망토! 혹은 라이언하트의 제복!”&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뭐 어때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누아르 제벨라예요. 거대 제벨라 기업의 총수! 헬무드를 넘어, 대륙의 유행을 선도하던 사람이라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전에 누아르는 헬무드의 공작이면서 여러 기업을 운영했다. 그녀가 회장으로 있던 제벨라 기업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세 가지가 건설과 연예기획사, 패션이다. 누아르는 죽었지만, 그녀가 생전에 남긴 것들은 여전히 헬무드에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기억을 제벨라 시티를 떠올렸다. 그 도시는 오직 향락이 가득한 도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영지는 앞으로 계속 라이언하트가 다스릴 텐데. 네 지랄 맞은 취향이 들어간 건물들이 있다면 영지민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가주가 참 흥이 넘치는구나 생각하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말이에요, 제벨라 시티를 그렇게 만든 것을 애초에 도시의 목적이 테마파크였기 때문이에요. 나의 제벨라 건설은 그런 도시 말고 다른 평범한 도시도 잘 만든다구요. 내가 300년 동안 헬무드에서 공사한 도시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한테 말은 해보지. 그래서, 만약 시공한다면 얼마나 걸리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 보자……. 영지의 크기랑…… 흠, 저쪽은 어떻게 할 건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성벽의 바깥. 신군과 헬무드의 마군이 격돌하고, 멸망의 마왕의 죽음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누르의 시체가 사라졌던 전장.&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곳은 호국원으로 만든대. 중앙에 거대한 추모비를 세우고. 그리고 뭐…… 이거저거 많이 들어온다던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봤자 전쟁 박물관 정도겠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저곳이랑 아예 연결해 버리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구한 라이언하트의 도시와 연결되는 것이 보다 상징적이지 않아요? 영웅의 광장이나 용사의 광장, 뭐 그렇게 해서. 당신들 신상도 세우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이 만들고 싶다는 아카데미도 저쪽에 세우는 것이 어때요? 딱이네, 광장과 추모비를 아예 교정에 두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야기를 들을수록 유진의 마음은 점점 누아르에게 도시 디자인을 맡기는 쪽으로 기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은 안 만들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누아르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만약 이 자리에 세냐가 있었다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꽥 소리를 지를 발언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세냐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재 세냐는 라이언하트의 본가에서 숲을 통째로 옮길 준비와, 사마르 대수림의 세계수를 이곳에 옮겨질 숲과 연결할 준비를 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으로 긴 시간 잠이 들 세계수를 빠르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다. 현재 라이언하트 본가의 숲에 심어진 세계수의 묘목은 세 그루. 대수림의 세계수와 비교하자면 한참이나 작지만, 성장 중인 묘목들을 마법을 통해 공간을 격하여 세계수와 접목시킨다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비슈르를 잠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은 과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과하다. 그 대답에 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히 과하죠. 바다와 거리도 멀기도 하고. 아무튼, 저쪽까지 작업한다면…… 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판데모니엄과 평원 쪽을 번갈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지민은 얼마나 생각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당신은 아무런 생각이 없군요. 괜찮아요, 내가 생각해 줄 테니까. 어디 보자……. 기존 판데모니엄의 인구수가…… 흠, 도시가 완성된다면 대륙 각지에서 이주하고 싶다는 사람이 넘칠 텐데. 미래를 생각하면 인구 밀도를 조정해서…… 영지민은 키옐 제국민으로만 채울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음…… 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베르무트를 힐긋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왜 보는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뭐…… 계획 없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문제라면 나보다 모론이 더 도움이 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그렇겠죠.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당신은 키옐에 정착하고서 자식 낳는 것에만 열중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이죽거림에 베르무트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누아르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설마 그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 제국민으로만 채우면 너무 키옐만 좋은 꼴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요. 하멜, 그럼 이것부터 들어보죠. 당신이 세우고 싶다는 아카데미는 대체 뭐 하는 곳이에요? 설마 수학이나 그런 것을 배우는 곳은 아닐 테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검도 가르치고…… 다른 무기나…… 싸우는 법? 마법도 배우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뭐, 다른 것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싶으시다? 거기에 도시는 국경 없이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이주할 수 있고? 아예 종족의 벽도 없애지 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몰라도 나는 모든 종족에게 평등한 입장이야. 엘프나 드워프, 뭐, 거인도 좋고, 수인이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유진은 품 안의 사슬을 의식하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상검증만 확실하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구만 충족된다면 어떻게든 산업은 굴러가고, 초기 예산은? 라이언하트의 금고를 열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국가들에게 지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구하면 당연히 줄 것이다. 유진의 대답에 누아르가 짝짝 박수를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시를 굴리는데 필요한 초기 예산은 각국의 지원금으로 충당. 아마 산업이 안정되면 자금이 순환되고 돈이 불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렇지 않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리하자면……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이주민들은 국경도 종족도 제한이 없어요. 필요한 절차만 밟는다면 누구든 이주해서 살 수 있죠. 그런 다문화 도시라면 관광산업만으로도 잔뜩 벌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 다양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박수 소리가 커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인맥을 쓴다면 교사는 얼마든지 채울 수 있죠. 정 안되면 당신들이 직접 교단에 서도 되고. 흠, 그것만으로 아카데미의 입학생은 만원일 거야. 아니면 입학증을 팔아도 좋겠네요. 부르는 게 값일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전 무기술에 기사 수업, 마법, 신학, 정령술…… 아, 드워프도 있죠? 멋지네요, 아주 이상적이야. 아마 고금을 통틀어 이런 도시를 세울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일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꼬는 거야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꼬다뇨! 저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의 라이언하트 신도시는 내 제벨라 시티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가 될 거고, 그걸 만드는 것이 바로 나인 거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팔을 끌어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예 나도 교단에 서볼까요? 아카데미라고 꼭 어린 학생만 가르칠 필요는 없잖아요. 어른을 위한…… 흠, 어린 학생을 위한 성교육도 괜찮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소리하지 마.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노골적으로 가슴을 부벼대는 누아르를 떨치고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헬무드에서 제벨라 기업의 사원들부터 불러줘요. 그리고 세냐 메르데인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은 어떻게 쓰겠다는 건데? 꿈과 현실을 연결해서, 뭐 그럴 셈은 아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걸 안 하면 시간이 엄청 걸린다구요. 걱정하지 말아요, 악몽으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바벨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냐 메르데인의 마법과 동조시켜서, 현실을 개변하고…… 그렇다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힘드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을 돌리던 누아르가 베르무트를 홱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의 이면에 있다는 도시의 자재를 쓰도록 하죠. 그래도 되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식간에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기 버거워 한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베르무트는 이런 것에 조예가 없었기 때문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방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 뒤에 이 폐허와 평원에 대륙에서 가장 멋진 도시를 만들어주죠. 모든 종족의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동시에 향락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만한 대도시에 유흥가가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하멜, 당신이 안 된다고 말해도 도시 사람들이 간절히 바랄 거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큐버스 클럽은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법에 따라 인도적인 선에서 조정하도록 하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공의 보수는, 하멜, 당신과의 하룻밤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 소리 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입맞춤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꺼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매정한 사람 같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달아 거절을 들었는데도 누아르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약속된 시간은 10년. 그 정도의 시간을, 서로를 죽이려 들지 않고, 증오가 희미해지고서 지낸다면……. 누아르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쿡쿡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나 가져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목걸이를 잡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가 붕괴하는 순간에 누아르에게 받았던 반지들. 하멜과 누아르의 이름이 각인된 한 쌍의 목걸이. 누아르가 저렇게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더 이상 목걸이를 걸 필요가 없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목걸이의 반지를 빼려 하자, 누아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엄밀히 말해서,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이도 못 낳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죽었다고 생각해요. 언데드 비슷한 것으로 남아 있을 뿐. 그러니까 그 반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톡. 가까이 다가온 손가락이 목걸이의 반지 한 쌍을 두드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가지고 있도록 해요. 정, 나에게 반지를 돌려주고 싶거든……. 후후, 반지를 줄 만한 관계가 되든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끔찍한 소리를 하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걸이의 반지는 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2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제국 유라스, 트레치아 교구.&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이곳의 외딴 수도원에서 자랐다. 그녀는 갓난아기 적에 수도원 문 앞에 버려졌고, 성직자들에게 거두어졌고, 10살이 되었을 적에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의 양녀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도원에 버려지고, 성직자에게 거두어진 순간부터 크리스티나의 미래는 ‘성직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한 미래에서 커다란 변화점이 되었던 것이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의 양녀가 된 것이다. 양부가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단한 성직자인 만큼, 크리스티나도 ‘평범한’ 성직자여서는 안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성장할수록, 크리스티나의 외모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성녀인 ‘신실한 아니스’와 닮아갔다. 성당에 찾아오는 신도들은 어린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보며 ‘성녀의 재림’이라고 수군거리기까지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연스럽게 크리스티나는 ‘성녀’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크리스티나의 자의가 아니었지만, 어린 크리스티나는 주변의 기대와 기도를 거절할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세르지오 로게리스에게 직접 신학을 가르침 받았고, 역대 성녀와 후보들이 의식을 치렀다는 빛의 샘을 찾았으며, 어엿한 ‘성녀 후보’가 된 뒤에는- ‘빛’의 가르침을 알리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알카르트 교구에 부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세르지오의 양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크리스티나의 외모가 점점 신실한 아니스를 닮게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린아이조차 알 수 있었던 노골적인 시선들. 신학을 가르칠 적에 양부가 보이던 강압적인 태도. 고문과 다르지 않던 빛의 샘에서의 기도. 피를 흘릴 때마다 기묘한 빛을 발하던 샘물과, 기도 중에 부유하던 의식이 느끼던 불쾌감, 희미하게 들리는 흐느낌들의 정체.&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묵묵히 앞을 보았다. 한때 ‘빛의 샘’이라고 불리던 유라스의 성지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거대한 공동묘지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년 전. 유진은 이곳에서 수많은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을 죽였다. 그들이 용사를 시험하고 죽이려 들었고, 마땅한 대가를 치렀다. 깊고 깊은 구덩이에 수많은 시체가 던져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도 적지는 않았으나, 구덩이에 떨어지고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빛의 샘은 붕괴했다. 이곳이 결코 ‘성지’라고 불릴 만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인조적으로 성녀를 양산한 것으로도 모자라, 성녀가 되지 못한 후보들을 시체를 샘의 원천으로 삼았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하멜의 동료였던- 신실한 아니스마저 샘에 공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날 유진이 참지 못했던 것은.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질렀던 것은. 빛을 섬긴다는 유라스의 성직자들의 폐단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고 싶다던, 천국의 존재를 바라던 아니스의 죽음을 모욕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분노를 다스리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빛은, 자신을 섬기는 이들을 베어 죽이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식하기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묘지의 중앙. 새하얀 비석 앞에서 크리스티나는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이곳에서 죽은 성기사와 이단심문관 대부분은 시체의 일부라도 건져, 각자의 묘비를 가졌다. 하지만 이 비석에 적힌 이들은 시체의 일부조차 갖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오랫동안 샘에 가라앉았던 이들. 다음의 성녀 후보를 위해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전대의 성녀 후보들. 그중에는 ‘후보’조차 되지 못하고, 빛의 샘을 요람으로, 관으로 삼아 죽은 갓난아기들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을 재현할 모조화신을 만들기 위해 스러진, 크리스티나의 언니들. 이 비석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국.”&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기도의 끝에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이 끝나고 떠돌았던 한 달.&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나먼 바다.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해역 어딘가에서, 새하얀 땅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직접 빛을 영접했다. 빛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크리스티나는 확실하게 ‘빛’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국.&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들은 흑마법이나 다른 이유로 영멸하지 않는 이상 머나먼 바다에 도달한다. 그곳을 거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곳을 과연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빛의 ‘천국’에 대해서는 이전에 유진에게 이야기를 들었었다. 윤회하기 전에 잠시 거치는 장소. 이승에서 오염되거나 망가진 영혼은, 천국에서 빛에 의해 정화된 뒤에 윤회의 굴레에 오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과정에서 빛은 영혼에게 최후의 신앙을 뽑아낸다. 그렇게 축적된 신앙이 유진에게 이어졌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행은 빛의 성역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시간 동안 유진은 빛의 앞에 앉아, 마치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침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멸망을 끝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을 바라며 거신에게 잡아먹힌 머나먼 과거의 신들. 그들이 세상을 위해 안배하고 환생시킨 것이 유진이었기에, 대화가 불가능한 빛에게 있어서 유일한 예외 역시 유진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흘 뒤. 자리에서 일어선 유진은 그렇게 말했다. 멸망이 끝났다는 것은 빛도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굳이 찾아와서 사흘 동안이나 빛와 교감한 것은- 기나긴 시간 동안 저런 형태가 되어 남은 옛 인연들에 대한 인사와 더불어, 빛과 새로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국은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확신을 가지고서 중얼거렸다. 성역을 떠나기 전, 크리스티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도달했을 때와 지금의 빛이 다르다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과거에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중 가면 거기도 뜯어고쳐야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더 그럴듯한 천국으로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의 천국이 어떻게 달라지고 완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유진에게 묻지 않았다. 천국의 형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된다. 크리스티나는 천국에 대한 궁금증을 언젠가, 언젠가…… 죽은 뒤를 위한 기대로 남겨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당장이라도 확인하러 갈 수 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묘비를 뒤로하고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진즉에 죽은 몸이니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시면 안 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아니스가 하는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란 것은 안다. 예전부터 했던 말 아닌가. 아니스가 천사가 되어 세상에 남은 것은 과거의 미련을 이루기 위해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 300년 전에 이루지 못했던 목표. 멸망의 끝으로 300년 전 아니스의 미련은 이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로운 미련이 남아계시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도 어느 정도는 이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은, 시스터가 사라진다면…… 굉장히 슬퍼하실 겁니다. 세냐 님과 모론 님, 베르무트 님도. 그리고 당연히 저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제가 이렇게 당신의 몸을 공유해 버리면, 크리스티나,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누릴 수 없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상관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추억은 온전히 당신만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대해서는 세냐 님이 방법을 만들어주셨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동묘지를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라파엘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게이트까지 모시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의 방문이 유라스 일정의 마지막이다. 오늘로 크리스티나는 유라스를 떠나, 라이언하트의 본가로 넘어간다. 교황청은 성대한 배웅식을 준비하려 했지만, 성녀들은 그런 배웅 따위 바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그녀들이 갖게 된 ‘성녀’라는 이름은 앞으로 평생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유라스는 감히 성녀들을 감시할 수 없겠지만, 수많은 빛의 신도들이 성녀를 기억하고 바라는 것까지는 성녀들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법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폴로가 이끄는 마차에 올랐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의 눈을 통해, 맞은편 자리에 놓인 커다란 여행 가방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방법은…… 아주 훌륭해서, 제 안에 남은 미련을 키워 버렸지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여행가방을 무릎 위로 가져왔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가방의 내부는 공간마법에 의해 일그러져 있다. 크리스티나는 그 안에 손을 넣어, 큼지막한 인형을 꺼내 맞은편에 앉혀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조차도 인형의 몸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시스터가 그렇게 하지 않으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그것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듭니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저는 정말로 세냐가 노망이 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대해서는 크리스티나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달리, 성녀들은 누아르 제벨라의 소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누아르가 예전처럼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겪었던 과거의 위협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누아르 제벨라가 기구한 운명에 희롱당했다는 것은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이 삶을 주는 것은 과한 친절이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님은 그러한 삶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내리는 형벌이라고 말하셨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계집애가 정말로 그런 이유만으로 삶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알고 있습니다. 세냐 님은 무르신 분이죠. 하지만 순수한 동정심만으로 누아르 제벨라에게 자비를 베푸실 만큼 어리석은 분은 아니십니다. 게다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이곳에서 판데모니엄까지의 거리는 멀어 풍경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현재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일 판데모니엄의 방향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는…… 유능하죠. 필요에 따라 여러 쪽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요한 만큼 사용한 뒤에 성불시키면 될 텐데. 10년이나 되는 시간을 주다니…… 세냐의 성격을 보건대, 막상 10년이 지나면 못된 정이라도 들어서 성불을 유보시킬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지 못하도록 저희 ‘둘이서’ 견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인형의 손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시스터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시스터에게는 결코 세상을 떠날 수 없는 많은 미련이 남아 계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에는 순진해서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승을 떠나 천국에 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던 생각은 크리스티나와의 대화를 통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예전에도 마냥 순진하지는 않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쎄요. 독설을 떠나서 휘둘리기 좋은 성격이기는 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군요. 언제부턴가는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휘둘리고 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두가 시스터께 보고 들으며 배운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아니스는 쿡쿡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아악…… 크리스티나의 뒤편에서 아니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맞은편 인형의 옆에 살며시 앉으며 눈썹을 찡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람들이 비웃지 않을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을 말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 죽은 제가, 성직자이고 성녀인 제가, 죽음이란 섭리를 거스르고 인형에 깃들어 살아가는 것을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방긋 웃었다. ‘시스터’라고 부르지 않았다. 똑바로 불린 이름에 아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의 뱃속에서, 유진 님과 아니스 님, 세냐 님, 모론 님이 베르무트 님께 하신 말씀 중에서 말입니다. 제 가슴에 가장 깊게 스며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행복해질 자격이 있고, 그건 아니스 님도 마찬가지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손이 아니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하지만 마주 잡은 손에 감촉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앞에 있는 아니스는 결국 영혼이자 천사일 뿐이며, 눈에 보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라도 피부의 온기는 느낄 수 없다. 음식을 먹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모두가 크리스티나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님. 당신은 30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육체는 성유물로 가공되셨고, 일부는 빛의 샘에 가라앉았으며, 다른 일부는 많은 후보를 거쳐…… 갓난아기일 적 제 몸에 이식되었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아니스 님은 시체마저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안식을 갖지 못하고, 천사가 되어 저와 함께하셨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바란 일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하신 일이시죠.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의와 신앙이 아닌, 저라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호소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크리스티나. 알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누군가가 아니스 님의 선택을 추한 몸부림이라 비웃는다면, 제가 직접 그들의 뺨을 때리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저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왼뺨을, 제가 오른뺨을 때리면 되겠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주 잡은 손이 놓였다. 아니스는 곁에 앉은 인형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에 대해서는 세냐의 설명이 있었지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다고. 하지만 아이는 낳을 수 없다고 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구를 계속하면 그러한 점도 보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딱히 아이를 낳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당신과 하멜의 아이를 보는 것도 즐거울 테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이라니…… 출산은 아무래도 세냐 님이 먼저 하셔야지 않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낳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요? 얼굴도 붉히지 않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려보았지만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붉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음으로 휘어진 눈, 얇은 틈으로 푸른 눈동자가 번득였다. 아니스는 저 미소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광기에 자신도 모르게 영혼을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은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2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른 새벽, 시엘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시간이지만, 시엘은 이 시각에 눈을 뜨는 것이 익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대에 앉아 목을 몇 바퀴 돌리고, 양 발바닥을 붙여 앉은 뒤에 상체를 앞으로 쭈욱 늘렸다. 그 뒤에 침대에서 내려와 관절을 풀면서 가볍게 몸을 풀어주고, 침대 옆에 놓인 물을 마신 뒤에, 세안과 양치를 마친 뒤에 옷을 갈아입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을 나오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대부분이 잠든 시간.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복도를 소리 없이 걸었다. 지금 시간에 일어나서 방을 나서는 것이 시엘에게는 일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 본가에서 태어난 만큼 어린 시절 노력이란 것이 부족했던 적은 없다. 이제는 그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된 장남, 이오드 라이언하트가 가주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는- 어머니의 만족과, 본가의 입지를 위해서.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었을지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요한 복도를 걸으며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그녀뿐만은 아니었다. 쌍둥이가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노력한 것은, 어머니의 만족과 본가에서의 입지뿐만은 아니다. 13살. 지금은 사라진 라이언하트의 전통인 혈계식에서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고, 파격적으로 본가의 양자까지 된 유진과 경쟁하기 위해. 아니, 경쟁이라기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3살. 어린 나이의 쌍둥이는 유진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가보다 훨씬 뛰어난 방계. 그저 방계로만 남았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유진은 본가의 양자가 되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애니실라는 시류를 읽는 눈이 밝았기에, 유진을 적대하는 노선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린 쌍둥이를 앞에 앉혀놓고 했던 말은, 유진과 진짜 가족이 되라는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혈계식에서 유진의 실력을 직접 보았던 것도 쌍둥이에게는 호재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유진의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그 나이의 남자아이는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을 동경하며 친해지고 싶어 하는 법. 그러나 시안은 동경을 넘어 형제가 되기를 바랐고, 명문가 도련님의 자존심은 어떻게든 유진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을 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도 비슷하다. 다만, 시엘은 시안과 달리 여자였다. 피가 짙게 이어진 가족만으로 이뤄진 본가에서만 살았던 시엘에게 있어, 갑작스레 나타난 유진은- 어릴 적부터 ‘가족’이나 ‘남매’라는 인식이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춘기의 감정이 덜했다면. 유진이 아롯으로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흑사자가 되는 대신, 유진을 따라갔다면. 일찍부터 이 감정을 인정하고 유진에게 호소했다면…… 그런 종류의 노력을 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됐을 리가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정을 모르던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시엘은 유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시엘이 어떤 방향성의 노력을 했건, 유진에게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에게 있어서 ‘과거’란 절대로 떨칠 수 없는 것이었다. 동료들과의 인연. 그것에서 축적된 감정. 미처 이루지 못한 미련. 시엘이 아무리 호소한들, 시엘의 감정은 유진에게 도달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예쁜 옷을 입어도. 매일 새벽마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둘러도. 그렇게 더 강해져도. 그러한 노력은 시엘이 간절히 바라는 답은 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전부 끝나 버린 전쟁에서도…… 그랬다. 시엘이 그토록 강해지고 싶어 했던 이유는, 유진과 함께 싸우고 싶어서였다. 유폐의 마왕이건, 멸망의 마왕이건. 그 전투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어 유진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나 멀었다. 도달하지 못했다. 전쟁에서 시엘의 활약은 암전의 마안을 사용하여 모론을 불러온 것 정도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서 그녀는 많은 마족과 마물을 쓰러트렸다. 멸망의 마왕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누르를 추락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전부다. 시엘은 유진과 같은 전장에 설 수 없었다. 두 번의 전쟁에서 시엘의 위치는 언제나 똑같았다. 마왕이 없는 전장. 유진이 마왕을 쓰러트리고 돌아오는 것을 바라며 기다릴 수밖에 없던.&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앞으로 수백 년간은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대륙 어딘가에 전쟁이 벌어질지라도 유진이 나설 일은 없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시엘도 유진과 ‘함께’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도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것은…… 많은 미련 때문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모를 기대? 그것과는 상관없이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아니면 단순한 습관? 정확한 이유는 시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 시간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고,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은 잘 오지 않고, 새벽 수련을 거르면 몸이 찌뿌둥한 것을 보면…… 결국 습관 때문이 아닐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계단으로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도 근처의 서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약간의 집중으로 기척의 주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시엘은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우선 서재로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은 도서관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는 본가의 서재. 자리에 앉지 않고 책장 근처에 서서 책을 읽고 있던 베르무트는, 자그마한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어오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심스레 열린 문틈 사이로 시엘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베르무트를 응시하다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큰아버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난기 가득한 부름에 베르무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호칭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아니면, 할아버지라고 불러드릴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름으로 부르는 편이 좋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는 없어요. 큰아버님은 라이언하트의 시조님이시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큰아버님이란 호칭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주님에게는 손위 형제가 없으시니, 제가 큰아버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구요. 이렇게 부르는 것이 굉장히 가족답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키득키득 웃으며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일주일 전 함께했던 식사 이후로 카르멘은 베르무트를 ‘아버님’으로, 시엘은 ‘큰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제가 방해를 한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이 오지 않으세요? 혹, 본가가 불편하시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원래 잠이 많지 않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는 재미난 책들이 많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깥에는 나돌지 않는, 라이언하트의 역사를 정리한 책. 시엘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본가의 자제인 시엘은 당연히 어릴 적부터 저 책을 몇 번이나 읽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큰아버님이…… 음…… 돌아가신 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싶습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책상에 올려놓은 책을 응시하며 잠시 침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베르무트는 절대로 좋은 남편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다. 베르무트는 십수 명의 아내를 두었고 수십 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그들 중에서 조금 더 사랑하거나, 마음을 쓰는 등의 ‘특별함’을 두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자식들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아버지의 휘광을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동시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애정과 관심을 갈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식 중 누군가는 틀림없이 무정한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결정한 본가와 방계의 격차에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베르무트에게 대놓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가, 위대한 베르무트였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에 대한 나쁜 글귀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원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대에 전해질 시조를 완전무결한 초인으로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를 후회하시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르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베르무트는 덮은 책에 시선을 거두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저는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는 하멜을 환생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환생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하멜의 우군으로 사용하기 위해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라도 베르무트는 똑같이 가문을 만들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큰아버님 같은 분도 후회가 있으시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람이라면 누구나 많건 적건 후회할 일을 가지고 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책에서 시선을 거두어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뒤의 후손. 본가의 적통. 그런 것과는 별개로 시엘은 베르무트에게 특별한 인연을 가진 존재다. 베르무트는 오른쪽 눈에 비해 색이 조금 탁한 시엘의 왼쪽 눈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마안은 베르무트가 각성시킨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생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유진의 의식이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려 허무로 빨려 들어갔을 때. 유폐의 마왕의 사슬이 폭주를 진정시키고, 시엘이 유진과 접촉하여 의식을 허무에서 탈출시켰다. 그 과정에서 시엘이 가진 라이언하트의 피에 내재 된 마(魔)의 인자가 발현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그것을 바랐다. 유진의 피에서 발현을 도모했다가는 신성과의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계해서. 함께 있던 시엘의 피를 사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당신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바다에서. 저는…… 당신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심어진 마안의 반동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됐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왼쪽 눈을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몰랐지만, 결과는 좋았잖아요? 저는 이 마안이 마음에 들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렸다가 깨어난 유진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순간. 그 틈을 파고든 공격이 유진을 노렸었다. 시엘은 유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밀쳤고, 그로 인해 왼쪽 눈을 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저는 이 마안을, 큰아버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저는 힘이 한참 부족한데도 유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게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베르무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큰아버님께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의 눈은 흥미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베르무트는 저 질문이 의외라고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에 대한 이야기는 저 말고도 여러 번 듣지 않았습니까? 세냐나 아니스, 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상이란 사람마다 다른 법이잖아요. 저는 큰아버님이 느낀 인상이 궁금해요. 유진과 큰아버님은 서로를 굉장히 의식하던 관계잖아요? 유진은 큰아버님을 라이벌이라고 여기고,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던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상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의 전생을 떠나, 제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낀 인상은…… 흠…… 망나니였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나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 제 동료는 모론과 세냐, 아니스 셋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멜은 용병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었죠. 저는 그 지명도를 엉성한 명분으로 삼아, 하멜을 동료로 삼겠다고 말했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아니스는 거부했죠. 근접전을 벌일 전사는 저와 모론으로 충분했고, 당시에는 용병이라는 직업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거든요. 거기에 하멜의 명성은…… 음…… 그리 좋은 방향은 아니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베르무트는 지금도 하멜과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첫 만남에서 하멜은 기사들을 패고 있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마경으로 넘어갈 배편을 구하고 있었죠. 그…… 협상의 과정에서, 기사들이 하멜을 비웃었기 때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기사들의 팔다리를 하나씩 부러트리고, 그들의 무기를 빼앗았죠. 그 뒤에…… 제가 하멜에게 다가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밥을 먹자고 말했죠. 구경꾼이 잔뜩 몰린 길 한복판에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함께 식당에 갔고, 밥을 먹으면서…… 동료가 되어달라고 말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라고 대답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걸 어떻게 순화해야 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화하지 않으셔도 돼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기보다 X밥 새끼의 말은 들을 생각이 없다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시엘은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에도 성격이 지랄 맞은 것은 똑같았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굉장히 순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동료가 된 후에, 세냐와 아니스가 집요하게 하멜의 성격을 둥글게 빚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빙긋 웃으며 시엘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생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도 하멜의 성격을 변화했겠죠. 저는 설마 그 하멜이 ‘아버지’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확실히. 제가 어릴 때 보았던 유진은, 지금보다 더 지랄 맞기는 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오빠가 조금 놀리니까, 바로 결투를 벌였었어요. 오빠는 한 방에 나가떨어졌고, 토하면서 울었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와 마찬가지로 시엘도 유진과의 첫 만남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베르무트는 입가를 가리며 키득키득 웃는 시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을 좋아합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의 웃음이 뚝 멎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베르무트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묵은 짧았다. 시엘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베르무트의 말마따나 사람은 많건 적건 후회를 가지고 있고, 이미 지나버린 과거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답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포기하면…… 포기하면, 나중에 더 크게 후회할 것 같아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습관처럼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검을 휘두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아무리 검을 휘둘러 강해져도, 유진과 동등해질 수는 없겠죠. 저는 앞으로도 계속 유진의 등을 볼 수밖에 없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침이 밝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으면 잠에서 깬 유진이 나와서 말을 걸곤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그 순간이 좋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물러서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멀어도 보이는 곳에 있고 싶어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가끔. 유진이 나를 돌아보아 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식해서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의외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들 만큼 필사적으로 따라갈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서재에 오기 전에 떠돌던 울적한 기분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큰아버님은 제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시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리가 없잖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 당신의 바람은 결코 비웃음을 당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포기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잖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에 따귀를 맞은 적이 있거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배시시 웃으며 뺨을 어루만졌다. 책상 근처의 창문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힐긋 창밖을 보니 어느덧 새벽이 지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이만 가볼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휘두르러 가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다면 제가 조금 봐드려도 되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괜찮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말을 듣고 검을 봐주겠다고 하신 것은, 큰아버님이 저를 응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족이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마주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연무장에 가 계십시오. 저도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가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재빨리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혼자 남은 베르무트는 책상에 놓았던 책을 책장에 돌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 참…….”&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생에 하멜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성격은 난폭하고 입은 거친 데다, 얼굴은 흉터가 가득했기 때문에. 동료로서 긴 시간을 보냈던 세냐와 아니스는 하멜에게 연심을 느꼈었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서 하멜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을 수 없는 타입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지금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환생할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유진에게 연심을 가진 것은 잘생긴 얼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외모적인 부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매일 불태워지는 수백 통의 연서는, 유진의 활약과 더불어 잘생긴 얼굴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죄가 많구나,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고개를 저으며 서재를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2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결혼 안 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흡.”&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건네진 질문에 유진은 막 목구멍으로 넘기려던 술을 뿜어버렸다. 예고 없이 가해진 공격이었지만 그간의 경험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듯, 시안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의자를 뒤로 기울여서 술을 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케헥, 켁…….”&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시안처럼 공격을 흘려내지 못했다. 목구멍 중간에서 역류한 독한 술 때문에 코와 눈까지 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자기 뭐라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뜬금없는 질문도 아니잖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뒤로 기울였던 의자를 원위치로 돌려놓으면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시안의 방이다. 형제끼리 단둘이 술이나 마시자길래 앞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저런 질문을 하다니. 유진은 입가를 손등으로 벅벅 문지르고서 시안을 흘겨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시킨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시켜서 물어보는 거냐고. 가주님이냐? 애니실라 님? 아니면 혹시 아버지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아니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꼴꼴꼴. 비었던 잔에 황갈색의 술을 새로 부으면서, ‘후보’들에 대해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먼저 떠오른 본가의 어른들 외에도, ‘결혼’에 관해 시안에게 한번 떠보라고 권할 사람은 너무 많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숲에서 지내는 시크나드. 종족도 부모도 다르지만, 시크나드와 세냐는 남매 사이다. 녀석은 세냐와 관련된 문제라면 팔불출 같은 면이 있고, 몇 번이나 숲의 엘프들과 단합하여 유진을 부추기는 분위기를 연출한 적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로베리안과 멜키스. 둘은 며칠 전에 ‘신도시’와 관련된 건으로 아롯을 대표하여 라이언하트 본가를 찾아왔었다. 유진도 함께했던 그 자리에서는 인사를 시작해서 가벼운 사담, 개설 중인 신도시와 아카데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와 라파엘로. 그들도 마법사들과 비슷한 이유로 라이언하트를 찾아왔었다. 부디 앞으로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달라는 황제와 교황의 청탁도 전달하는 것도 방문의 이유 중 하나였지만, 알체스터는 뜬금없이 아카데미의 입학 가능한 나이에 대해 질문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3살이 넘은 아들, 리우 드라고닉을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입학을 희망하는 것은 바로 알체스터 본인이었다……. 배움에는 신분도 나이도 없다지만, 제국의 기사단장인 알체스터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는 없는 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행히 라파엘로는 자신이 직접 아카데미에 입학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에 그는 아카데미의 교과과목 후보로 논의 중인 신학에 관심을 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는 아카데미에 필요하다면 혈십자 기사단의 업무도 뒤로 하고서 신학을 강의할 수 있다고 말했고, 유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편증된 광신도인 라파엘로가 신학을 담당한다면 학생들도 똑같은 광신도가 되어버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아만일지도 모른다. 당장 몇 주일 전에 시안은 아일라와 함께 루하르 왕국에 다녀오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외에 많은 사람. 과장을 조금 섞는다면 대륙 전부가 유진의 행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유명인의 ‘결혼’이란 동네 술집에서도 편하게 떠들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이야깃거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어보고 싶으면 직접 물어보면 되지, 왜 나한테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겠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긴, 형제잖아. 형제 사이면 뭐, 남들한테 안 할 말도 할 수 있는 법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형제……!”&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는 적잖은 감동을 느끼며 유진에게 술잔을 들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누군데? 혹시 세냐나 아니스, 크리스티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분들이라면 널 직접 닦달하시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그럴 것 같아. 그래서 누구냐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어물쩍한 태도가 유진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짠. 유진은 술잔을 부딪쳐 주고서 다시금 재촉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냐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일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일라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외의 이름이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일라 루하르. 모론의 후손, 아만의 딸, 루하르 왕국의 공주. 그리고 시안의 약혼녀. 유진은 눈을 끔뻑거리면서 아까 저택의 복도에서 보았던 아일라를 떠올렸다. 그녀는 모론과 아만을 닮아, 13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련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일라는 유진을 볼 때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저렇게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 언니와 미르 언니는 어디에 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숙한 것은 겉모습뿐. 아일라의 정신연령은 나이와 똑같다. 그래서인지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아일라의 앞에서는 드물게도 ‘연장자’로 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아일라 아가씨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결혼에 관심이 많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 식을 올리기 전에, 네가 먼저 결혼했으면 좋겠다는군. 참고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혼식이 어떤 것인지, 신부가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직 마시지 않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케를…… 받고 싶다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의 결혼은 아일라가 20살이 되었을 때로 예정되어 있다. 결혼식을 참고하고 부케를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유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일라는 시안에게 진심인 모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둘은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외모만 보면 굉장히 잘 어울리기는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은 아일라의 키가 시안보다 작지만, 앞으로 몇 년이 더 흐르면서 모론과 아만이 가진 루하르의 피가 각성한다면? 유진은 예전 본가의 행사에서 보았던, 오빠처럼 근육이 우락부락한 가르기스의 여동생을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표정이 왜 그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시안의 표정을 살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근데 너는 정말로 결혼할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약혼은 결국 가주님과 애니실라님이 정한 거잖아. 아일라 아가씨 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후보는 스칼리아 공주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야 스칼리아는 유진을 신으로 섬기며 독실한 신앙자가 되었지만, 처음 만났을 적에는 설원에서 용병들을 학살하고 스트레스와 악몽에 눈이 까뒤집혀 유진을 공격했었다. 당시 아일라와 스칼리아 중 약혼 상대를 정하지 못했던 시안은, 그때 설원에서 스칼리아를 겪고 난 뒤에 즉시 아일라를 약혼 상대로 선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나는 진심으로 아일라랑 결혼할 생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잔을 내려놓은 시안의 얼굴은 굉장히 진지했고, 그것을 본 유진은 더욱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그……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니까……! 누가 당장 결혼하겠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일라 아가씨가 20살이면 네 나이가 30살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일라가 나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면 나도 거절할 거야. 지금은 물론이고, 7년 뒤에도 말이다. 그런데, 아직은 파혼 이야기만 해도 엉엉 울어버린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세상 끝날 것처럼 엉엉 우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냐? 달래야지! 미안하다고, 파혼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정말 7년이 지나면 아일라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10살 많은 아저씨랑 결혼하기 싫을 수도 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30살이 아저씨면, 나는 뭐 할아버지냐? 아니, 언데드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 그만 돌리고. 너는 결혼 언제 할 거냐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카로운 쏘아붙임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쯤 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매하게 1년쯤은 뭐야? 하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혼은 뭐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당장 하는 거냐? 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는 무슨…….”&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나는 1년쯤 뒤에 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랑?”&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질문 역시 굉장히 날카로웠다. 유진이 말문이 턱 막혀서 눈을 끔벅거리자, 시안이 혀를 쯧쯧 차며 이죽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님? 아니스 님? 크리스티나 님? 누구랑 할 건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 다 같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신히 답한 말에 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진은 저 씰룩대는 입술이 열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셋 다 바라기도 하고, 나도…… 어……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리고, 1년 뒤에 세냐랑 결혼하고, 또 1년 뒤에 아니스랑 결혼하고, 또 1년 뒤에 크리스티나랑 결혼하는 것보다는 아예 한꺼번에 하는 것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욕설을 뱉는 대신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냐 님은 허락하셨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락 비슷한 건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자꾸 대답이 애매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1년쯤 뒤라고 말한 거야. 정리할 거 정리하고, 허락도 확실히 받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놈.”&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뭐…… 경사라고…… 할 수 있군. 아마 아일라는 좋아할 거다. 부케를 많이 받을 수 있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3개 동시에 던질 테니까 잘 받으라고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3개나 던질 거면 1개는 시엘에게 던져주지 그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케흑.”&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도 유진은 마시던 술을 뿜었고, 시안은 재빨리 의자를 기울여서 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저번부터 베르무트가 시엘이랑 가깝게 지내던데. 뭔 일인지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 말을 돌리는군. 시안은 유진을 한심하단 얼굴로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걸 왜 나한테 묻냐? 그리고 보면 알잖아. 매일 훈련을 봐주시던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자기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만 봐주시는 것도 아니잖아. 나도 잘 봐주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보다 잘 가르치디? 그 새끼, 옛날부터 누구 가르치는 건 잘 못 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봐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가르치지는 못하는 모양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적어도 옛날 너보다는 훨씬 친절하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쯧쯧 혀를 차면서 술잔을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슬슬 그만 마시고 끝내자. 내일이 중요한 날인데, 밤새 술을 마실 수도 없잖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일. 드디어 라이언하트 신도시가 완공되어서 이사를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시에 새로운 저택도 지었으니, 지금 지내는 본가 저택 자체는 이곳 부지에 남기기로 했다. 300년이란 역사가 있는 저택이기도 하니, 후대를 위한 박물관을 겸해 별장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공식에 누가 온다고 했더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에서는 원로원과 흑사자들, 방계 유력 가문들. 그리고 라이언하트 외에는 신군 시절 간부들과 각국의 군주들과 고위 귀족…….”&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 성문 밖에는 이미 며칠 전부터 수십만이 모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 신도시의 준공식은 대륙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내일 준공식에는 가장 먼저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입주한다. 그 뒤에는 따로 초대를 받은 손님들과 함께 저택과 도시의 랜드마크 등을 둘러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련의 식이 끝난 뒤, 도시의 성문을 개방한다. 이미 며칠 전부터 모였다는 수십만 군중은, 개방된 성문을 지나 도시를 관광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주민을 추첨으로 뽑는다니. 너무 파격적이지 않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뽑는 것도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시의 입주민은 전쟁에 참전했던 신군에게 우선권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기존에 판데모니엄에 거주하던 마족과 이민자들, 따로 입주를 희망하는 대륙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추첨을 하기로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일 준공식에 찾아오는 군중들을 대상으로도 추첨하기로 했잖아. 자칫하다가는 대참사가 날 수도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일 벌어지지 않도록 잘 통제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만의 군중이 한꺼번에 도시로 밀어닥치면 당연히 혼란이 생긴다. 거기에 즉석에서 추첨까지 진행하면, 흥분한 군중이 난동을 부릴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대한 방지책은 이미 마련해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디어 내일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안의 말마따나 중요한 날이니, 더 술을 마시지 않고 이만 방으로 돌아갈 생가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아닌 척하면서 기대한 모양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신도시에 지어진 라이언하트의 저택은 며칠 전에 본가 사람들끼리 먼저 봤었다. 시안은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저택에도 별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신도시에 세운 저택을 직접 보니 가슴의 설렘을 느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기대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똑같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유진의 기대는 새로운 저택과 신도시의 준공 때문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설렘을 감추고서 시안의 방을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자러 가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복도를 지나 방으로 돌아가는 중에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를 마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공적으로 인형의 몸으로 옮겨간 아니스의 모습은 옆에 선 크리스티나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분위기 외에 차이점을 꼽자면 눈물점의 유무와 복장. 유진이야 문제없이 알아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헷갈릴 수밖에 없을 만큼 닮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게끔 한 명이 머리카락이라도 묶는 것이 어떤가도 권해보았지만, 아니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고약한 성정을 보건대, 다른 사람이 헷갈리는 것을 오히려 의도하는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숲에 있습니다. 내일 펼칠 이동마법을 점검하겠다면서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패하면 큰일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택을 두고 간다고 해도 본가의 이삿짐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거기에 숲과 드워프의 공방을 통째로 까마득하게 먼 신도시까지 워프시켜야만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가 준공되기까지의 한 달 동안 세냐는 이 대규모 워프 마법을 완성하고 점검하는 것에 몰두했다. 사람들이야 직접 워프 게이트로 이동하기로 했으니 인명사고의 걱정은 없지만, 이삿짐과 숲- 특히 세계수의 묘목이 워프의 실패로 소실되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가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님의 마법이 설마 실패할 리는 없잖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가서 좀 도와야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번에 돕겠다고 찾아갔을 때, 세냐가 당신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괜히 가서 방해하지 말고 잠이나 자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는 너희는 안 자고 뭐 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둘에게서 술 냄새가 폴폴 풍겼기 때문이다. 아니스가 인형에 깃든 후로, 둘은 매일 대작하고 있다. 가끔은 수련을 끝내고 돌아온 시엘까지 억지로 끌고 가곤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만 더 마시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시스터께서 술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셔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안주가 부족하다고 주방에 가자고 저를 꼬드긴 것은 크리스티나,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유진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더 남아 있다가는 둘에게 붙들려 술을 더 마시게 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도 함께 가시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참 좋은 생각이군요, 크리스티나. 지금은 세냐도 없으니, 우리 둘이서 하멜을 독점할 수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더 물러서기도 전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유진의 양팔을 나눠서 잡았다. 둘이 한 몸이었을 때는 어떻게든 떨쳐낼 수 있었을 텐데…… 단단히 붙잡힌 양팔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유진은 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자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에게 연행되어 복도를 질질 끌려가던 중에 베르무트의 방문이 살짝 열렸다. 그는 하얗게 질린 채로 구겨진 유진의 얼굴과, 취기로 빨갛지만 욕망이 번들거리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보고서 혀를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술 먹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급히 베르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양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저 자리에 끌려간다면 아침까지 술을 마실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게 뜨거운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직감한 것이다. 베르무트의 대답에 두 성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녕히 주무십시오, 베르무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은 꿈 꾸십시오, 베르무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성녀는 인사를 남기고서 유진을 끌고 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문이 닫히기 전. 불쑥 다가온 말에 베르무트가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희번덕이는 눈으로 베르무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일 기대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62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 제벨라 건설사에 시공을 맡겨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전모를 쓰고서 정장을 입은 누아르의 뒤에 수십 명의 마족들이 도열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족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모습은 아닌바, 그들의 모습은 모두가 제각각이었는데, 그중에는 누아르와 같은 서큐버스와 마족 중에서 가장 흔한 데몬, 덩치가 산만 한 거인족에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마족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건설의 간부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누아르처럼 작업모를 쓰고, 정장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제벨라 건설’. 안전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부들의 앞에 선 누아르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준공식에 참가한 모두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누아르와 간부들의 등 뒤에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누아르는 장막에 꽂히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방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새로운 저택을 공개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락! 장막이 걷히면서 사라지며 거대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빰빠바밤, 빰빠바밤, 빰빰빰빰.&lt;/p&gt;&lt;p&gt;&lt;br /&gt;&lt;/p&gt;&lt;p&gt;펑, 펑, 펑, 펑!&lt;/p&gt;&lt;p&gt;&lt;br /&gt;&lt;/p&gt;&lt;p&gt;요란한 음악 속에서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푸르고 맑은 하늘에서 알록달록한 폭죽이 꽃을 피웠다. 유진을 비롯한 본가 사람들은 이미 몇 번이나 공사를 시찰하며 저택을 보았지만, 준공식에 참석한 모두가 저택을 미리 봤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름다우며 웅장한 저택의 위용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 * *&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존 라이언하트 저택도 대륙 어느 귀족가의 저택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이 새로운 라이언하트의 저택은 단어 그대로 격이 달랐다. 몇 개나 되는 성을 거느린 키옐의 황제조차도 입을 벌릴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저택은 황궁이나 성처럼 높고 커다랗지는 않다. 본가에서 지내는 가족이라고 해봐야 10명도 되지 않고, 집사나 시종 같은 사용인을 모두 포함해도 수십 명 안팎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크기와 상관없이, 완공된 저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저택에 장식된 조형물들은 모두가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예술품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아, 어디서부터 소개를 해드려야 할까요? 제 애장품들의 예술적 가치와 기원을 설명하자면 과장 섞지 않고 일주일은 걸릴 텐데. 아니면 실용적인 부분이 궁금하시나요?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세르니아 섬의 바다를 그대로 재현한 야외 수영장이나, 루하르의 명소인 리바르 온천에서 영감을 얻은 노천탕,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길고 긴 설명이 시작되었다. 준공식에 초대된 수십 명의 귀빈은 누아르의 설명을 들으면서 저택 부지를 관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택의 모습만이 아니다. 감각적으로 배치된 숲. 저택을 뒤에서부터 수호하듯 우뚝 선 세계수의 묘목들과, 똑같은 무게의 미스릴보다 몇 배나 되는 값을 가진 요정목들. 귀빈들은 저택과 숲이란 경관의 완벽한 조화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엄청 고생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두커니 선 베르무트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가 다가온 순간에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서서 멜키스와 거리를 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에 대한 ‘인상’은 처음부터 깊이 남아 있었다. 전장을 떠나던 때, 깍깍거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쫓아오던 정령사. 세냐가 아무런 망설임과 손속의 자비 없이 마법을 펼쳐서 손수 추락시킨 장본인. 그 당시에는 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가에서 돌아와 지내는 동안, 베르무트는 ‘멜키스 엘하이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카르멘과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더욱 광기에 절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가 입술을 모았다. 달콤한 숨결은 베르무트에게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멀었지만, 그녀의 의지에 따라 나타난 바람의 정령이 숨결을 옮겨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우…… 한층 더 짙어진 숨결이 베르무트의 귓가를 핥았다. 4명의 정령왕과 계약하며 하위 정령들을 지배하는 멜키스에게 있어서 숨결과 속삭임을 전하는 것에 거리는 의미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빠.”&lt;/p&gt;&lt;p&gt;&lt;br /&gt;&lt;/p&gt;&lt;p&gt;끈적거리는 목소리와 미소. 귓가를 핥는 숨결과 속삭임에 베르무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포를 보는 것만 같은 눈으로 멜키스를 힐긋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많이 노력했어요. 오빠를 위해. 가족을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족? 어떤 가족? 베르무트는 저 단어의 앞에 명확한 주어가 없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빠는 느낄 수 있죠? 오빠는 저 이전에 가장 위대한 정령사니까. 이 저택과 숲에는 어마어마한 정령술의 설계가 들어가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의 말은 사실이다. 저택과 숲, 아니, 도시가 성공적으로 준공할 수 있던 것에는 아롯 대마법사들의 다양한 협력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적색마탑과 백색마탑이 크게 활약했다. 로베리안을 필두로 한 적색마탑의 소환사들은 노동력을 제공했고, 백색마탑의 정령사들은 대지의 정령을 사용해 도로공사를 벌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멜키스는 숲의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완벽하게 학습을 마친 대지의 정령들은 숲이 전소하지 않는 한 저 땅을 비옥하게 만들 것이고, 저 땅에서 새로이 자라나는 모든 것을 기존의 경관을 해치지 않게끔 배치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오빠.”&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의 목소리와 눈빛이 더욱 끈적해졌다. 그녀가 한걸음 다가왔고, 베르무트는 꿀꺽 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를 칭찬해 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절함까지 섞인 속삭임. 계속해서 귓가를 핥는 숨결.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아찔한 공포에서 베르무트를 구원한 것은, 단호하게 끼어든 카르멘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버지에게 다가오지 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혐오를 그득 담은 눈을 찡그리며 멜키스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오빠가 당신의 아버지라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는 당신은 왜 아버지를 오빠라 부르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가는 대화에 베르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르멘과 멜키스는 사나운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르를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그리고 왜 멜키스 엘하이어는 위대한 베르무트를 ‘오빠’라고 부르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공식의 귀빈들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지만, 그 누구도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묻기에는 둘의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하였고, 위대한 베르무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우울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외관만큼이나 예술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저택의 내부도 순회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저곳은 본가의 생활공간이라서요. 프라이버시의 문제도 있으니, 저택의 관람은 라이언하트 본가에 따로 문의해 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고 긴 설명의 끝에서 누아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이제부터는 저택을 중심으로 하여 건설한 라이언하트 신도시를 순회하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존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저택 부지에도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걸어서 밖으로 나가기에는 저택부지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안전모를 쓰고서 앞장선 누아르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완벽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곁에 찰싹 붙어서 걷던 세냐가 대답했다. 이른 아침부터 숲을 통째로 이동시키느라 철야를 했지만, 세냐의 얼굴에는 조금의 피로도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세냐 님을 뭐로 보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걱정하지 마. ‘그걸’ 기대하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모론과 아니스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아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론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표정은 감추었지만, 그의 두 주먹은 흥분과 기대로 불끈 쥐어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고, 유진도 강요는 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보다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껴도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도 베르무트는 카르멘과 멜키스의 사이에서 광기의 고문을 받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택의 워프게이트를 통해 도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이동했다. 오오오. 도착한 장소에서 귀빈들이 감탄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택과 달리 이곳은 장막은 있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도 누아르는 입구에서부터 양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 신도시의 상징! 대륙 역사에 유일한! 미래로 이어지는 배움의 장!”&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시에서 라이언하트 본가만큼이나 넓은 부지를 사용하는 곳. 왕궁처럼 웅장한 건물들이 세워진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유진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귀빈들도 유진이 나서는 것을 기대했다.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에서 유진이 머뭇거리자, 세냐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떠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해? 나가서 설명해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떠밀려서 몇 걸음 앞으로 나와버린 유진은 세냐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기대에 부푼 많은 시선에 치미는 욕설을 꿀꺽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뒤를 힐긋 보았다. 연결된 건물들로 통하는 이 교정에는 여섯 개의 조각상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세냐와, 모론과,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와, 베르무트의 조각상. 본가에 머무르던 드워프 장인들이 오늘을 위해 직접 만든 조각상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이너스 아카데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카데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생각 없이 ‘라이언하트 아카데미’로 하려고 했는데, 그 의견에는 길레이드가 반대했다. 라이언하트는 아카데미를 소유할 생각이 없고, 그 이름 자체가 아카데미의 취지와 상징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 아카데미가 기각되었으니, 기왕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뭔가 그럴싸하고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이 말한 이름들은 여러 사람들을 거치며 모두 기각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뒤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다이너스 아카데미’다. 하멜의 성을 따온 이름.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이지만, 의외로 다들 좋다고 받아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라이언하트 가문을 남겼다. 모론은 루하르 왕국을 세웠다. 세냐는 서클마법식을 창안하며 모든 마법사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아니스는 성인으로서 유라스의 교전에 남아 있다. 유라스의 모든 신관은 교전으로 전해지는 아니스의 삶과 글귀로 신앙을 가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은 후대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제노스의 가문에 이어진 ‘하멜식’이 있겠지만, 그것은 하멜 본인이 아닌 베르무트가 남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이곳의 이름은 ‘다이너스 아카데미’로 결정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는…… 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리 준비해 둔 말은 여럿 있었지만, 막상 말하려니 낯이 간지러웠다. 결국 이번에도 유진은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검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무기들…… 다양한 종류의 마법과 정령술. 그리고 신학…… 아, 신학의 경우에는 꼭 ‘빛’의 교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한다면, 예, 전쟁이나 승리의 신학에 입문해서…… 신관이나 성기사로…… 전직? 취업? 예, 그럴 수 있게 할 생각이고요…… 기사가 되고 싶다면 바라는 무기의 과목과 기사도 과목을 선택하면 되는 거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즉석에서 이어가는 말이지만 모두가 유진의 말을 경청했다. 유진은 그 진지한 침묵이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롯의 마탑 등과도 결연하여 유학을 가거나, 각 과목의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여 심화적인 배움을 실현할 생각입니다…… 일단…… 제가 목표로 하는 다이너스 아카데미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게끔 나아가게 해주는 곳입니다. 물론 그건 학생이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지만, 저는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학장으로서 학생들이 귀중한 젊음을 낭비하지 않게끔, 바라는 미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줄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박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아르가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빰빠바밤, 펑, 펑, 펑! 아까도 들었던 음악이 흐르고 하늘에서 폭죽이 수를 놓았다. 짝짝짝…… 귀빈들의 박수에 유진은 민망함을 느끼며 냉큼 동료들 곁으로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또 우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는 제하드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제하드는 눈물을 멈추지 않고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아들이…… 내 아들이, 이런 큰 뜻을 가졌을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큰 뜻은 무슨…….”&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잖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말은 안 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뛰어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좋아지는 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변을 보니 제하드의 반응이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길레이드도 크게 감동했다는 듯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사도 과목을 정식으로 개설하신다면, 제가 특별교수로 강의를 나가도 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룡 기사단에서 연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다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사상이 온전하고 실력이 확실하다면, 연수에 그치지 않고 정식 단원으로 등용할 용의도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리우가 입학한다고 해서 편의는 봐주지 않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그래야지요. 제 아들이라고 생각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리우가 드라고닉 가문의 후광을 이용하려고 든다면, 즉시 퇴학시켜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대화를 나누며 귀빈들과 함께 교정을 지나 본관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의 건물이 워낙 크고 넓은지라 모든 곳을 둘러보고 설명하는 시간상 불가능했기에, 본관에 들어오고서부터는 각자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서 할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 지났던 교정이면 되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교실 안에서도 괜찮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방감이 없잖아, 개방감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대답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개방감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에는 아니스의 의견대로 장소는 교정으로 확정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다음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분 동안 아카데미를 둘러본 뒤에 다시 이동했다. 누아르는 능숙한 가이드처럼 행동하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향하는 곳은 드워프 공업지대입니다. 이곳은 본래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지내던 드워프 장인들과 남쪽 섬에서 살던 드워프들이 독립한 곳이죠. 그곳에서 드워프들은 이전과 달리 자유로운 창작과 의뢰를 받으며 신도시의 경제에 힘을 보태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워프에 관한 이야기에 시무인 국왕의 얼굴이 구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 드워프들은 사실상 시무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시무인의 섬에서 살던 모든 드워프들이 내륙으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시무인의 국왕은 이 건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업지대부터 본격적인 순회가 시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민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시청과 길드 단지, 도서관, 공원, 번화가 등. 신도시는 대륙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워프게이트가 존재하고, 하늘에는 기상을 통제하며 경관을 즐기는 부유역과 공중마차, 지하에는 제벨라 시티와 마찬가지로 지하철까지 있다. 덕분에 많은 랜드마크를 돌아보았는데도 아직 밤이 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시는 밤이 더욱 아름답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슬슬 해가 저물 것 같은 하늘을 보며 히죽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아름다운 야경은 화려한 축제로 완성되는 법. 자아, 이제…… 성문으로 가볼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재 성문에는 신도시를 구경하고자 찾아온 수십만 군중이 모여 있다. 성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도시의 모든 조명이 켜지고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입주한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문제는 없었다. 제벨라 시티의 붕괴와 함께 직장을 잃은 누아르의 권속들이 오늘만 한하여 도시에 들어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상한 짓 하면 죽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 이미 죽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번 더 죽을 줄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더 구미가 당기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샐쭉 웃는 누아르를 쏘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어요, 알았어. 환상도 꿈도 보여주지 않는다니까요? 정기도 안 뺏을게요. 애초에 난 이제 정기를 받아봤자 쓸모가 없는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성벽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가볼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준공식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와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게 닫힌 성문 앞.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성문 위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 꼭 해야 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표정을 잔뜩 구기고서 누아르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해야죠! 준공식은 사실 이걸 위해서 하는 거라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안전모를 벗지 않은 누아르는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빨리 일렬로 서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하기 싫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로운 영지의 개장을 의미하는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중얼거림과는 달리 길레이드는 굉장한 의욕을 보였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의 애니실라와 함께 앞으로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주가 앞장서 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기온이 길레이드의 옆에 서서 눈길을 주자, 시안은 아일라의 손을 이끌며 옆에 섰고, 시엘도 애니실라의 곁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버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도 카르멘에게 끌려 나왔다. 다음은 제하드였다. 그는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품에 넣고서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나가버리니 유진도 한숨을 푹 내쉬며 제하드의 옆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나는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일원이 안 될 건가 보죠? 그런 것이라면 나올 필요가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이죽댔다. 은근슬쩍 뒤로 빠져 있으려던 세냐는 저 이죽거림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냐는 냉큼 유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스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도 아니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인형의 몸에 들어오고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크리스티나. 일단 당신의 몸으로 들어가서…… 아니, 아니지, 그냥 당신 혼자 서 있으면 제가 함께 있는 줄 알 겁…….”&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아니스가 도망치거나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와 함께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군중들이 자신을 비웃지 않을까 내심 염려했으나, 이미 흥분한 군중들은 죽어서 천사가 된 아니스가 왜 멀쩡히 살아서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도 서야지, 뭐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이 불러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자여, 본녀를 부른다는 것은, 앞으로도 본녀는 은자와 살 수 있는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나가서 살래? 빨리 끝내게 얼른 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와 라이미르아는 후다닥 다가와 유진의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처럼 옆에 서기에는 둘의 키가 너무 작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렬로 선 본가 사람들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보던 누아르가 짝 박수를 쳤다. 그러자 본가 사람들 앞에 알록달록한 리본이 나타났다. 누아르는 모두에게 백금색의 가위를 나눠주고서 활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신호에 맞춰서 리본을 잘라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위를 전달한 뒤에 누아르는 냉큼 뒤편으로 이동했다.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올려다보는 수십만 앞에서, 중앙에 선 유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모두가 각가의 웃음을 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부터,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개장을 알리는 테이프를 커팅하겠습니다! 자, 하나, 둘, 셋!”&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억지로 쥐어짠 미소를 지으며 테이프를 가위로 잘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와아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고점에 달한 흥분, 커다란 함성, 하늘을 수놓는 불꽃! 수십 조각으로 잘린 테이프가 꽃잎이 되어 아름답게 휘날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구구궁!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 사람이나 옆 사람을 밀치지 말고! 천천히 입장해 주세요! 도시에서 날뛰지 마세요! 질서를 지키면서 신도시를 관광하고 축제를 즐겨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이 발동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살아온 기나긴 시간에서 지금만큼 인도적으로 환상의 마안이 사용된 적은 없었다. 수십만의 정신에 작용한 강력한 최면은, 방금까지의 흥분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군중을 질서정연하게 도시의 안으로 인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도 가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몸에 붙은 꽃잎을 털어대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다가오자 베르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느새 카르멘과 멜키스에게 붙들려 있던 팔을 빼내며 급히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는 따로 축제를 즐기도록 하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그, 그래야지. 카르멘 님, 멜키스 님. 저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의 곁으로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따로? 설마 도망치는 것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시엘은 눈을 흘기며 물어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옆에 온 베르무트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교정.&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이곳에 온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곳은 사람들이 많아질 거잖냐. 하지만 여기는 닫혀 있으니 못 들어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시는 개장했지만 아카데미의 교문은 닫혀 있다. 베르무트는 유진의 대답에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섯 개의 조각상 앞. 베르무트는 자신의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실력 좋은 드워프 장인이 만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정교한 조각상.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신의 조각상에 잠시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각상, 초상화. 그런 것들은 300년 전에 많이 보았지. 대부분이 진짜 나를 세워놓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달랐다. 드워프 장인의 요구대로, 베르무트는 직접 그의 앞에 서서 모델을 해주었다. 300년 전과는 달리 거절할 이유도, 그런 기분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내 조각상이나 그림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 깊게 바라본 적도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후후, 신기한 기분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은 기분이 아니야. 가슴이…… 따뜻해지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동료들을 베르무트의 뒤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날이 오게 될 줄도 몰랐었으니 당연한 일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시의 입주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의 학생과 교수진을 모집받을 것이고, 내년부터 입학이 시작될 것이다. 베르무트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배울 많은 학생들을 떠올리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이너스 아카데미. 이곳을 상징하는 데에 그 이상의 이름은 없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야 하멜, 너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할 수 없던 것들을, 너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네가 하멜로 살았던 삶이 있었기 때문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도, 모론도, 아니스도, 아가로트의 동료는 아니다. 그들은 하멜의 동료다. 베르무트도 그렇다. 그는 아가로트를 모른다. 베르무트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바로 하멜 다이너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구한 세상이 미래로 이어지고, 그 미래를 가꾸는 것은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되겠지. 후후…… 네 이름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불멸성을 얻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세냐, 모론, 아니스가 일렬로 서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리스티나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베르무트는 동료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러고 서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방긋 웃었다. 모론과 세냐, 아니스도 똑같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료들의 웃음에 베르무트도 함께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미소를 보며 유진은 망토를 들췄다. 펄럭! 망토에서 나온 것은 짚을 꼬아 만든 깔개였다. 베르무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지? 돗자리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슷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둘둘 말린 깔개를 바닥에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내 고향 튜라스에서 쓰던 것인데, 이름은 ‘멍석’이라고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고향은 튜라스에서도 시골 중의 시골이라서 말이야. 도시 사람들은 모르는 관습이 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습?”&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하멜이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고향의 관습이라고 하니 순수한 호기심이 들어 되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떤 관습이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빠른 것이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멍석을 평평히 펼친 뒤에,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워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워봐 빨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베르무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료들 모두가 웃고 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멍석의 위로 올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우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올라가 본 멍석은 꽤 거칠었다. 돗자리처럼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는 것인 줄 알았는데, 누우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멍석에 누워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상으로 쓸 만한 것은 아닌…….”&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락! 베르무트가 누운 순간에 세냐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일어난 멍석의 끝이 베르무트를 덮고서 둘둘 말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 무슨?!”&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기겁하며 멍석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300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베르무트가 세냐의 마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멍석에 말린 베르무트가 할 수 있는 것은 굼벵이처럼 멍석과 함께 몸을 꿈틀거리는 것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즉시 망토에서 거무튀튀한 몽둥이들을 꺼내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줘패!”&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고함을 지르며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도 양손으로 몽둥이를 단단히 쥐고서 베르무트에게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재는 재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도 추모의 기도와 함께 몽둥이를 내리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몽둥이를 잡지 않은 크리스티나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뻐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퍽!&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각!&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개새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윽……!]&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뒈지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헉…….]&lt;/p&gt;&lt;p&gt;&lt;br /&gt;&lt;/p&gt;&lt;p&gt;즐거운 기분으로 와인을 마시던 길레이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의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늘에서,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트가 멍석에 말려서 동료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길레이드의 입에서 와인이 줄줄 흘러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저게 무슨…….”&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똑같은 경악을 느끼며 하늘의 영상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교정, 여섯 영웅의 조각상 앞에서 벌어지는 구타. 위대한 베르무트는 내리꽂히는 몽둥이들에 저항하지 못하고 신음과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영상은 라이언하트 신도시에서만 중계되는 것이 아니다. 세냐의 마법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 과거 유진의 결투가 중계되었듯, 베르무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세례는 대륙 전역에 중계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 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그만이야, 새끼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뼈가 많이 부러지셨군요.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뼈가 으스러져도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빛에 뒤덮인 베르무트의 몸은 바로 치료가 되었고, 다시 몽둥이질이 시작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적인 고통은 익숙하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도 익숙하다. 어지간한 고통에서 베르무트는 신음 한 번 내지르지 않을 자신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의 고통은 참을 수가 없었다. 방어도 할 수가 없다. 양팔이 멍석말이에 단단히 고정되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한 몽둥이질이라면 베르무트의 뼈는커녕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 베르무트를 두들기는 4명의 힘은 모두가 베르무트의 뼈 정도는 우습게 부술 만큼 강했으며, 둘둘 말린 멍석을 거쳐서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은 뼛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몽둥이는 저만한 힘이 실리는데도 부러지지 않았고, 멍석도 찢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게다가 이 폭력은 기절하는 것으로 도망칠 수가 없다. 기절할 것 같으면 즉시 아니스의 기적이 정신을 깨웠고, 뼈가 부러져도 즉시 치료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 제발 그만……!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전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너 잘못한 거 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과하지 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그냥 처맞기나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님, 당신의 죄는 이미 사해졌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억, 퍽! 빠각! 콰직! 베르무트의 애걸에도 몽둥이질은 계속됐다. 자비롭게도 몽둥이질은 오직 멍석에 말린 몸뚱이에만 선사될 뿐, 머리는 누구도 노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베르무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몽둥이질에 맞춰 신음과 비명만을 지르며, 이 끔찍한 시간이 어서 끝나도록 마음속에서 간절히 기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퍽, 퍽, 퍼억…… 크리스티나는 두 눈을 감고 몽둥이 꽂히는 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계속했다. 그녀는 차마 저 위대한 영웅을 멍석말이하는 것에 가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중재하려 들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생각하기에도 베르무트는 맞을 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억…… 헉…… 허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하늘에 붉은 노을이 졌다. 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만큼 지칠 정도로 몽둥이질을 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그니션을 발동하고서 패버리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진짜로 베르무트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륵…… 크르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멍석에 말린 베르무트는 반송장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말끔하던 머리카락은 난발이 되었고, 하얀 피부는 흙투성이에 입에는 피거품이 끓는다. 반쯤 뒤집힌 눈은 마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을 적처럼 금빛이 탁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 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습에 세냐는 오래전에 베르무트에게 정말로 가슴이 뚫렸을 때와는 다른, 속이 뻥 뚫리는 상쾌함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도 몽둥이를 내려놓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00년이 넘도록 누르를 처죽이면서 한 번도 웃었던 적이 없다. 모론은 자신에게 기약 없는 삶을 살게 한 베르무트를 원망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원망과는 별개로 베르무트를 두들겨 패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기에, 지금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핫!”&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품에서 꺼낸 술병을 흔들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그녀는 베르무트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당한 적은 없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베르무트가 죽음을 위장했을 때, 장례를 주관한 것뿐이다. 하지만 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베르무트를 패고 싶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없이 모든 것을 진행했던 베르무트 덕분에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으로 우리는 아무 감정 없는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는 베르무트를 향해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말을 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베르무트를 치료해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고하셨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손수건을 들고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절은 유진의 얼굴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야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말대로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도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은 남아 있지만, 그들은 옛날처럼 포악하게 날뛸 수 없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마족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과 마찬가지로 살게 될 것이다. 아직 헬무드에서는 선거가 끝나지 않았지만, 누군지 확정되지 않은 당선인은 다른 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낼 수밖에 없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이너스 아카데미를 완성했다. 유진은, 하멜일 적에 가졌던 꿈을 이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이미 나라를 세웠다. 그는 이미 후손들이 다스리는 루하르의 왕실에 돌아가는 대신, 라이언하트 대저택의 숲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아직 호숫가의 저택을 짓지 못했지만- 호수는 없어도 숲과 저택은 생겼다. 그녀는 유진과 함께 저택에서 살면서, 아카데미와 아롯의 교단을 오가며 젊은 마법사들을 교육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새로운 마법의 개발과 마도서를 집필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가 가장 먼저 집필하는 것은 마도서가 아닌 ‘전설의 발자크’라는 이름의 동화책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유라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졌던 꿈. 여관을 겸한 술집. 건물은 세웠지만, 아직 내부는 꾸미지 못했다. 아니스는 한때의 꿈일 뿐이라며, 정말로 가게를 열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애니실라를 통해 여러 상인들을 만나보는 것을 보면 아주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나도 유라스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 또한 라이언하트에 남는다. 아카데미의 교단에 서는 것에는 조금 주저하는 듯했지만, 아니스를 은근히 부추기던 것을 보면 ‘함께’라는 조건이면 교단에 설 생각은 있는 모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뤄간다. 미래로 이어지는, 끝이라고 할 수는 없는 끝에 도착했다. 300년 전에 바랐던 대로 행복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정말 끝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행복해졌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뺨을 닦아주는 손수건, 그를 거쳐 전해지는 손의 온기. 빤히 보는 시선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 무슨 일이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였나? 가까운 곳에서 미소 짓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술을 마시는 아니스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일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병을 입술에서 뗀 아니스가 미소 지었다. 방금 흘린 땀으로 흐트러진 모습.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땀. 짙은 눈웃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였나? 아니스가 저렇게 예뻤던가? 크리스티나와 비슷한데 크리스티나와는 다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세냐가 모자를 벗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뺨은 흥분으로 인해서인지 조금 붉었다. 아니, 어쩌면 노을에 물든 것일지도 모른다. 시원스러운 미소가 유진의 가슴을 흔들었다.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섯 개의 조각상과,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건물과, 그 뒤에 펼쳐진 붉은 노을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신의 조각상을 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조각상.&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의 바람은 모든 마왕을 죽이는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의 바람은 마왕을 죽이고 돌아가서 아카데미를 세우는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이루지 못한 과거의 미련을 바람으로 삼았다. 마왕을 죽이는 것은 이뤘다. 아카데미도 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카로트도, 하멜의 것도 아닌.&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을 이루고 지금에 도달한 유진의 바람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혼하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공된 아카데미가 꽤 멋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노을이 아름다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번의 삶을 거쳐 도달한 현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커다란 만족감에서 이 이상 없을 평온함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아니스가, 크리스티나가 아름답게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진은 홀린 듯이 말해버렸다. 결혼하자. 넉넉히 1년을 잡고서 전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유진이 처한 모든 상황과 그로 인한 감정이 본심을 말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러운 프러포즈. 세냐는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세냐를 쳐다보았다. 지금 셋이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모론은 지금 유진을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지만, 모론이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유진이 먼저 대답해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아니스, 크리스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 결혼해 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두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는 여전히 도시와 대륙에 중계되고 있다. 수많은 탄식과 수많은 탄성을 공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유진을 보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빨갰다. 노을 때문도, 부끄러움 때문도, 기쁨 때문도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미쳤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휘어진 눈웃음 사이에서 아니스의 눈동자가 뱀처럼 번득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의…… 방금 그 말은, 굉장히 기쁩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비틀비틀 물러서며 탄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자리에서 듣고 싶지는 않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그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의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꽥 외쳤고, 아니스도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상황과 감정에 취해있던 유진은 셋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냐니! 몰라서 물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혼이란 중대사를 누가 이딴 자리에서, 몽둥이를 들고 말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지는 없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참을성을 유지하며 물었지만 유진은 망토를 뒤지기 시작하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르륵…… 멍석이 풀리고서 베르무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피범벅의 입술을 문질러 닦지도 않고, 충혈된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워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네가 눕기를 바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몽둥이를 들고 있던 세냐와 아니스는 양손으로 몽둥이를 쥐었다. 몇 걸음 물러섰던 크리스티나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유진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뺏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베르무트에게 건네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서 모두와 멍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우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죄송합니다, 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워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망칠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도망치면 앞으로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진을 취하게 했던 기분은 이미 차갑게 식었기에, 그는 냉정하게 자신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살하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며 멍석의 끝에 누웠다. 그러고는 직접 몸을 움직여 멍석을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꽥 내지르는 세냐의 외침과 함께 몽둥이들이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完&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가 후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기에 작중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녕하세요, 목마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2020년 8월 17일에 연재를 시작한 ‘빌어먹을 환생’이 드디어 완결이 났습니다. 햇수는 3년에 625편 완결. 제가 연재한 소설 중에서는 디자이어 다음의 분량이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쓰면서 저 자신에게 아쉬운 점도 많았고 후회할 점도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것 이상으로 ‘하고 싶은 건’ 다했다, 라고 만족합니다. 물론 많은 독자님들은 하고 싶은 것 좀 덜하지 그랬냐, 고 생각하실 분도 많겠지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625편의 긴 여정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8번째 완결인데 이것 참, 완결 후기를 쓸 때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고민되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소설에서 적지 않은 것들을 몇 가지 얘기해 볼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환을 쓰면서 느낀 것은, ‘해피엔딩’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중에서 자주 언급되는,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라는 것을 제가 이뤄주고 싶었습니다. 세상 구하겠다고 고생 많이 했으면 당연히 행복해져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피엔딩으로 가자, 고 결정하고서. 기존에 구상하던 비극 노선들은 대거 폐기했습니다. 본래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관련해서 조금 더 비극적이고 처참한 장면들을 구상했었는데, 죄다 날렸습니다. 성불시킬 생각이었던 아니스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누아르도 남겼죠. 죽이는 편이 그림이 이쁘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그에 관한 결정은 세냐의 의견으로 기울어버렸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주인공 주변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죠. 이만큼 길게 썼으면 주조연 중에서 누구 몇 명은 죽이는 게 제 취향이긴 한데, 이번에는 진짜 아무도 안 죽은 수준이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에 관해서는... 크흠, 제 설계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엘은 갓 성인이 된, 모두에게 사랑만 받던 철부지 아가씨였습니다. 그런 아가씨가 첫사랑에서 실연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조금 더 잘 살릴 수 있었나?? 제 능력 부족이겠죠. 아마 다시 돌아가서 그 장면을 쓴다면, 조금 더 잘 울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인공인 하멜과 유진을 쓸 때는, 어쩔 수 없는 과거의 망령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현재나 미래를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과거의 실패, 미련에 의한... 그렇게 캐릭터를 잡다 보니 전생의 전생까지 나왔네요. 625편 동안 유진을 통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나 장면은 다 한 것 같아서 후련하면서도 아쉽네요. 더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완벽에 가까운 작가가 아닌지라, 소설 하나를 완결 낼 때마다 항상 저 자신에게 아쉬운 것들이 많이 남습니다. 그래도 뭐, 처음 완결을 냈을 때보다는 아쉬운 것들이 줄어들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대로 쭉 완결을 내다보면, 언젠가는 아쉬운 것이 하나도 안 남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까지 연재를 한 저 자신에 대한 수고는 저 혼자 술 마실 때 할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따라와 주신 독자님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삽화로 글 대신 캐리를 해준 개그림.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매일 커뮤니티에 빌환 좋았다며 후기를 써준 독자님들, 매일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팬아트를 그려주신 분들, 모두 사랑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기작은 빙의물을 쓸 생각입니다. 회귀도 써봤고, 환생도 써봤는데, 빙의는 안 써봤으니까요. 아마 게임 빙의가 될 것 같고... 가능하다면 무공도 좀 넣고 싶네요. 겸사겸사 천마도 넣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기작을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성격상 오래 쉴 수가 없어서... 아무리 늦어도 2월이 가기 전에는 시작할 것 같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침 오늘이 설날이네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새해 복 많이 받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차기작도 꼭 봐주세요. 이번엔 더 잘할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lt;/p&gt;</content><link rel='replies'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feeds/5544080403574196658/comments/default' title='Post Comments'/><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2023/02/ch20.html#comment-form' title='0 Comments'/><link rel='edit'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www.blogger.com/feeds/5499307429964195877/posts/default/5544080403574196658'/><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www.blogger.com/feeds/5499307429964195877/posts/default/5544080403574196658'/><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2023/02/ch20.html' title='Ch20'/><author><name>ADMIN</name><uri>http://www.blogger.com/profile/02638522785814696466</uri><email>noreply@blogger.com</email><gd:image rel='http://schemas.google.com/g/2005#thumbnail' width='16' height='16' src='https://img1.blogblog.com/img/b16-rounded.gif'/></author><thr:total>0</thr:total></entry><entry><id>tag:blogger.com,1999:blog-5499307429964195877.post-108608183184940607</id><published>2023-02-19T23:50:00.000+05:30</published><updated>2023-02-19T23:50:07.859+05:30</updated><title type='text'>Ch19</title><content type='html'>&lt;p&gt;&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지지직! 바다에 구멍을 뚫은 불꽃에서 유진이 튀어나왔다. 핏발 선 눈. 격앙된 호흡. 흠뻑 젖은 머리. 누아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레반테인이 누아르의 머리로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바뀌었다.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까지 고개를 흔들던 누아르는 누아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었다. 세냐가 유진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죽이려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레반테인은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세냐의 머리를 잘랐다. 코부터 썩둑, 반으로 잘린 머리가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뒤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이건 아니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프로미넌스와 함께 유진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새하얀 성직복을 입은, 뼈만 남은 아니스가 턱관절을 딱딱 부딪치며 앙상한 뼈다귀 손을 모아 기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죽은 나를 한 번 더 죽이려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죽일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억! 레반테인이 아니스의 머리뼈를 정수리부터 쪼개버렸다. 꽈드드득! 아니스의 늑골이 열리더니 크리스티나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유진의 팔에 매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발, 제발, 유진 님, 구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X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으며 레반테인을 더 아래로 찍어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늑골을 열고 나온 크리스티나의 온몸이 불에 탔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유진의 코를 찌르고, 불 속에서 크리스티나가 발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 사, 살려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에서 나타난 메르가 유진의 다리에 매달렸다. 콰직! 레반테인으로 창림을 펼쳤다. 불꽃의 창이 메르를 꼬챙이로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자여, 아악! 아, 아프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미르아는 나타난 순간에 몸을 양단했다. 오른쪽, 왼쪽, 둘로 나눈 몸이 각자 다른 것으로 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너야말로 라이언하트의 가주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네 목숨을 구했어, 알아? 내가 널 구하지 않았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과 시엘. 둘은 실제로 할 법한 말을 지껄이며 유진에게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반복되는 촌극에 유진은 입술을 씹었다. 콰르르르! 레반테인을 휘감은 불꽃이 커다랗게 모이더니 망치의 형상이 되었다. 그대로 분쇄추의 권능, 프레셔를 구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때려서 부순다. 터트린다. 폭발시킨다. 단순무식한 권능이 시엘과 시안을 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때리지 못했다. 바로 앞에서 멈췄다. 꽈아아앙! 억지로 틀어막힌 권능의 여파가 사방을 휩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네 손으로 직접, 베르무트의 후손을 죽이려 하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늘한 안광이 빛났다. 덥수룩한 수염이 흔들렸다. 뚜둑. 모론의 도끼가 불꽃의 망치를 밀어냈다. 어느새 꿈이 바뀌어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바다였는데…… 아니, 정말로 바다였나? 시안과 시엘이 나타났을 때는 라이언하트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레헤인야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씨X.”&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꿈’은 익숙하다. 300년 전 누아르가 즐겨 사용하던 고전적인 악몽. 동료에 관한 악몽을 반복해 보여주면서 현실과 악몽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악몽에서의 악의를 현실로 끌고 오면서 내분을 야기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한 말이지만 하멜과 동료들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아르의 악몽이 아무리 정교한들, 유진의 감정은 지배되지 않는다. 지금 느끼는 것은 공포가 아닌 짜증과 분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딴 게 내게 무슨 소용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모론을 도끼와 함께 사이좋게 쪼개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도 이딴 악몽으로 미치지 않았는데, 지금의 내가 미칠 것 같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모론의 시체를 넘었다. 붉게 물드는 설원에 발을 뻗었다. 꿈이 끝나고, 새로이 시작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칠 리가 없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목소리가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도 이런 꿈이 당신을 미치게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그걸 바라지도 않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뭐 하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미치지는 않아도, 당신은 이런 꿈을 싫어하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특히나 이번 꿈은 싫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은 꿈이 악몽인 법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 흔들렸다. 거무스름한 세계에서 그림자가 번졌다. 휩쓸리고 파헤쳐진 전장. 유진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300년 전의 유폐의 마왕성, 바벨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지전능한 빛의 신이시여, 부디…… 부디 이 우둔한 어린양을 보호하고 살펴주소서. 안식 뒤의 험난한 여정…… 을…… 흑…… 자비와 사…… 사랑으로, 이끄시고, 어린 양이 가는 길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더듬 이어지는 아니스의 기도문. 결국에는 낭송하지 못하고 오열해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쾅, 쾅! 방금 유진이 죽였던 모론이 다시 나타나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주먹을 내리찍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안 돼, 안 돼, 안 돼……! 가, 가면 안 돼. 나, 날 두고 가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시체의 얼굴에 뺨을 문지르며 울부짖었다. 그 옆에 베르무트가 무릎을 꿇고 있다. 놈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멜이 죽을 적에는 시야가 흐릿해서 잘 볼 수 없었는데. 베르무트도 울었던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잠시 입을 닫고 가만히 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꿈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비명을 지르며 아니스의 멱살을 틀어쥐고 천국에 대해서 물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세냐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처박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스도 입을 틀어막고, 로사리오를 더듬으며 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끝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유진은 놈의 얼굴이 저렇게 일그러진 것과, 뺨이 눈물 자국으로 지저분한 것을 처음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의 꿈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겁고, 음울하다. 방금의 꿈이 있을 리 없는 가공품이었다면, 지금의 꿈은 다르다. 유진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꿈이야말로 악몽에 가까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에는 아무런 가공이 들어있지 않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의 시체 옆에 선 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나는 지금과는 달라서, 당신들의 정면에는 서지 않았죠. 애당초 이때의 바벨에 배치된 마족은 유폐의 권속뿐이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하멜의 시체 옆에 살포시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약속이 맺어진 뒤. 나는 유폐의 마왕에게 간청해서 이곳의 기억을 받았답니다. 사랑하는…… 후후, 나의 하멜의 마지막을 어떻게든 보고 싶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물론 나도 울었어요. 세냐 메르데인처럼, 아니스 슬리우드처럼, 모론 루하르처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처럼. 나의 하멜의 죽음이 슬프고 안타까워 울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더 이상 수영복 차림이 아니었다. 지금의 누아르는 새카만 드레스를 입고,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울었어요, 정말로. 당신의 동료 중 누구보다 서럽게 울었어요. 식음을 전폐했죠. 아무도 내게 가까이 올 수 없게, 홀로 방안에 틀어박혔어요. 마경이 헬무드가 되는 순간까지 말이에요. 모든 마족들이 유폐의 승리를 찬양하고 축제를 벌일 때, 오직 나만이 당신을 애도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생한 당신과 이렇게 다시 만나기는 했지만, 저 순간에 제가 느꼈던 슬픔은 진짜였어요. 하멜. 당신이 그걸 이해할 수 있나요?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당신이,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나요? 당신은 저렇게 죽을 때, 남겨진 자들이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갈지를 생각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말없이 누아르를 바라보았다. 병신같이 죽은 하멜의 시체를, 그 옆에 무릎 꿇은 세냐와, 오열하는 아니스와, 머리를 처박는 모론과, 우두커니 선 베르무트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해할 수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하지 않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악몽은 진하게 유진의 감정을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근데 어쩌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겨진 사람? 감정? 그게 뭔 상관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성큼 앞으로 걸었다. 화르륵! 퍼져 나간 불꽃이 모론과 아니스를 불태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기 싫었는데 죽을 수밖에,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고. 그런 상황에 남 생각할 겨를이 있었을 것 같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걸음 더 걸었다. 불꽃이 베르무트와 세냐를 불태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감정? 알 바냐, 누아르 제벨라. 내가 왜 네 감정을 이해해야 하지? 네가 슬퍼한 것이 뭐 어쨌다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걸음 더 걸었지만 불꽃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불꽃이 유진의 바람을 거역했다. 하멜의 시체와 누아르는 불길에 덮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하멜의 시체를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굉장히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군요. 당신의 죽음에 울었던 내게,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불꽃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구멍이 나서 죽은 하멜의 시체가 누아르의 손길에 함께 일어섰다. 누아르는 하멜의 시체를 안아 들고서 불꽃 속에서 빙글 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나는 그런 쓰레기 같은 면도 좋았지만. 그거 알아요? 하멜. 나는 지금도, 당신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 사랑이 깊어지고 있단 말이에요. 왜일 것 같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더, 너를 죽이고 싶다 생각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나는 말이에요, 서로의 끝으로 향해가는…… 이 모든 과정을,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워. 당신과 꿈을 반복할수록 더더욱 당신이 사랑스러워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레반테인을 높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빠지지직! 이그니션에 프로미넌스. 동시에 레반테인이 증식하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불꽃이 유진의 주변을 맴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순적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하나 된 흐름이 점점 퍼져나가며 바벨의 꿈을 부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 악몽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진짜 악몽은 보여주질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정말로 보고 싶지 않은 악몽은 보여주질 않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이 모조리 불타서 사라졌다. 본래라면 이 순간에 다음 꿈이 시작되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꿈은 시작하지 않고, 불꽃만이 남았다. 불타 버린, 계속해서 불이 타오르는 세계에서 유진과 누아르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마찬가지라서 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아직 하멜의 시체를 안고 있다. 그녀는 차갑게 굳은 시체를 어루만지다가, 조용히 시체를 불꽃을 향해 밀었다. 화르륵! 하멜의 시체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굴의 베일은 걷지 않았다. 덕분에 유진이 볼 수 있는 것은 누아르의 입술뿐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이 보았던 미소.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곡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황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누아르를 노려보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와 아리아의 마지막.”&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누아르는 유진에게 수많은 꿈을 보여주었다. 악몽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노골적이면서 가장 깊이 파고들 꿈은 보여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황야야말로 유진과 누아르의 진짜 악몽이다. 둘이 이미 한 번 겪어 보았던 서로의 마지막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말없이 미소를 유지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녀의 저 가장 된 미소에서 조금의 웃음기도 느낄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침묵 뒤에 누아르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은. 당신도, 그 황야를 악몽으로 여기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즐거운 꿈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누아르는 조용히 웃었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곡선이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텅 비어버린 세계에 새빨갛게 노을지는 하늘이 나타났다. 탁 트인 황야에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붉은 황혼을 등진 누아르의 모습이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즐거울 수가 없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가 유진을 향해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신인 블랙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이미르아의 머리 위. 세냐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메리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혼자서 제벨라 시티에 들어가고서 흐른 시간은 1시간 남짓. 세냐는 그때부터 쭉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뜨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을 집중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냐를 머리 위에 올린 라이미르아는, 이 주변의 모든 마나가 세냐를 중심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벨라 시티 바깥의 모든 마나가 세냐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세냐의 곁에 성녀가 무릎을 꿇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소리 없이 기도를 올리며 유진의 신력을 느꼈고, 아니스는 그를 토대로 크리스티나의 안에서 유진의 상태와 위치를 찾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리 언질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셋은 유진이 바랐던 것을 당연하단 듯이 행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에 들어가기 직전만 해도, 성녀들은 유진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이 세상 어디에 있든, 공명하는 신력을 통해 유진과 대화가 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뿌연 안개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안개 속 어딘가에 유진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정확한 위치와 상태는 알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유진의 ‘정신’이다. 육체야 성벽 근처, 다른 곳이라 봤자 도시 안에 있겠지만…… 꿈에 끌려간 정신이 어떤지가 급선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아무리 기도한들 닿지 않고, 유진에게서의 계시도 느낄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꺼지지 않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말했다. 눈을 감고 기도를 이어가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제벨라 시티와 성벽을 보고 있지 않다. 그녀는, 흐릿하게 깜빡이는 ‘빛’을 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레반테인의 불꽃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뿌연 안개 속에서도. 깊고 깊은 악몽의 한가운데서도 저 불꽃은 꺼지지 않고 있다. 저 불꽃이 빛을 발한다는 것은 유진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똑같은 통증을 느꼈다. 가슴 안쪽이 뻐근하고 온몸이 저릿거리는 통증. 육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타버릴 것만 같은 열기. 그리고 양손의, 성흔의 통증.&lt;/p&gt;&lt;p&gt;&lt;br /&gt;&lt;/p&gt;&lt;p&gt;통증에서 그치지 않았다. 흉터로 남은 성흔이 스스로 갈라지고 피를 뚝뚝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과거 아니스는 전투를 겪을 때마다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을 고통을 항상 달고 살았다. 크리스티나의 경우에는 이런 종류의 고통이 익숙하지 않지만. 이 모든 고통이 유진을 위한 것이란 생각만으로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고통이 나타나는 이유는 알고 있다. 레반테인 때문이다. 아직 유진은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악몽 속의 전투조차도 레반테인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유진이 완전히 악몽에 삼켜져서 누아르에게 지배되지 않게끔, 현실의 레반테인과 유진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잡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쭉 침묵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세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면서 눈썹을 찡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어가지 않기를 잘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권능은 위신의 마안의 것. 거기에 누아르가 평생에 걸쳐 모은 마력과 정기가 더해졌다. 아무리 세냐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돌입했어도, 저곳에 들어가 버린 순간에 세냐의 정신은 누아르의 꿈에 끌려갔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언가 방법을 찾으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피에 흠뻑 젖은 손을 가리면서 세냐를 올려다보았다. 가린들 감출 수는 없었다. 피의 냄새. 붉게 물드는 소매와 성직복. 세냐는 300년 전의 아니스가 얼마나 주의를 들여 성흔을 감추었는지를 느끼며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법이야 처음부터 알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놀라는 거야? 나는 꿈속에서는 몰라도 현실에서는 진짜 마법의 여신이란 말이야. 그런 내가 정말로 아무 방법도 없어 할 줄 알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저 대답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니스도 내심 저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크리스티나의 입으로 주장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1년 만에 돌아와서 마법의 여신이 되었노라 거들먹거렸지만, 정작 세냐는 마법의 여신다운 위엄찬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거리를 훌쩍 뛰어넘는 것은 마법적으로 꽤 훌륭하기는 했다만, 그런 것은 사실 암전의 마안을 가진 시엘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 마법의 여신이라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 주제에 누아르 제벨라의 초대장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꿈속으로 끌려가기도 했으니, 성녀들이 못 미더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세냐 님이십니다. 어떤 방법을 가지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에서 깨어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크리스티나도 똑같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스도 섣불리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세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깨게 만들어야지. 흔들거나, 물을 뿌리거나, 한 대 때리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그걸 방법이라고 하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멍청이가 저걸 말이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깊이 없고 단순한 대답에 이제는 진지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아니스도 버럭 짜증을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화를 내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로서는 세냐 님이 그런 의문을 말하시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잠을 깨기 위해서는 깨게 만들어야 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로서는 도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유진 님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을 직접 깨울 필요는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메리를 높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 전체를 깨울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메테오를 처박으시려는 것은 아니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메리의 꽃잎이 바르르 떨렸다. 세냐를 중심으로 흐르던 마나가 메리가 만들어내는 마법의 영향을 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악! 가시화 된 마나의 흐름이 수백 수천 장의 꽃잎이 되었다. 순식간에 라이미르아의 주변이 꽃잎들로 가득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떠도는 꽃잎의 중심에 선 세냐가 크리스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묻지는 않았다. 세냐의 눈동자에서 조금의 장난기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갈라진 성흔, 피로 흠뻑 젖은 손이 세냐의 손에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주저를 느꼈다. 피에 흠뻑 젖은 손을 뻗어 누군가와 마주 잡는다는 것은 당연히 거북할 것이다. 하지만 세냐는 개의치 않고 크리스티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성흔에서 흘러나온 피가 먼저 세냐의 손과 닿았다. 세냐가 지배하는 마나가 성녀들을 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마법이 되었다. 거대한 흔들림을 느꼈다. 성녀들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제벨라 시티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저 거대한 도시 전체가- 복잡하게 얽힌 넝쿨에 휘감겨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자, 비슈르 라비올라가 말했다. 인간의 마법은 열등하다. 지금이나 신대나 다르지 않다. 인간은 마나에 기원하여 답을 구할 수 없다. 난해하고 무한해야 할 마법을, 그를 이끌어내는 마나를, 술식이란 하찮은 설계에 가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전만 하더라도 세냐는 저 한계을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극한에 도달했고, 그 이상을 넘보려 했지만 좀처럼 도달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세냐 메르데인은 인간을, 인간의 마법을 초월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세냐에게 ‘술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녀의 마법은 기적에 도달했다. 기적이 내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냐의 바람 자체가 기적이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꿈을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지금 누아르 제벨라의 ‘꿈’은 신위의 마법으로도 무너트릴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흔들 수는’ 있다. 대마법사 수십 명이 모여서 재앙급의 대마법을 쏟아부어도 꿈은 흔들지 못하겠지만, 세냐의 마법은 저 꿈을 흔들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기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턱대고 흔든들, 깊은 잠 속에서 이어지는 꿈을. 악몽을 떠도는 유진을 깨우기 힘들다. 세냐는 저 도시에서 유진의 존재를 희미하게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다르다. 성녀들이 세냐만이 볼 수 있는 마법을 보듯, 세냐 역시 성녀들만이 볼 수 있는 ‘빛’을 보았다. 손을 마주 잡는 것으로 연결된 감각이, 세냐로 하여금 유진과 레반테인의 빛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신의 마안으로 만들어낸 사슬의 벽. 관측할 수 없는 불가해의 환상. 그 속을 떠도는 유진의 정신을 찾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야를 좀 더 확대해서 유진의 육체를 찾았다. 성문을 지나고 곧장 꿈속으로 끌려갔으니 성문 안쪽에 엎어져서 잠들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 유진은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도시를 배회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턱대고 배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유진을 인도하고 있다. 유진이 도시에 들어간 지 1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유진은 벌써 도시의 중심에 가까워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뿌득 입술을 씹으며 메리를 강하게 쥐었다. 휘몰아치던 꽃잎이 세냐의 적의에 따라 피처럼 붉은색으로 물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의 중심. 낮과 밤의 구분 없이 매일 관광객들이 미어터지던 카지노가 지금은 적막에 잠겨 있다. 화려하던 조명은 모두 꺼져 칙칙한 빛깔이 된 건물의 위, 관광객을 현혹하며 꿈을 보여주던 제벨라 페이스 중 2대가 장식물처럼 놓여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보다 높은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름 한 점 없이 시커먼 밤하늘에, 1대의 제벨라 페이스가 날고 있다. 세냐는 제벨라 페이스의 머리 위를 노려보며 입술을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려한 의자에 누운 여자가 보였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세냐는, 저 감은 눈꺼풀마저 꿰뚫는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세냐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 누아르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꺼풀이 천천히 들리고 보라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눈동자는 자수정처럼 아름답지만, 세냐는 저 눈동자에서 ‘아름다움’이란 감상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세냐는 저 눈동자에서 소름 끼치는 섬뜩함과 역겨움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참이나 떨어진 거리지만, 세냐는 누아르의 ‘시선’을 확실하게 느꼈다. 붉은 입술이 씰룩거리며 곡선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무의미했다. 시선이 닿았다는 것. 그것은 환상의 마안에 포착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세냐를 둘러싼 꽃잎들이 거세게 요동쳤다. 외곽을 흐르던 꽃잎들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색 되더니 재가 되어 흩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초대장을 통해 굴욕을 당하고, 세냐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환상의 마안과 강제수면을 버텨낼 마법을 준비했다. 덕분에 방어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보다 위력이 얕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초대장보다 훨씬 강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지금의 방어 마법으로 버틸 수 있다. 이 정도 위력에 그친 것에 대해서는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저 괴물 같은 갈보에게도, 지금 유진을 붙잡은 꿈을 유지하는 것에 많은 심력을 쏟고 있는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틈을 노릴 수 있다. 세냐는 마법의 다음을 준비했다. 성녀들의 기도로 유진을 부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도 마냥 꿈속에서 헤매는 것은 아닐 터. 내부에서 꿈을 부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냐는 바깥에서 꿈을, 도시를 흔들어야 한다. 그리고 저 누아르 제벨라에게 계속해서 압박을 가할 생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압박?’&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오싹 소름이 돋은 팔뚝을 힐긋 보며 생각했다. 어느새 흐른 식은땀에 등골이 서늘하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피가 닿았던 손바닥은 진즉에 차게 식어있다. 세냐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누아르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압박을 느끼는 것은 세냐 쪽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제벨라 페이스와 함께 이곳으로 날아오지도 않았다. 누아르는 여전히 도시의 중심, 카지노의 하늘에 있다. 시선에 적의와 살의를 담고, 짜증과 분노로 입술을 비틀어 미소를 짓고 있다. 죄어오는 환상의 마안에 의해 마나를 변형시킨 꽃잎은 계속해서 타들어 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크리스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압박감을 떨쳐내며 조용히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신이 깨어날 수 있게 기도해 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서로의 감각을 연결했어도, 세냐는 유진의 성녀가 아니다. 세냐가 아무리 기도하고 불러도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유진에게 닿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성녀들의 기도는 유진에게 닿는다. 너무 작아 들리지 않고 희미할지라도, 꿈을 계속해 흔든다면 목소리는 더욱 확실하게 유진에게 닿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작 자고 일어나라고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 * *&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황야는, 아가로트의 기억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곳이다. 유진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이 황야를 떠올렸고, 간접적인 체험도 여러 번 해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몇 번으로 보아도 이곳에서 느끼는 감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희미하던 감상과 체험과는 달리 지금의 ‘꿈’은 현실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체들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가 아가로트의 기억에 존재하던 얼굴이다. 깊이 생각을 더듬으면, 이름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시체들의 얼굴에 남은 공포와 절망을 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이뤄진 죽음들이라 고통은 없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유진의 가슴을 긁어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의 신군은 멸망의 마왕에게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가 신군에게 그렇게 죽으라고 명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이라면 다른 수단을 강구했을지 몰라도, 아가로트는 ‘저런’ 명령을 내리는 남자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꿈에서는 하멜, 당신과 내가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입을 열었다. 모습이 달라졌듯, 목소리도 달라졌다. 지금의 그녀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가 아니다. 전쟁신의 성녀, 황혼의 마녀, 아리아의 모습과 목소리를 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즐거운 감정은 느낄 수가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의 머리카락은 밤처럼 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의 머리카락은 노을처럼 붉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후에 당신의 품에 안겨서 죽었을지라도, 그 죽음 자체는 아리아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의 눈동자는 자수정을 닮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의 눈동자는 루비를 닮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우리 둘에게 있어 똑같은 악몽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가 입술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악몽조차도, 당신과 함께라면 사랑할 수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의 목을 보았다. 아가로트가 부러트렸던 목. 지금, 부러지지 않은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다.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엮은 목걸이. ‘하멜 다이너스’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는 지금 아리아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반지를 맞추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누아르는-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하멜을 죽일 때. 자신의 품에 안겨, 절망 속에 죽어가는 하멜의 손가락에 직접 반지를 끼워주겠다고 말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의 전쟁이 끝난 후에, 아리아의 기억을 떠올린 누아르와 이야기를 나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라진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지금 누아르가 하는 말은- 그리고, 여태까지의 행동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조용히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대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꿈속에 들어와서, 유진은 쭉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의 꿈. 아늑하고 평온한 가정집.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부엌. 그 꿈은 하멜이 마경에서 꿈꾸던 이상적인 미래였다. 모든 마왕을 죽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 멀쩡히 살아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발이라고 생각했다. 기만과 조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라면 누아르의 노림수는 훌륭했다. 그녀가 꿈이랍시고 보여준 것은 하멜이 그리던 미래였고, 세냐와, 아니스가 그리던 미래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도발뿐인가? 점점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만든 꿈은, 언제나 그녀와 유진이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 혹은 다른 누군가. 누아르가 만드는 꿈에 그녀와 유진을 제외한 다른 인물의 비중은 존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누아르, 둘이 함께하는 꿈. 유진이 그것을 거부하여 꿈을 부숴버려도, 누아르는 금세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다르지 않은 꿈을 반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면서 질문했다. 지금의 꿈은 마음에 드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유진이 품은 의문을 강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죽음을 바라지 않는 것만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결말을 바라는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결심을 흔들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에서 누아르에게 밀어 넘어트려져 당한 입맞춤을 기억한다. 침실의 장막처럼 내려온 날개의 안에서, 누아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누아르는 절망했었다. 그녀가 품은 감정에, 사랑에, ‘누아르 제벨라’의 것이 아닌 ‘아리아’의 감정이 섞여 버려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유진은 절망했었다. 전생을 깨친 누아르를 도저히 예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최후의 최후에, 누아르를 죽이는 것에 있어선 안 될 망설임을 느낄 것 같아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의 혼란과 동요는 그때 결론을 내렸다. 서로가, 잠시 사로잡혔던 미몽에서 깨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있어서 누아르 제벨라는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다.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멜과 유진의 삶이 근간부터 부정되는 것이다.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온 삶이, 까마득한 전생인 ‘아가로트’에 잡아먹혀 버리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에게 있어서 유진 라이언하트는 적이라곤 할 수 없다. 누아르는 비정상적인 이유로 유진을, 하멜을 사랑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사랑 외에 다른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광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감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죽음의 실감을 원한다. 상실을 원한다. 후회와 비탄을 원한다. 그 모든 것을 어설프게 만들, 그녀 자신을 파괴하고 망가트릴 격정을 원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의 누아르는, 그녀 자신이 바라던 것과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든 ‘끝’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유진을 죽이고 싶지 않고, 자신이 죽고 싶지 않은 것처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꿈을 반복해 보여준,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유진에게 애원하고 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짓이겨 씹은 입술을 열었다. 코끝을 감도는 피와 시체의 냄새가 그러하듯, 입술을 씹어 뭉개어 느끼는 통증까지도 현실과 똑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주제에 피범벅이 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분명 유진 자신의 목소리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습을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누아르는 아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와 유진이 용모가 닮지 않았듯, 누아르 역시 아리아와 닮지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누아르는 아리아의 모습이 되었다. 목소리도, 옷차림도. 아가로트의 기억에 있는 아리아의 모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모습을 취하는 것 자체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모순이다. 누아르가 절망했던 것은, 그녀의 감정이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누아르는 과감하고 과격하게 아리아를 부정했다. 유진의 목을 틀어쥐고 대뜸 입술을 맞췄다. 짓뭉개고, 입술을 열어, 혀를 얽었다. 달콤함이나 낭만, 풋풋함, 아리아의 마지막과는 거리가 한참 먼 입맞춤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왤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의 표정은 이 악몽의 시작과 달라지지 않았다. 쓸쓸하고 서글픈,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미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 표정을 안다. 아가로트를 감싸고, 얼굴의 절반이 찢어졌던 아리아가 짓던 미소. 지금 누아르의 모든 것이 아리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의식해서, 일부러, 감정을, 정신을 흔들기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르는 생각의 마지막을 의문이 끝맺었다. 이건 안 된다. 의식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감정이 요동친다. 뺨이 씰룩거린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자신의 도시에 유진을 초대했다. 성문을 지난 즉시 꿈으로 빨려들어 갔다. 행복한, 행복할 수 있을, 그런 가능성이 있는 꿈을 꾸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것은 절대로 악몽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집을 꺾으면 된다. 누아르에 대한 살의를, 버리면 된다. 자신을 포기하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오히려 지금보다 많은 것이 매끄러워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강하다. 유폐의 마왕이라도 지금의 누아르를 쉽사리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누아르를 죽이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고, 전생의 감정을 받아들여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비극으로 끝났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의 말대로다. 아가로트의 죽음도, 아리아의 죽음도, 모두가 비극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입맞춤. 서로에 대한 감정을 알면서도 목을 부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진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아가로트마저 죽었다. 그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는데, 멸망의 마왕을 며칠 멈춘 것이 고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극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는 저 목소리를 좋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투가 끝나고 돌아왔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축하드리옵니다, 나의 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얇은 펜으로 그린 것만 같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연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홀로 술을 몇 잔 더 마시려고 할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나 그랬던, 노크 없이 문이 열리는 것을 기대했다. 그저 그런 맛과 품질의 포도주를 품에 안고 들어오는 아리아를 보며, 오늘은 과연 저 술에 신에게조차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독이나 저주가 깃들어 있을지를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마시지 않을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신이시여, 그 말씀은 제게는 너무나 과중하고 가혹하옵니다. 어찌 성녀가 신과 대작하겠나이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시지 않겠다는 것을 보니 독이라도 탄 모양이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아주 치명적인 독을 부었나이다. 그러니 저는 결코 그 술에 입을 대지 않겠나이다. 나의 신이시여, 이 하찮은 것의 독이 두려우시다면 술잔을 거두소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의 복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얇은 옷. 흔들거리는 불빛 아래의 나른한 목소리와 교태 섞인 미소를 좋아했다. 결국에는 단 한 번도 독도, 저주도 깃든 적이 없는, 그저 그런 술의 맛을 좋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신이시여, 해는 진즉에 떴사옵니다. 어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소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색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질색하며 밀쳐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 요사스런 것이 짓궂게 웃으며 유혹해댈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뺨을 간질이는 달콤하고 뜨거운 숨결을 좋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가 한 걸음 더 유진에게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의 등 뒤에서 황혼이 흔들렸다. 아리아의 미소가, 루비 같은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촉촉이 젖어가는 눈동자에서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아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가 팔을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아주고, 입을 맞춰주세요. 내 귀에, 이름을 속삭여 주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유진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갈기갈기 찢긴 가슴에 온갖 감정들이 사무쳤다. 아가로트가 최후에 느꼈던 절망과 후회가, ‘지금’이라면 다른 결말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유진의 정신과 감정을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유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움직이고 싶었다. 아리아가 바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유진 본인조차도 그것을 바랐다. 바라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꿈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나도 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득!&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리의 칼날을 목에 내리찍었다. 불꽃은 일으키지 않았다. 사선으로 깊이 파고든 칼날이 목을 지나 쇄골에 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정에 꽉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목. 안에서 끓어오른 피가 ‘소리’가 되어 유진의 입술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리던 감정이 씻겨져 나간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생각들이, 직관적인 죽음에 의해 깔끔하게 정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뿌드득……! 불꽃을 뿜지 않는 유리의 칼날은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서 유진의 몸을 가르고 있다. 사선으로 베인 목은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끊어져서 떨어질 것이다. 기어코 쇄골을 지난 칼날이 심장의 끄트머리를 자르고 폐를 절단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날의 움직임은 느리다. 유진은 느리게, 자신의 몸을 베어가고 있다. 불꽃을 일으킨다면 한순간에 몸이 타서 재가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불꽃을 일으킬 필요도 없다. 저 아름다운 유리의 칼날은 닿는 것을 모조리 베어 가를 만큼 예리하다. 그런데도 천천히, 힘을 거의 주지 않고, 조금씩…… 칼날을 밀어가고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리아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눈물과 함께 미소가 사라졌다. 아리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 흔들렸다. 하늘이 일그러졌다. 이 흔들림은 누아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누아르는 뻗던 손을 멈추고서 혀를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 전체를 감싼 꿈. ‘인간’이라면 수백만이건 수천만이건 받아낼 수 있다. 단 하나의 세계에서 수백 수천만의 꿈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이다. 그들이 바라는 모든 욕망과 환상을 즉석에서 만들어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유진을 꿈속에 가두고 꿈을 만드는 것은 수천만 인간의 꿈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누아르로서도 많은 심력을 소모하고 있고, 유진의 정신을 꿈에 최대한 동화시키기 위해 누아르 본인까지도 꿈에 ‘깊이’ 들어왔다. 기억을, 감정을, 깊이 받아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짓말은 아니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소리는 유진에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 유진은 전혀 다른 소리를 듣고 있다. 칼날이 살을 가르고 뼈를 자르는 소리. 뿜어지는 피가 칼날에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도 소리. 이름을, 부르는 소리. 지금 들리는 소리는, 아가로트가 좋아하던 아리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리아의 신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날이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운해졌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거품이 끓던 입술이 열렸다. 유진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아리아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악몽은 너무나도 깊었다. 유진이 가진 신성으로도, 성역으로도, 이만큼 깊은 악몽에는 저항이 쉽지 않았다. 목을 베어 정신을 죽여 버리는 판단이 늦었다면. 만약, 아리아의 애원에 넘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리아가 아닌 그 이름을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구분했다. 지금 유진의 앞에 있는 것은 황혼의 마녀 아리아가 아니다. 전쟁신 아가로트의 성녀도 아니다.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거죽을 뒤집어쓴 것은, 나를 혼란시키기 위해서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에 박아 넣은 레반테인을 뽑았다. 피는 뿜어지지 않았다. 피를 대신해 치솟은 불꽃이 상처를 메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극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날 이 악몽에 완전히 삼켜지게 만들기 위해서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누아르가 철저한 기만과 조롱만을 갖고서 이 촌극을 꾸민 것이기를 바랐다. 그런 것이라면, 누아르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살의와 분노 외에 다른 감정을 허용치 않는 존재가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그게 아니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곳에서 들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스와 크리스티나, 둘의 목소리를. 아가로트의 성녀가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의 성녀들의 목소리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왜, 저런 말을 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의 흔들림을 느꼈다. 세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꿈의 바깥에서 흔들림을 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세냐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어떤 이름으로, 누구에게 안기기를 바라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쪽이든 나고, 어느 쪽이든 당신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웃음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저 대답은 유진에게 말장난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존재라면 모를까. 유진과 누아르, 둘에게 ‘이름’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누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꿈이 끝나길 원하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이 흔들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현실에 나가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의 붉은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나와 마주하길 바라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질문에서 유진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에 들어온 이래로 누아르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꿈속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 모든 모순이, 누아르의 진심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누아르는 망설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말할게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몽이 흔들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 꿈이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과 계속, 꿈속에 있고 싶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리는 황혼 앞에 선 누아르의 얼굴을 보았다. 저무는 석양을 등진 누아르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 어두웠지만,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은 그늘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입가에 미소는 없다. 지금 누아르에게는 조금의 장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꿈에서라면 우리는 영원히 죽고 죽일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의 죽음이 내가 평생 바라고. 알고 싶던 죽음과는 다르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그런 것쯤은 포기할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약지의 반지가 황혼에 물들며 엷은 빛을 발했다. 누아르는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많은 것을 할 수 있죠. 이 꿈에서, 우리는 악몽 말고도 많은 꿈을 꿀 수 있을 거예요. 하멜, 몇 번의 꿈을 겪어 본 당신이라면 제 말이 거짓이나 허세가 아니란 것을 알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안다. ‘꿈’이라는 자각이 없다면 이 세계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현실보다 훌륭하다. 악몽을 바라지 않는다면. 즐겁고 행복한 꿈을 바란다면. 이 세계는, 유진이 바라는 모든 환상을 실현해 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꾸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목을 감쌌다. 그녀는 울렁이는 맥박을 느끼면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이곳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꿈을 꿀 수 있어요. 바란다면, 아하하, 하멜, 당신이 정말로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아리아가 되어주죠. 아리아의 얼굴로, 아리아의 목소리로, 당신을, 나의 신이라고 섬기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기왕이면 아리아가 아닌 ‘나’를 원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나를 수백 수천 번 죽여도 좋아. 당신이 ‘나’를 원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말없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누아르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감싸 쥔 목을, 목걸이를, 반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유진을 응시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영원’을 말했어요. 그건 거짓이 아니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속에서 흐르는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다. 누아르가 원한다면, 그녀는 꿈속의 일 년을 현실의 하루로도 바꿀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이 영원은 나 혼자서는 이룰 수 없죠. 이곳은 나와 당신, 우리 둘의 꿈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꿈에서 정말로 영원을 얻을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악! 흔들리던 꿈의 형태가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체가 즐비하던 황야에 초록의 풀과 가지각색의 꽃이 피어났다. 수면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호수가 나타났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에 자그마한 저택이 우뚝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영원에서 우리는 한시도 지루하지 않을 거예요. 매일매일 새로운 나날을 즐길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풀밭이 벽돌이 깔린 인도가 되었다. 호수가 거대한 성이 되고, 꽃들이 건물이 되었다. 어느새 유진과 누아르는 자그마한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가로운 나날이 질린다면 화려한 도시를 만들어주죠. 알아요, 하멜. 인간의 욕망은 점점 더 큰 욕망을 바라죠. 아무 문제 없어요. 나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예요. 나는 수백만의 욕망을 보고 수백만의 꿈을 만들었어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영원을 다채롭게 해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았던 눈을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에게는 사명과 운명이 있죠. 당신이 바란 것.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맡긴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발적으로 거신의 입안으로 들어간 고신들. 모든 신을 잡아먹고 빛이 된 거신. 세계수가 된 현자. 하멜을 환생시킨 베르무트. 세상을 구하길 바란 망령.&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당신이 사명과 운명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당신은 결국 기대와 바람을 저버리지 않죠. 저버릴 수가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그것이 가능한지는 신경 쓰지 않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목을 감싼 손을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 모두가 당신 같을 수는 없을 거예요. 모두가, 당신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누군가는 명예롭고 숭고한 죽음보다는 가늘고 긴 일상을 바랄 거예요. 누군가는 승패를 알 수 없는 전쟁보다, 멸망 전까지의 행복을 바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지막이 이어지던 웃음이 잦아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나약함마저도 나는 품을 수 있어요. 당신이 알고 있는,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든 이들을 행복한 꿈에 초대해 주죠.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우리는 꿈속에서 영원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말이 잠시 멈추었다. 그녀는 짧은 침묵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뒤흔들리는 꿈의 중심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세냐 메르데인과, 아니스 슬리우드와,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도. 하멜, 당신이 바란다면…… 꿈속에 초대해 주죠. 필요하다면, 그들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맹세도 하겠어요.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는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에서 내려온 손이 가슴에 올라갔다. 누아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녀들이 싫어요. 당연히 그녀들도 나를 싫어하겠죠.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하멜, 당신과 영원한 꿈을 꾸기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양보하겠어요. 어쩌면, 아하하, 혹시 모르죠. 꿈속에서의 영원을 보내며, 우리가 조금은 친해질 수도 있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스로 말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셋이 주제를 알고서 조용히 분수대로 행동한다면. 누아르는 기꺼이 하멜을 사랑할 권리를 허용해 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어쩌면…… 우리끼리 제법 친해져서, 한가로이 수다를 떨며, 응, 하멜, 당신과 함께. 꿈을 여행할 수도 있겠죠.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같은 욕조에 들어가고, 같은 침대에 누워서. 아하하, 나조차도 상상하기 힘들지만, 의외로 막상 해보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그리고. 가끔은 꿈이 아닌 현실의 문제도 이야기할지도 몰라요. 바깥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어쩌면 유폐의 마왕이 우리의 행복한 영원을 방해할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누아르의 말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너의 이름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점점 거세어지는 흔들림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리서 느껴지던 흔들림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말하는 달콤한 꿈은 결코 이뤄질 수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를 들었다. 희미하고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것은 속삭임이 아니다. 성녀들은 필사적으로 유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이 꿈을 끝내고 싶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은 꿈일 뿐이다. 누아르가 말한 모든 것들은,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는 환상이다. 누아르와 유진의 관계와 감정을 근간부터 부정하는, 모순 가득한 망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달콤하고 행복한 꿈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누아르와 유진, 모두가 많은 감정을 버려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누아르에 대한 살의를 버려야 한다. 그녀를 누아르 제벨라가 아닌 아리아의 환생으로만 보아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하멜을 사랑하게 된 모든 이유를 잊어야 한다. 그녀가 평생 바랐던 죽음에 대한 갈망을 버려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꿈이 아니라 현실에 나가고 싶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든 것을 앎에도 누아르는 마지막으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든 것을 알고서 유진은 대답했다. 저것 외에 다른 대답은 존재해선 안 된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용하며 흔들림이 없는 대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반복된 꿈에서, 몇 번이나 들은 애원과 호소에서, 많은 혼란과, 동요와, 망설임을 거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분명한 결론을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원한 꿈이란 것은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직하지만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 유진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유진은 자신의 피로 흠뻑 젖은 레반테인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란 언젠가 깨어나게 마련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칼날 안쪽에서 불꽃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타오른 불꽃이 피를 증발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르르륵! 그 불꽃은 여태까지의 꿈에서 일으켰던 모든 불꽃 중에서 가장 선명하고 밝았다. 몇 번이고 풍경이 바뀌었던 꿈. 유일하게 바뀌지 않았던 황혼의 붉은빛이, 레반테인의 불꽃이 발하는 빛에 밀려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짧은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탄성처럼 들리기도 했고, 탄식처럼 들리기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더욱 강하게 억눌렀다. 설렘에, 슬픔에, 즐거움에, 사랑에,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의 고동을, 반지를 낀 왼손으로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미소가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리아처럼 웃지 않았다. 처연하게 웃지 않았다. 애달프게 웃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유진이 300년 전부터 보아왔던, ‘몽마의 여왕’다운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득! 손가락이 옷감을 뚫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새빨간 피가 누아르의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반지가 피로 얼룩졌다. 더욱 생생한 고동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 순간이 괴로웠어. 당신과 나 자신의 존재성을 혼동했어.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에 흔들렸어. 애증을 느꼈어. 모순에 헤매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성큼 앞으로 걸었다. 당장에라도 세상에 떨어져,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황혼의 붉은색이 누아르의 뒤를 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맹세할 수 있어요, 하멜. 꿈에서 내가 속삭였던 모든 말은 진실이야. 당신이, 나와 함께 원했다면. 나는 애원했던 대로 당신과 함께했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프로미넌스가 높이 치솟았다. 꿈을 가득 채운 황혼의 붉은색에서 유진의 신화가 찬란히 빛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저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몇 번이고 무너지려 한 것을 결국에는 일으켜 세워 굳힌, 상처투성이의 살의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랑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서, 꿈속의 나를 죽여봐요. 당신의 그 검으로. 우리가 영원할 수 있을 꿈을 모조리 불태워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말없이 발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아악! 신화가 유진의 몸을 떠밀었다. 불꽃에 휘감긴 레반테인이 꿈의 세상을 휩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여태까지 레반테인에게 직접 베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저 검에 직접 베여 죽는 것은 꿈을 유지하는 데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직접 꿈을 끝내고, 새로운 꿈을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누아르는 환히 웃으며 가슴에 박아 넣은 손을 뽑았다. 피범벅의 왼손을 유진을 향해 뻗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뿜어진 피와, 손에서 흩날린 피가 꽃잎이 되어 나부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엷은 미소를 지은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와 함께 피가 주륵 흘렀다. 반지 낀 왼손이 천천히 움직여 유진의 뺨에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으로 꿈은 끝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레반테인에 저항하지 않았다. 기꺼이 가슴을 열어, 레반테인이 몸을 꿰뚫게 내버려 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이 터졌다. 하지만 누아르는 여전한 고동을 들었다. 몸속 가득 퍼지는 환희의 희열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이 지났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뺨을 더듬는 손에서 열기를 느꼈다. 반지를 느꼈다. 유진은 말없이 누아르의 눈을 보았다. 거리가 가깝다. 뜨거운 숨결을 느꼈다. 짙은 피의 냄새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르르르르! 붉게 젖은 하늘이 녹아내렸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꿈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의 기도가 확실하고 가깝게 들렸다. 깊은 꿈에 쐐기가 처박혔다. 세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꿈속을 불태우고, 세냐의 마법이 꿈의 바깥을 흔들어 무너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명은 오지 않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에 젖은 입술이 짙은 곡선을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붕괴했다. 레반테인에 꿰뚫렸던 누아르가, 불꽃에 삼켜져 재가 되었다. 발밑마저 무너지고 유진은 아득한 심연으로 추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프로미넌스를 펼쳐 날아오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비행이란 개념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를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 멀리서 나타난 자그마한 빛이 어둠을 밝혔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멀었던 빛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자그마했던 빛이 형상을 갖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빛이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맞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감이 희미했다. 지금 이곳은 현실인가? 방금의 꿈이 끝나고, 새로운 꿈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얼마나 꿈속에 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 번지는 의문들. 동시에 찾아온 짧은 무력감. 탈진.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실이다.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 현실을 실감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은, 끝났다. 잠에서 깨어났다. 더 이상 성녀들의 목소리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지 않았다. 유진의 안에서 들렸다. 그녀들의 빛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르릉! 거대한 지진이 몸을 흔들었다. 유진은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식하게도 하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이 커다란 제벨라 시티의 공간을 들쑤시는 넝쿨을, 세냐의 마법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메테오보다는 덜 무식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잤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위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은 아침, 아니지. 좋은 밤…… 후후, 이것도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랗고 화려한 카지노 건물이 보였다. 유진의 시선이 건물을 타고 올라, 불 꺼진 네온사인의 간판을 지났다. 지붕에 내려앉은 2대의 제벨라페이스와 눈이 맞닿았다. 하지만 그곳에 누아르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하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과 별조차 보이지 않은 시커먼 밤하늘에 제벨라페이스가 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기괴한 비행체의 머리 위. 누아르 제벨라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유진을 내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진 밤이에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카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둔 누아르는 마치 밤의 여신처럼 보였다. 그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라던 현실에 돌아온 것을 환영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라락! 시커멓던 도시에 빛이 돌아왔다. 네온사인 간판이 알록달록 빛을 발하고, 도시 전체가 잠에서 깨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도시에, 제벨라 시티에 온 것을 환영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 이 도시의 주인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돌아왔다. 세냐의 마법은 더 이상 제벨라 시티를 흔들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 그거 알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현실조차도 당신에게는 악몽이 될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으며 살의를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불 켜진 도시가 발하는 알록달록한 빛. 곳곳에서 들리는 흥겨운 음악. 하지만 도시의 모든 조명이 켜졌음에도 하늘의 어둠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아르의 선언에 호응하듯, 끈적거리는 어둠이 바다의 물결처럼 출렁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은 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나는 여명이 싫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이 싫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도시에서 유진과 보낸 밤을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쇼핑을 하고, 술을 마시고, 도시를 거닐었던 날. 그때 누아르는 이 밤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찾아오는 여명이 싫었다. 그때 그 순간은 틀림없는 현실이었지만, 누아르는- 마치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여명이 오지 않게 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꿈은 끝났다. 유진이 바라지 않았고, 누아르도 받아들였다. 꿈에서 깨어나고, 현실로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웃으며 제벨라 페이스에서 뛰어내렸다. 날개를 펼치지 않고 떨어진 누아르가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누아르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환히 웃는 누아르와 시선을 맞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아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가 흔들렸다. 지면이 크게 주저앉으며 거미줄 같은 균열이 퍼졌다. 유진은 뿌득 이를 씹으며 무릎에 힘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릎을 주저앉히는 수준이 아닌, 몸을 통째로 으스러트릴 만한 거대한 충격. 몇 번이나 중첩시킨 방어 결계는 저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프로미넌스가 구축한 성역. 신에 대한 불가침을 법칙으로 두었지만 무의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머리 위에서 누아르가 웃었다. 대단한 공격은 아니었다. 누아르는 단지, 하늘에서 떨어지며, 유진의 머리 위에 발을 내리찍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작 그것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주님 안듯 받아주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하멜, 당신의 그런 표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꾸구구국…… 굽 높은 구두가 성역의 결계 위를 강하게 짓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뿌드드득……! 도로의 균열이 더욱 퍼져갔다. 이윽고 압력을 견디지 못한 도로가 뒤집히고, 지반이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성역을 유지하면서 레반테인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내가 무거운 것 같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웃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성역의 결계 안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그 폭발을 추진력 삼아 가속한 신화의 칼날이 성역을 가르고 누아르를 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쭉하게 뻗은 다리가 움직였다. 꽈앙! 새카만 구두가 불꽃과 칼날을 걷어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강한 충격을 받아도 레반테인은 부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걷어차인 것뿐인데도 유진은 팔이 뜯어져 날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소리높여 웃으며 양손을 치켜들었다. 콰르르르! 보라색 마력이 양 손바닥 사이에서 회오리쳤다. 치켜든 손을 아래로 내리찍자, 마력이 폭포수처럼 유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한 마력이 아니다. 독이다. 독이 성역 결계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려, 유진이 선 바닥을 녹이기 시작했다. 흐물거리며 녹아가는 도로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그 또한 독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독?’&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몸에 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독기는 유진조차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은 끝났다. 이곳은 현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누아르와 환상의 마안은 현실조차 개변한다. 꿈처럼 세상을 통째로 새로 만들 수는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독기는 누아르가 만들어낼 수 있는 환상의 범주 안에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라면 독무를 맡은 순간 중독되어서 바닥처럼 융해되어야 하는데, 유진이 가진 신성이 독기에 저항했다. 그렇다고 해서 중독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이뤄진 중독에 정신이 흔들리고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에 취한 것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보라색 마력이 손끝에 집중되었다. 시야가 뒤흔들렸지만 저 빛은 강렬했다. 강렬한 살의에 유진의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으면 죽을까? 일격에 죽지는 않을지라도 잠시 동안은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지금의 누아르 제벨라에게서 그 잠깐의 틈은 곧장 죽음으로 이어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끝의 빛이 쏘아진 순간. 유진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까지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몸, 지배를 아예 포기했다. 생각해서 움직이는 대신에 본능과 직관에 모든 것을 맡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가 죽음에 저항했다. 본능과 직관이 필살을 거스르기 위해 움직였다. 멋대로 움직인 몸이 아슬아슬하게 마력을 피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누아르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빛을 보며 눈살을 찡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제와 분수를 알고 멀리서 기도나 하고 있을 것이지. 관람 정도는 자비롭게 허락해 주었을 텐데. 누아르는 짜증을 담아서 손가락을 튕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앙! 빛이 밤하늘에서 폭발했다. 부서진 파편이 불꽃놀이처럼 사방에 흩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으로 충분했다. 주제와 분수를 알라고? 누아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충분히 주제와 분수를 알고 있다. 그녀들로서는 누아르 제벨라를 죽일 수 없다. 죽이기는커녕 상처 하나 입히는 것도 힘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초에 그런 역할은 맡지 않았다.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녀가 서는 자리는 용사의 앞도, 옆도 아니다. 뒤다.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용사의 등을 보아야 한다. 용사가 비틀거릴 때,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자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흩어진 파편이 유진에게 닿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현기증이 사라지고 육체의 통제권이 돌아왔다. 치료와 정화에 몰두한 기적이 유진의 정신과 몸을 씻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호흡을 내쉬었다. 누아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유진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르르릉!&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하늘에 돌연 번개가 나타났다. 커다란 번개가 누아르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깜짝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번개가 마치 장난감처럼 누아르의 손에 잡혔다. 누아르는 손에 쥔 번개를 창처럼 던져 버렸다. 푸확! 공간을 관통하며 날아간 번개가 순식간에 라이미르아의 앞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미르아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브레스를 쏴 갈기기 전에 세냐가 대응에 나섰다. 저 번개는 세냐의 마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아르의 손에 잡힌 순간에 세냐의 마법이 아니게 되었다. 세냐는 역으로 이쪽을 공격하는 번개를 마법으로 소멸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까득. 세냐는 이를 갈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순식간에 공간을 도약하여 도시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도시 바깥에서 초장거리 마법으로 공격.&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의 시도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누아르에게 그런 종류의 공격은 무의미하다. 머나먼 거리에서 발한 마법은 누아르에게 역으로 빼앗겨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경고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세냐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말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거대한 마력이 누아르를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그녀는 박쥐의 날개를 활짝 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했지만,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커먼 불꽃. 신화를 중첩시킨 공검이 공간을 갈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어둠. 살짝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폐부터 재가 될 것 같은 열기. 그리고, 너무나도 강렬한 살의. 저 모든 것이 누아르에게 하멜을 느끼게 해주었다. 하멜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현실을, 다시금 자각하게 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지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움직였다. 살며시 펼친 손바닥에 마력이 모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꾸던 미래의 중심에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에게 죽고 싶다. 하멜을 죽이고 싶다. 어떤 결말에 도달할지는 모른다. 이 과정부터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씁쓸하고 서글픈 꿈이 있었기에 더더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 기쁘다. 꿈이 그렇게 끝나버렸기에 하멜을 더욱 사랑하게 되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누아르는 최선을 다해 대응해 주었다. 자그맣던 마력이 크게 부풀었다. 환상의 마안과 위신의 마안이 동시에 발동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락! 허공에 나타난 사슬이 공검의 앞을 가로막았다. 곧이어 손바닥의 마력에 환상이 깃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이 불꽃이 되었다. 불꽃이 불꽃에 덮이며 중첩되었다. 누아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유진의 공검을 바랐고, 환상의 마안이 바람을 현실로 바꾸었다. 레반테인을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누아르가 지닌 끝없는 마력이 공검의 묘리로 증폭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압도적인 힘이 만들어졌다. 위신의 마안이 불러온 유폐의 사슬. 지금 유진이 만들어내는 공검은 유폐의 사슬마저 부순다. 하지만 사슬의 저편에서 덮쳐온 누아르의 공검은 부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돌한 순간, 오히려 밀려 버렸다. 꽈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유진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방금의 충돌로 레반테인의 불꽃이 꺼져버렸다. 너무 강한 힘이 신화를 소멸시킨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것만 같은, 아니, 실제로 으스러졌다. 회복은 빠르다. 성녀들의 기도도 기도지만, 신위에 도달한 육체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불사력을 갖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이 닿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실로 돌아왔지만 꿈과 똑같다. 유진의 공격은 누아르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현실조차도 악몽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달라. 지금의 누아르는 죽일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월광검 레반테인. 이 검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 빛이 직접 제련한 검이다. 죽여도 죽지 않는 마왕에게 레반테인의 불꽃은 치명적이다. 지금의 누아르 제벨라라도 레반테인으로 직접 신화를 처박아 불태운다면 소생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제는 누아르에게 닿는 것이다. 유진은 내심 착각하고 있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는 직접 전투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을 것이다. 꿈속이 아니라면 누아르를 몰아붙일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황이 조금 나아진 것은 맞다. 현실의 누아르는 꿈속에서처럼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투에 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누아르는 직접 전투만으로 유진을 압도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활짝 펼친 프로미넌스가 날아가는 몸에 제동을 걸었다. 미리 살포한 깃털이 유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즉시 도약했다. 누아르의 사각을 파고들 생각이었지만, 도약 한순간에 직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패다. 이런 종류의 공격은 누아르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 도시 전체가 누아르의 지배를 받는다. 유진이 어떻게 움직이건 누아르의 감각을 속일 수 없다. 그녀에게 사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즐겁게 웃는 소리가 유진의 귓가를 간질였다. 거대한 무언가가 순식간에 유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지노 지붕에 앉아 있던 제벨라 페이스였다. 그 기괴한 비행체가 유진에게 돌진해 왔다. 문제는 속도였다. 유진이 피하기도 전에 제벨라 페이스와 충돌해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라 무겁기까지 했다. 유진의 몸이 다시 뒤로 밀려났다. 째깍째깍…… 제벨라 페이스 안에서 시계침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위적이고 노골적인 신호.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지 않나. 유진은 상상했고, 상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유진을 밀어내던 제벨라 페이스가 자폭해 버린 것이다. 단순한 폭발이라면 유진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하지만 이 폭발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성역 결계를 지나서 온 충격에 유진은 쿨럭 피를 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이 너무 기발한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식의 전투에는 익숙하지 않다. 지금도 그렇다. 등 뒤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빌딩이다. 제벨라 시티의 커다란 빌딩 중 하나가, 있어서는 안 될 다리를 달고서 쿵, 쿵, 유진에게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르르르! 주변의 건물이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달라붙었다. 커다란 콘크리트의 주먹이 위로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무식하고 커다란 공격은 유진에게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건물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조악한 팔다리를 달아놓은 골렘처럼 보이지만, 저것 자체에 누아르가 바라는 환상이 깃들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아앙! 건물의 커다란 주먹이 유진에게 내리꽂혔다. 유진도 즉시 레반테인을 휘두르며 분쇄추의 권능을 발동했다. 충돌한 순간에 건물은 폭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하늘에서 그 광경을 보며 깔깔 웃고 박수를 쳤다. 박수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의 양손이 부딪칠 때마다 도시가 뒤흔들리고 마력이 폭풍이 몰아쳤다. 숨을 씨근거리던 유진의 등 뒤에 마력의 폭풍이 처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몸이 앞으로 휘청 기울였다. 쓰러지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현실적인 광경이 보였다. 주변의 건물이 모조리 뽑혀서 누아르의 주변에 떠오르고 있었다. 누아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사사삭! 커다란 건물들이 분해되고, 셀 수 없이 많은 돌덩이가 되었다. 그 광경은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꿈속의 누아르는 별과 달을 유진에게 때려 박았다. 현실의 누아르는 건물을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때려 박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자비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하나하나에 마력이 깃든 돌덩이는 꿈속과 다를 것 없이 강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르륵! 레반테인이 다시 불꽃을 내뿜었다. 직접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유진 주변의 공간이 갈라지고 활짝 열렸다. 마창의 권능이 펼쳐졌다. 수천 개에 달하는 불꽃이 창이 되어 쏘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듭된 요격. 마력과 불꽃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휩쓸려서 재가 되어 죽겠지만, 누아르에게 있어서 저 모든 것이 아름다운 불꽃놀이처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름다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심으로 감상을 말했다. 단순한 폭죽이 아니다. 서로 간에 존재하는 모든 인연과 감정을 비장하고 서글픈 살의로 승화시켜 폭발시키는 순간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오직 유진과 누아르만의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감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경고를 무시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 했어야 할 공격이다. 유진에게 가로막혀서 하지 못했던 공격. 하지만 이제는 방해받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마력이 회오리쳤다. 보라색 마력에 끔찍한 살의가 깃들어 날을 세웠다. 누아르는 옆에 만들어낸 송곳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려 보내지 않았다. 송곳이 마법처럼 도약해 사라졌다. 고속으로 다가오던 세냐의 앞에 송곳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당황하지 않고 메리를 앞으로 뻗었다. 아멜리아 머윈에게서 뽑아내는 마력과 세냐의 마나가 영력으로 화했다. ㅡ쩌엉! 영력으로 일으킨 마법이 송곳의 전진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꺼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소멸하는 마력의 사이에서 누아르가 나타났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 빛을 뿜었다. 강제수면. 근접거리에서의 권능이 세냐의 정신을 압박했다. 세냐의 눈동자가 몽롱히 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누아르의 표정에 짧은 당황이 스쳤다. 잠에 재운 것은 틀림없는데, 세냐의 정신을 악몽에 밀어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헐떡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세냐의 입에서 들린 것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마법의 여신님이. 똑같고 변하지 않는 수법에 몇 번이나 당할 것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홱 시선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커먼 밤하늘. 육체와 희미한 끈으로 연결된 세냐의 모습이 보였다. 불투명한 존재. 강제수면이 발동되어 잠이 든 순간, 세냐는 자기 영혼을 육체와 분리해 버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써서 떠올린 방법이 자살인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비웃으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버버벅! 그 비웃음을 징벌하듯이 마법이 누아르의 몸을 관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눈동자에 화살이 처박혔다. 연이어 나타난 수백 개의 화살이 누아르의 몸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누아르의 몸이 고슴도치처럼 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한 말이지만 평범한 화살이 아니다. 영력으로 만든 마법은 의도하지 않아도 절대률이 부여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직 살의만을 담았다. 다른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의 말살을 바랐다. 그런 화살을 수백 개나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리했던 영혼이 육체로 돌아왔다. 그 충격으로 강제수면에서 깨어났다. 이 방법으로도 강제수면은 피할 수 없지만, 절대로 당해서는 안 될 몽중몽은 피할 수 있다. 아무리 세냐라도 잠이 들어 꿈으로 끌려가 버린다면 방법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육체와 영혼을 스스로 분리했다. 잠이 든 즉시 육체를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누아르라도 죽은 상대에게 꿈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건 몇 번이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소생에서의 부담도 부담이지만, 분리가 반복될수록 육체와의 연결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스스로 분리했을지라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가능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의 악몽을 무너트린 것은 효과가 있었다. 누아르가 도시에 부여한 꿈은 아직 붕괴되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혼을 분리했어도 도시의 꿈에 붙잡혔을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누아르가 보여주는 꿈은, 1명의 의식에서만 작용하는 꿈이다. 반복할수록 정말로 자살이 되어버리는 수단이지만, 그래도 대응할 수는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 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기왕이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내고 싶다. 방금의 마법은 유효했다. 영력의 화살은 분명히 누아르를 파괴했다. 수백 개의 살의를 동시에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텐데도 누아르는 움직였다. 뒤로 기울었던 몸이 천천히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긱. 몸에 처박아 넣은 화살들이, 누아르가 움직일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쑤욱! 양 눈에 처박힌 화살이 뽑혔다. 안구는 딸려 나오지 않았다. 부서진 눈동자가 세냐의 눈앞에서 복원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프긴 한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뺨과 입술을 꿰뚫은 화살들이 뽑혀 떨어졌다. 누아르는 찢어진 뺨과 입술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히죽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라색 눈동자가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는 다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강제수면이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아르는 움찔 멈춘 세냐를 향해 소리높여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겁먹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욕. 세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발끈해 공격할 수는 없었다. 세냐의 공격보다 누아르의 공격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어느새 움직인 발이 허공을 걷어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뿐인데도 세냐의 비행이 끝났다. 그녀는 더 이상 하늘을 날지 못하고 지면에 처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 당신의 마법은 아파요. 그래…… 멋진 살의란 것은 인정해 주겠지만, 날 죽일 수는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양팔을 펼치며 노래하듯 속삭였다. 지면에 처박힌 세냐는 욕설을 내뱉으며 양손으로 땅을 디뎠다. 그 순간, 지면에서 치솟은 사슬이 세냐의 손을 휘감았다. 위신의 마안. 유폐의 사슬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죽일 수 있는 살의는 오직 하멜의 것뿐이야. 내가 죽고 싶은 살의는 오직 하멜의 것뿐이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해서 튀어나온 사슬이 세냐의 몸을 결박했다. 누아르는 지면에 찰싹 달라붙는 세냐를 내려다보며 소곤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너 따위의 살의에 죽지 않아. 네가 나를 아무리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해도, 네 살의는 내게 하찮을 뿐이야. 네 존재 자체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너는, 이곳에 오면 안 됐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하! 그건 너무 많이 들은 말인걸, 불쾌하지도 않은 말이야, 그래, 나는 미쳤지. 하멜에 대한 사랑으로 미쳤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손가락을 들었다. 흔들리는 손가락이 계속해서 환상을 만들었다. 부엌에나 있을 법한 조리도구들이 하나씩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채를 손질하고 고기를 자를 식칼, 냄비를 휘저을 국, 음식에 꽂을 포크, 스푼, 접시, 컵, 몇몇 개를 제외하고서는 도저히 사람을 해칠 수 없을 것 같은 도구들이 누아르의 앞을 빼곡히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 당신에게는 이것이 더 좋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미소가 심술궂게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락! 빼곡한 도구들이 모조리 책으로 바뀌었다. 서재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책장과 흔들의자, 심지어 벽난로까지 나타났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던 세냐의 얼굴이 참혹히 일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지금 누아르가 만들어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모욕이고 기만인지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지는 않을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바닥에 처박혀 있으면 돼. 당신이 그리던 재미없고 하찮은 꿈에 파묻히고 짓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도록 해. 내가 하멜을 죽이고, 하멜이 나를 죽이는, 그 모든 것을. 살아서 보기만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재의 가구와 책들이 세냐의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 충격만으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누아르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서 풋 하고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그렇게 죽는다면. 그 비웃을 수도 없는 하찮은 죽음이 세냐 메르데인의 마지막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누아르는 이 공격에 아무런 살의도 담지 않았다. 그냥, 세냐가 꿈꾸던 서재를 쏟아부을 뿐. 만약 이런 것에 세냐가 죽어버린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사고를 목격해도 즐거울 것 같다. 누아르는 심술궂게 웃으며 세냐가 서재에 깔리는 것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웅. 직전에 모든 것이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던 누아르가 탄성을 내뱉었다. 말로만 그치지 않고 직접 박수까지. 짝, 짝, 짝. 평범한 박수 소리가 밤하늘을 올렸다. 조롱이나 그런 것을 떠나, 누아르는 솔직하게 지금의 세냐에게 감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신의 마안으로 만들어낸 유폐의 사슬이 모조리 끊어졌다. 당연히 누아르가 끊은 것은 아니다. 세냐가 직접 사슬을 끊고, 몸을 일으킨 것이다. 살의를 담지 않았다고는 해도, 누아르가 바라서 추락시킨 모든 것이 멈춰있다. 그 역시 세냐가 한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법이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또한 솔직한 감상이었다. 유폐의 사슬은 마나와 마법을 차단한다.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상극이다. 완력으로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슬을, 마법으로 끊어내고, 늦지 않게 추락마저 멈추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당신을 너무 하찮게 보았던 걸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세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틀비틀 자리에 서서, 씨근거리는 숨을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격통. 그리고, 가슴 안쪽과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는 분노. 세냐는 입술을 뿌득 씹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얼굴을 본 누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핏발이 선 눈동자. 코와 입술, 눈에서 흐르는 피. 사슬의 결박에서 풀려나기 위해 세냐가 많은 무리를 한 것이 훤히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힘들어 보이는데요? 흠, 오히려 좋을지도. 세냐 메르데인,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발언을 철회하지는 않을게요. 방금의 발악 정도면 체면치레는 했을 테니, 얌전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지 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상을 치료할 수단은 있나요? 어쩜, 보는 내가 다 아파 보이는걸. 미안해요, 위신의 마안을 이렇게 쓰는 것은 영 익숙하지 않아서. 힘조절이 어렵달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팔다리를 보았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에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졌다. 누아르는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화악! 세냐의 옆에 커다란 의자가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의자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아, 거기 편히 앉아서. 책은 많으니까…… 아하하, 아무거나 집어서 읽고 있어요. 나는 당신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조금의 시간이 흘렀을 뿐. 유진에게 집중시켰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속해서 쏟아지는 폭격. 저 공격은 누아르가 바라는 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부수고 베고 불태워서 재로 만들어도, 그 재에서 다시 공격을 만들어낼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참.”&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돌린 누아르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껏 배려해서 의자도 만들어주고, 책까지 주었는데. 설마 호수나 강까지 만들어줘야 했던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욕심이 너무 많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짜증을 담아 내뱉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피범벅의 손으로 지팡이를 쥐고, 이쪽을 겨누고 있는 세냐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충혈되어 붉은 눈으로 누아르를 노려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배려가 무시당한다면 아무리 나라도 더 화를 낼 수밖에 없어요. 아예 팔다리를 뜯어놓아야 얌전히 있어 줄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세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계를 한참이나 넘은 분노가, 세냐로 하여금 누아르의 조롱을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신에 다른 소리는 선명히 들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목소리. 둘은 ‘다른 일’로 바쁘면서도, 세냐의 부상을 알고 치료해 주려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됐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생각했다. 그녀는 성녀들의 치료를 거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 좋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러진 팔다리의 부자유와 고통. 그 고통이 지금의 한심한 모습을 더욱 선명히 자각시켰다. 세냐는 한 번 더 입술을 씹었다. ㅡ화악! 영력이 부풀고 세냐의 등 뒤에서 은하가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모든 광경이 누아르의 짜증을 유발했다. 그녀는 세냐의 등 뒤에 펼쳐진 거대한 은하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하우리아에서 보았던 것과는 깊이와 격이 다르다. 누아르는 그렇게 느꼈다. 느낌일 뿐, 저것이 정확히 어떤 깊이와 가능성을 지녔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잠시 고민했다. 세냐에게 한 번 더 강제수면을 걸어버릴까? 영혼을 분리시켜 꿈에서 벗어날지라도, 그것은 꿈을 피하는 것일 뿐 누아르에게 치명적인 반격은 가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냈던 거대한 꿈을 재구축할까. 도시를 뒤흔들어 깨운 꿈. 그렇다고 해서 다시 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보다는 깨기 쉬운 연약한 꿈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럴지라도 세냐를 가둬서 죽이기에는 충분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란 언젠가 깨어나게 마련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목소리를 떠올리고서. 누아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그것만으로 누아르는 도시의 꿈을 재구축하는 것을 포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촤라락……! 세냐의 주변에 사슬들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꿈이 아닌 현실을 바랐다. 그래서 누아르는 기꺼이 꿈속에서 유진에게 죽었고, 꿈을 포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너트린 꿈을 다시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세냐에게 있어서 행운이다. 만약 누아르가 도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세냐의 마법은 결코 누아르를 위협하지 못했을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지금의 행운과 자비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머리가 세냐에게 향했다. 세냐는 반응하지 않고 우두커니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누아르를 겨누고 움직이지 않았다. 분노로 뜨겁던 가슴이 차갑게 식고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사슬의 철그럭거리는 소리만이 선명히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귀를 기울였다. 사슬의 소리를 지나 자그마한 속삭임들을 들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속삭임들. 세냐가 우화하는 중에 항상 들었던 마나의 목소리. 속삭임을 들으며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사슬. 저것은 세냐가 가진 여러 트라우마 중의 하나다. 바벨의 어전에서 저 사슬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던 기억이 떠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바벨이 아니다. 세냐가 멸시하던 갈X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의 도시다. 인정했다. 누아르는 세냐보다 강하다. 갈X의 여왕이라고는 해도 저 힘은 진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멜과 죽고 죽이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싫다. 세냐는, 그녀 자신을 무력함을 비웃는 모든 것이 싫었다. 그 빌어먹을 감정은 300년 전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느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기 위해서는 저 개 같은 사슬부터 넘어야 한다. 유폐의 사슬이 세냐를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시간이 멈췄다. 세상의 시간은 멈춤 없이 흐르지만 세냐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혼자만의 영원 속에서 세냐의 의식이 가속했다. 기어코 다가온 사슬이 세냐에게 닿은 순간,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은하가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은 가진 끝없는 마나의 현현. 이터널 홀을 직접 현실에 구현한 모습. 세냐가 완성이라고 생각했던 이터널 홀은 마법의 신위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세냐 스스로 붕괴시켰다. 지금의 저것은 말뿐인 무한이 아니다. 무한을 말하는 주제에 유한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한한 마법이 유폐의 권능을 이해했다. 꽃처럼 피어난 마법에 사슬이 밀려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사사삭! 마법에 휘감긴 사슬이 부식했다. 이 모든 것이 찰나에 일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환상처럼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아르가 마안을 통해 환상을 현실로 바꾸었듯, 세냐는 마나에 기원하여 기적과 환상을 일으켰다. 그것은 마법으로 모방해 낸 사슬. 수백 개의 사슬이 순식간에 누아르를 포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핫…….”&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사슬이 그러하듯, 세냐의 사슬도 비슷한 권능을 가졌다. 마력이 억제되고 있다. 빠르게 찾아오는 탈력감에 누아르는 유쾌히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세냐 메르데인의 살의는 꽤 마음에 들었다. 하멜이 없었다면, 저 살의만으로 누아르는 설렘을 느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이 있으니 그럴 수 없다. 사랑하는 남자가 두 눈을 훤히 뜨고 있는데 바람을 피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슬은 굉장히 강력해서, 누아르로서도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정말 한계인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아르는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않고 속삭였다. 비틀거리던 세냐가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유폐의 사슬을 마법으로 재현하는 것. 누아르 제벨라의 끝없고 흉포한 마력을 억제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세냐에게 커다란 부하를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박수라도 쳐주고 싶지만 손이 묶여서 원. 아니면 찬사를 담아 죽여버릴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고서, 누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럴 것 같아서 너랑 놀고 싶지 않았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이러고 있고, 네가 그러고 있으면. 마치 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에서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섬뜩함. 깊이 안기고 싶은 살의.&lt;/p&gt;&lt;p&gt;&lt;br /&gt;&lt;/p&gt;&lt;p&gt;“히로인을 괴롭히는 악녀 같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한히 반복되는 포격에 갇혀 있어야 할 유진. 그는- 외날개가 아닌, 한 쌍이 된 불꽃의 날개를 펼치고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유진의 주변에 휘날리는 시커먼 재들을 보았다. 일격에 소멸…… 시킨 것일까? 그럴 리가. 포격이 반복되어야 할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만든 환상 자체를 불태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을,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을 죽였을 때 이상의 화력. 이그니션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저 날개는? 누아르는 잠시 의문을 느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 울상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침 온몸이 사슬에 포박되어 있으니, 누아르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울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와줘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전.&lt;/p&gt;&lt;p&gt;&lt;br /&gt;&lt;/p&gt;&lt;p&gt;멈추지 않고 끊이지도 않으면서 반복되는 공격. 이 공격은 단순하고 집요하면서 떨쳐내기 힘들었다. 아무리 레반테인을 휘두르고 마법을 터트려도 공격은 사라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답은 간단했다. 화력을 올리면 된다. 환상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시작되지 못하게, 환상 자체를 모조리 불태워 재로 만들면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단한 해답이지만 쉽게 시도할 수는 없다. 레반테인의 화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이그니션을 써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을 써버리면 단기 결전이 강요된다. 아무리 이그니션의 지속시간이 늘었다고 해도, 필살을 확신하지 못하는 전투에서 벌써부터 이그니션을 쓰는 것은 유진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를 중첩해 베었다. 이클립스를 함께 터트렸다. 하지만 공격을 일소하지는 못했다. 별것 아니어야 할 건물의 잔해들이 계속해서 복원되고, 유진에게 계속해서 쇄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닮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 집요하게 연쇄되는 공격의 감옥은, 하멜이 과거 즐겨 쓰던 무한연옥과 닮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연일 리가 없다. 이 공격을 만든 것은 누아르 제벨라다. 저 미친년이라면 하멜의 공격기를 재현하여 하멜을 죽이겠다는 정신 나간 발상을 떠올릴 법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왔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의 꿈은 붕괴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아르가 약화 된 것은 아니다. 특히 세냐와 아니스에 대한 집념과 분노. 당연히 유진은 불길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된다.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었다. 지금 이러는 중에도 세냐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악! 유진의 가슴에 빛이 어렸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참 떨어진 도시의 바깥. 그렇지만 유진의 눈은 멀고 먼 성벽 근처에서 날고 있는 라이미르아와, 그 머리 위에서 기도 중인 크리스티나를 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부디.]&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말. 유진은 가슴에 얹으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대신에 양손으로 레반테인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저하던 것은 내 쪽이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숨을 깊이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르르르르! 유진과 레반테인이 공명을 시작했다. 이그니션 없이 감당할 수 없던 힘이 유리의 칼날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양손이 저릿거리고 심장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레반테인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기도를 맺은 양손, 성흔에서 피가 철철 흐른다. 뜨겁고 고통스러운 신열이 성녀들의 의식을 흔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곁에 있지 않다. 하지만 유진의 눈은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육신을 갖지 못한 아니스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이 신음을 억누르며 기도를 이을수록 빛은 점점 강렬해졌다. 둘의 머리에 떠 있는 빛의 고리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둘의 모습이 빛에 둘러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 어머니! 어머니가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미르아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던 크리스티나의 육체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메르도 기겁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급히 빛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성녀의 육신을 만질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2명의 목소리를 함께 들었다. 푸확! 빛이 흩어졌다. 성녀들의 모습도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레반테인을 머리 위로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양손으로 쥔 레반테인이 무겁게 느껴졌다. 짓눌릴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진은 피범벅의 손을 보았다. 짙고 강력해진 공명이, 성녀들의 존재를 빛으로 바꾸어 유진의 곁으로 이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아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2쌍의 손이 유진의 손에 겹쳐졌다. 성흔에서 쏟아지는 피가 불꽃에 스며들었다. 화르르륵! 격렬해진 신화가 성녀들의 환영을 휘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아픕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멜. 엄청나게 아픕니다. 영혼이 작열하는 것 같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반대의 대답.&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고, 크리스티나는 조금 더 강하게 유진의 손을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푸확! 불꽃이 성녀들을 집어삼켰다. 모든 것을 짓누를 듯이 무겁던 레반테인에서 무게가 사라졌다. 유진은 잠시 눈을 감고, 떴다. 성녀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등 뒤에서 성녀들의 존재를 느꼈다.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는 일체감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형태로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에서 탄식과 같은 속삭임을 들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는 않지만, 유진은 못 들은 척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우우우우우! 프로미넌스가 아닌 다른 날개가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지지직! 신화의 일검이 모든 것을 재로 만들었다. 무한히 반복되던 공격, 그러도록 부여된 환상이 재가 되었다. 공격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세냐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은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쪽 무릎을 꿇은 세냐. 밤하늘에서 사슬에 묶인 누아르. 유진과 누아르의 시선이 마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와줘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것부터가 저 모든 것이 연기란 증거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마법으로 재현한 유폐의 사슬. 그렇지만 누아르는 저 사슬에 칭칭 감긴 상태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하늘을 날고 있다. 누아르의 마력이 세냐의 마법을 웃돈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못된 마녀가! 저를 괴롭힌다구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빽빽 비명을 질렀다. 유진은 뿌득 이를 갈면서 시선을 내렸다. 세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습니다. 세냐 님은 잠시 의식을 잃은 것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해하지 마십시오. 팔다리의 부상은 세냐가 바라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하지만 정신이 어지럽지는 않았다. 저 목소리들은 마치 유진이 직접 떠올리는 것처럼 의식에 녹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야가 넓다. 레반테인이 가벼워진 만큼 기적의 ‘한계’가 늘었다. 이런 능력을 예상하고서 세례를 한 것은 아닌데. 이건- 기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운, 아득하고 거대한 신성. 그것이 빛의 성녀이기도 한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와 나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기적의 한계는 얼마나 늘었지? 어디까지 가능하지? 가늠되지 않는다. 해볼 수밖에. 유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우고서 아래를 보았다. 방금까지 저쪽에 있던 유진이 어느새 아래에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마법을 쓰거나. 어느 쪽이건 유진에게는 손쉬운 일. 그런 것이라면 누아르가 놀람을 느낄 일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놀랐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누아르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데. 누아르는 지금 유진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유진의 등 뒤의 날개를 보았다. 프로미넌스와는 다른 빛의 날개. 누아르의 눈이 얇아졌다. 분명 날개인데. 지금 누아르의 눈에는 날개처럼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 그, 둘이, 유진의 등 뒤에 선 것처럼 보였다. 그것에 누아르의 입술이 뒤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뒤틀린 입술을 열어 웃음을 터트렸다. 콰직! 전신을 묶은 사슬이 부서지고 흩어졌다. 누아르는 날개를 활짝 펴고서 밤하늘에 똑바로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세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휘황한 빛이 세냐에게 스며들었다. 으깨진 팔다리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동시에 누아르의 손가락이 유진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펑.&lt;/p&gt;&lt;p&gt;&lt;br /&gt;&lt;/p&gt;&lt;p&gt;터트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바랐다. 아직 구현되지 않은 환상, 그것을 위한 마력이 유진의 눈앞에서 양단됐다. 어느새 들린 레반테인의 끝이 누아르를 겨누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펑! 반대로 누아르의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검붉은 화마가 누아르를 집어삼켰다. 누아르는 소리죽여 웃으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부드럽게 뻗은 손바닥이 불꽃을 밀어냈다. 펼친 손가락을 쥐는 것만으로 불꽃이 소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짧은 사이에 유진이 누아르의 앞에 도달했다. 가속한 레반테인이 누아르의 목으로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로막혔다. 새하얀 손바닥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의 칼날을 받아냈다. 약지의 반지가 불꽃 속에서도 선명한 반짝임을 보였다. 받아내서, 밀어내려고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밀리지 않았다. 유진에게는 깃털처럼 가벼운 검이지만, 누아르에게는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 안쪽에서 폭발한 불꽃이 공검으로 이어졌다. 푸확! 연달아 터진 폭발이 레반테인을 가속시켰다. 가로막고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힘에서 밀린 누아르가 뒤로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짧은 탄성을 지르며 손바닥을 보았다. 화상이 보였다. 기어코 파고들어 왔나.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이 무겁다. 상처가 뜨겁다. 그 모든 것이 누아르를 흥분시켰다. 그녀는 쓰라린 손을 움켜쥐었다. 대륙 반대편까지 날아갈 것 같던 몸이 허공에서 우뚝 정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를 일으켜 세우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저 광경은 보기에 조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받아들였다. 누구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누구를 등 뒤에 세우고, 누구를 옆에 세울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오늘, 여기서, 당신이 보는 것은 나뿐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렘과 사랑이 질투란 감정조차 초월했다. 오늘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하였나. 쓰라린 손바닥의 상처로 다시금 실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방금까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자신의 패배를 상상하지 않았다. 그토록 기대했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냐의 마법은 누아르를 놀라게 했고, 성녀의 기도에 힘입은 하멜의 검은-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조차도 누아르에게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결투도 뭣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사적으로 죽이려는 것뿐. 정정당당? 애당초 이 전장은 누아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대등해졌을까? 상상되지 않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던 패배가. 죽음이, 조금은 가까워졌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다리의 상처는 나았다. 하지만 가슴 안쪽 뻐근함과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안도 없이 마왕의 권능을 재현한 대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이제는 직접 도와달라고까지 말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도 말했는데, 내가 언제 혼자 싸운다고 했냐? 혼자 들어간다고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봐도 너 혼자 싸우는 분위기였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혼자 싸울 생각이었으면 같이 오지도 않았고, 장소를 여기로 정하지도 않았을 거야. 가비드 때처럼 결투장으로 끌어들이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진짜, 그게, 마음에 안 들어. 왜 하필 저년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장에서 싸우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렀으면 밖으로 나왔겠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세냐를 흘겨보았다. 세냐는 호흡을 고르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세냐가 누아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압도적으로 유리하고 전지전능할 수 있는 전장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세냐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라면 밖으로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냅다 도망치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망치고 싶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뒈질 뻔한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네 열받는 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투덜거리면서 메리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그녀도 알고 있다. 오늘 도망, 아니, 후퇴한다고 해서 다음에 승기를 잡기는 힘들다. 오히려 다음이 더 끔찍할 수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야 도시의 꿈을 무너트릴 수 있었지만, 과연 다음에도 무너트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누아르 제벨라라는 존재를 배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그녀를 무시한다면, 누아르는 망설이지 않고 유폐의 마왕과 손을 잡고서 영지를 옮길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제벨라 시티가 아닌, 판데모니엄 전체에 누아르의 꿈이 펼쳐질 수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되면 정말로 승산이 없다. 바벨에 오르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의 조력을 받는 누아르에게 전멸할 것이다. 지금이 아니고서는 누아르를 죽일 기회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일, 기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입술을 꾹 닫고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꿈을 부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듯, 유진 역시 꿈속에서 끔찍한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묻고 싶었다. 어떤 악몽을 꾸었는지.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정말로 누아르를 죽이고 싶은 것인지. 죽여도, 괜찮은 것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을 리가 없다. 아무리 결의했어도, 누아르를 죽인다면- 여태까지처럼 승리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후유증이 남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조차도 유진은 감내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한 힘 싸움이라면 네가 우세하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세냐는 저렇게 말했다. 굳이 한 번 더 묻는 것으로 유진의 결의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이 전장에서 세냐가 해야 할 일은, 유진이 이기도록 돕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신경 쓰지 말고 너 편한 대로 싸워. 저 엿 같은 마안들은 내가 어떻게든 틀어막아 줄 테니까. 그러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유진도 급히 위를 보았다. 지금은 밤. 달도 별도 없어서 하늘은 어둡다만, 그것과는 다른 ‘어둠’이 갑자기 드리웠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딩이다. 거대한 빌딩이 유진과 세냐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 세냐는 표정을 찌푸리면서 메리를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내 곁에 있지 말고 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주변에 나타난 마법의 빛이 빌딩을 향해 폭사했다. 수백 개의 광선이 폭음조차 내지 않고 빌딩을 지워 버렸다. 조금 남은 부스러기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환상의 마안이 잔해들을 다른 형태로 바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냐의 마법이 환상을 포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틀어막아 주겠노라고 말한 것이 불과 방금. 세냐의 무한이 마법을 낳았다. 위신의 마안과는 달리 환상의 마안은 누아르가 타고난 것. 유폐의 권능을 빌려오는 것도 아닌, 누아르 본인의 권능. 빌려온 권능이야 어찌 모방이 가능했지만, 저 환상만큼은 모방으로 대응이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마법을 연이어 충돌시킨다. 누아르의 마안이 환상을 현실로 이루듯, 세냐의 마법도 기원을 현실로 만든다. 방식은 다르다. 이것만으로 싸운다면 세냐가 패배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관없다. 세냐가 맡기로 한 것은 환상을 틀어막는 것뿐이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으로 길이 열렸다. 유진은 주저 없이 세냐를 놓았다. 부축이 사라졌지만 세냐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날아간 유진의 등을 보았다. 돌아봐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돌아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에 가로막히는 환상을 신경 쓰지 않았다. 빠르게 다가오는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의 불꽃을 보았다. 저 검은 누아르로서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의 화상이 아직까지 쓰라리다. 좀처럼 재생이 되지 않고 있다. 역시 저 검에 베이는 것은 치명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검’이라는 형태가 오히려 약점이라고 느꼈다. 검이 할 수 있는 것은 베거나 찌르는 것뿐. 저 불꽃이 제아무리 위력적인들, 검의 형상이란 것이 오히려 하멜을 ‘덜’ 느끼게 해준다. 누아르로서는 그것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가 사랑한 하멜의 무자비한 살의를 표현하기에, 검은 너무나도 정직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금을 이해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유진이 대뜸 레반테인을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월광검 레반테인. 빛이 유진을 위해 제련한 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한, 유진과 빛의 신검. 그 검이 유진의 손을 떠나 누아르에게 비수처럼 날아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라기는 했지만 정직에서 크게 벗어난 공격법은 아니다.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젖혔다. 아슬아슬하다고도 할 수 없이, 레반테인이 넉넉하게 누아르를 비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움직인 순간에 누아르는 급히 내뱉었다. 하지만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레반테인을 던져 버리는 것과 동시에 펼친 기적. 누아르조차 간파하지 못한 공간도약이 유진의 몸을 누아르의 코앞으로 옮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안면에 주먹이 처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와서 칼질을 안 한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코피를 뿜었지만,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될 대로 되란 식으로 레반테인을 던진 것은 아니다. 유진은 이렇게 되도록 충분히 설계했다고 판단했다. 계속해서 레반테인 위주로 공격하면서, 누아르가 레반테인을 의식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누아르가 강할지라도 레반테인의 공격은 유효하다. 특히나 누아르는 강하되 오만하지는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는 단 한 번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적수가 될 만한 마족들을 추려서 타락시켰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정기를 수급하며 힘을 키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겉모습과 행동거지와는 달리 굉장히 신중하단 말이다. 그런 누아르가,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레반테인을 의식하지 않을 리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공격할 때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최우선적으로 레반테인을 쫓았다. 다른 마법이나 공격은 허용할지라도, 레반테인은 주시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결국, 누아르의 안면에 주먹을 처박았다. 코뼈를 부수는 감촉을 느꼈다. 더, 강하게. 그렇게 바랐고, 콰직! 주먹이 누아르의 머리를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를 잃은 몸이 기우뚱거렸다. 유진은 멈추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멀리 날아갔던 레반테인은 어느새 유진의 손에 돌아와 있었다. 떨어진 무기를 소환하는 마법 따위 대마법사가 아니어도 쓸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레반테인에 한해서는 마법을 쓸 필요도 없다. 레반테인 자체가 유진의 신검이다. 바라는 순간 손에 쥐어진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에 휘감긴 칼날이 누아르에게 쇄도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머리는 부쉈지만 누아르는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레반테인이 도달하기 전에 누아르의 몸이 반응했다. 꽈앙! 걷어찬 발길질에 유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자의 얼굴을 때리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는 없지만 누아르의 외침은 똑똑히 들렸다. 쿠르르르! 도시에서 뽑혀 나온 건물 수십개가 일제히 유진에게 날아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시했다. 유진은 건물을 공격하지 않고 다시 도약했다. 쾅, 쾅, 쾅! 유진에게 날아들던 건물들이 하늘에서 파괴됐다. 지상에 남은 세냐가 요격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크리스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의 칼날을 녹인 것은 빛이다. 애석하게도 유진은 신성마법과 기적이란 것에 익숙하지 않다만, 성녀들은 다르다. 유진이 바란 터무니없는 요구에 성녀들은 기겁했지만, 그렇다고 주저하지는 않았다. 기적을 내리는 신이 직접 가능하다 여기는데 불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유리공예처럼 칼날이 흐물거렸다.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던 칼날이 유진의 뜻에 따라 형상을 바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 아니, 망치? 어느새 머리를 복원한 누아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워낙에 형태가 불완전해서, 직전까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지금의 레반테인은 결코 검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답! 도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외쳤다. 활짝 펼친 손이 밤하늘을 강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하늘의 어둠이 통째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한 마력이 덮쳤다.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식하게 마력을 쏘아대는 중에도 두 개의 마안은 침묵하지 않았다. 공간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유진을 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집혀라. 떨어져라. 짓눌려라. 꿇어라. 꿇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의 권능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지의 조작. 여태껏 누아르는 그 권능을 꿈과 결합해서 사용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인지의 조작을 넘어 현실까지 조작하고 있다. 저 직관적인 환상들은 접촉한 순간에 유진에게 작용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내장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는 것 같다. 지금 세냐는 발현되지 않은 환상을 간파하고 틀어막고 있다. 유폐의 사슬을 마법의 사슬로 가로막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할 수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나의 고갈은 없다. 의식이 버티는 한 무한에서 마법을 끌어낼 수 있다. 세냐는 숨을 헐떡이며 밤하늘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안의 권능은 최대한 틀어막았다. 하지만 저 무식하게 치닫는 마력까지는 막아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라고 생각했는데. 틀려 버렸다. 지금의 레반테인은 망치였다. 불꽃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칼날 자체가 망치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와는 다르다. 무거운 타격이 마력을 깨부쉈다. 마력과 함께 밀려났던 밤하늘이 산산조각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절반은 맞은 거 아니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과 하늘을 부수고 온 망치가 도끼가 되었다. 이만큼 거리가 있었는데 어느새 거리는 소멸했다. 누아르는 가슴에 꽂히는 도끼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리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드드득! 내려 찍힌 도끼는 끝까지 닿지 못했다. 누아르가 두르고 있던 보라색 마력이 수백 개의 손이 되어 도끼를 받아낸 것이다. 태반이 도끼에 으깨졌지만 전진은 가로막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핏물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현실 조작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마력에 직접 환상을 부여한 것이다. 저런 것까지 가능할 줄이야. 세냐는 급히 메리를 움직여 누아르를 겨누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억! 이번에는 오히려 세냐의 마법이 먼저 틀어막혔다. 무식한 질량의 마력이 세냐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유진은 붙들린 도끼를 뽑았다. 수백 개의 팔이 뜯겨나갔다. 타오르는 불꽃이 마력을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레반테인을 직접 처박지 못했기에 누아르에게는 타격이 없다. 대량의 마력이 전소된 것? 아무 문제 없다. 불타 버린 마력이야 누아르가 가진 무한대의 마력에 비하자면 티끌조차 되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꽤 세게 때려주었는데, 걱정되지 않아요? 죽었을지도 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죽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날이 쭉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세냐 메르데인을 믿는 건가요? 아니면 내 상냥함을 믿는 걸까? 하긴, 죽였다면 진즉에 죽일 수 있었어. 내가 죽이지 않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다. 초대장을 보냈던 시점에서 정신을 제압할 수 있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지 않은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슬퍼할 것 같아서. 하멜이 화를 낼 것 같아서. 하멜의 살의를, 복수심 따위로 변질시키고 싶지 않아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창이죠? 창일 거야. 당신은 창도 꽤 잘 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틀렸다. 창처럼 길쭉하게 뻗은 칼날이 대뜸 굵어졌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게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 곧 누아르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포신이 되었다. 단어 그대로 유리로 만들어진 대포가 된 것이다. 유리 대포의 포구에서 불꽃이 일렁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방사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자그마한 빛의 구체가 대량으로 포구에서 쏟아져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먹만큼 자그마한 구체. 누아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녀는 주변 가득 떠도는 구체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이 다채로워졌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백 개의 이클립스가 동시에 폭발했다. 하늘은 더 이상 밤이 아니게 되었다. 하늘이 한 번 새하얗게 물들었다. 결코 환한 빛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릴 광염이 누아르에게 집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날개 때문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지지지직! 누아르가 펼쳤던 마력 결계가 순식간에 파괴됐다. 광염 속에서 누아르의 몸이 낙엽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불타지 않았다. 누아르는 파괴되는 즉시, 아니, 파괴되기 전에 마력결계를 보강하며 유진을 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을 밝히던 광염이 모조리 유진에게 되돌아갔다. 어느새 다시 검이 된 레반테인의 칼날에 광염이 중첩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를 상대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공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녀들과 공명하여 합일된 것으로 레반테인의 화력은 크게 늘었다. 거기에 지금의 중첩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위험한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공검이 순식간에 누아르를 파고들었다. 여태까지 누아르에게 유효하지 못했던 필중의 기적이 발해졌다. 집중시킨 마력결계가 불꽃에 소멸했다. 잔재한 마력에 환상을 부여했다. 어떤 환상도 공검을 가로막지 못했다. 무기, 방패, 갑옷, 모든 것이 발현되기 전에 불꽃에 베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러설 수밖에. 생각한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걱.&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서 나타난 사슬 하나가 누아르의 발목을 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노리나 했더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진 하늘의 아래. 부서진 건물의 잔해 속. 세냐의 안광이 보였다. 기절해 처박혀 있으라고 때려주었는데. 의식도 잃지 않았을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목이 묶였다. 필중의 공검이 다가온다. 어떤 식으로 대응하든 조금은 늦어버린다. 그럼 어쩔 수 없나. 누아르는 풋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침.”&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공검의 칼날이 누아르의 가슴을 베었다. 베인 가슴이 쩍 벌어졌다. 불꽃이 상처를 지져버려 피조차 튀지 않았다. 활짝 열린 상처에서 심장이 보였다. 침범하는 불꽃이 심장을 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감이 부족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심장으로 전진하던 불씨가 푹 꺼졌다. ㅡ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입술을 씹으며 레반테인을 당겼다. 검에서 형태가 바뀌었다. 지금 이 간극, 불필요한 동작 없이 심장을 가장 빠르게 찌르기 위한 형태. 단검이 누아르의 가슴으로 내리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단검을 가로막았다. 콰직! 손바닥은 뚫었는데 단검은 더 전진하지 못했다. 레반테인이 다시 형태를 바꾸기도 전에 누아르의 손가락이 칼자루와 유진의 손을 함께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음에 대한 실감.”&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그것이 좋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피의 맛이. 가슴과 손에서 느껴지는, 두근거림과는 다른, 감정과도 다른, 순수한 고통의 열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 필사적으로 되어보자구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직! 사슬에 묶인 다리를 끊어냈다. 레반테인을 가로막은 손도 함께 끊어냈다. 그렇게 자유롭게 된 누아르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다시금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누아르가 하나 남은 손으로 가슴의 상처를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상처가 벌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라락! 신화에 지져버린 상처에서 피 대신 다른 것이 뿜어져 나왔다. 내장이나 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처에서 뿜어진 것은- 제벨라 코인이었다. 개수를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많은 코인이 유진을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게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누아르에게서 별별 공격을 다 당해봤지만, 설마 상처에서 코인을 뿜어댈 줄이야. 심지어 이 코인은 무겁고 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이를 뿌득 갈면서 공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가지각색의 코인이 불길에 스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즉시 감각을 확장해 누아르를 찾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에서 갈라진 비명을 들었다. 세냐의 목소리다. 유진은 세냐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우우우! 커다란 제벨라 페이스가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카지노 지붕 위에 앉아 있던 것 중 하나. 아까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괜히 정면에서 쳐냈다가는 무시할 수 없는 폭발에 휘말릴지도 모를 노릇.&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즉시 반경을 벗어나며 이클립스를 쏘았다. 퍼엉! 제벨라 페이스가 폭죽처럼 터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짧은 순간에 어디로 갔지? 도망쳤나? 아니, 그럴 리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얕은 상처지만 레반테인은 틀림없이 누아르에게 상처를 남겼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심장까지 닿았을 상처. 치명상은 아니라도 무시할 상처는 아닐 터. 다른 상처라면 즉시 회복할 수 있어도 레반테인의 상처는 회복이 힘들다. 기껏 상처를 남겼는데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걱정하지 말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즉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이 도시에서 누아르와 마주쳤던 곳. 도시의 중심. 완전히 붕괴 해 버린 그곳에 누아르가 있었다. 유일하게 하늘에 떠 있던 제벨라 페이스. 누아르는 그 곁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말했잖아요? 하멜. 서로 필사적으로 되어보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에 남은 상처가 좋다. 살벌하고 뜨거운 열기가 좋다. 누아르는 어느새 재생된 왼손으로 제벨라 페이스를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뻔한 돌진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누아르가 항상 거처로 삼던, 왕관을 쓴 제벨라 페이스가 돌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열정적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빰, 빰, 빰, 빰!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벌어지고 요란한 음악이 쏟아져나왔다. 유리로 된 커다란 눈동자는 미러볼처럼 알록달록한 빛을 내뿜었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밤하늘이 화려한 색채로 물들었다. 동시에 밤하늘에 녹아든 어둠이 누아르에게 집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즐겁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 전체를 아우르던 마력이 누아르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녀는 도시에 남은 꿈의 잔재를 모조리 거두었다. 다시금 꿈을 수복하는 것을 포기한 대신에, 제 영지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자신에게 집중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두근! 벌어진 가슴의 상처에서 커다란 고동이 들렸다. 누아르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 아하하하! 이건, 이건 너무 많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본인조차도 가늠이 불가능한 마력. 그녀가 평생토록 쌓은 모든 힘이 하나의 육체에 담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적, 쩌저적! 누아르를 중심으로 하늘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서 누아르를 보았다. 그건 세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너덜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받치고서 간신히 일어서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도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결국은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지는 위압감. 전신에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불길한 힘.&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억, 퍼억! 도시의 건물들이 하늘에서 짓누르는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하기 시작했다. ㅡ우우우우우!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누아르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아아앙! 고작 날개를 펼친 것뿐이다. 그런데도 도시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그 충격은 도시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겁에 질려 있던 라이미르아가 충격에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급히 결계를 펼친 세냐도 전달된 충격에 왈칵 피를 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레반테인을 우뚝 세웠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어둠을 갈랐다. 프로미넌스가, 빛의 날개가, 구축한 성역이, 누아르의 압도적인 마력에 저항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부족하지 않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목소리. 들었지만 반응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진 공격이 유진의 몸을 땅에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버텨서 다음을 노렸다. 검을 휘둘렀지만 닿지 않았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졌다. 꽈앙! 아래로 처박혔는데 이번에는 뒤로 날아갔다. 유진의 입에서 울컥 피가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멋대로 움직인 빛의 날개가 유진을 감쌌다. 부서진 내장이 재생되었다. 몸속에서 퍼진 충격에 튀어 나가고 터졌던 안구도 재생되었다. 시커멓던 시야에 빛이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빰, 빰, 빰, 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의 클럽에서나 들릴 것만 같은 요란한 음악. 하늘을 어지럽게 수놓는 여러 색의 빛. 그 모든 것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씨X.”&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를 토하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해도 너무 강하다. 솔직히 말해서, 신성을 자각하고 신검을 손에 넣은 후로 이렇게나 고전한 것은 처음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령은 강했다. 가비드도 강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일대일도 아니고 세냐와 성녀들의 조력까지 받고 있는데, 도저히 승기를 느낄 수가 없다. 얕게나마 닿았을 때. 베었을 때. 그때는, 슬슬 이길 만한가? 라고 생각했다. 아주 조금 안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이 꼴이다. 결국 악몽에 들어가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누아르에게 농락당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누아르는 더 공격하지 않고 있다. 어지러운 색채 속에서 누아르의 모습이 보였다. 집중되었던 마력은 시커먼 드레스가 되었다. 하지만 움푹 파인 형태가 가슴의 상처는 선명히 보이게 만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을 모조리 거두었음에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의 안쪽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새카만 어둠만이 남아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선을 느낀 누아르가 방긋 웃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손을 올려 상처를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더, 위로 올라간 손가락이, 목걸이를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에게 세례를 내렸다. 지금의 레반테인은 전에 이그니션을 썼을 때 이상의 화력을 갖는다. 성역 자체도 강화되었다. 할 수 있는 기적의 범위도 커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도 화력이 부족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해야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전과 같은 전투는 성립되지 않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 닿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신히 닿았을 때는 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 닿을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얕게나마 닿지도 못할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비린내 감도는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감은 충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족하지 않다. 누아르는 지금에야 죽음을 느낀 모양이지만, 유진은 이 도시에서 단 한 번도 패배와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 적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필사적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은 사선에 서 있다. 살짝만 기울어도 죽는다. 아니, 사실은 이미 죽음 쪽에 깊이 기울어져 있다.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나는, 누아르 제벨라보다 약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인정한 것으로, 바라야 할 것은 간단해졌다. 결국 부족했던 것은 각오다. 누아르의 말마따나 필사적이지 않았다. 패배를, 죽음을, 사선을, 그 모든 것을 넘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죽기 전에 누아르 제벨라를 죽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왼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빰, 빰, 빰, 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귓가에 맴도는 요란한 음악 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는, 심장의 고동이 음악을 잡아먹었다. 밤하늘을 가지각색으로 바꾸는 제벨라 페이스의 조명이, 그보다 더, 더, 밝은 빛에 잡아먹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부터다. 누아르는 목걸이를 움켜쥐며 웃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 꿈은 끝났다. 결코 여명이 오지 않을 밤조차도, 어떠한 결말을 맞을 때가 도래했다. 죽음을, 실감했다. 염원했던 대로 필사적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그러했듯, 하멜도 그러했다. 이그니션. 누아르는 저것을 아주 좋아했다. 나중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만을 위한 폭주. 제 목숨을 산화하면서 상대를 무조건 죽이려 드는 살의의 정수.&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인다. 무조건 죽인다. 내가 죽을 지라도 너는 죽인다. 고개를 숙인 하멜에게서 그러한 의지를 느꼈다. 두근거리는 고동이 음악에 어울려 점점 가속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직, 찌지직! 유진을 휘감은 불꽃이 보다 격하게 타오르며 검붉은 전류가 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프로미넌스가 높이 치솟았다. 성녀들이 공명하는 빛의 날개도 함께 치솟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이 똑같은 비명을 질렀다. 폭주해서 증폭되는 신력, 끊이질 않는 폭발, 그 모든 것이 성녀들에게 고통이 되었다. 하지만 유진은 성녀들에게 버티란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버텨야……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그 말은 성녀들이 외쳤다. 지금 성녀들은 유진과 깊이 공명하고 있다. 이그니션의 통증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지금 자신들이 느끼는 고통이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이그니션은 여태까지와 다르다. 코어를 폭주시키고, 우주를 폭주시키고, 신성을 폭주시키는 범주를 넘었다. 유진이 바라는 염원과 기적은 그 이상을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을 쓰는 것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몸을 망가트리는 자살기.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이 이그니션을 쓰는 것을 좋아한 적은 없다. 이 미치광이 같은 기술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싫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고 차라리 후퇴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몇 번이나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은 알고 있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고 후퇴하는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았음을. 쓰지 않는다면 후퇴조차 할 수 없다. 지금 쓰지 않는다면 다시는 이길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도, 그렇다. 이그니션이 가속하면서, 성녀들도 점점 ‘실감’하고 있다. 그토록 아득하게 느껴졌던 누아르 제벨라가. 존재감만으로 모두를 압도시키고 가만히 선 것만으로 도시를 붕괴시키며, 작정하고 날아오른다면 대륙조차 멸망시키고 유폐의 마왕과도 겨룰 수 있을지 모를 악신(惡神)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점점, 가까이 느껴지고 있다. 아까처럼 아득하지 않다. 아까처럼 압도적이지 않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이 흔들리고 있다. 지금 나아가지 않는다면. 후퇴해 버린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결코 다시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을지도 모른다.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그토록 기도했음에도 세상을 구해주지 않았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심하고 무정하던 빛은 결국 실재했다. 빛은, 자신을 섬기는 신도의 희망을 저버릴지언정 세상 자체의 구원을 추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든 마왕을 쓰러트리고 이미 결정된 멸망마저 거스르기 위한 존재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와 크리스티나의 신은 이곳에 있다. 지금 성녀들은 그 어느 순간보다 신의 존재를 가깝게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이 폭주한다. 신위가 확장된다. 아직 부족하다. 그릇이 작다. 지금의 그릇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더욱 염원했다. 기적을 갈구하여 기적을 일으켰다. 신력이 감응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신력이 유진의 몸을, 우주를 가득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나먼 바다를 보았다. 살아 있는 존재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경계선. 그곳에서 길고 긴 세상 동안 존재해 온 빛을. 아득히 먼 옛날에, 벗이라 생각했던 거신을. 멸망의 직전에 스스로 거신에게 잡아먹힌 고신들을. 그들이 이어 온 빛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족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 신력을 모조리 품지 못했다. 레반테인을 단말 삼아 뽑아낼 뿐. 하지만 그마저도 충분하지 않다. 이 검은 결코 부서지지 않지만, 유진의 몸은 너무 커다란 신력을 견디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견딜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을 들었다. 불꽃 속에 유리의 칼날이 있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레반테인의 칼날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르륵! 레반테인이 유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리의 칼날이 불꽃과 빛에 녹아 유진의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완성되었다. 빛의 신성 자체가 유진과 하나가 되었다. 부서지기 직전까지 확장되던 그릇이 기어코 부서졌다. 하지만 그 안을 가득 채웠던 빛은 쏟아지지 않고, 유진에게 뒤섞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목걸이를 움켜쥐며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서로의 파멸이 될 수밖에 없는 힘을 느꼈다. 지금 하멜이 바라는 기적은 오직 누아르를 죽이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멜을 죽이는 것뿐이다.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는다. 어떤 식으로든 죽게 될 수밖에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걸이를 어루만지던 손을 뻗었다. 하멜의 이름을 새긴 반지를 끼운 왼손이, 앞을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죽이러 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흐느적거리는 날개가 함께 누웠다. 양손이 주저앉은 대지를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쇄추의 단순한 권능. 닿는 것을 밀어내서, 부순다. 폭발시킨다. 그것이 유진의 손을 통해 펼쳐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앙! 지반이 밀렸다. 부서졌다. 폭발해서 뒤집혔다. 그 모든 것이 난폭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렇게 유진은 한 줄기의 빛이 되었다. 검붉은 선이 어둠을 갈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콰쾅! 누아르와 유진이 충돌했다. 상냥하게 뻗었던 손이 으스러졌다. 마치 세상 전체와 충돌한 것만 같은 충격에 누아르의 입에서 피와 내장 부스러기가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 아학! 아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 고통. 하지만 누아르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는 부서지는 몸을 마력으로 붙들고서 허리를 꺾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짐, 승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웃으며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락! 길게 뻗은 다리를 마력이 휘감았다. 시커먼 마력의 와류가 발길질과 함께 폭사했다. 번쩍이는 빛이 와류의 앞을 가로막았다. 손길과 함께 펼친 권능은 창림. 하지만 창림은 이전처럼 불꽃을 뿜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온갖 종류의 무기가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불꽃과 빛으로, 신력으로 빚어낸 무기였다. 누아르의 마력이 수많은 신기에 가로막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어둠을 걷어차며 뒤로 훌쩍 뛰어올랐다. 두 개의 마안이 빛을 발했다. 유폐의 사슬이 공간을 붙잡았다. 환상의 마안이 유진의 공격을 재현했다. 콰장창! 뒤엉킨 무기가 부서지고 신력과 마력이 섞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광이 그 모든 것을 양단했다. 물러섰지만 얕게 베였다. 시커먼 드레스가 갈라지고 누아르의 새하얀 배에 선이 그어졌다. 피는 쏟아지지 않았다. 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드레스를 복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쓰라린 통증에 누아르는 더욱 크게 웃었다. 동시에 높이 든 손을 아래로 내리찍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 유진의 무릎이 굽어졌다. 여전히 무겁다. 이를 악물고서 피를 삼켰다. 굽었던 무릎을 다시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엉! 발에 밟히는 것이 땅인지 하늘인지는 모르겠지만, 밀어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들이 느끼는 신열의 열기마저 불꽃이 되어 유진의 신력을 증폭시켰다. 유진의 손이 허공을 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락! 손이 훑고 간 곳마다 어둠이 지워지고 빛과 불꽃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나타난 수백 개의 신검이 일제히 누아르를 향해 쏘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땅이, 어둠이, 아니, 공간 자체가 파편이 되어 뒤집혔다. 세상의 일부가 신검의 세례를 모조리 틀어막았다. 유폐의 사슬이 그것을 통째로 묶어버리고, 환상의 마안이 꿈을 흘려보내 세상의 일부를 꿈으로 만들고서 닫아버렸다. 그 일련의 과정은 시선이 움직이는 찰나에 이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하얀 손이 우아하게 어둠을 두드렸다. 이어진 일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무식한 폭력이 유진을 덮쳤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공격인지 유진은 굳이 파악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야가 너무 밝다. 머릿속이 너무 밝다. 눈으로 보고 판단하여 답을 낼 필요는 없었다. 예지 그 자체가 된 직관이 공격을 간파했고, 신성이 가득 찬 직관이 틀리지 않게 대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비틀거리며 서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이라 해서 동등하지 않다. 이 순간 세냐는 그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세냐로서는 절대로 저 전투에 끼어들 수 없다. 그녀의 마법이 아무리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저곳에서 부딪치는 힘 앞에서는 무한히 스러질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꿀꺽 침을 삼키며 유진을 보았다. 지금 유진은 레반테인을 휘두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손짓에서 무수히 많은 검이 만들어졌다.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를, 멸망의 화신이 된 망령을 패배시킨 신검이, 마치 싸구려 검처럼 태어나고 부서지기를 반복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뿐만이 아니다. 지금 유진은 그가 하멜일 적부터 다뤘던 모든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쟁 그 자체가 된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시에 유진은 빛이었다. 전쟁이, 빛이, 누아르가 만드는 밤을 밝힌다. 그것은 틀림없는 신화의 전장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패배감, 무력감, 그것과는 다른 기분을 느꼈다. 지금의 목도 자체가 세냐의 시야를 넓혔다. 세냐가 바라는 마법을, 추구하는 무한을 다채롭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 것만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찍이 유진이 말한 적 있다. 전쟁은 아가로트의 것이고, 빛은 양도받은 것. 그것과는 별개인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이 무엇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들어가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했을 뿐. 신성이 무엇인지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빛도 전쟁도 아닌 유진 라이언하트의 신성이 무엇인지. 그가 저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자신의 목숨마저 불태우며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까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멀지 않다. 얕지도 않다. 가깝다. 손을 뻗으면 닿는다. 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 유진의 왼발이 바닥을 짓눌렀다. 앞으로 뻗은 오른발이 강하게 떨어져 바닥을 부쉈다. 뿌드득. 극한까지 압축된 신력이 몸뚱이를 부술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유진은 허리를 비틀며 양팔을 들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 몸을 휘감은 빛과 불꽃을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까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생각했다. 누아르 제벨라와 가깝다. 동시에 죽음과 가깝다. 어느 쪽의 죽음일까. 어느 쪽이 먼저 죽을까. 아직, 그것에 대해서는 희미하다. 그렇지만 실감만큼은 확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아악! 유진이 움켜쥔 불꽃과 빛이 거대한 검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을 바라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의 죽음을 바란다. 길고 긴, 도저히- 악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짙은 인연의 끝을 바란다. 이 꿈의, 밤의, 끝을 바란다. 찬란한 여명을 바란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바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끄러운 음악 소리 따위 진즉부터 들리지 않았다. 미러볼이 되어버린 제벨라 페이스가 쏟아내는 빛 따위 진즉에 다른 것에 휩쓸려 사라진 상태다. 부딪치고 터지고 부서지는 전장의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유진에게 들리는 것은 성녀들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기도.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웃음소리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이 갈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신음과 비명, 그런 것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단지 웃음이 멈췄을 뿐. 누아르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리를 내는 것조차 잊을 정도의 충격. 누아르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입술이 곡선을 그린 것을 보았다. 유진도 똑같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술이 피범벅인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는 회복하고 있다. 그런데도 피는 계속해서 흐른다.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 영혼이 산화되는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숨과 목숨이 부딪치고 있기에, 서로의 끝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아직이다. 더 할 수 있다. 서로가 똑같이 웃었다. 부딪쳐서 함께 멀어졌지만, 서로가 똑같이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 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쁜 호흡에 웃음이 섞였다. 멈췄던 웃음을 다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한한 마력, 영원한 악몽이 부정되고 있다. 마력을 불사르는 빛이 무한을 유한으로 끌어내렸다. 악몽도 산산이 조각나서 현실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랑스럽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멜과 하는 지금 이 행위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제는 정말로 상상할 수 있다. 너무나 확실하고 가까운 실감이 죽음을 그리게 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었던 밤에도 끝은 온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베였다. 몇 번이나 불탔다. 그럴수록 점점 죽음에 가까워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필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죽어버리는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당신은 어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양팔이 활짝 열렸다. 기적이 도달했다. 마력이 폭주했다. 피범벅의 곡선이 일그러졌다. 빛이 누아르를 관통했다. 그렇지만 어둠은 부서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억! 누아르의 왼쪽 눈동자, 위신의 마안이 스스로 터졌다. 한계를 아득히 넘은 권능에 마안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모든 마력이 사슬이 되었다. 환상의 마안이 홀로 빛을 발했다. 사슬로 휘감은 세계가 유진과 누아르, 서로의 똑같은 악몽을 구현했다. 영원할 것 같은 밤이, 그 후에 찾아올 여명이 부정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악의 악몽이 재림했다. 시뻘건 황혼의 빛이 세계를 가득 채웠다. 누아르는 보다 가슴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드드득……! 가슴을 꿰뚫은 신검이 비틀렸다. 아슬하게 비껴간 심장. 넘실거리는 불꽃이 심장을 불태우려 하지만,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소곤거렸다. 유진은 창백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된 공간. 악몽과 같은 황혼. 유진의 신성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나와 같은 죽음을 느끼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의 빛이 모든 것을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로 둘러싸인 세계가, 안에서 터져 나온 붉은빛에 녹아내렸다. 세냐는 비명을 지르며 그곳으로 날아갔다. 방금 누아르가 무엇을 했는지는 세냐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력이 흩어지지 않도록 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남은 마력을 모조리 집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을 위해 스스로 가슴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터트렸다. 폭주시킨 마력. 저건 자폭이다. 마력의 주인인 누아르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그래서, 함께 죽으려고? 서로가 함께 끝나기 위해? 미친년이란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설마 저렇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급히 다가가던 세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녹아내리는 붉은빛 속에 선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살아 있다. 죽지 않았다. 하지만 상태는 처참했다. 유진은 피를 왈칵 쏟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파스스! 프로미넌스가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홀로 남은 빛의 날개도 점점 빛이 희미해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덜덜 떠는 손을 간신히 옆으로 들었다. 빛의 날개가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을 잃은 크리스티나가 나타났다. 간신히 든 손이 크리스티나를 받아냈지만, 유진의 몸이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기껏 받쳤던 팔이 뚝, 끊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비명을 질렀다. 끊어진 팔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유진은 흐릿한 눈으로 팔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이 잘린 것이 얼마 만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툴툴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챙겨놔. 나중에 붙이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야! 너…… 괘, 괜찮아? 괜찮은 것 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괜찮은데…… 살아 있기는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를 한 번 쏟아내고, 유진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ㅡ죽을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악몽을 베고 사슬을 불태웠다. 성역과 기적이 없었다면 방금 정말로 죽었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을 뻔했고, 죽지 않은 것은 피차 마찬가지. 유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커먼 밤하늘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 어딘가에 있을 누아르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툴툴 웃으며 뜯어진 왼팔의 상처를 붙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넌 가만히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자키아 때 이후로 유진이 이만큼 심하게 다친 것은 처음 본다. 300년 전에야 저것보다 심하게 다친 적이 있지만, 그때야 다들 약하고 미숙하던 시절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유진에게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하늘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유진이 죽지 않은 것처럼 누아르 제벨라도 죽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저 밤하늘의 어딘가에서 유진을 기다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몰라? 나도 알아. 그…… 갈X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지만 네가 더 이상 싸울 필요는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로브를 움켜쥐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참한 모습. 잘린 팔뿐만 아니라 내상도 심각해 보인다. 신성을 획득하고서 어지간한 상처는 스스로 재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 유진에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신성을 폭주시킨 대가. 방금 이그니션의 반동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그냥, 얌전히 여기 앉아 있어. 네 잘린 팔을 가지고서 말이야. 조금, 조금만 있으면 크리스티나건 아니스건 정신을 차릴 거야. 그래, 일단 엘릭서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내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 나도 부상을 입긴 했지만, 너와 비교하면 긁힌 상처도 안 돼. 그리고 너만큼 갈X도 부상이 심하잖아! 그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이름 부르지 마! 그냥, 그냥 닥치고 쉬고 있으라고. 지금의 누아르 제벨라라면 내가 죽일 수 있…….”&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세냐는 벌렸던 입술을 꾹 닫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말을 받아준 것일까. 유진은 더 이상 세냐를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시선은 입술을 열어 전한 말 따위보다 몇 배는 무거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투는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잖아. 서로 살아 있기는 하지만, 너한테는…… 내가 있어. 내가, 마무리할 수 있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나와 누아르 제벨라의 문제야. 나나 누아르, 둘만이 끝을 맺어야 해. 너는,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 내가, 내가 너희 둘의 감상에 어울려주어야 할 이유가 있어? 당장 너는 몸조차 가눌 수 없잖아……! 그런 네가 굳이 싸우겠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다면, 나는 평생 널 증오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말을 하면서,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네가 울고불고 매달려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죽어버린다면 증오고 뭐고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죽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럴 때의 유진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세냐는 어떻게든 유진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잘 알았어. 저 갈X를 직접 죽이는 것이 네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죽이려고? 지금 너는 싸움은커녕 몸도 움직일 수 없…….”&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 있게 만들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세냐는 순간 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눈을 깜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윽고, 유진이 하려는 짓을 눈치 챈 세냐가 기겁을 하며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미친 새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에 붙들리기 전에 유진의 손가락이 심장을 어루만졌다. ㅡ두근! 희미했던 고동에 묵직한 힘이 실렸다. 꺼져가던 불꽃이 되살아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유진이 이그니션을 연속으로 사용한 것은 라이자키아 때뿐이다. 그때 유진은 단독으로 라이자키아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직전에 힘이 다해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번 연속한 폭주는 심장과 코어를 완전히 망가트려서, 그때 유진은 정말로 죽을 뻔했다. 세계수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랑 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의 이그니션은 신성을 폭주시킨 것. 지금의 이그니션은 순수하게 마나를 폭주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라이자키아 때처럼 반동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이론만 그럴 뿐. 신성을 폭주시킨 반동은 신력의 봉인. 몸에는 별 부담이 없다. 하지만 지금,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 이그니션의 반동을 버틸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하지 않았다. 누아르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겠지만, 마나를 폭주시키지 않고서는 승산은 없다.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망토에서 엘릭서를 꺼내 입에 들이붓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끝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할 말을 잃고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유진은 그런 세냐에게 씩 웃어준 뒤,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밤하늘로 날아가는 유진에게 빽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렁이는 밤하늘에서 누아르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품에 안겨서, 같이 죽는 것도……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 있었다.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누아르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쿡쿡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하멜의 대응도 훌륭했다. 집중된 마력이 폭발을 일으키려던 순간. 하멜은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결말이, 당신에게는 아름답지 않았나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붙드는 힘이 부족했나?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망설여 버렸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방금의 자폭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냥,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열정적이지 못했던 걸까? 최후에 망설여 버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쪽이든 좋았다. 붙드는 힘이 부족했든가, 아니면 망설여 버렸든가. 모두가 이 순간을 달콤하게 만드는 것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을 입술 위에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쿨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며시 다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뜻대로 되지 않은 자폭은 누아르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그녀는 위신의 마안을 잃었다. 상당량의 마력도 방금의 자폭으로 증발해 버렸다. 몸의 부상도 상당하다. 가슴은 베이고, 뚫렸다. 심장 근처가 쓰라리고 아팠다. 너덜거리는 날개는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누아르는 아직 살아 있다. 살아서, 하늘을 날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같은 꿈을 꿀 수 있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피투성이의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저 아래에서 비틀거리며 선 하멜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태가 처참한 것은 하멜도 마찬가지였다. 하멜은 왼팔이 잘렸다. 이그니션도 끝났다. 프로미넌스도 힘이 다했다. 성녀들과의 공명도 끝났다. 그 끝없던 신력도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둘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나 서로가 직감하고 있다. 이제 곧 끝이 온다. 꿈이, 밤이, 끝난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아래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보였다. 하멜이 오고 있다. 저 불꽃은 아까와는 다르다. 신력이나 신성, 그런 것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격렬히 타오르고 있다. 누아르는 유진이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신력을 쓸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이그니션을 한 번 더 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위해 그렇게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저 불꽃이 사랑스러웠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며 제 몸을 파괴하는 저 모습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 목을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로 물든 붉은 입술로 애틋이 이름을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력이 깃들지 않은 저 모습에서 짙게 하멜을 느낀다. 전생 따위는 조금도 끼어들지 않는- 그래, 누아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누아르 제벨라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 사랑할 수밖에 없던 남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달콤한 한숨을 내쉬며 제 몸을 보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가슴은 베이고 구멍이 났고,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다. 예쁘게 차려입었던 옷도 지금은 누더기와 다름없게 보인다. 누아르는 자그마한 손거울을 만들어 얼굴을 비춰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못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누아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터져서 텅 비어버린 왼쪽 눈도. 피범벅인 얼굴도. 터져버린 입술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얼굴로, 이런 모습으로는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세냐 메르데인이 외친 대로, 마무리는 그녀에게 맡겨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쪽이 이성적으로 옳다. 지금의 누아르는 세냐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도, 하멜이 직접 와주었다. 싸울 수 없는 몸으로 굳이 이그니션을 한 번 더 쓰면서. 제 손으로 직접, 모든 것을 마무리하기 위해 와주었다. 그렇다면 누아르도 최선을 다해 하멜을 맞이해 주어야 한다.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마력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재생된 눈동자가 왼쪽을 채웠다. 얼굴의 상처가 사라지고 엷은 화장이 덧칠됐다. 가슴의 상처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다른 상처들은 재생했다.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옷도 새로이 바꾸었다. 그렇게 누아르는 마지막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 누아르는 거울을 이리저리 돌려 자신의 모습을 살핀 뒤에, 만족스레 웃으며 거울을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픈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헬무드, 아니, 대륙 제일의 테마파크. 존재하는 모든 유흥을 즐길 수 있는 환락의 도시.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자신의 꿈과 이상을 모조리 담아낸 도시, 제벨라 시티.&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허에 거울이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아래. 아직 그나마 형상을 유지하는 놀이공원에 불빛이 들어왔다. 회전목마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관람차도 빛을 깜빡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누아르는 그것을 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도시에서 당신과 하고 싶은 것이 많았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직 가슴에 얹고 있던 손을 들었다. 치직. 레반테인이 유진의 손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냈다. 신력이 봉인된 지금의 레반테인은 신검도 뭣도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검으로 사용할 수는 있는데. 유진은 레반테인을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대신에 다른 검을 꺼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범한, 투박한 검. 아무런 전설도 신비도 없는 검. 화륵. 백염식의 불꽃이 검을 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술집에서 술을 먹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수영장에서, 동물원에서, 놀이공원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에 휘감긴 칼날이 누아르에게 향했다. ㅡ후욱. 일렁거리던 불꽃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조작한 검강이 불꽃을 한 번 더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정도야. 응, 하지만 괜찮아요.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 하고 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력은 쓸 수 없다. 필요 없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의 누아르에게, 신력은 필요 없다. 아가로트의 힘도, 신검도, 필요 없다. 손에 무엇을 쥐건 지금의 누아르에게는 닿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자신을 겨누는 검을 보았다. 몇 번이나 중첩되었으면서도 차분히 가라앉은 불꽃을 보았다. 그 너머에서 안광을 발하는 금색 눈동자를 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살의로 벼려낸, ‘하멜’이라는 검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참 낭만적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왜 레반테인이 아닌 투박하고 평범한 검을 쥐었는지. 굳이 묻고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저 선명하고 아름다운 살의야말로 하멜의 대답이자, 누아르가 간절히 바라며 듣고 싶은 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로맨틱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임의 끝에서 누아르는 앞으로 나아갔다. 반지를 낀 왼손 대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사랑만큼이나 무거운 살의를 뽑았다. 지금 누아르가 다룰 수 있는 모든 마력이 살의를 따라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입술을 달싹이며 이름을 속삭였다. 침대에 함께 누운 연인에게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살의가 충천하는 공격과 함께.&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투박한 철검에 덧씌운 공검의 불꽃은 차분히 가라앉았으나, 살의에 맞서는 칼부림은 살기등등했다. 몸의 삐걱거림, 심장의 부하, 그런 것은 조금도 칼을 주저하게 만들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웃었다. 오늘 밤 몇 번이나 들었던 낭랑한 웃음소리가 칼부림의 파공음과 함께 어울렸다. 그 또한 베었다. 몇 번이고 베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을 베었다. 달콤하고 애틋하던 악몽을 베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손을 휘둘렀다. 갈기갈기 찢긴 밤이 손톱이 되었다. 전면에서 찢어오는 참격을 흘려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결코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살의의 한가운데에 들어왔다. 미련, 후회, 절망, 허나 검을 무겁게 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다이너스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멈추지 않았다. 마력과 불꽃이 얽혔다. 터지고 흩어졌다. 다시 일으켰다. 몇 번이나 터지고 가로막혔지만 살의는 무뎌지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흩어진 마력이 다시금 칼날이 되어 스쳤다. 무시했다. 하나하나 쳐내기도 아깝고, 그럴 여유도 없다. 무리해서 이그니션을 쓴 것이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마나를 불꽃으로 바꾼다. 그 불꽃을 모조리 검에 담는다. 오직, 앞만을 보았다. 누아르 제벨라만을 보았다. 그녀에게 도달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생부터의 인연. 아가로트와 아리아.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그가 하멜이고 그녀가 누아르인 이상, 둘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뎌지지 마라. 무거워지지 마라. 미련을 갖지 마라. 망설이지 마라. 필연적으로 맞닥트리게 될 모든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유진의 살의는 순수했다. 순수하게 누아르에게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낄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하멜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저 살의가 얼마나 순수하고 올곧은지. 그러니 웃음이 나왔다.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나도 마찬가지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을 사랑하기에 그와 영원한 꿈을 꾸고 싶다. 하멜을 사랑하기에 그를 이 손으로 죽이고 싶다. 하멜을 사랑하기에 그의 손에 직접 죽고 싶다. 죽음을 실감했다. 하멜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은 누아르가 살아온 평생에서 가장 달콤한 꿈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가 가깝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서고 싶지도 않다. 뻗으면, 닿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의 시선이 닿았다. 서로가 치명적인 죽음의 완성을 떠올렸다. 누아르가 손을 뻗었다. 유진이 검을 찔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불꽃을 흩트리고, 검을 부수었다. 산산이 조각난 검이 밤하늘에 흩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유진의 검은 누아르를 꿰뚫지 못했다. 다가와서 닿았으나, 누아르에게 죽음을 주지는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당신을 죽이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절히 바라던 끝에 도달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아르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일찍이 아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황혼의 마녀라고 불렸고, 전쟁신의 성녀로 불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사실을 깨닫고,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됨에 괴로워했다. 나 자신의 존재성을 혼동했다. 나의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에 흔들렸다. 그래서 더더욱, 애증을 느꼈다. 사랑하는, 하멜, 그에 대한 감정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란 것이 괴로웠다. 전생이란 것이 증오스러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결국 하멜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오늘, 최선을 다해 하멜을 파괴했다. 영원한 꿈을 꾸기를 바랐다. 하멜과 함께 죽는 것을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을 지나서 도달한 끝. 맹독처럼 치명적이고 달콤한 마지막. 이 모든 것이 끝나서 찾아올 감정은- 그녀가 일찍이 상상했던 후회와 상실감, 비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누아르는 망가지고 말 것이다. 다시는 웃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는 꿈이란 것을 꿀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관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없는 세상이라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황혼이 싫기에, 여명이 싫기에, 오늘 이 달콤한 밤은 영원한 악몽으로 막을 내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핫.”&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다. 끝나지 않았다.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흩어지는 검의 파편 앞에서 유진이 몸을 비틀었다. 활짝 열린 망토에서 칼자루가 튀어나왔다. 똑같다. 아무런 특색도 없는, 투박하고 평범한 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나 그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무기를 너무 험하게 다루었다. 전투 도중에 무기가 부서지는 것은 당신에게 있어서는 당황할 것도 없는 흔한 일이었다. 손에 쥔 검이 부서지면, 즉시 다른 검을 꺼내서 휘두르면 될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그런 남자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족해 버렸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을 죽일 수 있다는 것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이렇게 죽이는 것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아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순간에도 하멜은 포기하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족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같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패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순간에 누아르는 하멜을 죽이고 난 다음을 그렸다. 파괴되어 홀로 남아버리는 것에 절망을 느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이 순간에도 누아르를 보고 있다. 흔들림 없는 순수한 살의는 후회와 미련에 망설이지 않았다. 검이 다가온다. 갈망이 불꽃을 새로이 점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나 나를 죽이고 싶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의 몸이 겹쳐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이 심장을 꿰뚫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정말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새카만 밤하늘. 요란하던 음악은 진즉에 멈췄고, 제벨라 페이스도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회전목마도, 관람차도 움직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요한 밤의 중심에 유진과 누아르가 겹쳐 있다. 유진은 떨리는 눈으로 누아르를 보았다. 그녀는 피가 철철 흐르는 입술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활짝 열린 가슴을 보았다. 베고, 찔렀던 상처에 검이 꽂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얕지 않다. 비껴 꽂지도 않았다. 투박한 검은 정확하게 누아르의 심장을 꿰뚫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걸이를 보았다. 상처에서 뿜어진 피로 목걸이가 붉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눈을, 옆으로 돌리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움직였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유진에게 다가왔다. 아직 누아르에게는 여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만큼 몰아붙이고 심장을 꿰뚫었지만, 그녀는 몽마의 여왕.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아직 낯설고 먼 것일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왼손이 유진의 얼굴에 닿았다. 붉은 피가 유진의 뺨에 얼룩을 그렸다.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내려온 손이, 유진의 목을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두었다. 누아르는, 유진의 목을 붙들지 않았다. 손톱을 세워 목덜미에 꽂아 넣거나, 찢어버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깨지기 쉬운 공예품을 다루듯이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로 유진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마다 유진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뺨이 경련하는 것을 보았다. 입술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로 붉게 물든 입술이 열렸다. 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멋진 순간에, 왜 당신은 그런 표정인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표정을 앞에 두니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더듬거리며 나아간 손이, 칼자루를 쥔 손등에 올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답지 않게 마무리가 어설프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흩어지는 힘은 유진을 공격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손을 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드득! 검이 더욱 깊이 찔렸다. 유진과 누아르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열린 입술에서는 울컥 피가 흘렀고, 유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에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 하멜답지 않은 얼굴. 그래도 상관없다. 누아르는 황홀한 만족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하늘을 날 수도, 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축 늘어진 누아르의 몸이 추락을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 텐데.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양팔이 있다면 검을 쥐고서도 누아르의 등을 받칠 수 있겠지만, 지금 유진에게는 오른팔밖에 남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검을 놓았다. 손등에 얹어진 누아르의 손을 쥐고, 품 안으로 당겼다. ㅡ화악! 형태를 바꾼 망토가 둘의 몸을 하나로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갑게 식어가는 몸으로 포근한 온기를 느꼈다. 거머쥔 손의 떨림을 느꼈다. 손과 손이 떨어졌다. 깊이 다가온 손이 누아르의 허리를 받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추락했다.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유진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 좋았다. 정말로,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느긋하던 추락에도 결국에는 지상에 도달해 버린다. 유진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는 잠시 누아르를 안고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누아르를 땅에 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에 심장이 뚫렸다. 긴 칼날은 몸을 관통하고서 등 뒤로 삐죽 나와 있다. 그럴 텐데, 등이 땅에 닿았음에도 검이 밀려나거나 걸리면서 따를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보기와는 달리 섬세하고 상냥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을 받치는 순간에 칼자루를 미리 부러트린 것이다. 땅에 누웠을 때 더한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더 반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하려고 했다면 그럴 수 있었어. 나와 함께 자폭하던 때도. 내가 네 심장에 검을 박아넣을 때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그건, 달라요, 하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자폭은…… 후후, 당신의 집념이 내 생각보다 강해서.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거야. 마지막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똑같았죠. 나는 그 순간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만족하지 않았죠. 하멜, 당신은…… 최후까지 나를 죽이기를 바랐어. 그것뿐이에요. 당신의 갈망이 나보다 강했던 거야. 당신이, 나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결국 그런 거죠. 나는…… 최후에 망설였어요. 미련을 가졌죠. 그 순간에만 만족해 버렸어요. 흐흥, 결국…… 내가 말했던 대로 됐네요. 안 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눈을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아까와 달라지지 않았다. 악몽과도 달라지지 않았다. 유진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다. 억지로 감정을 붙잡고 있다. 그토록 바라던 승리를 얻었음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표정이 너무나도 좋고, 기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진 밤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시커멓던 밤하늘의 색이 엷어졌다.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의 색을 점점 바꿔 간다. 황혼이 지나고, 밤마저 지나서, 이제는 여명이 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영원하기를 바랐던 꿈에서도 깨어났고,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밤도 끝이 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이 물러가고 있다. 유진도 느꼈다. 동시에 누아르의 끝도 다가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 통증이 연달아 펼친 이그니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감정에 의한 것인지. 유진은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보았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나는 당신의 밑바닥을 핥았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리는 손이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왔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좀처럼 손이 닿지 않았다. 그에게 향하는 모든 과정이 멀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죽음을 느꼈다. 평생토록,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녀가 직접 죽음을 내린 적도 많았고, 죽어가는 이를 바라보았던 적도 많았다. 시한부의 인간에게 마지막 꿈을 보여주는 것은 누아르의 취미 중 하나기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누아르는 죽음을 실감한 적이 없다. 바라는 모든 환상을 만들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만큼 만들 수 없었다. 실감한 적이 없어서. 상상도 되지 않아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상상할 수 있다. 실감하고 있다. 누아르가 오늘 그토록 바랐던 영원한 밤이. 절대 밝혀지지 않을 어둠이.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칙칙하고 차가운 적막이 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음을 앞에 두었음에도 누아르는 진심으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밤, 당신을 품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쿨럭. 치솟은 피가 잠시 말문을 막았다. 누아르는 몇 번 피를 토했다. 그럴 때마다 몸이 굳고, 식어갔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런데도 누아르는 미소를 흩트리지 않았다. 피를 토해내고, 다시 목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보다 짙고, 깊게, 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도, 아니스 슬리우드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도 알지 못하는 유진을 보았다. 그녀들이 절대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렸다. 전력을 다해,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 죽일 뻔했고, 망설였고, 결국은 죽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지 않을 것만 같던 손이 닿았다. 유진이 직접 누아르의 손을 잡아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실감하던 죽음을 다시금 이해했다. 이것은 결코 칙칙하고 차갑지 않다. 밤처럼 어둡지도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눈을 깜빡이며 유진을 보았다. 꽉 다물고서 일그러진 입술을. 경련하는 뺨을. 울 것 같으면서도 결코 눈물은 흘리지 않는 눈을. 흔들리는 금색 눈동자를. 멀리서 다가오는 빛에 반짝이는 잿빛 머리카락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등진 여명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따뜻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쿡쿡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내가 언젠가 당신처럼 환생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쎄.”&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흥, 있을 법한 일이라고는 생각하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말하지 않을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있을지도 모르는 먼 미래를 떠드는 것보다, 지금이 더욱 소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사랑하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말에 유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몇 번 호흡을 고른 뒤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동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유진은 누아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할 수가 없다. 그녀가 ‘누아르 제벨라’인 이상, 절대로 그런 감정은 가질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얄미운 사람. 마지막만큼은 거짓말을 해줘도 좋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실망하지 않았다. 누아르는 배시시 웃으며 유진의 손을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 당신은 망설였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없는 손이지만 살짝 당겨보았다. 그릇 하나 끌어당기지 못할 힘이지만, 바람을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누아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할 뻔은 했잖아. 그렇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정할 수 없었다. 누아르가 보여주었던 꿈.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전투. 아니, 그전부터. 누아르가 아리아의 환생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매몰차게 무시하려던 것들에 애원이 더해지면서 감정에 동요가 만들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면 됐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이 느꼈던 동요는 순수하지 않다. 누아르만을 보고서 태어난 감정이 아니다. ㅡ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전부 다, 나에 대한 것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폐허를 등지고서 다가오는 세냐 메르데인이 보였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성녀가 세냐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흙먼지투성이인 세냐의 얼굴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심술궂게도 누아르는, 지금 이 상황에서 우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차 머지않았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의 떨림.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에 근접한 폭주의 대가가 유진에게도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죽을 만큼의 고통을 느낄지언정 유진은 죽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다르다. 그녀는 곧 죽는다. 여명이 밝히는 밤처럼 희미해져 사라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죽기 전에 당신이 쓰러져버리면 곤란해. 그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신히 들어 올린 손이 유진의 뺨에 닿았다. 누아르는 죽어가는 몸이 그렇게 움직여준 것에 만족하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언을 말해도 될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 당신도 이리 와요. 가까이 와서, 나와 하멜을 보도록 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음이 머지않은 이 순간마저도 장난스레 말하나. 저 지독한 광기와 애정은 세냐를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냐는 거절하지 않고, 성녀를 부축한 채로 누아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밤 당신은 나를 꽤 놀라게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요. 결국 당신도, 아니스 슬리우드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도, 내 자비로 살아 있는 거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에 대한 비웃음이 네 유언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요. 나는 이제 죽어버리니까, 유언으로 비웃음 정도는 남겨도 괜찮지 않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어버렸다. 그 모습에 누아르가 풋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놀란 것은 정말이에요. 나는 여태까지 당신을 좋아했던 적이 없지만, 세냐 메르데인, 오늘의 당신은 꽤 좋았어요. 살의가 꽤 매력적이었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부족해. 그 정도의 살의와 마법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어. 유폐의 마왕은 더더욱 죽일 수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비웃음과 조롱인가. 세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세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누아르가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환상의 마안을 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잘난 ‘현명한’ 세냐 메르데인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굳이 한 번 더 말해주기를 바란다면, 말해주죠. 내 환상의 마안을 주겠다구요. 환상의 마안과 함께 내 마력도 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세냐의 시선은 누아르의 왼쪽 눈에 향할 수밖에 없었다. 위신의 마안은 과용으로 터져 버렸다. 하지만 환상의 마안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유폐의 마왕에게 받은 것도 아니니, 내가 넘겨준다면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시엘 라이언하트의 경우처럼 마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쓸 수 있게끔 요령 있게 넘겨줄 수는 없지만,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쓸 수 있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래도, 신경 써서 조언해 준다면…… 통째로 당신 눈에 박아넣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요. 어디까지나 당신의 그 잘난 마법으로 사용해 보란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더듬거리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 누아르 제벨라가 저런 유언을 남기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죽지 않기를 바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손으로 죽이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잖아요. 그렇다면 유폐의 마왕도. 멸망의 마왕도 하멜을 죽일 수 없어야 해요. 연약한 당신이 하멜의 뒤에 선다면 그 자체가 하멜의 방해일 거예요. 그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말을 잇지 못하는 세냐를 비웃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디, 잘, 사용해서. 하멜이 죽지 않게 해줘요. 당신의 꿈과 아니스 슬리우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의 꿈은- 솔직히 내 알 바도 아니고, 절대로 이뤄지지 않기를 바라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의 침묵. 가쁜 호흡. 그 뒤에 누아르는 비웃음이 아닌 다른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의 꿈은, 이뤄졌으면 좋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그 말을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비웃음과 조롱을 남겼다면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을 텐데. 저런 말을 해버리며, 만족했다는 듯이 유진을 바라보는 모습은 세냐로 하여금 쓰라린 패배감을 느끼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그럼,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시선을 돌려 유진을 보았다. 세냐와의 대화 중에도 유진은 말없이 누아르를 보고 있었다. 누아르는 경직된 뺨을 어루만지며 키득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마지막 소원, 들어줄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이라도 부러트려 주기를 원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그건 아리아의 소원이잖아요. 마지막에…… 당신의 손길을 느끼며 죽는 것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지는 않을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 나를 기억해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유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누아르 제벨라는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였다. 그래서 죽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토록 염원하던 이 순간이 왜 조금도 기쁘고 즐겁지 않은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이건 말할 것도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평생 나를 기억할 수밖에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유진은, 아리아를 아닌 누아르 제벨라를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스칼리아 공주의 몸으로 설원에서 맞닥트렸을 때. 용마성에 들어가기 전의 호텔에서 그녀가 찾아왔을 때. 추락한 용마성의 잔해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하멜’이라고 불렀을 때. 남해에서, 시무인의 무도회에서,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 제벨라 시티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가 공들인 도시. 자기애가 넘치는 도시. 찾아온 인간들에게 꿈과 환상을 보여주는 대륙 최고의 관광지. 죄책감, 상실감, 후회,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서 인간을 상대하던 도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날 누아르와 술잔을 나누던 밤을 기억했다. 적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던 밤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그때 누아르가 다른 대답을 했더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령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더라도, 유진이 다른 답을 바랐더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끔, 나에 대한 꿈을 꿀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가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을 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언젠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그랬나? 다른 결말은 없었던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후회하게 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대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은 후회를 느끼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내가 이 도시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작은 목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과 나. 우리의 길고 긴 인연이 종지부를 찍는 그 순간에…… 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지 않냐고 물었었죠. 그때 당신은 이렇게 대답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소원이라고 말해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소원이 내 알 바는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젠가 내가 당신을 죽일 때. 내 손에 반지를 끼우고. 죽어가는 당신의 손에 반지를 끼우는 거야. 그리고…… 당신이 죽은 뒤에, 약지의 반지를 보며 영원히 당신을 추억하는 거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당신도 나처럼 그랬으면 좋겠어요. 응, 나는 그렇게 말했죠. 그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그락.&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목걸이가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반지를, 받아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지가 아니어도 좋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갑게 식어가는 손과, 더는 뜨겁지 않은 피에 젖은 약지의 반지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받아줘요, 하멜. 내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갖고서 살아줘요. 평생 나를 기억하고, 가끔 나에 대한 꿈을 꾸었을 때. 잠에서 깨어나, 나의 반지를 느끼면서. 오늘을 떠올리고, 후회해 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독하고 잔인한 소원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요, 지독하고 잔인한. 이건 저주예요. 이상하지는 않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뺨을 더듬던 손이 무거웠다. 아래로 미끄러진 손이 뺨을 지나서 유진의 어깨에 얹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욕심이 났다. 그래서 바랐다. 떨어질 것 같은 시선과 턱을 간신히 들어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는 손이 목을 잡았다. 애원하듯이 손을 당겼다. 떨쳐낼 수 있다. 그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언. 소원. 저주. 그 모든 것에 유진은 따라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누아르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서로의, 이마가 가까이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았던 이마가 살짝 떨어졌다. 붉은 입술이 열렸고, 다시 닫혔다. 직접 속삭일 것 없이 입술이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입맞춤이 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꽤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추억을 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원에서, 호텔에서, 바다에서, 무도회에서, 도시에서, 술집에서, 거리에서, 사막에서, 결투장에서, 꿈에서, 폐허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찍이 말했듯, 누아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이 아무리 거절하고 모욕해도 웃으며 유진을 대했다. 그렇게 추억을 쌓았다. 바라지 않던 하멜의 가슴에, 무언가가 쌓이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오늘 그 모든 것을 꽃피웠다. 상실감을 느꼈다. 후회, 미련, 슬픔, 모든 것이 누아르에게는 ‘처음’인 감정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여명이 싫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릿한 눈동자가 움직였다. 더 이상 하늘은 어둡지 않았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 빛이 깃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이 끝나 버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으로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 유진은 숨을 삼키며 누아르의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배시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에 ‘좋은 아침’이라는 말은 하고 싶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며드는 여명이 둘의 그림자를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은 아침이에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이 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이 감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긴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조용히 누아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잠이라도 든 것만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고통의 기색은 전혀 없고, 미련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온하고 행복하게, 자기 혼자 만족해 버린. 그런 얼굴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는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멀리서 떠오른 태양은 어느새 이쪽의 하늘에도 걸려 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 것이다. 어스름한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도시를 밝혔다. 이전의 화려한 모습은 거의 남지 않은 폐허. 건물은 대부분 무너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우뚝 멎은 관람차를 잠시 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났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는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금 그것을 실감했다. 잘린 팔에서 새삼 통증이 올라왔고, 가슴도 찢어지거나 터질 것처럼 뻐근했다. 전신이 파르르 떨리면서 소름까지 돋았고, 정신이 어지러우면서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기절이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툴툴 웃으며 내뱉었다. 단순히만 생각해도 이그니션을 2번 연달아 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이그니션을 제하고도 멀쩡할 수가 없다. 악몽에서 그토록 정신공격을 받았고, 현실에서도 사선을 넘나들며 격하게 싸웠다. 잘린 왼팔 외에도 외상이 한둘이 아니고 내장은 너덜거린다. 골백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서 억지로 살아 있으니, 골골대는 수준을 훨씬 넘은 반동이 올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피범벅의 손아귀에는 목걸이가 쥐어져 있다. 누아르의 왼손을, 약지의 반지를 보았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저앉아 있던 세냐는 그 질문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곧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괜찮냐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전부. 네 몸이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의 대화, 네가 느끼는 감정, 그런 것은 솔직히 안 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명이 만든 유진과 누아르의 그림자를 보았다. 무너진 폐허의 한복판, 가까이 앉은 둘의 그림자는 겹쳐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괜찮다고 말할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괜찮다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은 안 괜찮지만 괜찮다고 말하겠다는 거야. 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저 갈…….”&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소처럼 ‘갈X’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유진이 그 단어에 반응할 것을 의식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유진이 반응할 것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만, 누아르의 마지막…… 비웃음과, 유언이, 세냐로 하여금 ‘갈X’라는 멸칭을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가, 너를…… 죽이려고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죽으면서, 널 위한 것은 사실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했다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툴툴 웃으며 누아르에게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파스스. 그녀의 몸도 조금씩 재가 되어 무너지고 있다. 곧장 재가 되지 않는 것은…… 마무리로 신검을 쓰지 않아서인가.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은 늦고 빠르고의 차이다. 아침이 지나기 전에, 그녀는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유진은 아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하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내가 앞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날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저주를 남긴 거야. 내가 평생 오늘을 떠올리고, 괴로워 할 것을 바라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조심스레 누아르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천천히 약지의 반지를 빼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만약, 유진이, 지금의 감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약지에 반지를 끼운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런 행위로 유진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으로 오늘을 괴롭게 여길 거란 말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그럴 것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해? 누아르 제벨라를 죽인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는 하지 않아. 죽여야 했고, 누아르 본인도 죽음을 바랐다. 그래서 죽인 것뿐이야. 내가 안 죽였다면 누아르가 나를 죽였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아직까지 저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아르 제벨라를 용서할 수 있나? 그건, 솔직히 힘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라며 납득은 할 수 있다. 유진도 그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끝내 이렇게 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차 바란 대로 되었어. 축배라도 들고 싶다만, 그럴 수는 없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곧 기절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 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세냐가 화들짝 놀라서 유진을 보았다. 유진은 피범벅의 반지를 대충 닦고서 안쪽의 각인을 살피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다이너스,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이 각각 새겨진 한 쌍의 반지. 유진은 묵묵히 줄에 두 개의 반지를 엮고서, 목에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가락에는 안 끼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왜’, 라고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 대단한 이유는 없어. 그냥, 누아르의 바람에 놀아나고 싶지 않은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걸이의 반지 한 쌍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투덜거렸다. 졸지에 두 개의 목걸이를 하게 돼서 어색하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맞아. 내 왼팔? 왼팔 어딨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챙겨놨으니 걱정하지 마. 그런데 이거, 정말 붙는 거 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 큼직한 방울이 나타났다. 세냐는 방울 안에 둥둥 떠 있는, 왼팔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래 흙범벅에 피투성이였던 왼팔은, 지금은 절단면까지도 깔끔히 씻겨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독은 했는데, 안 붙으면 어떡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다리 두 짝도 거꾸로 붙였다가 다시 잘라서 붙였는데, 팔 한 짝 안 붙겠냐. 그리고 내 팔 잘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런데, 음…… 300년 전에 잘린 거랑 지금 잘린 거랑 경우가 좀 다르잖아. 당장 너 뺨에 흉터도 안 나았고. 외팔이가 되어버리면 곤란해. 유폐의 마왕을 팔 하나로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단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저주 개념의 흉터라서 그렇고. 왼팔은 괜찮아. 이건 저주로 잘린 것이 아니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와의 전투. 누아르의 공격은 최후까지 그랬다. 살의는 있었으나 저주는 없었다. 그녀가 남긴 저주는, 마지막 유언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어쩔 거냐? 환상의 마안. 가져갈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쓰라고 주겠다는데 안 받을 이유가 있어? 받을 거야. ……받아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꾸욱. 세냐는 로브 자락을 움켜쥐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죽이는 데 필요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의 함정이란 생각은 안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안 하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큭큭 웃으며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제야 세냐는 아까의 대화를 깨닫고서 후다닥 유진의 곁에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너! 곧 기절한다고 했지? 왜? 어, 어디 아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면 모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면……! 알…… 지. 그런데 기절까지 할 정도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지금도 억지로 눈 뜨고 있는 거야. 슬슬 눈 뜨고 있기 힘들어. 졸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졸리다니…… 괜…… 찮은 것 맞아? 눈 감으면 평생 못 일어나는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내 부탁이나 들어주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탁! 부탁이라니! 어떻게 불길한 소리를 안 해? 네가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유언이야?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니까 걱정은 말고. 그냥 기절이야. 아마 며칠…… 넉넉히 일주일은 기절할 것 같은데. 나랑 크리스티나, 아니스 데리고, 라이언하트 저택에 돌아가 줘. 사정은 네가 설명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늦게 일어난다고 걱정해서 깨우려 들지 말고. 정 걱정되면 내 성기사들이랑 크리스티나, 아니스한테 기도나 하라고 해. 그거면 돼.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움직이지 않아 흐느적거리는 손을 들어, 폐허를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도시. 지워주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하고 싶은데, 지금 그럴 만한 힘이 없어서 말이야. 부탁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를 지워달라는 것. 이 폐허에 더 이상 옛 도시의 모습 따위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럴지라도 이곳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체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사라질 거야. 환상의 마안을 취하려면 다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덤…… 이나, 묘비, 그런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쳤냐. 필요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질색하면서 세냐를 돌아보았다. 금색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흐리멍덩했다. 세냐는 반쯤 내려온 눈꺼풀을 보며 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어. ……푹 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잔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꿈이라도 꾸는 것은 아닐까. 무거운 눈꺼풀을 감으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 * *&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의 바벨. 시커먼 어전의 사슬 옥좌. 유폐의 마왕은 감고 있던 눈과 입술을 함께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도 가버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가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의 영지, 제벨라 시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그것까지는 볼 수 없었다. 마경 헬무드, 아니, 대륙 어디건 유폐의 마왕이 관측할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존재하지 않았다. 1년 전부터 유폐의 마왕은 제벨라 시티를 관측할 수 없었다. 누아르 제벨라가 만들고서 유지해 온 ‘꿈’은, 유폐의 마왕조차도 쉽사리 들여볼 수 없을 만큼 폐쇄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지어 그 꿈을 구축하는데 사용된 것이 위신의 마안인데도, 정작 그 마안을 하사한 유폐의 마왕은 간섭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철저할 정도로 위신의 마안과 유폐의 마왕을 통제하며 견제했다. 마안을 통해 권능을 사용하되, 유폐의 마왕의 마력만큼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의 죽음은 나조차도 상상이 힘들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물론, 유폐의 마왕이 거부했다면 누아르라도 위신의 마안은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부하지 않았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가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무엄하게도 황제의, 마왕의 권능을 제멋대로 사용하게 해주었다. 윤허조차 청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헬무드의 최고 납세자라서? 공작이라서? 300년 전에 혁혁한 공을 세워서? 모두가 이유는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무엇보다. 유폐의 마왕이 거부하지 않은 이유는ㅡ 누아르 제벨라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에 걸친 숙원에 기어코 도전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것이 조금은 부러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을 덮은 것은 하멜을 위해서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측할 수 없던 꿈. 결국에 무너졌음에도 도시의 마력은 최후까지 유폐의 마왕의 관측을 거부했다. 때문에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 제벨라의 ‘꿈’이 무엇을 거쳐 결말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 정도의 존재가, 어떻게 죽을 수 있었는지를 모른다. 하멜이 어떻게 그녀에게 죽음을 주었는지를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면 그대만의 깊은 꿈을 위해서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답은 알 수 없다. 누아르 제벨라는 죽어버렸다. 누아르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하지 않았기에, 영혼이 속박되어 유폐의 마왕에게 흘러오지도 않았다. 어쩌면 영혼조차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유진의 신검은, 레반테인은 영혼마저 불태워 소멸시켜 버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누아르 제벨라와 제법 친분이 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시커먼 어전에서 흐릿한 인영이 솟구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공작은 제 몇 되지 않는 후원자였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일하게 살아남은 유폐의 삼마(三魔). 발자크 루드베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흑색마탑주로 있을 적에 매년 막대한 거금을 기부해주셨고, 제가 헬무드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도 여러 지원을 해주셨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억한다. 제벨라 공작은 네 이상을 즐겁게 여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웃지는 않으셨습니다. 웃기는 하셨습니다만…… 조롱은 없으셨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러셨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하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발자크를 내려보았다. 당연히 유폐의 마왕도 발자크의 이상은 알고 있다. 발자크 루드베스. 그와의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음 유폐의 마왕에게 발자크를 소개했던 것이 바로 누아르 제벨라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청색마탑주 후보로 거론되던 신예. 그런데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청색마탑을 떠나 헬무드에 찾아와 흑마법사가 되려던 남자. 그 독특한 배경은 당시 헬무드의 여러 고위마족들의 관심을 샀다. 여러 마족이 발자크에게 계약을 권했지만, 정작 발자크는 흑마법사가 되기 위해 헬무드에 온 주제에 그 어느 마족과도 계약을 맺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마족과 계약을 맺지 않는 인간이 마력을 다루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족과의 계약을 거부하면서도 오롯이 흑마법을 탐했다. 흑마법사 학회에 빈축을 사면서도 얼굴을 비추고, 온갖 논문과 마도서를 탐닉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괴짜 같은 면모가 누아르 제벨라의 관심을 샀다. 파격적인 계약을 이뤄졌다. 누아르는 발자크에게 영혼의 계약을 맺지 않고, 오직 마력만을 후원해 주었다. 그리고 몇 년 뒤, ‘흑마법사’가 된 발자크를 유폐의 마왕에게 소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공작의 죽음에 애도를 느끼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공작은 제게도 여러 번 말하곤 했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가 흑색마탑주에 물러서고서 관계가 소원해지긴 했습니다만, 제벨라 공작이 얼마나 죽음을 바라였는지.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하멜……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집착하였는지는, 저도 잘 압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쓴웃음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염원하던 죽음에 도달하였으며, 심지어 그 죽음을 집행한 상대가 유진 라이언하트라면. 제벨라 공작은 필시 만족하며 죽었을 겁니다. 그런 죽음에는 애도보다는 축복이 어울릴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다운 대답이로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상을, 숙원을, 비원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그것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더더욱. 너는 어떤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비원 역시 그러합니다. 달성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가능하다 여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선은 다하고 있습니다. 필사적…… 으로.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한다면 계약은 파해주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발자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네 비원에 보다 가까울지도 모르지. 머지않아 이곳에 오를 자들을 네가 쓰러트린다면…… 후후, 가히 전설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짓궂은 말을 하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씀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제가…… 유진 라이언하트를, 세냐 메르데인을,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제가 폐하와의 계약을 파할 수 있다면. 저는 한 명의, 그저 그런 마법사가 되어버릴 겁니다. 그런 제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존경하는 세냐 메르데인과 함게 나를 칠 수도 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폐하. 그래 버린다면, 제가 바라는 ‘이상’은 폐하의 패배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폐하의 패배가 도저히 그려지지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을 배신한 흑마법사. 그것은 꽤 전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신한들 실패해 패배한다면 비웃음과 놀림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차라리, 제 이상을 폐하께 걸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 침범하는 적들은 제 시체를 넘어야만 어전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도망쳐도 상관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섬기는 주군을 버리고 어찌 도망치겠나이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토록 내게 충성적이지는 않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람이 있으니 충성하겠나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람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숙인 발자크를 내려보며 피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을 바라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죽는다면, 부디 제 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폐하와 함께 끝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멸을 바라지 않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존재가 소멸을 바라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려운 바람은 아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영혼의 계약은 맺었다. 발자크가 죽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오게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외는 혼까지 불태우는 신검. 하지만 이곳, 마왕성 바벨에 들어온 영혼은 모두가 유폐의 마왕의 것이다. 설령 신검이 발자크의 몸과 영혼을 재로 만들지라도, 바벨은 재마저 거두어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윤허하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눈을 감고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 너는 바벨에서 죽도록 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답에 발자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드시 이곳에서 죽겠나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6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교황청&lt;/p&gt;&lt;p&gt;&lt;br /&gt;&lt;/p&gt;&lt;p&gt;포근한 온기가 감도는 식탁. 평범한 빵, 그저 그런 맛의 수프, 두텁게 겹친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인 찌거나 구운 감자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빵 위에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를 올리던 중에 깨달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꿈이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펑퍼짐한 일상복에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부엌에 서 있다.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직접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런 번거로운 작업을 동반할 만큼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일상에서는, 저런 번거로운 작업조차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의자를 뒤로 기울이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꿈이 얼마나 되었지? 꽤 오래되었다. 자각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 꿈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하고 평온한, 그런 삶을 살았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말이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덜컹. 의자가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네가 보여준 것은 아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답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어느새 멈춰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부엌에 다가갔다. 등 돌린 여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유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각몽이 그러하듯, 유진의 바람에 꿈이 따라주었다. 여인이 몸을 돌려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꾸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릿한 미소를 지은 누아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누아르가 만들어낸 꿈이 아니다. 잔재가 되어버린 감정이 멋대로 꿈을 만들었다. 유진은 누아르와 마찬가지로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지의 반지가 보였다. 웃는 얼굴로 우두커니 선 누아르의 약지에도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이런, 꿈인 것이다. 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그렇게 작게 오그라들어서 완전히 사라졌다. 유진은 검게 변한 꿈의 중심에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눈을 떴을 때. 꿈은 더 이상 검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빛들이 꿈을 환히 밝혔다. 유진은 그 모든 빛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고 있다. 유진은 자신에게 이어진 모든 신앙과 목소리를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밝고 시끄러운데도 꿈을 꿔버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빛을 향해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주가 너무 잘 먹힌 모양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한 빛이 유진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아아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눈 부신 빛을 보았는데, 정작 진짜로 눈을 뜨고 본 빛은 굉장히 흐리고 엷고 은은했다. 조금도 환하지 않은 엷은 주황빛. 마치 침대 옆에 두는 취침등의 불빛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아아아아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굉장히, 굉장히, 시끄러웠다. 한 명이 아니다. 두 명이 꽥꽥 비명을 지르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꿈속이 순간이나마 그립고,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마치 전장 한복판에서 눈을 뜬 것만 같은 시끄러운 소리에 고막이 먹먹할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유진은 깨달았다. 빛이 저토록 엷은데도 눈동자가 쓰리다. 각막에 빛을 일 점 사 한 것처럼 쓰리고 뜨겁다. 반사적으로 눈을 다시 감으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생각처럼 되지 않아 불편했다. 잠깐 눈을 뜬 것뿐인데 안구가 순식간에 말라버려서 눈꺼풀이 뻑뻑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술과 입안은 충분히 촉촉했지만, 내뱉는 목소리는 갈라지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몸의 감각도 영 더디다. 유진이 몇 번인가 목소리를 내고, 몸을 뒤척거리고, 마른 눈동자를 굴려대는 동안에도 옆에서는 시끄러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 다른 두 개의 비명. 흐릿한 조명이지만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대의 바로 옆, 서로 부둥켜안고서 꽥꽥 비명을 지르는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보였다. 비명만 지르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은 눈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이 눈을 뜨셨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 은자가 살아났느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슬프고 서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기뻐서 우는 것인 모양이다. 일단 진정해, 그렇게 말하기 위해 입술을 연 순간- 두 꼬맹이가 동시에 유진의 침대로 뛰어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자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헉……!”&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를 내려던 순간에 정확히 메르의 머리가 명치에 처박혔다. 걱정과 애정에 따른 행동인지, 아니면 명확한 적의를 가지고서 들이박은 공격인지 파악이 힘들 정도로 치명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이밍이 정확하기도 했지만, 이만큼이나 아프고 무겁다고 여기는 것은- 몸의 감각 대부분이 어색하고 둔하기 때문이다. 팔도 아프다.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라이미르아는 메르처럼 머리를 처박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유진의 팔을 끌어안고서 열심히 이마를 비벼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이 이토록 무겁고 아픈 이유는 알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며칠이나 잠들어 있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트러진 호흡을 간신히 붙잡고서 더듬더듬 물어보았다. 명치에 머리를 박고서 격렬하게 머리를 돌리던 메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며칠, 며칠이라구요? 지금 며칠이라고 물어보셨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어, 음, 며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꽤 오래 잠들어 있던 것 같…….”&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 달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 달! 세 달이라구요! 일로만 따져도 거의 백 일을 자빠져 누워 계셨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 메르여, 정확히 말하자면 은자는 구십삼 일 만에 눈을 떴느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십삼이나 백이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주일이 차이가 나느니라. 그리고 본녀는 구십삼 일 만에 기적적으로 눈을 뜬 은자에게, 지금 같은 커다란 외침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하느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비열한 것! 이럴 때를 노리고 유진 님에게 아양을 떨지 말아요! 지금 유진 님은 혼쭐이 나야 한다구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서로의 머리채를 붙들고 다투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 다툼을 중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반쯤 벌리고서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 세 달? 구십삼 일 동안 자고 있었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을 오래 꿨다는 자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꿈속의 시간이란 현실과는 동떨어진 법. 설마 이토록 오래 잠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며칠…… 넉넉히 일주일은 기절할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늦게 일어난다고 걱정해서 깨우려 들지 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안 깨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쉰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에서 기절하기 전, 세냐에게 분명히 저렇게 말한 기억이 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도가 있는 법이다. 사람이 세 달이나 기절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워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깨우지 말라고 했어도, 이 정도로 오래 기절해 있으면 다른 수라도 써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깨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쪽에서 칙칙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유진조차도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는 두려운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몇 번이나 깨웠습니다. 매일 유진 님의 귓가에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몸이 망가지지 않을 선을 지키며 흔든 적도 여러 번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매일 기도도 올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유진 님께 서임 받은 모든 성기사가. 그로도 부족한가 싶어, 서임 받지 않았음에도 유진 님을 섬기는 대륙의 시민들에게 기도해 달라 간청하기도 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으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다 적극적인 수단을 써보기도 했지요. 세냐 님께서는 여러 마법을 만들어 유진 님을 깨우려 하셨습니다. 아예 정신에 파고드는 것도 시도하셨지요. 남해에서의 일 때문인지, 시엘은 유진 님의 손을 붙들고서 여러 번 끙끙대기도 했습니다. 그 외 다른 라이언하트의 사람들 전원이 유진 님께 매달렸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음, 그래, 그런데, 내가 일어나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압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거리는 변명이 끝나기 전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으며 유진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왔다. 어깨가, 뺨이,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와 아니스 님이 가장…… 많이, 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모두가 유진 님을 걱정하였습니다. 유진 님이 무사히 눈을 뜨기를, 모두가 진심으로 바라였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뜨셔서 다행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점점 가까워졌다. 은근한 시선 때문일지 스스로 눈치챈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유진에게 바짝 붙어 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재빨리 침대에서 물러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대에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무너지듯이 유진의 품에 안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 달이나 기절해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누워만 있었다. 심지어 성녀들은 유진이 기절하는 순간에 똑같이 의식을 잃고 있었기에, 더더욱 유진을 걱정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크리스티나의 머리를 만져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늦게 깨달았다. 누아르와의 전투에서 잘렸던 왼팔이 멀쩡하게 붙어 있다. 한 번 잘렸다가 붙었음에도 신경은 잘린 적 따위 없다는 듯 매끄럽게 연결되어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차리는 것이 늦습니다,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호칭이 바뀌었다. 가슴에 파묻은 고개가 들리고 눈동자가 가늘게 뜨였다. 아니스는 양손으로 유진의 갈비뼈를 더듬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린 팔을 붙이는 것은 300년 전에야 흔하고 익숙한 일이었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처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움직임에 불편함은 없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은 멀쩡한 것 같은데 몸은 안 멀쩡하네. 눈도 뻑뻑하고 목소리도 잘 안 나와. 특히 내장의 움직임이 너무 잘 느껴져서 소름 끼쳐.”&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선의 관리는 했습니다만, 세 달 만에 눈을 떴으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픈 것 같기도 하고 안 고픈 것 같기도 하고…… 체감이 잘 안 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식사를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씹기는커녕 삼키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요. 제가 씹어서 넘겨주고 삼키게 하는 방법도 쓸 법은 했습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갈비뼈를 더듬는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유진의 살결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점점 위로 올라왔다. 그 손놀림이 너무나 음험한지라 간지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고서 두려운 감정을 담아 아니스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쓸 법했지만 쓰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기절한 동안 필요한 양분은 마법과 의술을 접목해, 직접 체내에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대소변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측한 상상은 하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당신의 바지를 벗기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 것도 참, 편리하게도, 마법으로 처리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편리하게도, 라고 말할 때 아니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왜 못내 아쉬워 하는 것 같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과거 이그니션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때를 떠올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티나는 은근히 유진이 아파서 골골대는 상황을 즐기는 것만 같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아무리 마법이 편리하고 훌륭해도 한계는 있는 모양입니다. 세 달이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인지, 하멜, 당신은 조금 마른 것 같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이 조금 얇아진 것 같기도 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체적으로 얇아졌습니다. 뭐, 당신은 원체 건강하니 곧 돌아오겠지요. 육체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신은 어떻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마른 갈비뼈와 조금은 얇아진 가슴 근육을 타고 오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달그락. 아니스의 손가락이 목걸이에 매달린 한 쌍의 반지를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은 병들지 않았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말했지요. 하멜. 당신이 잠든 동안, 세냐는 몇 번이고 당신의 정신으로 들어가려 시도했습니다. 물론,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입고 망가진 정신을 각성시키고 치유하는 것은 신성마법의 영역이기도 하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저와 크리스티나도, 세냐도, 당신의 정신을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기절한 당신의 무의식이 다른 누군가의 침범을 강하게 거부한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유진과 목걸이를 바라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을 꾼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꿈에 흠뻑 빠져서, 깨어나지 않았던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도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뭡니까, 그 애매한 대답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란 것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니스의 손을 감싸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살면서 몇 번은 꿈을 꿔봤을 것 아냐. 내가 바라던 것이 꿈에 나올 때도 있고, 바라지 않은, 싫어하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을 꿀 때도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그냥, 정신을 차리는 것이 늦었던 거지. 이래저래 몸이 안 좋기도 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 하멜. 당신의 상태는 아주 끔찍했습니다. 팔은 잘리고, 뼈도 성한 곳이 드물었고, 내장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정신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멀쩡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저와 크리스티나가 열심히 당신의 몸을 회복했습니다. 신력이 남았더라면 당신 스스로 알아서 회복할 수 있었겠지만, 세 달 전의 당신은 신력이 봉인된 상태였죠. 성녀인 저희가 없었다면, 당신의 팔은 치료할 시기를 놓쳐 평생 붙지 않았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랬다면 아주 곤란했을걸. 의수라도 붙여야 하나…… 아니면 레반테인을 팔처럼 달고 다녀야 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리사의 의족을 보면 그럭저럭 생활은 가능하겠지만, 전투가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 크리스티나, 아니스, 너희가 있어서 내 팔이 멀쩡히 붙은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바로 넉살을 떨어대니 아니스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 손을 덮은 유진의 손을 가볍게 떨쳐내고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긴 어디야? 내 방은 아닌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라스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 유라? 유라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확히 말하자며 유라스 수도, 유레시아의 교황청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왜 여기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서임한 모든 성기사를 포함한 ‘신군(神軍)’의 수뇌부 전원이 교황청에 머물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의 전 병력은 현재 유라스와 헬무드의 국경지대에서 주둔 중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뭐라 답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저히 정리되지도 이해되지도 않아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니스가 혀를 차며 눈썹을 찡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것이 무려 세 달입니다.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확히 말하자면 구십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세 달 사이에 헬무드- 아니, 판데모니엄은 전시 태세에 들어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예고했던 기한은 1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유진은 그 1년을 꼬박 채울 생각은 없다. 기한이 확실한 것도 아니거니와, 베르무트의 예고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것.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1년 내에 베르무트가 붙들고 있는 멸망의 마왕이 깨어난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화시대와 마찬가지로 누르가 대대적으로 창궐할까. 아니면- 그때의 종말처럼, 멸망의 마왕이 직접 강림하여 세상을 쓸어버릴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자이기를 바랐다. 멸망의 마왕이 직접 강림한다면 시간이 촉박해도 너무 촉박하다. 전자라면, 조금 더 시간을 끌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전에. 바벨을 올라야 한다.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려야 한다. 베르무트를 구하고,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유폐의 마왕을 먼저 넘어가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하니 유폐의 마왕이 서둘렀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3개월이나 기절해 있던 것이 문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시 태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서 신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전시 태세를 선언한 것은 한 달 전.&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이라면 유폐의 마왕 대신 가비드 린드먼이 대공으로서 발표했겠지만, 가비드 린드먼은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해서 유폐의 마왕이 직접 모습을 비추지는 않았다. 전 흑색마탑주. 아멜리아 머윈이 재기불능이 되었기에 현시점 멀쩡하게 살아있는 유일한 유폐의 삼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 유폐의 마왕의 대리인으로 나섰다. 헬무드에 존재하는 모든 스크린이 제멋대로 켜져서, 발자크의 모습을 송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약속은 깨졌다. 머지않아 대륙 모든 국가의 정예가 헬무드를 침공할 것이다. 전쟁을 바라는 모든 마족은 바벨에 집결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는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 자비를 배신한 인간들은, 스스로 판데모니엄에 찾아와 바벨에 도전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바벨에서 죽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리인으로서 선언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저러했다. 선언이 있고서 가장 먼저 행해진 것은, 판데모니엄에 거주하는 마족이 아닌 이민자의 대대적인 피난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질로 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유폐의 마왕이 헬무드의 이민자들을 인질로 삼을 것 같지는 않다. 극단적인 피난 정책이 시행되고서 얼마 되지 않아 판데모니엄은 그 이름처럼 복마전이 되었다. 전쟁을 바라는 호전적인 마족만 득실거리게 되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일주일 전. 판데모니엄이 헬무드의 변경으로 이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가 전시 태세를 선언한 뒤, 대륙의 국가들도 즉시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각 국가마다 정예군을 차출하고 용병을 모집했한 뒤에, 판데모니엄과 가까운 유라스의 국경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기사들은 이곳 교황청에 모여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 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까지 들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유진은 급히 손을 들어 아니스의 말을 제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내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판데모니엄이 헬무드의 변경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군대를 유라스의 국경에 배치했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판데모니엄이…… 대체 어떻게 이동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판데모니엄은 헬무드의 중심에 있다. 애당초 헬무드 ‘제국’은 300년 전의 바벨과, 그 앞에 있던 붉은 평원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지금의 판데모니엄이야 다른 국가들의 수도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최첨단의 도시가 되었지만, 300년 전에는 결사대가 죽음을 불사하며 진군하던 붉은 평원이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 그대로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당황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는 아니스 본인조차도 일주일 전에 판데모니엄의 이동을 목격하고서 기함할 수밖에 없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빠를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창가에 다가갔다. 백 일 가까이 기절한 유진이 눈을 떴을 때. 너무 환한 빛은 안구를 다치게 할 우려가 있다. 그렇기에 유진의 방은 흐릿하고 엷은 조명만을 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창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스는 두꺼운 커튼을 젖히고, 그로도 부족하여 창문을 막고 있는 가림막마저 걷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부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력을 잃는다면 제가 당신의 눈이 되어드리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냥 치료하면 되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낭만적인 속삭임을 듣고서 그딴 반응이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투덜거리며 창문까지 활짝 열었다. 환한 빛이 순식간에 방안을 밝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이 찡하고 쓰라렸지만, 몇 번 눈을 깜빡이니 곧 익숙해졌다. 해의 기울기를 보니 정오는 진즉에 지났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휘청거리는 걸음을 붙잡고서 창가에 다가갔다. 그러곤 창틀을 손으로 붙잡고서 머리까지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제 말이 이해가 갑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리는 한참 멀다. 이곳은 유라스 수도의 교황청. 변경까지는 한참 멀다. 그러나 ‘저것’은 이 먼 거리에서도 희미한 점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찌 저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300년 전. 몇 번이나 노려보던 ‘성’.&lt;/p&gt;&lt;p&gt;&lt;br /&gt;&lt;/p&gt;&lt;p&gt;붉은 평원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바벨에 돌입하기 위해 전장을 질주하던 순간을. 가비드가 이끄는 검은 안개와 격돌하면서. 평원이 결사대와 마족의 피로 물들어 정말로 붉은 평원이 되던 순간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저 성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 저편에 바벨이 떠 있다. 그 모습은 ‘판데모니엄’의 바벨과는 다르다. 99층의 빌딩 따위가 아니다. 300년 전의 모습이다. ‘마왕성’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표현한 것만 같은, 시커멓고 음침해 보이는 고성.&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룡 라이자키아의 영지, 용마성이 하늘에 떠 있던 것처럼. 바벨이 머나먼 하늘에 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주일 전. 유폐의 마왕은 판데모니엄을 통째로 저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눈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죠. 말 그대로 판데모니엄이 ‘하늘’을 날아서, 저곳까지 이동한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카르트 교구의 바로 앞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라스와 헬무드의 국경이 맞닿는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재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바벨뿐입니다. 판데모니엄은 일주일 전에 지상에 내려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몇 번 알카르트에 가보았기에 기억하고 있다. 유라스의 북쪽 끝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은 네란. 그곳의 성문을 지나서 펼쳐진 평원을 며칠에 걸쳐 가로지르면, 헬무드의 영토인 알카르트에 도착한다. 현재 판데모니엄은 그 국경 평원에 내려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 새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를 가로지를 수고를 줄여주었다고 여겨야 하나? 아니면…… 저, 헬무드의 최전방에서부터 전쟁을 바로 끝내버리겠단 생각인가? 어느 쪽이든 유폐의 마왕이 할 법한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유진이 바벨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한다면, 유폐의 마왕은- 3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곧바로 대륙을 침공할 것이다. 그렇기에 판데모니엄 자체를 최전방으로 옮긴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선언은 있었지만, 모든 마족이 판데모니엄에 집결한 것은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린 마족들은 전쟁을 모릅니다. 꽤 나이가 있는 마족 중에서도 전쟁보다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이가 꽤 되는 모양이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겠지.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리서 보이는 판데모니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이야 ‘전쟁’이란 것이 실감이 되지 않을 테니, 굳이 직접 전장에 향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마족의 흉포함은 천성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판데모니엄에 집결하는 마족의 수는 늘어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병력의 우위는 저희 쪽에 있습니다. 순수 마족의 출산율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는 대륙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제국이지만, 영토에 비해 순수 마족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그것은 마족이 너무 오래 살고, 부모 자식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인간 이민자의 수가 마족의 수를 넘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순수 마족의 수가 아무리 적다고 해도, 마족과 인간의 힘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헬무드의 군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쪽에 대륙 모든 국가의 정예병이 모였다고 해도 헬무드와 힘싸움에서는 크게 우위를 점할 수는 없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가장 큰 문제는 유폐의 마왕이다. 우군의 숫자가 몇이고 헬무드 군의 숫자가 몇이건, 그 모든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는 무의미하다.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이 전쟁은 유폐의 마왕을 ‘언제’ 쓰러트리느냐에 달려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헬무드 각지에서 마족들이 움직일 것이다. 참전하지 않은 마족들이 피 냄새에 이끌려 본능을 해방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선이 코앞까지 온 것은 다행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창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판데모니엄과 바벨이 본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부터가 골치 아팠을 것이다. 전시 상황에서 워프게이트는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표정을 구기고서 아니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그 새끼가 유폐의 마왕 대리로 나섰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공석인 유폐의 지팡이 자리를 꿰찼나 보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와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수상쩍은 흑마법사를 아군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하멜 당신 아니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런데, 진짜로 유폐의 마왕에게 붙어먹을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의 전투에서 발자크가 관여했을 때, 그는 모든 경우에서 유진의 아군이었다.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배신을 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모른다는 생가을 하기도 했었다. 어쩌면 발자크가 유폐의 마왕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배신하고 싶어도 배신할 수 없는 입장이기는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마르와 나하마에서 발자크는 다른 유폐의 지팡이를 적으로 삼았다. 유폐의 마왕 본인도 그것에 대해서는 발자크에게 징벌을 내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해도 결국 발자크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 계약 상대가 하위 마족이라면 흑마법사가 기지를 부려 계약을 찬탈하는 것이 가능할 법도 하지만, 마왕을 상대로 그런 수작이 먹힐 리가 없다. 발자크는 절대로 유페의 마왕을 배신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해도 유폐의 마왕의 대리까지 맡을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죽고 누아르도 죽었다. 다른 유폐의 삼마도 모두 죽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발자크가 유폐의 마왕의 유일한 측근이 되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걸 노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흑마법사들을 죽이는 것에 일조한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유진이 봐왔던 발자크는 권력 같은 것에 야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고위 마족처럼 적극적으로 전쟁을 바란 것도 아니다. 발자크가 추구한 것은 그 자신의 이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나나 세냐를 죽여서 전설이 되겠다는 심보는 아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그런 것이라면 발자크는 병신이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발자크가 무슨 수를 쓰건 유진과 세냐를 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에게 대체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꿍꿍이가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만약, 바벨에서 발자크를 만난다면. 발자크가 적으로서 앞을 가로막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전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세냐도 그럴 것이다. 바벨에서 만나건, 전장에서 만나건, ‘적’이라면 무조건 죽인다.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이상을 허무하게 부숴버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세냐는 어디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시간이라면 신군의 마법병단을 지도하고 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내가 아까 물어보려다가 관뒀는데 말이야.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냥 물어볼게. 왜 하필 신군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야 당연히, 하멜, 당신이 총대장으로 이끄는 군대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대답에 유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은 신성제국 유라스의 신황(神皇)이자 연합국의 대표이며 신군의 총대장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 마음대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합의 모든 지도자들이 동의했습니다. 그러게 누가 3개월이나 나자빠져 있으랍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잖아……! 그리고 신황은 또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라스는 빛을 섬기는 종교국가고, 교황은 종교적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하멜 당신은 빛에게 신성을 위임받았죠.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곧 빛이기도 한데, 신황이 뭐 어떻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나는 왕 같은 거 하기 싫다고 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름만 그럴 뿐이지 국정은 여태까지처럼 교황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리고 연합의 대표이자 신군의 총대장이라고 해도, 그 누구도 당신에게 연합과 신군의 운영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기 싫다고는 말했지만, 대놓고 저런 말을 들으니 조금 발끈하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나에게 나도 모르는 왕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하멜,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당신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에게 왕의 재능이랄 것은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툭하면 단독으로 행동하고 제 목숨을 돌보지 않으며 혼자서 선두로 달려 나가는 당신이 왕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하멜, 당신이 왕이 된다면, 당신을 섬기는 모든 신하와 기사들은 스트레스로 정신에 병이 들어버릴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마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지만, 대놓고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쿡쿡 쑤실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맹하면 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모론이나 할 법한 말을 하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이 너무 심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정하겠습니다. 방금 그 말은 모론에게 실례되는군요. 모론은 그래도 나라를 세우고 잘 운영했으니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는 혹시 모를 기대를 품고서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둘도 이 건에 대해서는 도저히 유진을 두둔할 수가 없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싹퉁머리 없는 메르가 저러는 것이야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편을 들어주던 라이미르아까지 시선을 피할 줄이야……! 유진은 억울하고 서러워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껏 닫았던 창문이 벌컥 열렸다. 불쑥 머리를 들이민 것은 마법병단을 지도하고 있다던 세냐였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찬 눈동자로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너……! 드디어 깨어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나랑 모론 중에서 누가 더 낫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물 젖은 해후를 나누기 전에, 유진은 일단 그것부터 물어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랑 모론 중에서 누가 더 낫…….”&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지금, 세 달 만에 일어나서, 나한테 하는 말이, 그게 맞다고 생각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유진은 저런 말을 하면 안 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물 그렁그렁하던 눈동자가 분노에 잡아먹히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녕……?”&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주먹이 유진의 뺨을 후려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탁대로 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창문을 닫던 세냐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던 유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부탁. 기절하기 전에, 몽롱한 정신으로 간신히 전했던 부탁.&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 그 도시는 원래 아이리스의 영지였고, 다크 엘프만 살던 숲 지대였다더라. 웃기는 일이지? 엘프가 아니게 된 주제에, 숲에 집착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이리스 그년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릴 만큼 증오스러워. 하지만 그년을 따랐던 다크엘프들. 뭐…… 다크엘프가 되고 나서는 똑같이 정신상태가 맛이 가버렸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아이리스에게 납치되어서 강제로 타락 당한 엘프도 있을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럴지도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아이리스에게 죽은 엘프들도 많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주저하며 유진의 표정을 힐긋 보았다. 불과 몇 분 전에는, 세 달 만에 눈을 뜨고서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따귀까지 갈긴 주제에. 지금의 세냐는 마치 나쁜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유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무 말 없이 세냐의 얼굴을 보았다. 세냐는, 저 침묵이 조금은 두려웠다. 평소에는 얼빠지고 모자란 언동을 보이는 유진이, 진지해지거나 화가 날 때는 얼마나 냉엄한지를 알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도시를, 숲으로 만들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너는 도시를 지워달라고 했지만. 그래도, 생각해 봐. 그 넓은 땅덩어리가 휑하게 텅 비어버리면,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잖아? 오히려 그게 더 튈 거야. 그래서, 그냥 숲으로 만들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음, 무덤이나 묘비, 그런 거는 당연히 없고. 그냥 평범한 숲이야. 사마르 같은. 제벨라 시티의 흔적은 하나도 없…….”&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순간. 피식거리는 웃음이 말을 끊었다. 유진은 뺨을 더듬던 손을 대충 흔들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편이 좋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너한테 맡기고 세 달이나 자빠져 있던 것은 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려해 줘서 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짤랑. 작은 소리다. 하지만 세냐는 두 개의 반지가 부딪쳐서 나는 그 작은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세냐는, 얇은 환자복 안에 있을 목걸이를 흘겨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당연한 말이지만, 그 배려 말이야. 나는 누아르 제벨라를 배려한 것이 아니야. 그 못된 년이 어디서 어떻게 무슨 감정으로 죽건, 솔직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배려는 이 세냐 메르데인 님이 너, 유진 라이언하트에게 베푸는 거야.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동의했어. 우리는- 네가, 그 도시의 ‘꿈’에 매몰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앞으로 네가 살아갈 시간에서 뒈진 년의 초상이 남기를 바라지 않아.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굉장히…… 굉장히 깊고, 짙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이 돌아볼 때가 가끔은 있을 거야. 미련 때문이건 감정 때문이건, 꿈에서건. 그럴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스레 옆머리를 배배 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양팔을 활짝 벌려 유진을 끌어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텅 빈 폐허만 보이면 너무 삭막하잖아. 그래서, 숲으로 만든 거야. 내가 숲을 좋아하기도 하고. 숲은, 음, 활력이 넘치잖아.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숲에는 좋은 기운이 가득해. 숲에서 나고 자란 이 세냐 님이 훌륭한 대마법사가 된 것이 바로 증거지. 그리고 유진, 너도 300년 전에는 그, 어디야? 튜라스 변경 숲에서 자랐다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랬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의 우울한 기억은 미래의 좋은 기억으로 덮으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꾸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손이 보다 강하게 유진을 끌어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중에, 전부 다 끝나면. 나는, 그 숲에서 살 거야. 당연히 너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숲에 강은 흐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건넨 질문에 세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서 유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윽고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망할 년이 별의별 꿈을 다 보여줬구나? 강? 아직 안 흘러. 나중에 흐르게 만들 거야. 별도 왕창 띄우고서 말이지. 그리고…… 그리고, 숲의 좋은 기운을 통해 아이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되묻는 질문. 세냐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 광경을 꼴사납다는 듯이 보던 아니스가 똑같이 혀를 ‘쯧’ 차고서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람 한 명 없는 숲에 들어가서 살겠다니, 나무꾼 가문이라도 세우려는 겁니까? 아니면 숲지기? 세냐, 그 땅덩어리에 숲을 만든 것은 저와 크리스티나도 동의는 했습니다만, 그곳에서 평생을 사는 것은 싫습니다. 별장이라면 모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숲이 뭐 어때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고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공허한 숲에서 자란 당신과 하멜을 보십시오, 성격에 하자가 있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엘프랑 살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엘프가 사람은 아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는 아니스 넌, 사람이랑 부대끼고 살아서 성격이 그 모양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뇨, 제 성격에도 여러모로 문제점이 많지요. 유년 시절 제 주변에는 사람이 아닌 쓰레기들뿐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미래의 아이에게는 저희와 같은 절차를 밟게 해선 안 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래의 아이라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에 유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유진은 차마 아니스의 말이 틀렸다 반박할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튜라스 변경에서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하멜의 성격이 개차반이란 것은 유진 본인도 인정하는 바다. 반면에 ‘유진 라이언하트’는 어떤가? 한적하지만 평화롭던 키옐의 시골 영지 기돌에서, 아버지 제하드의 어여쁨을 받고 자란 유진의 성격은 썩 괜찮지 않은가? 하멜의 지랄 맞던 성격이 유진으로 자라면서 제법 완화되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 아버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하드를 떠올리니 불쑥 걱정이 들었다. 제벨라 시티로 출발하기 전에 얼추 사정은 설명하고 갔지만, 아들이 세 달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당연히 걱정하고 있을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나지 않는 너 대신에 나랑 크리스티나가 열심히 납득시켜 드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도 했습니다. 제하드 님은 크리스티나라고 생각하셨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하드 님은 본가에 남아 계셔. 의욕적이기는 하셨지만, 이제 와서 검을 들고 전장에 서기는 좀 그렇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재 본가에는 애니실라와 제하드, 아일라 공주. 마병에 걸린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남아 있다. 그 외에 전투가 가능하고 참전의사를 보인 본가의 총병력은 모두가 네란의 전초기지에 집결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국경방위로 일개 부대와 견습만을 남겼을 뿐, 흑사자 기사단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방계에서도 자발적으로 지원했기에, 현재 네란 전초기지에는 라이언하트의 총전력이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륙 각국에서 엄선 된 정예들이 모두 네란에 모여 있다. 덕분에 지금의 네란은 대륙에서 가장 북적거리는 군사도시가 된 상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부들을 제외한 대부분 병력은 모두 네란에 가 있어. 나는 마법병단 교육 때문에 방금 네란에 있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누가 간부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라이언하트에서 서임한 성기사 중 단장급과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 간부가 굳이 교황청에 남았다는 것이 유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전선이 코앞인 네란에 배치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을 위해서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새 바뀐 크리스티나가 공손히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식을 되찾지 못하신 유진 님을 누군가가 암살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유폐의 마왕이 그것을 명령하지는 않겠지만, 전시태세는 선언되었고 마족들은 이미 움직였습니다. 공명심에 눈이 먼 마족들이 스스로 판단하여 유진 님을 암살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교황청의 방비는 삼엄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그래서 간부들을 교황청에 남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시도는 있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섯 번이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중에는 서열 50위 내의 고위 마족도 있었어. 그야, 널 죽인다면 굳이 전쟁을 할 것도 없을 테니. 어쩌면 암살 시도를 반복하면서 연합이 대응하기를 바란 걸지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제로 세냐 님은 첫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을 적에, 가시권에 들어온 판데모니엄에 메테오를 처박으려고 하셨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짝 겁만 준 거야. 처박지는 않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억울하단 표정으로 항변했다. 그 꼴을 보고서 유진은 안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교황청이 아니라 전선의 임시 막사에서 눈을 떴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나 정신도 차렸으니 이제 네란으로 가면 되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긴 어딜 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홱 고개를 돌리고서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유진은 눈을 끔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신도 차렸고 몸도 멀쩡한데, 교황청에 남을 이유가 어디에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초에 널 왜 교황청에 눕혀놨겠어? 네란이나 라이언하트 본가에 눕혔으면 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그러게……. 왜 교황청에 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빛에 대한 신앙의 중심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사뿐사뿐 걸어서 다른 방향으로 난 창문에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긴 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하시는 유진 님의 눈을 뜨이게 하기 위해서는, 치료와 간호와 더불어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을 뜨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빛과, 유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설마 싶은 생각에 유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크리스티나가 반대쪽 창문을 덮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교황청 앞의 거대한 광장. 그곳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모두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쥐고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도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앉아 기도를 올리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용히, 입술을 닫고, 마음속으로 외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 모두가 유진 님의 신도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뿌듯한 얼굴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저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유진 님의 부활을 기도하는 신도들은 대륙 전역에 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눈을 뜨셨으니, 네란에 가시기 전에 신실한 신도들 앞에 직접 행차하시어 짧은 연설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는 절망에 의해 벌어진 입술을 간신히 닫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 굳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 돌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신앙을 폭발시킬 기회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앙이 폭탄이냐? 폭발시키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색하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크리스티나의 의견 자체가 틀리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에 중계된 가비드와의 결투. 그리고 하룻밤 만에 무너트린 제벨라 시티. ‘빛’이 아닌 유진에 대한 신앙은 의식을 잃은 세 달 동안 끝없이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돌입하기 전 신도들에 대한 연설로 신앙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지금의 유진에게 더 이상 ‘수련’이란 것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명상을 해봤자 힘 자체는 더 이상 늘기 힘들다. 누아르 제벨라와의 사투에서 신앙을 받아들일 그릇을 넓혔다. 더 이상 레반테인의 형태에 구애받지도 않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빛의 신력은 너무나 크다. 성녀들과 공명하고 이그니션을 쓰며 레반테인과 일체화할지라도 빛의 모든 신력을 다루기는 버겁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뺏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유진에게 필요한 것은, 빛에 대한 신앙을 빼앗는 것이다. 긴 세월 축적되어 온 빛의, 아니, 그 외에 수많은 이름으로 축적된 신앙과 거기서 태어난 신력을 ‘유진 라이언하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와의 전투에서는 쓸 수 없던 방법이다. 하지만 전시 태세를 선포하고 최전선을 구축한 유폐의 마왕에게는 쓸 수 있다. 대륙 전체를 위협하는 전쟁. 300년 전 시대의 재림. 패배하면 대륙이 끝장나는 상황.&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구한다. 세상을 위한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훌륭한 명분이었다. 유진이 앞에 나선다면. 승리를 염원해 달라 외친다면. 빛이나 다른 신의 신도들조차도 전쟁의 승리를, 유진 라이언하트가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을 더욱 간절히 염원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되면 유진의 신성도 확장되고, 빛의 신력을 받아들일 그릇도 함께 커질 것이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아도 그 거대한 신력을 능히 다룰 수 있을 것이며, 이그니션까지 쓴다면 유폐의 마왕에게도 죽음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어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해는 하는데 연설이라니, 그런 끔찍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많은 사람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하멜이라는 것을 밝히고 난 뒤에 기자회견을 할 때도 그냥 전부 죽이거나 죽어버리고 싶었는데, 그 미치도록 민망한 짓을 또 하란 말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뭔 걱정이야? 저기 사람들은 다 너나 빛의 신도야. 네가 갑자기 똥을 싸도 기적이라며 눈물을 줄줄 흘릴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은 똥을 싸지 않으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뭔…… 뭔 개소리야? 어떻게 사람이 똥을 안 싸? 이슬만 먹어도 똥은 나오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발, 세냐 님, 지저분하고 모자라 보이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 말은, 유진 님이 신도들 앞에서 신어를 읊으실 때 결코 그런 행위는 하지 않으시리란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내가 하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당연히 연설을 할 거라고 정해졌다는 듯이 구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 않으실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해야 되면…… 어…… 아니…… 해야 하니까…… 할 건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하면 유서 읽어버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귓가에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들은 순간, 유진의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유서? 제벨라 시티로 떠나기 전에 라만에게 남겼던 유서들. 생환한다면 무조건 불태우라고 말했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만 이 개새끼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허, 진정해, 그가 널 배신한 것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토록 오래 자빠져 있으니, 언제 가버릴지 모른다고 판단했던 거지! 네가 만약에 죽어버리면 유서를 전해야 할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내가 죽지도 않았는데 후다닥 유서를 전해줬단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라이언하트에 있을 적에, 혼자서 네 손을 붙들고 ‘유서는 어찌해야 합니까…….’하고 탄식을 흘리던 걸 우연히 들었지. 그래서 뺏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건가? 유진은 믿을 수 없어서 눈동자를 덜덜 떨며 세냐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읽으면 목을 베어 자살해 버리겠다고 해서 읽지는 않았어, 걱정하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스로 유서까지 적으신 유진 님의 결의를 희롱하지 마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 남긴 유서를 조금이라도 읽어보려고 끙끙거린 주제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께 맹세코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세냐 님이 보신 것은 제가 아니라 아니스 님이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할 테니까…… 유서, 내놔, 당장 태워 버리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요하면 연설문도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방긋 웃으며 로브의 안쪽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 라이언하트가 직접 쓴 연설문이야. 어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진짜 악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 달이나 자빠져서 사람을 걱정시켰는데, 이 정도의 화풀이는 애교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해버리니 유진은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애꿎은 주먹만 꽉 쥐고서 화를 삭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설문 필요 없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짧게 몇 마디만 할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대로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세냐가 걸친 로브의 안쪽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물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타이밍에 물어올 줄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짓궂게 웃으며 약을 올리던 세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도 말했잖아. 가져갈 거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에 있냐고 묻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한숨 뒤에 세냐가 로브를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목에 걸린 목걸이. 보랏빛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 유진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진짜 눈동자의 형태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보석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있을 줄이야. 특히나 유진이 놀람을 느낀 것은, 바로 앞에 ‘환상의 마안’이 있는데도 특별한 기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인하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 다루기가 힘들거든. 마력도 철철 흐르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목걸이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렇게 봉인이 잠시 해제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봉인을 했는지. 왜 다루기 힘들고, 마력이 철철 흐른다고 하는지. 곧장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세냐의 마법 봉인이 해제된 순간에 보석이 요염한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아악!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이 보석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제멋대로 발동된 환상의 마안이 마력과 동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르……! 방이 통째로 진동하더니 흐물거리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환상의 마안이 마력을 받아먹고 폭주하고 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티나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저 ‘환상의 마안’은 누아르 제벨라와는 달리 상대의 정신을 제압하고 강제로 꿈속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그것은 환상의 마안이 아닌 누아르 본인의 권능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절제 없이 마구잡이로 마력을 받아먹으며 일으키는 폭주는, 오히려 노골적인 정신 공격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크리스티나도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사라졌다. 환상의 마안이 유진이 기억하는 누아르의 모습을 멋대로 투영한 것이다. 누아르가 유진을 돌아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 또한 유진이 기억하는 미소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목소리. 유진은 혀를 차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것만으로 환상이 깨졌다. 누아르의 얼굴이 사라지고, 크리스티나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봉인했는지 알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한숨을 푹 내쉬며 보석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쏟아져 나온 마력이 모조리 되돌아가고 환상의 마안의 권능도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가 어떤 환상을 봤는지는 몰라. 그 정도로 이건 까다롭단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예 다룰 수 없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뭐로 보는 거야? 다룰 수 있어. 굉장히 피곤하고 짜증이 나지만. 심력도 소모되고. 그래서 평소에는 이렇게 봉인하고 있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투덜거리면서 열었던 로브를 다시 닫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음, 이 정도로 양질의, 순수하고 끝없는 마력을 얻은 것은 좋아. 아멜리아 머윈이 가진 마력보다 훨씬 강하니까, 이 세냐 님이 잘 사용할 수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환상의 마안을 통제하지 않아도, 이 마력과 내 마나를 결합해 영력을 만드는 것만으로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모를 가능성. 유진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는 잠시 세냐를 응시하고서 다시 입술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환상의 마안에 누아르 제벨라의 영혼이나…… 사념이 남아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폭주에서 나타난 누아르의 얼굴과 목소리. 만약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면? 환상의 마안에 누아르의 잔재가 남아 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것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누아르를 죽일 때 신력을, 신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누아르의 혼은 소멸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내가 언젠가 당신처럼 환생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기 전 누아르가 속삭였던 말이 유진의 머리를 어지럽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신력을 쓸 수 없어서 신검도 쓰지 못했지만. 레반테인에 녹아든 월광검의 불길한 빛은 쓸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쓰지 않은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유진도, 누아르가 말한 ‘언젠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마 누아르의 혼을 소멸시킬 수 없어서. 소멸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냥…… 죽이기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누아르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죽었잖아. 영혼은…… 가야 할 곳으로 갔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전례가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300년 전에 죽었을 때. 내 혼을 이 목걸이에 담아서 간직했던 것이 누구더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이유가 있어서 간직한 거잖아. 어? 네가 유언으로까지 바랐던! 마왕이 모두 죽은 세상에서! 네가 환생하기를 바라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그 망할 몽마는 죽었단 말이야. 언젠가 남자로 환생하건 여자로 환생하건 동물로 환생하건! 그건 내 알 바도 아니고, 환상의 마안에 잔재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 폭주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은 자아가 있어서 폭주했냐? 형편에 맞지 않는 힘을 억지로 다루니까 날뛰는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을 예로 들어버리니 유진도 더 이상 캐물을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세냐가 누아르의 영혼을 거둘 이유가 어디에 있고, 환상의 마안에 잔재랄 것이 있다면 그걸 숨길 이유가 어디에 있나. 오히려 그런 잔재가 남아 있다면, 세냐라면 진즉에 잔재를 영멸시켰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옷이나 제대로 입어. 연설해야 할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바로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내일 할래? 응? 아니면 모레? 세 달이나 자빠져 있었으면서 더 시간을 끌겠다 이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떠봤다고 이렇게나 사람을 갈구다니. 유진은 서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환자복의 아랫단을 잡았다. 그러곤 보란 듯이 위로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말랐기에 더욱이 선명해진 복근에 세냐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성녀들은 고개를 돌리지는 않고, 손으로 눈만 살짝 가렸다. 손가락을 충분히 벌리고서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너 뭐 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얼굴을 붉히며 쏘아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옷 갈아입으라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유진은 저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만 하더라도 300년 전부터 윗옷을 벗고 다녔고, 보급이 부족하던 전장에서는 하멜도 벗은 것과 다름없는 누더기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지금 생에서 전투를 벌이고 난 뒤에도 옷이 제 꼴이 아니었던 적이 꽤 많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보는 앞에서 갈아입으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냐도 억울했다. 어쩔 수 없을 때와 그러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은 당연히 그러지 않을 때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따지는 것도 많네, 그럼 뭐 어쩌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등 돌리고 있을게. 갈아입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방을 나가는 편이 낫지 않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연설하기 싫다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애야? 하기 싫다고 도망치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안 돼. 얌전히 갈아입…….”&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포옹.&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구석의 그림자가 돌연 치솟았다. 유진은 순간 그것이 뭔가 싶어서 눈을 끔벅였다. 적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방금의 시시껄렁한 대화가 유진의 판단을 흩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림자에 깃든 어둠에서 시엘이 불쑥 튀어나왔다. 시엘뿐만이 아니었다. 길레이드와 기온, 시안, 카르멘. 알체스터와 이바타, 오르투스, 아이빅, 라파엘로, 호네인과 대마법사들. 신군의 간부들이 죄다 시엘과 함께 어둠에서 튀어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매일 유진이 정신을 차리기를 기도하고, 상태를 확인하기 용이하도록 그림자에 침식시킨 암전의 마안의 권능.&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유진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냥 걷어 올렸던 웃옷의 밑단을 아래로 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침묵했다. 네란에서 급하게 복귀한 세냐가 유진의 방에 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간부진 전원이 시엘의 마안으로 유진의 방에 왔다. 왜, 세 달만에 눈을 뜬 유진이, 크리스티나와 세냐의 앞에서 옷을 벗으려 했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 어머머…….”&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가 혼자서 얼굴을 붉히며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녀는 방금 걸어 나온 어둠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해요? 눈치 없이 굴지 말고. 다들 돌아가자고요, 죽다 살아났으니 감동의 역사는 쓰게 해줘야 할 것 아니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템페스트의 말이 옳았다. 진즉에 멜키스 엘하이어를 죽여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뿌득 이를 갈면서 멜키스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것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긴 뭐가 아니야? 정말 아니어도 그렇게 대놓고 아니라고 하면 세냐 님과 크리스티나 성녀가 서운해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라니까 씨.”&lt;/p&gt;&lt;p&gt;&lt;br /&gt;&lt;/p&gt;&lt;p&gt;“씨? 너 방금 나한테 씨라고 했어? 신 됐다고 옛날 어렸을 적 까맣게 잊은 거야? 네가 귀여운 인간 꼬마였을 때 이 누나가 얼마나 잘해줬는지 기억 안 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씨…….”&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 씨? 그래, 계속 해봐. 씨 뒤에 뭐야? 발이야 팔이야? 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보란 듯이 팔과 다리를 흔들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유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면 안 되나? 안 된다. 저 언동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멜키스는 대륙 최강을 논할 수 있는 인간이다. 당장 앞에 보이는 간부 중에서도 멜키스의 전력과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은 카르멘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 같은 광인이 대륙 최강의 인간을 논해야 하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멸망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저런 미치광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령사라고? 유진은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 엘하이어는 나쁘지 않은 정령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템페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얼빠진 새끼. 그새 저 여자한테 감화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착각하지 마라, 하멜. 나는 멜키스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내가 처음에 편견을 가졌을 때처럼 끔찍하기만 한 인간은 아니라고, 그렇게 냉정히 판단을 내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연을 너무 깊이 들여다본 것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분을 삭이기 위해 숨을 씨근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을 괜찮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가 급히 유진에게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호흡이 고르지 않구나. 조금 더 안정을 취하는 편이 좋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화가 나서 호흡이 거칠어진 것이다. 길레이드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만, 그는 이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수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사자여, 네 후광은 이전보다 더욱 찬란하나 몸은 초라하게 메말랐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히 ‘찬란한 사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카르멘도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그런 거 아닌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길레이드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양팔을 활짝 벌리고 유진을 끌어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사히 눈을 떠서 다행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형제뿐인가. 유진은 은근한 감동을 느끼면서 똑같이 시안을 끌어안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기절했던 동안 결혼한 건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용한 질문에 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란이 수습된 뒤에 카르멘과 멜키스에게 강제로 맹세를 받아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대로, 절대로 연설에 난입하지 말 것. 목소리를 내지 말 것. 군중 속에 섞여 연호를 유도하지 말 것. 비명을 내지 말 것.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듣고만 있을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은 듣지도 말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카르멘이 정색까지 하며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기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레시아의 교황청. 일 년에 한 번, 성황의 탄신제마다 교황이 집전하는 예배가 있다. 그때 교황은 백원궁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광장을 내려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쪽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교황 에우리우스에게는 전혀 갑작스럽지 않았다. 그 또한 당연히 유진이 연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고, 교황청 앞 대광장에 신도들을 불러모아 기도하게 한 것도 에우리우스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에우리우스는 기꺼이 백원궁 옥상을 열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관(聖冠)은 정말로 쓰지 않으실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교황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금과 보석들로 장식된 화려한 오 층의 왕관이 들려 있었다. 교황이 대외적인 자리에서 착용하는 삼층관과도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한, 오직 유진을 위해 만들었다는 왕관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무거워 보이는 걸 어떻게 써? 목 부러지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 역사적인 연설에서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어도 안 써. 사실 이런 망토도 입기 싫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께서는 유라스의 신황이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한다고 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옷을 내려다보았다. 흰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룬 화려한 옷에 붉은 망토. 이것도 교황이 준비한 유라스 신황의 옷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 님은 라이언하트의 일원으로 연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군의 총대장이자 유라스의 성황으로, 헬무드와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에 나서기 전 연설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라이언하트 제복 대신에 이거 입은 거잖아. 하지만 성관은 안 돼. 싫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질색하고서 교황의 말을 끊었다. 은근히 드러내는 위압감에 교황도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설 전에…… 몇 가지 약속을 해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길레이드가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디, 그 연설에서…… 음…… 비속어는 쓰지 말아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안 할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그리고, 협박하는 말도 하지 말아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전황이 불리하면, 민간인이라도 강제로 징집할 수밖에 없다…….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승리를 기도해라……. 이런 투의 협박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알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싹 소름이 돋았다. 마치 마음을 읽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표정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그럴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요지의 연설을 하고서 빨리 돌아오려고 했는데. 대놓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그럼 어떤 연설을 해야 하나? 유진의 머리가 하얘졌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열린 문을 통해서 함성이 들렸다. 눈을 뜬 유진이 곧장 연설을 한다는 말에 대광장에서 묵언 기도를 올리던 모든 신도들이 열광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을 늦출수록 신도들은 기대를 품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감동적인 연설을 하려 들기에 이토록 뜸을 들이는가 생각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유진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감한 결단과 행동력. 유진은 숨을 삼키고서 앞으로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의 망토 끝자락을 들었다. 그녀는 빛과 유진의 성녀로서 고개를 깊이 숙이며 유진이 가는 길을 뒤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옥상으로 나왔다. 광장을 내려다보는 난간으로 향할수록 함성이 더욱 커진다. 그와 함께 유진은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끝없이 커지는 신앙을 실감했다. 크리스티나의 말은 옳았다. 지금 이곳에서 연설하는 행위 자체가 유진의 그릇을 넓히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로는 인지하고 몸으로도 실감하지만, 생각은 제대로 돌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난간 앞에 도착했다. 대광장을 빼곡히 채운 것도 모자라 도로에도 사람들이 나와 있다. 건물의 창문이며 옥상까지에도 사람들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입을 열었다. 작게 말했는데도 목소리가 멋대로 증폭되었다. 유레시아뿐만이 아니다. 유진이 눈을 뜨기 전부터 이곳에는 연설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유진의 연설은 가비드와의 결투 때와 마찬가지로 대륙 전역에 송출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연설문이라도 사용할 걸 그랬나. 차마 내용은 읽지 않았지만, 맨정신으로 말하기는 버거워도 그럴듯한 내용이기는 할 텐데. 하지만 후회도 늦다. 유진은 일단 계속해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의 환생…… 유진 라이언하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름만 말했는데도 함성이 즉각 호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사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편에서 보고 있던 카르멘이 함성 속에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황.”&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도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 총대장.”&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지어 알체스터까지 중얼거렸다. 유진은 그 칭호들을 도저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폐의 마왕과 판데모니엄이 전쟁을 위해 국경선에 내려앉았고, 마왕성 바벨은 하늘에 떠올랐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아니면 전장으로 가버리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을 이어온 약속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세상을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세상보다는 그냥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싶습니다. 3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똑같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듯한 말보다는 대놓고 말하는 편이 낫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당신들에게 칼을 쥐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세상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게 더 도움이 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협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합의 승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유폐의 마왕을 죽이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성은 어느새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승리를 기도하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홱 몸을 돌렸다. 망토를 놓고 입술을 벌리고 있던 크리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못 본 척했다. 도망치듯 후다닥 난간에서 멀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설이라고도 할 수 없을 기도 권유가 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와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함성과 함께 신앙이 폭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설에서 협박하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언제 협박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옥상을 떠난 즉시 아니스가 핀잔을 줬지만, 유진은 진심으로 억울함을 느꼈다. 연설의 내용을 지적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결코 ‘협박’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칼을 쥐기 싫다면 승리를 기도하란 말이 협박이 아니면 뭡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네가 너무 부정적으로 들어서 그런 거야. 나는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그리고 승리를 기도하란 말이 대체 뭐가 잘못됐단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태도가 너무 재수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만히 듣고 있던 세냐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기도하십시오’가 뭐야? ‘해주십시오’라고 말해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다르단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야. 무릎 꿇고 청해도 모자랄 판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뭐가 아쉽고 못나서 무릎을 꿇고서 청해? 어? 너는 내가 저 많은 신도들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이라도 뚝뚝 흘리면서,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외치길 바랐던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 말을 들으니 살면서 한번은 보고 싶은 광경이기는 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대 안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걸치고 있던 붉은 망토를 벗으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은 애걸해서 얻는 것이 아니야. 업적, 신화, 전설, 그런 것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신도들이 날 떠올리면서 곧장 연상할 수 있어야 신성이 깃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것치고는 승리를 기도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패배를 기도해 달라고 하냐니까? 전쟁을, 싸움을 시작했으면 이겨야 할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벗은 망토를 둘둘 말아서 세냐의 얼굴에 집어 던졌지만, 당연히 세냐는 망토를 덮어쓰지 않았다. 그녀는 공중에 멈춘 망토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혀를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패고 싶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자빠진 세 달 동안 이 세냐 님의 마법은 보다 완전해졌단 말씀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까지 그놈의 세 달을 들먹일 셈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세 달이나 자빠진 사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정말, 다시 생각해도 속이 쓰릴 정도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냥 놀리는 말은 아니었다. 유진이 기절한 세 달은 모두에게 있어서 불안과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모두 다 듣지 않았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눈치를 받고 있으니 유진도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후의 연설이 될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멋지고 웅장한…… 그런 연설은 할 수 없었던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후의 연설은 무슨, 왜 재수 없는 말을 하고 그래? 내 성녀라면 나를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조건 고개만 끄덕거리며 찬송하고 찬배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요. 저는 당신의 성녀인 만큼 누구보다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그래도, 연설 반응 좋았잖아.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폭주하는 것처럼 확장되는 신앙과 신성은 유진 본인이 직접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으로 강제로 그릇을 넓히는 것과는 다른 감각. 유진의 존재에 깃든 신성 자체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이 세상의 시작과 동시에 축적되어 온 신앙들이 유진에게 녹아드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300년 전과 달리 세상의 ‘상식’ 자체가 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세상에서 마족은, 마왕은, 헬무드는, 결코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시대를 아는 유진과는 달리,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마족에 대한 적의와 증오는 결코 크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유폐의 마왕의 치정. 당장 전시 태세가 선포되었음에도, 헬무드의 이민자들은 거의 이탈하지 않았을 정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대륙에 사는 인간 중에서는 헬무드가 전쟁에 승리하기를 바라는 자들도 적지 않을 정도다. 아예 헬무드가 대륙 전체를 정복하기를 바라며, 인간이 유폐의 마왕 휘하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에 대한 사정을, 약속의 끝을 모르는 그들 딴에는, 인간에게 있어 이상향과 다름없던 헬무드의 생활을 누리고 싶은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많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합과 신군이 빠르게 조직될 수 있던 것은 유진 라이언하트란 구심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헬무드가 먼저 전시 태세를 선포하고, 판데모니엄과 바벨이 통째로 날아와 최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유폐의 마왕이 ‘침략자’가 되었기에, 침략을 바라지 않는 대륙이 연합이 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전선에서 긴장이 지속될수록 급조된 연합에서 삐걱거림이 나타날 것이다. 간부들이 유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것과 상관없이, 민중은 불안을 품게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연합과 신군은 반전(反戰)에 대한 여론을 묵살하고 있다. 반전 여론이 전국적으로 퍼져 버리면 전면전을 벌이기도 전에 신군의 전력이 약화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 기절할지도 모르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이그니션은 몇 번이고 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제는 다음이다. 누아르 때처럼 연달아 이그니션을 써서 간신히 승리할지라도, 몇 달이나 정신을 잃어버리면- 자칫하다가는 기절한 사이에 멸망의 마왕이 눈을 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하늘에 떠 있는 마왕성 바벨이 창문으로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 * *&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란의 성벽의 망루에서 국경지대의 최전선을 보았다. 마차를 타고도 며칠은 걸리는 대평원. 본래 저 너머에는 알카르트 교구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수도 판데모니엄. ……정말 그런가?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먼 거리지만 유진의 눈은 판데모니엄의 정경이 똑바로 보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에는 예전에도 가보았다. 다른 왕국의 수도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된 도시. 수십 층에 달하는 콘크리트 빌딩. 도시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모두를 감시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마력을 에너지로 삼는 기계 물고기. 마차 대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거리를 청소하는 골렘 등, 몇 년 전 보았던 판데모니엄은 제벨라 시티 이상으로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도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진의 상식은 저 판데모니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99층에 달하는 마왕성 바벨은 30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하늘에 떠 있다. 마찬가지로 판데모니엄 또한 몇 년 전에 보았던 모습에서 변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300년 전과는 다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커멓고 높은 성벽의 위를 빼곡하게 채운 장치들이 보인다. 대포와는 다르다. 커다란…… 금속제 막대기 같은 것이 이쪽을 겨누고 있다. 그 위의 하늘에는 도시를 감시하던 에어로 피쉬들이 조용히 날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벽의 안쪽을 들여보았다. 몇 년 전 보았던 도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빌딩은 다른 건물이 되었다. 마력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금속의 장갑을 두르고 길쭉한 포신 같은 것을 달고 있는, 이형(異形)의 탈것들이 잔뜩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차?”&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형태의 전차는 처음 본다. 전차만 있는 것도 아니다. 뭔지 모를 기묘한 탈것들. 거리에는 마물과 마족이 득실거린다. 라비스타에 처박혀 있던 초대형 마물들을 나하마에서 몰살시켜놓지 않았다면, 그 마물들까지도 판데모니엄에 결집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총전력.’&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 수도에서 살던 이민자들이나 참전을 거부한 마족들은 죄다 피난시켰다. 지금 저 거대한 도시에는 전쟁을 위한 것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족과 마물은 당연히 모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와 탈 것들은…… 대체 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진이 가진 신성의 하나인 ‘전쟁’이, 저 모든 것들에서 짙은 피비린내와 흉악함을 느꼈다. 저것들 모두가 전쟁을 위한 병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뭐 하는 새끼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모든 것을 만들어낸 것은 유폐의 마왕일 것이다. 헬무드가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이 발전을 이룬 것은 유폐의 마왕의 존재 때문이다. 헬무드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홀로 일으키고 이끌었으며 유지하는 제국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시대에 저딴 것은 없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저 병기들은 ‘다른’ 시대의 것. 유폐의 마왕이 거쳐 온- 진즉에 멸망한, 아득한 고대의 병기. 헬무드의 문명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경험하고, 결국은 멸망해 버린 기술들로 이룩된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 시대에는 저런 병기가 없었다. 기껏해야 냉병기가 주류였고, 전투 마법사에 의한 포격을 기대하기 힘들다면 대포나 발리스타 따위나 동원하곤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300년 전에는 저런 병기를 동원하지 않았나. 그 이유는 유진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유폐의 마왕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멸망의 마왕이 존재하는 이상 대륙을 정복해 봤자 세상은 끝나 버린다. 애당초 정복과 군림은 유폐의 마왕의 목적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유폐의 마왕의 목적은 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곁에 선 세냐가 목소리를 냈다. 유진은 판데모니엄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서 세냐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를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경직된 얼굴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들은 순간. 굳이 위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무언의 시선. 하지만 절대 고요하지 않은, 살벌하고 거대한 존재감.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 미동도 하지 않고서 떠 있는 마왕성 바벨. 성벽 위에 선 유폐의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유진을 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시선에 유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유폐의 마왕의 시선은 결코 무감정하지 않았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확실한 ‘감정’을 가지고서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폐의 마왕은, 무언가를 기대하듯이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전해지는 것은 시선뿐. 하지만 유진은, 조금의 권태와 무료가 존재하지 않는, 기대뿐인 시선에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잠시 서로를 보았다. 곧 유폐의 마왕이 빙글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망토처럼 이어진 사슬들이 유폐의 마왕의 몸을 감쌌고, 곧 유폐의 마왕의 모습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라지는 유폐의 마왕을 대신해 그림자가 치솟았다.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 흑색 마탑주이자 현 유폐의 지팡이,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성벽 난간에 올라서서 아래를 보았다. 투명한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빙그레 곡선을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추락하지 않고 하늘을 날았다. 판데모니엄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발자크는, 지금 유진과 세냐가 있는 네란의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새끼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내뱉고 말았다. 대체 무슨 낯짝과 자신감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반응은 오히려 평화로웠다. 유진의 옆에 서 있던 세냐는, 발자크가 이곳으로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즉시 검지 손가락을 뻗었다. 파직! 세냐의 손끝에서 마나가 맺혔다. 순식간에 압축된 거대한 마나가 손끝에서 번쩍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요란한 굉음과 함께 세냐의 손끝에서 빛이 쏘아졌다. 설마 세냐가 대뜸 마법을 쏘아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유진은, 입을 쩍 벌리고서 옆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너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면 알잖아. 발자크 저 새끼한테 마법을 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쪽으로 오려고 하는데 그냥 냅둬?”&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렇기는 한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 확실히 말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세냐는 찡그린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아크리온에서 나랑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연구할 때 말이야. 그대 확실히 경고해 뒀다고. 언젠가, 만약에, 적이 되어서 내게 싸움을 건다면. 그때는 무조건 죽인다고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가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인 이상, 언젠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세냐는 발자크를 죽이지 않았다. 그때의 발자크는 적이라기보다는 아군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고, 한 명의 마법사로서 세냐를 열렬히 추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꽤 훌륭한 마법사였지. 흑마법사가 아니라면 더 좋았겠지만, 흑마법사여도 뭐, 내 앞에서 흑마법사다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내버려 둬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훌륭한 마법사였어. 비원도 마음에 들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연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세냐의 시그니처인 ‘절대률’은 현존하는 모든 대마법사들의 마법의 집대성이고, 그중에는 발자크의 연구도 들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적으로 돌렸다면 그만한 이유와 자신감이 있어서일 것 아냐? 이 거리에서, 고작 이 정도 마법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라면 ‘적’으로 취급할 가치도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쏘아낸 마법은 세냐가 생각하기에는 가볍고 나약했다. 물론 그것은 세냐의 기준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세냐가 쏘아낸 빛은 이미 하늘을 가로질러 발자크에게 접근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이었다. 판데모니엄의 성벽에 설치된 병기가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과광! 굉음과 함께 금속제 막대기가 쏘아졌다. 발리스타가 화살을 쏘아대듯. 저것은 도저히 ‘화살’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꽃의 꼬리를 그리며 쏘아진 금속 막대가 하늘을 갈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게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조차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놀란 소리를 냈다. 뒤편에서의 굉음에 당황한 것은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움찔하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급속히 하늘로 날아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벽에서 사출된 금속 막대가 발자크가 있던 곳을 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르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지간한 마법보다 훨씬 빠르다. 위력은? 유진은 하늘로 부상한 발자크보다 저 고대의 병기가 가진 위력에 더 궁금증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발자크를 추격하지 말고 저거랑 부딪쳐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왕 쏘아진 것 위력을 파악해 두고 싶었다. 세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법에 부여한 절대률을 거두었다. 발자크를 추격하기 위해 요동치던 빛이 가라앉고, 그대로 일직선으로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격돌했다. 꽈아아앙! 하늘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아래의 지면이 뒤집히고, 이곳에까지 미미한 진동이 전해질 정도의 큰 폭발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건재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미간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폭발의 위력은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냐의 마법을 상쇄하고 소멸시킬 정도는 아니다. 저 폭발에는 세냐의 마법을 소멸시킬 정도의 격이나 신비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문제는 위력과 숫자다. 성벽을 빼곡히 채운 병기는 그 수가 수백 개는 넘어 보인다. 저것들이 일제히 쏘아진다면? 신군의 간부들은 저만한 위력의 폭발에도 보신이 가능하겠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럴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은 일단 거둬. 발자크를 공격하지 말라는 것 같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발자크를 쫓았다. 그는 폭발의 반경을 벗어난 높이까지 부상하고서 다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처음과 다른 점은, 발자크가 머리 위로 든 양팔을 열심히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공격하지 말라는 노골적인 수신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 불러서 죽이자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되게 죽이고 싶나 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안 죽이고 싶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죽이고 싶기는 해. 하지만 죽이기 전에 얘기나 들어보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발자크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쏘지 마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팔을 흔드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발자크는 그답지 않게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란의 성벽 앞에 도착한 발자크가 넉살을 떨었다. 그는 흐트러진 로브 자락을 가다듬은 뒤, 양팔을 공손히 두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랜만입니다, 유진 님, 세냐 님, 크리스티나 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셋은 물론이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네란의 성벽 아래에는 신군의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다. 은광과 다른 신관들을 지도하던 중에 폭음을 듣고 급히 올라왔던 크리스티나는, 적의를 숨기지 않고서 발자크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사나 하러 온 것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발자크에 대해 조금의 우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진은 과거 아롯에서부터 발자크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 세냐는 ‘마법사’로서 발자크를 인정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성녀들에게 있어서 발자크 루드베스는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이자 당대의 유폐의 지팡이이며, 유폐의 마왕의 대리인. 그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그럴 리가 없지요. 인사라면 바벨의 성벽에서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높은 하늘의 마왕성 바벨은 마치 일식처럼 태양을 가리고 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에 불길한 땅거미를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직접 이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성벽 아래를 보았다. 하우리아 해방전 때 같이 싸웠던 이들 모두가 저곳에 있다. 그때 유진을 따랐던 이들 중에서 신군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오직 발자크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를 절대로 환영하지 않을, ‘적진’에 홀로 온 것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적진’이라고 말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 선언에 한때 발자크와 함께 청색마탑에서 수학했던 청탑주, 히리두스가 긴 탄식을 흘렸다. 히리두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아롯의 마탑주들은 짙은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적진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적탑주 로베리안이 뺨을 씰룩이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아롯에 있을 적부터 발자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발자크가 흑마법사인 이상,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하지만 흑마법사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떠나, 발자크가 가진 마법적인 열정만큼은 존중하고 경의를 가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화? 대화 좋아하네! 너 싫어하는 적진에서 뭔 놈의 대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탑주 멜키스도 참지 않고서 꽥 고함을 질렀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오메가 포스를 펼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당장에라도 발자크를 때려죽일 것처럼 적의를 내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를 진정시킨 것은 세냐였다. 그녀가 입을 열자 대기 중의 모든 마나가 정지했다. 멜키스가 은근히 펼치려던 마법도 마나가 정지한 세계에서는 발현되지 않았다. 멜키스는 화들짝 놀라고서 세냐의 눈치를 살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 여신 언니, 언니가 나설 필요도 없어요. 제가 당장 저 배은망덕한 개놈을 땅에 처박…….”&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화를 하러 왔다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멜키스를 돌아보지 않고서 말했다. 저 발언에 멜키스는 굉장히 억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벨에서 내려오던 발자크에게 대뜸 선공을 갈긴 것은 세냐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발자크가 말한 ‘대화’에 어울려 줄 셈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 발자크 루드베스. 네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것이라면, 대화를 해주지. 하지만 네가 나와 대화할 자격이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를 가로막은 주제에 정작 세냐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발자크는 사방에서 옭아 죄는 마나를 느꼈다. 이 공간의 모든 마나가 세냐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며 따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그 경이로운 마법에 전율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천한 흑마법사이자 미력한 마법사인 제게는 세냐 님과 대화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냐 님을 배신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신? 그건 틀려, 너와 내 사이에 ‘배신’을 논할 만큼의 관계는 없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세냐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세냐 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선을 그으셨었죠. 하지만 제 행동에 실망하신 것은 사실이시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 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 나는 네 비원이 마음에 들었어. 그 비원은 굉장히 노골적이고 욕망적이지만 숭고하고 존엄하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네 비원이 인간으로서, 마법사로서 추구하던 것이었기 때문이야. 설령 네가 유폐의 마왕의 힘을 빌었을지라도, 네 열망은 순수하다고 생각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직. 세냐의 주변에서 자색의 전류가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네가 인간과 마법사가 아닌, ‘흑마법사’로서 비원을 추구한다면. 나는 널 좋아할 수가 없어. 내가 실망한 것은 그 때문이야. 결국 너는 추구하던 비원을 포기하고 유폐의 마왕의 수족 노릇을 하겠다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처음부터 타협했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늘한 질책에도 발자크의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부터 자신의 한계는 절감했었습니다. 저 혼자만으로는 추구하던 비원을 이룰 수 없기에, 세냐 님의 말씀대로 유폐의 마왕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로 평생을 추구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숙이고 있던 머리가 들렸다. 발자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바라던 비원에 비해 저 자신은 초라하고 나약합니다. 저는 결코 세냐 님처럼 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타협했습니다.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협?”&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세냐 님과 같은 신화를 쓸 수 없습니다. 전설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세냐 님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하하…… 전설적인 마법사는 될 수 없어도, 전설적인 흑마법사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설적인 흑마법사. 그 노골적인 선언에 좌중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세냐의 입장과 기분을 헤아려 침묵하던 유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분노와 적의를 드러내던 간부들은 이제는 세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발자크의 발언이 세냐의 뜻을 정면에서 반하는 것을 넘어서 모욕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무어라 반응하지 않고 발자크를 뚫어져라 보았다.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녹색 눈동자에는 보석이 그러하듯 감정이란 것이 말살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윽고 세냐가 대답했다. ㅡ화악! 방금까지 세냐의 주변에서 파직거리던 전류가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너는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와서 대화를 청하는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웃으며 물었다. 표정만 그러할 뿐 세냐의 목소리와 감정에는 웃음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발자크는 무기체와 다름없는 건조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님의 대리인이자, 헬무드의 사절로 대화하기 위해 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착각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런 자격으로 이곳에 왔다면, 나는 너와 대화할 이유가 없어. 널 공격할 이유도 없고. 그럴 가치가 없으니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씀은 세냐 님을 존경하는 저로서는 무척이나 괴롭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날 존경한다는 말은 가증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너를 존중하지 않아. 만약 네가 바벨에서 내 앞에 선다면. 나는, 존중과 예우 없이 치워 버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서 발자크를 노려보며 이죽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바벨에서 치울 필요가 있나? 그냥 지금 치워도 될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난감하단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유폐의 마왕님의 대리인이자 헬무드의 사절로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제 모든 자격은 유폐의 마왕님의 인정이 있으십니다. 만약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쎄. 내가 지금 널 죽인다고 해서 유폐의 마왕이 화를 내진 않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제가 죽어도 유폐의 마왕님은 조금의 분노도 느끼지 않으시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죽여도 되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저로서는 피할 방법이 없지요. 하지만 우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 유언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흔쾌히 대답했다. ‘유언’이라는 말에 발자크의 표정은 더욱 난감함을 담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성벽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게 주실 의자 따위는 없으실 것 같으니, 어떻습니까? 조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 마지막 부탁 정도는 들어줘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도 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발자크의 표정이 더더욱 난감해졌다. 발자크는 짧게 헛기침을 한 뒤에 몸을 돌리더니, 먼저 성벽을 걷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다른 간부들이 따라붙으려는 것을 가볍게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걸음을 떼기 전. 유진은 세냐를 힐긋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대로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노와 짜증, 실망. 그런 감정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 대답을 듣고서 유진은 발자크의 뒤를 따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둘이서 걸었다. 발자크의 걸음은 은근히 빨라서, 조금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어느새 꽤 먼 곳을 걷게 되었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간부들의 모습이 작게 보일 정도였다. 물론 이 정도 거리는 문제 되지 않는다. 간부들의 실력이라면 전원이 순식간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까지 걸을 생각이냐? 설마 쟤들이 아예 안 보일 때까지 걸으려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발자크의 뒤통수를 보며 이죽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간부를 부를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발자크는 유진의 간격 안에 있다. 발자크가 어떤 수작을 부리건, 유진은 순식간에 발자크를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유진과 발자크의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실력과 격의 차이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진은 더 이해되지 않았다. 유진의 ‘힘’은 발자크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굳이 유폐의 마왕에게 붙어먹은 것인지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성격상, 발자크가 참전을 거부한다면 결코 강요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발자크는 바벨에 들어갔다. 유폐의 마왕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나? 그럴 리가 없다. 유폐의 마왕은 결코 어전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상 발자크는 바벨의 선봉으로, 용사를 가로막다 죽을 운명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서 걷고 있던 발자크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걸음을 늦춰 유진의 옆까지 다가왔다. 이 새끼가 대체 뭔 수작일까?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려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튀어나온 말에 유진의 뺨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의 말을 잘못 듣지는 않았다. 똑바로 들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유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발자크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뭐라고 말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려달라고 말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는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를 이곳에서 죽이지 말고, 살려서 돌려보내 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지한 얼굴, 흔들림 없는 목소리. 그래서 유진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헛웃음을 지으며 묻자 발자크가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이 작은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제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세냐 님은 저를 오늘, 이곳에서 죽일 생각이 없으시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세냐의 생각이지 내 생각은 아니지. 그리고 간부들 전원이 널 오늘 여기서 죽이고 싶어 할걸. 그래, 뭣하면 투표라도 해볼까? 다수결로 네 처분을 결정하자고. 아마 만장일치로 네 처형이 나올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그렇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면서 왜 온 거냐? 무슨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건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씀드렸듯이 유폐의 마왕님께서 제게 사절의 역할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에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뜻?”&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전의 시기에 대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뭇거림 없이 돌아온 대답. 유진은 짧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꽈득. 감정을 따라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 주먹에 핏줄이 돋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전이라. 그래, 지금은 대치하고 있을 뿐이니까. 유폐의 마왕은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나 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유진 님과 유폐의 마왕님이 나눈 약속이 그것이지 않습니까? 유진 님이 바벨에 오르시기 전까지, 유폐의 마왕님은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실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바벨을 올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 님이 저곳에 도달한 순간, 전쟁은 벌어집니다. 현재 판데모니엄에 집결한 전 병력이 대륙을 침공하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으로서는 병력의 대부분은 마족입니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헬무드의 여론도 바뀌겠지요. 전쟁을 거부하는 마족들도 멀리서 풍기는 피의 냄새에 본능적으로 기울게 될 겁니다. 카마쉬의 죽음 이후로 은둔한 거인들도 참전할지도 모르죠. 신군 간부들의 실력은 저도 잘 압니다만, 일반병의 질은 마군이 압도적일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도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과 인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발자크의 발언은 전쟁이 길어졌을 때의 경우다. 유진은 전쟁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이 전쟁은 길어야 하루나 이틀이면 끝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어느 쪽이건 희생을 최대한 줄이면 좋지 않은가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손을 들어 판데모니엄의 성벽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 세냐 님이 저를 공격하셨을 때. 판데모니엄의 대응은…… 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유폐의 마왕님의 의도도 물론 아니었죠. 성벽의 병사가, 저를 보호하기 위해 발사한 것입니다. 저 미사일의 위력은 유진 님도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사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앞에 여러 이름이 붙기는 합니다만, 저것은 미사일이라고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기초 공격 마법 중에 하나인 ‘매직미사일’을 떠올리면서, 판데모니엄에 설치된 ‘미사일’을 돌아보았다. 도저히 같은 이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미사일은 신군과의 전면전에서는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위력이 너무 강하니까요. 하지만. 유진 님이…… 유폐의 마왕님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순간. 판데모니엄의 모든 미사일은, 대륙 모든 국가를 향해 발사될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이 패배한 순간에 저 모든 미사일은 대륙을 불태울 겁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국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수도를 노리고, 순차적으로 인구수가 많은 도시까지 발사될 겁니다. 거리는 문제가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땅이 저것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죽인다…… 그것은 불가능하지요. 인간의 말살은 목적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피해가 나오겠지만, 인간은 살아남을 겁니다. 거기서 다시 인간은 선택해야 할 겁니다. 헬무드에 투항하든지, 증오와 복수심으로 맞서 싸우다가 죽을 것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너무나 잔혹한 일이지요.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약 신군이 항복한다면, 대륙이 불바다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헬무드는 투항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무슨 말을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항복을 권유하는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유진은 눈을 끔벅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웃음이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항복이라니! 당연히 저것은 유폐의 마왕과 상관없는, 발자크 개인의 권유다. 유폐의 마왕이 항복을 권할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유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한참을 그렇게 웃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참을 웃던 유진이 손을 뻗었다. 발자크는 움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유진의 손은 발자크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 높이 뜬 바벨을 가리키며,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죽일 테니까 가라고. 바벨로 가건, 다른 곳으로 도망치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널 살려주는 것은, 네가 너 나름대로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그것이 내게 죽을 각오를 하고서 내려와- 항복을 권하는, 머저리 같은 방식일지라도 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살려서 보내주마. 이번에만,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는다. 살려서 보내준다. 이번만이다. 이렇게 살려줬는데도 바벨에서 만난다면, 그때는, 유진이 나서기 전에 세냐가 발자크를 죽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다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의 성격상 항복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이들과 상의 정도는 할 수 있는 안건이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의미해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항복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어. 유폐의 마왕이 저 미사일인지 뭔지를 쏴갈기건, 쏴갈기지 않건, 내가…… 유폐의 마왕을 넘지 못하는 이상. 전부 다 끝나 버릴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래. 개전의 시기……를 물어봤지. 그래, 한 달 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한참을 웃다가, 의미를 모를 말을 하고, 별 고민도 없이 개전의 날을 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당황하여 유진을 보았다. 하지만 유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미를 모를 대답. 하지만 발자크는 저 대답을 통해 무언가를 유추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에서 글러트니로 포식했던 괴물. 불길한 마력. 멸망의 마왕. 위대한 베르무트가 맺었던 약속.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유폐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 뒤에, 바벨에서 뵙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항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항복할 수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넘지 못하면 세상이 멸망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을 이해하고, 발자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늘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보내준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시에 질문들이 날아왔다. 무엇부터 먼저 대답해야 하나? 유진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눈동자만 끔벅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보내준 것이냐 물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이라니! 너무 빠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끔벅이는 동안 재촉이 이어졌다. 간부들도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표정에는 의문과 당황이 그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진정들 해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일단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만류에 나섰다. 그러지 않고서는 가까이 다가온 세냐와 아니스에게 한 대씩 얻어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씩 설명할 테니까, 세냐, 일단 마나는 가라앉혀. 그리고…… 크리스티나 너도, 플레일은 내려놓자. 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얇게 뜨고서 노려보는 것은 크리스티나가 아닌 아니스지만, 시엘을 제외한 간부들은 아니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아니스는 일단 플레일을 내려놓았다. 세냐도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마나를 가라앉혔다. 그러고 나서야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내준 이유는 보내줘도 될 것 같아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도 하…… 유진 님을 때려도 될 것 같은데, 때려도 되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려놓았던 플레일에 다신 손이 올라갔다. 유진은 움찔하여 어깨를 움츠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정말로. 보내줘도 될 것 같아서 보내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판단한 이유에 대해 묻는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놈 나름대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거든. 놈이 유폐의 마왕에게 붙은 것은 상황이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그 위치에서 전쟁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발자크 루드베스를 죽이지 않겠다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준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도 해주었는데, 만약 발자크가 바벨에서 앞을 가로막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 내가 죽일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냐가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나는 오늘은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이었어. 발자크에게 인의가 있고 말고는 상관없어. 녀석이 유폐의 지팡이가 되어서, 유폐의 마왕을 위해 바벨에 있겠다면. 마법사로서의 비원을 포기하고 유폐의 지팡이에 몰두하겠다면. 나는, 마법의 주관자로서 저 빌어먹을 바벨에서 녀석을 죽여버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나는 가라앉았지만 목소리는 살벌했다. 저 발언에 간부에 포함이 된 대마법사들이 선망 어린 눈으로 세냐를 보았다. 세냐가 폴폴 흘리는 살기를 떠나, ‘마법의 주관자’라는 말에 홀린 모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니, 저도 함께하겠어요. 저도 언니와 함께 바벨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고금 최강의 정령사의 힘을 보여주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의욕은 훌륭했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에는 저와 세냐, 크리스티나만 갈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 님이 고금 최강의 정령사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바벨에서는 그 잘난 정령술을 뜻대로 쓸 수 없을 테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은 유폐의 마왕의 권능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장소다. 물론 유진은 300년 전에 어전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때의 전투가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세냐와 아니스, 모론에게 들어두었다. 당시의 세냐는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대부분의 마법이 봉인 당했었고, 템페스트도 거의 활약하지 못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 님은 지상을 맡아주세요. 가능하다면 판데모니엄 성벽 좀 치워주시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벽?”&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질문에 성벽에 설치된 미사일에 대해 설명했다. 대륙 모든 국가를 겨누고 있다는 말에 간부들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 당장 피난령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호네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군의 간부 중에서 전투에 참전하는 왕족은 호네인과 아만뿐. 직접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만의 표정도 굉장히 어두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미가 있소? 유진의 말대로라면 저 미사일이란 병기는 대륙 전역을 폭격할 수 있다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의 말에 아만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시민들을 도시에 남겨둘 수는 없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 피난해야 한다면 사마르로 보내시오. 대수림의 땅은 굉장히 넓고,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가장 마나가 풍부한 곳이오. 대수림을 주요 피난처로 삼고, 대마법사님들이 나서서 방어 결계를 구축하면 될 것 같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의 말에 모두가 의외란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바타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들의 의미를 깨닫고서 눈썹을 찡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굉장히 모욕적인 시선이로군……. 숲에 사는 원주민이라고 해서 야만적이고 무식한 것은 아니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정도로 심한 생각은 안 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그래야 한다면 대수림으로 오도록 하시오. 다만 피난령을 내릴 때 폭격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괜히 불안과 혼란을 증폭시킬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주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성적인 발언에 유진은 짝짝 박수를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의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 이바타, 똑똑한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수한 뜻의 칭찬. 이바타는 무어라 반응할지 알 수가 없어서 눈썹을 씰룩였다. 그도 성격이라면 어디서 꿀리지 않을 불같은 사내였지만, 그렇다고 유진을 상대로 불같은 성격을 작렬시킬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벽을 치우라는 건 뭐야? 이 고금 제일이자 최강의 정령사, 멜키스 엘하이어 님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안의 심각성과 무거움을 알게 된 멜키스가 으스대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 님의 그 잘나고 대단한 인피니티 포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정령왕 세 명일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오메가 포스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오메가 포스로 성벽의 미사일을 전부 파괴해 달라는 겁니다. 기왕이면 아예 판데모니엄에 쳐들어가서 쓸어버리시든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멜키스 님보고 적의 본거지에 쳐들어가서 날뛰라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려우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뻐서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다.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고 명예욕도 넘치는 멜키스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가 결정적이란 것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수림이 넓기는 하지만, 대륙 모든 피난민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해. 각국에도 피난처는 마련해야 한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왕들이 알아서 하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좋겠다, 대충 말하면 남들이 알아서 해주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나보고 성황에 총대장 자리 앉히래? 마왕 잡으라고 앉힌 자리잖아, 마왕만 잡으면 되지 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눈을 흘겼지만 유진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각자 잘하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정무 같은 것은 유진이 절대로 잘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계 만드는 것도 나는 잘 못 하니까, 세냐 네가 대마법사들 데리고 가서 알아서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대마법사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요즘 내가 마법사가 맞기는 한가 싶거든. 내가 어딜 봐서 마법사냐? 시그니처 있으면 마법사야? 그 외 마법은 거의 쓰지도 않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드렁한 얼굴로 말하던 유진은 움찔하고서 로베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 스승인 로베리안 앞에서 자신의 마법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사람에게는 각자 맞는 옷이 있는 법이지요. 유진 님의 전투 방식이 순수 마법사에 어울리지 않을 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래도 시그니처는 항상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예. 사실 제가 칼 휘둘러서 하는 것이 마법과 큰 차이가 없기도 하고요. 그냥,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계 같은 것은 잘 못 한다~ 이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열심히 달래듯 말하니, 시무룩했던 로베리안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님은 어떡해? 안 불러도 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염식의 성취와 더불어 유진에게 세례도 받았기에, 지금의 시엘은 대륙 최북단까지 암전의 마안을 연결하는 것이 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러야지. 내가 바벨에 들어간 뒤에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맞춰서 불러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의 결전에서는 가진 패를 아껴서는 안 된다. 혼자 싸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지금의 모론은 유진의 화신이자 대전사.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전력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은 너무 촉박하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한 달보다는 여유가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보다 늦어도 변할 것이 없잖아. 오히려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불안이 커질 거다. 나한테 그건 좋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사자여. 나는, 우리에게…… 아니, 세상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의미는 얼추 이해하고 있다. 함께 대수림에 다녀왔으니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자, 비슈르 라비올라와 만났을 때. 카르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모든 대화는 듣지 않았지만, 하나의 시대가 멸망을 맞아 지금의 시대에 도달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간부 중에서 나를 제외하고서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없다. 나조차도 완전한 진실은 알고 있지 않다. 나는, 우리에게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원이다. 우리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이곳에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눈에 강한 결의가 담겼다. 다른 간부들도 똑같은 열망을 담아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숨겨서는 안 될 일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라이언하트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이 갖는 의미와- 약속의 끝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젠가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숨겨서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하면 세상이 멸망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한다고 해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패배한다면 유폐의 마왕이 먼저 멸망시킬 것이고, 승리한다면…… 멸망의 마왕이, 그 이름처럼 세상을 멸망시킬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좌중은 침묵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내뱉는 어조에는 조금의 격정도 없었다. 그는 당연히 일어날 일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유진은 몇 달 내에 반드시 찾아올 멸망에 대해 말했다. 이전의 세계가 몇 번이나 멸망한 것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고대의, 신화시대에 살았던 전쟁신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것도 말했다. 300년 전에 멸망했어야 할 세상이 지금까지 유예를 얻은 것이,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란 것도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유폐의 마왕이 내 패배와 동시에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 개자식의 의중은 파악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놈은 굳이 갈라서 말한다면, 멸망을 거부하는 쪽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유폐의 마왕 본인은 멸망의 마왕과 맞서지 않는다. 아마 맞설 수가 없는 것이라고,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폐의 마왕은 몇 번이나 세상의 멸망을 보았고, 다음 세상으로 넘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멸망의 마왕에게 맞서다가 자칫해서 자신이 죽기라도 하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기라도 하면? 유폐의 마왕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 오직 그것을 바라고 영원을 살아오고 있다면, 대체 무엇이 유폐의 마왕을 살게 하는가? 왜 유폐의 마왕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을, 멸망의 마왕의 소멸을 바라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유폐의 마왕이 아군이라고 생각은 안 합니다. 그 자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왕이었고, 가장 먼저 세상을 침략했습니다. 이번만 해도 그렇고. 놈이 어떤 미련과 이유가 있어서 그 지랄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 달 뒤에 바벨을 오를 거고, 그 빌어먹을 어전에서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겁니다. 그다음에 멸망의 마왕을 죽일 거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한 달인 겁니다. 유폐의 마왕만 죽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대치가 길어질수록 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릴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구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을 막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함께 떨리는 손을 움직여, 품 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냈다. 점점 격해지는 떨림에도 간신히 케이스를 열어 시가를 잡았지만, 결국 손가락 사이에 끼운 시가가 부러져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지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부러진 시가를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카르멘은 자리에 벌떡 일어서고서 자켓을 어깨에 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카르멘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디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으나, 해야 할 일들은 많다. 세상을 구한다. 멸망을 막는다. 위대한, 베르무트를, 라이언하트의 시조를 구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스스! 카르멘의 손에 쥐고 있던 부서진 시가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곳에서 진실에 짓눌리거나 겁을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찬란한 사자가 그리는 찬란한 미래를 위한 초석이자 전쟁과 빛과 영광과 승리의 선봉이다. 우리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불끈 쥔 주먹을 모든 간부의 앞에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을, 승리를 위한 불꽃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 셈인가? 알체스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들고나와라. 대련이다. 그다음은 오르투스 경, 그대의 차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갑자기 대련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군, 오르투스 경. 우리 같은 기사에게 대련 외에 무슨 훈련이 필요하겠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그렇게 말하고서 홱 몸을 돌렸다. 그녀가 먼저 회의실을 나가버리자, 직접 지목받은 알체스터와 오르투스도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하나둘 간부들이 회의실을 떠났다. 카르멘의 웅장한 연설에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구한다. 멸망을 막는다. 원래부터 ‘반드시’ 승리한다는 결의가 있었지만, 저 사명들은 결의를 더욱 필사적으로 바꾸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린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몇 번이나 세상을 끝내 온 멸망의 마왕마저 쓰러트려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총대장은 나보다 카르멘 님이 하는 편이 낫지 않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떠나고 회의실에는 유진과 세냐, 성녀들만 남았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둘을 돌아보았다. 그녀들도 유진의 말에는 적극 동감했지만, 차마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를 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나신 신군 총대장님께서 결계를 치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래서 결계 치러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녀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주눅 들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도 나가보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왜? 결계 치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지금 시대의 신관들은 마족과의 전쟁 경험이 한참 부족합니다. 그에 관한 교육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기나 합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유진을 쏘아보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성수도 양산해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아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필요하면 말만 해. 내가 손목 몇 번 긋지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팔다리를 자르고 호수에라도 들어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며칠 그러고 있으면 호수 전체를 성수로 바꿀 수도 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 요하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거리는 대답에 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뇨, 그만두겠습니다. 하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한 달 동안 최대한 힘을 온존하는 것. 유폐의 마왕을 반드시 쓰러트릴 방법을 생각하는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한 달을 말한 것이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을 들은 아니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뱉을 뻔한 심한 말을 간신히 참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은 간부들이나 신군의 앞에서는 말하지 마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안 하지. 전쟁에서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아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가끔, 세상의 운명이란 것이 당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 절망스럽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에도 없는 말하기는. 나 믿잖아,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이라도 닫고 있으면 나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히죽 웃는 얼굴을 본 아니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회의실을 떠났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유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창밖의 바벨을 노려보았다. ……이길 자신? 그런 것 따위, 가비드 때부터 희미했다. 무조건, 반드시, 이긴다, 그런 확신은 진즉부터 없었다. 이겨야 하니까. 그래야 하니까 싸워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도 똑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겨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기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을 바라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겨야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벨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달이 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경건한 부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일부러 의식하여 깊은 잠을 잤다. 심신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방금 눈을 떴는데도 눈꺼풀은 무겁지 않고, 정신도 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눈을 뜬 유진은, 정신이나 육체로나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그마한 속삭임.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곁에서 들려 온 나직한 부름. 그 부름은, 유진은 먼 옛날을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부러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묻는 질문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스스로도 방금은 우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억’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알지 못한다. 유진은 아련한 잔재를 지우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나 싶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의 유진 님은 그 어느 때보다 신이시어야 하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 유진은 저 대답이 갖는 의미와 무게를 알고서 쓴웃음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단 저만 그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진 님. 나의, 신이시여. 신군의 모두가 그렇게 되뇌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의식한 것만으로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한 달, 목소리는 줄어드는 일 없이 계속해서 커져 갔다. 대륙 각지에서, 그리고 이곳에 모인 신군들에게서 전해지는 기도와 신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이 가까워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동안 대륙은 바쁘게 준동했다. 미사일과 폭격에 대해 알리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의한 피난 자체가 시민들에게 공포를 주었다. 네란에 모인 신군은 개전이 머지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포를 잊기 위해 신을 찾았다. 이 세상에서 신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세상에는 신이 굉장히 가깝다. 기도를 들어주고, 마왕과 맞서며,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줄 신은 바로 이곳에 있다. 그것을 알기에 기도는 끊이질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전의 준비는 끝났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속삭였다. 그녀는 목에 건 로사리오를 움켜쥐면서 고개를 낮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유진 님의 호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같은 날은 흔쾌히 하겠다고 하십시오, 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낮췄던 고개가 다시 들렸다. 어느새 바뀐 아니스가 유진을 흘겨보며 쏘아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총대장인 당신이 개전을 선언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합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격이라면 세냐도 충분하고, 인망이라면 카르멘 님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발, 신이시여!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을 쏘아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돌변한 분위기에 아니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침대에서 내려온 유진은, 아니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은 중요한 날이지. 이 시대의 끝이 될 수도 있는 날. 아니면, 끝을 바꿀 수도 있는 분기점.”&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시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너무 경건하게 굴지 말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말에 아니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심하게 군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것은 맞는데, 하기 싫은 것은 진짜이긴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정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너의 신인 것도 맞고, 네가 내 성녀인 것도 맞아. 오늘이 중요하고 특별한 날인 것도 맞지. 하지만 그렇다고 각별하게 굴지 말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근처의 큼직한 항아리가 둥실 떠올랐다. 아니스는 유진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눈동자를 몇 번 깜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러서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러서라고. 튈 수도 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무엇이? 아니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유진이 시키는 대로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는 동안에 떠올랐던 항아리가 앞으로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즉시 손을 뻗어 항아리를 잡았다. 텅 비었던 항아리에 순식간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진이 항아리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ㅡ촤아아악! 항아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냉수가 쏟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대체 뭐 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기겁하며 물었다. 유진은 찬물에 젖어 푹 가라앉은 머리를 몇 번 털어낸 뒤에, 옷걸이에 걸친 흑암의 망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촤라락! 날아온 망토가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냉수마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도 새로 무장할 겸.”&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물에 흠뻑 젖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유진은 양손으로 뺨을 찰싹 한 번 친 뒤에 아니스를 지나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문으로 향하는 유진을 쫓으며 눈을 깜박였다. 곧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라고 추켜세우는 것보다 훨씬 듣기 좋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이지, 저와 크리스티나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 것이라면, 흐흠,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터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방금 자다 일어났잖아. 씻을 겸 한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문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게 이어진 복도에는 세냐와 대마법사들을 제외한 간부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법과는 관련이 없는 기사와 전사들. 유진은 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카르멘과 길레이드, 기온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잘 주무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자려고 노력은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이 가까워질수록 긴장과 흥분으로 인해 잠을 못 자는 이들이 많았다. 신군 대부분이 그러했고,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대는 아득한 세월 동안 군림해 온 유폐의 마왕. 넘어온 세계들까지 생각한다면, 유폐의 마왕이 마왕으로서 군림한 시간은 가히 영원마저 논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잘 잔 것 같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자려고 노력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넉살 떠는 대답에 기온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다른 간부들은 좀처럼 웃지를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로 전쟁이 시작된다.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는 바벨에 오를 것이고- 남은 신군은 지상에서 헬무드의 공세를 가로막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말하자면 지상의 전투는 두렵지 않다. 마족과 마물과의 싸움은 이미 하우리아에서 겪어보았다. 카르멘과 오르투스, 아이빅은 ‘마왕’과의 전투에서의 절망도 느껴본 경험이 있다. 지상에서의 전투가 아무리 험악할지라도, 여태까지의 전투보다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제는 바벨이다. 바벨에 돌입한 유진 일행이 유폐의 마왕에게 패배한다면- 지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그것만큼은 간부들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간부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상대는 유폐의 마왕이다. 그 영원한 대마왕의 패배를, 간부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믿음이 부족하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해지는 불안은 유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간부들 사이를 지나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심장 부근에서 신화(神火)가 피어올랐다. 그것만으로 복도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불안과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공기에 불꽃이 스며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진의 등을 보았다. 어느새 간부들을 지나친 유진의 존재가 어두운 밤바다의 등불처럼 느껴졌다. 유진이 앞을 걷고, 그 등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에 가라앉은 불안과 긴장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바타는, 유진의 등에서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그리고 유진이 다른 누군가의 등이 된 것만 같은. 기묘하게도 이바타는 그 감각을 낯설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식은땀이 고여 있던 손은 어느새 메말라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믿음이 부족하다고? 맞는 말이다. 유진의 패배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승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알체스터는 웃음을 삼키며 유진의 등을 보았다. 몇 년 전에 처음 보았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대한 등.&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의 간부들 중에서 오직 카르멘만이 태연했다. 그녀는 긴장과 불안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유폐와 멸망을 넘어 찬란한 미래에 도달하는 것에 자신의 드래곤 클로가 일조할 것을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족합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힐긋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에 있던 모든 간부들은 이미 동요 없는 얼굴로 유진의 뒤에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히 물어봤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건물은 네란의 성벽 위에 있다. 문을 열고 나온 유진은 곧장 성벽의 위를 걸었다. 뿌연 하늘.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먹구름에 태양이 보이지 않아, 하늘이 거무죽죽하다. 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힐긋 시선을 들었다. 저 구름 같은 것은 구름이 아니다. 이 일대의 하늘이, 유폐의 마왕의 마력에 뒤덮인 것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씨 엿같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서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와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선을 내린 순간에 쩌렁쩌렁한 함성이 이어졌다. 이곳은 아직 전장이 되지 않았으나, 개전의 함성은 바로 앞에 있어 가깝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높은 성벽의 아래. 판데모니엄을 사이에 둔 평원에서 대치하고 있던, 대륙 전역에서 모인 신군 전원이 유진을 보고서 함성을 내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빨리도 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원을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 속에서도 세냐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징조 없이 옆에 나타난 세냐가 유진을 흘겨보면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다는데 잠이나 푹 자라고 들여보낸 것은 너였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늦게까지 잘 줄은 몰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정오야. 이 정도면 늦게 잔 것도 아니지. 그래서, 어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세냐의 옆에 내려서는 대마법사들을 시야에 함께 담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한 달 동안 가장 바쁘게 움직인 것은 세냐와 대마법사들을 필두로 한 마법병단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사마르 대수림 전역을 세계수와 연결하여 강력한 방어결계를 구축했고, 각 왕국의 주요 도시에도 방어결계를 구축했다. 동시에 전장이 될 이곳 평원에 다양한 마법을 설치했고, 신군을 보조할 만한 마법 스크롤도 양산했다.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신관들도 성수 양산과 신성마법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그 고생은 세냐와 마법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 중에 레헤인야르도 다녀왔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을 불러내면 레헤인야르가 비어버린다. 누르의 출현을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세냐의 마법이 필요하다. 덕분에 세냐는 아까까지만 해도 레헤인야르에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텅 비었지. 후발대는 없는 것 같아. 우리 후방을 타격하는 것도 불가능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은 보이지 않았다. 평원의 끝도 안 보인다. 신군의 너머에 있는 것은, 마족과 마물로 이뤄진 대군이었다. 헬무드에서 사육하는 모든 마물이 이 평원에 모인 것만 같았다. 마족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군데군데 인간이 섞여 있다. 많지는 않지만 거인도 있었고, 수인도 몇몇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총전력으로 서로 꽝, 부딪치자, 이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 지상의 전투는 큰 의미를 갖지 않을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시커먼 하늘의 바벨을 노려보았다. 만약 지상의 마군이 전멸할지라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유폐의 마왕은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대륙을 휩쓸어버릴 수 있는 대마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왼손은 아직 가슴에 얹어져 있다. 신화가 점점 더 거센 빛을 내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이 전쟁이라면 나는 승리를 원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의 왼손이 떨어졌다. 유진은 모든 신군이 보는 앞에서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ㅡ화르륵! 왼손을 감싸고 있던 신화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유진은 씩 웃으며 불꽃을 하늘 위로 가볍게 던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아악! 높이 치솟은 불꽃이 폭발하듯 부풀었다. 마력에 뒤덮여 거무죽죽하던 하늘에서 검붉은 태양이 만들어졌다. 신화시대에 아가로트가 그러했듯, 유진은 자신의 신력을 빚어 태양이란 기적을 만들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들은 함성을 내지르는 것을 잊고서 홀린 듯이 하늘의 태양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알고 있다. 저것은 태양처럼 보이지만 진짜 태양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의, 전장의 신군들에게 있어서 저 인조 태양은 진짜 태양보다 찬란했다. 가슴의 공포와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함성을 내질렀건만, 이제는 그런 함성을 내지르지 않아도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과 용기 같은 감정이 넘쳐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감탄하여 유진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와 전투를 치를 때만 해도 유진의 성역은 이렇게 광범위를 덮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프로미넌스를 펼치지도 않고서, 평원 전체를 성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성역 내에서 신도들의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다. 부상은 빠르게 치유되고, 마나에도 신력이 더해진다. 저 태양이 떠오른 것만으로 신군의 전력은 몇 배나 상승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성격상 거창한 말은 못 하겠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모든 신군의 시선을 받으며 손을 뻗었다. -화악! 네란의 성벽에 꽂혀 있던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유진의 손으로 날아왔다. 유진은, 하우리아에서의 진군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 끼리릭…… 손에 쥔 깃대가 불길한 소리를 발했다. 가득 불어넣은 마나가 불꽃이 되어 깃대를 휘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손에서 깃대가 쏘아졌다. 공간을 관통하고 날아간 깃대는, 마군의 전열에서 가장 큰 거인의 몸을 관통했다. 관통한 순간에 터져 나온 불꽃이 거인의 몸을 폭발시키고, 그 주변의 마족과 마물이 폭발에 휘말려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서 봅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으며 건넨 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적진의 한복판에서 라이언하트의 깃발이 펄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와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살아서 보자는 말. 유진은 거창하고 대단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신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은 자신들의 총대장이 300년 전 하멜의 환생이란 것을 안다. 그는 과거 위대한 베르무트와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마왕과 맞선 대영웅이며, 지금 시대에서 환생하여 성검의 선택받은 용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용사마저 넘어서 신좌에 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자리하고 가호하는 이 전장은 신화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에 떠오른 검붉은 태양을 보라. 살아서 보자는 말과 더불어, 전장을 밝히는 저 태양은 기적이자 신의 가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앞으로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폼체인지. 나직이 내뱉은 중얼거림은 신군뿐만 아니라 반대편의 마군에게도 들렸다. 그들은 대뜸 날아와서 진영에 구멍을 뚫고서 처박힌 라이언하트 깃발에 악을 쓰다가, 뜬금없이 들려 온 ‘폼체인지’라는 말에 이쪽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락! 걸치고 있던 코트가 휘날렸다. 제복 안에 입은 전용 엑시드가 가변하며 카르멘의 몸을 감쌌다. 본래 엑시드의 착용, 카르멘에게 있어서 ‘변신’인 이 과정은 3초도 걸리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카르멘은 일부러 변신의 과정을 늦췄다. ‘필요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진의 발언이 신군의 사기를 충전시킨 것처럼, 카르멘도 자신의 변신이 신군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이 소름 돋을 만큼 멋진 변신을 모두에게 천천히 보여주고 싶었다. 곧 으깨 죽일 저 많은 마군에게도, 그들에게 최후를 줄 잔혹한 사신(死神)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컥, 철컥……! 몸통부터 시작된 변신이 팔다리로 뻗어갔다. ㅡ부족하다. 카르멘은 자신의 팔다리를 뒤덮는 엑시드의 형태를 보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 전용 엑시드의 이름은 백염룡(白炎龍).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름. 카르멘 라이언하트. 그녀는 백염식의 별을 합일하여 새로이 우화했다. 라이언하트의 은사자이자 백염룡이라 불리었던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더 이상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림 리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엑시드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밤처럼 죽음처럼 완전히 검게 물든 엑시드가 카르멘의 전신을 덮었다. 카르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난간 위에 올라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틀리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림 리퍼의 낫처럼 날카로운 손가락이 시가를 들었다. 카르멘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시가를 들었던 손가락으로 하늘을, 유폐의 마왕성, 바벨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녀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서 보자는 말의 화답으로 이 이상의 말은 없을 것이다. 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가서, 돌아와야 한다. 평소라면 카르멘의 언동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버렸겠지만, 지금의 유진은 그럴 수 없었다. 저 말에 담긴 의미를 느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진은 그렇게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륵! 유진의 등 뒤에서 프로미넌스가 치솟았다. 아직 공명하지 않은 크리스티나도 똑같이 빛의 날개를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탁할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곧장 날아오르지 않고 대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멜키스가 앞에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걱정 말아요, 이 멜키스 엘하이어가 훌륭히 역할을 해낼 테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에 하나 교신이 끊어진다면, 예정대로 돌입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로베리안이 바벨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당장 간부들은 지상을 책임지기로 했지만- 최악의 경우엔 그들도 바벨에 돌입하기로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그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올려보는 메르와 라이미르아를 보고서 씩 미소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무리하지는 마, 알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꼬마는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상 전투에는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참가한다. 꼬마의 모습이라고 논외 하기에는 둘의 전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인 라이미르아는 마이스의 시그니처와 합일하여 공중전의 주요 전력이 될 것이고, 메르는 세냐와의 교신을 도맡으면서 전장을 해석하며 마법병단을 보조하기로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라도 뭔 일 날까 봐 걱정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우리가 겪을 일보다는 나을 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히 지상을 힐긋거리는 유징네게 세냐가 핀잔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대답하고서 마군 쪽을 살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 성벽에 설치된 미사일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성벽 안쪽에 있던 뭔지 모를 탈것과 병기들은 마군의 뒤에 배치되어 있다. 혹시 먼저 진군해 오지 않을까 싶어서 깃발을 던졌던 것인데, 진영에 만들어 준 커다란 구멍도 어느새 다른 부대로 메워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들은- 아직 진군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살벌한 시선으로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진이 바벨에 돌입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중에서 가장 진한 살의를 흘리는 것이 선봉의 검은 안개다. 대장인 가비드는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검은 안개를 두르고서 마군 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이 더 커졌군. 유폐의 마왕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위 서열의 마족들이 유폐의 마왕에게 직접 마력을 부여받은 것이 몇 년 전. 서열에 소속되지 않은 검은 안개는 당시에 제외되었다고 들었는데, 전쟁을 준비하면서 새로 마력을 부여한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꽤 까다롭다. 만약 검은 안개가 마족 서열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현재 최상위 마족들은 죄다 검은 안개로 채워졌을 테니. 본래부터 전투에 특화된 놈들이 유폐의 마력까지 얻은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보다는 낫네. 그렇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지상을 살피던 세냐가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정할 수는 없었다. 300년 전. 바벨을 목전에 두고서 붉은 평원에 모였던 결사대. 지칠 대로 지쳐서 목숨 말고는 내걸 것이 없던 것이 결사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사대는 이름처럼 대부분이 붉은 평원에서 죽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유진은 싸늘히 식은 눈으로 바벨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300년 전과는 달라야 한다. 그때 유진은, 하멜은, 바벨에서 죽었다. 끝내 어전에 오르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생각해 봤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이 점점 가까워진다. ㅡ화악! 등 뒤의 프로미넌스가 크게 펄럭이더니 불꽃의 깃털이 저만치 앞으로 쏘아졌다. 공간도약이 펼쳐졌다. 유진은 바벨의 정면을 지나서 보다 높은 곳까지 이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정문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세냐가 헛웃음을 흘렸다. 크리스티나의 곁에 바짝 붙여 펼친 마법이 둘을 유진의 곁으로 이동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도 시도했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 바벨을 덮은 결계를 돌파할 수 없었으니 입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사슬이 보인다. 300년 전에는 저 사슬을 뚫지 못했기에 외곽 정문부터 돌파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바벨에는 발자크를 제외하고 방해꾼은 없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방패는 300년 동안 공석이고, 가비드의 죽음 이후로 유폐의 칼은 임명되지 않았다. 친위대인 검은 안개도 지상에 나와 있으니, 어전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발자크 혼자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함정이나 마물, 언데드 따위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그런 것들은 지금의 전력에 있어 방해로도 취급되지 않는다. 무엇이 앞을 가로막건, 나타난 즉시 치우고 갈 수 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긴 하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커먼 불꽃이 타올랐다. 유진은 레반테인을 쥐고서 결계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저건 부숴 버리고 싶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ㅡ! 유리의 칼날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그 단순한 말에 세냐도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는 로브의 안쪽에서 메리를 꺼내더니 레반테인 쪽으로 가까이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수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사슬. 그리고 바벨은 과거 세냐가 평생을 넘고자 한 벽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의 끝에서 빛이 반짝였다. 흩날린 꽃잎이 레반테인의 불꽃으로 흘러가더니 불타서 재가 되었다. 하지만 마법은 사라지지 않고 레반테인에 더해졌다. 찌직, 찌지지직! 번뜩이는 전류가 불꽃에 더해졌다. 유진은 보다 무거워진 레반테인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뜻대로 하시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스도 마찬가지였기에 굳이 몸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늘을 갈랐다. 검붉은 불꽃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처럼 바벨에 내리꽂혔다. 꽈아아아! 바벨이 존재하는 공간을 겹겹이 두르고 있던 사슬이 불꽃에 분쇄되었다. 바벨이 추락할 것처럼 진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와아아아! 지상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하늘을 노려보던 마군이 일제히 진격을 시작하는 소리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시했다. 유진은 다시 한번 레반테인을 치켜들었다. 바벨의 결계는 방금의 일검으로 모조리 베어냈다. 지금의 바벨은 아무런 결계도 두르지 않고 그저 하늘을 떠는 불길한 마왕성일 뿐이다. 유진은 바벨의 중심을 보았다. 넓고 높은 본성. 300년 전에 하멜은 저곳을 오르다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뺨이 씰룩거리며 미소가 만들어졌다. 유진은 다시 한번 레반테인을 높이 쳐들었다. 불꽃은 피어오른 즉시 참격이 되어 쏘아졌다. 신화가 바벨의 본성에 처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음과 함께 성이 무너졌다. 그렇게 보였다. 무너지는가 싶던 성이 크게 일렁거리더니 시커먼 안개가 되었다. 마치 구름처럼 커다랗게 부푼 안개가 성을 통째로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안개를 노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마력에 의한, 흑마법에 의한 안개. 유진은 저 안개가 띄고 있는 어둠이 무엇인지를 안다. 유진이 무어라 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세냐가 대뜸 앞으로 성큼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 집어넣고 물러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늘하게 식은 목소리. 시키는 대로 레반테인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섰다. 대신에 세냐가 메리를 뻗어 들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성을 통째로 휘감은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요동쳤지만, 이곳에서 저 안개를 경계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신에 분노와 살의를 느꼈다. 세냐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안개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밖에서부터 파훼하거나 부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세냐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접 들어가서 부숴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정면에서, 압도해 주겠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없이 안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유진과 크리스티나도 세냐를 제지하지 않았다. 세냐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의 세냐를 말리는 것은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들어간 세냐가 안개에 삼켜졌다. 유진도 크리스티나를 곁에 가깝게 두고서 안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너무 짙은 안개에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안개가 시각 자체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블라인드. 발자크 루드베스의 시그니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래에서 사용할 줄 알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보이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블라인드가 대규모 전투에서 치명적인 위력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 사마르에서의 전투로 실감했었다. 수백만 신군에게 동시에 시각이 차단되어 버린다면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그런 일을 경계하고서 대비는 했다. 만약 발자크가 지상에 블라인드의 장막을 내렸다면, 유진이 만들어놓은 태양이 즉시 장막을 찢어발겼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시각은 차단되었지만, 그것은 유진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감각은 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감각을 의지하려 들 필요도 없다. 몇 번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 차단되었던 시각이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내게 이런 마법이 통할 리가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력으로 시각을 되찾은 것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 그녀는 유진의 바로 곁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의 충고를 듣지 않았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지 않고 살려서 돌려보냈다. 도망치라고 충고도 해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얇게 뜬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게 닫힌 성문의 앞.&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성문 앞에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대뜸 어전으로 진입하려 하실 줄이야. 그래 버리시면 문지기를 맡은 제 입장이 우스워지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언제나 쓰던 안경을 살짝 올리면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지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를 노려보던 세냐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블라인드는 건재하다. 하지만 세냐는 처음부터 시각을 잃지 않았다. 세냐의 시그니처 중 하나인 엠프레스 룰은 그녀보다 수준이 낮은 마법을 지배할 수 있다. 본래 엠프레스 룰은 ‘흑마법’에는 여러 제한을 지니지만, ‘절대률’을 더한다면 흑마법조차 지배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문은 열려 있는데, 문지기가 필요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늘한 목소리가 담은 말에 발자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즉시 뒤를 돌아본 발자크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닫혀 있던 문. 절대 열리지 않게끔 여러 마법을 담았던 문이, 발자크가 알아차릴 새도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은…… 열렸지만. 들여보내지 않는다면, 닫힌 것과 같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큰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메리를 앞으로 뻗으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 흑색마탑주? 마법사? 흑마법사? 바벨의 문지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다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대답했다. 떠도는 안개 속에서 시커먼 지팡이가 나타났다. 발자크는 왼손으로 지팡이를 쥐고, 오른손은 세냐를 향해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유폐의 지팡이이기도 하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억. 오른손바닥이 갈라지고 자그마한 입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고개를 끄덕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죽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가 번쩍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키이잉…….&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의 끝. 마나가 주입된 꽃봉오리가 개화했다. 활짝 펼쳐진 꽃잎에서 얇은 빛이 선이 되어 쏘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즉시 오른손의 글러트니를 발동했다. 포식의 입이 손바닥을 넘어 팔뚝까지 이어졌다. 발자크의 팔은 마치 파충류의 입처럼 위아래로 벌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가온 빛이 글러트니의 간격에 들어왔다. 글러트니가 즉시 빛을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벌어졌던 입이 닫히고,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발자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이 뒤집히고 입에서는 피가 뿜어졌다. 방금 집어삼킨 마법을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피를 토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뚜둑, 뚜두둑! 왼팔이 들썩거리며 기포가 올라왔다. 소화되지 않은 마법이 글러트니를 내부부터 찢어발기기 시작한 것이다. 발자크는 연신 토해지는 피를 억지로 삼키며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앙! 시커먼 마력 덩어리가 세냐에게 쏘아졌다. 동시에 오른손에서는 글러트니가 다시 열렸다. 도저히 소화하지 못한 마법이 토해졌다. 결국 토해버렸지만, 발자크는 그 짧은 순간에 어느 정도는 마법을 해석하고 지배권을 빼앗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쏘아진 마력 덩어리와 돌아오는 마법. 둘 모두가 세냐에 대한 공격이 되었다. 하지만 세냐는 저것에서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않았다. 어느새 앞으로 뻗은 손가락이 쓱 선을 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개의 마법이 동시에 소멸했다. 마냥 힘으로 덮은 것이 아니다.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 자체에 간섭해서 마법을 무로 돌려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름…… 답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입에 번진 피를 닦으면서 감탄했다. 저만큼 깔끔한 디스펠은 본 적이 없다. 최초의 공격에서도 느꼈지만, 저 디스펠에서 더욱 절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압도적이다. 발자크는, 자신과 세냐 사이에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느꼈다. 격이 다르단 말이다. 발자크가 어떤 마법을 쓰고 어떤 수단을 시도하건, 세냐에게 상처 하나 줄 수 없을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엠프레스 룰을 거두신 것은…… 저를 무시하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엠프레스 룰을 쓰지 않아도 네 마법은 나에게 닿지 않을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그래 보이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번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왼손이 활짝 펼쳐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한 번의 마법으로, 너는 죽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덤덤이 고해진 선고. 세냐는 확신했고, 발자크도 확신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저는, 아무쪼록 죽지 않도록……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 되도록 노력해야겠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건 불가능해. 네게 두 번은 없어. 한 번, 단 한 번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지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왼손에 보라색의 빛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본 발자크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보라색 빛은 ‘마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냐 메르데인의 것이라 믿을 수 없는 요악한 빛. 발자크는 저 빛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제벨라 공작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 누아르 제벨라의 마력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과 함께 거둬들인 누아르의 마력. 본래 누아르가 지니고 있던 마력과 비교하면 편린 정도지만, 그럴 텐데도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짧은 웃음을 흘리며 지팡이를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음이 선고된 상황. 그렇지만 발자크는 감사를 말했다. 세냐는 온갖 방법으로 발자크를 죽일 수 있다. 처음에 쏘았던 빛만 난사해도 발자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세냐는 ‘단 한 번’이라고 말한 만큼, 그녀는 진심으로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발자크는 감사를 느꼈다. 엠프레스 룰을 거둔 것. 세냐는 ‘무시’라고 했지만, 발자크는 단순히 무시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려’라고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 미련이 남지 않도록.’&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문지기로서 이곳에 서 있지만, 발자크는 절대로 문을 지킬 수 없다. 저들이 여태까지 넘어온 난관과 비교하자면 발자크는 너무나 하찮고 초라하다. 발자크가 아무리 발악해도, 그는 난관이 될 수가 없다.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할 돌멩이도 되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 알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서 여기 서 있는 것이다. 난관이 되고 싶었다면 훨씬 일찍 ‘적’이 되어야 했다. 애초부터 발자크는 난관이 될 생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의 신역.”&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견식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손이 지팡이를 놓았다. 하지만 지팡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발자크는 가슴 앞에 지팡이를 세워놓고서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지지직…… 오른손이 다시 갈라지며 글러트니가 입을 벌렸다. 발자크는 피비린내 어린 숨을 삼키며 왼손을 글러트니에 가까이 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르……! 글러트니의 안쪽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렸다. 이윽고 회백색의 마력이 글러트니의 안쪽에서 토해져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력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로 물러서서 전투를 지켜보던 유진은 쯧 혀를 찼다. 저 마력의 근원이 뭔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하우리아에서 쏟아져 나왔던 누르의 군세. 발자크는 그 전장에서 적극 활약하며 누르를 포식했다. 그를 통해 얻어낸 마력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력은 존재를 붕괴시킨다. 화신조차도 예외는 아니야. 저만한 마력을 인간이 품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발자크가 도망치지 않았는지. 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바벨에 남았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은 이해했다. 애초부터 발자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찌 몸뚱이는 유지하고 있지만, 멸망의 마력을 저만큼 포식한 이상 발자크는 머잖아 죽을 시한부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길게 숨을 내쉬며 멸망의 마력을 집중했다. 동시에 왼손에서 유폐의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오른손의 글러트니는 모든 멸망의 마력을 쏟아낸 뒤에 다음의 마력을 토해냈다. 마족과 마물을 포식하며 얻은 마력. 그리고 발자크가 가진 모든 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 다른 종류의 마력과 마나가 뒤엉키면서 압축되었다. 세냐는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면서 메리를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치지지지직! 인도된 마력이 메리의 꽃잎을 휘감았다. 동시에 발현한 마나가 마력과 섞이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발자크는 똑같이 마나와 마력의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지 않았다. 발자크가 섞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붙들고 있다면, 세냐의 마나와 마력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력. 다르게 변질한 마나와 마력의 교집합에서 끌어낸 순수한 정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치미는 피를 삼키며 감탄을 흘렸다. 하우리아 때만 하더라도 세냐에게 저런 힘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보다 일찍 견식 했다면, 내게도 가능했을까? 떠오른 의문에 발자크는 다시 웃고 말했다. 가능할 리가 없다. 저것이야말로 마법의 신역. 전설을 넘어 신화에 도달한, 마법의 여신만이 다룰 수 있는 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다시 한번 감사를 말했다. 죽기 전에 저런 것을 볼 수 있다니. 저것에, 죽을 수 있다니. 백 번 감사를 말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시에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법에 대한 재능은 중요치 않다. 사랑은 재능이 부족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고 사랑해 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경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되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가 끝났다. 발자크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릉……!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진동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힘을 조율하며 지팡이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발자크의 육신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부터 핏기가 없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졌고, 글러트니의 이빨은 딱딱 부딪쳐 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세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회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면 오히려 더 실망했을 것이다. 스스로 마법사이자 흑마법사이며 유폐의 지팡이라 말했으니, 그 하찮은 지조를 갖고서 죽는 것이 그나마 명예로울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의 끝에 모인 영력은 고작해야 주먹만 한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발자크가 끌어모은 힘과 크기로 비교하자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작았다. 하지만 격이 다르다. 발자크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았고, 유진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크리스티나의 앞을 가로막고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저 힘에 휘말려 버리면 그냥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가, 발자크 루드베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뱉은 말에는 조금의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었다. 세냐가 발자크에게 그런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평생을 마법에 바치고, 마법에 열망하고, 마법의 끝을 염원했던 어리석은 흑마법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이 마법에는 그러한 존중을 담았을 뿐. 흑마법사로서 앞을 가로막은 발자크에 대한 살의는 견고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력이 움직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빛이 발자크를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발자크는 부릅뜬 눈으로 빛을 보았다. 저 빛이 생의 마지막을 결정할 것을 알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발자크도 마법을 쏘았다. 지팡이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빛이 폭사했다. 발자크가 쏘아낸 마법은 세냐의 것과 달리 흉포하고 야만적이었다. 두 개의 마법이 서로 충돌하기 전. 유진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프로미넌스로 성역을 만들고서 크리스티나와 자신을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개의 마법이 충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발하거나, 부서지거나. 그런 것과 관련된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충돌은 저러한 현상을 동반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는 순간에 발자크의 마법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발자크가 수명을 깎아가며 끌어모은 멸망의 마력도. 존재를 변질시켜 가며 포식해서 얻은 마나와 마력도. 모두가 세냐의 마법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오히려 소멸한 마법이 세냐의 마법에 흘러 들어가며 영력의 힘을 키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황하지도 경악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저렇게 될 것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자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은 발자크가 평생 갈구해 온 형상을 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능하다면 조금 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하며 글러트니를 열었다. 활짝 열린 입이 다가오는 죽음을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마법이 글러트니에 먹혀 사라졌다. 발자크는 잠시 동안 왼팔을 뻗고 우두커니 섰다. 잠시 후, 발자크는 푸들거리며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대꾸하지 않고 메리를 아래로 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느릿하게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토록 경이롭고…… 위대하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직, 찌지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의 오른손이 갈라지더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호흡을 할 때마다 내부의 장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글러트니로 포식한 존재는 한 권의 책이 되어 발자크의 안에 있는 책장에 꽂힌다. 마법도 마찬가지다. 아카샤가 마법을 이해하듯, 발자크의 글러트니도 포식한 마법을 이해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방금 포식한 마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처음으로 위치크래프트를 보았을 때. 이터널 홀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각. 답안지를 보고 있는데도 도저히 이해는 할 수 없는 막연함. 이것이 마법의 신역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큭큭 웃으며 간신히 남은 왼손으로 가슴을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으로 이런 마법을 견식하고 죽을 수 있다니. 저 같은 마법사에게 이 이상의 죽음은 없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을 때는 유폐의 지팡이로 죽는 것이 아닌 모양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처음부터 마법사였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서지 못하고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이 마법의 끝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간절함을 담아서 물었다. 세냐는 발자크가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른다.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겨우 이딴 것이 마법의 끝일 리가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마법의 여신님도 아직 마법의 ‘끝’은 가늠할 수가 없어. 나조차도, 끝을 탐구하고 있지. 사실 이제는 이런 생각마저 하고 있어. 마법에 끝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란 존재에 끝이 있을지언정 마법에는 끝이 존재하지 않아. 마법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끝이란 존재해서는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로 마지막 감사를 말했다. 그는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아래로 떨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조차도…… 마법의…… 도중. 후후…… 그렇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부의 장기가 모조리 소멸했다. 그리고 육신마저도 소멸하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야가 흐려지기에 눈을 감았다. 끊어지려는 의식을 굳이 붙들지 않았다. 육체는 소멸하지만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다. 발자크는, 계약으로 묶인 자신의 영혼을 느꼈다. 이렇게 소멸하고 있음에도 계약은 견고하며, 육신의 소멸 후에 발자크의 영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사가 되기를 잘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에 죽음이 결정되었던 목숨. 살 생각 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유진에게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가능하다면 세냐에게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존경하던 세냐의 마법에, 죽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아니, 바라던 것 이상의 최고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 황홀한 여운과 함께, 발자크의 혼은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으로 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만족했고, 웃으며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서진 육체가 재가 되어서 사라졌다. 활짝 개화했던 메리가 다시 닫혔다. 세냐는 마나와 마력을 갈무리하고서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은 열려 있고, 문지기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진도 결계를 거두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단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내가 고전이라도 할 줄 알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지기라고 거창하게 앞을 가로막았으니, 비장의 한 수라도 있을 줄 알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대 흑색마탑주. 아롯에서부터 쭉 수상쩍게 굴었던 흑마법사. 발자크 루드베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수상하게 군 것치고는 허무하게 죽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7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의 성문을 지나, 본성으로 향하는 길.&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억하고 있다. 300년 전의 이곳에는 마물과 마족부터 언데드, 키메라가 득실거렸고 함정도 잔뜩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다. 문지기로 앞을 막아서고 죽은 발자크와 어전에 있을 유폐의 마왕을 제외하고, 바벨에는 다른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의미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삭막한 정원을 지나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꽃 한 송이는커녕 잡초 하나 존재하지 않는 정원. 사실 이곳을 정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군데군데 방치된 조형물들을 보면 한때는 ‘정원’으로 쓰였던 것 같기는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것들을 재현해 봤자 지금의 나를 막는 것은 불가능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너무 흘렀다. 당시에는 바벨을 돌파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그래서 더 의문이 남는다. ‘베르무트’라면 그때에도 혼자서 정원을 돌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바벨에서도 제법 고전했었다. 바벨 전에도, 살육과 참혹과 광란의 마왕과 싸울 때. 베르무트는 항상 ‘전력’을 다했다. 그것을, 연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베르무트는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짐작은 하고 있다. 확신도, 있다. 인정하고도 있다. 하지만 의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외면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베르무트가 말하지 않았나. 베르무트의 정체. 약속. 300년 전의 목적. 유폐의 마왕이 갈구하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 유진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가. 그것이 유폐의 마왕이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 기어코 유진은 바벨에 도달했다. 지금, 어전으로 향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이제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외면할 수도 없다. 유진은, 유폐의 마왕에게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정.&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을 결정하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 네가 결정하는 것이, ‘마왕’이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르겠다. 그것만큼은 짐작할 수가 없다. 유진은 힐긋 아래를 보았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이 보였다. 은근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의 전투는, 솔직히 두렵다. 그 터무니없는 대마왕을 정말로 쓰러트릴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패배해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이 두렵다. ‘나’라는 존재를 위해 아득히 이어온 염원이 허무해지는 것이 두렵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진실이 두렵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 생각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원을 지나 본성에 도달했을 때. 세냐가 불쑥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 지난 뒤에 유폐의 방패가 가로막았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뒤에 하멜, 당신이 죽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말했다. 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이 기억하는 바벨은 거기서 끝이다. 이, 문을 열기 위해- 얼마큼의 희생을 치렀던가. 유진은 굳게 닫힌 본성의 문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문지기는 없다. 닫힌 문은 그냥 열면 된다. 유진은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성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에서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 유진은 망토 안의 레반테인을 의식하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이익…….&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긴장했던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문은 쉽게 열렸다. 안은 텅 비어 있다. 300년 전에 그토록 힘들게 지났던 복도가 보였다.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먼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 바벨에서는 절대로 쇠사슬 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유진이 바벨에 침입한 순간부터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흠칫 놀라며 레반테인을 뽑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시에 성녀들과 세냐를 챙기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공격인가? 그런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징조를 느꼈을 터. 유진이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세냐는 대응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 아니, 이건 공격이 아니야. 적의가 전혀 없다. 마법인가? 아니면 권능?’&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은 유폐의 마왕의 영지.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유폐의 마왕이 주관하는 것. 유진은 긴장을 덜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일렁거리는 것들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쇠사슬이다. 어둠 속에서 무수히 많은 쇠사슬이 녹아 있다. 쇠사슬이 이 공간을 통째로 휘감고 있다. 조금씩 어둠이 희미해지면서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유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억이다. 이 공간에서 벌어졌던, 사슬에 유폐되어 있던 ‘기억’이 보이기 시작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 쓰러졌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유진은 움찔 놀라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그 순간에 어둠이 확 하고 걷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릉…….&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릉…….&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성 바벨의 최상층, 유폐의 마왕이 머무르는 어전. 300년 전에 하멜이 도달하지 못했던 장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의 풍경이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벽은 모조리 무너졌다. 천장조차도 없다. 그래서 먹구름에 의해 뿌연 회색의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붉은 번개가 쿠릉거리며 울리는 하늘의 아래. 유폐의 마왕이 서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는 쓰러질 생각이 없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모습. 복장. 300년 전, 붉은 평원에서 보았던 모습과 똑같다. 지금 이것은 300년 전의 기억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문을 들은 것은 베르무트다. 상처투성이인 베르무트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너덜거렸다. 그렇게나마 베르무트는 서 있었고, 가장 형편이 나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루하르는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앞에 모론이 쓰러져 있다. 모론은 시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처참했다. 팔다리가 죄다 뜯어지고, 옆구리도 찢어져서 내장이 흘러내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에도 모론은 아직 살아 있었다. 희미한 빛이…… 모론의 상처를 덮어준 덕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도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옆에 세냐가 쓰러져 있다. 그녀의 손에는 길쭉한 검이 쥐어져 있었다. 마법을 뜻대로 쓰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런 상황임에도 세냐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들고서 덤볐던 것이다. 그렇기에 세냐가 입은 부상은 마법사답지 않았다. 모론만큼은 아니지만, 세냐 또한 전사의 것과 같은 부상을 당하고서 쓰러져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슬리우드도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뒤에 아니스가 쓰러져 있다. 그녀의 전신은 피로 흠뻑 물들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린 것이 아니다. 신성마법과 기적을 남발한 대가. 새하얀 로브를 붉은 로브로 물들인 만큼 성흔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런데도 아니스는 마지막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스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정신을 잃었다. 덕분에 모론과 세냐가 심각한 치명상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무의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운명에 존재하지 않던 네가, 운명에 개입하여 바꾸려 했던 모든 것이 무의미다. 혹한의 대지에서 태어난 강건한 무의 화신이 자랑하던 도끼는 내게 닿지 못했다. 이 시대가 낳은 마법의 총아는 내 앞에서 마법을 뽐내지 못했다. 스스로 신성 제국이라 떠드는 광신자들이 만들어낸 성녀의 모조품도 내 마력을 밝히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늘에 떠있던 유폐의 마왕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는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듯이 괴로운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고서 거신의 뱃속에 뛰어든 신화의 주인들. 그들은 자신을 섬기는 신도와 살았던 시대를 포기하고서 ‘다음’의 멸망에 거역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무의미했다. 운명에 거역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희망과 염원을 담았겠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하지만 비웃고 싶지는 않다. 영원을 살아본 적 없는 자들이 어찌 영원을 가늠하겠나. 하멜 다이너스. 아가로트의 환생자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멸망은 그가 신성을 자각하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이 모든 뒤틀림은 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말은 베르무트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일 것이다. 혹시,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셀 수 없도록 많이 떠올리고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리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틀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잘못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사적으로 회피하던 말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레 태어난 너는, 자기 자신이란 존재와 의의를 확신했다. 구도자가 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신이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기어코 용사가 되었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너는, 혹한에 머무를 모론 루하르를 밖으로 데려갔다. 신의 뜻을 의심하며 남몰래 종말을 고대하던 아니스 슬리우드에게 신이 존재함을 확인시켰다. 세상을 모르고 복수만을 바라던 세냐 메르데인에게 무엇이 대의인지를 알려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손바닥 위에 철그럭거리는 사슬 뭉치가 나타났다. 뭉쳤던 사슬이 풀리면서 반짝이는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너는 하멜 다이너스를 만났다. 전장을 떠도는 용병. 당시로서는 위명도 실력도 부족하던 하멜을, 너는 동료로 끌어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네게 가장 필요한 동료는 바로 하멜이었을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해한다. 최초의 너는 미숙하고 나약했을 테니. 함께 싸워줄 동료가 필요했겠지. 모론 루하르와 아니스 슬리우드, 세냐 메르데인은 동료로 훌륭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부족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멜 다이너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에 어린 빛이 일렁거렸다. 그건, 영혼이었다. 저주에 의해 죽은 하멜의 영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네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멸망의 마왕은 여태까지와 달리 포악하게 날뛰고, 하멜을 위한 검이던 신검 알테어는 네 손에 들어갔지. 그리고- 월광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손에는 월광검이 쥐어져 있다. 베르무트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월광검을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인간의 흉내를 내기 위해 뜯어냈던 멸망의 일부. 하지만 너는- 결국, 스스로 파묻었던 일부를 다시 거머쥐었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조급했음이라. 너의 모든 여정이 그러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틀렸기 때문이다. 너도 몇 번이나 생각했을 것이다. 네가, 태어나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네가 하멜의 운명을 선점했기에. 하하…… 결국 어쩔 수 없던 것이기도 하지. 멸망은 하멜의 자각을 기다려주지 않았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끝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편에 지나지 않는 너는 나를 쓰러트릴 수 없다. 네가 해야 했던 것은, 용사로 나를 찾아와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미숙한 하멜과 함께 내 앞에 서는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길을…… 열어주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마왕이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너는 마왕에게 너무나 많은 자비를 구하는구나.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었는데 말이다.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하던 멸망의 마왕을 진정시켰다. 너와, 동료들이, 다른 마왕을 먼저 쓰러트리고 내게 올 때까지 이곳에 기다려 주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하멜이 신성을 자각하기를 기다려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리릭. 사슬이 다시 하멜의 영혼을 휘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운명에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운명을 거역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격과 힘을 갖춰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너는 최후의 최후에 자격이 부족했다. 하멜은 끝내 신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인간으로 죽었으니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만약 하멜과 함께 내 앞에 도달했다면. 몇 번이나 절망했던 나조차도…… 가능성에 대해 받아들였겠지. 설령 그것에 확신이 없을지라도, 실낱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에 기대했을 것이다. 기꺼이 너와 하멜을 멸망의 배 속으로 인도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끝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다시 말했다. 그는 손에 쥔 월광검을 거꾸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 내가 너를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또한 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없듯, 멸망의 마왕 또한 나를 죽일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결속되어 있지. 영원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네 손에서 하멜의 영혼은 빼앗을 수 있을 거다. 네가, 모론을, 세냐를, 아니스를, 죽이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묻지,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내게서 하멜의 영혼을 빼앗아 무엇을 할 텐가? 죽은 자를 당장 되살리는 것은 언데드로 만드는 것뿐. 하지만 그 방법이 하멜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신성을 박탈하는 것은 너도 알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 되살리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악! 월광검이 베르무트의 가슴을 꿰뚫었다. 베르무트는 자신의 손으로 월광검을 몸에 박아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에 또다시 절망한 네가,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을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이 꿰뚫렸는데도 베르무트의 입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저번과 똑같이, 그리고 여태까지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겠지. 네 몸에 엮은 무수한 인과와 함께, 네 사슬로 결박한 모든 것과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내게는 옳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는 옳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금색 눈동자가 회색으로 물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는 이번 시대가 마지막이다. 내게는 지금 이러는 것이 옳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달라 청하지 않겠다. 네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유폐의 마왕의 미소가 바뀌었다. 그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면서 입술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고? 어떻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영원의 저주를 받아들이며 끌어온 사슬을 끊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길한 마력이 베르무트의 몸을 휘감았다. 일렁거리는 마력은 마치 불꽃이자 갈기처럼 보였다. 베르무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유폐의 마왕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존재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네 무수한 사슬을 끊어갈 수는 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을 너무 과신하는군. 파편에 지나지 않는 네가 과연 할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ㅡ푸확! 불꽃처럼 일렁거리던 멸망의 마력에 다른 색이 더해졌다. 무수히 많은 색이 불꽃에 섞여 일렁거렸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를 휘감은 마력을 직시하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작해야 파편인 것은 아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베르무트를 잘못 재단했음을 깨달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너는…… 무엇을 바라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세상의 멸망을 막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용사로서의 갈망인가? 아니면…… 멸망의 분신으로서의 갈망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용사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나와, 모두의 갈망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잠시 침묵했고, 이윽고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절망하지 않았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자비를 구걸했다면 상대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최악의 사태에서도, 용사가 아니면서도 용사라 추앙받던,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구하던 존재는 지극히 용사답고 인간다운 행동을 선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유폐의 마왕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저러한 모습은 아득한 옛날에 절망하여 져버렸던 것.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내게 증명해 봐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엉키는 색을 두른 베르무트가 앞으로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베르무트를 죽일 수 없고, 베르무트도 나를 죽일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극도의 고통으로 정신을 마모시키는 것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내게 있어 고통이란 오래전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익숙해졌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고통은 나를 결코 마모시킬 수 없다. 애초에 내게는 마모될 만한 정신조차도 거의 남지 않아 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거리는 사슬 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나와 다르다, 고…… 생각했다. 베르무트의 근원과 달리, ‘그’라는 인격은 취한 모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흡사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우두커니 서서 모든 소리를 들었다. 소리와 함께 나타난 유폐의 마왕은, 유진과 세냐, 성녀들의 시선 속에서 계단을 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제로 그곳에선 베르무트는 몇 번이나 좌절하고 쓰러지려 하였지. 하지만 기어코 다시 일어서서, 내게 덤벼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바벨의 중심이자 최정상. 어전.&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베르무트는, 스스로 말했던 대로…… 나의 사슬을 끊어내고 있었으니. 죽지 않고, 죽일 수 없고, 좌절하지 않고.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단 높은 곳에 선 유폐의 마왕이 몸을 돌렸다. 그는 이곳에 도달한 모두를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을 맺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에 짊어진 수많은 사슬이 옥좌가 되었다. 유폐의 마왕은 스스로 만든 사슬 옥좌에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다이너스의 혼을 돌려주었다. 모론 루하르와 세냐 메르데인, 아니스 슬리우드를 죽이지 않았다. 전쟁을 멈췄다. 베르무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이 세상의 유예로 삼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성녀가 입술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런 약속을 맺은 겁니까? 그 약속으로 당신은…… 무엇을 얻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문한 것은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이 시대에 태어났다. 300년 전의 약속이 없었다면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희망.”&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페의 마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은- 영원을 군림해 온 대마왕의 입에서 나온 대답처럼 들리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으로 얻은 것은 희망이다. 지금의 세상이 끝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갈 필요가 없으며, 멸망의 마왕이 사라지는 것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전쟁을 일으킨 것은…… 당신이잖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요에 의한 일이다. 언제나 그러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령 지금 세상이 멸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전의 세상이 그랬듯이 스러진다고 해도. 그럴지라도, ‘약속’에서 얻는 것은 있다. 바로 가능성과 기억이다. 이번 시대는 특별했으니까. 내가, 다음으로 간다면. ‘전’ 시대를 회상하며 새로운 흐름을 유도할 수 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알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으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당연히, 알았겠지. 하지만…… 방금 봤던 네 태도. 마치, 베르무트와 이전부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겼던 눈이 뜨였다. 칙칙한 눈동자가 옥좌에서부터 유진에게 내리 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이곳, 바벨의 어전에서 맺은 약속은 ‘두 번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득.&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상했던 대답이지만, 직접 듣고서 확정되었을 때의 충격은 가볍지 않았다. 너무 강하게 씹은 어금니가 박살 나고 잇몸에서 피가 터졌다. 꽉 말아 쥔 주먹에서도 피가 뚝뚝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첫 번째 약속은- 카자드였지. 베르무트가, 인간의 흉내를 내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최초로 뜯어냈던 곳. 나는 그곳에서 베르무트를 만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육의 마왕이 토벌당하지 않은 시점이다. 북쪽 설원에서부터 이곳 알카르타까지, 마경의 최전방이 살육의 마왕의 영지였다. 그는 마왕 중에서 가장 서열이 낮았기에 침공의 첨병으로 쓰였고, 대륙의 반발에 가장 먼저 얻어맞았으며, 마왕 중에서 가장 먼저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자드는 그 살육의 마왕의 영지로, 마왕성과 가까운 곳이다. 다른 마왕이 영지를 침범하는 것. 그런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는 거리낄 일이 아니었다. 살육과 참혹과 광란은, 마왕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마왕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신비로운 존재였지. 마왕이 아니고, 마족이 아니고, 인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렇기에 인간이 되기를 바라던 존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 순간의 전율을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살아온 영원. 몇 번이나 반복한 세상에서, 베르무트 같은 이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시대에서만 존재하는 커다란 변수고, 가능성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이 흔들렸다. 공간에 녹아든 사슬이 움직였다. 마나조차 기억할 수 없도록 유폐한, 최초의 약속이 드러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전의 풍경이 바뀌었다. 탁한 공기, 칙칙한 시야, 깊숙한 지하의 풍경.&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이 장소를 알고 있다. 그가 지나왔던, 이전에 멸망했던 시대. 멸망의 마왕을 숭배하던 이들이 세운 제단. 시대가 멸망하고, 바다에 휩쓸리고, 다시 떠올라 조립되면서 지하에 파묻힌 것인가.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많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 제단은 조금의 의미도 신비도 갖고 있지 않다. 아무리 숭배한들 멸망의 마왕과 이어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에 이르러서 이 제단은 그저 오래된 유적일 뿐이다. 아무리 제물을 바치고 기도해도 ‘이런’ 일은, ‘저런’ 존재는 나타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존재에게는 의문을 품을 가치가 있다. 아니. 최근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의문을 품을 가치가 있다. 유폐의 마왕이 반복한 영원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이 너무 많이 날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는 이런 적이 없었다. 아주 날뛰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 시대는 특히나 난동이 잦다. 그렇다고 난동을 지속하는 것도 아니다. 단발적으로 날뛸 뿐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그 일대를 휩쓸고서 사라져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난동뿐만이 아니다. 이번 시대에서 멸망의 마왕은 ‘계약’을 맺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 멸망의 마왕은 권속 따위를 두지 않았다. 머나먼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에 이르러서 그 존재에게는 권속을 두고자 하는 의지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기묘하게도 이번 시대, 아니, 최근 들어서는 계약을 남발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존재가 입을 열었다. 방금의 그것은 불길한 기운이 뭉쳐진 탁한 안개처럼 보였지만, 목소리를 내뱉은 순간에 다른 형상으로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잿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 이름을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알던 이름이고, 다시는 들을 일이 없을 이름. 그렇기에 드물게도 유폐의 마왕은 격정을 내비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리릭! 공간에서 튀어나온 사슬들이, 자신을 ‘베르무트’라 말한 소년의 사지를 결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내뱉었다. 그의 표정엔 온갖 감정들이 나타나 뒤섞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거리며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로 묶은 존재. 마주해서 느끼는 존재감. 아니,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올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부터, 유폐의 마왕은 저 존재가 무엇인지를 짐작했다. 다만- 저렇게 인격 비슷한 것을 가지고서, 저 ‘이름’을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긴 한숨을 내쉬며 사슬을 거두었다. 그는 다시 소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작해야 열댓 살 정도 되었을까. 잿빛의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가 발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유폐의 마왕은 먼 옛날을 생각했다. 물론 유폐의 마왕이 기억하는 ‘그’는 소년의 모습 따위는 아니었지만, 그가 어릴 적이라면 저것과 똑같은 모습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멸망의 마왕이 이전과 다르게 움직이나 했거늘. 네가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로군. 하긴, 이러한 일은 그가 겪어 온 영원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 떨어져 나온 만큼 채워 넣어야 하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중얼거림에 자신을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 말한 소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유폐의 마왕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베르무트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무엇을 바라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끝.”&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순이군. 네가 떨어져 나온 것으로 멸망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현상처럼 나타나던 멸망은 이제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날뛰고 있다. 아마 머잖아 멸망이 강림하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라면 막을 수 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유폐의 마왕과 마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뛰는 멸망에 사슬을 묶고 억누르는 것이 네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왜 그래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되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편인 너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멸망의 마왕과…… 대적할 생각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까지 듣지 않고서 돌아온 대답.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불쾌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저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더욱 베르무트에게 흥미를 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멸망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너는 그것을 바라겠지만, 그것이 이상은 아닐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이상을 이뤄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멸망을 끝낼 방법을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손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당장 그 방법을 실행할 수는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시간을 필요로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이야기는, 네 존재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흥미롭다. 하지만 무턱대고 시간을 달라는 말은 곤란하군. 내가 왜, 네게 시간을 주어야 하나? 그 시간을 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하던 말을 멈췄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무엇을…… 할지는, 묻지 않으마. 무지로 관망할 필요가 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있다면 멸망을 끝낼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앵무새처럼 말이 반복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르무트의 의지는 강력히 멸망의 끝을 바라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다시 침묵했다. 멸망의 끝. 저 말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무수한 반복을 보아온 그는 이러한 변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질문했다. 이런 주제의 이야기.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설령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할지라도, 이러한 경험 자체가 유폐의 마왕의 영원을 가꿀 것이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육과 참혹과 광란을 죽이고, 너를 찾아갈 때까지의 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네가 타고난 본성과 힘이라면 당장에라도 그럴 수 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고 있던 손이 가슴에 가까이 다가갔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가 무엇을 하려는 일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이윽고 베르무트의 손이 제 가슴으로 쑤욱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지고…… 싶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존재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하지만 거짓은 없었다. 베르무트는 진심의 혐오를 담아서, 몸속에 존재하는 ‘멸망’을 뽑아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에서 뽑아낸 멸망은- 투박한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색 없는 평범한 검. 누구나 쓸 수 있을 법한, 어느 전장에건 있을 검. 하지만 그 투박한 생김새와는 달리, 검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불길하면서 파멸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뽑아낸 멸망을 제단에 꽂고서. 베르무트는 숨을 헐떡거리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으로, 마왕들을…… 죽이고, 널 찾아가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약속이다. 내가…… 너를 찾아간다면. 유폐의 마왕. 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끝을 보는 것에 협력이라도 하라는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마왕인 내게 너무 많은 자비를 구하는군. 멸망을 사슬로 묶고, 네가 바라는 만큼의 시간을 준 것만으로는 부족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처음부터 마왕이었던 것은 아니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립고 덧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래, 처음부터 마왕인 것은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라는 시간은 주마. 하지만 무조건 협력은 하지 않는다. 시간을, 줄 뿐. 다음의 협상은…… 하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네가 살육과 참혹과 광란을 쓰러트린 뒤. 바벨에 도달할 때 하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후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겹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자드 지하가 사라지고 바벨의 어전으로 돌아왔다. 계단 위의 사슬 옥좌에 앉은 유폐의 마왕이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북쪽 설원으로 향했다. 그가 설원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너희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경으로 옮겨지던 노예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린 소년이 마족과 흑마법사를 죽이고 노예를 해방한다. 세상은 그러한 영웅담에 목말라 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의 설원은 노예를 비롯한 약탈한 물자를 운송하는 주요 교역로로 쓰였다. 바야르를 비롯한 부족들은 최대한 마족과 맞섰지만, 일통되지 않고 각자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설원 부족들은 마족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시점에서 베르무트가 나타났다. 노예를 해방하고, 바야르와, 모론과 결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년이 청년이 될 정도의 짧은 시간. 베르무트는 바야르와 다른 부족들의 힘을 하나로 모았고, 북쪽의 노예들을 해방했다. 그리고 용사의 ‘후보’가 되어, 유라스에 초빙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다 베르무트의 의도였다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상하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되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많은 것을 설계했지. 3명의 마왕을 죽이고 내게 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될지. 누구를 동료로 삼아야 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갈라져 나오기 전부터 안배했을 거다. 멸망의 속에서, 세상을 보면서…… 누구에게 가능성이 있는지. 누구를 동료로 삼아야 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분신, 이라고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300년 전 이 자리에 있었다. 패배를 겪고 절망했다. 진실을 알리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베르무트를 원망했던 적도 있다. 베르무트에게, 죽을 뻔한 적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눈썹을 찡그리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와 멸망의 마왕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을 것임은 진즉부터 알았다. 하지만 세냐는 ‘어떻게’ 베르무트가 멸망의 마왕에게서 떨어져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시에 직감했다. 베르무트와 멸망의 마왕이 분리된 것. 그것은 멸망의 마왕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될 것이다. 유폐의 마왕이 굳이 약속을 맺어준 것은, 그 또한 베르무트를 통해 멸망을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을 들은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유진을 쳐다보았다. 세냐는 드디어 이해했다. 크리스티나도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니스는 탄식을 흘렸다. 그제야 그녀는, 왜 유진이 베르무트의 존재에 대한 추측을 그토록 피해왔는지를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에게 새긴 상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그 상처에서 태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범벅의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중심. 아가로트가 베었던 자국. 베르무트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알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의 마안을 통해 베르무트와 마주했을 때. 베르무트는 자신의 정체를 직접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 베르무트와 만났을 때. 그 시점에서부터 유진은 이미, 자신이 상상하는 것이 모두가 진실임을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외면했다.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베르무트에게 정체를 들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놈의 정체를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베르무트가 어떤 존재건, 어떻게 태어났건, 놈은 베르무트다.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주먹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베르무트에게 말했었다. 정 모든 것을 알리고 싶다면. 나중에,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 빌어먹을 의자에서 베르무트를 일으켜 세우고, 다 같이 흠씬 두들겨 팬 뒤에 듣겠노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는 없다는 것은 알았다. 베르무트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유폐의 마왕을 넘어야 한다. 이곳 바벨의 어전에서 모든 진실을 말하고, 유진이 결정하는 것이 마왕의 마지막 시련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첫 번째 약속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 네가 베르무트와 함께 왔다면…… 멸망의 끝을 위한 협상을 할 수 있었겠지. 베르무트가 바랐던 대로 너희를 멸망의 뱃속으로 인도해 주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도박일지라도, 나는…… 본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도박수를 걸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와 두 번째 약속을 맺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멸망의 안으로 돌아갔다. 멸망에 뒤섞여가면서 멸망을 붙들었다. 그리고 나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멸망을 늦추며 얻은 유예. 설령 최후에 멸망할지라도, 지켜볼 가치는 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짧은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을…… 준다. 버는 것은 베르무트고, 나는 전쟁을 멈추기만 하면 될 뿐. 그렇게 주어진 시간은 의미가 있었다. 세상은 300년 전보다 성장했다. 전쟁시대 이상으로 대륙의 의지는 강건하다. 그리고 하멜, 환생한 너는 신성을 쥐고서 바벨을 올라, 내 앞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이라면 이것만으로 조건이 충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베르무트가 이곳에 없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이 끝이 아니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적의를 숨기지 않는 눈동자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 싸우고 싶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 중에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유진 라이언하트의 선택에 달려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모든 것은 결국 너를 위한 것이니 말이다. 멸망에 깊은 상처를 남긴 아가로트의 환생. 모든 고신의 염원을 잇는 존재. 베르무트가 자신을 갈아 넣으면서 이룬 하멜의 환생. 빛과 모든 신의 대행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시대 이후 300년은 오직 유진을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앞으로 영원을 더 살아갈지라도, 지금의 너 같은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의심해야 한다. 네가 정말로 멸망을 끝낼 수 있는가? 베르무트가 곁에 없는 네가,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할지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턱을 괴었다. 높은 곳의 옥좌에서 아래를 오시하는 모습은 지극히 마왕다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결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결해서, 내게 혼을 바쳐라. 너희도 마찬가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의 시선이 세냐와 성녀들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리고, 아니스 슬리우드. 너희의 혼은 무척이나 가치가 있지. ‘다음’으로 데려가기에 차고 남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가 자발적으로 혼을 바친다면 그만큼의 대우는 해줄 것이다. 기억을 보존하고 싶나? 그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지, 알고 있지 않나? 광란의 마왕은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너희가 자결하지 않아도…… 나는 너희 모두를 죽일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내가 너희의 기억을 보존해 줄 이유는 없지. 그리고 너희를 직접 죽이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아. 그래 버리면 영혼의 순도가 조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그것을 피하고 싶다. 가치가 높은, 다시는 없을 영혼들이니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으로 넘어가겠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를 마족으로 환생시키겠다는 말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크리스티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둘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조건 마족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거느린 영혼을 언제나 다음으로 데려가 왔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족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냥, 데리고 갈 뿐이다. 몇 번이나 그것을 반복해 왔지. 버려도 되는 것은 버리고, 새로이 채우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약속할 수 있겠구나. 내가 살아갈 영원에서, 너희의 혼은 결코 버릴 일이 없을 것이다. 바란다면 무수한 윤회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마. 만약 그 영원이 버겁다면- 기억을 잊게 해줄 수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유폐의 마왕을 제외한 모두가 침묵했다. 마왕은 침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속삭임을 계속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운명은 반복되게 마련이다. 기억을 보존하지 못한 아이리스가 운명에 이끌려 광란의 마왕이 되었듯, 유진 라이언하트, 네게 아가로트의 반지가 흘러갔듯, 이바타 자하부가 네게 호감을 가졌듯, 누아르 제벨라가 네게 집착하였듯.”&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공간이 쩌억 갈라지며 다른 풍경을 비추었다. 바벨 아래의 전장. 신군과 마군의 전투가 모두에게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곳의 존재 중에서 너희와 각별한 인연을 가진 자들이 있겠지. 전장에 없는 자 중에도. 그래, 유진 라이언하트. 네 친부는 어떠한가? 널 가문에서 돌봐 온 시종은? 너를 섬기는 숲의 엘프들은? 그 외, 너를 우러르는 수많은 신도들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인연은 다음 시대에서도 엷게나마 이어지게 마련이다. 스쳐 지나갈 뿐이라도, 지금이 무의미하지는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눈동자가 빙글 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만약, 너희가 자결하면서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너희와 인연을 맺은 존재들도 거두어 줄 것이다. 너희의 혼에는 그럴 가치가 있고, 너희와 인연을 맺은 영웅들에게도 그럴 가치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노골적인 유혹이다. 지금의 세상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자는 말. 모두와 똑같이 과거를 기억하고, 다음 시대를 살아가며, 죽고, 또다시 다음으로. 그것을 반복하자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너는, 멸망을 끝내지 않겠다는 것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 없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와의 대화로 알았을 텐데. 나는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없고, 멸망의 마왕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라는 희망을 유폐의 마왕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에서 맞닥트린 망령은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 죽으면, 나는, 절대로 멸망의 마왕을 죽일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령에게, 미련을 느끼면 그냥 두고 가라고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게 죽으면, 나는, 절대로 베르무트를 구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에,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구한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멸망의 파편 정도가 아닌 분신이다. 그리고 지금은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면서 동화되어버렸지. 멸망의 마왕을 죽인다는 것은, 베르무트를 죽인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이 아니라면 도전조차 할 수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대답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씹고서 메리를 쥐었다. -화아아악……! 메리의 꽃잎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베르무트 님과 재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한 번은 얼굴을 보아야겠습니다. 그 고귀한 낯짝을 제 손으로 구겨버리고 말겠다고, 추하게 코피를 쏟게 만들겠다고 오래전부터 결심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머리에 떠오른 천사의 고리가 빛을 발했다. 등에서는 여덟 장의 날개가 펼쳐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위한다면 멸망을 쓰러트릴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게 있어서 유진 님과의 만남은 기적입니다. 이 찬란한 기적을 당신의 사슬에 바쳐 다음으로 잇는 것? 제가 태어나고, 유진 님과 만난 세상을 버리는 것?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도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 유폐의 마왕은 돌아오는 대답들에 웃으며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구하고, 멸망을 죽이고, 세상까지 구하겠다는 건가? 욕심이 과하군. 불가능하다. 인연의 결속과 미래를 포기할 가치가 있나? 영원에는 여러 변수가 나타나곤 하지. 너희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어쩌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멸망을 끝낼지도 모르지. 어쩌면 멸망이 스스로 사라질지도 모르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왔으니까. 내가 그를 해내기를 염원한 자들이 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를 해내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넘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릭, 끼리릭…… 짊어진 인과의 사슬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다시 망토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능하다고 생각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당장 대답하지 않고 옆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눈이 마주쳤다. 세냐는 뭘 굳이 쳐다보냔 듯이 눈을 찡그리더니, 로브를 살짝 들춰서 왼손을 보여주었다.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이 올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스는 세냐와 마찬가지로 확인을 구하는 시선이 언짢았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유진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언짢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유진의 시선에 더욱 큰 믿음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레반테인을 옆으로 들었다. ㅡ화륵. 유리의 칼날 안쪽에서 흘러나온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어떻게 생각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질문은 유폐의 마왕에게 향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전에 내려앉은 어둠에 커다란 균열이 갔다. 순식간에 번져나간 균열이 떨어져 내리더니, 이윽고 와장창 부서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리석은 질문이다,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덥수룩한 수염에 장발. 거구의 사내가 어둠에 뛰어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과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유진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쿠웅. 유진의 옆에 내려선 모론은 고개를 들어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를 이루기 위해 유폐의 마왕과 싸워야 한다면, 당연히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끄트머리가 조금 잘린 거대한 도끼가 모론의 어깨에 걸쳐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옥좌는 더 이상 없다. 유폐의 마왕은 텅 빈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포의 모론 루하르. 재앙의 세냐 메르데인. 지옥의 아니스 슬리우드가 저곳에 있다. 모조화신을 넘어, 참된 성녀에 도달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저곳에 있다. 전쟁신 아가로트이자 몰살의 하멜이었던 유진 라이언하트가 저곳에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긱, 끼기긱…… 사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전을 감싼 어둠이 흔들렸다. 공간에 녹아든 모든 사슬이 유폐의 마왕에게 연결되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 헬무드의 마력이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되었다. 헬무드 전역에 퍼져나가며 제국을 움직이던 모든 마력이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궁.&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한걸음 계단을 내려왔다. 터무니없는 위압감이 모두를 압박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상대는 영원을 살아온 대마왕이자 헬무드의 황제. 저만한 존재감은 당연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과는 다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어전에 도달한 이들은 별 볼 일 없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아득한 강자였지만, 유폐의 마왕의 시선에서는 하찮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사명감은 봐줄 만했다. 신념은 좋았다. 증오는 훌륭했다. 독기는 멋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어떤가? 사명감도, 신념도, 증오도, 독기도, 모든 것이 과거보다 대단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르다고 해서, 결말마저 바꿀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항상 그래 왔듯. 모론이 앞장서서 나아갔다. 그는 훅 숨을 내뱉으며 도끼를 양손으로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드득……! 도끼의 자루를 으스러트릴 듯이 강하게 쥐어 온 힘. 도끼가 덜덜 떨리면서 빛을 발했다. 유진의 신력이 모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목소리는 귀에서 들리는 아우성과는 달리 머릿속에 새겨졌다. 검은 안개의 목에 박힌 자벨의 칼날을 회수하던 시엘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움찔 놀라면서 하늘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무죽죽한 하늘의 중심에 뜬 마왕성 바벨. 이 목소리는 시엘에게 있어서 계시 그 자체다. 바벨에 돌입했던 유진이, 신이, 시엘에게 계시를 내린 것이다. 이 계시에서 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 시엘은 당황하지 않고서 즉시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근처의 시안이 즉시 다가왔다. 시엘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두 눈을 감았다. 시안은 뺨에 묻은 핏자국을 손등을 닦으면서 시엘의 근처에서 엄호를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움직인 것은 시안만이 아니었다. 길레이드와 휘하 백사자 기사단이 즉시 시엘을 중심으로 한 원진을 구성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닫힌 왼쪽 눈의 주변에서 검은 전류가 흘렀다. 시엘은 몇 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감은 눈을 다시 떴다. ㅡ화아악! 시엘의 시선이 닿은 상공에 시커먼 구체가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투박하고 큼지막한 손이 구체의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 몇 번인가 허공을 휘저었다. 이윽고 나무 기둥처럼 굵은 팔과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봉두난발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머나먼 북쪽의 레헤인야르, 용감한 모론이 이곳에 왔다. 그는 조금의 당황과 긴장도 없는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살필 필요도 없었다. 먼저 뻗었던 손끝에서 느꼈던 대기의 진동. 온갖 아우성과 소음이 뒤섞인 전쟁의 소리. 모론의 수염이 푸들거리며 떨렸다. 암흑의 문을 빠져나온 모론이 전장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욱신거리는 눈자위를 감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실패의 가능성은 없었다. 몇 번 시험도 거쳤다. 하지만 계시의 순간에 정확하게 모론을 불러냈다는 것이 시엘을 안도시켰다. 그녀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마나가 새로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며 모론에게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주변, 그의 영역에 진입한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시엘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수염. 모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모론이, 과거 몇 번이나 보았을 때처럼 호탕한 표정이 아닐 것임은 직감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한 수염 안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진짜 전장이다. 목숨과 목숨이 부딪치는 곳이다. 모론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거무죽죽한 하늘의 중심. 300년 전에 정복하지 못한 마왕성 바벨이 보였다. 바벨을 눈에 담은 순간, 모론의 육체가 전율했다. 덜덜 떨리는 상체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아아아아아아ㅡ!”&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렁쩌렁한 함성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모론의 근처에서 머뭇거리던 시엘과 시안은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전장이 멈췄다. 신군과 마군 모두가 모론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 커다란 발이 대지를 한 번 밟았다. 그 발구름은 지진이 되어 전장을 흔들었다. 모론은 다시 한번 전장을 둘러보았다. 마군의 거인들을 가로막는 바야르의 후손들이 보였다. 나이트마치에서 보았던 세대의 영웅들은 전장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마군과 맞서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루하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이 담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전쟁시대를 겪었던 마족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두려움이 번졌다. 그들은 용감한 모론보다 공포의 모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름이 과거의 전장에서 얼마나 공포스런 이름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쩌라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전쟁을 통해서 시대의 패권에 가까이 가려 하는 패기 넘치는 젊은 마족들은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론 루하르란 수백 년 틀어박힌 은둔자일 뿐이다. 세냐나 유진과 달리 최근에 활약을 보인 적도 없다. 지금만 해도 저 목소리는 커다랗기만 할 뿐 그 외에는 특별함은 느낄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전대의 퇴물이라고 해도 모론 루하르의 목은 가치가 높다. 달려들기 전에 먼저 살의가 모론에게 닿았다. 그 깜찍한 살의에 모론은 친히 도끼를 쥐어 호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득, 우드드득……! 도낏자루를 쥔 손가락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가 움직였다. 푸확! 휘두른 참격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살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모론에게 살의를 품은 마족 백 명의 목이 일제히 하늘로 떠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불러내 주어 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장의 한복판이지만 모론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뒤를 돌아 시엘을 보았다. 엉거주춤 선 시엘을 향해 모론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도 거하게 날뛰어보고 싶다만, 내 전장은 이곳이 아니구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이 순간에도 모론의 머릿속에서는 바벨의 상황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모론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베르무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해방한 포로들 앞에서 검을 들고 있던, 사자라기보다는 늑대를 닮은 시절의 베르무트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변하는 것은 없다. 베르무트의 본질이 어떻건, 모론에게 있어서 베르무트는 베르무트일 뿐이다. 모론은 묵묵히 시선을 거두어 하늘을 보았다. 마왕성 바벨. 모론은, 오늘 저곳에서 살아서 물러설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론이 다짐한 것은 승리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나를 부르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둑, 우두둑……! 모론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시엘과 주변인들은 이후 벌어질 일을 직감하고서 즉시 뒤로 물러섰다. 그 행동은 옳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 폭음과 함께 대지가 움푹 가라앉고, 모론의 거구가 바벨까지 도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앙! 모론은 바벨의 벽을 부수고 침입했다. 그제야 시엘은 벌리고 있던 입을 가까스로 다물을 수 있었다. 잠시 멈췄던 전장은 모론이 도약한 직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엘도 다시 자벨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유진의 계시는 들리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모론 님이 불려졌다는 것은, 유폐의 마왕과 전투가 시작된다는 뜻이니까. 위대한 베르무트를 제외한, 과거에 패퇴했던 영웅들이 시간을 넘어 다시 유폐의 마왕에게 도전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길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간부들 대부분이 그렇듯, 시엘 또한 유폐의 마왕의 패배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만큼 유진의 패배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불안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폐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유진 혼자뿐인 것도 아니다. 현명한 세냐와 신실한 아니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그리고 이제는 용감한 모론까지 바벨에 향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전장을 맡은 간부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바벨에 향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괜찮다. 패배가 아닌 승리를 믿어야 한다. 이곳의 전투에 집중해야 한다. 간부들의 역량 차이는 압도하고 있다만, 마물과 흑마법사, 언데드 등까지 동원한 마군의 전력은 전황을 팽팽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후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하늘이 시커멓게 바뀌었다. 바벨을 휘감은 어둠이 마치 먹물처럼 번져가고 있다. 유진이 만든 태양은 건재하여 신군에게 힘을 내리고 있다. 바벨도 마찬가지였다. 유폐의 마왕이 거둬들인 제국을 움직이던 마력이, 전장의 마군들에게 부여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이 없는 힘에 마족은 희열에 몸을 떨었다. 마물들은 마치 진화를 거듭한 것처럼 몸뚱이부터 변화했다. 흑마법사들도 오직 힘만으로 벽을 뚫었으며, 그들이 일으켜 세운 언데드들도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심지어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인간이나 용병들마저 마력의 은혜를 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의 크기가 다르다. 유폐의 마왕의 마력은 수백만에 달하는 마군에게도 당연하단 듯이 마력을 퍼줄 수 있다. 간부진의 역량 차이가 단순히 힘만으로 좁혀질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럴……!”&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가 당황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력의 태양 근처, 마이스의 배틀쉽을 두른 라이미르아가 보였다. 몇 번씩이나 브레스와 마법을 폭격한 라이미르아는 광명사제단의 정예인 은광을 태우고서 전장에 기적을 내리고 있었으나, 지금 퍼져 나가는 마력에 의해 비틀거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아앙!&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벨이 흔들렸다. 라이미르아는 놀란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고도를 유지한 라이미르아와 그 위에 탄 사람들이 바벨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을 부수고 들어갔던 모론이, 다시 바벨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길레이드는 그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벨의 영역 바깥까지 날아갔던 모론을 추격하듯, 부서진 벽 안쪽에서 쇠사슬이 쏘아져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꽈지직! 내지른 주먹이 사슬을 정면에서 으스러트렸다. 발 디딜 곳 없는 하늘이지만 모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모론은 주먹으로 부수어 튕겨낸 사슬을 스스로 붙잡아 당기는 것으로 다시 바벨의 안으로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등신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의 어전. 유진은 한심하단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기세 좋게 달려든 주제에 설마 일격에 나가떨어질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게 왜 무식하게 달려들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를 활짝 펼친 세냐도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로브의 안쪽에서 환상의 마안을 준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등신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손에 움켜쥔 사슬을 단단히 잡으며 대답했다. 얻어맞은 일격.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날아갈 정도였지만 상처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 모론의 손등과 팔에 굵은 혈관이 돋고 근육이 꿈틀거렸다. 모론은 계단의 중간에 멈춰 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끌어내리고 싶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공간마저 붙잡아 구겨버리는 모론의 힘은, 붙잡은 사슬과 이어진 유폐의 마왕은 미동조차 시킬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 끼릭.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모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끼기긱……! 모론의 발이, 유폐의 마왕 쪽으로 끌리기 시작했다. 모론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사슬을 단단히 붙잡았다. 뚜두둑……! 사슬에 쓸리는 손아귀에서 불꽃마저 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 모론의 발이 바닥을 짓눌렀다. 앞으로 기울었던 몸이 뒤로 젖혀지고, 쭉 뻗었던 팔이 접혔다. 끌려가던 사슬이 순식간에 모론 쪽으로 당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과 동시에 유폐의 마왕이 계단에서 날아올랐다. 그는 사슬의 망토를 날개처럼 펼치면서 어전의 중심으로 떨어졌다. 모론의 도끼가 떨어지는 유폐의 마왕을 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를 휘둘렀다. 닿았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정작 모론의 ‘손’은 닿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모론의 도끼는, 유폐의 마왕의 주변을 휘감은 사슬의 앞에서 멈췄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한가운데에서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을 들었다. 길게 세운 검지가 모론에게 향했다. 검은색 빛이 반짝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은 반짝임에서 사슬이 튀어나왔다. 일직선의 사슬에 얻어맞은 모론이 뒤로 날아갔다. 아찔한 충격이 내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모론은 이를 악물고서 버텼다. 그는 날아가는 몸에 제동을 걸면서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슬이 마치 창처럼 모론에게 쇄도했고, 내리찍은 도끼가 사슬을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신같이 굴지 말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몸을 낮추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가슴 부근에서 태어난 신화가 전신을 뒤덮었다. 마력이 가득한 어전에서 유진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 불빛에 공명하여 성녀들이 양팔을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악! 마력의 한복판에서 밝은 빛이 태어났다. 아니스가 기도문을 읊고 크리스티나가 펼친 양팔을 한곳에 모아 기도를 올렸다. 태어난 빛이 무수한 고리가 되어 마력을 밀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300년 전 그녀는 이 어전에서 희미한 빛을 불러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불편 없이 빛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신력 그 자체인 유진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용히 바닥에 내려선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밝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손가락이 성녀들에게 향했다. 그 즉시 유진의 발이 바닥을 박차 성녀들의 앞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면을 가로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환한 빛 속에서 마력은 존재하고 있다. 검게 번진 마력이 성녀들을 덮쳤다. 그 순간 프로미넌스의 불꽃이 성녀들을 휘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가 빛이 되어 유진과 공명했다. 유폐의 마왕은 환한 빛과 함께 펼쳐지는 날개에 감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유진이 ‘어떻게’ 싸우는지 목격한 적이 없다. 제벨라 시티에서의 전투는 누아르의 방해로 관측할 수 없었고, 문지기로 나선 발자크는 유진이 아닌 세냐에게 죽었기 때문이다. 만약 발자크가 세냐가 아닌 유진에게 죽었을지라도, 발자크로서는 유진의 진심을 조금도 끌어내지 못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과 결투할 때보다 성장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지 않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유폐의 마왕은 당연히 유진이 레반테인을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간극이 좁혀지는 순간에도 유진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유폐의 마왕은 빙그레 웃었다. 빛과 이어진 촉매인 레반테인은, 지금은 검의 형상을 취하지 않고서 유진의 가슴에 깃들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건조한 평가에 화답하듯 유진의 손이 들렸다. 손을 감싼 불꽃이 검이 되었다. 최초의 일격부터 닿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일단 유진은 손에 쥔 검을 그 목적에 걸맞게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람에 크게 뜬 눈앞에서 불꽃이 흩어졌다. 신화를 부순 것은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었다. 유폐의 마왕의 발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유진은 잠깐이나마 유폐의 마왕을 볼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직감이 대응하게 만들었다. 유진은 직감에 따라 손을 휘둘렀다. 흩날린 불씨가 무수한 칼날이 되어 공간을 찢어발겼다.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거나, 결계를 만들어 방어하지 않았다. 천천히 뻗은 손이 쇄도하는 칼날을 부드럽게 스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만으로 칼날의 궤적이 바뀌었다. 신력과 마력이 닿은 것인데도 반발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닿았는데 닿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유폐의 마왕의 수법은 유연했다. 궤적이 뒤틀린 덕에 유진과 유폐의 마왕 사이가 활짝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외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유진은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에 즉시 주먹을 날렸다. 그것과 동시에 모론은 유폐의 마왕을 등 뒤에서부터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늦게 출발한 손이 유진의 주먹과 만났다. 정면에서부터 단단히 가로막는가 싶더니, 활짝 펼친 손은 조금의 강건함도 없이 유진의 주먹을 감싸고서 뱀처럼 팔뚝을 휘감았다. 등 뒤에서 떨어지는 도끼. 사슬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손이 도끼를 받아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전법은 근접전을 허락하지 않는 마법사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혹은 대부분의 마족과 마왕이 그런 것처럼, 압도적인 마력을 바탕으로 한 고화력 중심의 전법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300년 전에 유폐의 마왕과 직접 싸웠던 세냐와 아니스, 모론도 그렇게 말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다르다. 유폐의 마왕이 말한 것처럼 이건 너무 의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초근접전. 무한한 마력을 바탕으로 한 압도적인 힘이 아닌, 상대의 힘을 이용하거나 모조리 흘려내는 무(武).&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되돌아온 힘에 모론의 무릎이 굽혀졌다. 유진은 얽힌 팔을 즉시 빼내려고 했지만, 그러기 전에 유폐의 마왕의 손이 먼저 유진의 가슴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투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활짝 핀 손바닥이 유진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고, 유진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쿨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부에서 퍼진 묵직한 충격. 입에서 내장 조각이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유진은 목에 끈적히 달라붙은 피를 퉤 뱉어내고서 벽에 처박힌 몸을 뽑아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의외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유폐의 마왕이 근접전을 걸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러한 전투 방식은 그간 보았던 유폐의 마왕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냐와 모론, 아니스에게 들었던 300년 전의 전투에서도 유폐의 마왕은 저런 식으로 싸운 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와 다를 것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의 등 뒤. 모론은 제압당했던 도끼를 놓고서 맨손으로 유폐의 마왕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손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악! 모론의 주먹이 마치 기름에 미끄러진 것처럼 유폐의 마왕을 스쳤다. 유폐의 마왕은 스쳐 지나가는 주먹의 팔뚝을 덥석 붙잡더니,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모론을 바닥에 메쳐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검도, 창도, 도끼도, 활도 다룰 수 있는 것처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이 자신의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닿는 순간에 힘이 쭉 빠져나가서 제멋대로 휘둘려 버린다. 그것은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모론에게 있어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선 감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만 해도 그렇다. 모론은 팔뚝부터 붙잡힌 오른팔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관절과 근육이 멀쩡할 텐데도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힘이 들어가기는커녕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할 줄 아는 것이 많지. 무기는 모두 다룰 수 있다. 마법도 마찬가지.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움직인 시선이 세냐에게 향했다. 유폐의 마왕은 활짝 펼쳐진 메리와,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는 영력을 보고서 빙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테르가 마력과 마나로 나누어지기 전부터 마법을 다뤘으니. 물론, 마족…… 마왕으로서의 권능에도 익숙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극한까지 익히지는 않은 모양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당황하지 않고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직, 찌지직…… 회오리치는 영력에 확실한 살의가 깃들었다. 동시에 발현시킨 절대률이 유폐의 마왕을 포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큼 긴 시간 마법을 다뤘다고 자부한 주제에, 너는 현자를 간파하지 못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극한이라, 부정할 수는 없군. 내가 도달했다고 생각한 극한이란 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구시대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마왕으로 영원을 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포기하고 바칠 수밖에 없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을 포기했다는 것인지.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세냐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영력과 마나가 유폐의 마왕에게 강하게 반발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존재는 ‘마왕’이라는 이름답게 오직 마력만을 지배한다. 마나도, 영력도 다룰 수가 없다. 아득히 옛날은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유폐의 마왕에게 마나는 다룰 수 없는 힘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건 포기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펼쳐져 있던 손이 천천히 쥐어져 주먹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 끼리릭…… 주먹에 힘이 들어갈수록, 기묘하게도 유폐의 마왕과 연결된 사슬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마치 유폐의 마왕의 힘이, 육체가, 사슬에게 묶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처음으로 존재했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 내게 영광과 절망을 주었던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뿌드득! 지면에 처박혀 있던 모론의 몸이 홱 돌아갔다. 그는 붙잡힌 팔을 빼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어깨를 으스러트리는 것으로 속박에서 탈출한 것이다. 그래 봤자 위치는 바닥. 하지만 모론은 그 불편한 자세에서도 극한의 위력을 뽑아내서 주먹을 갈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떨어졌다. 명치에 처박힌 일권. 모론의 입이 쩍 벌어지며 피가 뿜어졌다. 유폐의 마왕은 처박은 주먹을 뽑아내며, 숙인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잘하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폐의 마왕의 분위기가 돌변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료함과 권태를 두르고 있던 저 마왕이, 지금은 마치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간을 전율시킬 정도의 투기(鬪氣). 유폐의 마왕이라고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살기(殺氣). 유폐의 마왕은 아직까지 붙잡고 있던 모론의 팔을 내팽개치면서 성큼 발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닥에 처박힌 모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에게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론이 간신히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유진은 느낄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지만 않았으면 됐다. 300년 전에도 모론이 저만큼 죽기 직전이 되어 쓰러진 적은 여러 번 있었으니. 그래서 놈이 등신인 것이다. 무턱대고 달려들어서 처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언제 쓰러졌냐는 듯이 덤벼드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곱절이 된 압박감이 유진을 덮쳤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짓누르는 압박감이 강할수록 유진을 휘감은 불꽃은 더욱 밝게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앙! 유진이 땅을 박찼다. 서로의 거리가 사라졌다. 불쑥 나타난 검이 유폐의 마왕을 베려고 들어갔다. 동시에 유폐의 마왕의 왼손이 움직였다. 활짝 펼친 왼손이 측면을 베는 검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 손에 붙잡힌 칼이 부러졌다. 개의치 않았다. 유진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단창(短槍)이 쥐어져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르는 창. 유폐의 마왕의 오른손이 창을 따라 움직였다. 발과 허리도 함께 움직여 몸을 옆으로 세웠다. 후욱! 허리에서 아슬하게 빗겨나간 창이 오른손에 붙잡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혹의 권능.”&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다. 발밑과 등, 머리 위, 양옆에서 나타나려던 창은 생성되기도 전에 사슬에 묶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 쓰기에는 우습군. 대체 누가 참혹의 마왕에게 루인토스를 주었을 것 같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지직! 사슬에 묶인 창과, 직접 붙잡힌 창이 부러졌다. 유진은 미련을 갖지 않고 허공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긱, 끼기긱……! 유폐의 마왕이 주먹을 쥐었고, 어깨를 젖히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 모든 움직임에 사슬의 비명이 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주먹을 내질렀을 때. 사슬이 가장 큰 비명을 내질렀다. 유폐의 마왕과 연결된 사슬의 망토가 크게 요동쳤다. 쏘아진 주먹이 마력을 흩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심상찮은 위력에 유진도 즉시 대응했다. 프로미넌스가 성역 결계를 구축했다. 빛에 동화된 성녀들도 동시에 기도를 외웠다. 유진 본인도 거대한 망치를 만들어 주먹에 내리 찍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의 주먹은, 정면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를 철저하게 부숴버렸다. 분쇄추의 권능은 망치 채로 꿰뚫었고, 중첩된 성역 결계를 으스러트렸으며, 성녀들의 기도마저 사슬의 비명으로 지워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 세냐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사방에서 자라난 넝쿨이 유폐의 마왕을 포위했다. 사슬이 넝쿨에 대응하려 했지만, 넝쿨은 사슬을 부식시키고서 기어코 유폐의 마왕의 팔과 양다리를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위의 마법.”&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넝쿨에 붙잡힌 양다리와 왼팔을 힐긋 보았다. 던졌던 주먹이 노린 장소에 유진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이 짧은 사이에 도약해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랍지만, 부족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앙! 메리의 마법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 마왕마저 위협할 포격이지만, 유폐의 마왕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을 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른팔은 묶지 못했잖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슨히 펼친 손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세계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흐름은 세냐의 절대률마저 거역했다. 유폐의 마왕에게 닿았어야 할 포격이, 뒤틀린 흐름에 따라 텅 빈 허공을 꿰뚫었다. 번쩍하는 빛, 어전의 천장이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지가 묶였어도 별 차이는 없었을 테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넝쿨을 뜯어냈다. 세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유폐의 마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그것은 마법도 권능도 아니다. 모론이 무식한 힘으로 공간을 잡아끌고 쥐어뜯는 것처럼, 유폐의 마왕도 비슷한 짓을 했을 뿐이다. 다만, 유폐의 마왕이 한 것은 절대률을 거역할 만큼 터무니없이 격이 높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도 권능도 아니라고? 저러한 현상을 일으키는데, 저것이 마법과 권능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경악으로 벙찐 세냐의 옆에 내려서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근접전에 능숙하지 않은 것 같다며?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고 마력을 퍼붓고 사슬로 봉인한다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는 그렇게 싸웠단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진심으로 억울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러셔? 그럼 300년 전에는 저 새끼가 너희를 엄청 봐줬나 보네. 아니면 전력을 다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륵…… 등 뒤의 날개 주변에 흩날리는 신화의 불씨가 모여 천사가 되었다. 아니스는 혀를 쯧 차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모론에게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전에 뒈진 새끼가 참 입만 살았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뒈지지 않고 살아서 왔으면 안 싸웠대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뻔뻔하게도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스의 손길을 받은 모론이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 졸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손을 들었다. 아니스와 마찬가지로 천사의 모습을 한 크리스티나는 공손히 유진의 손에 검을 올려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저러한 결속에- 마왕에게 많은 감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이 고요히 가라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앞에 용사라는 이름과 사명으로 선 자들은 그리 많지 않지. 지금의 너희는, 내가 평생 보았던 ‘용사’라는 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른손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과 기술. 사명에 대한 절실함.”&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손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 중 누구도 배신을 상상하지 않는, 결속된 신뢰.”&lt;/p&gt;&lt;p&gt;&lt;br /&gt;&lt;/p&gt;&lt;p&gt;특히 저 신뢰가 유폐의 마왕에게 많은 감상을 주었다. 인간에게 있어 300년은 길다. 그 긴 시간도 저들의 신뢰를 마모시키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자신이 죽은 뒤에 세상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죽은 하멜의 바람과, 동료들을 위해 결국은 성녀로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하멜의 복수를 하기 위해 평생을 마법에 바쳤다. 베르무트의 폭주로 죽음까지 몰렸으면서도, 끝까지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꿈에 나타난 베르무트의 부탁 하나로 100년이 넘도록 누르를 죽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갑작스러운 환생에도 과거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 동료의 변절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이름, 다른 육체로도 결국에는 이곳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결속된 신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안다. 너무나도 커다란 절망 앞에서는 제아무리 단단한 결속조차도 무르고 약해진다. 신뢰는 절망 앞에서 배신으로 흩어지고, 신념은 공포 앞에서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히게 마련이다. 그 누구보다, 유폐의 마왕은 잘 알고 있다. 그는 대부분 경우에서 절망이자 공포였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때는 절망과 공포 앞에 섰던 적도 있다. 굽히지 않고 맞서며, 신뢰와 신념을 부르짖었던 적도 있다. 물러진 결속에서 배신의 칼날을 맞은 적도 있다. 믿었던 동료의 배신을 보았던 적도 있다. 그 동료가, 걷잡을 수 없던 절망과 공포 자체가 되어가는 것도 목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대한 존재감이 어전을 압박했다. 유폐의 마왕이 보란 듯이 발을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마왕이란 시련이 되도록 하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유진도 함께 달려 나갔다. 둘의 합공은 300년 만이지만, 둘 중 누구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300년이란 시간으로 망각할 만큼 얕지 않기 때문이다. 모론은 유폐의 마왕의 왼쪽을, 유진은 오른쪽을 맡았다. 모론은 도끼를 들고, 유진은 검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의 경험에 그치지 않았다. 유진의 신력이 모론에게 이어졌다. 그렇게 둘의 사고가 연결되었다. 모론의 밝은 눈과, 유진의 직관이 하나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최선의 공격을 만들었지만,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양팔이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과광! 양쪽에서 덮친 도끼와 검이 주먹에 가로막혔다. 어느 하나 부서지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무수한 잔영을 남기며 움직였고, 도끼와 칼도 참격과 폭력을 난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기도를 시작했다. 둘은 마력을 기도로 밀어내고, 모론과 유진의 상처를 돌보며 가호를 부여했다. 유진과 모론이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300년 전부터 성녀의 역할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이 어지러운 난전. 세냐는 의식을 집중해서 유폐의 마왕의 움직임을 보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유폐의 마왕을 멈춰서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다. 동시에, 그녀는 로브에 덮인 환상의 마안을 준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꺼내는 것만으로 주변에 막무가내로 환상을 난사하는 일이 없도록 봉인은 해두었지만,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역시 봉인을 풀어야 한다.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목걸이를 뜯었다. 보라색 보석이 세냐의 왼손에 휘감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주할 일은 없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말하자면 사용하는 것이 꺼림칙하다. 가능하다면 사용하고 싶지도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에게 거짓말을 했는데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기적인 사람.]&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는 잔인한 일인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머릿속에서 낭랑한 웃음이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라색 마력이 안개처럼 나타나 일렁거렸다. 세냐는 보다 정신을 집중하며 환상의 마안을 조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직거리는 노이즈. 집중한 정신이 조금 흔들리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더욱 마법을 조정했다. 안개가 되어 퍼져나가는 마력이 세냐의 마나와 만나서 영력이 되었다. 환상의 마안이 그 거대한 영력을 받아먹으면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정말로 이기적이고 잔인한 여자예요, 세냐 메르데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아리치는 웃음 안에서 보다 확실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새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세냐의 뺨을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하멜의 영원한 악몽이 되고 싶었어요. 하멜이 영원토록 악몽을 두려워하고, 또, 내심 악몽을 다시 꾸기를 바라게 만들고 싶었죠. 세냐 메르데인보다, 아니스 슬리우드보다, 크리스티나 로게리스보다, 나를, 더, 강하게 새기고 싶었어요. 나를 떠올리며 후회하고 슬퍼하기를 바랐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듬으며 올라온 손이 세냐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세냐는 대답하지 않고서 입술을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환상의 마안의 폭주가 아니다. 마안의 출력과 권능은 완벽하게 세냐의 통제하에 있다. 하지만- 이 ‘목소리’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 터무니없는 마안을 다루기 위해서는 세냐의 정신 또한 환상과 악몽에 침식되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멜이 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고? 아하하, 결국 질투한 것 아니에요? 하멜이, 당신보다, 나를 더 추억하는 것을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헛소리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지만. 저것만큼은 세냐도 참을 수가 없었다. 뿌득……!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착각하지 마. 나는 그딴 감정으로 너를 붙잡은 것이 아니야. 추억? 하! 나는, 유진이, 너 따위보다 나를 더 생각하게 만들 자신이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결국 뒈졌으니까, 누아르 제벨라. 하지만 난 살아 있지. 안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누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거둔 것은 같잖은 패배감 때문이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발끈하는 것이 꽤나 귀여운걸, 좋아요, 세냐 메르데인. 이건…… ‘거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요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제벨라 시티에서 누아르의 혼을 거두었다. 소멸하지 않은 영혼을 거두어서, 환상의 마안 깊은 곳에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빌어먹을 마안은 통제하고 다룰 수 있지만, 본래 주인인 누아르보다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세냐가 누아르의 영혼을 거둔 것은 오늘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나를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웃을 수밖에 없었죠. 이 누아르 제벨라 님을? 그건 굉장히 오만한 말이었으니까요. 세냐 메르데인, 당신이 아주 훌륭한 마법사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지만, 나를 도구로 사용할 정도는 아니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냐의 눈동자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세냐는 혼이 희롱당하는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환상의 마안과 메리를 거두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거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유진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이 순간에도 유진과 모론은 유폐의 마왕을 상대하고 있다. 사방에서 덮치는 공격에도 유폐의 마왕은 조금도 불리해 보이지 않았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양팔은 온갖 공격을 가로막거나 흘려내고, 도중부터 끊어냈다. 그러면서도 틈이 보인다면, 아니, 틈 따위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의 공격은 유진과 모론의 방어를 관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따위의 도움은 가능하다면 바라고 싶지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은ㅡ 강해. 저 자식을 쓰러트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나는 뭐든지 할 거야. 엿 같은 네 손조차도 빌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패배와 죽음은 내 알 바가 아니지만, 하멜의 패배와 죽음은 바라지 않아요. 그는, 나를 죽였으니까. 나한테 이겼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살아가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냐의 눈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내 혼의 자유를 당신이 속박하는 것은……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당신을 이기적이고 잔인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세냐 메르데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뜻대로 하게 두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자에게 안식조차 주지 않고, 윤회의 자유마저 빼앗겠다니. 정말…… 잔인하다니까. 하지만, 뭐, 좋아. 이것까지도 달콤한 여흥으로 삼도록 하죠. 하멜의 후회와 악몽을 바라지 않는 당신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환상의 마안으로 향했다. 키이잉…… 영력에 휘감겼던 보석이 바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혼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궁.&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섭해 오는 거대한 파장에 유폐의 마왕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활짝 꽃을 피운 메리와 공명하는 보라색 보석. 유폐의 마왕은, 그 보석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ㅡ환상의 마안. 유폐의 마왕은 즉시 물러서려고 했지만, 마안이 내뿜은 요사스러운 빛은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서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야가 뒤흔들렸다. 유폐의 마왕이 살아온 영원이 침식되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에 간섭하는 환상의 마안. 본래 이만큼의 격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마안이지만, 누아르 제벨라는 환상의 마안의 한계를 몇 번이나 초월하여 불가해의 영역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지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유진과 모론의 공격이 방해다. 두 명의 성녀도 보조를 맞추어 유폐의 마왕의 마력을 붙들고 거슬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환상의 마안은 제법 치명적으로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관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메르데인. 이 정도의 마법…… 아니, 이건 온전히 그녀만의 마법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틀려 어지러운 시야에서 세냐의 모습을 보았다. 이쪽을 향해 뻗은 메리. 유폐의 마왕은 그 오래된 지팡이에서 현자의 존재감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히 메리를 넘기고 그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저 지팡이에는 현자의, 비슈르 라비올라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메리의 마법이 환상의 마안과 어우러져 더욱 확실하고 깊게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깊은 어둠.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서 유폐의 마왕을 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저것을 보게 될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환상의 마안은 느끼지 않는 감상조차 억지로 끌어낸다. 억지로 만들어낸 동요가 유폐의 마왕의 정신을 흔들고, 그러한 혼란에서 마력과 공세가 흐트러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유폐의 마왕은 짧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법, 그립다는 감정이 들었다. 어둠 속에 선 환상은, 베르무트의 모습을 하고 있되 베르무트가 아닌 환상이 유폐의 마왕을 향해 무어라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외로 증오는 느껴지지 않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푸확! 흐트러진 마력이 끊어졌다. 검붉게 타오르는 신화의 검이 유폐의 마왕의 목으로 날아왔다. 마차가지로 신화에 휘감긴 거대한 도끼가 유폐의 마왕의 허리를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멈췄다. 목을 가른 검은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도중에서 멈춰버렸다. 도끼도 똑같았다. 모론은 눈을 부릅뜨고서 도끼에 힘을 주었지만, 도끼는 유폐의 마왕의 몸을 반쯤 가른 상태에서 멈추어 더 움직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오래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과 허리가 반쯤 잘렸지만 유폐의 마왕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고통은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고통은 결코 평온을 깨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제로 이런 고통은 유폐의 마왕이 언제나 안고 있는 고통보다 훨씬 미약하다. 수천, 수만 개의 사슬이 영혼을 관통하는 감각. 그렇게 관통한 사슬이 제멋대로 맞물리며 영혼을 갈아대는 감각. 절대 아물지 않고 느슨해지지도 않는 저주에 비하자면, 이 정토의 고통은 간지러울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오래전이라서, 오히려 반가울 정도로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환상의 마안을 통해 만들고자 했던 것은 ‘공포’다. 하지만 환상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에게 동요는 주었지만, 공포까지는 주지 못했다. 심지어 억지로 짜낸 동요조차도 유폐의 마왕을 더 이상 흔들지 못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모론이 동시에 직감했다. 둘은 유폐의 마왕의 몸을 파고든 무기를 뽑아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폐의 마왕이 주도한 거대한 흐름이 둘이 벗어나지 못하게 끌어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심연을 보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조각조각 끊어졌던 마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이어졌다. 두 주먹에 모이는 힘. 유진과 모론의 직관이 겹쳐졌다. 유진은 즉시 검을 놓고서 양손을 유폐의 마왕을 향해 뻗었다. 모론도 도끼를 놓고서 텅 빈 허공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대 출력의 이클립스가 즉시 완성되었다. 그 직전에 모론은 전력을 다해서 공간을 붙든 마력의 흐름을 뽑아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앙! 이클립스의 폭발이 유폐의 마왕을 덮치고, 그와 동시에 모론은 유진을 끌어안고서 뒤로 도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르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부끼다 사라지는 불꽃. 유진은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면서 모론을 흘겨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끼, 좀 살살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살했다가는 저 주먹에 맞았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얻어맞았다가는 뻐근한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진은 더 핀잔을 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신에, 유진은 세냐를 쳐다보았다. 그는 세냐가 들고 있는 환상의 마안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유진은, 환상의 마안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기척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너…… 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전에 물어보았을 때도 혹시나 했지만, 지금의 환상의 마안을 보니까 불안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세냐는 유진에게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가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누아르도 마찬가지였다. 세냐에게만 보이는 누아르의 영혼은, 환상의 마안으로 파고들었던 심연에 경악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부끼는 신화가 걷히고서 유폐의 마왕이 걸어 나왔다. 목을 반쯤 갈랐던 검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지만, 그의 허리에는 아직 모론의 도끼가 박혀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도끼를 뽑아서 모론을 향해 던져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앙! 순식간에 날아든 도끼가 모론에게 처박혔다. 아슬하게 붙잡아서 막아내기는 했지만, 큼직한 도끼의 날은 모론의 가슴팍을 조금 파고들고 말았다. 하지만 모론은 신음 대신에 괴성을 내지르며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세냐를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세냐가 저지른 일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저런 일을 남몰래 준비했다는 것에 분노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세냐를 질책할 상황도 아니거니와, 유진이 판단하기에도 ‘저것’은 필요했다. 실제로 환상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에게 순간적이나마 틈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유진은 모론과 함께 유폐의 마왕에게 덤볐다. 휘감긴 불꽃이 길쭉한 검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한 참격으로는 얕은 공격조차 되지 않는다. 코앞에서 이클립스를 터트리고 목과 허리를 베었는데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경상 취급조차 안 되는 것 같다. 마왕과 같은 불사력을 지닌 괴물들에게 치명적인 신력의 불꽃인데도, 유폐의 마왕에게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더 깊이 베어야만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가 중첩되기 시작했다.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중첩이 거듭되며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화력이 부족하다. 극한을 넘어 중첩된 불꽃은 이제는 검의 형상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상관없다. 이것을 휘둘러서 일으키는 것은 참격이 아닌 무식한 폭력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성으로 내뱉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모론은 그 목소리를, 유진의 바람을 들었다. 그것은 잔인하고 무모한 요구였지만, 모론에게 망설임과 주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바람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도 욕설만 뱉었을 뿐, 유진의 뜻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성녀들의 가호가 모론에게 집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괴성과 함께 도끼를 던졌다.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도끼가 공간을 찢어발기며 유폐의 마왕에게 날아갔다. 그런 공격은 유폐의 마왕에게는 어설프고 느렸다. 뻗은 손은 도끼에 닿기도 전에 파장을 만들어 도끼의 궤적을 바꿨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 모론의 손이 공간을 붙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드드득! 찢어졌던 공간이 모론의 악력에 의해 잡아끌렸다. 그로 인해 유폐의 마왕도 모론에게 조금 가까워졌다. 우악스러운 주먹이 날아들었고, 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식간에 끝났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은 순식간에 모론의 의식을 앗아갔다. 찰나에 퍼부어진 연타가 모론의 육체를 파괴했다.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모론의 육체는 멈추지 않았다. 파괴된 육체는 즉시 재생했다. 부러지고 터졌던 손이 유폐의 마왕의 허리를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와 동시에 세냐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환상의 마안이 마안과 어우러져 현실을 개변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마법의 주박이 잠깐이나마 유폐의 마왕의 시야를 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대한 살의가 머리 위에서 내리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무릎이 굽혀졌다. 내리찍은 시커먼 신검은 유폐의 마왕의 손에 가로막혔지만, 그 거대한 충격은 손으로 막는다고 해서 흘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진심을 담아서 찬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드드득! 신검이 유폐의 마왕의 손을 잘랐다. 그리고 어깨를 베었다. 하지만 양단하지 못했다. 검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금 파고들고서 멈춰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르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모론이 피를 토하며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반대로, 유폐의 마왕은 굽혀졌던 무릎을 세웠다. 유진은 늑골쯤에서 멈춘 신검을 놓지 않고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죽일 수 없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결국 그렇게 묻고 말았다. 그 질문에 유폐의 마왕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주이니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여도 죽질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그런 적은 세기 힘들 만큼 많이 만나봤다. 중위 마족만 해도 어쭙잖은 불사력을 가지고 있고, 고위 마족은 더욱 죽이기 힘들다. 마왕쯤 되면 저 새끼가 정말로 죽기는 하는 건가 의문이 들 정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죽이다 보면 결국에는 죽일 수 있다. 여태까지, 유진은 몇 번이고 그렇게 적을 죽여왔다. 살육의 마왕도, 참혹의 마왕도, 광란의 마왕도, 아이리스도, 라이자키아도, 가비드 린드먼도- 누아르 제벨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에는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폐의 마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씨X.”&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답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사실 저렇게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몸을 파고들었지만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신검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목숨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을 더.&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번을, 수백 번을, 수천 번을 베어도. 유폐의 마왕은 죽일 수 없다. 저 지독한 불사는 저주와 같아서, 아무리 공격해도 죽일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리가 없다. 제아무리 저주와 같은 불사일지라도, 저주 이상의 공격을 퍼붓는다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한 혼란은 절망을 낳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절망할 생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유폐의 마왕을 죽일 수 없다. 멸망의 마력으로는 절대로 유폐의 마왕을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멸망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월광검의 힘은 의도적으로 차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신검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몸에 파고든 신검이 불길을 발하는데도 유폐의 마왕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소를 머금고서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포기할 생각은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이 시야를 덮었다. 동시에 프로미넌스의 깃털이 빛을 발했다. 퍼엉! 마력이 폭발한 순간, 유진은 모론을 붙들고서 뒤로 도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을 차린 모론은 피범벅의 입술을 문질러 닦으면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실패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내가 실패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음을 각오하고 붙들어서 틈을 만들라고 했는데, 정작 유진의 공격이 제대로 박히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뻐근한 손을 쥐었다 펴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몸에 처박아 놓은 신검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이 한걸음 걸은 순간에 불이 푹 꺼져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요동친다. 뚜둑. 유폐의 마왕이 가볍게 목을 꺾었다. 쩍 갈라졌던 몸은 어느새 달라붙어 있다. 고소조차 사라진 평온한 얼굴에 유진과 모론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존재감이 다르다. 이렇게 마주 선 것만으로도 압박감에 짓눌릴 것만 같다. 유진과 모론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핫.”&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 싸우는 것은 300년 만이다. 설마 300년 만에 이런 상황에 처해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돌연 웃어대는 둘을 아니스는 질렸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도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크리스티나만이 이 상황에 다른 이들과 같은 기분을 느끼지 못해 어리둥절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 지금부터는……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이라면 베르무트 님이 중심을 잡으면서 전투를 조율했을 텐데. 지금은 베르무트 님이 없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스터, 무슨 말씀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둘은 전투에서 죽이 잘 맞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부터 저 둘은 부상을 신경 쓰지 않고 싸울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선임을 알면서도 달려들 겁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300년 전에는 저 혼자 저 등신들이 죽지 않게 붙들어야 했는데…… 지금은 크리스티나, 당신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진과 모론의 몸이 점점 낮아졌다. 지면에 닿을 정도로 내려온 유진의 양손에는 두 자루의 신검이 쥐어졌다. 하지만 모론은 무기를 쥐지 않았다. 그의 도끼는 아까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푸확! 검붉은 폭발 속에서 프로미넌스가 불꽃을 흩뿌렸다. 수천 개의 불티는 마치 암기처럼 유폐의 마왕에게 폭사했다. 그렇게 쏘아진 불티 중 일부가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유진은 한 줄기의 번개가 되어 불꽃을 관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자루의 검이 엇박으로 움직였다. 유폐의 마왕의 눈은 검의 궤적을 굳이 쫓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과광! 공간이 울리면서 검이 튀어 올랐다. 시야에 잡히지도 않고 고속으로 끊어 친 연타. 유폐의 마왕은 주먹을 거두는 대신에 무릎을 곧추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끝이 창처럼 쏘아졌다. 뻐어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모론의 팔이 뜯어져 날아갔다. 순식간에 왼팔이 사라졌지만, 모론은 작은 신음 하나 내뱉지 않고서 더욱 유폐의 마왕에게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와 크리스티나에게서 빛이 반짝였다. 날아가던 팔이 빛과 이어지더니, 즉시 절단면에 달라붙었다. 부족한 살점과 뼈 등은 초고속으로 이어진 재생이 더해졌다. 모론은 깔끔하게 붙은 팔을 주먹으로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양팔은 쌍검의 난무를 막고 있다. 한 번 걷어찼던 무릎은 내려오지 않고 여전히 곧추서 있다. 모론은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발끝이 모론의 턱을 갈겼다. 목뼈가 그대로 뽑히고 머리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타격이지만 그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론의 의지가 죽음을 거부했고, 육체가 의지를 따랐으며, 화신이 되어 얻은 신력 또한 결의에 호응했다. 그렇지만 턱 끝에서 쳐들어온 충격은 모론의 의식을 뚝 끊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시 의식이 끊겼지만 육체는 멈추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앙! 기어코 날아온 주먹이 유폐의 마왕의 몸을 밀어냈다. 크륵. 유폐의 마왕의 입에서 처음으로 피가 흘렀다. 그는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힘과 무게에 피식 웃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베르무트가 선택한 동료들은 모두가 특별하다. 하멜은 물론이고 아니스와 세냐, 모론도 그렇다. 모두가 기적과 같은 존재란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중에서 모론은 세상 모든 존재 중 으뜸이라고 할 만한 힘을 타고났다. 애석하게도 인간으로 태어나 버린 것이 모론의 제약이었다. 모론이 타고난 힘을 인간의 육체는 감당할 수 없다. 만약 모론이 인간이 아니라 거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진즉에 마왕조차 우그러트릴 힘에 도달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신의 격은 네가 타고난 힘에 잘 어울리는구나. 육체가 힘을 감당해내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의 가호가 의식을 밝혔다. 찌릿, 하는 전율과 함께 모론의 의식이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게나마 기절해서 깨어난 것인데도 모론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땅을 박찼다. 주먹이 들어갔다. 주먹에 타격의 감촉이 남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르르! 어둠 저편으로 날아갔던 도끼가 모론의 부름에 따라 마력을 갈기갈기 찢으며 돌아왔다. 모론은 날아온 도끼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너덜거리는 쌍검을 불꽃으로 바꾸었다. 다시 한번 타오른 불꽃이 형상을 바꾸어 거대한 망치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와 망치가 동시에 휘둘렸다. 가속이 붙은 어마어마한 힘이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리릭……! 유폐의 마왕의 등에 이어진 사슬들이 일제히 공간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존재를 고정시킨 후, 양팔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박힌 공격, 밀려나지는 않앗지만 어전에 녹아든 시커먼 마력이 소멸했다. 성녀들의 기도가 불러온 빛이 어전을 환하게 밝혔다. 동시에 세냐의 메리가 일으킨 마법이 환상의 마안에 깃들어 현실을 개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묶은 공간이 바뀌었고, 유폐의 마왕은 탄성을 내뱉었다. 공간이 바뀌어버려 사슬이 겉돈다. 그 순간에 다시 도끼와 망치가 움직였다. 다시금 존재를 고정하기에는 공격이 가깝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우우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날아갔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하면서 눈을 번득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망치를 놓고 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모론은 도끼를 머리 위로 들었다. 끼리릭.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인 사슬이 유폐의 마왕의 앞으로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대로 죽지 않는 것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했다. 정말로 불사라면 굳이 공격을 막을 필요가 없을 터.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계속해서 공격에 대응하려 하고 있다. 죽이다 보면 죽일 수 있는 걸까? 아니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 이어진 수많은 사슬. 아까 보았던 300년 전의 기억. 유폐의 마왕을 절대로 죽일 수 없던 베르무트는, 저 사슬을 끊어가겠다며 유폐의 마왕을 압박하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사슬들이 끊어지는 것이 유폐의 마왕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란 것일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줄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법 유의미한 타격을 줬다. 여전히 유폐의 마왕을 죽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간의 공격이 소용이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높이 든 도끼가 먼저 떨어졌다. 공간과 함께 통째로 양단하는 무거운 참격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응하려는 순간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덮쳐오는 참격의 옆, 희미한 존재를 보았다. 동시에 세상의 시간이 멈췄다. 멈췄다고 느꼈다. 마주친 순간에 환상이 정신을 침범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멈춰버린,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유폐의 마왕은 입을 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끼를 향해 팔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버린 상황. 유폐의 마왕은 다시 한번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었을 텐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세상에 남아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련이라, 그런 것은 남기지 않았어요. 나는 아주, 아주 만족하며 죽었거든. 내 죽음에 미련과 후회는 없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하늘에서 누웠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치며 유폐의 마왕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이렇게 남아버린 것은, 지독하고 고약한 마녀 할망구의 심술 때문이죠. 정말, 망자를 모독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거두어주지. 어떤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흥, 꽤 상냥한 제안이지만…… 거절하겠어요. 이렇게 되어버리기도 했고. 저는 하멜이 살아남는 것을. 바람을 이루는 것을. 당신에게서 승리하는 것을 바라거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능하다고 생각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누아르의 미소가 조금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는 세냐 메르데인과 함께 내 심연을 들여보았지. 그렇기에 알 수 있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심연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탄식 후에 누아르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외…… 였죠. 정말로 의외였어. 나는…… 아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의 동요를 끌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대마왕. 그의 심연에 잠든 트라우마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환상으로 보여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트라우마에 유폐의 마왕이 공포를 느끼지 않은 것? 그것 자체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누아르가 최후를 맞닥트리기 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지 못했듯, 그녀는 유폐의 마왕이 공포를 느끼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한 동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이 느낀 동요 이상으로 누아르는, 세냐는 동요를 느꼈다. 그만큼 유폐의 마왕의 심연은 깊었고, 그 밑바닥의 어둠은 짙다. 절망하고 절망해서 이제는 절망조차 벗으로 둔,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저 대마왕을 상대로- 승리라는 것을 거머쥘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동정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물었다. 누아르는 대답을 미루고 착잡한 시선을 전했다. 곧 그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뇨. 유폐의 마왕. 동정을 느끼는 것은 당신에 대한 모욕이겠죠. 나는 당신을 동정하지 않아요. 대신, 경외를 느끼고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심이다. 누아르는 평생 유폐의 마왕에게 진심 어린 경외를 바친 적은 없지만, 그의 심연을 들여다본 지금에는 경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경외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눈을 감았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면서 분리되었던 의식이 육체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론의 도끼가 유폐의 마왕에게 내리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유폐의 마왕의 몸이 꺾였다. 힘을 제대로 버텨내지 못한 무릎이 주저앉혔다. 아슬하게 머리가 찍히는 것은 피했지만, 모론의 도끼는 유폐의 마왕의 왼쪽 어깨를 찢어버리고 허리까지 갈라 버렸다. 처음으로 유폐의 마왕의 몸이 양단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뒤를 따라 유진은 창을 쏘았다.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창끝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마력과 함께 피가 뿜어졌다. 유진의 창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을 관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긴 숨을 내뱉었다.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피가 입술을 넘어 턱과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두둑. 가슴을 관통한 창이 늑골을 부수면서 회전했다. 회전과 함께 타오르는 신화가 유폐의 마왕을 중심부터 불태우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한번 묻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끼에 잘린 하반신이 털썩 무너졌다. 너덜거리는 상반신은 창에 관통되어 불타고 있다. 입술은 계속해서 피를 토했지만, 유폐의 마왕의 얼굴에 괴로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포기할 생각은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오르는 신화 속에서 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점점 격렬해지는 불꽃 속에서 사슬이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뒈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창을 놓지 않고서 내뱉었다. 그 대답에 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타깝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이 어둠에 덮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야를 뒤덮은 어둠. 유진은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과 세냐, 성녀들의 모습은커녕, 자신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곧장 연상한 것은 발자크의 시그니처인 블라인드. 발자크는 허무하게 죽었지만, 놈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에게 돌아갔다. 하려고 든다면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의 시그니처를 충분히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유진은 우선 동요를 가라앉혔다. 이 어둠은…… 블라인드와 다르다. 오감을 차단해 나가는 종류의 마법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단순한, 마법이나 권능이라고 할 수도 없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이다. 유폐의 마왕이 지닌, 어전을 떠돌던 마력의 성질이 바뀌었을 뿐이다. 너무나도 짙고 빽빽하며 결속된 마력이, 공간을- 세상을 침식해서 바꿔버린 것이다. 이 말도 안 될 만큼 농밀하고 결속된 마력은, 유진이 불사른 신화의 빛조차도 덮어서 지워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너지지 않았다. 유진이 이곳에 존재하기에 성역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그 성역을 바깥에서부터 감싼 마력은, 유진이 구축한 성역의 이점까지도 모조리 뒤덮고 있다. 유진은 감각을 곤두세우고 눈을 감았다.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탐색이 되지 않았다. 세냐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납득할 수 있지만, 모론과 아니스, 크리스티나마저 느낄 수 없다는 것에 유진을 적잖게 당황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은 유진의 화신이고 성녀다. 그런데도 느낄 수 없다. 마치 이 세상의 법칙이 달라진 것만 같다. 제벨라 시티에서 악몽에 들어갔을 때도 이 정도로 강하게 구속받지는 않았는데, 이 어둠은- 유진을 철저하기 고립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벅.&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여전히 자신의 몸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지만, 손에서 검이 쥐어지는 감촉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나 세냐, 성녀들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만큼 신중하게 판단하고자 검은 휘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동료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다르다.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유폐의 마왕은, 아까 보았던 모습과는 너무 다르게 보였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분위기가 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보다 젊은 외모인데도…… ‘저’ 유폐의 마왕에게는 젊음 특유의 혈기나 패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권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젊은 모습의 유폐의 마왕에게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끔찍할 비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에 피범벅인 모습도 아니지만, 저 유폐의 마왕에게는 당장이라도 쓰러져 오열할 것만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격정은, 유진이 알고 있는 유폐의 마왕에게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애당초 저것은 유진이 아는 유폐의 마왕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낄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하게, 느껴지고 있다. 뇌에 파이프가 연결된 것처럼, 유진의 것이 아닌 감정들이 밀려오고 있다. 끔찍하고 거대한 절망감과 분노, 허무함,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신감?’&lt;/p&gt;&lt;p&gt;&lt;br /&gt;&lt;/p&gt;&lt;p&gt;밀어닥치는 감정들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여전히 어둠에 잡아먹혀 보이지 않는 다리가 비틀거리고,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이 감정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런 감정을 느낀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명한 것은, 절망과 분노와 허무함은- 배신감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배신당했기에 저런 감정을 느끼나. 대체 누가 유폐의 마왕을 배신할 수 있었던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다시 유폐의 마왕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둠 속에서 나타난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유진에게 향해 있지 않다. 저것은 결국 이 농밀한 마력에 깃든 기억의 잔재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이 끔찍한 마력과 함께 자신의 심연에 처박고서 사슬로 걸어 잠근 무의식. 유진은- 보이지 않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득한 옛날의 잔재일 뿐이라도, 유진은 ‘저것’에서 무언가를 간파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에 깃든 기억의 잔재인 주제에, 정작 저 시절의 유폐의 마왕에게서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유진은 간파한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단순하다. 저 때의 유폐의 마왕은, 마왕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립지는 않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목소리.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있게 마련이지. 안 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먼 과거의 환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마찬가지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떠올린들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쓰지 않는 것들과 함께 깊이 넣어두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더는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을 때. 그럴 때 꺼내서 보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깔끔하게 사라져 버리지. 더 할 수 있다…… 더 해야 한다. 그런 의욕이 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배신감에서 태어난 감정들에서 의욕을 얻는다는 말은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러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끌어낸 독기라면 유진에게도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 대체 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에 유폐의 마왕은 잠시 침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저 때의 네게 신성력이 느껴지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묵에서 답을 재촉했다. 이것으로 인해 유진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저, 머나먼 과거의 유폐의 마왕에게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충만한 신성력이 느껴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마왕에게 신성력이라니? 심지어 저 신성력은 신관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인이나…… 화신. 유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 ‘신성력’을 자각하니, 지금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에서도 마력 외에 다른 것이 느껴졌다. 마치, 마력에 신성력이…… 신성력이었던 것이 녹아 있는 것만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때의 나는 마왕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묵이 끝났다. 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였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들었다. 천장이나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곳에 시커먼 어둠만 가득하다. 유폐의 마왕은 그 어둠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나…… 베르무트가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을 했었지. 비슷한 것을 바랐다.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 세상을 구하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과적으로 나는 성공했지만, 직후에 실패해 버렸다. 바라던 대로 마왕을 쓰러트렸지만……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했다. 누군가는 죽어가는 마왕의 유혹에 넘어갔다. 누군가는 마왕의 저주에 정신이 무너졌다. 그리고 누군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눈이 감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친애하는 벗은, 마왕의 옥좌를 탐냈다. 세상을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힘에 욕심을 가졌다. 나는 그를 벗이라고 여겼지만, 그는 나를 벗으로 여기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친애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벗은 내 힘을, 내 위치를, 앞으로 내가 누리게 될 영광과, 내가 받게 될 칭송을 질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가 중심이 되어 나를 배신했다. 내 등에 칼을 꽂았다. 유혹에 넘어간, 저주에 무너져버린 동료들은 앞다투어 옥좌로 향했지만, 결국 마의 옥좌에 앉은 것은- 내게 칼을 꽂은 벗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욕심은 끝이 없었다. 옥좌에 앉은 ‘마왕’은 더 큰 것을 바랐다. 영원불멸한 힘을 바랐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지.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삼켜서, 결국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겼던 눈이 뜨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라는 이름에서 크게 동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아가로트가 만든 상처에서 태어난 멸망의 분신이다. 그 모습과 이름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베르무트가 가지고서 태어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의 본질 또한 베르무트의 모습과 닮았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왜…… 마왕이 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비틀비틀 물러서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였던. 배신당했던…… 네가, 왜, 마왕이 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만한 배신을 겪으면 용사라도 타락하게 마련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락하는 것이 저 상황에서…… 그리고 내게는 더 편하고 좋았던 것이지. 결과적으로 나는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았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리릭.&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어둠 속에서 사슬 소리가 들렸다. 유진의 눈은 시커먼 어둠을 흐르는 무수한 사슬을 보았다. 그 사슬은 하나의 거대한 사슬에 결속되어 유폐의 마왕의 가슴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폐의 마왕은 가슴에 연결된 사슬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오래 살았다. 몇 번이나 멸망을 지켜보았다. 그 기나긴 시간에서 쌓인 것들은, 나조차도 감당하기 버겁게 되었다. 그래서 사슬로 묶어 유폐했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충분하였지. 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손이 사슬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필요하구나. 훌륭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내가 평생 보았던, 먼 과거의 나조차도 포함해서 가장 뛰어나고 강한 용사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저주에 무너지지 않으며, 더 커다란 힘을 탐내지도 않는 네 동료들도 훌륭하다. 그렇기에 마왕인 나는, 더욱 커다란 시련이 되어 줄 수밖에 없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두둑.&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천천히 뽑히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무수한 시간과 세계를 관측했다. 인정하마. 내가 관측해 온 무수한 시간과 세계에서 지금이 가장 멸망의 끝에 가깝다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더욱 커다란 절망이 되어 용사를 시험해야 한다. 너희가, 정말로, 멸망을 끝낼 수 있을지. ‘마왕’인 나를 쓰러트린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뽑혀나가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멸망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속된 어둠에 깃든 모든 ‘힘’이 해방되어 간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타락과 함께 묶어버린 신성력. 그리고- 유폐의 마왕이 거쳐 온 세계에서 거둔 것들. 그가 죽이고 거느렸던 것. ‘다음’으로 가져가지 않고 유폐했던 영혼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뽑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일그러지고 뒤엉킨 데스마스크가 어둠을 떠다녔다. 그 광경은 마치 지옥으로 흐르는 시커먼 강이 유폐의 마왕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빠르게 걷혀갔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던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과 세냐, 성녀들이 보였다. 다행히 그들에게 부상은 없었지만, 방금의 대화를 똑같이 들은 것인지 표정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유진은 무어라 입을 열어 전하기 전에 자신의 손을 보았다. 아까 만들어서 손에 쥐었던 신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검에서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화가 타오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둠은 사라져가지만, 그 사악함과 불길함이 끈적하게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뿌득 입술을 씹었다. 사슬을 뽑아낸 유폐의 마왕은 가벼운 현기증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비틀거리는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유진과 동료들의 시선이 맞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험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즉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전투를 결정짓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모자라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그니션이라도 쓰지 않는다면 저것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직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대해서는 모론과 세냐, 성녀들도 이해했다. 성녀들이 즉시 빛이 되어 유진에게 돌아왔다. 이그니션의 부담을 덜면서 위력을 증폭시키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도 환상의 마안을 다시 발동하며 메리를 치켜들었다. 모론은 저 모든 준비 시간을 벌기 위해 유폐의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움직였는지 볼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무언가를 했고, 모론은 달려 나가던 기세를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한참이나 뒹구는 모론에게서 뿜어진 피가 시커먼 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 순간에도 유폐의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가 뿜어지는 것은 목.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모론의 목은 살점이 큼지막하게 뜯겨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이그니션은 발동되지 않았다. 유진의 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드는 순간에 모론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냐의 마법도 발현되지 않았다. 세냐가 지배하는 영력이 메리와 환상의 마안에 깃들기 시작할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무릎이 꺾였다. 입술을 벌리기도 전에 다문 틈 사이로 피가 왈칵 뿜어졌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자신을 지나고 간 공격을 쫓지 못했던 것은 세냐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묻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을 붙잡으려던 손가락이 억지로 뽑혔다. 어느새 앞에 다가온 유폐의 마왕의 손이, 유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포기할 생각은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둑, 뚜두두둑…… 억지로 손이 뽑혔다. 바로 앞에 선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는 차분하고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죽음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이 제지당했다. 유진은 붙잡힌 손을 억지로 빼는 대신,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신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저 엿 같은 제안에 대한 대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직! 신검은 휘두르는 도중에 시커먼 재가 되어서 박살 났다. 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손을 펼쳐서 유진의 가슴을 향해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시킬 수밖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볍게 두드린 손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쿨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벌어진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계속해서 공격할 수 있을 텐데, 유폐의 마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망을 주기 위해서다. 유폐의 마왕은, 유진과 동료들을 죽이는 것보다 ‘절망’을 주는 것을 우선하고 있다. 먼 과거 절망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똑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절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혼을 바치기를 원하는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리는 입술을 뿌득 씹었다. 목에서 넘어오는 피를 억지로 되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망? 유진은 그딴 감정을 느끼고 싶지도, 느낄 생각도 없었다. 유폐의 마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다고 해도. 절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유폐의 마왕이 말하는 ‘다음’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싶다.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싶다. 세상을 구하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갈망은 ‘지금’의 것이다. 유진이 죽이고 싶은 유폐의 마왕은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이고, 멸망의 마왕은 지금, 베르무트가 붙들고 있는 놈이며, 구하고 싶은 세상도- 지금의 세상이다. ‘다음’ 세상 따위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이 알 바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세상을 구하고 싶다. 빛이 밝혀온 세상을 구하고 싶다. 지금 저 아래의 전장에서, 승리를 기다리며 싸우고 있는 신군을 구하고 싶다. 전쟁의 승리를 기도하고 있는 대륙의 신도들을 구하고 싶다. 미쳐가고 마모되면서도 멸망을 미뤄낸 베르무트를 구하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기 위해서는 절망해서는 안 된다. 절망할 수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무릎에 힘을 주었다. 부서진 내장이 삐걱거리며 맞춰졌다. 불사에 근접한 재생력을 손에 넣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재생하지 못한다면 더는 싸우지 못할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서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 이번 공격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맞고 나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다. 휘둘러 찬 발길질. 유진의 양다리가 부러지고 몸이 땅을 뒹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을 뒹굴고서 땅을 손으로 짚었다 너무 강하게 씹은 어금니에서 피의 맛이 진하게 났다. 유진은 핏발 선 눈으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몇 번을 일어선들 무의미다.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아무런 바람도 이룰 수 없다. 나라는, 마왕이라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용사에게 무슨 의의가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유폐의 마왕이 천천히 걸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이 전투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절망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결국은 절망해 버리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둑, 뚜두둑. 유폐의 마왕의 오른손이 주먹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유진 라이언하트, 너는…… 불가능한 것을 욕심내고 있다.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켜 온 ‘그것’은 이제는 마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재앙이자 시대의 죽음이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 언젠가 죽어버리듯, 그것은 세상의 수명을 결정짓는 죽음이 되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유폐의 마왕의 주먹을 보았다. 그 주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태초의 그것은 과분한 탐욕에 잡아먹혔지. 마왕의 옥좌로도 부족하여 더 큰 힘을, 모든 것을 탐내서 잡아먹다가- 자신의 자아마저 잡아먹고 만 우인. 그렇게 완성된 것이 멸망이다. 그것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먹이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라고 해서 멸망을 끝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 누구보다 멸망을 증오하고 끝내기를 갈망한 것이 바로 나다. 내가 용사로서 마무리를 완벽하게 했었다면. 동료가 배신하게 두지 않았다면. 유혹에 홀리고, 저주에 미치고, 질투에 눈이 먼 동료를 내 손으로 먼저 죽였더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이 움푹 들어갔다.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로운 마왕 따위는 태어나지 않았겠지. 옥좌에는 그 누구도 앉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 후로 살아온 영겁에서, 몇 번이나…… 내 실패를 후회했는지. 너는 상상할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몸을 웅크리고서 컥컥 숨을 몰아쉬었다. 성녀들이 외는 비명 같은 기도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처는 고속으로 재생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유폐의 마왕의 공격은 무겁고 빠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후회하고 증오하면서, 내 실패로 태어난 멸망을 끝내기를 갈망했지. 하지만 끝낼 수 없었다. 내 세상은 멸망하기 시작했고, 신은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다시 유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뾰족한 비명과 함께 유진의 오른쪽 날개가 빛을 발했다. 천사가 되어 튀어나간 아니스가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하는 나의 세상에서 천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지. 지금 아니스 슬리우드, 너처럼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몸이 공중에서 멈췄다. 시커먼 사기(死氣)가 손의 모습이 되어 아니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아니스는 목을 죄는 손을 붙잡고서 버둥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멸망을 멈추지도, 세상을 구하지도 못하는 신을 부정하고 타락했다. 먹어도 먹어도 굶주리는, 멸망이 되어 가는 우인과 옥좌에 사슬을 묶고, 나 자신도 옥좌에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득! 사기의 손이 아니스를 땅에 처박았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기도를 외지 못했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천사가 되어 유진의 앞에서 날개를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나, 유폐의 마왕이다. 내가…… 왜, 마왕이 되었을 것 같나? 도저히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실패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멸망의 다음을 만들기 위해서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멸망하고 난 뒤. 그 무엇도 살아남지 못한 세상에서…… 나는, 혼자서, 처음을 시작해 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닥에 처박힌 아니스가 덜덜 떠는 손을 뻗어 유폐의 마왕의 발목을 붙잡았다. 퍼억! 걷어찬 발길질에 아니스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덮인 바다에서 대지를 건져내고 산을 깎았다. 유폐한 혼을 풀어놓아 생명을 순환시켰다. 그렇게 세상에 존재와 문명과 태동하기 시작하면, 다시 마왕이 되어 어둠에 앉았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는 그것을 반복해 왔다. 세상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다음을 만들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앞을 막아선 크리스티나의 눈이 덜덜 떨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유폐의 마왕은, 마왕이면서도 신과 같은 일을 해왔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대와 멸망이 연속되면서 ‘그것’은 멸망이란 현상이 되었지만, 최초에 묶어 놓은 나의 사슬은 건재하다. 그렇기에 나는 절대로 멸망에게 죽지 않고, 나 자신도 멸망을 죽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타협했다. 멸망을 끝내지 않고, 멸망을…… 받아들이면서, 다음을 향하는 것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어어어!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모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뜯어져 나간 목에서는 아직도 피가 철철 흘렀지만, 모론은 상처를 감싸 쥐는 대신에 유폐의 마왕의 뒤를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말하는 거다. 불가능한 것을 욕심낸다고. 때로는…… 불가능을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서 감싸오는 양팔이 유폐의 마왕의 손에 붙잡혔다. 모론의 굵은 팔에 비해 유폐의 마왕의 손은 아주 작았지만, 그가 손가락을 쥐기 시작하자 모론의 근육과 뼈가 악력에 말려 들어갔다. 그렇게 양팔을 부숴버리고 난 뒤에 모론을 옆으로 패대기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을 죽이겠다고? 그러면서 베르무트를 구하고 싶다고? 양립할 수 없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를 죽이겠다고? 그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세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는 구멍 난 배를 감싸 상처를 메우면서, 피범벅의 입술을 잘근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덜덜 떨리는 메리가 유폐의 마왕에게 향했다. 응집된 영력이 마법을 터트렸다. ㅡ꽈앙! 하지만 그 마법조차도 유폐의 마왕의 손짓에 흩어져 버렸다. 사기가 검은 번개가 되어 세냐를 꿰뚫었다. 세냐의 몸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메리와 환상의 마안이 바닥에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의 결의와 결속에는 찬사를 주겠지만, 주장하는 희망이 내게는 아집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크리스티나의 앞으로 나섰다. 흠칫 놀란 크리스티나는 유진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유진은 크리스티나를 자신의 뒤편으로 밀어 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마나 더……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지한 저항을 할 셈이냐. 얼마나 더 욕심을, 아집을 부릴 셈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이길 때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대답했다. 그 말에 유폐의 마왕의 뺨이 씰룩거렸다. 한순간이나마 유폐의 마왕은 짜증과 분노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망시키기도 힘들군. 다소 망가질 것을 감안하더라도 죽일 수밖에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리가 앞으로 향한다. 팔이 움직인다. 여태까지는 유폐의 마왕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한다면 대응할 수 없다. 막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다. 잡을 수 없다. 공격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는 안 된다. 아니스와 모론이 바닥에 처박혀 있다. 세냐도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쓰러져 있다. 하멜이 오지 못했던, 300년 전의 어전과 똑같은 상황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300년 전과는 달리 유폐의 마왕은 멈춰주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는 베르무트가 없고,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약속을 맺지 않을 것이다. 유진도 약속 따위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를 위해. 세냐를 위해. 모론을 위해. 아니스를 위해. 크리스티나를 위해. 빛이 된 거신과 고신들을 위해. 세계수가 된 현자를 위해. 가족을, 라이언하트를 위해. 세상을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이곳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승리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을 바라야 한다.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염원을 들었다. 기도를 찾았다. 쓰러져서는 안 된다. 패배해서는 안 된다. 절망해서도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드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움직였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졌다. 공격이, 주먹이, 가슴을 부수고 들어와서 심장을 으깨버리는 ‘결과’가 보였다. 찰나 후에 일어날 미래를 관측했다. 이번에는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벅! 유폐의 마왕의 손이 위로 튀어 올랐다. 짜증과 분노가 스쳤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설마 유진이 지금의 공격을 쳐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듯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밖에. 지금 유폐의 마왕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사슬을 풀어 내린 상태다. 제한을 풀어버리고 꺼내 온 힘. 300년 전 베르무트가 끊어버리겠다고 내뱉었던, 영겁을 살아온 불사력과 다음 세상을 위해 비축한 마력을 소모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신에 유폐의 마왕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얻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확신이 방금 일부 부정당했다. 절대로 빗나갈 일 없던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멈춰 버린 시간에서 유폐의 마왕과 유진의 눈이 맞닿았다. 충혈된 눈동자 깊은 곳에서 빛이 반짝였다. 절망은 절대로 띄지 못하는 빛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디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동자에 깃든 빛이 신화가 되었다. 꺼졌던 불씨가 다시 흩날리며 불꽃이 타올랐다. 끈적한 어둠은 더 이상 불빛을 덮어 삼키지 못했다. 저벅. 유진은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아악……! 희미해졌던 날개에도 빛이 타올랐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후광이 되어 어둠을 비추었다. 퍼져 나가는 빛이 모론과 아니스에게 닿았다. 부러진 뼈와 터진 근육이 다시 연결되었다. 감겼던 눈이 뜨였다. 둘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얼굴에서 놀람이 사라졌다. 그는 튀어 오른손을 다시 쥐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문이 시작함과 동시에 주먹이 사라졌다. 그 순간에 유진의 시야가 아득히 확장되었다. 유폐의 마왕의 공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았던 쾌속의 공격이 지금은 끄트머리나마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격이 꽂히기 전에 유진의 신성이 타격점을 간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궤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타격점을 간파했다면 아까처럼 무력하게 처맞는 일 없이 최소한의 대응은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움직여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씨X.”&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후회감을 느끼며 욕설을 내뱉었다. 보이기는 하는데 받아내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었다. 타격점을 가로막은 신검은 빛을 발하는 상태에서 터져나갔고, 뒤늦게 갖다 붙인 팔도 부러지고 찢어졌다. 유진이 훌쩍 뒤로 뛰어오르자 유폐의 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이는 것은 틀림없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인다고 해서 완벽하게 대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보인다’는 것에 유폐의 마왕은 조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는 지금 이 전투에서 성장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속된 공격에 익숙해졌나? 몇 번이고 본다면 익숙해질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좁혀질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격차가 있었다. 그러한 격차를 스스로 성장해서 좁혀왔다는 것에 유폐의 마왕은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가 가진 압도적인 강점은 성장력이다. 불과 몇 년 만에 저만큼의 격에 도달한 것은, 그가 단순히 아가로트와 하멜의 환생이기 때문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선을 넘을 때마다 강해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전투에서 유폐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유진 혼자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포효가 어둠을 뒤흔들었다. 몇 번이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는 마치 언데드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일어나서 유폐의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죽지 않았다고 해도 죽기 직전까지 간 순간의 공포와 고통은 있을 텐데, 모론의 눈동자에는 그런 종류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유폐의 마왕에 대한 적의와 살의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도달한 감각은 그의 대전사이자 화신인 모론에게도 연결되었다.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던 모론은 감각이 확장되면서 시간이 느려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착각이나 현혹이 아니란 것을 직감했다. 느려진 시간에서도 유폐의 마왕의 공격은 빨랐지만, 날카로이 곤두선 감각이 공격의 도달점을 예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피하지 않았다. 방어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공격에 공격으로 대응했다.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 무식하게도 주먹을 내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지지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모론의 팔 근육이 부풀었다가 터지고 주먹이 으스러졌다. 그렇지만 모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부수었음에도 유폐의 마왕의 주먹도 더 앞으로는 전진할 수 없었다. ‘가로막혔다’는 기분이 확실하게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으로 되돌아온 아니스가 놀라서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 짓도 안 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세냐를 쳐다보았다. 상처를 회복하고 선 세냐와 유진의 시선이 마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부터 뭐라도 더 해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끄러져 내려간 시선이 환상의 마안과 맞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몽에서나 들었던 웃음소리가 유진의 머릿속에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한숨을 푹 내쉬며 환상의 마안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흐르는 시간이 어그러졌다. 유폐의 마왕이 잠시간 현실이 아닌 꿈속에 끌려 들어갔듯, 유진과 세냐도 환상의 마안의 권능에 의해 똑같은 꿈을 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시 멈춘 시간의 틈. 현실과 동떨어진 꿈의 한복판. 유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세냐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미쳤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선 유진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날카롭게 선 어투지만 세냐는 발끈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혹시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설마 진짜로 이랬을 줄은 몰랐다. 너 뭐 네크로맨서라도 될 생각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건 말이 좀 심하잖아. 내가 흑마법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씨구,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흑마법은 꽤 관심 있게 연구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흑마법도 결국 마법이니까 그런 거야. 그리고 흑마법에도 종류가 다양한 건 유진 너도 알잖아. 내가 미쳤다고 네크로맨시를 익히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면서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다. 300년 전 하멜이 죽고, 유폐의 마왕이 혼을 돌려주었을 때. 세냐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멜의 혼을 목걸이에 봉인했다. 언젠가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인 뒤에, 하멜이 자연스럽게 윤회하여 환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그것은 베르무트가 바란 ‘환생’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결국 목걸이를 빼앗기고 말았지만- 어쨌든 세냐가 과거 ‘영혼’을 붙잡았던 것은 사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자, 진정들 하시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음 섞인 목소리.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런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서 내뱉었다. 그런 유진을 마주 보는 세냐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짜증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코흘리개가 보아도 지금 유진이 어마어마하게 동요하고 감정적인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 나는 환상의 마안을 완벽하게 다룰 자신이 없었어. 사용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극한까지 다룰 만큼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하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평생 후회하고 악몽을 꾸는 것이 싫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괜찮다고 말할 거고, 앞으로도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나도, 아니스도, 크리스티나도, 네 안에 남은 미련을 지울 자신이 있어.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깔끔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영혼이라도 박제해 놓겠다는 거냐? 가끔 내가 후회를 떠올리면 잠깐 만날 수 있게, 뭐, 그런 거야? 그딴 짓을 할 거면 애초에 죽이지도 않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빽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세냐 님이 뒈지고 남은 영혼 따위와 놀아나게 해주려고 영혼을 거둔 줄 알아?!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숨을 씨근거리면서 발을 쿵쿵 굴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부 다, 끝난 뒤에, 너와 결혼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와 결혼하고!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도 뭐…… 걔들이 하고 싶다고 하면…… 같이 해줄 용의가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 무슨 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뒤에 나는 이 영혼을 사역마에 처박아 버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엿같이 못생긴, 흉물스러운 사역마의 몸뚱이에 이 영혼을 처박아 넣겠다고. 그리고 목줄을 묶어서 너와 나의 신혼집의 정원에 묶어서 번견으로 삼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정신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너도 앞으로 악몽 따위는 꾸지 않겠지! 너와 나의 신혼집 정원에 묶인 개새끼의 낯짝을 보면 절대로 악몽을 꿀 수 없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흉물스러운 사역마가 될지라도 나는 나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앞에서 뺨을 부풀리고 있던 누아르가 냉큼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나를 그렇게 묶어 놓는 것 자체가, 당신이 나를 두려워하는 증거 아닌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어쩌고저째?”&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혼은 소멸하지 않았고, 언젠가 환생하고 말 거예요. 그때 내 기억이 온전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아하하, 나와 하멜 사이에는…… 아주 진한 운명의 끈이 존재하죠. 언젠가 환생한 나는, 반드시, 하멜을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유진의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서 유진의 얼굴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흉물스러운 사역마로 만든다는 것은…… 나와 하멜을 엮은 운명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대답하지 않고서 누아르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세냐는 그딴 두려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누아르를 임시로나마 사역마로 삼을 생각은 했지만, 꼭 못생긴 똥개의 모습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머잖아 유진이 완전히 악몽을 극복하고 감정의 잔재를 떨쳐낸다면, 그때는 깔끔하게 누아르의 혼을 놓아줄 용의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러한 뜻을 주장한다면 결국 누아르의 망언에 놀아나게 되는 꼴이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역마는 필요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오늘 전투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이해할게. 하지만, 정말로 사역마는 필요 없어. 그냥…… 모든 것이 끝나면, 혼은 해방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대답했다. 그쯤에서 타협하는 것이 자존심을 세우기도 좋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언제까지 나를 무시하고 있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진은 다가오는 손길을 느끼고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하멜. 나예요, 누아르 제벨라예요. 당신이 심장을 찌른, 입맞춤을 한, 울 것 같은 얼굴로 떠나보낸 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재회가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그런가요? 그때 맛본 내 입술의 감촉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나요? 아하하, 목걸이, 계속해 주고 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좀 꺼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대답할 거면서 왜 자꾸 눈을 감고 무시하려고 용을 쓰나요? 그리고 하멜, 저는 꺼지고 싶어도 꺼질 수 없는 입장이에요. 나라고 해서 이렇게 당신과 재회하기를 바랐을 것 같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세냐를 한번 흘겨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알겠지만, 난 말이에요, 내 죽음에 굉장히 만족했어요. 그것은 내가 바랐던 완벽한 죽음이었죠. 우리는 서로를 파괴했고, 나는 당신에게 깊은 감정을 새기고 죽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결국 이렇게 됐잖아요? 저 심술궂은 마녀가 멋대로 내 영혼을 도구로 삼은 것이 잘못이죠. 그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손이 다시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뜨고 날 봐줘요, 하멜.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짧은 악몽일 뿐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다가온 손이 유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떴다. 살아 있을 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을 한 누아르가 보였다. 그렇게 봐버리니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구궁…… 악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냐는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누아르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 무너지고 있군요. 내 영지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꿈을 꿀 수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도 악몽을 보여주려 시도했었지만…… 잘되지 않았죠. 그의 심연은 깊고, 그가 살았던 현실은 그 어떤 악몽보다 끔찍하고 절망적이었기에. 환상의 마안은 그에게서 공포를 일으킬 수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환상의 마안이 몇 번이나 발동했지만 유폐의 마왕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폐의 마왕의 심연을 들여 본 세냐의 감정이 역으로 흔들리고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죽은 내가 말하기도 우스운 일이지만,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봐요, 하멜. 유폐의 마왕에게는 한참이나 여력이 있죠. 하멜, 당신은 유폐의 마왕에게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로서는 유폐의 마왕의 패배를 상상할 수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네 죽음도 상상하지 못했었지. 하지만 결국 죽었어. 내가, 너를 죽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홀한 죽음이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방긋 웃으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죽은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상상하건 하지 못하건,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알아. 하지만 나는 절망을 느끼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신은 한참 부족하다. 그것이 절망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유진이 해야 할 것은, 가진 모든 힘을 쏟아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쓰러트릴 수 있도록 싸우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당신의 바람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보라색 보석, 환상의 마안이 그녀의 손 위에 나타났다.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보석을 눈으로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자가 되어버린 이 몽마의 여왕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바람이 실현되도록 도와드리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석의 빛이 누아르의 눈동자에 녹아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악몽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찰나의 꿈에 빠져들었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현실, 모론과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맞닿아 있다. ‘가로막혔다는 기분.’ 유폐의 마왕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을 잠시 즐기다가 빙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몽을 꾼 것 같지는 않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질문은 모론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대답 대신에 날개를 펼치고 도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두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 다가가는 순간 신성의 고동을 느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메리를 들고 있는 세냐 또한 당황한 얼굴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이 홀로 공중에 떠올라 있다. 흐릿한 ‘환상’에 세냐의 영력이 더해져 점점 실체를 갖추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 저 모습을 잊을 리가 없잖은가. 누아르 제벨라. 죽었을 그녀가 세냐의 옆에서 나타났다. 심지어 저 모습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사가 된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의 여신을 주장한다면 천사 하나쯤은 둬야 하지 않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 마음대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한 것은 당신이에요, 세냐 메르데인.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아요. 이렇게 당신과 공명하는 편이 지금은 더 도움이 될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동자에서 환상의 마안이 빛을 발했다. 동시에 세냐도 이해했다. 한때 악신의 권좌에 도전하고 몽마로서 마왕마저 아득히 넘어서 신성을 침범했던 누아르와의 공명은, 세냐의 신격을 더욱이 드높였다. 그것으로 환상의 마안은 세냐의 기적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구구궁! 어전이 뒤흔들렸다. 어둠을 몰아냈던 유진의 빛에 세냐의 의지가 더해졌다. 그녀가 지배하는 영력에 신성이 깃들었다. 두 개의 신력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졌다. 성역과 성역이 뒤섞이며 유폐의 마왕을 짓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감각.&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 유진은 경악하면서도 즉시 신검을 들었다. 성역과 성역이 섞여서 하나가 되었다. 환상의 마안은 세냐의 기적이 되어 현실을 개변했다. 이곳은 유폐의 마왕의 어전이자 유진의 성역이며 세냐의 성역이고, 현실이면서도 환상과 꿈에 걸쳐져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가 피어올랐다. 유리의 칼날이 허공에 나타났다. -틀림없다. 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계속해서 불꽃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월광검 레반테인. 유진의 가슴에 박아넣었던 그 검이 새로이 나타났다. 하나로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바랐고, 환상의 마안이 더해진 성역은 바람을 기적으로 실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부족하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입안에서는 피의 맛이 났다. 코에서도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공명 중인 성녀들도 유진의 부하를 떠안아 신음을 삼켰다. 제벨라 시티에서 겪었던 악몽에서 구현했던 것보다 더 많게, 더 강하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개의 레반테인. 거기서 유진은 ‘더’ 갈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륵. 모든 유리의 칼날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불꽃에 불꽃이 중첩되었다. 몇 번이나 중첩된 공검의 화력은 유리의 칼날마저 일그러트릴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광경에 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이 결코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저것 모두가 이 공간에서는 실재하고 있다. 유폐의 마왕을 가로막은 모론조차도 저 터무니없는 광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훌쩍 뛰어 유진의 옆에 내려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지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레반테인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 세상을 몇 번이나 멸망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레반테인의 폭격을 향해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을 몇 번이나 멸망시킬 힘? 그런 것은 유폐의 마왕이 물러서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저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멸망을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보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먹이 불꽃을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8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발이 폭발을 덮는다. 연달아 퍼부어지는 공격에 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직접 길을 만들었다. 그의 주먹은 쇄도하는 레반테인을 가로막고, 공검을 흩트리고, 불꽃을 꺼트리고, 유리의 칼날을 깨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걸음 발이 나아갈 때마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은 수십 번의 움직임을 만들었다. 실체를 부수어도 공격은 끝나지 않는다. 흩트린 공검이 다시 결합하고, 꺼진 불꽃이 재점화되고, 깨부순 칼날이 복원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에 보이는 것은 수십 개의 레반테인. 하지만 이 폭격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 수십 배는 될 밀도를 가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싹하는 감각을 느꼈다. 팔에도 소름이 돋았다. 이만한 공격을 상대하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최초에 후회를 견디지 못하고 멸망의 마왕에게 덤볐을 때. 멸망의 마왕과 자멸하고자 했을 때를 제외하고서는, 이만한 공격을 겪은 적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경시할 수 없다. 이 공격을 대응하지 못하고 당해 버린다면,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죽음조차도 가까이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응하지 못하고 당해버렸을 때의 이야기다. 이 세계는 세냐 메르데인이 환상의 마안과 누아르 제벨라의 잔류사념을 통해 일으킨 기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기적에서 유진과 세냐의 성역은 하나가 되어, 유폐의 마왕을 철저하게 ‘적’이라 규명하고 몰아붙이고 있다. 지금의 세계에서 유폐의 마왕은 아무런 이점도 가질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점을 갖지 못하듯, 단점 또한 갖지 않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폐의 마왕의 사정은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조작되는 현실이 유폐의 마왕을 침범하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이 갖는 격과 힘에 대한 지배권은 이 세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압도적 이점을 갖는 것은 유진과 동료들뿐. 즉, 유진과 동료들은 이 세계에서야 겨우 유폐의 마왕과 맞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유진이 전투에서 성장한 것으로 아주 조금 확신을 부정당했지만, 그것도 결국 오늘의 결과는 바꾸지 못할 작은 이변일 뿐이리라. 비록 이 이변이, 아니, 지금의 시대가 유폐의 마왕이 살아온 영겁 중에서 가장 많은 이변이 있었을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하기로 한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유폐의 마왕은 수십 개의 레반테인을 부수며 나아갔다. 부수고 부숴도 다시 복원되는 칼날을 깨트리고 몇 번이고 다시 타오르는 신화를 손으로 꺼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습은 유진을 섬뜩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꿈과 현실이 연결된 성역. ‘꿈’의 이점은 유폐의 마왕은 누릴 수 없다. 과거 누아르 제벨라는 레반테인의 폭격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꿈을 끝내고 다음 꿈을 여는 것으로 파훼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정면에서 돌파해 올 줄이야. 심지어 레반테인을 깨부수며 전진하는 유페의 마왕의 공세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차분하게 가까운 공격을 걷어내면서 천천히 유진과의 거리를 좁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듭해서 터지는 폭발음 속에서 유폐의 마왕의 중얼거림이 울렸다. 그와 함께 유폐의 마왕의 자세가 바뀌었다. 몸을 옆으로 세우고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단단히 주먹을 쥐어 허리에 갖다 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활짝 펼친 왼손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터졌다. 미세하면서도 견고하게 조정한 마력이 마치 거미줄처럼 폭발의 틈바구니에 나부꼈다. 그 마력의 거미줄은 수천, 수만 가닥으로 분열하여, 부서지는 레반테인의 파편 사이로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왼손을 쥐었다. 가느다란 거미줄이 그 순간에 쇠사슬로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빠지지직! 셀 수 없이 많은 파편과 타오르는 불씨 하나하나가 사슬에 묶였다. 유폐의 마왕이 왼손을 당겼다. 그에게 이어진 수만 개의 사슬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잡아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유폐의 마왕의 몸이 조금 뒤로 기울었다. 허리에 붙었던 주먹이 몸과 함께 기울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아졌다. 그 모든 동작이 유진의 눈에는 한없이 느리게 보였다. 꿈과 현실이 겹친 이 세계에서 유폐의 마왕에게 이질감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유진은 직감했다.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의 마력과 힘, 그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성역을 정면에서 침범하는 것이다. 이 성역의 법칙에 환상이 깃들어 바뀌듯, 유폐의 마왕은 오직 자신의 존재만으로 현실을 다시 바꾸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lt;/p&gt;&lt;p&gt;&lt;br /&gt;&lt;/p&gt;&lt;p&gt;움켜쥔 주먹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끌었다. 발이 생각했던 만큼 뒤편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격발했다. 쿵, 쿵, 쿵. 주먹이 앞으로 밀고 나갈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이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윽고 마왕의 주먹이 끝까지 뻗어졌다. 사슬에 붙잡혀 있던 모든 레반테인이 소멸하고, 겁화처럼 타오르던 신화가 모조리 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나직이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전력을 다해 내질렀던 주먹이 검은 재가 되어서 무너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연에 유폐한 이 힘은 유폐의 마왕 자신조차 베어버리는 양날의 검이다. 문제없다. 이 양날이 아무리 날카로울지라도 그 칼날은 결코 유폐의 마왕의 목숨에는 닿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닿을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재가 되어 무너진 팔의 단면에서 사슬이 튀어나왔다. 서로 엉킨 사슬이 다시 팔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방금의 공격을 정면에서 분쇄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황과 경악은 짧았다. 다시금 유진은 정신을 무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름을 읽는 능력이 끔찍할 정도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읽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주먹으로 부수고 전진하면서 동시에 공격의 모든 흐름을 읽고 계산했다. 레반테인의 폭격에 딱히 패턴을 두지는 않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그 난수마저도 순식간에 읽어냈다. 유진도 평생 전투 감각에 대해서는 어디서 꿀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규격 외의 괴물이다. 최초에 용사였고, 멸망을 막기 위해 마왕이 되어서, 억겁의 세월을 살며 시대의 끝을 몇 번이나 보아 온 대마왕. 이만큼 판이 깔리고 나서야 간신히 대등해진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기적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으로 떠올린 질문은 세냐와 누아르에게 전해졌다. 질문과 함께 전달 된 구상에 세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누아르는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하멜, 진심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미쳤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반응에 유진은 손으로 가슴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륵. 손끝에서 타오른 불꽃이 가슴을 감쌌다. 유진은 바로 옆에 있는 모론을 보았다. 드물게도 굳은 얼굴이던 모론은 유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 짓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넘을 수 없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과의 전투는 항상 그랬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 쿵, 쿵. 겁화를 지워낸 유폐의 마왕이 다가오고 있다. 유진의 생각을 전달받은 성녀들은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직감한 것이다. 방금 시도한 레반테인의 폭격은 유폐의 마왕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여태까지 유폐의 마왕에게 유효한 피해를 주었던 것은 쉬지 않고 몰아치는 연계. 그것을 파악했다면 공격의 성질을 바꿔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도 말했지만 하멜, ‘꿈’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너무 과격한 꿈은…… 현실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죠. 지금도 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것이 유일한 답이라고 선택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네가 바라는 꿈을, 기적을 만들어줄 거야. 하지만…… 솔직히 두려워. 정말 가능한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리는 목소리. 유진은 피식 웃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서 ‘가능하냐’는 질문을 무의미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가능하더라도 시도해야 한다. 계속해서 시도해서 부딪치지 않는다면 저 괴물을, 대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다. 그래서 유진은 세냐와 누아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가락이 가슴을, 심장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믿었다. 믿음은 곧 신앙이고 신앙은 기적을 만든다. 신이 기적을 바란다. 유진의 신력이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투를 결정짓기에는 아직 멀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그니션에 시간제한은 없다. 세냐의 기적이 환상을 현실로 바꾼다. 신력이 깃든 우주가 폭주했다. 그 폭주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폭발이 연속해서 터지고 끝없이 확장되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가 덜덜 떨렸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실은 힘을 견디지 못해 재가 된 것처럼, 유진의 육체도 내부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피부에 쩌적 금이 갔다. 가슴에서 번지는 균열은 내부에서 펑 터질 것처럼 부풀고 줄어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유진과 동화된 성녀들은 혼이 불태우는 것 같은 신열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벌어지는 균열이 점점 달라붙었다. 폭주로 미쳐 날뛰는 힘이 조율되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당하는 것은 성녀들과 유진만이 아니었다. 대전사이자 화신인 모론도 똑같이 이 미친 폭주를 부담했다. 모론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피를 흘리면서 무릎을 굽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핫! 아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빛을 철철 쏟아내는 환상의 마안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세냐도 진동하는 메리를 간신히 붙들고서 신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적을 구현하는 것이 버겁다. -공감했다. 이 정도의 힘이 아니고서는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음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저 앞에서 집중되는 ‘힘’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경이롭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유폐의 마왕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그가 몇 번의 세계를 넘어서 연명을 바란 것이 광기라면, 지금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연명이 아닌 종결을 갈망하는 광기였다.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고 세상을 밝히는 광염이었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직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웃었다. 빛에 대항하듯 시커먼 마력이 몸을 덮었다. 강렬한 빛에 그림자가 짙어지듯이 지금의 유폐의 마왕의 존재감은 짙었다. 철그럭, 철그럭. 평생 들어 온 사슬 소리가 마왕의 움직임을 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이 전진했다. 유진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괴성과 함께 땅을 박찼다. 손에 쥔 도끼의 날이 박살 났다. 대신에 찬란히 타오르는 불꽃이 도끼날이 되었다. 콰르르르! 도끼가 빛을 이끌었다. 유폐의 마왕의 주먹이 도끼의 앞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번쩍 터진 빛에 세상이 뒤흔들렸다. 꿈과 현실에 침식된 바벨의 외곽이 소멸했다. 유폐의 마왕은 날아간 팔을 추스르는 대신에 몸을 비틀었다. 주먹을 쥐는 오른팔에 사슬이 휘감겼다. 상대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공격에 팔이 부서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 정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타격에 모론의 우반신이 터졌다. 휘청거리며 밀려나는 모론의 머리 위, 유진이 도약했다. 높이 치켜든 신검에 불꽃이 뒤덮였다. 울룩불룩 부풀어오르는 불꽃이 수십 개의 태양을 만들었다. 이클립스가 유성우처럼 쏟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양손이 전방을 휩쓸었다. 찰나에 이클립스의 흐름을 읽고 통제했다. 연계되어야 할 폭발은 유폐의 마왕을 덮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황하지 않았다. 유진의 손에는 아직 신검이 있다. 유진의 눈과 입에서 피가 흘렀다.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을 만드는 대신에 그 모든 힘을 신검에 집중했다. 이그니션도 몇 번이 중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일 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유진의 손에서 떨어졌다. 추락한 신검이 마왕을 내리찍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지지직! 유폐의 마왕이 무릎을 꿇었다. 무수히 많은 사슬이 유폐의 마왕의 몸을 지탱하고 신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런데도 힘은 무거웠다. 유폐의 마왕은 피를 토하면서도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마왕은 피범벅의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검의 위. 흩트렸던 태양들이 다시 모이고 있다. 어느새 세냐가 하늘에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우주가 현실로 구현되었다. 천사의 모습을 한 누아르가 천사답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펑, 펑, 펑! 태양이 작게 줄어 수백 수천 개의 별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하늘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밤하늘을 밝히는 모든 별이 유폐의 마왕을 향해 추락했다. 이건 정면에서 돌파할 수 없다. 유폐의 마왕은 빠르게 확신했다. 온갖 혼란을 간파하는 마왕의 감각은 이 공세에서 활로를 찾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리릭! 수만 개의 사슬이 마왕의 손에 잡혔다. 유페의 마왕은 그 모든 사슬을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서 별들을 부수었다. 그렇게 만든 작은 틈에서 뒤로 도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유진과 모론은 유폐의 마왕이 물러서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다. 모론은 양손에 쥔 두 자루의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쏟아지던 별이 도끼에 맞아 부서졌다. 그 모든 파편이 유폐의 마왕을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움직임을 제한했다. 유폐의 마왕이 저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모든 가능성이 유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읽고 보는 것은 유폐의 마왕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유진 역시 이 전투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자신을 죽일 만큼 몰아붙인 폭주는 유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극한까지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움직이기 전에 유진이 먼저 움직였다. 유폐의 마왕이 팔과 사슬을 휘둘러 길을 열기 전에 유진이 먼저 그 길을 가로막았다. 사슬의 앞에는 이미 신검이 있었다. 대신에 주먹을 휘두를 때 유진은 이미 사슬을 끊고 신검을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품을 파고들었다. 유진의 손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으로 향했다. 지금 유폐의 마왕은 길을 보지 못했고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유진에게 가로막혔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바닥에서 전해진 힘이 유폐의 마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왕의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해서 공격을 이었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주먹이 유폐의 마왕의 머리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휘청거리는 마왕의 옆구리에 모론의 도끼가 꽂혔다. 허리가 끊어졌지만 마왕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이 이어지는 순간에 유폐의 마왕은 다시금 활로를 찾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모론의 팔다리를 잡아 뜯어버렸다. 어느새 가까이 온 신검에는 오히려 목을 내주었다. 신검이 목을 파고들었을 때. 유폐의 마왕은 가까이 온 유진의 가슴을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그 충격에 유진은 신검을 놓치고 물러섰고, 유폐의 마왕의 몸도 땅을 뒹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뒹굴었다. 유진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대마왕이 몸도 추스르지 못하고 땅을 뒹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만 더.’&lt;/p&gt;&lt;p&gt;&lt;br /&gt;&lt;/p&gt;&lt;p&gt;울컥 나오는 피를 삼키며 달려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뒹굴던 유폐의 마왕의 손이 땅을 긁었다. 추태라고 할 모습이지만 정작 유폐의 마왕은 수치스러운 기분은 느끼지 않았다. 지금 그가 느끼는 것은 이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적들에 대한 찬사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세계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슨 의미가 있나? 허무하게 죽었던 아가로트의 환생은 결국 모든 운명을 짊어지고서 이곳에 왔거늘.&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련에, 시험에, 전력으로 부응하고 있다.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폐의 마왕은 만족했다. 이 정도의 집념과 광기.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오는 기도는 마왕이 정했던 기준을 진즉에 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과 동료들이 포기하지 않듯, 유폐의 마왕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만족했다고 해서 져줄 수는 없다. 유진이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듯, 유폐의 마왕도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령을 떠올렸다. 그는 모든 진실을 알지 못했지만, 멸망이 반복되고 유폐의 마왕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것을 안 뒤에 스스로 선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렇게 죽어 가치를 증명했듯, 나도 다르지 않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범벅의 입술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 시험은 만족하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낼 수 없다. 상대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려야만 끝이 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의지는 어떤가? 몇 번이나 절망하고서 누더기처럼 기워내고서 남긴 답은, 멸망과의 공존이다. 죽일 수 없는 이상 공존할 수밖에 없다. 죽일 수 없는 존재를 죽이겠다고 날뛰다가 모든 것이 끝나게 둘 수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으로의 영원을 마왕으로 군림해야 할지라도. 모든 망자의 혼을 짊어지고, 결국 공허하게 될 뿐인 처음과 끝을 반복할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욕심을 부리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닥을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벌겋게 충혈된 안광이 번득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성을 고집하는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가 저물고 밤이 되어 다시 해가 떠오르듯이, 멸망이란 파도는 당연히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 멸망의 탄생에 빌미를 주고 목도할 수밖에 없던 남자는 스스로 마왕이 되어 세계를 모래성으로 만들었다. 몇 번이나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성이 결국 무너져 버려도, 파도가 물러가고 나면 흙투성이의 손으로 다시 모래성을 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르겠구나, 정말로 모르겠어.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네가 주장하는 희망을 여전히 아집이라고 느낀다. 네 욕심을 도저히 긍정할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한 몸이다. 갈라져 나왔다고 해도 베르무트의 본질은 멸망과 이어져 있다. 멸망의 마왕을 없애고 베르무트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유진과 동료들이 베르무트를 포기했다면. 멸망의 마왕과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를 모두 죽이고, 온전히 세상을 구하는 것만을 바랐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을 해내겠다고 말하면서 인정을 남기니, 유폐의 마왕은 도저히 저 아집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절망시키고자 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긍정은 필요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검이 가로막혔다. 유폐의 마왕은 너덜거리는 손을 당기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싸움을 거는 것은 유진만이 아니다. 뒤에서는 모론이, 위에서는 세냐가 있다. 그들이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성녀들이 받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이기면, 내가 옳은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내거는 신념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순하게 오늘 승리하는 쪽이 옳은 것이다. 최후에 멸망을 넘지 못할지라도, 오늘의 패자는 결과를 논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생각했고, 유폐의 마왕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발언을 이기적이거나 독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유폐의 마왕도 마찬가지다.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주장한다면, 결국 둘 중 하나가 꺾일 때까지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르다. 유폐의 마왕은 주먹을 쥐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혼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동료가 있다. 승리를 기도하는 신도가 있다. 사정을 모르는 자들일지라도 지금 시대에서 죽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용사가, 신이, 빛이, 마왕을 쓰러트려 승리하고 평화를 열기를 바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어떤가. 이 전쟁에 참전한 마군은 유폐의 마왕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패자를 유린하고, 영원불멸 대륙에 군림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멸망을 모르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들 영원불멸한 군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 후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유폐의 마왕에게, 혹은 멸망의 마왕에게 몰살당할 것을 알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시대의 모든 기억을 잃고서 다음 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사슬에 이은 셀 수없이 많은 영혼으로 있다가, 선별을 거쳐 다음 시대에 태어날 것을 알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선택받지 못한 영혼 중 일부는 융해되어 마력의 소자가 되고, 원시의 정령이 되고, 세상의 마나가 될 것을 알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마저도 되지 못한 영혼들은 하나로 뒤섞이고 사악한 힘이 되어, 유폐의 마왕의 깊숙한 곳에 봉인이 될 것을 알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항상 그래 왔다. 다른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푸념한 적도 없다. 토로한 적도 없다. 이전 시대에 그랬고, 이번 시대도 그랬다. 제법 오래 곁에 두었고, 스스로 이례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꼈던 측근, 가비드 린드먼도 최후까지 유폐의 마왕이 품은 진실은 알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하의 비원이 성사되기를 바랍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최후의 순간에는 조금은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비드가 아닌 다른 마족들은 유폐의 마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죽는다면, 부디 제 혼을 거두어주십시오. 폐하와 함께 끝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드시 바벨에서 죽겠다는 말과 함께, 문 앞에서 허무하게 죽은 발자크 루드베스. 그는 유폐의 마왕이 보려는 ‘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개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막막한 절망, 그런 절망에서 존재는 원망할 존재를 찾게 마련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 평생 충성한 마족들도, 마왕이 내리는 은혜를 고혈처럼 빨아먹어 온 헬무드의 이민자들도, 생전의 특혜를 갚기 위해 저당 잡힌 혼들도, 멸망에 수긍하고 받아들인 유폐의 마왕을 원망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저 모든 원망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가 흔들렸다. 지금도 유폐의 마왕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 초를 끝없이 늘린 것만 같은 기나긴 찰나. 그 순간의 순간의 순간에서 유폐의 마왕은 계속 공격하고 방어하며 탐색했다. 서로의 심상이 이어졌기에 공격에는 틈이 없다. 최소한의 피해를 내주면서 깨부수고 흩트려 보아도 공격은 점점 격해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압도적인 힘으로 우직하게 덤벼온다. 화신이 되어 더욱이 증폭된 힘은, 이 세계에서는 일격 일격이 유폐의 마왕의 존재를 울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마법은 상상하는 모든 불가능을 실현하고 있다. 몇 번이나 밤하늘이 쏟아졌다. 세냐의 마법은 이 세계를 몇 번이나 숲으로 만들고 다시 뒤집어 작열하는 지옥으로 만들고 불타서 삭막한 사막으로 바꾸었으며 다시 차가운 동토로 얼렸다. 그 모든 재앙은 온전히 유폐의 마왕에게만 향할 뿐 동료들은 해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위에 유진의 태양이 추락하고 다시 떠올랐다. 유진의 손에 쥔 무기는 과거의 전쟁신이었음을 증명하듯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보아도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공격이 유폐의 마왕을 깎아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죽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세계도 유폐의 마왕의 힘은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제아무리 잘 만든 꿈이라도 결국은 현실에 녹아든 것일 뿐. 현실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유진과 그에게 이어진 빛, 그리고 세냐의 신력이 환상의 마안을 극한까지 활용하고 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세계가 영원할 수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탐색하면 간파할 수 있다. 부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부서서 무너트릴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느긋하게 구조를 파악해서 무너트리려 할 필요가 없다. 그것보다 쉬운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세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것은 환상의 마안. 그리고 그 환상의 마안을 사용하는 것은 영혼만 남아 천사가 된 누아르 제벨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심연에서 한 번 더 사슬이 풀렸다. 그러자 유폐의 마왕의 팔이 본래의 형태를 잃고 시커먼 마력 자체가 되어서 요동쳤다. 동시에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가 먹물이 녹아들 듯 검은색에 덮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풀려나온 광기가 이성을 흔들었다. 억겁의 세월을 버틸 수 있게끔 봉인한 광기가 힘과 함께 풀려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술에서는 피가 아닌 독기가 흘러넘쳤다. 이 이상 독을 해방하는 것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위험하다. 자칫하다가는 자아가 붕괴해서, 멸망의 마왕과 다름없이 미쳐 날뛰는 재앙이 될 것이다. 당연히 유폐의 마왕은 그러한 몰락을 바라지 않는다. 똑같은 재앙이 되어버려도 멸망과 공존할 수는 있겠지만, 앞으로의 세계는 만들 수 없을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로 몰아붙이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게 변한 눈동자가 안광을 발했다. 조금 더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이려던 유진과 모론, 세냐는 저 안광에서 원초적인 공포와 섬뜩함을 느꼈다. 마치 멸망의 마왕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저 ‘독’이 자신을 겨냥하는 것을 느꼈다. 독이 풀려나오는 것만으로 꿈이 뒤흔들린다. 누아르는 왼쪽 눈동자에서 생으로 지져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결코 눈은 감지 않았다. 지금이 분수령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더 몰아붙이지 않는다면 유폐의 마왕에게서 승기를 잡을 수 없다. 저 독은 유폐의 마왕에게도 치명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집착이란 감정은 나도 잘 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일그러지는 입술을 붙잡으며 억지로 웃었다. 유폐의 마왕은 ‘다음’에 집착하고 있다. 저 치명적인 독의 대가로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그 독이라도 당신은 죽지 않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숨에 닿지 않는 독. 그럼에도 사용하지 않고 봉인하는 것은, 고통이 싫어서? 아니, 고작 그런 이유일 리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저만큼의 독을 억제했던 것은. 저 검게 물든 눈동자에 감긴 광기가 가리키는 것은. 유폐의 마왕이 결코 바라지 않는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안다. 누아르도 그랬다. 지금의 내가,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증오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즉, 유폐의 마왕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기 전에 독을 다시 사슬로 묶어 유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코 죽일 수 없는 저주를 안은 마왕이라도, 가진 모든 수단이 가로막혀 버리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절대로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유폐의 마왕이 버티지 못하고 독기를 수습할 때까지 버틴다면 누아르의, 아니, 하멜의 승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승리는 나도 바라고 있지만,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유폐의 마왕이 풀어낸 어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진과 모론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 유진의 등을 보며 누아르는 이를 꽉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승리는 나에게 가혹한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독기를 수습할 때까지 버티면 된다고?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독기는 몇 번의 시대의 죽음과 억만의 시체와 영혼이 녹아서 쌓인 시독(屍毒)이다. 살아 있을 적의 누아르가 군림했던 제벨라 시티라도 저 시독에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어서 간신히 영혼만 남은 누아르가, 저 시독을 상대로 유폐의 마왕보다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그것을 확신했다. 유폐의 마왕이 시독을 수습하기 전에,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오염되어 버릴 것을. 그렇게 오염되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소멸해 버릴까? 아니면, 오염되어서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쪽이든 다시 환생해서 하멜과는 만나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와서 그것을 두려워할까? 아니, 두렵지 않다. 애당초 누아르가 바랐던 죽음에서 환생이란 다음은 없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가 바라는 것은- 하멜이 승리하는 것이다. 최후에 자신이 어떻게 되건, 그것은 상관없다. 이 꿈이 완전히 무너져서 나란 존재가 사라지게 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이 하멜의 승리에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누아르는 환상의 마안을 감지 않고 독기를 노려보았다. 결국 꿈은 무너지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최대한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이기를 바라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 이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모론은 그 독기를 느끼지 못했다. 유폐의 마왕이 새로이 풀어내 어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느꼈어도, 그것이 독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누아르가 저 독기를 온전히 자신에게 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아르와 연결된 세냐는 저 독기를 어느 정도 간파하고서, 경악한 눈으로 누아르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쉿.]&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 전해진 감정에 세냐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멈추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누아르가 결심한 것이고, 이것 외에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방법이 없다는 것은 세냐도 이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끝내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딴 식으로 누아르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은 세냐의 이상과 어긋난다. 그렇기에 세냐는, 누아르가 소멸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고자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줄 알았다. 더 이상 팔의 형상도 아닌 시커먼 어둠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지지직! 궤적을 따라 번진 독기는 세상을 흔들었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는 유진과 모론은 독기를 베고 부수면서 유폐의 마왕에게 들이닥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얕잡아 보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치명적인 독일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완전히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유진과 모론, 세냐의 공격이 유폐의 마왕을 소모할지라도, 중독의 사선에 도달하는 것보다 누아르가 중독되어 소멸하거나 미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 네가 하멜을 그토록 위할 줄은 알았지만, 결국 네 소멸이 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성이 크게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독기에 범벅된 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유폐의 마왕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변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유폐의 마왕은 이변의 정체를 이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독기와는 다른 오염이 유폐의 마왕의 심연을 갉아먹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머릿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이 순간에 발자크 루드베스의 얼굴이 떠오른 것인지는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나? 만약 그랬다면 유폐의 마왕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발자크가 아무리 용의주도할지라도 그는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한 흑마법사. 계약자의 심상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유폐의 마왕은 휘하의 반기조차도 자유로이 내버려 두어 왔다. 그 생각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실천하고서 실패하면, 언제나 그 책임을 물어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인간 흑마법사에게 단 한 번도 반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발자크는 언제나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했고, 바벨에서 와서도,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순간에 발자크는 세냐의 마법에 감탄하고, 그러면서도 유폐의 마왕의 승리를 바라며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 유폐의 마왕이 알고 있는 발자크 루드베스에게 이런 재주는 없다. 발자크는 단 한 번도 유폐의 마왕에 대한 배신을 떠올린 적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도 유폐의 마왕은 머릿속에 떠오른 발자크의 얼굴과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근거 따위는 없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에게 찾아온 불편하고 끔찍한 이변의 근원이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것을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직감이고 본능이었기에 근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으며, 유폐의 마왕은- 지금 이것이 평생에 걸쳐 썩히고 쌓아 온 시독보다도 더 치명적인 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각이 엉클어진다. 의지를 떠나서 멋대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지금 정말로 서 있는 것인지 누워있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어떻게든 이성의 날을 세워보지만 육체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신에 독기는 더욱 짙게 느껴졌다. 심연에서 치솟은 독기가, 유폐의 마왕의 뜻과는 달리 날뛰면서 마력을 갉아먹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폭주다. 독기가 멋대로 폭주하고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는데, 유폐의 마왕이 평생 지배하던 것들이 계속해서 통제에 벗어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험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만큼은 유폐의 마왕조차도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폐의 마왕의 심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어떤 최악에도 유폐의 마왕이 지켜야 할 것은, 멸망의 마왕과 연결한 사슬이다.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면 유폐의 마왕은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을 느리게 느끼는 것은 유폐의 마왕뿐. 그를 공격하는 적들에게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유진과 모론은 유폐의 마왕에게 생긴 이상을 눈치챘다. 그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되 꺾이지 않고 대응하던 유폐의 마왕이, 갑자기 대응하지 않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에는 무언가에 대한 노림수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틈을 열고서 깊이 들어오라 손짓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아니었다.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도 유폐의 마왕이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흘려내지도, 막아내지도, 반격하지도 못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새끼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경직된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가까이서 보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의 눈동자에는 유진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추어질 뿐이었다. 마치 눈을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제로 그랬다. 홀로 동떨어진 시간의 골. 심연의 한복판에 선 유폐의 마왕의 정신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검게 출렁거리는 바다에서 거품이 부글거리며 끓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바다는 유폐의 마왕의 심연이다. 그가 살아온 억겁에서 쌓인 광기와 영혼들이 이곳에 녹아 있다. ‘오늘’ 죽은 발자크의 영혼은 결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의 영혼을 심연에 처박은 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힘과 격을 찬탈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헛수고다, 발자크 루드베스. 네 비수가 치명적인 것은 인정하지만, 이미 죽은 너로서는 절대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탈?”&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글부글 끓는 거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심연에는 무수히 많은 영혼이 녹아 있고, 지금 발자크도 그중 하나가 되어 있다. 만약 발자크의 노림수가 저 심연에서부터 기어올라 유폐의 마왕의 영혼을 역으로 잡아먹고 마왕의 힘과 격을 빼앗는 것이라면, 발자크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큰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폐하. 저는 마왕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도 없다. 심연에서 홀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다. 발자크의 영혼은 바다의 일부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기묘한 것이다. 이 넓고 깊은 바다의 일부가 되었는데도 발자크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고작 100년도 되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그가, 저 수많은 영혼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하께서도 제 비원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품이 점점 번지고 바다가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원. 당연히 알고 있다. 전설적인 마법사가 되는 것. 마법을 동경하고, 갓 마법사가 된 어린이나 가질 법한 비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의 충성한 흑마법사로서 유진 라이언하트를, 세냐 메르데인을 쓰러트린다. 하하…… 그것도 충분히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폐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가 없어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지만, 발자크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과 만족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흑마법사가 아닌 마법사로 전설이 되고 싶습니다. 전설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 된다면, 마족이 아닌 인간에게 회자 되고 싶습니다. 마왕이 되고 싶냐니요? 하하, 폐하께서는 저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것을 몹시나 싫어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다. 인간을 버리고 마왕이 되기를 바랐던 에드몬드 코드렛과는 달리, 발자크는 단 한 번도 인간을 버리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폐의 마왕은 자신이 알고 있던 ‘발자크 루드베스’라는 인간에 대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발자크의 심상에서는 읽을 수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상해 보십시오, 폐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가…… 결정적인 순간에 마왕을 배신하면, 과연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흑마법사의 배신이 마왕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그 부상을 통해서 용사가, 인간이 승리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간절한 바람은 그것입니다. 비원이 가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살아서 충분히 준비는 했습니다만, 죽어버리고 난 뒤에는 더는 준비할 수 없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발자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품은 영혼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심연에 보내지 않았던 발자크의 영혼이 이곳에 있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납득했다. 왜, 발자크가 바벨에서 죽겠다고 한 것인지도 납득했다. 저 남자는 죽음을 이용한 것이다. 죽고서 영혼이 거둬지는 순간에 혼을 나누었다. 그것은 유폐의 마왕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교했고, 결국 노렸던 대로 분리한 혼은 아무것도 아닌 찌꺼기가 되어 심연으로 흘러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식으로 나를 속일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임수는 제 얼마 되지 않는 특기 중 하나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유폐의 마왕은 지금 발자크가 어떤 얼굴일지는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시그니처도 오늘을 위한 포석이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러트니가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의 시그니처는 살아 있는 것을 먹는다면 그 힘과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소멸하지 않고 발자크에게 더해진다. 그렇게 발자크는 자신의 혼을 은밀히 부풀려 왔다. 그렇게 부풀린 뒤, 유폐의 마왕에게 심상이 읽히지 않도록 자신을 둘로 나누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발자크의 노림수는 성공했다.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가 죽는 순간까지 배신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죽은 영혼이 나누어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 나는 네가 비원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네 죽음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구나. 너는 최후까지 비원을 추구했고, 허무하게 죽지도 않았다. 자신의 죽음마저 이용해, 나를 파고드는 비수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저 혼자 죽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폐하를 노리는 비수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라고 해서 모든 것을 계획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결정적으로 유폐의 마왕이란 존재에 대해 무지했다. 혼을 나누어 심부까지 파고드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유폐의 마왕을 위협하는 극독이 되리란 자신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자신을 독으로 바꿨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에게 여유가 있었다면…… 발자크는 비수가 되기도 전에 역으로 소멸당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이렇게 비수가 되었다는 것은, 폐하께서…… 여유가 없으시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폐하는 밑바닥에 고인 힘마저 끌어내셨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대답하지 않고서 빙그레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저는 독이 되어 폐하의 심연에 증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만으로는 폐하를 쓰러트릴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아무리 증식한들, 폐하께서는 저를 통째로 잘라버릴 수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저를 잘라낸 만큼 폐하께서는 약해지실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가 요동치고 있다. 지금 순간에도 발자크의 영혼은 심연에 잠긴 것들을 잡아먹으며 덩치를 불리고 있다. 덩치가 커질수록 포식의 속도가 빨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으로 됐습니다. 결국 저는 폐하의 패배와, 다음이 아닌 ‘지금’을 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쿠웅.&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진동이 세상을 흔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시야가 바뀌었다. 유폐의 마왕은 심연이 아닌 현실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실의 유폐의 마왕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죽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재생이 더디고 정신이 혼미하다. 감각은 여전히 엉클어져 있다. 중독이 가속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서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다, 발자크 루드베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금 유폐의 마왕은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큭큭 웃으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히 이것은 치명적이구나. 너뿐만이 아니지. 지금 모든 것이 내게 치명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레 나온 발자크의 이름에 유진과 세냐가 멈칫했다. 하지만 왜 그 이름을 내뱉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휘청거리며 일어서는 유폐의 마왕의 그림자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일어선 유폐의 마왕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씨.”&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기겁하며 신검을 휘둘렀다. 길게 뻗어간 참격이 유폐의 마왕의 목을 잘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머리를 떨어트렸는데도 유진이 느끼는 직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똑같이 느낀 모론은 즉시 공간을 휘어잡아 유진을 당겼다. 그리고 펄쩍 뒤로 뛰어오르면서 다시 손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르르르! 억지로 밀려 나간 공간이 유폐의 마왕과의 거기를 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세냐도 주저하지 않고 메리를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근처에 떠 있는 환상의 마안을 손으로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내 도구니까, 멋대로 굴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소멸을 각오했다는 것은 안다. 아까는 그 각오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폭주하는 독기는 이미 꿈을 무너트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유폐의 마왕이 하려는 것은, 이 세계를 고집하다가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자기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로 몰렸나? 내뱉었던 이름, 발자크 루드베스가 무언가를 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저 유폐의 마왕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몰린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부풀어 오르는 그림자, 유폐의 마왕에게 집중되는 흉악한 마력.&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기도가 눈부신 빛을 일으켰다. 성역의 결계가 유진과 모론, 세냐를 감쌌다. 그리고 메리가 마법을 일으켰다. ㅡ빠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며 길을 만드는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잘린 목에서 어둠이 솟구쳤다. 심연의 독기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환상의 마안을 거두는 것으로 꿈이 끝나 버렸기 때문에 유진과 모론도 독기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연거푸 뿜어져 나오는 독기와 마력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유진 일행에게 밀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 하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시커먼 격류에서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자크의 웃음소리였다. 유폐의 마왕이 발자크와 바다를 통째로 뽑아낸 것이다. 그것으로 발자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지만, 발자크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면 전설의 일부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선명한 목소리가 세냐와 유진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그 순간에 유진과 세냐는 발자크가 무엇을 의도하고 죽었는지를 이해했다. 세냐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를 위한 동화책을 써주고 싶을 정도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자크가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쉬움은 느끼지 않았다. 최후에 발자크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만족하며 죽었다. 마왕을 배신한 흑마법사. 마왕의 패배에 일조한 흑마법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비원은 아직 전부 이뤄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르르르르! 유폐의 마왕에게서 뿜어져 나온 독기와 마력이 바벨을 침식하고 무너트렸다. 그 무식한 파괴에 휘말리기 전에, 세냐의 마법은 공간을 찢어 만든 길에 문을 열어 바벨을 탈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부유감 뒤에 유진 일행은 전장의 하늘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장의 하늘을 부유하던 바벨이 무너진다. 300년 전부터 군림해 온 마왕성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붕괴하고 있다. 그 광경에 전장의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과 마군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경악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하는 마군은 설마 자기들 머리 위에서 바벨이 붕괴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왕에게 맞서는 적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힘은 유폐의 마왕 앞에서는 대단치 않으리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은 붕괴했지만, 마왕은 패배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이 붕괴하면서 퍼져나가는 힘. 사악하고 불길한, 시커먼 마력. 유진이 띄웠던 신력의 태양이 바벨이 내뿜는 어둠에 뒤덮였다. 저렇게 붕괴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붕괴했기에 하늘은 밤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의 피에 흠뻑 젖어 숨을 몰아쉬던 시엘은 놀라서 그 이름을 외쳤다. 너무나도 짙은 어둠이 빛을 가리고 있지만, 시엘의 감각은 저 시커먼 밤 너머의 빛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먹에 엉겨 붙은 살점을 털어내던 카르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바벨이 붕괴하며 퍼졌던 어둠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쏟아지던 바벨의 잔해가 우뚝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중심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이었다. 그는 붕괴하다가 정지한 바벨의 중심에서 긴 숨을 내뱉었다. 유폐의 마왕이 호흡하자 바벨의 잔해와 어둠이 두근거리며 공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쿨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의 중심에 떠 있지만 유폐의 마왕은 피를 토했다. 발자크와 함께 잘라낸 것은 독기뿐만이 아니다. 발자크의 속임수는 유폐의 마왕에게 치명적이었다. 잘라내지 않았다면 절대로 끊어져서는 안 될, 멸망과 연결한 사슬마저 끊어졌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참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시 호흡을 고른 뒤, 유폐의 마왕은 메마른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콰르르르! 정지했던 바벨의 잔해가 모조리 마력으로 바뀌어서 흩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치명적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라낸 것이 너무 많다.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다가 다시 피를 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죽지는 않는다. 죽지만 않을 뿐이다. 더는 싸울 수 없게 된다면, 죽지 않아도 패배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유폐의 마왕은 피범벅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회오리치는 어둠 저편에서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참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대가. 환상의 마안을 촉매로 삼아 연결한 꿈과 현실. 몇 번이나 중첩한 이그니션. 수십 개로 늘린 레반테인과 공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힘의 반동은 꿈이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용한 힘의 반동은 꿈에서 깨어난 뒤에 찾아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리는 손을 쥐며 곁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호흡을 가다듬지 못하고 거칠게 내쉬는 모론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씹는 세냐가 보였다. 성녀들은 아직 유진과 공명하고 있다. 하지만 둘의 상태도 나쁘면 나빴지 결코 좋지는 않았다. 그나마 유진이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 있는 것은, 성녀들이 유진이 감당해야 할 대가를 일부 부담하면서 치료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은 감겼다. 완전히 부서지지 않고, 누아르의 영혼도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전투에서는 더 이상 환상의 마안을 뜰 수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울 수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태는 좋지 않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분이다. 하지만 싸울 수 있다. 꿈에서의 반동은 심신을 지칠대로 지치게 만들었지만, 결국 현실은 아니었기에 신력은 쓸 수 있다. 불꽃은 사그라지고 빛은 희미해졌지만, 유진은 검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유폐의 마왕은 쓰러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내뱉었다. 그가 손을 뻗자 어둠 속을 떠돌던 도끼가 모론의 손으로 날아왔다. 평생 휘둘렀던 도끼는 자루가 끊어질 것처럼 너덜거리고 날에도 이곳저곳 금이 갔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모론은 씩 웃으며 도끼를 양손으로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껴진다,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둠이 준동하고 있다. 모론의 눈은 짙은 어둠을 꿰뚫어 유폐의 마왕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토록 멀었던 유폐의 마왕이, 지금은…… 닿을 수도 있을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있을 것 같다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장의 소리는 멈춰있다. 모두가 하늘을 보고 있다. 유진은 왼손을 가슴에 얹으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가락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칠 대로 지친 심장에 불꽃이 깃들었다. 혹사당한 우주가 폭발하며 신력이 폭주했다. 사그라졌던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유진을 중심으로 몰아친 빛이 어둠을 밝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유진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지금이 아니고서는 유폐의 마왕에게 닿을 수 없음을 절감했다. 환상의 마안과 누아르 제벨라를 이용했다. 발자크가 죽으면서 감춘 노림수가 적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결과, 간신히 유폐의 마왕을 몰아붙였다. 여기서 보신 따위를 생각하며 물러섰다가는 절대로 유폐의 마왕에게 닿지 못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눈동자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메말랐던 메리의 꽃잎이 다시 펼쳐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화아아아악! 영력의 폭풍이 엷어진 어둠을 완전히 밀어냈다. 홀로 선 유폐의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번쩍 터진 빛이 하늘에 선을 그었다. 한줄기 번개가 돼서 도달한 유진의 신검이 유폐의 마왕에게 쇄도했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던 유폐의 마왕의 손이 참격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지지직! 강제로 꺾인 참격이 판데모니엄의 성벽에 꽂혔다. 굉음과 함께 성벽과 도시가 갈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에서 날뛰던 멜키스가 비명을 질렀다. 파괴에 눈이 멀었던 멜키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달아 터지는 빛이 어둠을 부수고 있다. 유진이 퍼붓는 참격은 당장에라도 유폐의 마왕을 도륙을 낼 것처럼 보이나, 유폐의 마왕은 물러서지 않고 그 모든 참격을 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템페스트가 고함을 질렀다. 하멜의 결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물러서 주었지만, 템페스트 역시 바벨과 유폐의 마왕에게 원념을 품고 있다. 폭풍은 300년 전의 패배와 굴욕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300년 동안 북상을 바라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 잠깐, 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메가 포스가 멜키스의 제어를 벗어났다. 템페스트가 일으키는 폭풍이 오메가 포스의 팔을 멋대로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릉! 제어에 벗어나 폭주하는 것은 템페스트뿐만이 아니었다. 마왕을 쓰러트리겠다는 의지는 그들도 똑같았기에, 다른 3명의 정령왕도 템페스트의 의지를 따라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의 비명과 함께 오메가 포스가 주먹을 내질렀다. 멜키스의 의지와는 다른 전력이 하늘을 꿰뚫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면 나는 어떡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4명의 정령왕이 쏟아낸 전력이 오메가 포스를 소멸시켰다. 멜키스는 추락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 전력은 지금의 유폐의 마왕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강력했다. 꽈아앙! 손을 휘둘러 궤적을 바꾸기는 했다만, 폭풍에 찢긴 팔에서 피가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팔 위로 모론의 도끼가 떨어졌다. ㅡ콰직! 너덜거리던 팔이 완전히 잘렸다. 찍혀온 힘에 휘청거리던 유폐의 마왕은 입술을 뿌득 씹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꽈앙! 내지른 발길질에 모론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후에 벌어질 일은 안다. 계속 그래왔다. 모론이 제 몸을 아끼지 않고서 틈을 만들면 즉시 유진의 공격이 파고든다. 이번에도 그랬다. 모론은 팔을 자르고 발길질을 유도했다. 그리고 신검이 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는 있다. 눈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간신히 피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다. 신검이 스친 허리에서 피가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보다는 느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폭주시킨 이그니션에 비하자면 지금은 당연히 느리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유폐의 마왕이 느렸다. 누적되었던 피해를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리가 베였는데도 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었다. 떨리는 손이 주먹이 되었다. 꽈직!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때렸다. 신검이 부서지고 주먹에서 피가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흩날리는 핏방울 너머에서 빛이 번쩍였다. 세냐가 일으킨 마법이 무수한 별이 되어 유폐의 마왕에게 처박혔다. 꽈과과광! 거대한 폭발이 유폐의 마왕을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들린 외침. 유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망토에 손을 넣었다. 멜키스와 계약한 이후로 꺼낸 적이 없던, 폭풍검 위니드가 망토에서 뽑혀 나왔다. 이그니션으로 과열된 신화가 위니드를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림하는 폭풍에 신화가 더해졌다. 거대한 바람이 폭발과 유폐의 마왕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아까라면 템페스트의 바람은 유폐의 마왕을 침범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폐의 마왕은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제 몸을 가누기조차 쉽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쩡한 상태라고 해도 쉽사리 떨쳐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전신을 베어 가르는 폭풍 속에서 유폐의 마왕은 감탄을 섞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 바람은 미약했다. 모두가 그 바람을 폭풍이라고 말했지만 유폐의 마왕에게는 산들바람보다 못했다. 멸망을 앞둔 세계. 처참하게 짓밟히고 마병이 창궐하던 그 세계에서, 정령의 힘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폐의 마왕이 베풀었던 300년이란 시간은 세상을 바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화에 익숙해져서 약해졌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령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300년 동안 병들었던 세계수는 회복했고, 세계수가 된 비슈르 라비올라의 의지가 템페스트가 이끄는 바람과 원시의 정령에 힘을 보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템페스트가 재차 고함을 질렀다. 거센 폭풍의 힘은 유진도 느꼈다. 등을 떠미는 바람, 머나먼 세계수에서 현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과거 유진에게 깃들어 일부가 되었던 세계수의 정령들이 몸을 일으켰다. 푸확! 이그니션으로 폭주하던 신화가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령에게만 힘이 실리는 것이 아니다. 유진과 하나가 된 레반테인에 더욱 강한 빛이 깃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의 반대편. 머나먼 바다에 앉은 빛이 몸을 일으켰다. 일렁거리는 빛이 거대한 남자가 되어 손을 뻗었다. 유진의 눈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 광경을 보았다. 빛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득 찬 빛이 손에 모이더니 거대한 검이 되었다. 빛은, 아니, 거신은 그 검을 천천히 뻗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쥐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쥐고 있던 신검이 산화하고, 거인이나 휘두를 법한 거대한 검이 새로이 손에 쥐어졌다. 유진은 의심하지 않고 검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왼손에 쥐고 있던 위니드를 거신의, 빛의 신검에 가까이 가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템페스트가 고함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폭풍을 휘감은 위니드의 검신이 덜덜 떨리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검의 파편이 빛이 되어 폭풍과 함께 나부꼈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성녀들의 기도에 힘이 실렸다. 그것은 더 이상 속삭이는 기도가 아닌 경배의 찬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부끼는 빛이 거대한 형상을 갖추었다. 바람의 정령왕이 완전히 세상에 강림했다. 이 강림은 계약자에게 힘을 빌려주는 형태도, 온갖 제약을 덕지덕지 붙인 불완전한 강림도 아니었다. 빛이 문을 열었고, 정령왕의 본신이 세상에 강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으로 직접 보아도 믿기지 않는 광경.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광경에 유폐의 마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시커먼 마력이 마왕의 손에 모였다.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폭력을 향해 유폐의 마왕도 공격을 준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달려들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화신이자 대전사인 모론이 해야 할 것은, 하멜의, 유진의 공격이 방해받지 않도록 길을 활짝 여는 것이다. 세냐 역시 자신의 역할을 이해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메리가 모론을 포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시간이 가속했다. 그는 순식간에 공간을 관통하고서 유폐의 마왕과의 거리를 좁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둑, 뚜두둑……! 모론의 양팔에 핏줄이 울룩불룩 돋고 근육이 부풀었다. 고스란히 전달되는 악력은 도낏자루를 부수는 대신 도끼날을 진동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위치와 이어질 공격은 유폐의 마왕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쳐내며 대응할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막아낼 것인가. 어느 쪽이든 저 거대한 신검에 전력으로 맞설 수는 없게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을 셈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몸을 들이밀어 길을 열었다. 그 대가는 절대 가볍지 않으리라. 모론은 피범벅의 입술을 열어 히죽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믿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의 강인함을? 은혜로운 기적을? 아니면, 목숨을 바쳐 열은 길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어느 쪽이든 좋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경의를 담아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래전 유폐의 마왕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저러한 믿음이었다. 그는 경외 뒤의 씁쓸한 감정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르릉! 마력과 도끼가 만났다. 그 사이에서 끓어오르는 격류에 유폐의 마왕의 양팔이 위로 들렸고, 도끼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모론은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모론이 유폐의 마왕과 이어지는 길을 연 순간에 신검을 휘둘렀다. 유진의 뒤에 강림한 템페스트도 빛에 휘감긴 주먹을 내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을 덮은 어둠이 소멸했다. 하늘에는 한 점의 어둠도 얼룩도 남지 않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이 참격에 갈라졌다. 템페스트의 주먹이 일으킨 폭풍이 갈라진 빛마저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 폭풍 속에서 유폐의 마왕은 저항하지 못하고 피를 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마왕이 추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판데모니엄이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9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서려고 했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도중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서 다시 주저앉았다. 시야는 제멋대로 흔들리고 균형감각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뇌가 망가졌나? 아니면 다른 기관이? 이성은 아직 남아 있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곤란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마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유폐의 마왕은 잠시 바닥에 엎드려서 호흡을 가다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다듬는다고? 그렇게 생각할 뿐, 멋대로 날뛰는 호흡은 뜻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숨을 쉬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벌린 입술에서는 숨결 대신에 죽은 피와 부스러진 내장 조각만이 뚝뚝 떨어질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곤란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에 구멍이 났나? 박살 난 늑골이 폐를 찢어발겼나. 심장은 멀쩡한가? 지금 상태의 부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도출한 결과는 대부분이 부정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신히 살아만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 유폐의 마왕이 만든 최초의 사슬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멸망과 묶은 사슬은…… 부서지지 않았다. 이것이 남아 있는 한, 유폐의 마왕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즉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간신히 사슬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면 충분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전투에서 유폐의 마왕은 죽지 않는다. 유진과 동료들이 아무리 죽음을 부르짖어도 유폐의 마왕이 죽는 일은 없다. 이 싸움에서 죽음이 패배로 끝나는 것은 유진과 동료들뿐. 유폐의 마왕의 패배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이 꺾이는 것이다.&lt;/p&gt;</content><link rel='replies'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feeds/108608183184940607/comments/default' title='Post Comments'/><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2023/02/ch19.html#comment-form' title='0 Comments'/><link rel='edit'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www.blogger.com/feeds/5499307429964195877/posts/default/108608183184940607'/><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www.blogger.com/feeds/5499307429964195877/posts/default/108608183184940607'/><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2023/02/ch19.html' title='Ch19'/><author><name>ADMIN</name><uri>http://www.blogger.com/profile/02638522785814696466</uri><email>noreply@blogger.com</email><gd:image rel='http://schemas.google.com/g/2005#thumbnail' width='16' height='16' src='https://img1.blogblog.com/img/b16-rounded.gif'/></author><thr:total>0</thr:total></entry><entry><id>tag:blogger.com,1999:blog-5499307429964195877.post-2521924854985069867</id><published>2023-02-19T23:47:00.001+05:30</published><updated>2023-02-19T23:47:47.034+05:30</updated><title type='text'>Ch18</title><content type='html'>&lt;p&gt;&amp;nbsp;&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헤자르에게서 듣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고민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가비드가 ‘왜’ 이런 짓을 하였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이미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을 바랄 것이라고, 전장에서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가비드가 바란 것은 전쟁이 아닌 결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은, 세상 모두가 그 시작과 결과를 알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2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늦은 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이되 어둡지 않은 도시. 화려한 야경에 오히려 낮보다 밤이 밝은 도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의 하늘에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제벨라 페이스의 안에서. 너무 밝은 야경에 오히려 푸르게 보이는 밤하늘과, 지상의 빛에 의해 잘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의 별과 달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아래의 도시. 야경은 화려하지만 왁자지껄한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지금 제벨라 파크에 있는 모든 관광객은, 누아르의 환상의 마안이 보여준 꿈에 빠져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쇼타임’이라 불리는, 이 도시 최대의 이벤트. 관광객들은 제벨라 쇼타임을 위해 찾아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상의 마안이 보여주는 ‘꿈’에 한계는 없다. 바라는 모든 것을 꿈에서 이룰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제벨라 쇼타임에 정해진 일정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누아르 제벨라의 기분에 따라 시작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가 미쳤다는 것은 알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았다. 제벨라 페이스 안에 멋대로 들어와서, 이쪽에 다가오며 말을 걸 것이란 것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면서도 무시했다. 굳이 싫다고 면박을 주며 내쫓을 만큼의 사이가 아니다. 누아르는 저 마족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알고 지낸 지 수백 년이니 그럭저럭 지인(知人)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라고는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 정도까지 미쳤을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헬무드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며, 가장 많은 정기와 세금을 거둬들이는 도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도시. 그것이 바로 제벨라 시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제벨라 시티는 새로운 관광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벨라 시티는 마치 봉쇄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관광객을 거부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묘한 것은 그것에 대한 관광객의 불만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 도시에 방문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헬무드에 입국한 관광객들은, 도시의 성문 앞에서 거부당했음에도 아무런 항의 없이 다른 도시로 떠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에게도, 이 도시에게도 사정이란 것이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속삭였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에 걸친 와인 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내 행동이 법을 저촉하였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합법일 리는 없죠. 그래서, 당신이 나를 제재하러 온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누아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비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서부터 지적하고 제재해야 할지 모르겠군. 제벨라 공작. 그대가 제국의 국고에 어마어마한 지분을 가진 납세자라는 것과, 그간 제국의 기틀을 다진 공로를 인정하여도…… 이건 너무나 과해. 그대가 가진 모든 재산을 국고에 환원할지라도, 나는 그대에게 ‘처형’ 판결을 내릴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말에 누아르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가비드는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를 봉쇄한 것.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최면을 강요하여 인지를 조작해 돌아가게 만든 것. 그것들만 해도 제국 역사상 다시 없을 중죄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손가락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그는 저 아래에 펼쳐진, 화려히 빛나며 침묵을 유지 중인 도시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도시의 모든 존재를 인질로 잡은 것은 중죄를 넘어 무조건 청형의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벌써 나흘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 제벨라 파크의 모든 관광객. 공원의 모든 노동자까지. 무엇 하나 예외로 있지 않았다. 지금 이 도시에서 누아르 제벨라와 가비드 린드먼, 둘을 제외하고서 깨어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의 바람을 들어주었을 뿐인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바라는 꿈이 있어서 온 거잖아요? 흐응, 이전까지의 나는 아주, 아주아주 각박했죠. 다들 꿈을, 내가 보여주는 제벨라 쇼타임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인데, 나는 쇼타임을 매일 보여주지 않았거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희소성을 유지하고 싶어서, 뭐 그런 이유 아니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맞아요. 보고 싶을 때 항상 볼 수 있으면 누가 간절히 보고 싶어 하겠어요? 뭐, 그래도 꽤 자주 보여주었다고는 생각하는데. 운 없는 관광객들은 쇼타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관광객은 금세 다시 제벨라 파크를 찾아온다. 사실 쇼타임을 본 관광객도 마찬가지다. 탐욕에 끝은 없다. 한번 달콤한 꿈을 맛보면 그 한 번에 중독되어 다시 찾아와 꿈을 갈망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의 환상의 마안이 보여주는 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래서 해봤어요. 모두가 꿈을 바라고 온 것이니까, 꿈을 보여준 거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도시에 마족과 인간의 수는 수백만이 훌쩍 넘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어마어마하게 많은 존재가, 누아르 제벨라가 만들어낸 꿈에 갇혀 있다. 마왕이 아닌 마족 중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오직 누아르 제벨라 뿐이다. 아니. 마왕일지라도 지금 누아르처럼 수백만의 존재를 인질로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의 꿈이 아닌 수백만의 꿈.”&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한을 말할 수 있을 마력으로 강제로 잠에 재운 것도 아니다. 공포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지금 저 도시에서 꿈을 꾸는 존재 중에서 불행이나 공포 같은 종류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은 도시의 모든 존재가 바라는 꿈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현실에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지만, 그들의 뇌가 만들어낸 정신세계 속에서는 현실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환상을 즐기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 없는 이상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아니잖나. 그대는 대체 무엇이 목적인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큰 힘을 바라서? 정기를 끝없이 수급하며 무한한 마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럴 리가 없다. 누아르 제벨라는 이미 저것을 손에 넣었다. 누아르의 마력은 진즉에 마왕의 수준을 뛰어넘었고, 그녀는 이미 몽마(夢魔)라는 종의 정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가 지금보다 더 큰 힘을 바란다면 마왕이 되어야 할 걸세. 설마 그 방법을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사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이미 마왕조차 넘어서 있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 궁금한 것이 많군요, 가비드. 나를 처형하기 전에 사정을 듣고 싶은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그대를 처형하러 온 것이 아니란 것은 알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누아르는 짧게 웃으며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제야 의자를 돌려, 가비드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 있죠. 애당초 당신이 나를 죽이는 것이 가능할지부터 논해야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어. 설마 여기서 내 자존심을 긁으려 할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핫! 가벼운 농담을 한 것뿐이에요. 음, 아니야. 솔직히 말할게요, 가비드. 나는 말이에요. 하우리아 때의 당신과 싸운다면- 무조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덧붙일 것도 없지만, 당신이 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를 사용할지라도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랬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존심에 대해 말했지만, 가비드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는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누아르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어떤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르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여전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능력’ 같은 것은 내가 훨씬,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때와 같은 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참 신기하죠? 하우리아에서 당신을 본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가비드를 꿰뚫어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으로도 저 깊이의 밑바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당신은 두 달이 아닌, 백 년은 겪고 온 것 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가비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마큼의 시간을 보냈을까. 그, 시체와 무기가 널브러진 황야에서. 여전히 그 남자의 정체는 모른다. 죽고, 현실로 돌아와서, 다시 사슬을 내려치고, 싸우고, 죽고, 현실로 돌아와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그것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르겠다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면 되었지. 굳이, 그대와 확인하고 싶지는 않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나를 처형하러 온 것도 아니고,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아니라면. 왜 나를 찾아온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웃으며 물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야, 가비드는 이미 답을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이나 한잔할까 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국의 건국과 동시에 담갔던 술이지. 아, 내가 직접 담근 것은 아니야. 언젠가…… 하하, 언젠가를 위해 장인에게 의뢰했던 술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 그렇다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술이란 것이네요? 흐흥, 당신이 그냥 술이나 한잔하자고 권했다면,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즉시 거절했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누아르의 앞에 큼직한 의자와 테이블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술을 가지고 왔다면 궁금해서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건 궁금하네요, 가비드. ‘언젠가’를 위해 의뢰했던 술이라고 했죠? 그 언젠가가 대체 뭔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뻔한 질문을 하는군. 뭐라고 생각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 정복?”&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샐쭉 웃으며 물었다. 가비드는 의자에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는 그것 외에 다른 바람이 없었지. 유폐의 마왕님도 그것을 바라고서 전쟁을 벌이셨으리라고 생각했네. 약속을 맺기는 하였지만, 언젠가는 깨질 것이라 생각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언젠가에 마실 술을 지금, 나랑 마시겠다라…… 아하하, 이건 아주 낭만적이네요. 왜 지금 마시려는 걸까. 왜 그 ‘언젠가’를 기다리지 않는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가비드의 앞에 빈 잔을 놓아주며,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수백 년을 보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가비드의 외견은 변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꼭 그렇지도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빛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위기. 300년 동안 거르지 않았던 대공의 업무에서도 물러나고, 바벨도 떠난 두 달 남짓의 시간 동안……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걸까?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 때문인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가비드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술병의 봉인을 열어갔다. 제국의 영광. 뻔한 이름이지만, 가비드는 이 술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가비드는 술을 그리 즐기지는 않는다. 마셔도 잘 취하지도 않거니와, 억지로 취할 필요를 느낀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취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유폐의 칼이 되었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기뻐서, 너무 영광스러워서.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을 마셔보았다. 특별한 날이었다. 평소 하지 않은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느껴본 적이 없는, 특별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술에 취했다. 진탕 마시면서, 취기를 억제하지 않았다. 꽤 즐거웠다.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이후로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마셔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홀로 있을 때는 입에 대지 않았다. 취한 적도 없었다. 취한 상태의 즐거운 기분은 알았지만, 유폐의 칼과, 헬무드의 대공은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젠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언젠가. 약속이 깨졌을 때.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재개하고, 대륙 모든 땅이 헬무드의 영토가 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을 것 같았다. 이 술, 제국의 영광은- 그 언젠가의 미래를 위해 만든 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는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공들여 뜯은 봉인을 옆에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코르크의 봉인 마법마저 해제했다. 그렇게 술병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페이스의 안이 향긋하고 독한 주향으로 가득 찼다. 누아르는 떠도는 향을 음미하며 쿡쿡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는다……. 아하하,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300년을 기다린 술도 마실 수 없게 되니까. 그래서 지금 마시겠다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신기하네요. 당신이라면 무조건 결투에서 승리한 뒤에, 이 술을 축배로 삼거나…… 아니면 바라던 언제까지 기다릴 것만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도 알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술병을 들었다. 그는 누아르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대는 그, 몰살의 하멜일세. 30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으며, 그 힘의 밑바닥을 가늠할 수가 없어. 그리고 장담하건대, 그는 하우리아에서 보았을 적보다 더 강해졌을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그때보다 강해졌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도 마찬가지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와 가비드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웃었다. 누아르가 먼저 술잔을 들었다. 가비드도 거절하지 않았다. 둘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맛에 대한 말은 하지 말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모금 마신 뒤, 가비드가 말했다. 그는 술잔을 천천히 흔들면서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상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만 남기고 싶거든. 이 술을 의뢰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요. 가비드, 당신에게 이런 낭만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입술을 핥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신, 다른 것은 묻고 싶은데. 물어도 되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마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나를 처벌하지 않기로 한 거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상했던 질문이다. 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술잔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그는 몇 번 향을 즐긴 뒤에 술잔을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님께서 그대를 처벌을 명하지 않으셨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그건 당연하죠. 음, 가비드, 당신은 이 말을 불쾌하게 들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말하고 싶으니까 말하도록 할게요. 만약 내가 이 도시의 수백 만에게 꿈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조리, 다, 죽여서, 잡아먹을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웃음이 짙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나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을걸요? 아, 물론 방금의 말에는 조건이 받쳐져야 해요. 한 10년 전에 내가 이런 짓을 했다면, 음, 죽이지는 않았어도 제재는 했을 것 같네요. 어디 제국 바깥으로 추방시키거나……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나에게는 맡은 역할이 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그렇게 말하고서 깔깔 웃었다. 그녀는 내려놓았던 술을 다시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가비드. 유폐의 마왕이 내게 그렇게 할지라도, 당신은 그러지 않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유폐의 마왕님의 명을 어기지 않아. 마왕님께서 그대를 처벌하라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를 처벌하지 않을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처럼 나와 웃으며 술을 마시진 않겠죠. 술병 대신 글로리를 들고 찾아와서, 공격하거나 죽이지는 않는 대신 나를 모욕하고 경멸할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도 술을 더 마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이라면 그랬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이 당신에게 변화를 만든 거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이 곡선을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결투인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하멜과 결투하려는 거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2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냐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빈잔에 술을 새로 채우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줄곧 하멜과 싸우고 싶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움과 결투는 다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도 똑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가비드 린드먼이 어떤 사내인지 안다. 그는 수백 년 전부터 유폐의 칼이었고, 역대 유폐의 칼 중 가장 오랜 시간을 유폐의 마왕을 섬겼다. 그는 전임자들 중 가장 강하고, 가장 충성스러운 유폐의 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바라는 결투는 유폐의 마왕의 뜻을 어기는 것이잖아요. 유폐의 마왕은 하멜이 바벨을 오르는 것을 바라요. 그러니 당신은 바벨에서 하멜을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 그것이 유폐의 마왕의 뜻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마치 가비드를 유혹하듯 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당신은 하멜에게 결투를 선포했어요. 바벨이 아닌 다른 장소. 하멜이 바벨로 향하기도 전에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됐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술잔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누아르는 풋 웃으면서,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등받이에 기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히 하멜을 죽이고 싶은 것이라면 이전에도 기회가 있었죠. 아주, 아주 쉽게 죽일 수 있을 기회가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의 전쟁이 끝났을 때. 가비드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가비드는 진심으로 글로리를 뽑고,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여 하멜을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의 하멜은 굉장히 무력했다. 그 주변에 하멜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영웅들은 많았지만, 가비드의 마검(魔劍)은 그 모든 방해를 단절하고서 하멜을 죽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지 않았다. 검을 멈췄다. 하멜의 비웃음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 비웃음을 무시하고 기어코 검을 휘둘렀을지라도, 하멜을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큼 누아르 제벨라의 힘은 대단했다. 그녀는 가비드조차 눈치챌 수 없게 뒤를 잡았다. 만약 가비드가 마검을 끝까지 내리찍었다면, 어떻게든 누아르에게 가로막혔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도 나는 아주 감정적이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치 않은 과거의 기억. 나의 것이 아닌 황혼의 마녀의 기억.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혼동.&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든 감정들은,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하멜과 서로 죽이려는 순간에 다시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때의 달콤함이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행동이 유폐의 마왕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사실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잔을 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제벨라 공작. 그대도 말했듯, 유폐의 마왕님은…… 그대가 이 도시의 수백만을 잡아먹을지라도 침묵하실 걸세.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일 뿐일세. 내가 그분의 뜻을 거역해 하멜과 결투할지라도, 그분은 즐겁게 내 거역을 방관하시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백 년을 유폐의 마왕에게 충성한 당신이, 이런 식으로 거역하는 것이 신기하고 궁금한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 그녀는 술잔을 찰랑찰랑 흔들기만 하며 가비드를 응시했다.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에서 요염한 빛이 흘러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역할 만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바뀌었다. 공간 자체가 누아르의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의 ‘소리’가 가비드를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을 죽이고 싶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본래 누아르 제벨라가 가지고 있던 능력과 다르다. 지금 이곳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의지가, 현실에 간섭하여 개변을 일으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몽마의 성질과 환상의 극한. 그렇게 해서 도달한 인식의 조작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저 터무니없는 몽마는 그 영역마저 초월한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을 시험하고 싶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말은 가비드의 진의를 끌어내려 하고 있다. 누아르의 시선과 목소리가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순간에 가비드는 확신했다. 만약 그가 황야를 지나오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정체 모를 사내와 검을 부딪치고, 끝내 그에게 검을 닿게 만들지 못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와의 전투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비드가 위신의 마안을 쓰고 글로리를 뽑을지라도, 누아르가 무너트린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내 역할이에요, 가비드.”&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새 누아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찰랑찰랑 흔들던 술잔을 내려놓고, 둘 사이에 있던 자그마한 테이블을 지나쳤다. 가비드의 눈은 누아르를 쫓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바벨에 오르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것은 바로 나예요. 유폐의 종인 당신은 바벨에서 하멜을 기다리는 것이 어울려요. 그것이, 당신에게 올바른 흐름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공작.”&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빈 술잔을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단지 하멜과 싸우고 싶을 뿐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로서 평생을 유폐의 마왕님께 충성하였지. 거역 없이 살았어. 하지만 나도 결국은 한 명의 마족이고, 검사였던 모양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님이 바라시는 것은 하멜이 바벨을 올라, 어전에 도달하는 것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하멜을 위해 바벨과 어전의 문을 활짝 열어두지는 않으시겠지. 하멜이 어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련을 넘어야 할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어전의 앞에서, 마왕이 용사에게 내리는 시련의 마지막이자…… 유폐의 칼로서, 하멜을 가로막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입술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내가 싸울 하멜이 과연 전력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하멜과의 싸움을 간절히 바라네. 전력을 다하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죽이기 위해 덤비는 하멜과 싸우고 싶은 걸세. 하지만 바벨에서 만날 하멜은 그러지 않을 걸세. 그럴 수가 없어. 그는, 나를 넘은 뒤에 어전에 들어가야 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림이 멈추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던 누아르는, 마치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듯이 가비드의 앞에 앉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을 죽이고, 시험하는 것이 그대의 역할이라 하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빈 잔에 다시 술을 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그대보다 먼저 해야 해. 하멜과의 싸움을, 그의 목숨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세. 만약 그대가 먼저 하멜을 죽여 버린다면…… 하하, 나는 평생을 후회하겠지. 그리고 평생을 하멜에 대한 패배감을 갖고 살아야 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패배감이라. 누아르는 의외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가비드는 단 한 번도 하멜에게 패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아르는 저 패배감의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가비드 린드먼이 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역했다. 유폐의 칼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마족은 헬무드의 대공인가? 누아르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달의 짧은 은거. 가비드는 대공의 모든 업무조차 내려놓았다. 그리고 만약 가비드가 대공으로서 하멜을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결투’ 따위는 벌이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곤란한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턱을 손에 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하멜을 죽이고 싶은 것처럼 나도 하멜을 죽이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이 하멜을 죽여 버리면, 내가 하멜을 죽일 수 없게 되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 어쩌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설득되지 않을 테니, 그대의 뜻을 주장할 방법은 하나뿐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뭘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죽이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진짜로 그렇게 말할 줄이야. 누아르는 즐거운 기분이 들어 쿡쿡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제벨라 시티. 누아르의 영지다. 설마 이 땅에서 영주를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서를 양보해 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사하지만, 양보의 이유가 궁금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유폐의 마왕과 똑같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나를 찾아와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잔을 비웠다. 누아르가 잔을 내려놓았고, 가비드가 잔을 채워주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누아르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잔을 안으로 끌어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나를 만나러, 나를 죽이러, 이 도시에 와야 해. 응, 그래야만 해요. 내가 먼저 하멜을 죽이러 찾아가지는 않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을 이을 때마다 누아르의 미소가 짙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가비드. 당신이 먼저 결투하도록 해요. 내가 친히 순서를 양보해 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내가 하멜을 죽인다면?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하멜과 만날 수 없게 될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나에게 지독한 말을 강요하는군요. 그래도 당신과는 오랜 지인이니까,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 듣게 될 것인지는 뻔했지만, 가비드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누아르는 그 노골적인 손짓에 웃으면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하멜을 이길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이 두 달 동안 굉장히 강해진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하멜은 이길 수 없어. 나의 하멜은, 이 결투에서 당신을 쓰러트리고…… 바벨에 향하기 전에, 나를 죽이러 올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 참, 정말로 지독한 말이로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그러니 순서를 양보해 준 거예요. 하멜이 당신을 죽이고서 내게 올 것이라 믿으니까. 음, 그래도 기도는 해야 할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을 위한 기도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패배와 죽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가비드는 무릎을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감이 대단하군, 제벨라 공작. 그러니까, 그대는…… 나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나를 죽여 버린 하멜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단 말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응, 그건 어떨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입술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말이에요. 하멜을 죽이고 싶기도 하고, 하멜에게 죽고 싶기도 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말에 거짓은 없다. 하지만 가비드는 그 말의 내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고 싶고, 죽고 싶기도 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누아르 제벨라다. 가비드는 이미 수백 전에 누아르의 언동과 감정에 대한 이해를 포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보았다. 그때, 가비드가 보았던 누아르의 얼굴은- 알고 지낸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다. 생각해 보면, 저 몽마는 ‘하멜’과 엮일 때마다 그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하멜을. 베르무트와 동료들을 습격하고 돌아왔을 때. 누아르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은 얼굴을 했었다. 죽이든가 홀리게 하여 지치게라도 만들기를 바라고 파견한 것인데, 왜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부끄러워하던 것인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아서 화만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죽었을 때. 약속이란 것이 맺어진 바람에, 마족들은 대놓고 축제를 벌이지는 않았다. 다른 마족이야 어쨌건, 가비드는 축제를 벌이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와 동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않았다. 손쉽고도 당연한 승리를 앞서서 거절한 것은 바로 유폐의 마왕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어떤가. 그는 전쟁에서도, 싸움에서도 패배했다. 약속이 맺어졌고 하멜이 죽어버렸으니 다시는 설욕할 수 없게 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가비드와도, 다른 마족과도 달랐다. 그녀는 아마…… 모든 마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멜의 죽음을 애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하우리아에서는. 가비드가 하멜을 죽이려 했다는 이유로 분노했다. 가비드가 보았던 그 어느 순간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분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분노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나에게 향한 것이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언동과 감정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 그녀에게 있어서 ‘하멜’은 굉장히 특별한 존재다. 하멜이 죽어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했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누아르에게 특별하다. 오히려 한 번 죽고, 환생했기에 더욱 특별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을 죽이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에게 죽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확신했다. 누아르 제벨라는 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미치광이 몽마는, 미치광이의 방식으로 하멜을 사랑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결론을 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알 수 없는 말에 대해서, 가비드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보아온 지인에 대한 존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가비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듯, 두 공작은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존중하며 의문들은 가슴 안에 묻어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입술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한은 내년이 끝나기 전. 장소는 하멜보고 정하라고 하였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결투를 준비하고 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은 더 사용할 수 있다. 몇백 몇천 번이고 그 황야에 들어가서, 남자와 만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두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네. 나는 하멜과 결투만을 생각하여 준비하는데, 하멜은 아니지 않나. 그건,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본인도 준비가 완벽히 끝나지는 않았다. 조율 자체는 되었지만, 솔직히 더 앞에 도달하고 싶었다. 가비드의 검은 황야의 남자에게 닿았다. 하지만, 남자를 쓰러트리지는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먼저 선포한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하멜이 이미 준비가 되었다면 내일이라도 날을 잡아도 상관이 없네. 하지만 그도 약간이라도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기한을 내년이 끝날 때까지 잡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흥.”&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대로 결투를 선포했는데, 기한과 장소 정도는 하멜이 정하는 것이 예의겠지. 아마 헬무드는 선택하지 않을 테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하멜이 내년이 끝나도록 날짜와 장소를 잡지 않는다면 어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하멜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하멜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궁금해서 물어보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이 결투를 청했는데 하멜이 도망갈 리가 없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함께 술을 마시고 싶어서…… 그리고 결투의 ‘허락’을 맡기 위해서. 이게 끝인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가 더 있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리 말해두지. 이건 부탁이 아닐세. 헬무드의 대공으로,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 대공의 업무에서는 물러섰으면서 대공의 권한은 누리시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그대도 거절하지는 않을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건 들어보고 결정하죠. 그래서 뭔데 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입술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경악하고서 가비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심인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이건, 굉장히…… 의외네요. 설마 당신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할 줄이야. 아니, 부탁이 아니었지. 명령…… 명령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더듬더듬 말을 잇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요. 받아들이죠. 거절하지 않겠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득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로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설득이라니. 이걸 거절할 리가 없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가비드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마저 비웠다. 그는 누아르가 자신 쪽으로 당긴 빈 잔을 힐긋 보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이 입에 맞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 맛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면서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 뭔가 오해하고 있군요. 가비드, 이 술은 무척이나 맛있어요. 내가 술을 거절하는 것은, 맛이 싫어서가 아니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당신의 술이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향기롭고, 진하고, 독한, 취하기 위한 술. 하지만 나는 이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내 앞에서 취해 추태를 보이고 싶다면야, 아하하, 바라는 꿈 정도는 꾸게 해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도 똑같이 웃었다. 그는 아직 넉넉하게 남은 ‘제국의 영광’을 손에 잡고서 의자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려해 주어서 고맙네. 그래, 이건…… 내가 취하기 위해 만든 술이지. 다른 누군가와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혼자 즐기기 위한 술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한다면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방을 내어드리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괜찮네. 남은 술은 내 방에 돌아가서 마시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술병을 다시 봉인하며 피식 웃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쯤은 남겨야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축배를 위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락! 옷소매 안쪽에서 쏘아진 사슬이 공간의 문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그 축배를 내가 마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중얼거림을 남기고, 가비드는 사슬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2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잘됐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긴 고민 끝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와는 언젠가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전장은 무조건 바벨의, 유폐의 어전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그곳에서 싸웠더라면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과의 결전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 그렇다는 것은 절대로 이그니션을 쓸 수 없다는 것. 그 시점에서 신검을 몇 번 휘두를 수 있을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바벨에서까지 신검에 제한이 있다면, 가비드와의 전투에서는 신검을 쓰면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쓸 수 있는 모든 재주를 유폐의 마왕에게 쏟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유폐의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산이 없다. 아니, 애초에 바벨에 오를 시점에서 신검을 휘두를 ‘횟수’를 신경 쓴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신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를 수 있던 아가로트조차도 유폐의 마왕보다는 약했을 것이다. 심지어 유폐의 마왕은 신화시대보다 ‘더’ 강해졌을 가능성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은 늙을수록 보통은 강해지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왕인 이상 마력의 총량에 구애받지는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시대 이후로 유폐의 마왕이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아왔는지를, 유진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 유폐의 마왕에게 결코 허무하게 작용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유진은 무조건 아가로트보다 강해야 한다. 아가로트보다 강하지 않고서는 유폐의 마왕과 전투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을 오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을 터. 어전에 도달하기까지 최대한 힘을 온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솔직히 부담된다. 가능하다면 바벨에서 강적과의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적.”&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 그리고…… 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제와서, 세상 아무도 모르는, 오직 유폐의 마왕만 알고서 꽁꽁 숨겨놓은…… 가비드 린드먼보다 강한 대마왕의 친위대, 유폐의 사천왕, 이딴 게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헬무드에서 유폐의 마왕을 제외하고, 유진에게 있어 ‘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저 둘뿐이다. 그중 누아르 제벨라와는 바벨에서 맞닥트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무조건 제벨라 시티에서 유진과 마주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결국 난관인 것은 가비드.&lt;/p&gt;&lt;p&gt;&lt;br /&gt;&lt;/p&gt;&lt;p&gt;“긍정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은편의 아니스가 정색하고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결투를 선포하고 고작 반나절. 성상과 교전의 일로 유라스에 돌아갔던 성녀들이 부랴부랴 라이언하트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가비드의 결투 선포는 성상 건축과 교전 개편을 ‘그따위’의 일로 만들 만큼 파급력이 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라면, 하멜, 당신과 가비드 ‘둘’이서 싸우는 것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아니스는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했다. 길고 긴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일단 아니스는 한 번 호흡을 삼키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절하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유진은 두눈을 끔벅거렸다. 유진은 잠시 아니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보란 듯이 새끼손가락을 세워서 귀를 후벼팠다. 아니스는 지금 유진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똑같이 눈을 끔벅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 귀를 파던 유진은, 새끼손가락을 후- 불고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라고? 잘 못 들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대놓고 말하니 아니스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진이 자신에게 대놓고 엿을 먹인 것임을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평소에는 아니스가 저런 표정으로 다가오면 유진도 어깨라도 움츠리거나 시선을 피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고 눈에 힘을 주고서 똑같이 아니스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만큼 유진은 가비드와의 결투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유진을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담긴 고집을 느꼈다. 아니스가 알고 있는 ‘하멜’과 ‘유진’도 결투에서 도망칠 인간은 절대로 못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군가가 간섭할 수 없는 결투라면,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가비드가 결투를 선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니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이 강하단 것은 압니다. 하지만 ‘결투’는 위험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유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유진의 어깨를 붙잡고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유진도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러왔다. ‘어떻게’ 싸우느냐. 그에 대한 방식은 이미 300년 전부터 정해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대는 수백 년을 살아온 마족과 마왕. 놈들은 종족부터가 인간보다 우월하다. 유진은, 하멜은,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범한 인간이 100년도 살지 못하는 것에 반해 마족은 그냥 수백 년을 산다. 인간은 극한까지 육체와 마나를 단련해야만 수명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거늘, 마족에게는 그냥 수명의 한계란 것이 존재하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은 아무리 단련한들, 불로(不老)에는 도달하여도 불사(不死)는 손에 넣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마족은 다르다. 고위 마족은 머리를 터트리고 육체를 모조리 불태워 재로 만들어도 소생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성직자의, 성녀의 보조가 필요하다. 성녀의 존재는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목이 잘리는 것과 같은, ‘즉사’는 성녀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치명상이라면 성녀의 기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라면 제가 당신을 보조할 수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내뱉었다. 300년 전부터 아니스의, 성녀의 역할은 똑같았다. 이번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녀가 합류한 후로 유진은 과감하게 싸울 수 있게 됐다. 그전에는 최대한 부상을 입지 않는 방향을 선택해 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세냐도 당신을 보조할 수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는 전쟁을 했다. 고위마족과 마왕을 상대로 단독으로 싸우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동료들과 합을 맞추어서 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전위로서 공격을 받아내고, 하멜과 베르무트는 공격진으로서 모론이 만든 틈을 파고들었다. 아니스가 후방에서 기적을 일으켜 부상을 치료하고 힘을 북돋웠으며, 세냐는 힘을 모아 강력한 마법을 때려 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령과 싸울 때도 사실상 나 혼자 싸웠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이리스와의 전투에서는 세냐와 성녀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망령과의 전투는 달랐다. 해방군이 힘을 합쳐 길을 열었고, 유진은 단독으로 망령과 전투를 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대가 다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유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아니스는 조금 더 몸을 숙여, 유진을 가까이서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에서 싸운 망령은…… 하멜, 당신은 그와의 전투에서 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전투에서 당신이 쭈욱 망령을 압도했다고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그렇지는 않아. 놈은 강했어. 나와 비등할 정도로 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만, 예, 하멜,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다르게 말하도록 하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망령과의 전투를 매우 유리하게 끌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망령이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망령은 하멜, 당신의 기술을 썼습니다. 그리고 베르무트 님의 기술을 썼습니다. 둘 모두 하멜, 당신이 잘 아는 것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정하지 않았다. 아니스의 말이 옳다. 유진은 망령이 순간, 순간마다 어떤 기술을 사용할지를 예측했다. 경험에 의한 예측은 신성과 직관에 의해 확실한 예지가 되었고, 그래서 대응이 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술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단순 화력조차도 당신이 망령보다 강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은 죽어가고 있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멸망의 마력은 너무나 파괴적인 힘이니까요. 화신 같은 존재가 되었던 망령도 결국은 멸망의 마력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전투에서 월광검을 지배했고, 성검의 봉인과 같던 형상을 부수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령과 다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침묵 뒤에 긴 한숨이 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대는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입니다. 하멜, 당신도 그때 보았을 텐데요. 가비드 린드먼이 위신의 마안을 쓰고, 마검 글로리를 꺼내서 당신을 공격했을 때. 그 자리의 누구도 가비드 린드먼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쳐서? 방심해서? 아닙니다. 그 순간에 가비드 린드먼의 일검은 우리 중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일검은 유진도 기억하고 있다. 하늘의 끝자락에서 내리꽂힌 일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 중 아무도 죽지 않았던 것은, 가비드 린드먼이 오직 당신만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예, 그것이 가비드 린드먼이 ‘기습’에 두었던 나름의 배려였겠지요. 하멜, 당신이 그때 죽지 않은 것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새끼가 검을 거두었기 때문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 아니스. 그리고 크리스티나도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겠지. 결투에서는 기적으로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 세냐의 보조로 가비드의 대응을 강제할 수 없다. 나 혼자서, 놈과 싸워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공평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 중 하나가 무조건 죽어야 하는 결투입니다. 그렇지만 하멜, 당신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비드 린드먼을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새삼스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을 들어 아니스의 손목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나는, 우리는, 몇 번이나 그런 상대와 싸워왔지. 죽여도 잘 죽지 않는 놈들. 팔다리가 잘려도 당연하다는 듯이 재생시켜서 덤비는 놈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말이 맞아, 아니스. 인간이 마족과 싸우는 것은 굉장히 불공평하고 불합리해. 하지만 내가 평범한 인간인 것은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결국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멜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그는 결투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를 받아들였을 때의 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아니스도 태도를 바꾸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을 바벨 밖으로 끌어내서 싸우는 것. 예, 이건 매력적인 일입니다. 바벨에서 싸웠다면 당신의 힘을 온존해야 했을 테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그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솔직히 저는, 바벨에서의 전투가 저희에게 있어서 크게 불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전력을 다하지 못할지라도, 세냐가 있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에서 돌아온 세냐가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는 미지수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해지지는 않았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야 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 노골적으로 꽁해 하는 모습에 아니스이 눈썹이 한 번 더 씰룩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가비드 린드먼이 결투를 선포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결투를 거절하냐면, 세상 사람들 전원이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상당수가 당신을 겁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모르겠군요야, 무조건 놀리겠지. 겁쟁이 새끼라고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 예, 아마 그럴 겁니다. 2명의 마왕을 쓰러트리고 한창 전설과 신화를 쓰고 있는 당신에게 겁쟁이란 모멸이 붙는 것은…… 그리 좋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야. 신앙이란 숭경과 외경에서 만들어진다고. 세상 누가 결투가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를 섬기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냥 고집으로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비드가 알고서 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미 결투가 선포된 이상 유진은 거절할 수가 없다. 거절해서는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자를 만나서 확실하게 느꼈어. 인간으로 아무리 강해져 봤자 결국은 인간이야. 다른 마왕이라면 인간의 격으로도 상대가 가능하겠지만, 상대는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이라고. 놈들은…… 인간의 격으로는 싸움이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욱 확실하게 신위에 도달해야 한다. 다섯 번 뽑는 것이 한계인 신검을 평범하고 가볍게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신검 외에도 신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를 받아들이고, 만약 승리한다면…… 하멜, 당신이 말한 숭경과 외경은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유진 라이언하트가 죽인 마왕은 둘. 하지만 그 둘을 합친 것보다 ‘유폐의 칼’을 쓰러트렸다는 것이 큰 반향을 불러올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특히 헬무드의 마족들에게 있어서 ‘유폐의 칼’이란 이름은 굉장히 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인 척하고 합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세냐까지는 몰라도, 제가 몰래 당신을 보조하는 겁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빛을 보태주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너무 비겁하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기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비겁하고 말고가 뭐가 중요합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가 하는 말이라곤 믿을 수가 없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아니스는 저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라고 해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무인의 투사들처럼 콜로세움에서 결투를 벌였다가는 구경꾼들 전원이 공격의 폭풍에 휘말려 죽어버릴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야 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마법과 신성마법으로 결계 같은 것을 친들, 유진과 가비드가 충돌한다면 결계가 즉시 소멸해 버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경꾼이 없다면 오히려 쉽지요. 세냐가 매복해서 가비드를 공격하고, 제가 당신을 보조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건 너무 비겁하다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비겁하다는 겁니까? 어차피 가비드를 죽이면 아무도 모를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눈썹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아니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결국 당신이 가비드와 결투하고 싶은 것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하지. 싫으면 미리 싫다고 말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 답을 혼자 정해놨으면서 왜 저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얘기하고 싶어서 얘기하냐? 너가 대뜸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녀는 로브 안쪽에 두었던 플레일을 꺼냈다. 쿠웅! 유진과 아니스 사이에 있던 테이블의 철구에 의해 폭삭 주저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일단 사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가 미안하다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날 걱정하는 것뿐인데, 내가 고집만 부려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렇게 바로 정답을 말할 줄이야. 아니스는 마음속으로는 감동했지만, 그걸 표정으로 내비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토록 가비드와 결투하고 싶은 겁니까. 신앙 핑계는 대지 마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력으로 싸우고 싶…….”&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이미 들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에서 그 새끼는 날 죽일 수 있는데 안 죽였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놈이 그 순간에 검을 거뒀는지. 왜 유폐의 마왕의 뜻마저 거스르고 나를 기습한 것인지. 왜, 나에게 결투를 선포한 것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X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선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 그 새끼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 새끼는 자기 나름대로 명예와, 승부욕, 그런…… 생각을 해서 검을 거두었겠지. 이번 결투도 그래. 가비드 린드먼은 유폐의 마왕의 뜻을 거역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저도 신기하다 생각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생 섬긴 유폐의 마왕의 뜻에 반할 만큼, 나와 결투하고 싶어 한 거야. 바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서로가 뒷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곳에서. 가비드 린드먼은 다른 누구도 간섭하지 않게, 일대일의 결투를 원하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거절하고 싶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 저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이런저런 계산이나 대의를 따지는 것은 납득을 위한 변명일 뿐이다. 사실 유진은 굳이 저런 변명을 만들 필요 없이, 스스로 바라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결투하고 싶다. 그냥 가비드 린드먼과 싸우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혀를 차면서 플레일을 다시 로브 안으로 집어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 할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행히 가비드는 유진에게 꽤 많은 유예를 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년이 끝날 때까지라고 말했지요. 설마 당장 하겠다고 굴지는 않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야 당연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가비드가 기한을 올해로 두었다면, 유진은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억지로 싸울지, 아니면 자존심을 굽히고 결투를 조금 더 뒤로 미룰지. 아니면, 아예 결투를 무시할지. 유진이 결투를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가비드가 충분한 유예를 줬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이었으면 그냥 들이박았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유진은 이번 시대의 자신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세상이 끝장날 수 있단 것을 안다. 이미 300년 전에 제멋대로 행동해서 한번 죽어본 몸. 유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한은 아슬아슬할 때까지 써먹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 장소로 생각해 둔 곳은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은 내가 정했으니까 장소는 같이 정할까 싶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잠시 유진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같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번 만나자고 하지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2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카르트 교구. 신성제국 유라스와 헬무드 제국의 국경이 맞닿은 영지. 사실상 대륙에서 유일한, 헬무드와의 중립구역.&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전쟁이 막 끝났을 때, 이 지역은 헬무드와 대륙에게 있어서 중요하고도 정치적인 의미를 가졌다. 당시 대륙 사람들은 마경을, 마족을, 유폐의 마왕을 믿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한 불신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당장에라도 대륙을 짓밟을 것처럼, 아니, 실제로 짓밟아 정복하기 직전이었던 유폐의 마왕이- 대뜸 종전을 선언하고, 거대한 마경 전역을 제국령으로 삼아버렸으며, 전쟁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나섰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누가 마왕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용사, 위대한 베르무트가 앞장서서 유폐의 마왕과의 ‘약속’에 대해 강조하지 않았더라면, 마경 헬무드가 ‘제국’이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나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카르트 교구. 이곳은 대륙에, 특히 국경과 관계없이 많은 영향력을 가진 신성제국에 대한 타협의 의미로 선포했었지.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마족이 빛의 신을 신앙한다는 것은 싸구려 술집의 우스갯소리도 못 되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에도 헬무드는, 유폐의 마왕은 알카르트 교구를 공인했다. 마왕이 받아들이고 마족이 고개를 숙인다. 그 행위 자체가 대륙에 대한 선전이었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 제국의 여명기. 마왕 폐하께서는 대륙에 다양한 원조를 베풀려 하셨지만, 누구도 제국에 찾아오려 하지 않았지. 그렇다고 마족이 직접 자기네 땅에 찾아오기를 바라지도 않았어. 그 시기에 이곳, 알카르트 교구는 꽤나 유용한 교역지로 쓰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카르트의 교구장. 에일린 플로르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새하얀 로브로 감싼 여인. 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에일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얀 가면에 덮여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동자에 어린 감정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공께서 말씀하셨듯, 그 시대에서 마족이 교화되어 빛을 믿는다는 것은 우스갯소리도 되지 못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감정을 가다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시대에, 이 지역에서 신앙은 하찮았습니다. 마족들은 인간을 죽이지 않는 대신에 짓궂게 희롱하였지요. 성경을 외는 성직자들을 마치 술집 작부처럼 대하면서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 플로르. 무척이나 희소한 반인반마. 가비드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마족과 인간의 혼혈은 아멜리아와 에일린을 포함해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찍이 저는 제 존재 자체를 저주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이곳이 유라스의 교구가 되지 않았다면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생각도 하였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고,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빛에 신앙을 품기 전. 에일린은 저런 못된 생각에 매몰되어 100년을 살았다. 그녀는 헬무드의 시궁창을 떠돌고, 마족 귀족과 인간 관광객, 이민자들의 동정에 기대어 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무척이나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고, 그 빛을 따라 걸어 빛의 품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보살핌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고개를 돌려 가비드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입은 은혜를 나누고 싶어 이곳, 알카르트의 교구장을 자처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가 집전하는 예배에 대해서는 나도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지.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업무가 너무 바빠 시간을 내지 못하였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예배에 찾아오는 마족들은 대부분 비슷하지요. 반인반마가 떠드는 신앙을 구경하기 위해. 혹은 비웃기 위해. 대공 전하께서는 어느 쪽이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대를 존중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웃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가 집전하는 예배에 참석한다면, 나는 경의를 갖고서 그대의 이야기를 들을 걸세. 하지만 교화되지는 않겠지. 나는 빛의 신을 숭배할 수 없는 몸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부분의 마족이 그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일부……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신앙에 입문하는 마족들이 있습니다. 또, 기댈 곳이 간절한 마족들이 신앙을 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 그런 일을 기대하고서 이곳, 알카르트 교구를 유지하는 것이지. 마왕 폐하가 아무리 위대하신들, 모든 마족을 보살피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런 마족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에 대한 신앙에 입문하여, 성경을 읽고 자신에게 빛이 깃드는 것을 기다리는 마족들은…… 전쟁이 벌어진다면,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국의 법은 전시에 있어 시민에게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을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과 마찬가지일세. 폐하께서 전쟁을 선포하면, ‘바라는’ 마족은 참전하면 되는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잔혹한 말씀을 하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의 흉포함은 천성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억제될 수 있던 것은, 위대한 베르무트와 유폐의 마왕님이 약속을 맺어 종전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천천히 교화되어 빛을 섬기게 된 마족들도, 대륙에서 인간과 함께 사는 마족들도…… 모두가 고삐와 재갈을 벗어 던질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작 그런 이유로 참전해 버린다면 빛에 대한 신앙이 너무 얇은 것이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는 에일린 플로르 교구장. 그대는 어떤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대의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마족의 것. 그대는 전쟁이 벌어져도- 여전히 성직자로 있을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 말은 매일 밤 에일린이 자문하는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고 싶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신이 없는 대답이로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또한 마족의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마인 이상 천성에 잡아먹혀 짐승처럼 날뛰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100년 넘게 믿어 온 신앙이, 제게 깃든 빛이, 제 안의 사악한 천성을 억누르리라 믿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믿는다, 라. 하긴, 신앙이 그런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의 걸음이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린드먼 대공 전하께서 승리하신다면, 곧바로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네. 폐하께서 전쟁을 유보하신 것은, 용사가 바벨에 오르기를 바라셔서니까. 용사가 패배해 죽는다면, 폐하께서 더는 바벨의 어전에 앉아 계실 이유가 사라져 버리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가 승리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패배해 죽을 것이고…… 그럼 개전이 늦춰지겠지. 용사가 바벨에 오를 때까지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제까지고 늦출 수는 없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걸음을 멈춘 에일린의 등과, 그녀의 앞에서 굳게 닫힌 문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가 바벨에 오르지 않아도 약속의 끝은 다가오고 있네. 그건 폐하께서 미리 말씀하셨지. 언젠가, 결국에는 약속이 끝이 날 걸세.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폐하께서 바벨의 어전에서 기다리겠다고 선언하신 것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자비라고 말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즉, 이런 차이일세. ‘누가’ 침략하느냐. 용사가 바벨에 오르면, 용사가 바벨을 침략하는 것일세. 하지만 용사가 바벨에 오르지 않고 약속이 끝이 나버리면…… 헬무드가 대륙을 침략하겠지. 어느 쪽이 더 끔찍할 것 같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례를 용서해 주시길.”&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일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 대공 전하의 패배를, 간절히, 진심을 담아 기도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저 대답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서하도록 하지, 에일린 플로르 교구장. 그대는 성직자로서 내 패배를 기도할 수밖에 없을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이 열렸다. 에일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물러섰다. 가비드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문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늦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의 안쪽. 방 한가운데 놓인 널찍한 소파. 건들거리는 자세로 앉아 있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일찍 와있던 것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알카르트 교구는 굉장히 상징적인 중립지역이다. 그래서 유진과 가비드는 이 장소에서 결투에 관한 회담을 갖기로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일 줄은 몰랐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유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같이 오겠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유난 떨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카르트에서 회담이 결정되었을 때. 라이언하트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진이 아는 강자들 전원이 함께 가겠다며 찾아왔다. 심지어 호네인 왕세자와 아만 국왕은 왕국군을 파견하겠다고 말해왔으며, 교황 또한 성기사 전원을 출정시키겠다고 떠들었다. 오히려 이 경우에서는 키옐의 황제가 이성적이었을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보냈어. 나를 너무 걱정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내보냈다고는 해도 별 의미는 없군. 아주 노골적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피부가 저릿거리고 있다. 공기 자체에 신성력이 녹아서 흐르는 것만 같다. 문이 열리고, 가비드가 들어온 시점에서부터 이곳, 알카르트 성당은 강력한 신성결계에 포착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난이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노골적이고 강력한 신성력을 유진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그는 표정을 찡그리며 망토를 들췄다. 지금 유진의 망토 안에는 대부분 함께하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없다. 유진은 어색할 정도로 조용한 망토 안에 손을 넣어, 성검을 꺼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검에 빛이 흘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방 안까지 영향을 주던 성녀들의 신성력이 모조리 성검 알테어에 흡수되었다. 유진은 전류처럼 빛이 흐르는 성검을 다시 망토 안에 넣지 않고, 대충 뒤쪽에 꽂아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변모한 성검의 모습에 가비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테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성검은, 300년 전과 모습이 달라졌다. 하우리아에서 망령과 전투할 때, 성검의 칼날이 부서졌던 것은 보았다. 그 결과, 금속의 칼날에 갇혀 있던 빛의 원형이 해방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기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성검의 칼날은- 마치 투명한 유리 같은 것에 덮여 있다. 빛을 봉인하는 것이 아니다. 투명한 유리는 빛을 붙잡지 않고 그대로 세상에 밝히고 있다. 그 모습만 보면 살짝 두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위신의 마안을 쓸 필요도 없이, 가비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유리와 같은 검신은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에 이어 성검까지…… 베르무트의 애검(愛劍)들은 모두가 네 손에서 다르게 바뀌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새끼가 이상하게 썼나 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걱정을 물리친 것에 대해서 이따 성녀들에게 한 소리 듣겠지만, 스스로 말했다시피 유진은 이 자리에서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았다. 당장 가비드는 검은 안개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오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내가 결투를 선포했는지 궁금해서 회담을 연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갑작스러웠듯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대뜸 결투에 대해 조율하자며 장소를 정하라기에, 중립지인 이곳 알카르트 교구의 성당을 선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별로 궁금하지는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가비드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결투를 청한 것인지는 이미 홀로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가비드의 대답은 유진의 생각과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건 더 이상 유진의 알 바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과 결투하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짜는 내가 정한다. 그것이면 충분해. 장소까지 내 마음대로 정하고 싶지는 않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 왜 굳이? 나는 그대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려 했거늘.”&lt;/p&gt;&lt;p&gt;&lt;br /&gt;&lt;/p&gt;&lt;p&gt;“똥개도 제집 안마당에서 조금이라도 먹고 들어갈 텐데. 만약 내 마음대로 장소를 정해서, 네가 출정을 오는 형태가 되어봐라. 그럼 내가 이겨도 조금 찝찝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저런 이유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었지만, 이렇게 듣고 보니 참 하멜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왕이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낫겠지. 피난을 시키면 될 문제기는 해도, 너랑 내가 싸운다면 그 지역은 소멸해 버릴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에 대해서는 유폐의 마왕님께 보증을 받았다. 폐하께서는 너와 나의 결투가 세상에 큰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장소’에 친히 권능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권능?”&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와 나의 결투라면 마땅한 무대가 필요하지 않겠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뺨이 씰룩거리더니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부터 고대한 결투. 그것을 두고 ‘직접’ 하멜과, 유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할 만큼의 즐거움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사들 간의 결투와 시합이 명물인 시무인에는 커다란 콜로세움이 있지. 만약 너와 내가 그곳에서 결투를 한다면, 유폐의 마왕님께서는 친히 권능을 내려 콜로세움을 사슬로 감아주실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가 걱정인 인명피해와 지역의 소멸은 일어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유진이 놀란 소리를 냈다. 설마 유폐의 마왕이 그렇게까지 해주겠다고 나섰다니. 그렇다는 것은, 가비드의 거역은 역시 유폐의 마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무인의 콜로세움은 쓰고 싶지 않은데. 차라리 새로 만들고 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결국 장소부터 정해야겠군. 헬무드 제국령을 제외하고…… 흠, 이곳 알카르트 교구는 어떤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어. 여기는 도시 한가운데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명피해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권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가비드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진을 빤히 보았다. 곧, 가비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만하구나, 하멜. 그렇지만 네 오만함을 꾸짖지는 않으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를 제외하고 사람이 없는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는 어떠한가? 아이리스. 그 한심하고 가여운 다크엘프가 수장된 남해의 끝도 좋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 한복판에 결투장을 만들기는 귀찮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산이나 숲은 어떤가? 우클라스 산. 이곳도 썩 괜찮군. 넓고, 사람이 살지 않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은 라이언하트의 영지다. 그리고 흑사자 성과 베르무트의 무덤이 있다. 너와 유폐의 마왕을 오게 하고 싶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 이해가 가는군. 좋다. 그럼…… 북쪽의 끝은 어떤가? 레헤인야르. 그곳이라면 모론도 우리의 결투를 볼 수 있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제안에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헤인야르의 너머, 라구르야란.”&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기묘한 땅에 대해서는 나도 안다. 머나먼 바다와 이어진 세상의 끝. 허나 누구도 끝과 끝의 연결을 확인할 수 없었다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이라면 날뛰어도 문제는 없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소는 정했고…… 날짜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년이 끝날 때까지 했지? 아슬아슬하게 미루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상관없다. 네게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태도와 대답에서는 숨길 수 없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유진도 그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달 동안 칩거했다더니. 몰래 수행이라도 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말했다. 태도에서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방에서, 가비드를 보았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지 않아졌다. 좋지 않아질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불편한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싸우면 죽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쯧 혀를 차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은 대련 상대를 구해서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2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상대라면 더 궁금한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련 상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가비드를 응시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유진이 체감하는 가비드의 실력은, 고작 몇 달 사이에 이뤄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헬무드에 내가 모르는, 너와 대련할 수 있는 상대가 있나? 설마 누아르 제벨라가 상대해 주지는 않았을 테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대체 누가 가비드를 상대해 주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유폐의 마왕이 대련 상대가 되어주었다면, 가비드가 저토록 가볍게 말할 리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무엇을 경계하는지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빙긋 웃으며 유진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말하지 않고, 너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괜찮겠지만…… 나는 그런 식의 장난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니 솔직히 대답해 주지. 하멜, 내 대련 상대는 마족이 아니다. 헬무드의 시민도 아니고, 이 세상의 존재도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하의 오랜 기억에서부터 재현한 환상…… 아마 너도 아는 존재일지도 모르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잠시 가비드를 응시했다. 기억에서 재현한 환상.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알 수도 있는 존재란 말이 유진의 감정을 긁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품 안의 사슬 뭉치를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널브러진 황야를 알고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유폐의 마왕님의 은덕에 의해 그 이름모를 황야를 떠돌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 황야에서 내가 맞닥트리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죽음이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체가 널브러진 황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죽이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상대였다. 대검을 짊어진 남자. 내가 싸우건, 싸우지 않건, 남자는 항상 내 목숨을 끊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실에서 흐른 시간은 고작해야 두 달 남짓이지만, 황야의 나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았다. 그, 황야에서, 대체 몇 번의 죽음을 겪었는지 모르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손가락을 들어 유진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 남자의 정체를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이 세상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역사가 기록되기도 전의 먼 옛날이라는 것.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자의 ‘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맞상대가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렸을 뿐. 가비드는 아직까지 남자의 검을 넘어서지 못했다. 위신의 마안을 써도, 글로리를 사용해도, 남자의 검을 넘어서서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너는 그 남자를 알고 있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야에서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죽지 않기 위해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고, 글로리를 뽑았다. 그때 남자의 검을 처음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붉은 빛이 만들어내는 검신. 무자비하고 포악하며 거스를 수 없는 폭력의 결정.&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검은, 망령을 죽였던 하멜의 검과 닮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저렇게 강해졌나 했더니. 설마 유폐의 마왕이 가비드에게 저런 방식으로 원조를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환상이라니 다행이야. 난 또, 내가 모르는 강자가 새로 있는 줄 알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다행이라고 할 일은 아닌가. 유진은 쯧 혀를 차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가비드는 지금보다 더, 더 강해질 것이다. 당장 유진은 가비드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가비드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도 제법 궁금하다만, 그런 것까지는 캐묻고 싶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름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거창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스스로 말하고서 피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내 쪽에서 멋대로 생각하는 것도 우스울 일이지만. 그렇지만 하멜, 나는 그 남자의 검에 탄복했다. 설마 세상에 이토록 강한 남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검에서 수백 수천 번을 죽었고, 죽음이 번복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나를 예리하게 깎아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순수하게 남자의 이름과 정체가 궁금한 것이다. 나를 이토록 죽이고, 끌어낸 상대의 이름을 알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툭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신, 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순수한 존중으로 아가로트의 이름을 궁금해하고 있다. 그러니 유진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신 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이름을 되뇌었다. 동시에 긴 세월 살아오면서 쌓인 기억을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신, 아가로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찾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이리스가 틀어박혔던 바다에 그 이름이 남아있었지. 신앙이랄 것도 없는, 아주 오래된 전설 같은 형태로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이리스가 대뜸 남쪽 끝에 틀어박혀, 드워프들을 납치해 뭔지 알 수 없는 꿍꿍이를 꾸밀 때. 가비드도 개인적으로 아이리스의 음모를 짐작하기 위해 정보를 긁어모았었다. 그때 아가로트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상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시대에 신앙과 종교를 남기지도 못한, 아득한 고대의 신의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어디에 있나.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재회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의문에 대답해 줄 의무 따위는 없었을 텐데. 친절에 감사하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족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남자가 먼 고대에 전쟁신이라 일컬어지는 격의 소유자라면, 하하, 만족할 수밖에 없지.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쓰러트리지 못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서 유진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겠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뭘 물어보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년. 하멜, 너 또한 그 시간 동안 강해지겠지. 하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나는 너 이상으로 1년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을 열쇠 삼아 들어가는 황야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현실과 어그러져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히 권하자면, 너로서는 차라리 지금 당장 나와 결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하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1년 후의 나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할 것이다. 어쩌면, 그 전쟁신의 검마저 넘어설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도 모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저 사실을 정면에서 부정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나는 네가 아가로트와 비슷하거나……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가비드가 눈을 끔벅거렸다. 유진은 가비드가 의문을 묻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에게는 아가로트를 넘어섰다는 확신이 필요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릿한 기억과 견주어 얻어낸 판단은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1년 뒤의 가비드와 결투해서 승리한다면, 진정으로 아가로트를 넘어섰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덤덤한 목소리. 가비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고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 결투 자체가 그리 공정하지는 않을 것 같군. 하멜. 당연히 너도 알고 있겠지만, 결투는 너와 나 단둘이서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결투에 현명한 세냐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는 개입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그래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마족이 인간보다 모든 면이 우월하단 것을 안다. 네 검이 몇 번이고 나를 벤들, 나는 치명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한 위신의 마안은 내가 섬기는 유폐의 마왕님의 권능을 그대로 재현시키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상관없어. 네가 위신의 마안을 쓰듯, 나도 성검에서 빛의 기적을 끌어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바란다면, 이 결투가 훨씬 더 공정할 수 있도록 규칙을 추가하마. 네가 내 심장을 부수거나 목을 벤다면, 나는 죽지 않아도 패배를 인정하겠다. 패배를 인정하고, 나 스스로 목숨을 끊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가비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무릎까지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소리하지 마, 가비드 린드먼. 심장을 부수거나 목을 베면 패배를 인정하겠다고? 하하하! 유폐의 마왕이 내게 그래 줄 것 같냐? 멸망의 마왕이 나와 규칙 따위를 정하고 싸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단언하고서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깟 규칙은 필요 없어. 나는 1년 뒤의 결투에서 널 죽인다. 그렇게 이긴다. 그 뒤에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고, 바벨에 올라서, 유폐의 마왕을 죽인다. 그리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러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오만한 말이다. 가비드도 유진이 강하단 것은 인정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절망의 베르무트마저, 300년 전 바벨에서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말이 너를 모욕하였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가비드는 저 말에 오만이란 감정을 읽을 수 없다. 오히려 광기에 가까운 맹신을 느꼈다. 몰살의 하멜은,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는.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더 조율할 사안이 없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장의 건설은 어떻게 할 건가? 네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에서 데리고 있는 드워프가 꽤 많은데, 걔들보고 만들어놓으라고 하면 되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온 대답. 가비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을 돌린 가비드의 앞에 사슬의 문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1년 뒤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가비드를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탁?”&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저 하멜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올 줄이야. 가비드는 저 말이 굉장히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가기 전에 나 좀 어디 떨어트리고 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진은 먼저 좌표를 말했다. 가비드는 몹시 당황했지만, 방금 유진에게 들은 좌표를 머릿속에서 그리며 눈동자를 몇 번 끔벅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남해 아닌가? 내가 읽은 것이 정확하다면, 광란의 마왕이 된 아이리스가 죽은 바다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왜 가려는 것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는 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탁을 하는 입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뻔뻔했지만, 가비드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전쟁신 아가로트와 관련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리스가 죽은 바다에는 아가로트의 이름이 남아있으니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궁금하기는 하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까지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전적으로 유진에게 달린 일. 가비드는 긴 시간 기다려 온 적수를 탐색하거나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도 1년 동안 몰두할 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유진에게 들은 좌표대로 사슬 문을 조작했고, 유진은 그 짧은 사이에 종이를 꺼내서 무어라 휘갈겨 적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쏴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만든 문에서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다. 방금까지는 헬무드에 있는 린드먼 저택가의 텅 빈 방 안을 비추었는데, 지금은 광활한 바다를 비추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 바다를 보자마자 즉시 발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1년 뒤에 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끊겼던 말을 다시 이었다. 유진은 대답 없이 사슬의 문을 지나다가, 대뜸 가비드를 향해 손을 들어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뚝 선 가운뎃손가락. 가비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 역시 하멜답다고 해야 하나? 가비드는 유진이 바다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테이블에 남은 유진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유진이 접지도 않고 훤히 펼쳐둔 탓에 어쩔 수 없이 내용을 보게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동안 수행하고 올게. 라구르야란 쪽에 결투장 만들기로 했으니까, 나 대신 라이언하트 드워프들한테 결투장 만들라고 시켜. 나중에 화내지 말고, 너무 걱정하지도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적어 놓은 편지에 가비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렇게 적어놓고 대뜸 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라구르야란에 결투장을 만들기로 했으니 드워프들한테 시키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중에 따로 편지를 보내야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남긴 편지대로 일을 진행하였다가는 무언가 하나쯤은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하멜 대신, 결투의 날짜와 장소에 대해서 라이언하트에게 편지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나 무책임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를 쯧쯧 혀를 차며 새로이 사슬의 문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 * *&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문을 지난 순간, 곧장 바다로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건 몰라도 이 능력은 굉장히 편리해서 부럽단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워프 게이트를 쓸 필요 없이, 좌표만 알고 있다면 언제든지 한 걸음 만에 도착하는 권능. 이러한 권능은 세냐와 드래곤도 갖지 못한, 오직 마왕만의 권능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덕분에 편하게 왔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남해의 끝. 머나먼 바다와 가까운, 아이리스가 죽은 장소. 그리고 아득한 옛날에는 광란의 마왕이 유페의 마왕과 약속을 맺은 장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가 다스리던 도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 신의 성지가 묻힌 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혼자 왔으면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다로 떨어지면서 중얼거렸다. 이곳은 워프 게이트와 한참 떨어진 바다라, 배를 타거나 하늘을 날지 않고서는 도착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은 시간은 ‘고작’ 1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어떻게? 이번에도 모론을 찾아가서 무작정 대련을 해야 하나. 그런 식의 대련에서 얻을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유진은 모론보다 강하다. 유진이 떠난 사이에 모론도 새로 수행을 했겠지만, 그럴지라도- 더 이상 모론과의 대련에서 무언가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세계수로 돌아가서, 현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카르멘처럼 넝쿨에 들어가 거신의 환영과 대련해야 하나. 그건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자의 경고를 정면에서 무시하는 꼴이 되어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지금의 유진이 모색할 수 있는 방향은 하나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력.’&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딘가 틀어박힐 장소가 필요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나의 근원을, 오직 나만을 관조할 수 있는 장소.&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 말고는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어지던 발이 바다에 닿은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바다가 문이라도 된 것처럼 ‘쩍’하고 갈라졌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갈라진 바다의 틈 사이로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동안 여기서 안 나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해의 심연이 활짝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이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2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은 빠르게 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대공,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회담 이후로 라이언하트 본가에 직접 친서를 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친서에는 1년 뒤에 있을 결투가 정확히 어느 날짜에,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이뤄질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잠적’은 개인적으로 수행에 몰두하기 위해서이며, 본인은 결코 결투의 상대인 용사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맹세마저 곁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로서는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알카르트 성당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유진이 후다닥 편지를 적어 남기기는 했지만, 그 일방적인 편지의 내용으로는 유진의 뜻을 유추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결국 의심의 화살은 가비드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눈썹을 왈칵 찡그리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결투를 약속한 날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을 뱉을 때마다 호흡이 얼어붙어 뿌연 김이 되었다. 혹한. 이 추위는 키옐의 겨울이 아니다. 지금 시엘은, 몇 년 전 나이트마치를 치렀던 레헤인야르의 훈련기지에 와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망친 것은 아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은편에 선 시안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넓은 세상,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고, 하멜이, 유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얼간이들은 시안과 시엘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뭐래? 그 자식이 도망쳤을 리가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 시안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언제 도망쳤다고 했냐? 도망친 것은 아니라고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도 물러서지 않고 똑같이 시엘을 노려보았다. 적잖은 감정이 실린 시선이 쌍둥이들의 백색 불꽃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자가 도달한 백염식은 똑같은 6성. 하지만 결코 똑같지는 않은 불꽃들이 일렁거리며 눈보라를 잠재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휴.”&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시 노려보다가, 결국 시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불꽃을 거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랑 나랑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남들 보기 부끄럽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도 불꽃을 거두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쌍둥이가 자그마한 일에도 발끈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가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잠적해 버린 유진은 돌아오기는커녕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고 있다. 쌍둥이가 백염식의 6성에 오르고, 암실을 극복하고 나왔는데도 라이언하트 본가에는 간략한 편지조차 도착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쯤 되니 라이언하트, 아니, 대륙 전체가 유진의 행방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제국과 왕국이 앞장서고 정보길드를 동원하고 시민들의 제보까지 모집했음에도, 대륙 그 어디에서도 유진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가 결투를 앞에 두고서 도망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이런 소문이 나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유진이 그간 해온 일이 있는 데다, 성격이 워낙 유명한지라 소문이 격화되지 않을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가 정해진 시점부터 잠적하고, 1년 동안 소식은커녕 행방도 묘연한 데다, 결투가 사흘 남은 시점에서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표정을 구기고서 중얼거렸다. 라이언하트와 유진의 지인들은, 유진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시간이 워낙 촉박하다 보니 불안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남해의 끝 말이야.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는데, 뭐 수행할 만한 데가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있…… 을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광란의 마왕, 아이리스와 전투를 치르고 그녀를 죽였던 바다. 그 밑바닥에 무언가가 있다는 시엘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심해와, 그보다 깊은 심연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까지는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무언가가 유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곳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세냐 님이랑…… 크리스티나 성녀 언니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님이라고 부를지 언니라고 부를지 둘 중 하나만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싫어, 그냥 언니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고 부끄럽단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괜히 발치의 눈을 걷어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없는 1년. 성국에서 돌아온 크리스티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한참 동안 나오지 않고서 술만 퍼마셨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식객. 밖에 나오지 않고 술만 찾아대는 성녀를 상대하는 것은 시엘의 몫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님한테 뭐 들은 것 없어? 이제는 더 이상 비밀로 하고 감춰둘 수도 없잖아. 사흘,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없어. 나도 성녀 언니가 취했을 때 몇 번이나 캐보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단호한 얼굴만 봤단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큼 유진의 비밀이 중요하단 것일 터. 예전이라면 시엘은 자신만 소외된 것에 우울함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하멜의 환생이란 것은 공표되었고, 시엘 같은 경우에는 진즉에 유진에게 한 번 들이박았다가 걷어차인 몸.&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한 번 걷어차였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최후의 최후에 받아들여지면 되는 일. 시엘은 몇 년 전 얻어맞은 화끈한 따귀를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시간을 헷갈린 것은 아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은 홀로 결의를 다지는 동생을 무시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있는 산봉우리. 저곳을 넘으면 라구르야랸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바다 한복판이면 날짜를 알기도 힘들잖아. 아슬아슬할 때까지 시간을 쪼개서 수행하다가, 날짜를 헷갈린 걸지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바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보는 아니지만 가끔 바보 같은 구석이 있기는 하잖아. 그리고 남해 끝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말 그대로 대륙을 횡단해야 한다고. 워프게이트를 쓴다고 해도 사흘이면 시간이 너무 부족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시무인부터 시작해서 이곳까지의 최단루트에는 각국의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만약 유진이 워프게이트에 모습을 보였다면 진즉에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어느 워프게이트에도 유진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서 오겠지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시엘도 도저히 확신은 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결투에서 도망칠 리는 없다. 사흘 안에 무슨 수를 써서도 도착은 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어떻게? 시엘과 시안은 도저히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유진이 라이미르아라도 데려갔더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으로 날아서 오면 될 테니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라이미르아를 데려가지 않았다. 메르도 데려가지 않아서 사정도 알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세냐와 카르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세계수에서 우화하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그 둘이 유진과 같이 돌아오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흘이라는 빡빡한 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대를 걸어보아도 솔직히 회의적이다. 이곳은 대륙의 최북단. 그리고 유진이 틀어박힌 곳은 남해의 끝. ‘머나먼 바다’를 가로지른다면 곧장 라구르야란에 도달할 수 있지만…… 대륙의 역사에서 머나먼 바다를 횡단한 전례는 단 한 번도 없다. 북쪽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남쪽 끝에도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확인한 적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든 올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들렸다. 시엘과 시안은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점점 거세어지는 눈보라. 휘날리는 눈발 너머에서 휘청휘청 걸어오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나먼…… 바다…… 히윽…… 바다를 가로질러서 오는 것은, 끅, 유진 님도 하지 못하던 일이지만, 히끅, 어떻게든 올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랍게도 크리스티나는 양손에 각각 다른 술병을 들고 있었는데, 두 술병은 공평하게 비워져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두 개의 술병을 동시에 들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 그러니까, 딸꾹, 두 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 밖이 무척 춥습니다. 그러니까, 히끅, 안에, 안에 들어가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보다 유진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크리스티나다. 본래 도통 마시지 않던 술이 부쩍 늘어난 것도 유진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잊기 위해서다. 놀라운 것은, 매일 술을 저렇게 마시고 있음에도 크리스티나가 폐인처럼 일상을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없는 1년. 초창기에는 방에 틀어박혀서 시엘을 강제로 앉혀 놓고 술만 퍼마셨지만, 한 달 정도 그렇게 지낸 뒤, 크리스티나는 술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유라스에 돌아가서 성국 전역에 유진의 성상을 세웠다. 성경에 유진에 관한 구절을 추가했다. 그러고는 홀로 세계수에 다녀왔고, 최근 몇 달 동안은 레헤인야르로 넘어와, 결투장을 건축 중인 드워프들을 축복했다. 대망치협곡에 은거한 모론과도 만남을 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 성녀님, 술이 너무 과하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 시안 님,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날이, 날이 너무 추워서, 몸을 덥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있을 뿐. 제 정신은 아주 멀쩡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깔끔하게 비운 술병 2개를 흔들며 웃었다. 얼큰한 취기로 번진 미소에 시안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장 쪽은 어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핫…… 시엘, 당신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그곳, 그곳은 아주 멋지답니다. 제가 특히나 드워프님들에게 부탁, 힉, 부탁했으니 말입니다. 아름답고 웅장한, 차…… 찬란! 찬란한 유진 님의 신화를 쓰기에 아주 어울리는 곳이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작! 말하는 도중, 크리스티나의 술병이 박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유진 님만 오면 되는 것입니다. 오실…… 오실 때가 되었는데, 왜 오지 않으시는 걸까요? 저는, 저는 유진 님을 아주 많이, 끅, 믿고 있습니다만, 유진 님이 제게 제대로 된 편지 한 통 전하지 않으신 것은, 힉, 지금 생각해도 아주 서운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 시작인가. 시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발을 뒤로 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리, 이리 오도록 하십시오. 밖은 추우니까, 제 방에 함께 갑시다. 시안…… 시안 님도 어떻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차기 가주로서의 업무를 해야 하기에……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차기 가주의 업무라면, 허윽,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이해하겠……씁니다. 하지만 시엘, 당신은 괜찮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다. 누군가는 크리스티나의 폭주를 붙잡아야 한다……. 다른 일이라면 아니스에게 맡기면 될 일이지만, 술에 관한 문제는 그 셋에게 맡길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그럼, 그럼 갑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긋 웃는 크리스티나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서 시엘의 옷깃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끌려오게 된 크리스티나의 방. 이곳은 이미 폐허와 다름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두려운 눈으로 구석을 보았다. 그곳에는 지쳐 쓰러진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구겨진 넝마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일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 새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한 크리스티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유진 님은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제게 단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으신 걸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 수행이 바빴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진 님에게 있어서 이 결투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 유진 님이 패배하신다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립니다. 그러니 수행에 몰두하실 수밖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저는 너무나, 너무나도 서운합니다. 대뜸 남겨진 제 기분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으신 겁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시엘, 당신은 어떻습니까? 시안 님은요? 제하드 님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해…… 이해는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움을 토하던 크리스티나가 감정을 붙잡았다. 아마 머릿속의 아니스에게 언질을 들은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정말로 그럴까? 솔직히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지금 취해서 진상을 부리는 것은 크리스티나인가, 아니스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유진 님이 들어가신 곳은 심해의 밑바닥…… 그곳은…… 유진 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장소일 겁니다. 제가 아무리 바란들,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에 대해서는 들었다. 다만 그 아래에 대체 뭐가 있는지를 듣지 못했을 뿐. 때문에 시엘을 나름의 상상력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해의 밑바닥에 해저동굴이라도 있는 것일까? 라이언하트 호수의 밑바닥처럼 말이다. 어쩌면 드래곤의 레어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럴지라도 제게 언질은 주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근처에 배라도 띄워놓고서 유진 님을 기다렸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그곳에 배는 있죠? 마이스 님이 유진 님을 마중하기 위해 가 계신 것으로 아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건 어디까지나 마중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갈 수는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긴 탄식을 흘리며 입에 술을 콸콸 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윽…… 저는…… 저는, 만약을 대비해야 합니다. 만약 유진 님이 사흘 안에 오지 못하신다면. 세냐…… 세냐 님도 이곳에 계시지 않으니, 제가 가비드 린드먼을 상대해야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시엘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세냐를 대신해서 가비드 린드먼을 상대한다니! 설마 그 유폐의 칼을 상대로 플레일이라도 휘두를 생각인가? 아니면 정신을 번쩍 깨우고 눈물을 뚝 그치게 만드는 매서운 따귀를 선사할 셈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무리 성녀 언니님들이라도 그건 너무 무모하지 않을까요. 차라리 제가 모론 님을 불러올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구르야란의 결투장은 모론이 있는 대망치 협곡과 가깝다. 암전의 마안의 권능을 쓴다면 한 걸음 만에 모론을 불러올 수 있다. 사실 굳이 암전의 마안을 쓰지 않아도 모론의 도약력이라면 몇 초도 되지 않아 결투장에 도착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염식의 6성에 오르고, 암실을 극복하면서 시엘의 실력은 극적으로 상승했다. 특히나 시엘은 마나를 늘리는 것에 몰두했고, 백염식의 경지와 상관없이 단순 마나의 총량은 8성에 오른 길레이드와 기온마저 뛰어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다른 분들도 많잖아요? 알체스터 경과 오르투스 경도 있고, 아이빅 님과 아만 국왕님도 계신 데다 대마법사들 전원이 와 계시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과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저로서는…… 모두와 함께 합공을 하고 싶습니다만. 그랬다간 나중에 돌아온 유진 님이 화를 내실 겁니다. 그리고 가비드 린드먼은 우리 모두가 합공했을 때 굳이 싸워줄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무사히 빠져나가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유진 님을 비웃고 모욕할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진이 결투에 늦을 경우를 대비할 뿐. 크리스티나는 유진이 반드시 돌아올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하려는 것은, 가비드 린드먼을 설득, 아니, 부탁하는…… 딸꾹, 것입니다. 유진 님과의 결투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유진 님이 조금 늦는 정도는 이해해 줄지도 모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그럴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뇨,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해는 하지 않겠죠. 어쩌면 나름의 대가를 요구할지도. 일단 저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용의는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잠시 크리스티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가비드에게 애걸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무릎을 꿇는 것은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다. 그, 신실한 아니스도- 유폐의 칼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끔찍한 굴욕이다. 시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입술을 몇 번 잘근거리며 씹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저도 함께 무릎을 꿇겠어요. 유진을 위해서라면 라이언하트 모두가 무릎을 꿇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라이언하트가 굴욕을 자처할 필요는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저희가 생각할 것은, 무릎을 꿇느냐 마느냐보다…… 유진 님을 믿는 것이지요. 저도, 유진 님을 믿습니다. 만약을 대비할 뿐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다시 잔에 술을 부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쯤은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람이 무색하게도, 유진은 이틀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흘이 지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이 도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구르야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옆의 레헤인야르에서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지만, 이 땅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회색의 뿌연 하늘. 안개가 고인 것만 같은 땅.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침묵의 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활짝 열린 사슬의 문에서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은 검은 안개를 이끌고서 침묵의 땅에 발을 디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변을 둘러보기도 전. 가비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희뿌연 하늘의 위. 이제는 익숙한 제벨라 페이스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안개가 모두 나오고, 사슬의 문이 닫히는 사이에 제벨라 페이스의 입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라면 혼자서 올 줄 알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는 코웃음을 치며 하늘에 섰다. 평소 기행과 더불어 파격적이고 화려한 패션을 즐기는 그녀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단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누아르의 얼굴을 살짝 덮은 검은 베일을 보며 피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는 내가 패배해서 죽을 것을 예견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물론 그렇지만, 당신의 죽음을 비웃을 생각은 없어요. 난, 당신이 죽는다면 진심으로 애도할 생각이라구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얼굴을 덮은 베일을 살짝 들추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건 조금 의외인걸. 나는 당신이 혼자서 올 줄 알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의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결투잖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답이 훨씬 더 의외야. 가비드 린드먼. 당신이 그렇게 과시욕이 넘치는 남자인 줄은 몰랐는걸요. 이러다가 패배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내가 패배한다면, 더더욱 검은 안개를 이곳에 데려온 의미가 있지. 헬무드의 적이 얼마나 강한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안개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최정예기사단. 가비드는 설령 자신이 패배할지라도, 이 결투를 통해 검은 안개의 기사들이 무언가를 얻고 깨치기를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꼭 내 바람 때문에 데리고 온 것은 아닐세. 그대도 알지 않나. 검은 안개는 유폐의 마왕을 지키는 친위대. 유폐의 마왕님이 오신다면, 검은 안개도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녀는 이미 닫힌 사슬의 문을 힐긋 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직접…… 오는 건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장에 권능을 내리기로 하셨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는 설마 직접 올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 두려운가? 폐하께서 그대의 무례를 꾸짖을 것이 말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그럴 리가요.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비드는 하늘에서 울리는 웃음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고선 걷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린드먼 대공. 제벨라 공작이 폐하를 폐하라 섬기지 않는 것을 어찌 꾸짖지 않으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안개의 부관이 가비드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 혼자만 아니라 검은 안개 전원이 가비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헬무드를 다스리는 황제. 유폐의 마왕 본인이 ‘황제’라는 호칭보다는 ‘마왕’이라는 호칭을 즐기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든 휘하 마족들은 예를 갖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누아르 제벨라는 유폐의 마왕을 ‘마왕님’이라 부르지 않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의 격을 인정하기 때문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아르는 이미 1년 전부터 유폐의 마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 마치 동격인 마왕이라도 된 것 같은 언동을 사용했다. 그때부터 이미, 가비드는 누아르의 언동을 묵인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혹시라도 제벨라 공작의 심기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그녀는 개미를 짓밟듯 그대들을 죽일 수 있고, 폐하께서는 그대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제벨라 공작을 꾸짖지 않으실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검은 안개는 모두 다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지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결투장을 올려보며 탄성을 흘렸다. 고작 1년도 안 되어 완공된 건축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한 건물. 가비드는 섬세하게 조각된 벽들을 훑으며 빙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 한 번을 마지막으로 삼는 것은 아쉬울 정도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결투에서 승리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각을 끊었다. 그런 생각은 결투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야 더욱 즐길 수 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래를 빙 돌아보면 안으로 들어갈 문이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시무인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이 건축물에는 천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겉은 화려하지만…… 안은 생각보다 초라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부분 비어 있는 관중석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이곳은 대륙의 최북단이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눈이 멎지 않는 설원을 횡단하고, 가파르고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는 해도 워프 게이트는 설치할 수 있을 텐데. 설치하지 않는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바다와, 불길함이 그득 번진 레헤인야르를 힐긋 보며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이트 마치로 방문했을 때는 보지 못했는데…… 지금의 가비드는 레헤인야르에 고여있는 사기(邪氣)와 독기(毒氣)를 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구르야란을 관망하는 가장 높은 봉우리. 그 최정상에 우뚝 선, 레헤인야르의 산맥보다 거대하게 느껴지는 사내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포의 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리는 멀다. 하지만 가비드는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모론의 살의를 느꼈다. 이상하게 토막이 난 도끼를 어깨에 세운 모론은, 먼 거리의 가비드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한다면 조금 더 가까이서 보아도 될 텐데…… 하하. 네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깨에 걸친 도끼를 적신 피를 보았다. 가시화한 사기와 독기는 저 피에서 번지고 있었다. 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다시 관중석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석이 대부분 텅 빈 것은, 이곳이 단순히 대륙과 멀고, 오기가 힘들어서만이 아니다. 1년 동안 잠적한 유진 라이언하트에 대한 불신. 그리고- 만약, 만약 유진이 결투에서 패배했을 때에 대한 불안 때문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석이 가득 찬 편이 좋았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높은 곳에서 날고 있던 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뿐만 아니라 마족들도 왔다면, 흐흥, 어느 쪽의 함성이 더 클지 재어볼 수 있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이곳에서의 결투는 대륙 전역에 송출된다고 들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요. 세상 모두가 결투의 양상과 결과를 알고 싶어 할 테니 말이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이 커다란 결투장에 설치된 다양한 마법들을 느꼈다. 검은 탑과 마력 케이블을 인간의 방식으로 재현한 모양이지? 누아르는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식의 영상 송출은 내 전문인데 말이야. 얌전히 도와달라고 했다면 내가 쉽게 만들어줬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재현 자체는 훌륭하다. 이 정도라면 미리 선고된 대로, 각국의 주요 광장 등지에서 결투를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와- 유폐의 칼, 가비드 린드먼 중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을 것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웃으면서 아래로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의 영웅들이 있고, 라이언하트가 있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소가 장소인 데다 어떤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 만큼, 황제나 교황, 국왕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우리아의 전장에서 보았던 영웅들 전원은 참석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예를 갖추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오지 않았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웃으며 속삭였다. 관중석은 물론이고 결투장 어디에도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기척조차도 읽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하멜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오늘은 지나지 않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건너편. 그래도 헬무드의 깃발을 높이 걸어 준 관중석. 가비드는 그 한가운데에 있는 큼직한 의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행히 저들은 나를 결투장 한가운데에 세워놓고 기다리게 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저 의자에 앉으면, 유폐의 마왕은 어디에 앉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검은 안개를 이끌며 하늘을 가로지르던 가비드가 너털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 강림하실 폐하는 저 의자를 옥좌로 삼지 않으실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유폐의 마왕은 항상 그렇죠. 멀쩡한 의자를 두고서 등 뒤의 사슬로 의자를 만들곤 해. 그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사슬 의자가 무어가 편한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하늘에서 내려와, 헬무드의 깃발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를 따라온 검은 안개는 넓게 펼쳐져서 가비드의 뒤편에 섰다. 누아르는 아무도 앉지 않은 검은 안개의 기사들을 둘러보며 키득키득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이 끝날 때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릴 생각인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그럴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나의 하멜이 오늘 오지 않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하멜이 올 것이라 믿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이라고 말했잖아요. 나도 하멜이 올 것이라고 믿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만약 하멜이 오지 않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안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스산한 살의와 함께 안개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의자에 앉은 가비드는 손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으로 안개를 진정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하멜이 나와 약속한 결투에 오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어서 말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흥, 나의 하멜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바로 당신이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하멜이 어디에 있는지 알 테고. 당신이 데리러 가는 것은 어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하멜과 약속하지 않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오늘 안에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그가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 되지. 하멜이 결투에서 도망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별로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하멜을 대신해 다른 누군가가 나와 결투를 치러야 할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답에 누아르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이 자리를 떠날 걸세. 어디로 갈지는 아직 생각해 두지 않아 나도 모르겠지만, 어딘가의 도시일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에 가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도시의 모든 사람을 베어 죽일 걸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걸세. 가로막는다면, 가로막는 것들부터 베고 가야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성녀.”&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석의 앞. 여덟 장의 빛의 날개를 펼치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작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비드는 질문을 듣지도 않은 주제에 크리스티나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가 해야 할 일은 나를 설득하는 것이 아닐세. 자리로 돌아가,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것이지. 부디 하멜이 오늘이 끝나기 전에 이곳에 도착하기를 말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조건은 없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오싹한 한기에 등골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뿐. 크리스티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가비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의 크리스티나였다면 가비드와, 누아르와, 검은 안개가 내뿜는 마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오들오들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동안 성장한 것은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술이라는 못된 버릇이 생기긴 했지만, 그녀는 양손의 성흔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매일 기도도 거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당신이…… 무척이나 신사적이고, 기사도를 우선하는 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진 님과의 결투를 간절히 고대한 만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진 님이 도착하지 못하실 경우도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탓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 명과의 결투, 도시 하나의 몰살. 인간의 관점으로는 미친 짓이지만, 당신은 인간이 아니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는 편이 그대와 내가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또, 거짓의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것부터가 당신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겁에 질리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이성적으로 가비드를 보았다. 예전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은 끔찍하리만큼 강하다. 유진과 세냐가 없는 이상, 이곳의 전원은 가비드를 감당할 수가 없다. 모론을 불러올지라도 승산은 그리 많지 않을 것만 같다. 게다가 가비드가 굳이 싸우지 않고 위신의 마안을 써서 사라진다면,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저는 솔직하게, 제 뜻을 주장하겠습니다. 가비드 린드먼. 만약 제가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춘다면. 결투의 날짜를 조금 뒤로 미뤄주실 수 있는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의 입장은 이해하고 말을 하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비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감정을 느끼며 크리스티나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는 빛의 성녀일세. 유라스의 교황 이상으로 빛에 가까운 인간이지. 그런 그대가, 마족인 내게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겠다고? 그것도 대륙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의 행동이 빛을 욕보이는 것인데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섬기는 빛은, 성녀가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는 것을 굴욕이라고 여길 만큼 편협하지 않으십니다. 도시 하나의 목숨을 구하는데 제 무릎이 닳고 입술이 더럽혀지는 것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로게리스 성녀. 내가 그대의 제안을 거절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다른 제안을 드리지요. 유진 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저를 인질로 잡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알기로, 헬무드와 유라스의 긴 역사에서 성녀가 인질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를 인질로 잡은들 별로 즐겁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고문할 생각도 없고 말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제가 자발적으로 하지요. 내일이 되어도 유진 님이 오지 않으시면 저 스스로 왼쪽 눈을 뽑겠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왼팔을 자르고, 사흘이 지나면 왼쪽 다리를, 나흘이 지나면 오른쪽 다리를, 닷새가 지나면 오른쪽 눈을 뽑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에 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가 스스로 자해한단다. 기적을 믿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스스로 인질로 잡혀서 자해하겠다는 말은 성녀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기가 가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닷새. 닷새가 지나도 유진 님이 오지 않으신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진즉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외침을 무시했다. 아니스에게 몸을 내주지도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제가 여기 있음을 밝히겠습니다. 제 혼을 저당 잡게 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외침. 크리스티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 제 목을 내어드리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말은 끝났지만, 가비드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가비드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이런 말까지 듣게 될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참을 웃던 가비드는, 크리스티나의 등 뒤에 펼쳐진 여덟 장의 날개를 보았다. 그 찬란한 날개와 용모는 300년 전의 지옥의 아니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이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를 인질로 잡고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로군. 하지만 거절하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작 도시 하나 분의 인간 목숨과 바꾸기에는, 로게리스 성녀, 그대의 목숨이 훨씬 더 귀중할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그편이 당신에게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도시 하나를 죽이지 않고 그대를 인질로 잡고 죽일 수 있다면, 하하, 훌륭한 일이지.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나를 더 이상 설득하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듭된 거절. 크리스티나는 적잖이 놀란 눈으로 가비드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의 조건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남자는 당신의 생각 이상으로 고지식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 누워 있던 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 애걸하고 싶다면, 가비드 린드먼이 아니라 나에게 애걸하는 것이 좋을걸요? 나라면, 흐흥,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당신 하기에 따라서 가비드를 며칠 정도 막아줄 수도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 제발, 저 갈X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는 아니스의 외침을 무시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잘근 씹고서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녀는 관중석의 너머, 섬뜩할 정도로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애걸할 필요도 없게 되었지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는 급히 날개를 펼치고서 하늘로 치솟았다. 무언가를 느낀 것은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었다. 관중석에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다 쪽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요한 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너머, 머나먼 곳에서- 파도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오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자에서 일어선 가비드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검은 안개가 일렁거렸다. 유폐의 칼 직속의, 헬무드 제국 최정예의 기사단. 그들 모두가, 스멀스멀 밀려오는 감정에 침식당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율.&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안개 전원이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이 결투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 하지만 저 바다 너머에 있는 머나먼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섬뜩하리만큼 고요한 바다를 깨우고, 이곳의 모든 마족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 누워 있던 누아르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조금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바다’를 확실히 보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낌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라구르야란의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간의 침묵이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이었다는 듯, 지금의 바다는 거세게 넘실거리고, 밀어닥친 물결이 회색 땅을 점점 밀어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쏴아아, 쏴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의 소리가 점점 커진다. 경직되었던 누아르의 얼굴에도 점점 표정이 돌아왔다. 누아르는 첫사랑처럼 설레이는 가슴을 꾸욱 누르면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하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아르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짙고 강렬하게 하멜을 느꼈다. 이 감정은 틀림없는 사랑이고 설레는 증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하늘에서 멈췄다. 본래 그녀가 앉아 있던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관중석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바다를 보고 있지만, 크리스티나는 돌아가던 모습 그대로 하늘에 멈춰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만 이곳에 있을 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의 혼은 이미 결투장을 떠나 바다에 향하고 있었다. 두 성녀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스터. 부끄럽게도, 제가 정말 괜한 말을 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몇 번이고 말리지 않았습니까? 크리스티나. 당신이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희생을 자처할 필요도 없다고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시스터께서 대신 하셨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쩡히 잘 살아 있는 당신이 인질이 되어 죽는 것과, 이미 한참 전에 죽은 제가 인질이 되는 것. 제가 생각하기에는 후자가 당연히 옳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자신과 닮은 크리스티나를 향해 풋 웃어버렸다. 그녀는 활짝 피고 있던 날개를 접고서 크리스티나의 곁에 다가와 손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이제 와서 떠든들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크리스티나, 저는 이것이 몹시도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하멜을 환영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꾸중해야 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당장은 환영해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투가 유진 님의 승리로 끝이 난다면. 그때는, 저희를 속상하게 만든 유진 님은 무책임하고 못난 행동의 죗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순간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쏴아아아! 바다가 크게 뒤흔들렸다. 머나먼 곳에서 밀려오던 파도가 라구르야란의 모든 바다를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회색 땅이 얕은 바다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면을 쭈욱 밀어내는 물결에도 성녀들의 발은 젖지 않았다. 그녀들은 지금 육신을 초월했고, 순수한 영혼만이 남은 천사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은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똑같이 움직였다. 찬란히 빛나는 날개를 접고, 새하얀 물결이 오고 가는 땅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찰박.&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요히 가라앉은 바다에 발소리가 울렸다. 소리와 함께 잔잔했던 바다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늦은 건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스레를 떠는 목소리. 두 성녀는 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늦지는 않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새 해안가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1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모습이 조금 바뀌었다. 1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몰두했던 것일까? 아니스는 풋 웃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염 정도는 밀고 오지 그랬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슬아슬할 것 같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짓말. 내심 수염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놀림에 유진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는 수염에 덮인 하관을 어루만지며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 네가 보기에는 어때? 난 꽤 마음에 들거든. 슬슬 내 나이도 수염을 기를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만, 수염이 없으신 얼굴이 더욱 멋지다고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나.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을 들어 얼굴을 훑었다. 그러자 수염이 말끔히 사라지고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일 년 동안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을 털 듯이 정리하고서 해변을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늦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늦어서 미안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릎 꿇은 두 천사에게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의 눈에 비치는 유진은- 달랐다. 1년 전과 비교해서 무언가가 달랐다. 방금 밀어버린 수염? 덥수룩해진 머리? 아니,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의 본질이, 존재가, 혼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길 수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 ‘신’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목도 한 것만 같은 기분.&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봐야 알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슨한 자신감. 죽고 죽이는 결투를 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진의 표정은 맑았다. 그 표정에 크리스티나는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여태까지 유진의 전투 대부분을 함께 했다. 그럴 때마다 유진이 어떤 표정과 감정으로 임했는지도 기억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겪는 전투의 상대는 대부분 마족이었다. 마왕에 가까운 존재도 있었고, 진짜 마왕도 있었다. 그런 존재에게 유진이 갖는 감정은 대부분 똑같았다. 분노, 증오, 살의, 그런 것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유진에게 신기하게도 분노와 증오,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노와 증오, 살의는 없지만- 지금의 유진에게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순수하고 올곧은 투쟁심이었다. 질 것 같지는 않다. 저 느슨한 자신감에 거짓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이 결투에서 이기기 위해 온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속삭였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그의 발이 무릎 꿇은 두 천사들을 지난 순간, 둘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멈췄던 육체로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하늘에서 잠시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여덟 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서 하늘을 날았다. 바다를 향한 난간. 그곳에 모인 관중들은,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밀어닥친 파도를 보았다. 격렬히 흔들리고, 지금은 고요해진 바다를 보았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대지를 침식하던 물결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자기 나타나, 끝과 끝의 경계선에 우뚝 선 남자를 보았다. 관중들은 저곳에서 두 명의 천사가 남자를 맞이한 것은 볼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바다를 건너온 남자에게서 강렬한 신성(神性)을 느꼈다. 남자는 누구도 정복하고 건너지 못했던 끝의 바다를 건너왔다.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神話)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더듬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뭔지 모를,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 진짜 신화를 맞닥트린 것에 뒤따른 신묘한 고양감.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시엘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름을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24년의 삶에서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적이 있던가. 이렇게, 내가, 결국은 인간이란 것을 실감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이 기분은 무력감이 아니다. 무력감과는 다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동이다. 시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똑같은 감동을 느꼈다. 시엘을 시작으로 모두의 말문이 트였다. 길레이드를 위시한 라이언하트 전원이 왼쪽 가슴의 사자 문양에 손을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사와 용병, 전사, 대마법사. 일컬어지는 모든 영웅이 유진의 이름을 속삭이며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웅의 부름에 용사가 응했다. 끝과 끝의 경계를 걷던 유진은 어느새 결투장의 난간에 섰다. 용사? 지금의 유진을 용사라 불러도 되는 것일까. 모두가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유진은, 더 이상 용사라 일컬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기분 탓일까? 태양이 보이지 않는 이 회색의 땅에, 유진의 주변만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여 유진을 우러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과 신화가 불러일으킨 감동이 순식간에 푹 꺼졌다. 대신에 섬뜩한 한기가 공간에 퍼져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의 모두가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들 대부분은 유폐의 마왕이 어떻게 이 자리에 강림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틀림없이 이곳에, 심지어 본신 그대로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서있던 모든 검은 안개가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가비드조차도 몸을 낮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아르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하늘에 서서, 관중석에 나타난 유폐의 마왕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히 마왕을, 헬무드의 황제를 내려다보다니. 그건 어마어마한 무례일 테지만, 유폐의 마왕은 누아르를 꾸짖지 않았다. 누아르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석의 가장 낮은 곳에 선 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며 한 걸음 걸었다. 망토처럼 어깨부터 늘어진 사슬들이 유폐의 마왕이 움직일 때마다 철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을 만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물었다. 그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유폐의 마왕과 시선을 마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빛을 발하는 금색 눈동자. 유폐의 마왕의 저 눈동자 깊은 곳에서 확고한 신성을 느꼈다. 동시에, 굴종하여 존재적으로 따르며 스스로 비추는 빛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자리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면서 유폐의 마왕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와 내가 대담하는 자리도, 내가 너에게 시험받는 자리도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림 없는 목소리. 유폐의 마왕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유진은 저 미소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이 자리의 주역은 너와 내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는 반대편 관중석에 있는 가비드를 가리키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 오늘 이곳은 너와 나의 결투가 있는 곳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세상이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 내가 마음이 급하였어, 유진 라이언하트. 네 말이 옳다. 오늘 이 자리는…… 너와 나의 무대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칼.”&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임이 이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기사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새 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의 곁에 섰다.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유폐의 마왕을 향해 머리를 낮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돌려 가비드를 보았다. 스릉. 가비드는 허리에 매단 글로리를 뽑고, 양손으로 공손히 받쳤다. 유폐의 마왕은 글로리를 직접 손으로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 결투의 승리를 바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마치 처음으로 유폐의 칼을 서임했을 때처럼 가비드의 어깨에 글로리를 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이 결투는 나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 나의 바람, 나의 약속. 만약 네가 그런 것들을 신경 쓰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바치겠나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임이 끝나고, 가비드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글로리가 다시 가비드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비드는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락! 사슬의 망토가 머리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은 언제나 앉던 사슬의 옥좌에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진 곳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결투장을 둘러보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장소와 오늘의 결투는 신화가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우우웅! 세상이 뒤흔들렸다. 결투장의 중심에서 돌연 사슬이 치솟았다. 출렁거리는 사슬이 다시 지면에 돌아와 넓게 펼쳐지고, 관중석과 결투장을 나누었다. 원형의 결투장 전역을 감싸고서 맞물리던 사슬이 공간에 녹아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권능에 감사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글로리를 다시 허리에 꽂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페의 마왕이 직접 내린 권능. 이제 저 널찍한 결투장에서 어떤 파괴가 일어나고, 얼마나 큰 힘이 부딪친들 관중석까지 피해가 번지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카르멘 님은 아직도 안 온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사 서임과 권능을 시큰둥하게 보던 유진이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참. 1년이나 지났으면 당연히 돌아와 있을 줄 알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발을 떼었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관중석의 계단을 걷고, 아래의 난간에서 뛰어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내려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대에 선 유진이 가비드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비드는 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는 유폐의 마왕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결투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가비드에게 남은 마지막 족쇄를 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찍한 원형의 결투장은 시무인에서 보았던 콜로세움의 몇 배는 될 것 같았다. 그 넓은 결투장의 끝과 끝에서 유진과 가비드가 마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묻지 않고, 공격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직감했다. 누군가에는 짧았을 1년이 서로에게는 그 얼마나 알차고 길었는지를. 특히 가비드는 유진의 성장에 놀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오늘 너와 결투하게 되어서 다행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1년 전, 알카르트 성당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 만약 그때 결투를 벌였더라면, 가비드는 무조건 하멜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비드가 원한 것은 서로의 전력을 아낌없이 부딪히는 치열한 결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담을 나누고, 하멜이 원한 대로 사슬의 문을 열어주었다. 1년의 시간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나 내심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어떤 수행을 하건, 가비드 자신이 보낼 1년보다 값진 수행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가비드에게는 유폐가 하사한 사슬이 있었고, 그를 통해 인도되는 ‘황야’는 현실의 시간과 동떨어진 장소다. 1년을 우직하게 몰두한다면, 백 년은 훌쩍 넘는 시간을 사용할 수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순하고 무식하게 시간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시체가 즐비한 황야. 그곳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것은 시간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대의 전쟁신, 아가로트. 역사와 신화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그 존재와 끝없이 싸울 수 있단 것이야말로 사슬의 진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서로가 전력을 다하는 치열한 결투.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해도 이상하지 않을 결투를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을 훨씬 뛰어넘은, 아득하리만큼 긴 시간을 황야에서 지냈다. 세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많고 많은 죽음을 겪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으면서도 깎여나갔고, 그렇게 마모된 부분에 갈망을 채웠다. 주저앉거나 물러서지 않고 갈망하는 만큼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결투가 너무 쉽고……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닐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검 글로리가 아가로트의 검을 부러트렸을 때. 전쟁신의 몸에 피를 쏟게 만든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한 걱정이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갑옷 같은 것은 입지 않았다. 어차피 유진이 퍼붓는 공격들은 세상 그 어떤 갑옷이나 방패로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갑옷 대신에 헬무드의 제복을 입었다. 가비드는 어깨의 견장을 가볍게 털어낸 뒤, 유폐의 칼로서 쌓은 무훈(武勳)을 증명하는 훈장이 가득 달린 상의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이도 달고 다닌다. 안 무겁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흑암의 망토를 두른 유진이 이죽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훈장은 명예의 상징과 다름없으니 무거운 것이 당연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사슬의 문을 열어 벗은 제복의 상의를 집어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훈장들은 유폐의 칼과, 대공으로서 받은 것. 지금은 그 무게가 방해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김 하나 없이 반듯한 셔츠의 윗단추를 몇 개 풀었고, 소매의 단추도 풀어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습에 유진은 피식 웃었다. 베일 듯이 각을 세운 바지.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아 은은한 광까지 발하는 구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면에 유진의 머리는 정돈하지 않아 덥수룩했고, 망토 아래의 옷은 악취는 없었지만 1년의 고행을 증명하듯 헤져서 너덜너덜했다. 대륙이 주목하고, 관람 중인 결투에 나설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가비드는 유진에게 비아냥을 전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고 진중한, 동시에 호기심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유진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기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장은 넓다. 끝과 끝에 선 유진과 가비드의 거리는 한참이나 멀다. 먼저 발을 뗀 것은 가비드였다. 그는 손에 쥔 글로리를 의식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황야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헤인야르의 너머, 라구르야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앞에 있는 것은 아가로트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마치 황야를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황야에서, 처음 아가로트를 보았을 때와 같은 위압감을 느꼈다. 그곳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맡았던 무기들의 금속 내음과, 시체들의 피비린내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부가 저릿거릴 정도의 위압감.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가비드는 실감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하멜이, 유진 라이언하트가 얼마나 강한지를. 인간이었을 그의 격이 현재는 어디에 도달해 있는지를. 그러한 실감이 가비드에게 직감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미소가 짙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아가로트였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목소리.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뚜둑. 유진의 손가락이 뼈 소리를 발했다. 천천히 움직인 오른손이 흑암의 망토 안으로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광경은 관중석의 모두가 보았다. 검은 안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유진과 한 번이라고 같은 전장에 섰던 사람들은 모두가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털이 덥수룩한 망토의 본래 주인은 멜키스 엘하이어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진의 상징이 되었다. 저 망토의 안에는 라이언하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무기들이 잠들어 있고, 빛의 신이 직접 빚어낸 성검 알테어와, 기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한 달빛과, 마왕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들이 잠들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은 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다가가던 가비드의 눈이 얇아졌다. 이 결투에 심판 같은 것은 없다. 관중석에서 내려오고 마주 선 순간에 결투는 이미 시작되었다. 겉치레의 인사나 대화도 끝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글로리를 강하게 의식했다. 주저하지 않고 위신의 마안을 빛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찰나, 가비드의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유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와, 종류에 따라 시작하는 모든 종류의 공격,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대응. 당연하게도 가비드가 떠올리고 결론 지은 가능성에는 성검과 월광검에 대한 것도 존재했으며, 아가로트의 검도 존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다시 한 걸음 걸은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손이 망토를 빠져나왔다. 손이 완전히 뽑히기 전. 위신의 마안이 유진이 선택한 무기를 포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처음 보는 검이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칼날. 그것은 1년 전에 보았던 성검과 같았지만, 칼날 안쪽에서 일렁거리는 ‘빛’은 성검과 판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위신의 마안이 정체 모를 검에서 느껴지는 ‘힘’을 보았다. 성검 알테어의 빛, 월광검의 불길한 달빛. 저 유리와 같은 검신은 유진이 지배하던 모든 빛을 품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뿐만이 아니다. 죽은 마왕의 무구들. 분쇄추 지골라스와 마창 루인토스의 권능까지 깃들어 있다. 마치 분쇄추와 마창을 녹이고 새로이 제련한 것처럼 말이다. 결코 섞일 수 없는 양극의 힘들을 어떻게 하나의 검에 녹여냈단 말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검은 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해하기 힘들다. 결국 가비드는 그렇게 묻고 말았다. 유진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연약해 보이는 칼날을 옆으로 들면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월광검(神聖月光劍).”&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아아악! 유진의 몸이 백염식의 불꽃에 삼켜졌다. 동시에 유리의 칼날이 월광과 빛을 발했다. 뒤섞이는 빛을 백염식의 불꽃이 감싼 순간- 빠지지직! 격렬한 소리와 함께 유리의 칼날이 검붉은 불꽃에 휘감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을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검을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창을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분쇄추를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부수고 남은 모든 잔해를 빛에 녹였다. 빛은 친히 유진을 위해 망치를 들어, 빛에 녹은 잔해들을 하나의 검으로 만들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월광검, 레반테인.&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검은 유진이 오랜 벗에게 받은 선물이며, 기적의 결정이다. 유진은 가볍게 호흡하며 레반테인의 불꽃을 조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이, 혼이, 존재가 떨린다. 투명하고 아름답던 칼날은 지금 포악한 불꽃에 휘감겨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검은 확실하게 규격 외다. 그럴 수밖에. 성검과 월광검, 마창, 분쇄추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조차도 벅찰 텐데, 레바텐인의 중심이라 할 만한 ‘힘’에 어우러져, 가뜩이나 다루기 벅찬 힘이 아득하게 증폭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 끼릭, 끼리리릭…….&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계속해서 거세어졌다. 그럴 때마다 결투장 전체가 뒤흔들렸다. 사슬의 옥좌에 앉아 결투장을 내려보던 유폐의 마왕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그는 레반테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검인지를 느꼈고, 저 검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유폐의 마왕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결투장과 관중석을 분리한 사슬이 한계까지 늘어나는 것이. 계속해서 힘이 가해진다면 사슬이 모조리 끊어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검이라면 내게도, 멸망에게도 닿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락! 유폐의 마왕의 발밑에서 또다시 사슬이 쏘아졌다. 그러자 결투장의 흔들림이 멎었다. 그렇게 사슬을 보강한 뒤, 유폐의 마왕은 손등에 턱을 괴고서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에 대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 이후를 비추기 위해 산화한 모든 신들에 대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중심에서 모두를 떠받친, 가장 거대한 신에 대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야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번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눈을 떴다. 그는 저 눈부시고 포악한 불꽃에 순간 압도되었고, 경외를 느꼈다. 동시에 확신했다. 저 검에는 아가로트의 검도 녹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의 몸이 앞으로 휘청 기울었다. 위신의 마안이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넓은 경기장,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커먼 마력에 휘감긴 글로리가 먼저 유진을 향해 움직였다. 육안으로 쫓을 수 없는 움직임. 유진도 굳이 눈으로 보려 들지 않았다. 가비드와 글로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레반테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서로의 검이 충돌했다. 마치 글로리가 레반테인의 불꽃에 빨려 들어간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아아앙! 부딪친 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어마어마한 힘이 서로 충돌했음에도 유진과 가비드 누구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유진은 이어서 레반테인을 휘두르려 했지만, 생각대로 검이 움직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릭…….&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간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레반테인의 칼날을 붙잡고 있었다. 위신의 마안. 유폐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마안이, 레반테인을 구속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짧은 틈은 가비드에게 있어서 영원처럼 길고 충분했다. 마검이 유진을 덮쳤다. 반응하고 싶어도 반응할 수 없다. 잠깐이라도 검을 놓던가, 아니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몸을 관통하려는 순간, 가비드는 이질적인 위화감을 느꼈다. 진즉에 내찔렀던 검이 아직도 유진에게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밀어내고 있는데, 마치 무언가에 막힌 것만 같은- 아니, 아니다. 이건 막힌 것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이 느려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소를 잘 보고 들어와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속삭였다. 그 말이 들린 즉시 가비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범하게 본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아래에 깔린 것은 회색의 땅뿐이다. 하지만- 지금 가비드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검은 불꽃에 휘감긴 유진의 발과 땅이, 공간이 통째로 연결되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긴 내 성역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에서 신을 해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가비드의 검은 유진에게 닿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르륵! 거세어진 불꽃이 사슬을 끊어냈다. 유폐의 권능을 그대로 담은 사슬이, 레반테인의 불꽃에 녹아서 사라졌다. 유진은 양손으로 레반테인을 잡았다. 가비드는 즉시 글로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아앙! 가비드의 몸이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그는 양손의 뻐근함을 느꼈다. 입술이 멋대로 씰룩이며 미소를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이라니. 가비드에게는 낯선 개념이지만, 유진에게 느껴지는 초월적인 힘과 신격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멀찍이서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 가비드를 노려보았다. 지금의 유진은 예전처럼 신검의 횟수에 구애받지 않는다. 레반테인 자체가 유진의 신검이 되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아가로트의 신검보다 강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에는 아가로트의 신검 자체를 녹여냈다. 그런데도 글로리와 가비드를 단번에 양단하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저 새끼, 너무 세진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을 인지하면서 유진은 레반테인의 화력을 낮추었다. 이 빌어먹을 검은 지금 상태로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애당초 레반테인은 지금의 규격을 한참 벗어난 물건이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그만한 태세로 임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의 중심에 우뚝 선 유진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만 묻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뻐근한 손을 쥐었다 펴던 가비드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가비드의 눈을 노려보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쪽 눈은 얻다 버리고 왔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가진 위신의 마안. 당연히 존재해야 할 쌍안(雙眼) 중에서 왼쪽 눈이 마안으로써 기능하지 않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한 쌍의 마안 중에서 왼쪽만이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진의 사고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몇 번의 공격을 나누면서, 유진은 가비드의 눈동자에 단 한 번도 주목을 거두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틀림없었다. 가비드의 왼쪽 눈동자에는 위신의 마안이 깃들어 있지 않다. 저것은, 그냥 평범한 눈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패널티는 아닐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가비드는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나로서는 이 ‘다음’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입가에 쓰디 쓴 웃음이 번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만약에, 내가 하멜, 네게 패배했을 때를 위한 대비.”&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안은 사용하기 나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른쪽 눈동자. 위신의 마안이 스산한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알겠지만, 이 눈에는 나의 주군, 유폐의 마왕님의 권능이 깃들어 있다. 한쌍의 눈으로 쓰건, 하나의 눈으로 쓰건,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유진도 잘 알고 있다. 당장 시엘만 하더라도 마안이 깃든 것은 한쪽 눈동자 뿐. 그럼에도 시엘은 한짝의 마안으로 암전의 권능과 부동의 권능을 다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마안’이란 것은 저렇게 편리하게 뽑고 남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안이란 육체가 아닌 존재에 깃드는 것. 한쪽 눈을 뽑아낼지라도 마안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럴 텐데, 지금 가비드의 왼쪽 눈에는 위신의 마안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하는 것을 보니 다른 놈한테 넘긴 모양인데. 누구냐? 내가 없는 사이에 이미 차기 유폐의 칼이 내정이라도 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숨길 필요는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큭큭거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후임 따위는 내정하지 않았네. 유폐의 마왕님께서도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전, 유진과의 결투를 선언한 직후. 가비드는 바벨에 돌아가, 유폐의 마왕에게 결투에 대해 보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위신의 마안의 양도를 희망했다. 만약 거절당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위신의 마안은 유폐의 마왕이 자신의 칼을 위해 하사한 것이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가비드의 청을 받아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락을 얻은 뒤, 가비드가 향했던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lt;/p&gt;&lt;p&gt;&lt;br /&gt;&lt;/p&gt;&lt;p&gt;“몽마의 여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속삭이는 대답은 유진이 상상하던 가장 끔찍한 경우에 대한 증명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유진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투명해진 사슬 벽의 너머, 공중에 편안히 누워있는 누아르 제벨라의 모습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유진은 가비드와 누아르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저 둘이야말로 바벨에 오르기 전에 넘어야 할 커다란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비드와의 무대는 오늘 마련되었고, 유진은 패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에서 승리하고 난 뒤를 생각했다. 오늘 가비드를 죽인다면, 바벨에 오르기 전의 난관은 누아르 제벨라 단 한 명만 남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주목해서 누아르 제벨라를 살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유진에게 섬뜩함을 주었었다. 누아르 제벨라에게는 아무런 힘도, 격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가비드에게 미리 듣지 않았다면, 누아르 제벨라가 위신의 마안을 하나 계승받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나중에 서프라이즈로 알려주려 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허공에 누워서 다리를 까딱거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난기 가득한 웃음. 그렇지만 유진은 저 미소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 순간에야 유진은 절절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몽마의 여왕, 누아르 제벨라. 서큐버스란 종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지금에 이르러 서큐버스란 종족을 아득히 초월했다. 그렇다면 마왕이 되었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이미 마왕조차 아닌 다른 존재다. 유진은 쯧 혀를 차면서 시선을 내려, 가비드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를 죽이기 위한 대비는 지금은 너무 이르다. 유진이 당장 해야 할 것은, 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에서 승리하는 것. 놈을 완전히 죽여버리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한쪽 마안을 나눠줄 줄이야. 너희 공작이란 새끼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내게 엿을 먹이는데. 넌 오늘 뒈지기 전에 한쪽 마안이 없는 것을 후회할 거고, 뒈지는 순간에 전력이 아니었던 것에 대해서 미련을 가질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에 차이는 없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뱉은 말을 증명하듯 위신의 마안의 빛이 강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긱, 끼기긱. 사슬은 체화하지 않았지만, 가비드의 주변에서 금속의 소리가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했듯이 마안이란 쓰기 나름이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쪽 마안을 누아르에게 넘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힘이 부족해졌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한 황야의 전투, 아가로트를 베었던 ‘검’은 한 쌍을 이룬 위신의 마안으로 거둔 것이 아니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만약 오늘 패배한다면. 그것은 마안의 결손과는 관계가 없다. 단순히 가비드의 검이 유진을 넘지 못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이지 않던 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텅 빈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가비드의 왼손을 휘감았다. 동시에 수백 개의 사슬이 유진을 향해 뱀처럼 머리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만으로도 공간의 성질이 바뀌었다. 유진은 성역을 압박하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그 많은 사슬이 마치 창처럼 쏘아진 순간, 레반테인이 다시 불꽃을 휘감았다. 포착된 공간이 활짝 열리고 불꽃의 장벽이 치솟았다. 마창 루인토스의 권능, 창림이 전혀 다른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은 불꽃의 장벽을 관통하지 못했다. 관통할 필요가 없었다. 유폐의 사슬의 권능은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저것은 닿는 것을 모조리 닫아 유폐해 버린다. 마나도, 마법도, 신성력도, 기적도, 사슬에 연결된 순간 주도권을 빼앗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을 끄는 것은 가비드다. 가비드든 사슬과 연결된 왼손을 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의 장벽이 소멸했다. 가비드는 능숙하게 왼손에 회전을 넣으며 사슬을 휘둘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움직이지 않고 성역의 중심에 섰다.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역이 과연 유폐의 권능 앞에서 얼마큼의 가치를 가지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구구구궁! 결투장이 진동했다. 가비드가 휘두른 사슬은 아무런 벽도 없는 허공에 멈춰서 덜덜 몸을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유진과 가비드, 둘이 똑같은 것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힘겨루기. 누구 하나가 특별히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힘만을 겨루는 것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가비드가 앞으로 나섰다. 시커먼 마력이 가비드의 전신을 뒤덮고, 글로리의 칼날로 흘러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험하고 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신의 힘을, 그리고 내 검을. 가비드는 입술을 뒤틀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저 성역은 놀랍다. 분명히 죽일 생각으로 찔렀는데도 칼끝은 유진에게 닿지 않았다. 유진을 중심으로 한 반경 수십 미터는 일반적인 상식이란 것이 통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에도 가비드는 성역을 향해 나아갔다.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팽팽히 당긴 사슬을 왼손에 몇 바퀴 더 돌려 감았고, 내딛는 발에 힘을 주었다. 글로리에 일렁거리는 마력은 가비드의 의지에 따라 점점 더 짙어졌으나, 포악해지지는 않고 조용히 응축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순간, 가비드의 발이 땅을 강하게 밀었다. 팽팽히 당겨졌던 사슬이 순간 느슨해졌다. 사슬에 흐르던 힘이 바뀌었다. 유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성역을 제외한 모든 힘이 가비드의 몸을 앞으로 밀었다. 그것은 질주나 도약과는 전혀 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정면에서 때려 박히는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찰나에 유진은 그것을 느꼈다. 가비드에게서 이어지는 것은 한 번의 참격. 하지만 그것은 결코 ‘검’에 의한 참격처럼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였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의 법칙. 성역에서 신을 해할 수 없다. 그러니 가비드 린드먼의 검은 닿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단순하기에 절대적이어야 할 법칙이 일격에 파괴되었다. 그러고도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신살(神殺)의 경지에 도달한 마검이 유진의 목숨을 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되니 유진도 빠르게 전략을 바꾸었다. 지금 상태로 전개한 성역은 마검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의 형태를 바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등에서 불꽃이 치솟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그니처, 프로미넌스. 검게 타오르는 빛의 날개가 발현된 순간, 유진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폭발적인 가속이 유진의 등을 떠밀었다. 한순간에 유진과 가비드의 위치가 반전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면을 내리찍던 마검이 우뚝 멈췄다. 그만한 힘을 도중에 거뒀음에도 가비드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불균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홱 몸을 돌리고서 유진의 모습을 좇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유진의 손은 가슴에 올라가지 않았다. ‘저것’은 이그니션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프로미넌스, 유진 라이언하트가 아롯에서 대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아 만든 시그니처. 저 마법이 어떤 형식이고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가비드도 이미 파악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포한 깃털로 좌표를 지정하여 연속으로 펼치는 공간도약. 그것도 전투 보조 계열의 마법으로서는 터무니없는 성능을 갖지만, 유진에게 있어 프로미넌스의 극한은, 유사 코어로 활용하여 이그니션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저 성능에 대해서는 나하마의 하늘에서 직접 본 것으로 확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마법의 영역은 뛰어넘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불꽃은 마나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프로미넌스를 구성하는 술식도 마법이 아니다. 프로미넌스는 마법의 영역을 한참 뛰어넘어 확실하게 기적에 도달했다. 저 검은빛의 날개 자체가 유진의 신기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 성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프로미넌스 자체가 유진의 성역을 대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아가로트의 방식이 아니다. 그 전쟁신은 신명(神名)처럼 자신의 성역을 전쟁병기로서 활용했다. 아가로트가 선 전장에서 신군은 결코 지치지 않고 대부분의 부상을 기적으로 치료받았으며, 신력의 은혜까지 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멸망의 마왕 앞에서는 아가로트의 성역은 허무히 부서졌다. 즉, 아가로트로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지금’ 판단하자면 아가로트의 방식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마족과의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면 광범위한 성역을 써먹어야겠지만, 지금 유진이 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닌 결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와 유폐의 마왕을 죽여야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프로미넌스를 성역으로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치직, 치지직. 유진이 선 공간이 흔들리면서 균열이 일었다. 한계를 넘어 몰입시킨 힘에 세상이 버거워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더 이상 감탄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지금의 유진은 성역을 통째로 두르고 있다. 그것이 전투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비드는 아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직접 부딪칠 수밖에. 가비드는 숨을 들이켜면서 마력과 권능을 전면으로 개방했다. 모든 것을 옭아 죄는 사슬이 가비드의 몸을 한 번 휘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빛 속에서 유진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찬란한 금색 눈동자 깊은 곳에서 신성이 번뜩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증유의 힘이 움직였다. 서로를 상징하는 검이 공간을 가르며 충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번의 충돌, 꿰뚫어 볼 수 없는 빛의 폭발이 결투장을 가득 채웠다. 즉시 유폐의 마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사슬을 몇 겹이나 보강했음에도 결투장이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가비드, 서로의 팔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 광경에 크리스티나와 아니스가 비명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는 ‘인간’인 유진에게 있어서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 붙는다. 결투에서 유진은 부상을 입어서는 안 된다. 경상 정도라면 어쩔 도리가 있어도 중상을 입는다면 결투에 크나 큰 지장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의 오른팔을 보라. 한 번 검을 부딪쳤는데도 뒤틀린 뼈가 살갗을 뚫고 나왔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터진 근육에서 피가 철철 흐른다. 성녀들의 보조가 있다면 저런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할 수 있겠지만, 지금 성녀들은 결투에 개입할 수 없는 입장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앗……!”&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람과 걱정을 느낀 순간에 유진의 팔이 멀쩡히 되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력에 의한 초고속 재생? 아니다. 팔이 박살 났다, 라는 현실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성녀들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불사력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옥좌에 앉은 유폐의 마왕만이 저 불사력이 어떤 성질을 갖는지를 이해했다. 그는 웃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릎까지 두드리면서 감탄을 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너.”&lt;/p&gt;&lt;p&gt;&lt;br /&gt;&lt;/p&gt;&lt;p&gt;똑같이 부서진 팔을 재생해 낸 가비드도 감탄에 그치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인간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문을 건넨 순간에도 가비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서 나타난 유폐의 사슬이 유진을 덮쳤다. 유진의 왼손이 레반테인의 칼날을 훑었다. 더해진 신력에 불꽃이 보다 격렬히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폭발하는 광채 속에서 검붉은 불꽃이 선을 그었다. 레반테인의 칼날을 훑은 왼손이 주먹을 쥐었다. 갑자기 번진 어둠이 빛을 모조리 빨아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중첩된 신력이 작은 구체를 만들었다. 빛을 모조리 빨아들인 구체에 검은 태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힘이 깃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클립스가 터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담담한 선언은 중계에 들리지 않았다. 폭주하는 빛과 폭발이 결투장의 모든 것을 감췄다. 하지만 가비드와, 관중석의 모두가 저 말을, 담담한 목소리에 실린 오만한 확신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유진은 틀림없이 인간의 격을 넘어섰고, 그가 조작하며 만들어내는 힘은 신위라 하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을 가장 깊이 실감한 것은 유폐의 마왕이었다. 저 신위는, 유폐의 마왕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혹시, 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야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집중된 운명과 가능성이 낳은 괴물이다. 과연 저 신위는 찬탄할 만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그렇지만. 지금의 ‘결투’에서 특별하게 우세하지는 않다. 평생을 추구하던 이름과 입장을 저버리고 제 자신의, 그리고 마족으로서의 순수한 욕망에만 몸을 던진 가비드 린드먼은 신살의 영역에 도달했다. 신화시대였다면 그는 신살자로서 이름을 떨치며 마왕으로서도 최흉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르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유진이, 하멜이 300년 전에 저만한 격을 얻었다면-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바벨의 문을 활짝 열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전쟁 시대가 아니다. 이미 300년이나 흘렀다. 진즉에 멸망했어야 할 시대가, 300년이 더 지속되었단 말이다. 약속이 없었다면, 거기서 작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유폐의 마왕은 여태까지 반복했던 것을 이번 시대의 마지막에도 똑같이 행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족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300년 전이라면 저 힘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부족하다. 300년은, 모두에게 충분하고 긴 시간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만한 힘이 폭발했는데도 가비드 린드먼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 300년 전의 그였다면 저 힘 앞에서 무력하게 소멸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의 가비드는 그렇지 않다. 누아르 제벨라가 무수한 욕망을 모아 마족을 초월했다면, 가비드 린드먼은 반복되는 시간 속에 스스로 유폐하고 검에 무구하여 마족을 초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검 글로리가 전진했다. 이곳을 통째로 멸망시킬 것만 같던 빛의 폭발이 칼끝에서 가로막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옆으로 그었다. 쭉 그어서 완성된 선이 빛을 양단했다. 소리 없이 빛이 소멸했고 모든 것이 텅 비었다. 설마 저렇게 한 번에 베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유진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웃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쉬울 리가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가 별 어려움 없이, 쉽고 짧게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도를 넘은 오만이다. 유진이 1년 동안 여러 일을 겪고 비로소 신성을 손에 쥐었듯, 가비드 또한 미지의 체험을 하고 미지의 경지에 도달하였기에 이 장소에 서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새로운 것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중얼거렸다. 결투가 시작된 후. 유진은 자신이 손에 넣은 새로운 힘들을 사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검과 월광검, 마왕의 무구를 신검으로 벼려낸 신성 월광검, 레반테인. 성역. 프로미넌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가비드를 응시했다. 저 질문에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와 별개로 유진은 어떤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별로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유진은 깊이 숨을 한 번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딱히 패를 숨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유진은 다시 한번 왼손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레반테인의 불씨가 유진의 왼손에 옮겨붙었다. 새카만 불꽃이 선을 그리면서 유진의 손을 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태까지 싸움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시작하자마자 쓰는 것은 영 익숙하지 않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 말과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가비드를 압도하고, 공포를 주었던. 혼을, 목숨을 불사르면서 승산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죽이고 말겠다는 필살의 의지. ‘몰살의 하멜’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기술.&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게 타오르는 손이 유진의 왼쪽 가슴을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근. 그 커다란 소리는 결투장의 전원이 들었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유진의 심장과 공명하며 일렁거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유진을 뒤덮은 불꽃은 오히려 잔잔히 가라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지금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 가비드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그니션을 펼치는 도중에 공격한다면 유진은 무방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한 방식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저 자세는 결코 무방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손이 가슴에 얹어진 순간에 이미 이그니션은 발동되었다. 지금 유진이 저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이그니션이 늦어서가 아니다. 만약 틈이라고 생각하고 다가간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가가서는 안 된다. 가비드는 그것을 직감했지만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것이야말로 가비드가 300년 동안 갈망하던 것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걸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작 한 걸음 나아갔을 뿐이다. 그것뿐인데도 가비드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 넓은 결투장이 한없이 좁게 느껴졌다. 마치 자그마한 독방에 유진과 똑바로 마주 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될 만큼 유진이 크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다시 한 걸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하고 행동하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마검이 앞을 베었다. 그렇게 베었을 텐데도 충격을 흘려내지 못했다. 오히려 충격은 가비드가 예상했던 순간보다 한 박자 늦게 때려 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이 붕 떠올랐다. 혼이 육체에서 뜯겨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날아가게 된 자신이 대체 어디까지 날아가 처박힐 것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에 가비드가 선택한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그니션을 쓴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팔을, 레반테인만 휘둘렀을 뿐이다. 그것뿐인데도 참격은 끔찍하게 무겁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락!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가비드의 몸을 붙잡았다. 진즉에 방어를 위해서 몸에 사슬을 감아두었는데. 그것은 이미 방금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으스러져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낮추면서, 허공에 사슬을 묶어 정지한 가비드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좁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 유진의 발이 땅을 박찼다. 유폐의 권능에 보호되던 결투장이 그 발 구름 한 번으로 움푹 주저앉았다. 그렇게 도약한 유진은 체공시간조차 갖지 않고서 즉시 가비드에게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둑, 뚜두둑. 유진의 오른팔이 뒤로 넘어갔다. 레반테인의 불꽃이 조용히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지직! 허공에서 글로리와 레반테인이 충돌했다. 아까의 충돌은 서로가 대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이를 악물고 버티려고 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글로리를 휘감고 있는 마력이 통째로 소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력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무리 이그니션을 썼다고 해도 이 정도로 화력이 달라질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파악했던 프로미넌스와 이그니션의 동시 발동에서 증폭되는 화력은 대략 3배에서 4배 정도. 하지만 지금의 유진이 뽑아내는 화력은, 가비드의 예상을 너무나도 크게 뛰어넘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지어 화력은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유진의 몸이 넘어지듯 앞으로 기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라졌다. 어디에서 나타날지 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소용없었다. 출현과 동시에 도달한 참격이 가비드를 덮쳤다. 다시 한번 가비드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의 유진은 비교적 얌전하게 싸웠다.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움직일지라도 지금처럼 역동적이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진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눈으로 좇는 것이 불가능했고, 예지와 다름없는 예측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도 맞아야 하는 공격을 어떻게 대응하나? 가비드가 할 수 있는 것은 유폐의 사슬을 전신에 두르고, 크게 물러서지 않게 사슬을 연결하고, 방어에 몰두하며 틈을 보는 것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달아 수십 번을 처맞은 뒤에야 가비드는 이해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의 불꽃을 꺼내고, 유진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여유 따위가 아니었다. 저 미치도록 아름다운 검은 평소의 유진으로서도 감히 휘두를 수가 없던 것이다. 성역을 펼치거나 몸에 두르고 나서야 간신히 다룰 수 있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이그니션을 써야 한다. 폭주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유진 본인이 레반테인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판단이 옳았다. 레반테인은 유진이 소유한 모든 무기와 시공을 뛰어넘은 염원들로 벼려낸 검이다. 현존하는 모든 마왕과 세상을 끝내버리는 멸망을 불태우기 위한 검이다. 이 검의 전력은 신이라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기 자신조차 불태우겠다는 필살의 각오가 필요했다. 제 자신의 죽음이나 그에 따른 공포보다 상대를 무조건 죽이고 말겠다는 순수한 살의가 필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안광이 번득였다. 아직 유진의 왼손은 가슴에 올라가 심장을 쥐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부족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장에서 뽑힌 손가락에 검붉은 불꽃이 옮겨붙었다. 옆으로 누운 레반테인의 칼날을 왼쪽 손끝으로 한 번 훑었다. 살의와 신력을 불사른 빛이 칼날에 깃들었다. 레반테인의 칼날이 부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리의 칼날이 맥동했다. 이미 타오르는 불꽃 위에 새로운 불꽃이 더해졌다. 그렇게 불꽃이 한 번 중첩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신이 짓눌리는 것만 같은 압박감. 뚝뚝 끊어지는 사고. 그 속에서도 가비드는 판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의 명문 무가 드라고닉의 비기. 검강을 중첩하는 공검(空劍). 원리 자체는 원류와 같다. 하지만 지금 유진이 중첩시키는 것은 검강이 아닌 신화(神火). 공검을 쓰기 전에도 가비드의 공격을 봉쇄할 만큼 무거웠는데, 거기서 힘이 더욱 중첩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족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만한 힘을 휘두르는데도 유진은 계속해서 바랐다.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의 칼날이 전진했다. 거기에 유진은 하나의 권능을 더 불어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에 녹아든 분쇄추 지골라스의 권능.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부수고 터트리는 권능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다가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직감했다. 저 검은, 가비드가 집중시킨 유폐의 사슬을 모조리 으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위신의 마안을 부정할 것이다. 이후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글로리의 칼날마저 깨트릴 것이다. 방어를 위해 몸에 감은 사슬도 레반테인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에도 가비드는 검을 뻗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 검은 이미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성질을 갖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은 이미 가비드에게 패배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운명을 정해놓았다. 저 붉고 검게 타오르는 불꽃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운명을 피하거나 도망치는 것과 똑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지는 틀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포악하고 폭력적인 신의 불꽃이 모든 사슬을 으깼다. 넘어온 불꽃이 글로리의 칼날을 깨부쉈다. 그러고도 레반테인은 멈추지 않았다. 유진이 바라는 만큼 밀어낸 불꽃의 칼날이 가비드의 몸에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직, 꽈지직. 칼날과 가비드 사이에서 검은 마력이 산화했다. 가비드의 부릅뜬 눈과 유진의 눈이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선을 거두었다. 레반테인이 가비드의 몸을 베었다. 화르르르! 높이 치솟은 불꽃이 천장을 덮은 사슬에 닿고 흩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고개가 툭 떨어졌다. 유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가비드를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끄…….”&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 10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10분 동안, 놀랍게도 멜키스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유진 라이언하트와 가비드 린드먼의 결투는, 수다쟁이 멜키스의 입을 틀어막을 만큼 장엄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에 이르러 멜키스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결투장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처음에는 유진이 패배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비드가 너무나도 평온하고 손쉽게 유진의 공격들을 베어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이 이그니션을 발동한 후로 승기는 확정되었다. 애당초 멜키스를 비롯해 이 자리의 모두가 유진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없고서는 이그니션을 사용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명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멜키스는 방금 유진의 검에 실린 힘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제아무리 가비드 린드먼이 강하다고 해도, 저 검은 어쩔 도리가 없다. 닿는 순간에 무조건 죽여 버리는 검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났다고! 유진이 이겼어!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 만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가 양손을 치켜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관중석에 앉은 이들은 멜키스처럼 수치를 모르지 않았기에, 일어서거나 환호성을 지르는 것 따위의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도 멜키스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과 가비드에게 압도되었다. 특히 유진에게는 정말로 신위(神威)란 것을 느꼈다. 몇 번 되지 않은 공격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됐다. 일격 일격에 세상을 부술 것만 같은 위력이 담겼는데 수백 수천 번 휘두를 이유가 어디에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침묵 속에서 멜키스만 양팔을 치켜들며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외침이 반복될수록 관중들도 하나둘 깨달았다. 쓰러진 가비드가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목을 자르고 심장을 부수고 몸을 재로 만들어도 부활할 수 있을 정도의 불사력을 가진 최고위 마족이, 방금의 일격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뿐이다. 멜키스가 시끄럽게 외치는 것처럼, 유진이 결투에서 승리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웅성거림이 번졌다. 가비드가 앉았던 의자 뒤에서 기립해 있던 검은 안개들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유진의 신위에 압도된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압도될지라도 유폐의 칼의, 가비드의 힘을 믿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존경하던 대공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투는 격렬했던가? 치열했던가? 가비드가 바라던 것처럼, 서로의 모든 것을 부딪치며 사선을 오가는, 어느 한쪽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대결이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다. 압도한 것은 유진이었다. 유진이 이그니션을 쓴 순간부터 가비드의 검은 단 한 번도 유진에게 위기를 주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안개들은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유폐의 마왕 쪽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여전히 사슬의 옥좌에 앉아, 손등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수백 년 최측근으로 두었던 가비드의 패배와 죽음에도 유폐의 마왕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부터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에? 가비드의 패배를 직감했기 때문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가비드의 패배와 죽음을 직감한 적이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여전히 이 결투의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라는 중얼거림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입술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여전히 가비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하고 몸을 돌리거나, 혹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레반테인을 한 번 더 내려찍지도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유진은 기묘하고 불길한 끈적거림을 느끼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개를 푹 숙인 가비드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자신의 오른쪽 손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로리가 보였다. 결코 부서질 일 없던 칼날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꽉 쥐고 있던 칼자루는 남아 있었다. 그것뿐이다. 이것은 더 이상 검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검으로서 사용할 수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기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작은 얼룩 하나 없이 하얗던 셔츠는 넝마짝이 되었다. 구김 없이 각을 세운 바지도 너덜거린다. 닦고 광을 냈던 구두도 마찬가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졌다. 포마드를 발라서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도 엉망이었다. 이렇게까지 정리되지 않고 추한 모습을 세상 모두에게 보이게 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큭큭 웃으면서 눈을 한 번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근본부터 잘못된 모순을 품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동안 황야를 반복했다. 아가로트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겪었다.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고, 글로리를 휘둘러도 결과는 패배라는 결과는 좀처럼 바꿀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신의 마안과 글로리가 약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다. 저것들은 유폐의 권능을 빌려오는 도구일 뿐. 도구가 아무리 특별하고 뛰어날지라도 한심하게 다룬다면 그 정도 수준의 위력밖에 낼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존하기 전에 스스로 관조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신의 마안과 글로리는 결국 유폐의 마왕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만으로는 아가로트의 검을 넘을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와의 결투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깨달은 것이었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대공이란 직위를 놓았다. 유폐의 칼이라는 이름도 놓았다. 그를 갈망하여 유폐의 마왕에게 하멜과의 결투를 청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순이다. 정작 오늘의 결투에 선 것은 가비드 린드먼이 아닌 유폐의 칼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부서진 글로리를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이 마검의 이름은 영광. 가비드에게 있어서는 위신의 마안과 더불어, 자신을 ‘유폐의 칼’로 만드는 증거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시선을 들어 유진을 보았다. 여전히 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서서 가비드를 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이면 충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을 듣지 않았다. 가비드는 스스로 글로리의 칼자루를 오른쪽 눈동자에 처박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돌발적인 행동에 유진의 뺨이 움찔 떨렸고, 관중석의 모두가 놀란 소리를 냈다. 검은 안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왜 가비드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직 유폐의 마왕만이 저 행동이 갖는 의미를 이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디어 버리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가 시작되기 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에게서 한 번 글로리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비드에게 기사의 서임과 글로리를 하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가비드는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그 자체가 유폐의 마왕이 가비드에게 내린 시험이자 기회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가비드는 거절하지 않았다. 진즉에 깨달았음에도 결투의 시작에서 가비드는 자신의 모순을 떨쳐내지 못했다. 긴 시간 동안 그를 대표해 온, 그 무엇보다 영광스러워하며 아끼던 ‘유폐의 칼’이라는 이름은 이미 가비드에게 강하게 예속되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치 사슬에 묶인 것처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 결투의 승리를 바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그렇게 말했을 때, 가비드는 감사하며 유폐의 마왕에게 서임을 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이 결투는 나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 나의 바람, 나의 약속. 만약 네가 그런 것들을 신경 쓰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무어라고 대답했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바치겠나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는 유폐의 마왕에 대한 거역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결투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스스로 깨달았다. 이 결투의 승리는 유폐의 마왕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의 승리도, 패배도, 영광도, 죽음도, 모든 것이 가비드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에서 유폐의 마왕은 결코 가비드의 주군이 아니다. 주군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이 결투에 임한 가비드의 순수성이 변질되어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가비드는 부서진 글로리로 마안을 꿰뚫었다. 단순히 마안을 꿰뚫어 부순 것이 아니다. 가비드의 의지가 마안을 거부했다. 유폐의 칼로서 누렸던 은혜로운 권능을 저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기쁜 마음으로 거절을 받아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른쪽 눈에 처박은 글로리의 칼자루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눈구멍에 새로이 눈동자가 만들어졌다. 글로리와 마찬가지로 위신의 마안이 사라졌다. 가비드가 수백 년 동안 사용하던 힘이 텅 비어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가비드는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구멍에 새로운 무언가가 차올랐기 때문이다. 가비드는 알 수 없는 충만감에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안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사과했던 것처럼 가비드도 똑같이 사과를 말했다. 그는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서서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화아악! 유폐의 마력이 아닌, 가비드의 마력이 길쭉한 검이 되었다. 가비드는 새로이 나타난 검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런 가비드의 모습에 작은 탄성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앞에 있는 것은 마족, 가비드 린드먼. 300년 전에 보았던 놈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유진은 지금의 가비드가 낯설었다. 마치 전혀 다른 존재를 보는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정말 마족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인간이냐고 묻던 가비드의 질문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질문을 받은 가비드는 짧은 웃음을 흘리며 검을 앞으로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르겠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가비드도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버리고, 추구해서, 채우고, 깨달았다. 이 심득 자체는 마족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사선을 오가며 추구하면 도달하게 되는 격. 천재라 불리기 충분했던 자가 그만한 시간을 몰두하면 당연히 이렇게 된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하고 부조리한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멜에 대한 공포와 열등감이 없었다면 지금의 가비드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오늘의 유진이 가비드를 이만큼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모순을 깨달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 감사에 대답하지 않고 레반테인을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잠해진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변모는 우화라 하기에 충분했다. 저 경지가 얼마나 드높고, 저만한 높이에 오르기 위한 고행을 했다. 그것에 있어서 유진은 순수하게 가비드에 대한 존중을 느꼈다. 놈은 경의를 느끼기에 충분한 남자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유진이 오늘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유진의 왼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신좌에 오르며 우화한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다. 이그니션의 잔존시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히 남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은 시간 동안 가비드를 죽일 수 있을까. 아까 이그니션을 썼을 때는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같은 확신이 없다. 처음과 똑같아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봐야 알겠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돌파하고서 레반테인을 휘둘렀다. 유진의 독주도 빨랐지만 불꽃의 참격은 그보다 더 빨라서, 이미 가비드에게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른 것은 유진 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이 뛰어서, 벤다, 라고 생각한 순간에 가비드도 이미 대응에 나섰다. 그의 오른쪽 눈에 더 이상 위신의 마안은 깃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가비드는 자신의 눈에서 특별한 힘을 느꼈다. 마치, 마치…….&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허공에 번졌다. 닿았다, 아니, 닿았나? 닿는 순간에 옆으로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느적거리는 움직임, 가비드는 탈력(脫力)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재현하듯이 유연했고, 레반테인의 불꽃은 가비드의 검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흩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단순 화력으로 압도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을 섞으면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다시 한번 가슴의 우주에서 뽑아낸 신력을 레반테인에 더했다. 두근, 하는 공명과 함께 공검이 완성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래를 본다……. 아니, 그렇지는 않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발을 뒤로 끌었다. 무수한 경험에 의한 예측. 그것이 보다 완전하게 날이 선 것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비드는 공검에 어린 어마어마한 힘을 느꼈고, 여전히 자신이 저 검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정면을 고집하지 않으면 된다. 가비드는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옆으로 누운 칼날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한 점에 집중된 불꽃이 가비드에게 내리 찍혔다. 공검의 무게와 힘은 세상을 통째로 양단할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로(劍路)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지럽게 뒤엉킨 힘의 흐름. 그 중심을 만드는 검로.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검이 불꽃을 역으로 파고들었다. 칼바람과 같은 불꽃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공검이 파훼되었고, 아름답게도 투명한 레반테인의 칼날이 정면에 드러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날과 칼날이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 중 누구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 유진 역시 가비드와 똑같이 공격을 예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도달한 신성은 극한의 전투에서 어디를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할지를 알게 해준다. 정면에서 찍어 눌러 버리면 되레 이쪽이 베인다. 그러니 무르고, 다시 파고든다. 칼날이 쇄도했다. 뒤로 살짝 물러선 가비드는 능숙하게 반격을 흘려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만을 신경 써서는 안 된다. 가비드는 유진의 왼손에 검은 구체가 뭉친 것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클립스. 이미 한 번 파훼했던 것이지만 경계할 수밖에 없을 만큼의 꺼림칙한 것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몸놀림이 바뀌었다. 그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클립스를 도중에 폭파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 폭발하며 터져 나온 것은 신력의 불꽃이 아니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월광, 저 작은 구체는 태양이 아닌 달이었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을 스스로 재생성했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엄밀히 말하자면 저것은 ‘검’이 아니지만, 폭사되는 달빛은 수백 수천의 칼날과 마찬가지로 예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이상적인 회피는 달빛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거리를 벌리는 것. 하지만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이곳은 결투장. 유폐의 사슬에 구속된 철장과도 같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루는 힘이 끔찍할 뿐, 공격 자체는 단조롭…….’&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생각을 비웃듯이 월광의 형태가 바뀌었다. 정면에서 쇄도하던 힘이 우뚝 멈추고, 회색의 월광 틈 사이로 검붉은 전류가 흘렀다. 빠지지직! 이윽고 월광이 거대한, 정말로 거대한 검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자루도 없이 달빛만으로 만든 검. 유진은 직접 쥐지도 않은 월광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 공간이 버티지 못하고 일그러지고 깨져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클립스의 폭발까지 섞으면서 최대한 위력을 증폭시킨, 순수하게 월광만으로 만들어낸 공검. 거기에 신검과 같은 필중과 필살의 기적까지 부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훼하기는 늦다. 너무 크다. 모조리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갉아낸다. 일순 떠올린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 가비드는 유일하다 싶은 정답을 선택했다. 마검이 시커먼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가가각! 마검이 월광검의 표면을 긁었다. 그것만으로 양팔이 부서지고 내장이 터졌다. 하나 가비드에게 고통과 죽음은 아주 익숙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움찔거림조차 없이 월광검의 표면만을 베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촤아악! 하늘이 쩍 갈라졌다. 하지만 가비드의 몸은 갈라지지 않았다. 가비드는 기어코 월광검의 참격 안쪽까지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악! 마검이 앞을 베었다. 유진의 가슴 한복판에서 피가 솟구쳤다. 양단할 생각으로 벤 것인데도 참격이 얕게 들어갔다. 유진은 상처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악! 이번에는 레반테인이 가비드의 몸을 베었다. 유진도 똑같이 가비드의 몸을 양단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처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재생되었다. 레반테인에 다시 불꽃이 점화되었다. 마검도 조용히 빛을 뿜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칼부림이 시작됐다. 유진은 부릅 뜬 눈을 단 한 번도 감지 않고, 한 번의 휘두름에 셀 수 없이 많은 참격을 담았다. 예지하고 대응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가비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쇄도하는 참격 중에서 무엇이 진실인가. 판단하고 싶었지만 그 자체가 무의미했다. 저 모든 칼날이 진실이며, 확실한 살의와 위력을 갖고서 가비드에게 파고들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고함을 지르며 마검을 휘둘렀다. 황야에서 보낸 아득한 시간이 검에 담겼다. 그리하여 마검은 세상의 이해를 초월했다. 유진이 퍼부은 참격들에 비해 마검의 움직임은 고작해야 몇 번. 하지만 그 몇 번의 참격은 틀림없이 ‘검’이란 것의 극한이었고, 마땅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조리 베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인지를 초월한 공격은 대응할 재간 없이 ‘베였다’라는 결과만을 남겼다. 푸확! 유진의 전신에서 피가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마 없는 관중들이 유진의 부상에 비명을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레헤인야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서 멀지 않은 결투장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신에서 피를 쏟았지만, 유진은 쓰러지지 않았다. 표정에 곤혹스러움도 없다. 이 정도 부상은 당연하다 생각하는 얼굴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입을 열었다. 언제 누르가 나타날지 모르니 레헤인야르를 떠날 수는 없다. 그래서 결투장의 관중석에 앉지는 못했지만, 모론의 밝은 눈은 이 정도 거리에서도 결투의 양상을 모조리 볼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유진의 승리를 믿고 있다. 그렇기에 모론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 관중석에 앉아서 우렁찬 목소리로 유진의 승리를 응원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서도 충분하지 않은가? 모론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깊이 숨을 삼키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유진의 이름과 승리를 외치기 위해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 마, 등신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뜸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모론은 커다랗게 유진의 이름을 외쳤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를 내려던 순간에 가로막혀버렸다. 모론은 크게 놀라 뱉던 숨을 다시 삼켰고, 그로 인해 사레에 들려 버렸다. 모론이 몸을 숙이고 컥컥 기침을 토할 때마다 봉우리가 들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소리를 질러 버리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막이 터져버린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투덜거리는 목소리. 바로 옆에서 들릴 만큼 가까운데도, 모론은 그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컥컥대던 기침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 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넘게 사라졌던 세냐와 카르멘이 모론의 뒤에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 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놀람은 진정됐지만 연속해 뱉은 기침의 여파로 목소리가 갈라지고 뚝뚝 끊어졌다. 모론이 더듬거리며 이름을 부르자, 세냐는 미간을 왈칵 찡그리며 핀잔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떻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근황에 대해서는 아니스에게 전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꽃봉오리가 되어 1년 동안 잠들어 있다……. 그 꽃봉오리가 마법의 신역에 오르기 위한 것이고, 세냐가 그럴 수 있도록 인도해 준 것이 바로 세계수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상아탑의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라는 것도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은 모론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튼 세냐가 꽃봉오리가 되었고, 언젠가는 마법의 신역에 도달해 꽃을 피운다는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여기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 모론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 1년간 봉오리였던 세냐는 드디어 개화하고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즉 그녀는 염원했던 대로 인간에서 시작해 마법의 신역에 도달한 것이다. 그 사실에 모론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버럭 외치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는 이 벅찬 감동과 전율을 공유하기 위해 세냐를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직전까지 그곳에 서 있던 세냐의 몸이, 모론의 팔이 감싸오는 순간에 푹 꺼진 듯이 사라져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이래? 징그럽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새 세냐는 모론의 옆에 있었다. 그녀는 모론의 어깨를 찰싹 때리면서 눈을 흘겼지만, 모론은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벅거렸다. 방금 세냐가 어떻게 사라지고 나타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이구.”&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눈을 끔벅거리는 모론을 한 번 흘겨본 뒤, 팔짱을 끼고 서서 결투장 쪽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 또 무식하게 싸우고 있네. 저러다 한 번 더 죽어야 정신을 차릴까 볼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결투만 아니었어도 당장 가세했을 텐데. 세냐는 제멋대로 결투를 성사시킨 유진에 대한 얄미운 짜증은 잠시 내려놓고, 결투장에서 주목해야 할 다른 것들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 놈이 이룩한 격과 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힘과 격을 상대해야 하는 것은 세냐가 아니고, 그녀는 혹시라도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오게 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세냐에게 차례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유진이 패배하고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세냐로서는 당연히 그쪽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공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누아르 제벨라. 결투장을 향한지라 누아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갈X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아르가 빙글 고개를 돌렸다. 먼 거리를 초월하여 세냐와 누아르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것뿐인데도 무언가가 세냐를 침식하려 들었다. 세냐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걷어냈다. 하지만 누아르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전에도 보통 갈X와 괴물이 아니었지만, 이제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쯧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유페의 마왕이 보였다. 그 또한 세냐가 왔음을 눈치챘겠지만, 조금의 의식도 하지 않고 결투장을 주목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장을 휘감은 유폐의 권능을 보았다. 세냐는 자신의 마법에 대해 생각하고, 둘을 잠시 견주어 보았다. 지금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세냐는 그렇게 판단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서 보실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쪽에 있던 카르멘이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의 모습은 1년 전과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모론은 카르멘에게 커다란 변화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 마치 때와 비교되지 않는 힘. 헤아릴 수 없이 깊어진 관록.&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쩡히 자리가 있는데 굳이 여기 서서 볼 필요는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모론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하지만 모론은 세냐의 손을 잡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여기서도 볼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르 때문에 그래? 몇 년 전 나이트 마치 때는 산을 잠시 비워도 괜찮았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와 사정이 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세냐의 말대로, 몇 년 전에는 잠시 산을 떠나도 괜찮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누르의 출현이 많아졌다. 놈들은 원래부터 징조 없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이제는 하루에 몇 번씩, 수십 마리가 동시에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이 괜찮다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나절 정도는 누르가 나타나지 않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공간이 열리고 지팡이가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리’. 현자의 애장(愛杖)은 프로스트와 합쳐져서 새로운 모습을 가졌다. 새하얀 눈꽃의 지팡이가 세냐의 손에 쥐어진 순간, ‘반짝’하고 터진 빛이 레헤인야르 전체에 녹아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는 마법에 무지하지만, 방금 세냐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밝은 눈으로 레헤인야르를 살피면서 나직이 감탄을 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을 닫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메리를 놓고, 카르멘과 모론에게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나절 정도면 저 무식하고 끔찍한 결투도 끝나겠지. 유진 저 자식이 승리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가서 수고했다고 등짝이라도 두들겨줘야 할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세냐의 손을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그렇군. 결투는 이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승리의 감동은 저곳에서만 강렬히 실감할 수 있겠지. 네 말이 맞다, 세냐. 나는 하멜이 승리한다면 그를 번쩍 들어서 하늘에 높이 던지고 받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모론 님의 곁에서 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을 외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도 빙긋 웃으며 세냐의 손을 잡았다. 그것뿐인데도 셋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모론에게는 마법에 휘말렸다는 체감조차 들지 않았다. 그만큼 세냐의 마법은 빠르고 완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석에 도착한 순간 피 냄새가 몰아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라졌다. 결투장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전 유진의 다리가 잘렸다. 피가 쏟아졌다. 신경 쓰지 않고 전진했다. 잘린 다리가 되돌아오고 피는 사라졌다. 기세를 줄이지 않고 레반테인을 휘둘렀다. 가로막혔다. 가비드의 마검은 참 요령 좋게도 레반테인의 불꽃을 흘려내고, 유리의 검신을 잠시 받아내고, 또다시 흘려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검이 꺾인다. 꺾이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유진은 힘을 줄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꺾이며 흘려지는 힘을 조율했다. 불꽃이 나선이 되어 유진을 감쌌다. 빙글 회전하며 이어진 참격이 또다시 가비드를 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흘려낼 수 없다. 판단과 동시에 가비드는 몸을 앞으로 밀었다. 거리를 벌리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최소한으로 받아내는 것을 선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팔을 내줬다. 잘린 즉시 팔은 불타버려 재가 되었다. 불꽃은 멈추지 않고 팔뚝의 절단면에서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위까지 타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 저 불꽃의 검은 살짝만 베어도 순식간에 몸을 태워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이 어깨를 침범하기 전, 가비드는 스스로 팔을 더 잘라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한 깨달음이 가비드에게 끔찍한 기분을 주었다. 지금의 레반테인만 하더라도, 유진이 바란다면 순식간에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바라는 것은 세상을 불태우는 마검이 아니다. 마왕을 죽이는 검이다. 저 검이 완성된다면 마족이나 마왕의 불사력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의 불꽃을 내뿜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스로 왼팔을 내어준 가비드가 간격을 좁혔다. 마검은 이미 유진을 노리고 있다. 유진도 왼팔이 참격에 걸쳤다. 살을 가르고, 근육을 베고, 뼈를 자르는 감촉. 유진의 왼팔이 썩둑 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의 싸움이 아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대가 인간이라면 진즉에 끝이 났겠지만, 지금의 유진은 인간이 아니다. 깎아내는 것으로는 목숨에 닿을 수 없다. 목을 베면 죽을까? 놀랍게도 가비드는 그것조차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 검은 멈출 수 없다. 이 결투는 둘 중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를 위한 살의가 칼날에 깃들었다. 아가로트를 벤 검. 아가로트를 죽인 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비드 린드먼, 놈의 검은 진즉부터 유진의 상상을 초월했다. 가비드를 죽이기 위해서는 저 검을 꺾어야 한다. 그것은 전쟁신으로 군림한 아가로트를 완전히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라는 바였다. 아가로트보다 강하지 않는다면 유폐의 마왕도 멸망의 마왕도 죽일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만큼 검을 벼려낸 가비드에게 경외를 느꼈다. 마족이고 적이고를 떠나서 가비드를 인정했다. 저만한 격에 도달하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겪었을까. 얼마나 많이 검을 휘둘렀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정하고, 내뱉었다. 필사적인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심연에 묻힌 도시에서 보낸 시간은 유진에게도 끔찍하고 가혹했다. 시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살아 있는 자가 없는, 폐허와 무너진 신상의 아래에서 길고 긴 묵상을 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와 하멜 다이너스의 모든 것을 되감고, 깊이 묻었던 아가로트의 기억을 돌이켰으며, 그 모든 것을 일순(一巡)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무아에 이르렀다. 유진과 하멜과 아가로트를 구분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혹은 내가 가졌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엮었다. 그러고도 부족했다. 더하고 더한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채워지지 않는 갈망 속에서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고 불꽃을 일으켰다.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고, 텅 빈 상태로 다시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이 부족하지? 무엇을 채워야 하지? 몇 번이고 극한을 넘었다. 하지만 이제는 넘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게 내 끝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으로서의 종착점. 초월은 이 종착점을 넘어야만 시작된다. 그 지점에 유진은 허무함과 분노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작 이 정도가 끝이어서는 안 된다. 아직, 아직 넘어야 할 것이 있다. 죽여야 할 것이 있다. 여기가 끝이라면 결코 닿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했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폐허인 도시를 보았다. 무너진 아가로트의 신상을 보았다. 그, 황야에서. 모든 신군에게 죽음을 명령하던 아가로트를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망치고 싶었으나 도망치지 않던, 그 오만하던 전쟁의 신이 어떠한 생각으로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았는지. 무엇이 아가로트의 등을 떠밀었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도들의 목소리. 신앙의 목소리. 멸망을 바라지 않는 자들의 목소리. 오늘의 평안을, 내일의 행복을 바라는 목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텅 비어버린 폐허.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죽어간 신도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는 실패했다. 폐허와 무너진 신상은 아가로트의 패배와 실패의 증거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에 유진은, 아가로트로서 절망했다. 전쟁신은 목숨을 바쳐가며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고 붙들었다. 그가 시간을 끌었기에 현자는 세계수가 되었고, 거신과 다른 신들도 다음을 위한 안배를 준비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세상은 결국 멸망했다. 모든 신도가 죽었다. 다음을 기약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을 포기하고 버린다는 뜻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X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지금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는 가비드와 다르다. 가비드는 헬무드의 대공을 버리고, 유폐의 칼을 버리고, 위신의 마안을 버리고, 글로리를 버리고, 욕망과 투쟁심을 그득 채워 검을 벼려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유진 라이언하트는, 용사는, 무엇 하나 버려서는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조리 안고, 더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의 귀에는 세상의 염원이 들리고 있다. 이곳의 결투는 세상에 중계되고 있다. 대륙의 모두가 결투를 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린아이에게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팔과 다리가 날아가고 내장이 쏟아지는 잔인한 싸움. 그렇지만 어린아이도 이 결투를 보고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볼 수밖에 없다. 이 결투에는 과장 하나 없이 세상의 운명이 걸렸다. 만약 유진이 패배해 죽는다면 유폐의 마왕은 지체없이 대륙을 침략할 것이다. 대륙에 사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유진에게 달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염원을 들었다. 부응해야 한다. 버려서는 안 된다. 내뱉기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지금 유진은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니 결코 패배할 수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겁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흘려낼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검이 흔들렸다. 가비드는 손에 힘을 주어, 마검의 흔들림을 붙잡았다. 존재를 흔드는 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 하멜, 너의 검에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검과 함께 가비드의 몸이 뒤로 밀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극에 불꽃이 깃들었다. 거대하고 무거운 불꽃이 가비드의 몸을 더욱 뒤로 밀어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인간의 염원이 깃들어 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에 대한 염원. 오늘의 평안과 내일의 행복에 대한 염원. 그러한 모든 염원이 실린 검은 너무나도 무겁다. 저 검을 넘어선다는 것은, 가비드의 손으로 직접 대륙의 내일을 결정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의치 않았다. 가비드는 오늘 결투에서 승리할 것이다. 300년 동안 곪은 열등감을 끝낼 것이다. 전부 마시지 않고 남긴 술로 축배를 들고, 마군의 선봉이 되어 대륙을 침공할 것이다. 대륙의 명운 따위 가비드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늘의 승리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은 똑같이 고함을 질렀다. 가진 걸 버리고 벼려낸 검과 염원들로 벼려낸 검이 충돌했다. 검은 다를지라도 집념은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다른 것이 부족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망이 부족했다. 가비드가 가진 집념도, 갈망도, 열등감도, 유진이 가진 절망보다 부족했다. 세상의 끝을 안다. 유진은 절망을 집념으로 삼았다. 오늘 끝내지 않기 위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촌스럽고 뻔한 말이지만, 용사는 희망의 상징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손에 얹은 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귓가에 들리는 염원. 승리에 대한 기도. 내일을 바라는 희망. 그 모든 것을 장작으로 삼아 신화를 피워냈다. 검이 부딪치고, 밀려났을 때. 가비드는 양손으로 마검을 쥐었다. 유진은 왼손의 신화를 레반테인에 흘려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르륵!&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리의 칼날에 격렬한 불꽃이 타올랐다. 백염식의 모든 불꽃이 레반테인과 공명했다. 프로미넌스의 성역이 레반테인에 모든 기적을 중첩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레반테인은 기적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백 년의 삶.&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에 대한 몰두.&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복해 온 황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신을 넘은, 신살의 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진 것을 버리고 새로이 채워서 도달한 격.&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에 대한 집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비드 린드먼은 강하다. 그는 마족을 초월하고, 마왕마저 뛰어넘어 검의 극예에 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패인은 단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의 염원이, 희망이, 기적이, 가비드의 검보다 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만 같은 불꽃. 가비드는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물러설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세웠으나, 가비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타오르는 신화(神火)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저 불꽃이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신화(神話)를 남길지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신화에서 가비드는 신에게 거스른 어리석은 마족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신화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결코 바꿀 수 없다. 가비드가 손에 쥔 마검은, 포악하게 타오르는 신의 불꽃에 사라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그 단어를 마음속에서 부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정말로 빛과 같은 신격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신앙은 마족의 것이 아니다. 가비드는, 마족이 신을 섬기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검이 정말로 기적이 되었을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자코 인정하며 스러지고 싶지 않다. 하멜,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가 정말로 신격을 이루었다고 해도 가비드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아닌 마족이기 때문이다. 마족은 결코 인간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가비드 린드먼이 가진 마지막 고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고함을 지르며 불꽃을 향해 마검을 휘둘렀다. 허나 신위를 정면에서 반역하기에는 가비드의 마검은 기적에 미치지 못했다. 이미 결정된 대로, 레반테인의 불꽃이 마검을 불살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검을 통째로 재로 만든 불꽃이 가비드의 몸을 침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이 타서 재가 되는 고통. 그것은 가비드가 수백 수천 번 반복했던 황야에서의 죽음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버텼다. 그대로 불타서 재가 되어 사라져야 할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불완전하게나마 형상을 유지했다. 아득한 고통 속에서 가비드는 이를 악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오르는 불길. 존재의 모든 것이 타오르는 고통. 화륵거리는 불꽃의 소리. 그 속에, 줄곧 듣지 않던 소리가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자리에 섰다. 유폐의 마왕에 대한 충절과 헬무드 제국의 영광을 떠나, 단순히 하멜과의 결투와 승리에 대한 갈망으로 이 자리에 남아 있다. 글로리는 부서졌다. 위신의 마안은 스스로 꿰뚫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가비드의 선택이다. 하지만 지금, 관중석에서 결투를 보는 검은 안개는 가비드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았다. 가비드가 결투의 승리를 바라듯, 검은 안개 역시 가비드의 승리를 바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가비드가 주저앉았을 때 탄식하고 절망하며 이름을 불렀고, 가비드가 새로이 마검을 쥐고 섰을 때 희망을 담아 이름을 불렀으며, 지금은, 신화 속에 스러지려는 가비드를 보며 간절히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안개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이곳, 라구르야란에서의 결투는 대륙 전역에 중계되고 있다. 인간들뿐만 아니라 마족들도 결투를 보고 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의 종결과 전쟁의 시작을 바라는 마족들은 당연히 가비드의 승리를 바란다. 아직은 전쟁이란 것에 별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 마족들도, 몇 번의 위기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가비드의 승리를 응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당연했다. 유진에게 인간의 염원이 집중되었다면, 가비드에게는 마족의 염원이 집중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얄궂고,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가진 것들을 버리고 검만을 남겨 지금이 되었는데. 결국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뒤를 떠받치고 있는 꼴 아닌가. 가비드는 스스로가 우습고 한심하여 자조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앞으로 나아갔다. ‘목소리’가 가비드가 쓰러지지 않게끔 등을 받쳐주었고, 이미 모조리 타서 재가 되어야 할 몸을 붙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염원’은 유진이 받는 것과 격이 다르다. 유진이 염원을 통해 절대적인 기적을 일으켰다면, 지금 가비드에게 집중된 염원은 필연적인 죽음을 아주 조금 뒤로 미루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포악한 불꽃의 너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보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가비드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한 점의 비웃음이나 멸시가 존재하지 않았다. 경악과, 감탄만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너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발이 비틀거리며 전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해지는 응원과, 이미 절감한 탄식 속에서 저 목소리는 또렷하고 가까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목소리였다. 그는 사슬의 옥좌에 앉아 있다. 지금의 그에게 일상과도 같던 권태는 없었다. 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곁에 두었던 ‘기사’의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를 남기지 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이 가비드의 정신을 관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 후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을 버리고 몰두했음에도 최후는 이 꼴이다. 이만한 격에 도달했음에도. 결국 정말 쓰러트리고 싶던 남자에게는 닿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내가 틀렸던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버리지 말아야 했던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를 고집하지 않고, 차라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후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지독한 불꽃이, 이미 결정이 된 죽음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의식이- 최후의 최후에 스스로를 나약하게 하였나. 가비드는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안개가 보고 있다. 헬무드의 모든 마족들이 보고 있다. 누아르 제벨라가 보고 있다. 그리고, 유폐의 마왕이 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후에 후회를 남겨, 추태를 부려서는 안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타버린 혼이 남긴 재가 검이 되었다. 후회에 자조하여 멈추지 마라.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면 발악을 계속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후회해 죽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결정된 패배일지라도 허무하고 한심하게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손에 닿지 않는 승리를, 닿지 않기에 더, 더 갈망했다. 유진 라이언하트가 써 내릴 ‘신화’에서 한심하고 어리석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마족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르!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가비드가 땅을 박찼다. 그는 불꽃을 거슬러서 유진에게 달렸다. 마족은 신을 믿지 않는다. 처절한 의지가 신성을 거역했다. 유진은 불꽃을 퍼부으면서 레반테인을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강한, 경의를 느꼈다. 설마 저러고도 움직일 줄은 몰랐다. 기적과 신화는 가비드의 검보다 강했으나, 존재의 마지막에 불사른 집념은 기어코 기적마저 거역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것은 단순한 집념이 아니다. 처절한 마지막에서 태어난 저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푸확! 일순 레반테인의 불꽃이 사라졌다. 그 포악한 신화가 모조리 유리의 칼날에 맺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참격을 바꾸었다. 시커먼 재를 흩날리는 참격이 레반테인과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꽈아앙! 신화와 저주가 부딪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갈라지고 쉬어버린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조금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가비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검은 레반테인에 가로막혔다. 가비드의 갈망은 결국 레반테인을 이겨내지 못했다. 가로막히고, 부서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부서지고 튀어 나간 작은 파편이 유진의 뺨을 스쳤다. 그렇게나마 조금, 유진에게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왜 진 것 같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유진은 천천히 레반테인을 내려놓으며, 왼쪽 손을 들어 뺨을 쓸었다. 손등에 닦이는 피는 뜨거웠고, 상처는 쓰라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너보다 강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몸이 썰리고 치명상을 입었어도 되돌아갔는데, 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도 쭉, 뺨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와 나는 짊어진 것이 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짊어진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절대로, 여기서 져서는 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로 죽었고, 하멜로 죽었다.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로 환생했다. 월광검을 받았다. 성검의, 빛의 선택을 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 무엇 하나 버리지 않았다. 버려서는 안 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느끼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은 오싹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커먼 저주의 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성(神性)이 없었다면 변절한 궤적을 간파하지 못했을 거다. 충돌하기 직전에 꺾인 검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필살의 저주가 되어서 유진의 목을 노렸다. 막지 못했다면 그대로 목이 베였을 거고, 조금이라도 잘못 막았다가는 팔이 잘렸을 거다. 부수고 나서도 파편을 즉시 불살랐기에 뺨을 스치는 것으로 그쳤지,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애꾸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퍼석! 한쪽 팔이 재가 되었다. 한계까지 떠밀어놓았던 죽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이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부러졌지만, 저주를 내뱉고 싶었다. 오늘이 더해지고, 앞으로도 쓰일 신화에 처절하고 절망스러운 종말이 찾아오기를 말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 않았다. 결국 패자의 넋두리가 될 뿐일 테니. 최선을…… 다했다. 전력을 다했다. 필사적이었다. 한 삶의 마지막으로 두기에 부족함이 없는 결투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아니. 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공간이 삐뚤삐뚤 뒤틀렸다. 이러한 조작조차도 되지 않다니.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틈을 열었다. 조그맣게 열린 틈에서 반쯤 남은 술병이 굴러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자에 대한 선물로는 초라하지만, 받아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면 모르나. 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닥을 구르는 술병을 주워들었다. 한 번 개봉되어 반쯤 마신, 라벨도 없는 술. 유진은 그 수상쩍은 술을 살피고서 가비드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독 따위는 없다. 애당초 네게 독이란 것은 통하지도 않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이기고 축배를 들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패배해 버렸으니, 승자인 네가 가져라. 싫다면 버려도 좋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술병을 망토 안에 밀어 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난 뒤에 마시도록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대답에 가비드는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잠시 유진을 올려다보다가, 쉰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쓰이지 않기를 바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시선을 힐긋 들어 위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300년 전에 너보다 약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알아서 물러서지 않았다면 난 네 검에 죽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너보다 강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도, 1년 전에도, 나는 너보다 강했다. 내가 널 죽이려고 했다면 언제든지 널 죽일 수 있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오늘은. 네가 아까 말했듯, 내가 너보다 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련하지는 않았다. 후회가 없지도 않았다. 분했다. 가비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 패배감은…… 300년 전과는 다르군. 이럴 수밖에 없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떴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패배를 보고할 시간을 베풀어주겠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 결투해 줘서 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대답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비틀거리며 선 가비드는 멀어지는 유진의 등을 응시했다. 방금 그 말에는 한 치의 조롱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를 내 마지막으로 만들어줘서 고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냥, 한쪽 손을 들어 한 번 흔들었을 뿐이다. 가비드는 그 모습에 큭큭 웃으며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대편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모두가 유진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가비드는 그것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뻗어 한 걸음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석! 버티지 못한 다리가 재가 되어 무너졌다. 평소라면 금세 균형을 잡았겠지만, 지금의 가비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힘을 잃은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땅에 엎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비드의 몸을 받쳐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는 없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설령 시각을 잃을지라도 유폐의 마왕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 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지는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란다면 후회를 거둘 수 있게 해주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옥좌에서 내려온 유폐의 마왕은 사슬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을 써서 가비드를 부축했다. 그 목소리는 고요했고, 아쉬움이나 슬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인과를 사슬로 엮은 이 죄인에게 저런 종류의 감정은 진즉에 마모된 지 오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아쉬움이나 슬픔이 없더라도, 유폐의 마왕의 말은 진심이었다. 유폐의 마왕이 직접 선택하지 않을 뿐. 만약 가비드가 바란다면,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에게 결정된 죽음마저 유폐해 버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는 패자의 죽음으로 끝나야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라건대, 제 끝을 붙잡지 말아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한 대답이었다.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뒤따라 내려온 검은 안개가 유폐의 마왕과 가비드를 둘러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의 몸은 재가 되어 무너지고 있다. 모든 검은 안개가 검을 뽑아 하늘로 세웠다. 유폐의 마왕은 가비드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공작.”&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에 있던 누아르가 유폐의 마왕의 곁에 내려왔다. 머리 위로 넘겼던 베일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와, 누아르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눌 이야기가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당신에게 이런 배려를 받을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다운 웃음기는 조금도 있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도 애도의 시간을 주시겠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유폐의 마왕은 대답하지 않고 가비드를 내려다보았다. 가비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가 바라는 대로 되었는데,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조금 놀라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유폐의 마왕을 대신해 가비드를 부축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낮추어, 가비드의 머리를 무릎 위에 눕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그때 결투를 말려야 했을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렇죠. 그때 당신을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가비드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탁해진 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몸은 재가 되어서 무너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으로 꿈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구나 마지막 순간에는 행복한 꿈을 꾸기를 바라잖아요. 가비드 린드먼. 당신이 도달하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 그것이 무엇이든, 꿈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무할 뿐일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나는 이미 충분히 꿈결 같은 삶을 살았네. 내가 버린 모든 것이, 내가 어린 시절부터 바라던 꿈이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죽음조차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패배했지만 악몽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짧은 웃음 뒤에 목소리가 이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회도, 미련도 있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럽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에게 맡긴 눈이, 그대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았다. 왼쪽 눈에 깃든 위신의 마안을 느꼈다. 누아르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비드는 누아르의 떨림을 느끼며 쉰 소리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폐하의 군림과 영달을 바라도 되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칙칙한 눈으로 가비드를 응시했다. 그는 저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군림과 영달을 추구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라고 싶다면, 가비드 린드먼. 내가 추구해 온 비원이 성사되는 것을 바라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이 추구하는 비원이 무엇인지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폐의 마왕이 군림과 영달을 바라는 것이 아니란 것은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저것들을 추구했다면, 300년 전에 약속 따위를 맺을 이유가 없다. 하멜의 환생인 유진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바벨에서 기다려 줄 필요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는 유폐의 마왕의 비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하의 비원이 성사되기를 바랍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마족은 죽어도 그 혼이 유폐의 마왕을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유폐의 마왕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가비드의 혼을 붙잡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그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헬무드의 대공, 유폐의 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족, 가비드 린드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가 마족들에게 애도를 받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가비드에 대한 애도와, 배웅을 이미 끝냈기 때문이다. 과연 가비드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했다. 이 결투는 유진에게도 중요했고, 큰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필사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치는구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천천히 이그니션을 끝냈다. 몸에 둘렀던 성역이 함께 사라졌다. 1년 전과는 다르다. 인간을 한참 넘어선 유진에게, 더 이상 육체적인 반동은 존재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멀쩡한 것도 아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몸은 멀쩡히 움직일 수 있다는 점. 하지만 신력의 폭주에 대한 반동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몸만 아픈 것이 낫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의 반동으로 당분간은 신력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이랄 점은 마나는 어찌어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신력을 쓸 수 없는 이상 레반테인도 본래 위력의 반의반도 끌어낼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에서 이 꼴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결투에서 유진은 많은 것을 얻었다. 하나는 신력과 레반테인의 힘. 거기에 대륙에 중계되는 결투에서 승리했으니 신앙도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오르게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가장 큰 성과는 가비드 린드먼을 여기서 죽인 것이다. 이제는 바벨에서 유폐의 마왕의 어전에 오르기까지, 유진을 가로막을 수 있는 마족은 아무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를 제외하고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에 가기 전에 죽여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덤덤하게 그것을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이만한 힘을 손에 넣었는데도 확신은 희미하다. 그렇지만, 승패를 떠나서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에게 더 이상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더 이상 ‘몽마의 여왕’이라고 불릴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가비드와 똑같다. 그녀는 이미 ‘마족’의 영역을 뛰어넘어 불가해의 존재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지어 위신의 마안까지 가지고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의 마안 하나만으로도 끔찍하고 까다로운데, 거기에 위신의 마안까지. 게다가 누아르는 가비드처럼 위신의 마안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안의 활용도는 누아르 제벨라가 압도적으로 뛰어나. 직접적인 전투에 쓰지 않고, 아마 환상의 마안을 보조하는 데 쓰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더더욱, 누아르에게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제벨라 시티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골몰히 생각하던 유진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1년 만에 듣는 빌어먹을 이름. 1년 내내 들었다면 익숙해졌을까? 유진은 표정을 왈칵 구기며 위를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중석의 모두가 일어서서 유진을 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뛰어내린 것은, 놀랍게도 길레이드 라이언하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가 버럭 외치면서 유진의 앞에 내려섰다. 유진은, 그의 왼쪽 가슴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라이언하트의 문장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온 라이언하트 전원이 똑같았다. 1년 전 카르멘이 도입한 제복의 새로운 문양…… 유진은 하나둘 앞에 서는 라이언하트들을 울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표정이 왜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감정을……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대놓고 좋아할 수도 없는…… 그냥 못 본 체해야 하나?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지 않나? 보아하니 이곳에 없는 라이언하트 전원이 똑같은 문장을 제복 가슴에 새겼을 것 같은데. 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쳐서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칠 만도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의 결투. 가까운 관중석에서 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비드와 유진의 결투는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꺄아아아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까마귀 같은 외침이 고막을 때렸다. 하지만 유진은 놀라지 않고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 아니, 대륙 모든 사람 중에서 저렇게 요란한 소리를 낼 사람은 한 명뿐. 멜키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중계된다는 것은 추호도 신경쓰지 않고 양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세, 만세, 만세!”&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틈엔가 멜키스의 손에는 커다란 깃발이 들려 있었다. 유진은 깃발에 크게 새겨진 라이언하트의 문장과, 그 아래에 금색으로 쓰인 자신의 이름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입술을 뻐끔거리는 동안, 멜키스는 꺅꺅 환호성을 지르면서 깃발을 좌우로 펄럭펄럭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치미는 욕지기를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참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건 놀리는 것 같지만 놀리는 것이 아니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라이언하트의 문장도, 열심히 펄럭대는 깃발도, 모두가 유진의 승리를 믿고서 준비한 것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신성을 얻었지만 다행히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멜키스에게 윽박을 지르지 않고 일단은 참아 넘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편에 있던 세냐가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가로막은 인파에 몸을 밀어 넣거나, 직접 하늘을 날아서 유진에게 내려오지 않았다. 발을 살짝 뗀 것만으로 세냐는 모두를 넘어, 유진의 앞에 도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헛기침만 하면서 어깨를 활짝 펴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녀는 ‘오랜만이다’ 같은 재회의 인사를 기대했지만, 유진은 세냐의 기대대로는 행동해 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세냐는 유진에게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세냐가 눈앞에 선 순간, 유진은 망설임 없이 양팔을 활짝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이렇게 대뜸 포옹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품에 안긴 순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랜만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빨갛게 달아오른 세냐의 귓가를 속삭임이 핥았다. 세냐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고 어깨는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 어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1년 넘어 맛본 포옹은 세냐에게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세냐는 힘이 풀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가온 모론이 유진과 세냐를 통째로 끌어안고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하! 으하하하! 하하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우렁찬 목소리로 웃으면서 유진과 세냐를 공중에서 흔들었다. 몸이 몇 번을 흔들리고 나서야 세냐는 정신을 차렸다. 아까 모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진의 품에서 사라져, 땅으로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내뱉었던 말을 즉시 이행했다. 그는 유진을 하늘 높이 던지고서 다시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지만, 유진은 한숨을 푹 쉬면서 잠자코 아래로 떨어졌다. 모론은 유진의 몸을 손바닥으로 받고, 마치 공을 튕기듯 한 번 더 유진을 높이 던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에서! 네가 승리한 것이다!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유진을 열 번이나 던지고 받고서야 땅에 내려주었다. 유진은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하려는 모론을 우선 제지했다. 모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진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모두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자 다들 환호를 멈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표정, 시선, 분위기. 그런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다들 느껴버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이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표정을 가다듬고 몸을 돌렸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모론은 만약을 대비해 이곳의 모두를 지키고서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위치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도 아공간의 메리를 꺼내서 손에 쥐었다. 술식의 준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 세냐의 마법에 더 이상 술식은 필요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격에 젖어 기도를 올리고 있던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현실을 의식했다. 크리스티나는 긴장하여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검은 안개들은 가비드의 마지막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원진을 그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검은 안개들은 높이 들었던 검을 착검하고, 위로 열었던 투구의 안면 덮개를 다시 내리며 뒤로 물러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흩어지는 재 속에서 누아르 제벨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무릎에 조금 남은 재를 손으로 거머쥐었다. 누아르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을 덮은 검은 베일이 심연의 어둠처럼 짙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그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흩어지는 재를 잠시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요한 시선에 멜키스는 괜히 혼자서 움찔했다. 그녀는 열심히 흔들었던 깃발을 슬며시 아래로 내렸다. 설마 이 호들갑을 두고서 유폐의 마왕이 언짢아한 것은 아닐까? 이 추모의 시간을 감히 모욕했다며 대뜸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닐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멜키스가 대륙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대범할지라도, 유폐의 마왕은 조금 무서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승리를 축하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입이 열렸다. 그는 하늘을 떠돌다 사라진 재에서 시선을 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에 마모된…… 그런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물게도, 유폐의 마왕은 조금의 미련을 느꼈다. 가비드의 바람을 묵살했다면. 되살리지 않더라도, 영혼만을 거두어 다음으로 가져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의미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령 다음으로 가져갔을지라도, 지금만큼 꽃을 피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비드의 우화는 지금 시대가 특별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쉬움을 덜고, 유폐의 마왕이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그와 같은 존재를 곁에 두었지만, 이렇게나 아쉬움을 느낀 것은 처음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시선을 내려 유진을 응시했다. 라이언하트와, 대륙의 영웅들 앞에 선 유진을 본 순간- 유폐의 마왕은 묘한 감회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에 멸망했을 세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약속이 없었다면, 유폐의 마왕은 몇 번이나 그랬듯이 세상이 해무와 파도에 잠겨 사라지는 것을, 바벨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그 일그러진 부산물을. 존재의 근원부터가 용사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억지로 성검을 쥐고서 빛의 외면을 받은 남자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끝까지 베르무트를 용사로 여기지 않았다. 빛은 베르무트의 존재를 이해하지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애당초 빛에게는 베르무트를 이해할 지성이 존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에도 베르무트는 성검을 휘둘렀다. 성검을 매개체 삼아 빛을 강제로 뽑아냈다. 사실 베르무트에게는 성검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지만, 그럴지라도 베르무트는 성검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라는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이 결정되지 않았노라고, 마왕에 맞설 수 있는 영웅이, 빛이 선택한 용사가 여기 있노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결국.&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약속이 결실을 맺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용사가, 베르무트가 있었기에 300년 전의 사람들은 마경으로 몸을 던졌다. 약하고 용사가 아닌 자들조차도 베르무트에 감화되어, 세상을 위해 마경에서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은, 인간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패배하지도 않았다. 300년 전. 유폐의 마왕이 잊지 못할 순간들이 몇 개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는 처음으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란 사내를 보았을 때. 그를 본 순간 유폐의 마왕은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바벨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벨에서 베르무트를 맞이했다. 저, 도저히 용사라고 할 수 없는 남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하나는, 처음으로 ‘하멜’을 보았을 때. 그가 베르무트의 동료가 되어 마경에 왔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의 최정상. 마왕의 어전. 하멜의 죽음을 넘어온 동료들이 모두 쓰러지고, 베르무트가 봉인하던 본성을 해방했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훌륭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유폐의 마왕은 베르무트가 바란 대로 약속을 맺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300년이 흘렀다. 유폐의 마왕에게 있어서 300년이란 길다고 여길 시간이 아니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이 300년이나 유예된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세상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폐의 마왕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약속의 결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과연 저 결실을 거둘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 유폐의 마왕의 뒤에 있던 사슬이 움직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속의 끝은 다가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 역시 베르무트를 떠올렸다. 사슬의 의자에 묶여 앉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마모된 베르무트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의 끝을 기다릴 수는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유진은 베르무트가 대체 어떤 새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이 멸망의 마왕과 관계된 존재일지라도- 놈은, 베르무트는,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다. 베르무트가 용사가 아닐지라도, 놈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바람을, 유진이 완성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늦지 않게 찾아갈 테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가락을 들어 목으로 가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망치지 말고, 목이나 씻고 기다리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슥. 유진의 손가락이 목을 그었다. 검은 안개가 일렁거리며 유진에게 살의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살의는 유진에게 있어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다리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빙긋 웃으며 사슬의 문을 열었다. 유폐의 마왕이 먼저 문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검은 안개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문이 닫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만이 홀로 남았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베일이 덮여 있어,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누아르의 시선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쉿.”&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손가락을 세우며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과의 해후, 대화, 교감, 그런 것들은, 여기서 하고 싶지 않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의 끝이 머지않았다, 라고 했죠. 그렇다면 하멜, 당신은 조만간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화아아악! 아래로 꽂히는 바람이 지상을 휩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펄럭이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눌렀다. 흔들리는 베일 사이로 누아르의 미소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다릴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리꽂히던 바람이 이번에는 위로 치솟았다. 누아르는 바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인을 맞이하러 온 제벨라 페이스가 안광을 빛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도시에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누아르와 제벨라 페이스가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3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넘기면서, 제벨라 페이스가 사라진 하늘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을 만큼 가비드의 죽음이 무거웠던가? 유진은 마지막에 보았던 누아르의 표정을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유진도 알고 있다. 누아르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가비드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막연하게,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고, 방글방글 웃으며 농담처럼 떠들던- 서로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누아르도 확실하게 인지한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그 끝이 어떤 식으로 맺어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과, 서글픔과…….&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려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손을 힐긋 내려보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감정은 도저히 깔끔하게 잘라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감았다.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를 떠올렸다. 빛을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때 유진은 자신이 아가로트의 환생일지라도, 아가로트의 인연과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나이고, 내가 아니었을 때의 인연과 감정이란 방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렇게 구분지은 주제에, 유진은 부정하려 들던 아가로트의 덕을 여러 번 보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모순을 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쩔 수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의 절반을 차지한 묵상은, 유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순점을 충분히 인지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론을 내렸다. 유진은, 아가로트일 적의 인연을 도저히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때의 인연이 염원이 되어 지금 세상이,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가로트의 인연을 부정하는 것은, 유진의 근본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유진이 해야 할 것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끝을 맺어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의 마녀와, 전쟁신의 성녀와, 아리아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와의 인연은 도저히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다. 유진에게 녹아든 아가로트의 감정이 도저히 그렇게 두질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난……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는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끈적하고 쓰라린 감정에 유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감정과 상상은 마음을 약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역겹고 버거웠다. 유진은 혀를 쯧 차면서, 아직까지 떨고 있는 손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짝 물러서 있던 크리스티나가 유진의 손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으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안 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소라면 괜찮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평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지 않아서? 가비드의 죽음과, 누아르를 죽일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진짜 힘들어. 1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유진에게 있어서 일종의 항복 선언과 목숨 구걸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등을 감싼 크리스티나의 손에서 전해지는 악력, 그리고 성직복 사이로 보이는 플레일의 손잡이. 제대로 편지도 쓰지 않고 후다닥 잠적해 버린 1년.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허리춤에 달린 자그마한 금속제 술병…….&lt;/p&gt;&lt;p&gt;&lt;br /&gt;&lt;/p&gt;&lt;p&gt;“필사적으로 수련하고 결국에는 승리했지만, 쉬운 승리가 아니었잖아.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결투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만약 제가 조금만 늦게 수련을 시작했다면, 오늘 결투에서 패배해 죽는 것은 가비드 린드먼이 아닌 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빠르게 말을 이으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대부분이 유진이 뱉은 말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 온 사람들 대부분이 유진이 예의를 갖추는 연장자라는 점…….&lt;/p&gt;&lt;p&gt;&lt;br /&gt;&lt;/p&gt;&lt;p&gt;“호네인 왕세자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 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러운 호명. 아롯의 차기 국왕, 호네인 아브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성취가 느셨군요. 지금 몇 서클이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8…… 8서클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호네인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현재 호네인의 나이는 29살. 아롯 왕가의 핏줄은 마법에 특화되게 개발해 온 혈통.&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워낙에 말도 안 될 만큼 특별했던 것일 뿐, 호네인도 본래라면 ‘천재’로 분류될 사람이다. 비록 초입일지라도 29살의 나이에 8서클에 오른 것은 호네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전에는 7서클 아니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랬…… 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1년 만에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르신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하우리아에서의 전쟁이 내게 영감을 주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이 얇아졌다. 그가 호네인에게 기대한 대답은 저런 것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동안 수련을 거른 적이 있으십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없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저 질문에 호네인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부왕인 다인돌프 아브람의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국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자비에 기대지 않고, 사자가 기꺼이 이빨과 발톱을 빌려줄 만큼의 힘을 갖춰야 한다. 그 말을 들은 후로 호네인은 마법에 매진하고 또 매진하였고, 하우리아의 전쟁에서 그간의 수행을 증명하였으며, 전장에서 얻은 깨달음을 붙잡아 8서클의 벽을 허물어서, 유진 다음으로 최연소로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전쟁 이후 1년 동안 하루도 마법의 수련을 거르지 않았어. 유진 공, 그대의 무위가 나에게 마법적으로 커다란 영감을 주었고, 나는 그대의 곁에 서고자 하는 일념으로 매일 같이 마법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그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호네인이 수행에 몰두한 동기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매진하는 것! 그것이 왕세자님을 대마법사로 만든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음…… 그렇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안, 시엘, 너희도 그렇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타겟이 바뀌었다. 유진이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몰라서 우두커니 있던 시안은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마나를 느껴보니 너희 둘의 백염식은 6성에 올랐구나. 가주님과 기온 님은 8성에 오르셨고. 1년 사이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덩달아 언급된 길레이드와 기온 역시 유진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시엘은 달랐다. 그녀는 요 1년 동안 성녀들에게 굉장히 시달렸기에, 유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을 숨기랴. 성녀들은 술에 취할 때마다, 언젠가 유진이 돌아온다면 결투가 끝난 뒤에 머리털을 죄다 뽑아버리겠다고 술주정을 부리곤 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말이 맞아, 유진. 1년은 절대 길지 않아. 오히려 굉장히 짧지. 벽을 허물고 새로운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루도 허비해선 안 돼. 마음먹은 순간에 즉시 수련을 시작해야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즉시 유진의 편을 들어주었다. 모르는 척 곯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지만…… 시엘은 지금 유진의 머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정돈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길러서 덥수룩한 것이, 12년 전 라이언하트에 처음 왔을 때, 시골 촌뜨기답던 유진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1년 동안 매일 대수림을 달리며 도끼를 휘두르고 수행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가 재빨리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짓말이었다. 요 1년 동안 이바타는 수련보다는 막 국가로서 여명기에 접어든 조란을 다스리고 국무를 보느라 바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야만족에서 태어나 열린 생각으로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대수림의 부족을 일통해 대족장이 된 그는 당연히 오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밝았다. 그렇기에 유진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르기스! 네 근육이 더 커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20년 동안 단 하루도 훈련과 가문 비전의 근육 성장제를 거른 적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근육 성장제,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저만큼 덩치가 커졌는데도 아직도 근육 성장제를 챙겨 먹는 것인가? 이미 덩치는 모론보다도 커졌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새끼 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인의 불알을 먹었더니 정말로 거인이 되고 싶어진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면 되었겠지. 유진은 한 번 숨을 삼킨 뒤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나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이 워낙 짧은지라…… 하루라도 빨리 수련을 시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결투에서 이길 것 같지가 않아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가려던 장소가 워낙 가기 힘든 곳이기도 하고, 그게, 가비드가 문을 열어주면 바로 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설마 이 정도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줄이야……. 아니스는 유진의 대범하지 못함에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칼과의 결투. 유진 님이 전념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가비드 린드먼은 강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크리스티나, 저 말 같지도 않은 변명질에 홀라당 넘어간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스터께서도 함께 듣지 않으셨습니까? 유진 님은 변명하신 것이 아닙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게 변명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1년 동안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며 마음고생 한 것을 아시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해명해 주신 겁니다. 이 얼마나 상냥한 마음씨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그 대답에 또다시 탄식을 흘렸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우호적인 해석…… 거기에 해명과 변명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유진 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고된 수련…… 심지어 수련이 끝났음에도 유진 님은 휴식을 가질 틈 없이, 곧장 이곳에 와서 결투를 치르셨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그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지금 유진 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입니다. 이곳 결투장에도 휴식을 위한 장소는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결투는 이미 끝났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의 집으로 돌아가실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집? 저 ‘집’이라는 것은 라이언하트의 본가를 말하는 것인가? 라이언하트의 집이 왜 크리스티나의 집이 된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뻔뻔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저 생각을 애니실라가 알았더라면 애꿎은 부채가 하나 더 아작이 났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와 할 얘기가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1년 동안 먹은 것은 망토 안에 쟁여놓았던 육포 따위의 보존식품. 그리고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잔뜩 쑤셔 넣은 사탕이나 과자 종류…… 고기, 고기가 부족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기름진 고기. 그런 고기로 배를 가득 채우고, 술도 마시고, 씻고, 푹 자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그럴 수는 없다. 유진은 모론과 세냐를 돌아보았다. 세냐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유진에 대해 묻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은 성녀들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러운 잠적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지만…… 유진이 보낸 1년.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탄식을 흘렸다. 진즉에 알았고, 복잡하던 마음은 정리했다. 하지만 추측뿐이던 것에서 확실한 진실을 알게 된다 생각하니, 착잡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을 만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결투장에 왔을 때, 유폐의 마왕은 저렇게 물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먼저 돌아가 있으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번에도 1년이나 사라져 있지는 않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본가에 도착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하고 기다리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촐하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대하게 말고, 조촐하게. 저택에서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 결투를 본 모두는 참석해야 하지 않겠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정도라면…… 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계의 사람들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까지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 그 외 너를 지지한 귀빈들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딱! 거기까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더 이상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길레이드는 협상의 성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외에 원하는 것이 있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니나보고 음식을 준비하라고 해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제가 13살부터 먹던 것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한창 성장기던 시절. 매일 검을 휘두르고, 백염식을 수행하던 시절. 전속 시종인 니나는 유진이 요구한 대로 무식하리만큼 두껍고 큰 고기를 구해 와, 유진의 취향에 맞게 요리해서 삼시 세끼 접시에 올렸다. 야채보다 고기가 많은 스튜나, 완벽하게 구워낸 스테이크 등…….&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해두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투에서 보았던 말도 안 되는 신위와, 12년 전부터 보았던 유진의 어린 시절은 도저히 겹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이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어떤 격을 얻든, 유진은 길레이드의 아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저택에서 뵙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왜 안 와? 안 갈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편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흠칫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이 너무 대단한 분이 되셔서 저처럼 꼬질꼬질한 사역마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지 뭐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 본녀는 은자를 믿었느니라. 하지만 은자의 대단함은 드래곤인 본녀도 대단치 않게 되어버리느니라. 그래서…… 그래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헛소리들 말고 빨리 오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썹을 구기며 망토를 열었다. 서로를 힐긋거리던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후다닥 망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자리부터 옮기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아직 손을 놓지 않은 크리스티나가 유진이 이끄는 대로 함께 하늘로 떠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그 모습을 못마땅히 보다가 결국 한 마디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하늘 날 수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이상하게도 날개가 나오지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가 거짓말해도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날개가 나오지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읊었다. 세냐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로 갈 건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집.”&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동굴?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구르야란을 내려볼 수 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꼭 거기가 아니어도 되잖아. 저기 저 봉우리면 되는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모론이 결투장을 내려보던 곳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저기도 상관은 없…….”&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악! 세냐의 마나가 확장되었다. 유진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 세냐의 마나가 유진과 크리스티나, 모론을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이 끝났을 때. 4명은 결투장을 떠나 레헤인야르의 봉우리 정상에 도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주변을 돌아보며 감탄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간이동은 아닌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꿔치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으스대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 있던 마나와, 내 마나를 치환한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약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10명 이상은 치환할 수 없어. 물론 내 마나는 수천 명도 손쉽게 감쌀 수 있지만, 그만한 양의 마나를 강제로 치환했다가는 공간의 축이 붕괴해서 대참사가 날 거야. 거리도 대충 이 정도가 한계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편리하네. 나도 쓸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못 쓰지! 이건 작고 작은 마나의 세계를 이해하고, 완벽하게 영력을 다뤄내야만 쓸 수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영력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자 선배는 원천의 정수라고 불렀지만, 그건 너무 길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선배라고 부르기로 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자꾸 깝죽댈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유진은 더 이상 놀리지 않고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서부터 해야 할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모론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일인가,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오늘부터 내 성기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뜸 뱉은 말에 모론이 눈을 끔벅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끔벅거리는 모론과 달리, 크리스티나는 어떤 의미로 유진이 저런 말을 한 것인지를 곧장 이해했다. 그녀는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자리에서 짝짝 박수를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역시 유진 님이십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저 얼간이가 저런 방법을 떠올리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도 똑같이 감탄했다. 성녀인 그녀들은 ‘성기사’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만약 모론이 성기사가 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힘에 더하여 신성력까지 쓸 수 있게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그 이상의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빛을 포함하여 다른 종교의 성기사들이 신에게 나눔 받는 힘은 신성력뿐. 하지만 유진이 모론을 ‘직접’ 성기사로 서임한다면, 모론은 성녀들과 마찬가지로 기적과 신성력 이상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눈을 빛내며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님을 성기사로 삼으신다면, 그것은 ‘빛’의 성기사입니까? 아니면 ‘전쟁신’의 성기사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 다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본래 가진 신성은 전쟁의 신 아가로트의 것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빛의 신성도 갖게 되었거든. 아니 뭐, 갖게 되었다기보다는 빛이 줬다고 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쩝 입맛을 다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지금 나는 그렇게 두 개의 신성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럼 내가 직접 서임한 모론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의 감탄이 유진의 말을 뚝 끊었다. 그는 두꺼운 양팔을 하늘 높이 번쩍 들면서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과 빛의 성기사가 되는 것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에 카르멘이 없어서 다행이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카르멘이 함께 있었다면, 그녀는 ‘전쟁과 빛의 성기사’라는 거창한 이름에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려댔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카르멘이 없을지라도, 결국 언젠가는 그 상황을 맞닥트리게 된다는 것. 유진은 조용히 그 언젠가의 미래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은 모론 한 명만 성기사로 삼겠지만…… 바벨을 공략할 때는 다른 사람들도 성기사로 서임할 생각이다. 우선 전쟁에 참전할 라이언하트 전원과,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성기사가 되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릴 무신론자가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해둔 사람들은 이미 있다. 알체스터나 오르투스, 아이빅, 이바타 같은 손에 꼽히는 강자들. 막무가내로 성기사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는 아예 소수에게 큰 힘을 퍼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애초에 ‘성기사단’으로서의 구색은 라이언하트 전원을 서임하는 것으로 충분할 테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과 빛의 신성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리송한 기분을 느끼며 유진을 빤히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결국 아가로트의 것이고, 빛에게 양도받은 거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신성은 따로 없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리한 질문이었다. 세냐가 말한 것처럼, ‘전쟁신’이라는 이름의 신성은 아가로트의 것으로, 유진의 혼 자체에 새겨진 신화시대의 것이다. 그리고 빛은, 유진이 직접 녀석에게 신성을 양도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들어가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 완성되지는 않아서 섣불리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대충 감이 오기는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와의 결투에서 들었던 목소리들. 그리고 앞으로 유진이 해야 할 것들. 유진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쌓아가야 할 것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너는 결국 3개나 되는 신명을 갖게 되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화를 거쳐 마법의 신격을 얻었다. 전대 마법의 여신이 상아탑의 현자, 비슈르 라비올라였다면- 당대의 마법의 여신은 바로 현명한 세냐 메르데인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을 성기사로 삼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언젠가 모론이 스스로 신성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신화시대와 다르다. 그때는 인간과 같은 종족들이 업과 덕을 쌓고, 추종과 숭배에서 신앙이 태어나 신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신화(神化)를 이루는 것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세냐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군가가 신화의 문을 닫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숭배와 신앙을 독점했다. 세냐조차도 ‘마법’이라는 이름의 길을 독점하고, 현자의 인도를 받지 못했더라면 100년을 수양해도 마법의 신성에 도달하기 힘들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그 ‘누군가’에 대해서 짐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들을 수 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유진을 똑바로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에 대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시대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것은 빛의 신이다. 대륙에는 빛을 제외하고도 다른 신앙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신도 모두를 합할지라도 빛의 신앙보다는 한참이 부족하다. 그것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신성제국’으로 군림하는 유라스가 증명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도 각오를 다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란 존재의 근원. 그녀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섬길 존재로 정해진, ‘빛’이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답은 예전에 유추했다. 빛에 인격이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신을 섬기고 바라는 자들에게 신성력이란 힘을 내려주는 존재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정말로 실존하는 신인 것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신이라 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에는 신이라 여길 만한 거룩한 의지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거,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은 성녀들의 생각을 부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해서 떠올리는 ‘신’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빛이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힘의 덩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빛에는 성검을 내리고, 유진을 용사로 선택하고, 베르무트의 무덤을 파헤치라고 권하는 ‘의지’는 존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계시는 오롯이 유진을 위한 것. 빛은 유진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 애호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유진은 ‘빛’이 누구인지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먼 곳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장을 넘고, 회색의 라구르야란을 넘어, 이제는 고요히 가라앉은 바다와, 뿌옇고 짙은 안개에 가려진- 머나먼 바다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풍요와 번화의 신. 바다와 항해의 신. 대지와 숲의 신. 기사와 명예의 신. 시간과 운명의 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외에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명(神名). 세상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신명과, 유라스의 이단심문관들이 경멸하는 사교(邪敎)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모두가 빛의 다른 이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세상에서 ‘빛’을 제외한 신앙이랄 것은 대수림의 세계수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대답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크리스티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니스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와 성기사를 보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들에게서 동질감 같은 것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원시 정령과 똑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이 원시에서 벗어나 바람의, 물의, 대지의, 그런 이름을 갖게 되듯. 순수한 신성력에 성질이라 불릴 것은 존재하지 않아. 마나와도 비슷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은, 저희가, 빛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신성력과…… 그들이 이단이나, 열등하다 치부하던, 다른 종교의 신성력이. 결국은 똑같다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똑같지는 않지. 뭐, 똑같은 곳에서 나오기는 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며 턱을 괴었다.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는 크리스티나를 대신해 아니스가 육체를 차지했다. 그녀는 황급히 유진의 곁에 다가가며 캐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빛은 그렇게 여러 종교를 만든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의 본질이 수십, 수백이 뒤섞인 덩어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그 말에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십, 수백이 섞인 덩어리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곧 아니스는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리고 빛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심각한 얼굴로 유진을 보고 있던 세냐의 눈동자도 가늘게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은 유진이 ‘어떤’ 기분일지를 생각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1년, 대체 어느 시점에서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저것을 알았을 때 도저히 태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화시대의 마지막을 보았던 신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바다를 보았다. 도저히 그 너머를 볼 수가 없는 뿌연 해무를 보았다. 그 너머의 머나먼 바다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존재의 발길을 철저하게 금한 곳. 지금 시대의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 절망과 희망을 함께 묻은 곳. 신화시대의 끝을 본, 현자를 제외한 신들의 무덤이자 지금 시대 모든 신의 성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이 말하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 심연의 폐허 도시에서 눈을 떴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앞에는 빛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을 붙잡고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은 현자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만약 아가로트와 신군이 도망쳤다면, 멸망의 마왕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즉시 세상을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고, 붙잡고 있었기에 신들은 다음을 안배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자는 상아탑의 모든 신도들을 모아 세계수가 되었어. 현자는 윤회의 굴레가 끊어지는 것과, 다음 시대에서도 멸망이 시작될 것을 염려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윤회의 굴레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자와 상아탑 마법사들의 최후의 마법은 지금 시대에서 결실을 맺었다. ‘마법’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고, 세계수는 멸망의 때에 최후의 방호가 될 것이며, 마법의 신역은 세냐에게 계승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신들도 똑같아. 그들은- 말 그대로, 하나가 되었지. 아주 무식한 방법으로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식한 방법이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은…… 신화시대의 어떤 신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아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은 여전히 머나먼 바다를 응시하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르데온.”&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름을 말하고,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그를 보았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가 어떤 신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빛으로 이뤄진 거대한 남자. 신화시대의 그는 지금처럼 ‘빛’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산봉우리조차 우습게 여길 덩치는 여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식한 방법은, 뭐…… 그냥 무식했지. 고르데온은 엄청나게 크거든. 신화시대에 살았던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컸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들은 자발적으로 고르데온의 입 안에 들어갔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연에서 해후한 빛은, 거신은, 신화시대의 신들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맞이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지금 세상의 멸망은 결정되었다. 늙은 신들은 유폐의 마왕과 만나 멸망을 막을 방법에 대해서 물었지만, 들은 대답이라고는 ‘다음’을 기약하라는 말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신들은 다음을 기약했다. 지금 시대가 멸망할지라도 다음의 시대가 새로이 시작될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시대가 이번과 똑같은 멸망을 맞닥트리지 않을 방법을 궁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신(古神)들은 두 가지 방법을 준비했다. 하나는, 모든 신이 거신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신성과 신력을 하나로 만드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 그런 방법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봐야 멸망의 마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신화시대의 종말로 증명됐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저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아가로트가 붙잡고 있던 멸망이 풀려났을 때. 힘에 대해 자신이 넘치던 신들이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겠다고, 아니, 죽이겠다고 나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멸망을 잠시라도 가로막은 신조차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고신들은 다른 ‘신’이 없는 세상을 선택했다. 거신이 모든 신을 잡아먹고, 그렇게 하나의 거대하고 완전한 신이 되어서, 다음 시대의 주신(主神)이 된다. ‘다음’ 세상에서는 오직 그런 신만이 존재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지금 세상에서 신좌에 오르는 길을 막은 것은…… 빛이었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신들은 지금 세상의 신성을 독점했다. 어떤 식으로 숭배받건, 상위의 신앙에 먹혀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현자가 유진에게 했던 경고와 일맥상통했다. 유진이 세계수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잡아먹히듯, 지금 시대의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신앙은 빛과 다른 신앙에 잡아먹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기 싫은 것은 믿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여러 이름을 갖게 하고, 뚜렷한 자아를 두지 않았다. 무아(無我)의 신성을 갖추었기에 고신들은 지금 시대에서 어떤 신이든 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된 신앙이 ‘빛’이었지. 그것도 나름의 의도였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망토를 뒤졌다.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잡힌 것은, 가비드가 남긴 술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안 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술은 언젠가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나서 마실 것이다. 하지만 망토 안에는 다른 술이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망토 안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손을 뻗자, 아니스가 허리춤의 술병을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평소라면 아니스는 개인 술병에 담은 술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술병을 여니 독한 주향이 확 풍겨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취향의 술은 아닌데? 이거 증류주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증류주도 주면 먹기야 하겠지만, 본래 아니스는 독한 과실주를 즐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야 제가 담은 술이 아니니까요. 그건 크리스티나의 술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술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1년 전만 해도 술은 잘 마시지 않고, 마셔도 달짝한 와인 정도만 마셨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하멜. 당신의 말대로…… 모든 신들이 거신에게 먹혀서, 지금의 신이 되었다면…… 빛의 ‘신화’는 대체 뭡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느 정도 이야기가 부풀려졌지만 진짜지. 말했잖아, 무아의 신성에서 주된 신앙으로 ‘빛’을 선택한 것은 나름 의도대로였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의도라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노골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빛은 어둠을 밝히지. 그럭저럭 은유를 넣기도 좋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둠을 밝히는 빛. 밤이 지나고 오는 여명.&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상화하기에 제격이란 말이야. 유라스의 신화처럼, 빛의 화신이 세상에 밝음을 주고…… 그런 일은 없었지만, 빛이 세상에 성검 알테어를 내린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알테어가 있었기에 신성제국 유라스가 만들어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독한 증류주를 삼키고, 술병을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신들의 의도는 성공했어. 덕분에 지금 시대에 빛의 신교가 성세하고, 대부분의 신앙은 구색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단 하나의 신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 그래서 의도대로 되었다는 거야. 덕분에 ‘그들’은 신화시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신성을 갖게 되었지. 정작 그 신성은 직접 쓸 수 없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 직접 쓸 수 없다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들은 죽은 존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신은 모든 신을 잡아먹고, 스스로 육체를 불살랐다. 그렇게 육신을 죽이고, 혼만을 남겨 지금 시대로 넘어온 거야. 그렇기에 그들은 세상에 직접 강림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신성력을 내리는 것이 고작일 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무아의 신성이 가진 거대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알테어를 세상에 내린 거다. 신력을 편하게 끌어내기 위해서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알테어는…… 용사만이 쥘 수 있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신들이 다음을 기약하며 준비한 것은 두 가지라고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나는 모든 신들이 거신에게 잡아먹혀, 다음 시대의 유일신이 되는 것.&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은 하나가 바로 나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일하게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고, 놈의 심부(深部)에 상흔을 남긴 존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를 다음 시대에 무조건 환생시키는 것이, 고신들의 마지막 안배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유폐의 마왕성, 바벨에서 죽은 하멜을 환생시킨 것은 베르무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베르무트는 아가로트를 하멜로 환생시키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가 유일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머나먼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쓰러트리지는 못했어도 심부에 상처는 남겼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며칠 동안이나 멸망의 마왕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전한 신이 많지는 않지만, 도전했던 신 중에서 오직 아가로트만이 저것을 해냈다. -아가로트가 강해서? 유진은 그것은 부정했다. 아가로트가 강한 축에 드는 신이었던 것은 맞다. 몇 명이나 되는 마왕을 살해한 신인 것도 맞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신화시대의 신 중에서 아가로트가 최강은 아니었다. 전쟁에 나서지 않은 고신들 중에서는 아가로트 이상의 신력을 가진 신들도 여럿 있었다. 아가로트가 특별했던 것은, 신명으로 삼은 ‘전쟁’에 걸맞게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 가비드 린드먼이 아가로트를 베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만, 그것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다. 어떤 형태든 가비드가 싸운 아가로트는 ‘진짜’가 아니다. 아마 유폐의 마왕이 보고 기억하는 대로 만들어낸 환영 같은 것일 터. 전쟁 신에게 독기와 살의를 거세하고 전투만 가능하게 만든 것이라면, 그건 ‘진짜’ 아가로트와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가 멸망의 마왕을 붙들 수 있던 것도 그 독기와 살의 때문이다. 신력의 강함과 격은 진즉부터 멸망의 마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신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든 신군이 눈앞에서 죽었다. 성녀 아리아의 마지막 소원으로 그녀의 목을 부러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아가로트는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멸망의 마왕을 죽이고 싶다는 독기와 살의로 멸망의 안에서 닷새를 버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신들이 생각하기에, 다음 시대의 사람들을 믿는 것은 너무 근거 없는 모험이었던 거야. 그래, 어쩌면- 다음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완벽하게 성검을 다뤄내고, 신에 버금갈 만큼 강하고, 잘 싸우고, 유폐의 마왕을 넘어 멸망의 마왕에게까지 도달할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기대하느니, 아예 싹수가 있던 아가로트를 환생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신들의 안배는 절반만 성공했다. 유폐의 마왕은 신화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대륙을 침공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쭉 침묵하던 유폐의 마왕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끝’이 당도하고 있는 신호탄 같은 것인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아니스, 모론. 너희는 300년 전의 내가 옛날 옛적 전쟁의 신인지 뭔지 하는 거창한 존재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셋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자연스럽게 하멜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입에 걸레짝을 물고, 찍찍 싸 뱉는 말투는 시비조에, 소문도 별로 좋지 않고, 틈만 나면 베르무트에게 시비를 걸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의 신은 모르겠고, 병신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솔직한 심정으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동료로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성이 아주 못된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도 솔직하게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나는…… 어…… 네가 병신이고 약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어, 못 봐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첫 만남에서 하멜에게 ‘예쁘다’라는 평가를 들은 세냐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들 진짜 나쁜 새끼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 이상의 저평가. 유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어, 그게 문제였던 거야. 고신들이 기대한 아가로트의 환생은, 환생하자마자 인간 전장을 평정하고 고위 마족과 마왕의 목을 썩둑썩둑 썰어대는 놈이었을 텐데, 정작 환생한 내가 영 아니올시다였던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뭐…… 하멜, 당신은 충분히 강하지 않았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히 강한 것으로는 부족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배의 반을 망가트린 것은 ‘시간’이었지. 지금의 세상이 시작하고, 아가로트가 환생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검 알테어는 아가로트를 위한 검이다. 고신들은 지금의 시대가 끝을 맞이하기 전에, 환생한 아가로트가 알테어와 함께 멸망의 마왕을 가로막기를 바랐다. 설령 아가로트의 힘이 부족할지라도, 알테어를 매개체 삼아 뽑아내는 신성력은 대륙 전체의 신앙의 정수이니, 멸망의 마왕에게 닿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너무 긴 시간이 아가로트의 신성을 망각시켰다. ‘하멜’은 인간으로서 강했지만, 고신들이 기대했던 강함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다. 만약 하멜이 성검 알테어의 주인이 될지라도, 신성이 없는 이상 알테어의 전력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각한 신성을 깨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했다. 전장을 떠돌고, 전쟁을 반복하고, 마족을 죽이고, 마왕을 죽이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멸망의 마왕이 그것을 기다려 줄까? 아니, 멸망의 마왕뿐만이 아니다. 유폐의 마왕은 이미 전쟁을 일으키고 바벨에서 침묵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다른 마왕과 마족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들은 욕망대로 마경을 나와 대륙으로 전진하고, 참살을 반복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멸망의 마왕이 나타나기 전에 마족과 마왕에 의해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군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군가가 필요했다. 아가로트가 망각한 신성을 깨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누군가가. 다른 마왕과 마족들이 인류를 멸망하지 않도록 가로막아줄 누군가가. 세상에 패배감과 절망이 팽배하도록 두지 않고, 희망이 되어줄 누군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법은 알고 있다. ‘용사’가 있으면 된다. 인류의 구심점이 되고, ‘승리’에 대한 희망을 만들고, 그 희망의 초석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인간들을 전장으로 향하게 할 존재.&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용사뿐이다. 계시를 내려 용사를 점지해야 하나? 대체 누구를? 빛은, 무아의 신성에서 희미한 자아가 나타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것이 허무해질 뿐. 아가로트가 각성할 때까지 누군가가 시간을 벌어야 한다면, 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 절망의 시대에서 대체 누가 용사로서 행동할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는 있다. 그녀를 엄밀히 말해 ‘성녀’라고 할 수 있는지를 제쳐두고, ‘빛’은 성녀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성녀에게 용사의 업까지 얹을 수는 없었다. 그건 만들어진 성녀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효율의 문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성기사 중에서 선택해야 하나? 눈에 차는 인물이 없다. 한번 용사가 된 이상, 패배해서는 안 된다. 용사는 희망의 상징이어야 한다. 희망을, 승리를 바랄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점지한 용사가 유폐의 마왕은커녕 다른 마왕에게 패배해 죽는다면. 어쩌면, 어쩌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서- 마왕도 아닌 마족 나부랭이에게 죽어버린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을 만든다. 수많은 이름을 가진 ‘빛’은 지금 세상의 유일신이다. 용사가 패배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가로트가 각성에 성공할지라도, 세상이 절망으로 범벅되어 버리면…… 알테어는 아가로트를 위한 검으로 쓰일 수 없게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도 알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술병을 들면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나타나서 성검을 쥐고 용사가 되었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북쪽 설원.&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경으로 이송되던 포로들이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그들은 흑마법사의 제물이 되거나 마족의 노리개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포로들 중에서, 그 누구도 경계하지 않던 소년이, 대뜸 검을 빼앗아서 그 자리의 마족과 흑마법사를 모조리 도륙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침음과 함께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 모론은 베르무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야르 부족이 머무르던 설원. 그곳에서 마주친 베르무트는, 이름처럼 ‘사자’가 연상되지는 않았다. 헝클어진 회색 머리. 눈보라 속에서 귀기(鬼氣)를 발하는 금색 눈동자. 첫 만남의 베르무트는, 마치 굶주린 설원 늑대처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처음부터 성검을 쥐러 간 것은 아니다. 베르무트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모론과 바야르 부족과 함께 설원을 평정했다. 마족의 주둔지를 박살 내고, 흑마법사의 던전을 붕괴시키고, 이송되는 포로들을 해방시켰다. 넓고 가혹한 설원에는 마족을 피해 숨은 사람들이 많았다. 베르무트는 그들조차 모두 거두어 보살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되니, 베르무트가 나서지 않아도 소문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설원에 나타난 젊은 영웅에 관한 소문. 성급한 이들은 그 젊은 영웅이야말로 ‘빛’이 세상을 위해 내린 용사일 것이라 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억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 유라스는 어떻게든 성검을 뽑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성검을 뽑으려 했지만 실패했었고, 저 외에도 수많은 성직자와 성기사들. 신도들 중에서 신앙심이 투철하다 알려진 전원이 성검의 앞에 섰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누구도 성검을 뽑지 못했다. 그런 시점에서 베르무트에 대한 소문이 들려 온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가 빛에 대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는 용사가, 희망이 필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당대의 교황이 직접 성명을 발표했고, 베르무트 님과 모론이 유라스에 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과 마찬가지로 아니스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교황청에 당당히 걸어 들어오던 베르무트의 모습. 잿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내리고, 새하얀 망토를 걸인 그 모습을. 은은한 빛을 발하는 금색 눈동자를. 당시의 아니스는 빛에 대한 원망과 회의감에 젖어 있었지만, 베르무트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남자야말로 빛이 세상에 내린 화신이다. 용사일 수밖에 없는 남자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베르무트의 모습은 성스럽고 거룩해 보였다. 저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금색이 마치 희망의 불빛처럼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 말하더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남은 술을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에는 베르무트를 용사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고 말이야. 처음 본 순간에 느꼈다더군. 베르무트가 절대로 인간이 아니란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 베르무트는 성검을 쥐었고, ‘억지로’ 뽑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알고 있다. 성검은 단 한 번도 베르무트를 주인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베르무트는 성검을 사용했다. 사용하기 위해 성검의 빛을 봉인했다. 베르무트가 뽑아낸 빛은, 봉인을 거치고 나온 희미한 잔광에 지나지 않았다. 망령과의 전투에서 칼날을 부수었기에 성검은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끝까지 베르무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닐지라도 적도 아니었으니까. 베르무트는 성검을 들고서 용사처럼 행동했고, 나를 찾아냈으며, 마왕을 죽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저 남자는 무엇이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가? 대체 무엇을 알고 있기에 ‘하멜’을 발견했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체는 모르지만 바라는 것은 똑같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언젠가, 언젠가…… 내가 신성을 각성하기를 바라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은 최후까지 신성을 각성하지 못했다. 계기로 쓰일 아가로트의 반지도 얻지 못했고, 살아서 바벨을 오르지도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의 삶과, 하멜 다이너스의 삶이 갖는 차이점이 뭘까. 유진은 알고 있다. ‘아가로트의 반지’는 어떤 식으로든 유진에게 주어졌을 운명이다. 유진이 아가로트의 환생인 이상, 신성을 망각했을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아가로트의 반지와 만났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하멜의 삶에서 아가로트의 반지를 만난 적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 말하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베르무트와 만났기에 아가로트로서의 운명이 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베르무트란 존재를 안배한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세상의 운명이란 것에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베르무트에 의해 유예되었을지라도, 베르무트는 결국 이치에 어긋난 존재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어째서 미리 언질하지 않은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은 결국 너에 얽힌 대부분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무아의 신격이라고 말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최소한의 자아를 띄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너나 아니스에게 진실을 알릴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등신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뜸 빛이란 새끼가 나한테, 너는 사실 고대 전쟁신의 환생이다~ 라고 말을 하면. 내가 아이고 그렇습니까, 내가 사실 신이었다니! 하고 믿었겠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개소리로 치부했겠지. 그래, 내가 많이 양보해서 믿었다고 치자. 그런데 믿어서 뭐 어째?”&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실을 미리 알았을지라도 변하는 것은 없다. 아가로트의 반지도 없고, 남해의 심연에 도달하지도 않은 이상- 망각한 신성을 깨칠 수 없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별말을 할 수 없었던 거야. 베르무트도, 빛도 말이지. 내가 스스로 신성을 깨칠 때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300년 전에는 최후까지 신성을 깨칠 수가 없었다. 운명이 너무 크게 틀어져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베르무트도 알았을 터. 만약, 살아서 바벨의 정상에 올랐더라면- 무언가 바뀌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텅 비어버린 술병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이 울적하고 쓴 것이 술이 간절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조차도 베르무트 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이 세상에서 베르무트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유폐의 마왕뿐일 거라더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쩝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하는 것 같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듣지 못한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캐물으면 말해주었을 것 같기는 한데, 안 들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째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하지 않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마찬가지다. 베르무트의 정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은, 월광검을 사용했다. 지금 세상의 것이 아닌 다양한 무구들을 발견했다. 마왕의 무구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하멜이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것을 알았고, 동료가 되어라 권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답은 유폐의 마왕에게 들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 대해서. 약속에 대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어떻게 해야 베르무트를 구할 수 있는지. 유폐의 마왕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물어볼 생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이것은…… 제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손가락을 들어 바다를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곳이야말로 천국 비슷한 곳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을 섬긴 혼은 모두 저곳으로 흘러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나먼 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곳과 연결된 이차원이 고신들의 무덤이자 신의 성역이고, 천국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윤회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 멸망의 마왕조차도 윤회의 굴레는 끊을 수 없다. 오직 ‘마왕’만이 혼을 윤회의 굴레에서 빼앗아 구속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하고 유일한 것이 유폐의 마왕이다. 놈은, 자신과 계약을 맺지 않은 영혼조차도 사슬로 묶어 유폐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대단한 곳은 아니지. 윤회하기 전에 잠시 거치는 정도일 뿐이니까. 하지만 천국은 맞아. 이승에서 오염되거나 망가진 영혼은, 저 천국에서 빛에 의해 정화된 뒤에 윤회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종의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이름을 가진 빛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에서 거둬들이는 신앙을 통해 신력을 부풀리는 것. 그렇게 배양한 신력을 아가로트를 통해 멸망의 마왕에게 처박게 만드는 것이 고신들의 안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영혼은 죽는 순간에도 잠시 동안 의지를 갖는다. 죽었다고 해서 허무한 존재가 된다면 망령이나 언데드 같은 것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 그렇기에 빛은 천국을 만들었다. 흘러들어 온 영혼에게서 마지막까지 신앙을 뽑아내기 위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입술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인류애에 의한 천국이 아니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에 정말 인류애가 없다고 말할 수 있나? 빛이 바라는 것은 멸망을 막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있다. 빛의 신교가 세상에서 별 개짓거리를 하고, 인체실험을 하고, 다른 종교를 핍박하고 사냥할지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에 필요하기에, 빛은 묵인했다. 빛이야말로 인류애의 괴물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국이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의 대답으로 아니스는 수백 년 동안 품고 있던 불안과 의심에서 안심을 얻었다. 세상에는, 천국이 있다. 한때 그녀가 섬겼던,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섬기고 있는 ‘빛’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나중 가면 거기도 뜯어고쳐야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더 그럴듯한 천국으로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이 할 수 있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되면 해달라고 조르지 뭐. 설마 싫다고 하겠어? 지들 멋대로 나를 환생시키고, 유폐와 멸망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라는 빡센 업을 주었는데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과거의 인연을 버릴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지금’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수많은 존재가 있다. 아가로트에게, 하멜에게, 유진에게, 멋대로 기대하며 불씨를 이어 온 자들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 슬슬 해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망토에서 레반테인을 뽑으며 모론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무릎부터 꿇어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꼭 꿇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런 자존심을 부릴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꼭 꿇을 필요는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모론의 자존심은 존중해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로서의 최초의 기사 서임이지만 무엇 하나 거창하게 차려진 것은 없다. 단상은 당연히 없고, 참석한 존재는 사람 두 명, 죽은 영혼 한 명, 사역마 한 명, 드래곤 한 마리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면면을 따져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 한 명은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이자 최근에는 신위까지 도달한 예비 마법의 여신이고, 다른 한 명은 성녀. 죽은 영혼은 진짜배기 대천사다. 사역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귀여우면 됐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처음부터 메르는 사역마로 느껴지지 않았다. 드래곤도 그냥 드래곤인 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시대에서 드래곤의 축복을 받으며 서임 된 기사는 없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상은 정 필요하다면 어찌 만들면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유진은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릎을 꿇지 않고 꼿꼿이 허리를 세운 모론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루하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임받는 자의 이름. 용감한, 모론 루하르. 일국을 건국한 전설적인 용왕(勇王)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어…… 그러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성기사로 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순간 진지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생 누군가를 기사로 삼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옛날 사막에서 거둔 아만조차도 기사 서임은 하지 않고 그냥 저택에 던져놨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서임 어떻게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모론에게 물었다.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로 기다리던 모론이 옛날처럼 멍청한 표정이 되어 눈을 끔벅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그래도 왕도 해봤으니 옛날에 서임은 잔뜩 해봤을 거 아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 하멜. 이 혹독한 설원에 처음으로 마을 만들었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그 마을이 루하르의 시도, 하멜른이 되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 나라 수도의 이름이 하멜른인 것은, 너를 기리기 위함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초의 하멜른은 지금처럼 대도시가 아니었다. 나를 따르는 전사들과 그들의 가족. 또, 헬무드에 고향을 잃은 난민들……. 당시에는 물자도 몹시 부족하여 뭉친 눈을 벽돌 삼아 집을 만들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최초로 설원에 마을을 만들고, 나는 그곳을 ‘왕국’으로 선포했다. 이름은 내 이름을 딴 루하르 왕국. 그때 나는, 설원의 한복판에서 전사 수백 명에게 기사의 직위를 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새끼 왜 뜬금없는 자랑질이지? 유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배배 꼬인 유진에게는, 지금 저 말이 ‘나는 수백 명을 기사로 두었다’라는 자랑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대뜸 루하르의 건국 이야기를 지껄이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소리 말고, 서임 어떻게 하는 거냐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그딴 쉬운 이야기 듣자고 네 개소리를 들어준 것이 아닌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임식은 기사마다 다른 것이다. 두들겨 패거나, 따귀를 몇 대 때리거나, 검을 들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을 서임식으로 삼곤 한다. 만약 네가 그리하겠다면 하멜, 나는 며칠이곤 네 주먹을 맞아주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주먹이 더 아플 텐데 그런 짓을 왜 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다른 의문을 느낀다, 하멜. 말했듯 루하르 수도의 이름이 하멜른인 것은 너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환생하고, 세상 모두가 환생에 대해 알게 된 너를 더 이상 기릴 필요가 있는가? 하멜른의 이름은 더 이상 하멜른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내가 지금 환생했어도 하멜의 죽음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뭐 하러 기릴 필요가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빽 쏘아붙이면서 레반테인을 높이 들었다. 화륵! 투명한 유리의 칼날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불꽃에 모론이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칼에 불을 붙이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칼로 네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릴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살갗에 성화의 화상을 남기는 것이 네 서임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 보기만 활활 타지 별로 안 뜨거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듣기는 했지만 모론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릴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 저 불꽃의 검이 끔찍한 힘을 토해내며 가비드를 베는 것을 본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의 이름은 ‘용감한 모론’. 그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서 유진의 앞에서 어깨를 활짝 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 루하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불꽃에 휘감긴 레반테인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모론의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를 나의 첫 번째 성기사이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한 순간. 불꽃의 색이 바뀌었다. 검붉고 포악한 색이 찬란한 백색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대전사로 서임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움직인 레반테인이 모론의 왼쪽 어깨에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아악! 칼날에서 부풀어 오른 불꽃이 모론의 몸을 한 번 덮었다. 유진이 말한 대로였다. 불꽃이 전신을 휘감았지만 모론은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타오르는 불꽃이 호흡과 함께 모론에게 흘러 들어갔다. 두근, 두근…… 불꽃이 스며든 심장의 박동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옆에 꽂아 두었던 도끼에 손을 뻗었다. 커다랗고 억센 손이 도낏자루를 잡은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르르륵! 유진의 것과 똑같은 불꽃이 도끼를 휘감았다. 모론은 감탄을 내뱉으며 도끼를 위로 들어 올렸다. 모론은 자신에게 깃든 신력을 느끼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믿을 수가 없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평생을 쌓은 마나에 신력이 더해졌다. 그것뿐인데도 모론은 신화(神火)를 피워낼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직접 서임한 성기사와 대전사. 심지어 그렇게 서임한 대상은, 인간 중에서 최강인 모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힘뿐만이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도끼를 내려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즉부터 전설로 여겨지던 루하르의 건국왕. 300년이나 살며 추앙받았으니, 다른 시대였다면 진즉에 신좌 하나는 꿰찼을 위업. 그렇기에 지금의 서임은 모론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늦어도 1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차분한 눈으로 모론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안에, 나는 바벨에 도전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두를 수밖에 없지. 유폐의 마왕이 경고했잖아,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이 대체 어떤 형태로 끝이 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유진은 그 ‘끝’이란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끝’이란 것이 좋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근 이곳에서도 누르의 수가 많이 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르는 멸망의 징조다. 지금이야 수가 늘었다고 해도 모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지만, 만약 신화시대의 마지막처럼 누르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와 대륙로 창궐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제는 누아르 제벨라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유진과 누아르에 얽힌 사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사연은 알지 못해도- 누아르가 강적이란 것은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제벨라 시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압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기야 뭐 언제나처럼 시끄럽고 맛이 가 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맛이 가 있기는 합니다만…… 당신이 전에 갔을 적과는 도시의 상황이 다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없는 동안 제벨라 시티는 두 달 동안 봉쇄되었었습니다. 도시의 수백만 관광객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새로운 관광객은 도시로 들어갈 수가 없었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상태가 두 달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관광객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각국은 정식으로 헬무드에 항의했습니다. 어째서 관광객을 인질로 잡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저 역시 사안이 보통이 아니란 것을 느꼈기에, 직접 제벨라 시티를 방문했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번이나 항의했지만 유폐의 마왕은 제벨라 시티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유폐의 마왕이 직접 누아르 제벨라를 두둔한 것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이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성녀들은 그렇게 받아들였고, 행동에 착수했다. 벌써부터 누아르 제벨라와 무력 충돌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곳에 포로로 잡힌 인간의 목숨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수가 많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없지만, 하멜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성녀들은 모을 수 있는 전력을 동원했다. 하우리아 해방전에 참전했던 대부분이 성녀들의 부름에 응했다. 교황이 허락했고, 키옐의 황제도 성녀들의 뜻을 지지했다. 심지어 유폐의 마왕조차도 성녀를 필두로 한 군세가 헬무드의 국경을 넘고, 마치 관광이라도 온 것처럼 워프 게이트를 지났음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발작해야 할 마족들도 그러기로 했다는 것처럼 쉽사리 길을 열어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아직도 그때 제벨라 시티의 기묘한 정경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도 예전 유진과 함께 제벨라 시티를, 그 정신 나간 제벨라 파크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밤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 한시도 고요했던 적이 없는 도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군세를 뒤에 두고 제벨라 시티의 성문에 섰을 때. 아니스는 도시에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수백만이 사로잡힌 도시는 도저히 그렇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이 열렸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게 닫힌 성문을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명령하기도 전에, 먼저 성문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달의 봉쇄가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문이 열리고, 포로로 잡혔던 관광객들이 풀려나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욱이 기묘했다. 그 자리에는 성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사와 용병과 전사와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문 저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기척을 느낄 만큼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누구도, 성문 건너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늘에서 성벽 안쪽을 살피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성벽 안을 보고 있었는데, 모든 눈은 제벨라 시티의 그 무엇도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제벨라 시티의 기묘한 장막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았던 도시와, 느꼈던 기척, 그 모든 것이 현실에서 어그러진 환상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활짝 열린 성문을 나온 사람들은, 두 달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하고…… 개운한 얼굴이었습니다. 마치 길고 깔끔한 단잠을 즐긴 뒤의 얼굴처럼 말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문을 나온 관광객들은 앞을 막아선 성녀의 군세에 어리둥절하며 걸음을 멈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함께 온 이들에게 관광객의 인도를 부탁한 뒤, 직접 제벨라 시티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 도시에서 두 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아르 제벨라, 그 갈X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아야 했으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어가지 못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쭉 침묵하던 유진이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꼴사납고 한심하지만, 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목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네가 들어온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까지 이어지지 않은 말. 하지만 그 뒤에 어떤 말이 붙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정을 내려야 했다. 성녀들의 힘은 마족에게 상극이지만, 상대는 누아르 제벨라. 그 정도 격의 마족, 아니, 누아르는 이미 마왕의 격은 진즉에 넘어선 존재.&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가 단독으로 마왕을 토벌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가진 신성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기적을 퍼붓는다 해도 누아르와 전투는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 성녀들의 뒤에는 대륙의 최정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들이 모였다. 하지만 그들을 가호한들 전투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전투가 성립은 되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의 제게는 모두의 목숨을 걸 각오와 명분이 없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러 간 것이 아니잖아. 포로를 되찾으러 간 것이고, 성공했으니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한심함과 나약함을 위로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렇게나 생각해. 내가 뭐라 한들 그때 네가 느낀 굴욕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스, 나는 네가 죽는 것은 싫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빙긋 웃으며 아니스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아니스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유진의 강건한 팔은 아니스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사로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크리스티나. 내가 없는 동안 너희도 무리가 많고 괴로웠겠지. 이렇게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이미 죽은 몸인데 뭘 이제 와서 ‘네가 죽는 것은 싫다’라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원래라면 아니스는 저렇게 이죽대며 유진을 놀려댔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의 포옹은 아니스에게 생각의 자유를 앗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스터, 시스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들리는 크리스티나의 비명도 무시했다. 그러면서 아니스는 필사적으로 육체의 주도권을 붙잡았다. 부쩍 힘이 강해진 크리스티나지만 지금은 아니스에게서 육체를 되찾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령! 이 사악한!]&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비명을 질렀다. 성녀로 죽어 천사가 된 성령에게 감히 악령이라니! 하지만 아니스는 저 괘씸한 망발에도 분노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네에, 다…… 다행입니다, 하멜, 이렇게…… 이렇게 제가 살아 있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300년 전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녹아내리는 표정이 되어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 으흠, 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는 모론과는 달리,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던 세냐가 연달아 헛기침을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그 뒤에 뭐 어떻게 됐는데? 관광객 풀려나고! 너는 누아르한테 도망가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쩜 말을 그리 재수 없게 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내가 뭐 틀린 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과해, 세냐. 지금은 네가 말이 심했어. 아니스는 신관이잖아. 당연히 우리처럼 마왕과 단독으로 싸울 수 없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저는 가련하고 나약합니다. 요…… 용사의…… 하멜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가쁜 숨을 섞어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련하다니! 세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300년 전 메이스를 휘둘러 고위마족의 대가리를 쳐부수는 것을 즐기고, 지금만 하더라도 대부분 마족을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전투 신관이 가련하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 미…….”&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성녀의 전투력이 대마법사와 용사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 세냐는 방금의 발언을 정정하고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좀처럼 말을 끝까지 뱉을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의 봉쇄는 풀렸지만 문제는 그다음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세냐의 사과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유진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서 양손으로 등까지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 미친년아! 뭐 하는 거얏!”&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간 관광객들이 다시 제벨라 시티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국이 그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붙잡아 가둬놓으면, 벽에 머리를 박거나 제 손으로 목을 죄는 등의 자해를 벌였기 때문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스가 속삭였다. 여전히 그녀는 크리스티나가 육체를 빼앗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와 신관들은 정신 계열의 흑마법, 혹은 그 갈X의 사악한 최면이라 판단하고 정화를 시도했습니다만…… 불가능했습니다. 관광객들에게 가해진 것은 흑마법도, 최면도 아니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추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유진의 등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두 달 동안, 그 갈X의 도시에서 맛본 강렬하고 달콤한 추억이- 그들을 자발적으로 제벨라 시티로 향하게 만든 겁니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지우거나, 감정을 말소해야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법이 없다는 말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자해와 정신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결국 관광객들 대부분이 다시 제벨라 시티로 돌아갔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처음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제벨라 시티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다. 누구든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간 사람은 누구든 나올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그래서 상황이 좋지 않다. 왕국들은 스스로 국민들에게 제벨라 시티의 관광을 금지시켰다. 그 전에 제벨라 시티로 돌아간 관광객들은 스스로 나오지 않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의 대부분의 놀이시설과 카지노는 여전히 운영 중이지만- 하멜, 우리가 갔을 적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의 제벨라 시티는 밤이 존재하지 않았지요. 낮과 밤, 모든 시간이 연회로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제벨라 시티의 관광객들은, 다른 놀이를 즐기지 않습니다. 오직 잠을 자고, 꿈을 꾸기 위해 도시에 있는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에서 즐기는 환상. 누아르 제벨라는 수백만의 맹목 위에 서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갈X는 미쳤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래도 미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니스를 놓아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더 미치기 전에 죽여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아니스의 눈을 뒤로하고, 유진은 고개로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라이언하트로 돌아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감정을 가다듬고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 으흠, 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계속해서 헛기침만 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마지막으로 모론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바벨에서, 내 첫 번째 성기사이자 유일한 대전사인 너를 부를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그래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준 빛과 함께 그날을 고대하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으로 길어야 1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이 산에서 보냈던 지옥 같던 수백 년에 비하자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날이야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웃으며 유진에게 주먹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하멜, 너와 함께,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도 씩 웃으며 주먹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툭. 서로의 주먹이 가볍게 닿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만에 돌아온 저택은 유진의 기억 속과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이 저택은 어떻게 되는 걸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1년 전에는 그럭저럭 옛 저택의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흔적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엇보다 유진을 껄끄럽게 만든 것은, 저택 부지 내의 극심한 부조화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쪽은 대수림의 따귀를 갈길 수 있을 정도로 울창한 숲. 우뚝 솟은 요정목이 세 그루. 그냥 요정목만 하더라도 엔간한 나무보다 훨씬 크게 자라는데, 심지어 저건 세계수의 묘목이다. 유진은 숲의 하늘 대부분을 덮기 시작하는 무성한 나뭇가지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쪽이 활력 넘치는 자연 그 자체인 것과 달리, 반대편에 자연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체 모를 기계장치가 열심히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벨트 위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날라지고 있다. 검, 창, 도끼, 화살, 방패 같은…… 그런 무구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쪽에는 이런저런 광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 귀하다는 미스릴이 마치 길바닥 돌멩이처럼 흔하게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을 얇게 뜨고서 그곳을 지켜보았다. 굵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다니는 드워프들…… 거기에 누군지 모를 사람들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이 누군고 하니, 모두가 백색마탑 소속의 정령사들이었다. 그들은 익숙하게 드워프들을 보좌하며, 완성된 장비와 세공품들에 마법을 부여했다. 몇몇은 아예 한편에 공방을 차리고 드워프들과 협업까지 하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 현 백탑주인 멜키스 엘하이어가 대정령사이기는 하다만, 애당초 백색마탑은 정령술뿐만 아니라 연금술도 다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어…… 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1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저택 부지는 난잡했다. 유진이 데려온 엘프들과 세계수의 묘목은 라이언하트의 숲을 너무 과격하게 성장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라이자키아의 시체를 가공하기 위해 데려온 10명의 드워프들. 그들은 작업 효율을 위해 저택 부지 한편에 공방을 차렸는데, 문제는 공방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과가 좋기는 한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의 묘목들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덕에 라이언하트의 숲은 대륙 제일의 영맥이 되었다. 그 수혜는 라이언하트가 그대로 독점하고 있고, 단순 효율만 따지자면 백사자, 흑사자들이 평생 수련해 쌓은 마나보다 최근 몇 년 동안 쌓은 마나가 더 질적으로 우월할 정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워프의 공방도 미관은 해칠지라도 결과는 훌륭하다. 덕분에 라이언하트 전원이 드래곤 소재의 장비로 무장했고, 앞으로도 드워프들의 작품을 독점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것이 끝나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족 모두 같이 이사 갑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을 제쳐두고, 직접, 혼자서, 유진을 마중하겠다고 자처했다. 당연히 극 이유는, 1년 동안 저택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이라면, 그것이 언제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제가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멸망의 마왕을 죽이면 끝이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 힘들겠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많이 힘들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마중 나온 애니실라를 보자마자 도망쳐 버린 세냐와 성녀들을 떠올렸다. 세냐는 오라버니와 해후해야 한다며 도망쳤고, 성녀들은 미리 와있는 교황에게 볼일이 있다며 가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사라, 그것참 좋구나. 어디 생각해둔 장소는 있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애니실라 님이 원하시는 곳이면 뭐든 좋습니다. 만약 애니실라 님이 성을 원하신다면, 오늘 연회에 와 있는 스트라우트 2세의 멱살을 쥐고서 황궁을 비울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는 처음과 똑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에도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애니실라는 이사 자체가 그리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은 느낄 수 있었다. 저번의 애니실라는 그냥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이사를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다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늘한 살의를 느꼈다. 폭력과는 동떨어지는 원념의 살의. 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면 교황청은 어떠십니까? 유라스 거기가 은근히 살기 좋아요. 도시 중심이기도 하고. 워프게이트가 없다고 알려져 있기는 한데,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교황청 지하에도 워프 게이트가 있어요. 없으면 뭐 새로 만들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소를 유지하며 잠자코 듣고 있던 애니실라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이 좋겠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쑥 내뱉은 말. 곡선을 그리고 있던 눈이 살짝 열리며 눈동자가 보였다. 섬뜩한 시선이 유진의 피부를 핥았다. 그 시선은 유진이 평생 보았던 그 어떤 마안보다도 심부를 파고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 바, 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바벨이 제가 아는 바벨이 맞을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아는 바벨이 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아는 바벨은 하나뿐이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벨을 성이라고 할 수 있나? 유진은 저번에 헬무드에 갔을 적에 보았던 바벨을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99층에 달하는 고층빌딩…… 하지만 지금의 애니실라에게, 바벨은 성이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가는 저 손의 부채가 아작이 날 것이 틀림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바벨은…… 예…… 무너지지 않고 멀쩡히 남아 있다면, 예. 아래층은 기사들 쓰라고 하고, 위층은 저희가 쓰면 되겠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상층의 어전을 가주를 위한 집무실로 쓰면 참 멋진 일일 것이야. 상징적이기도 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유폐의 마왕을 죽이고서도 바벨이 멀쩡하게 남아 있을까? 다른 것보다 유진은 그것만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전투의 여파를 버티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거나…… 심할 경우는 용마성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 전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 아니, 애당초 지금의 바벨은 유폐의 마왕이 있기에 존재하는데, 유폐의 마왕이 죽는다면 바벨도 통째로 소멸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새로 지어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니실라가 저렇게 말하는 이상, 바벨이 소멸할지라도 그 자리에 똑같이 99층의 빌딩을 세워야 한다. 애니실라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의미도 충분하다. 바벨에서 죽은 하멜이, 그리고 용사의 후손인 라이언하트가- 300년을 넘어 바벨을 정복하고, 그곳을 영지로 삼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하면 할수록 괜찮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바벨이 소멸해도 새로 지으면 되지. 99층은 너무 높으니까 10층 정도로…… 아니, 10층은 너무 낮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생각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백색마탑 마법사들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없고 세냐 님도 안 계시면 누가 멜키스 님을 억제할 수 있겠느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있었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없을 때 성녀님은 몇 주 동안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셨단다. 그 사이에 멜키스 님이 들이닥쳐 이런저런 일들이 진행되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에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큰 이득을 얻었다. 백색마탑과의 적극적인 교류로 숲의 엘프들은 정령술을 익혔고, 기사 중에서도 뒤늦게 정령술에 개화한 자들이 늘었다. 또한 연금술과 마법이 가미 된 드워프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라이언하트의 소유물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됐네요. 제가 엘프들과 드워프를 데리고 온 덕에 가문이 풍족해졌…….”&lt;/p&gt;&lt;p&gt;&lt;br /&gt;&lt;/p&gt;&lt;p&gt;뿌득.&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부채가 부서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애니실라가 이를 악무는 소리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끝까지 말하지 않고 냉큼 말을 바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연회장으로 돌아가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라이언하트 저택에는 빈객이 많다. 여태까지 유진을 한 번이라도 봤던 왕들은 모두 참석했고, 키옐의 황제와 유라스의 교황까지 왔다. 그리고 며칠 전 라구르야란의 결투장에서 직접 참석했던 관중들에, 유력한 방계 가문의 가주와 자식들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엘프를 사용인으로 쓴다더니…… 진짜였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의 황제. 스트라우트 2세는 귀빈석에 앉아 엘프들을 보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도심에서 엘프를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나돌아다니는 엘프는 대부분이 노예로서 사냥당해 감금당해 있고, 다른 엘프들은 인적 없는 숲이나 산에 숨어 살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라이언하트가 엘프족의 후원자가 된 후로부터는 종족의 사정이 크게 변했다. 국가가 노예법을 금했음에도 음지에서 벌어지던 엘프 사냥이, ‘라이언하트’의 이름 앞에서는 뚝 멎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는 알고 있다. 라이언하트의 이름도 이름이지만, 음지에서 지저분한 일을 도맡는 흑사자 기사단.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이름. 대수림에서 활동하던 사냥꾼들은 유진이 현명한 세냐의 후계자란 것보다, 바야르 부족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것을 껄끄러워해서 사냥을 중지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그 당시로서는 스트라우트 2세는 엘프에 관련된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소수 종족이라고는 해도 일개 가문이 한 종족의 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심지어 일국의 법보다 큰 위력을 행사한다니…… 심지어 대수림의 야만부족과 연을 맺었다고? 알체스터의 만류가 없었다면, 스트라우트 2세는 뭐든 핑계를 붙여서 유진 라이언하트를 한번은 털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행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 알체스터는 유진과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알체스터는 유진을 두둔했다. 알체스터 딴에는 라이언하트에 대한 의리와, 한참 젊은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알체스터의 만류는 스트라우트 2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만약 그때 핑계를 대서 유진을 불러 앉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스트라우트 2세의 귓가에 목소리가 꽂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키옐 황제라는 체면도 잊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느 틈인가 스트라우트 2세의 옆에 유진이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 유…… 유진 라이언하트…… 경.”&lt;/p&gt;&lt;p&gt;&lt;br /&gt;&lt;/p&gt;&lt;p&gt;“뭔 경이야, 콱 씨, 님이라고 안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왜 결투 때 안 왔어? 알체스터 경은 오셨는데, 너는 뭔데 안 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에 힘을 주고서 스트라우트 2세를 쏘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게 상식적으로 올바른 꾸짖음인가? 스트라우트 2세는 황제다. 아무리 그 결투에 대륙의 명운이 걸려 있을지라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결투장에 직접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에 하나 유진이 패배하고, 가비드와 마족들이 관중들 전원을 살해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무리 그래도 짐에게도 입장이란 것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장? 알체스터 경은 직접 오셨는데 넌 왜 안 왔냐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알체스터에게는 존칭을 쓰면서 황제인 나에게 이렇게도 무례하게 구는 것일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트라우트 2세는 그것이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래도 몇 년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나마 황제로 대우해 주었는데…… 하멜의 환생이란 것이 알려진 후로는 그 최소한의 대우마저 사라져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짐만 안 간 것이 아니라, 유라스의 교황과 시무인, 아롯의 국왕도 안 갔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세리스는 남쪽 끝에서 오기 힘들 것 아냐. 더운 나라에서 평생 살았으니 북쪽에 왔다가는 얼어 죽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교황은 너무 늙었고. 아롯 다인돌프는 대신 호네인 왕세자라도 보냈지. 넌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짐도 알체스터 경을 보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 경이 왕족이야? 네 아들이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눈에 힘을 주고서 쏘아붙였다. 어깨를 부르르 떨던 스트라우트 2세는, 이 대화에서 자신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왜냐면 이미 유진은 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트라우트 2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죄송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앞으로는 죄송할 일 없게 잘하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툭툭. 유진은 스트라우트 2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애니실라에게 받은 갈굼. 그로 인한 울적함이 말끔히 가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참으면 병나. 가끔은 분출해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령 원인제공을 자신이 직접 했을지라도.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들으라고 하는 건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트라우트 2세는 모든 것이 억울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유진처럼 묵은 감정의 분출이란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병이 날 때까지 참는 게 나을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들으란 듯이 헛기침을 뱉었다. 그러자 연회장의 수많은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크리스티나는 먼저 도착했고, 유진만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점. 참석한 모두가 유진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침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무도 유진이 도착했음을 몰랐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진정들 하시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왁자지껄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전. 유진이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뿐인데도 모두들 목소리를 멈췄다. 등이 움푹 파인 드레스를 입은 멜키스조차도 깍깍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을 정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연스러운 위압. 지금의 유진에게는 그런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연회장의 뒤편. 보란 듯이 장식으로 우뚝 선 플래티넘 라이온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것을 볼 때마다 그냥 부수거나 녹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길레이드는 저 화려한 플로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창고에 넣어두시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플래티넘 라이온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높은 자리가 없나 찾아봤는데, 애석하게도 연회장에서 가장 높은 곳은 플래티넘 라이온의 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노린 것일까? 유진은 그만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라이언하트에서 그런 일을 주도할 만한 위인은 단 한 명뿐. 유진은 즉시 카르멘을 찾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이 마주친 카르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진은 카르멘에게 한 점의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도저히 뭐라고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유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플래티넘 라이온의 위에 올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올라가기 싫으시면 그냥 하늘에 떠 계시면 되잖아요. 아니면 그냥 땅에서 말씀하시던가. 어차피 모두가 유진 님을 보고, 유진 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꼭 여기 설 이유가 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 저는 잘 알아요. 지금 유진 님은 자신을 속이고 계세요. 아니, 지금뿐만이 아니죠. 유진 님은 대부분의 일들에서 항상 자신을 속이세요. 하기 싫은데~ 라고 말은 하면서도 내심 즐기고 계시죠. 지금도 그렇잖아요. 어쩔 수 없네, 카르멘 님이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실은 화려하고 높은 곳에서 선망받는 것을 즐기시는 거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음대로 지껄여라. 유진은 마음을 다스리며 망토 안에 손을 넣어 메르의 뺨을 꼬집었다. 저 당돌한 꼬맹이가 지껄이는 모든 말은 음해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보다 은자가 존귀하니, 은자가 당연 화려하고 높은 곳에서 모두의 선망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이 새끼는 왜 항상 내가 놀리고 나서 유진 님의 편을 드는 건가요? 비겁한 도마뱀 같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녀는 솔직히 말하는 것뿐이니라. 헌데 은자여, 은자의 존귀함을 과시하기에 이 조형물은 너무나 초라하구나. 차라리 드래곤인 본녀의 머리 위에 서는 것이 어떠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영악한 새끼, 네가 관심받는 것에 유진 님을 이용하지 마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르와 라이미르아가 망토에서 투닥투닥 다투기 시작했다. 유진은 시끄러운 망토의 소음을 무시하고서 플래티넘 라이온의 머리 위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기 와 계신 손님들 중 상당수는 라구르야란의 결투장에도 오셨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먼저 그렇게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의 중계가 얼마나 잘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결투하던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연회장의 사람들이 눈을 빛내고 귀를 열고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신이라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먼저 그것을 선언했다. 자연스럽게 유진의 시선은 교황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이 선언을 불편하게 생각하고서 나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교황과 추기경, 라파엘로의 곁에는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핑계를 대고 도망친 줄 알았는데, 미리 만나서 말해둔 모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라니…… 갑자기 무슨…….”&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유가 아니라, 진심으로 했던 말인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군중들이 웅성거렸다. 그렇게 웅성거리는 것은 결투장에서 직접 본 사람들이 아닌, 중계를 통해 결투를 본 사람들이었다. 정작 알체스터처럼 직접 결투를 본 사람들은 유진의 말에 의문을 느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의 결투, 유진이 뿜어대던 불꽃과 힘은 신위(神威)라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제가 신이 되었으니, 연회를 즐기기 전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망토에서 레반테인을 꺼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게 직접 세례받아 교인이 되고, 성기사가 되고 싶은 분이 있으시다면 이 앞에 줄을 서주십시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부 해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준을 두고서 선별하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숨을 삼키며 손을 번쩍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그럴 줄 알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쪽으로 오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연회장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세냐와 함께 1년 만에 대수림에서 귀환한 그녀는, 외견 자체는 대수림에서 헤어졌을 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1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깊이를 느꼈다. 인간에게 있어서 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카르멘이 보낸 1년은 수십 배를 넘는 밀도를 가졌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어긋났을지는 모르지만, 카르멘이 겪은 체험은 가비드와 비슷하다. 현자와 세계수의 마법은 시공을 넘어 거신을 불러왔고, 카르멘은 셀 수 없는 죽음을 반복하며 기나긴 시간 동안 거신에게 도전했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이 플로트의 아래로 왔을 때. 유진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제한하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신을 쓰러트리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그 사실이 굉장히 궁금했다. ‘진짜’와 비교할 수는 없다지만 현자가 불러낸 거신의 기억이다. 당장 가비드만 해도 아가로트의 환영과 전투를 반복해 마족을 초월했는데, 과연 카르멘은 어떨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마지막까지 그 거대하고 위엄찬 남자를 쓰러트리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한 대답이었다. 방법이 비슷할지언정 카르멘과 가비드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가비드는 마족이고, 카르멘은 인간이란 것이다. 아무리 그 수행에서의 죽음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고, 카르멘의 정신력이 강한들, 이런 종류의 수행법은 인간이 감당하기 버겁다. 골백번의 죽음을 반복한다면 카르멘이라도 정신이 붕괴해 버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쓰러트리지는 못했어도 많은 것을 얻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위대한 자에게 수십 수백 번 도전하고 패배하면서, 나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초라한 약자에서 거듭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직접 체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유진은 카르멘의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염식. 카르멘의 백염식은 유진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바뀌어, ‘별’의 숫자로서 구분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깨닫고 말았다. 라이언하트의 백염식. 경지를 구분하는 ‘별’이란 결국 허상이란 것을. 무턱대고 별의 개수를 늘리는 것에만 집착한들, 진정한 강함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힘 있는 목소리는 비단 유진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회에 참석한 모든 라이언하트를 위해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 라이언하트의 시조, 위대한 베르무트께서 창안한 백염식은- 결국은 그분에서 시작이 되고 완성된 것. 시조께서는 우리 후손들을 위해 백염식과 적염식을 계승시켜주셨다. 당연히 우리는 백염식이야말로 정통하고, 적염식은 급이 떨어진다고 여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방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에는 수많은 방계 가문이 있지만, 연회에 참석한 가문들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유력한 가문들이다. 심지어 함께 참석한 흑사자들은 절대 다수가 방계 출신이고, 가문의 위세와 상관없이 실력을 인정받은 라이언하트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카르멘의 말은 가문의 출신을 가르는 지독하고 쓰린 발언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나 카르멘 라이언하트는 당당히 말하겠다. 실제로 나는 과거에 그렇게 생각했다. 가문을 잇는 본가가 백염식을 계승하며 정통성을 지키고, 가지처럼 뻗어 나간 방계는 적염식을 익혀 본가를 거스르면 안 된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흑사자는 그러한 가문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존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성기사 서임이나 진행하고 싶은데 왜 카르멘의 웅변회가 된 것일까. 유진은 내심 그런 생각을 했지만, 차마 카르멘의 웅변을 멈출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나는 우화를 통해 깨달았다. 우리가 정통이라 여기던 백염식조차도 극성으로 익힌다 해서 결코 시조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시조께서 가문을 위해 남기신 백염식과 적염식은, 결국 라이언하트의 무(武)가 나아갈 지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더 이상 방계는 웅성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카르멘의 웅변을 들었다. 가주인 길레이드와 원로원주 클라인조차도 진지한 얼굴로 카르멘의 웅변에 귀를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의 시조께선 위대한 영웅이셨지만,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조건 시조께서 걸으신 길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은 틀린 것이다! 백염식과 적염식, 두 개의 수련법에만 매달리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별’을 퇴색시키는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는- 누구나 가슴에 빛나는 별을 지니고 있기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유진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계 중의 최강자, 제노스는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카르멘의 웅변을 듣고 있었다. 길레이드조차도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위대한 베르무트가 아닌, 카르멘 라이언하트라는 별을 완성하고 싶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늘 높이 뻗은 주먹이 펼쳐졌다. 아직 해가 중천이어서 하늘이 맑았지만, 하늘을 향해 뻗는 손가락은 마치 밤하늘의 별을 쥐려는 것처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정 자신의 별을 찾고 싶은 자들은 내게 오라. 본가도, 방계도 상관없다. 백염식과 적염식이란 틀을 떠나, 단 하나의 찬란한 별을 갖는 것이야말로 우리와 라이언하트를 위한 것. 나는,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시조 베르무트께서 꿈꾸던 미래라 믿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카르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백염식을 극성으로 익힌들 베르무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후손들에게 전해진 백염식과 베르무트가 직접 쓰던 백염식은 큰 차이를 갖고, 인간은 결코 진짜 백염식을 사용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언젠가는 백염식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유진도 그랬다. 본래 7성이었던 유진의 백염식은 다양한 전투를 거친 뒤에 별의 개수가 무의미해졌다. 지금 유진의 안에서 백염식의 별이 있던 자리에는 무한히 펼쳐진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은 유진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백염식만 익히지 않았고 이터널홀을 이해했으며, 하멜로서의 경험과 아가로트의 신력까지 녹여낸 것으로 우주를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라이언하트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만- 카르멘의 경우를 보건대, 저런 형태로 백염식을 진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베르무트가 의도한 것은 옳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 6성에 이르러 들어가는 암실만 하더라도 백염식을 자기 자신에게 특화시키는 것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적염식에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결과물에 따라 다르겠지만 본가와 방계의 간극이 크게 줄어들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된다면 본가가 가진 백염식의 우월성은 경지가 낮을 때에 방계와 커다란 격차를 낳게 된다는 것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라이언하트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라이언하트의 영광, 대륙의 미래, 계승되는 의지. 그 모든 것을 담아, 카르멘은 힘을 주어 외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성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외침과 함께 하늘을 향했던 손이 주먹이 되었다. 지금, 카르멘은 그녀의 ‘별’을 거머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성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은 다시 외쳤다. 그 뜨거운 외침이 모두를 움직였다. 제노스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부전여전이라고 옆의 제니아도 똑같이 주먹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성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연회장의 모든 라이언하트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유진의 귀환과 결투의 승리를 축복하기 위해 도모된 연회가 졸지에 라이언하트의 단합장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성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두가 똑같은 뜻으로 외치는 말. 라이언하트 자체가 환생한 하멜을 위한 가문. 이후 성장한 라이언하트는 자연스레 하멜을 위한 선봉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베르무트가 그렸던 미래일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령 그럴지라도.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플래티넘 라이온의 위에서, 카르멘에게 감화된 라이언하트의 뜨거운 외침을 듣고 있는 유진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진심으로 말하자면, 유진은 그냥 귀를 막고 도망이나 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찬란한! 유진 라이언하트를 위해! 대륙의 미래를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격정을 담아 사명을 외치며, 타오르는 금색 눈동자로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성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시선에서 무언의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저항이 불가능했다. 라이언하트뿐만 아니라,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유진의 결의를 듣고 싶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유진은 머뭇거리다가 주먹을, 아니, 레반테인을 하늘로 치켜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 각성하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오오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라이언하트가 열광했다. 유진은 두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열의에 찬 환호가 멈추고서야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서임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까지 피를 토할 듯 격렬히 외쳤던 카르멘이지만 지금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유진은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임 자체는 모론에게 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때처럼 첫 번째 성기사이자 대전사를 운운하지는 않았지만, 얇게 타오르는 검신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방식이다. 그렇게 서임을 하면 레반테인의 불꽃이 상대에게 스며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신화(神火)를 옮기지만, 정작 유진의 신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서임을 통해 신화를 옮길 때마다, 유진의 신력은 충만히 차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르멘 다음으로도 서임은 계속됐다. 백사자 기사단과 흑사자 기사단, 다로 기사단 소속이 아닌 방계의 가주들에게 서임을 내렸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서임은 라이언하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수왕 아만을 필두로 루하르의 하얀 송곳니 정예에게 서임을 내렸다. 아이빅과 용병들에게도 서임을 내렸다. 오르투스와 격랑 기사단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었지만, 서임받은 자들이 몸 안에 자리 잡은 신화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선 결국 유진의 앞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체스터와 백룡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우트 2세는 정말 서임까지 묵인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했다. 오직 황제만을 섬기기로 맹세하고, 황제가 직접 서임 받은 알체스터와 백룡 기사단이 유진에게 통째로 빼앗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을지라도 스트라우트 2세는 서임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유진에게 한 소리 듣는 것도 두려웠고, 세상을 위해서도 서임은 묵인해야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외로 망설인 것은 이바타와 조란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대수림과 세계수다. 아무리 유진에게 경의를 느낀들, 평생 다른 종교와 연을 맺지 않은 대수림의 부족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신에게 서임 받는 것은 여러모로 낯선 일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이바타가 어떤 이유로 망설이는지 짐작하고 먼저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세계수랑 직접 만나본 사이인데, 세계수도 괜찮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짓말 아니라 진짜야. 내가 뭐 너희 주신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필요하고 좋으니까 잠깐 계약 비슷한 것 하는 거잖아. 그러다가 나중에 전쟁 끝나고 만족스러우면, 부족 전체의 신앙에 대해 다시 논해보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리 아쉬울 것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실제로 아쉽지는 않았다. 예전에야 이바타를 통해 조란 전체를 종교국가로 개조해서 신앙을 수급할까 생각했지만, 지금의 유진은 빛뿐만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바타는 그런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사로서 유진을 존경했고, 서임 받은 기사들에게 스며드는 신화도 탐이 났다. 결국에는 이바타를 시작해서 조란 전사들 정예가 유진에게 서임받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파엘로와 혈십자 기사단에게는 따로 서임을 내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빛의 성기사. 유진이 서임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신력을 공유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에우리우스 교황과 라파엘로는 미리 성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들은 모든 진실까지는 듣지 못했다. 성녀들은 애초에 저 완고한 광신도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고, 적당히 거짓을 꾸미는 것을 선택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는 빛을 직접 만났다. 빛의 화신이 되었다. 유진과 빛은 한 몸이 되었으며, 빛은 유진이 시대를 밝히는 새로운 신이 되도록 신명을 주었다……. 사실 무조건 거짓뿐인 말도 아니었고, ‘진짜’ 성녀가 저렇게 말하는 이상 교황이라고 해서 의문을 품을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왜 안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사와 용병, 전사들의 서임이 끝난 뒤. 서임을 받기 위해 나왔다가 거절당한 멜키스가 울상을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지금 마법사 차별하는 거야? 무기 휘두르는 놈들은 성기사가 될 수 있는데 마법사는 성기사, 아니, 성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세상에 성마법사라는 이름이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생각이 활짝 열린 사람이야. 성마법사가 없다면 내가 최초의 성마법사가 되어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소리 말고 들어가 계세요. 저는 마법사한테 서임 못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는 너도 마법 쓰잖아! 유진이 너 그러면 안 돼, 네가 귀여운 꼬마였을 때 이 누나가 얼마나 잘 챙겨주었는데. 당장 네 시그니처, 그거 뭐야, 편익의 프로미넌스! 그거 만드는 걸 도와준 사람이 이 멜키스 엘하이어 누나인데, 어쩜 누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멜키스는 사탕 달라 떼를 쓰는 아이처럼 졸라댔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사 서임은 제가 아니라 세냐가 할 겁니다. 멜키스 님도 저한테 서임받는 것보다 세냐한테 서임받는 것이 좋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즉시 멜키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유진의 앞에서 후다닥 물러나, 한가로이 차를 마시던 세냐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마법의 여신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법의 여신이 되겠다는 것이 세냐의 바람. 그것은 금세기 대마법사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신격에 이르지 못했을 텐데, 1년의 은거를 통해 결국은 신격에 이르른 것인가. 로베리안과 다른 대마법사들도 감격하여 세냐를 둘러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은 유진의 망신을 음미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폭탄을 돌릴 줄이야. 세냐는 유진을 흘겨보면서 말을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임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롯의 국왕 다인돌프와 왕세자 호네인까지 세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 여기서 말고. 다음에 아롯에서 해줄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고서 대답했다. 유진이야 아가로트일 적의 경험도 있고 빛의 도움도 있지만, 세냐는 갓 신격에 오른 몸. 서임 자체야 가능은 하겠지만, 해본 적이 없었기에 연습해 볼 필요를 느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임했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명한 마법의 여신’ 세냐 메르데인의 신화의 첫 단추부터 잘못되는 꼴이다. 세냐는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륙의 주역이라 하기에 충분한 자들에게 서임을 내렸다. 그 이상 서임을 통해 성기사를 양산하는 것은 불필요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저들이야 단련하며 갖춘 바가 있기에 신화와 어우러진 것이지, 괜한 어중이떠중이에게 서임을 내리는 것은 낭비나 다름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서의 서임은 모두 끝이 났지만, 연회가 끝난 뒤에 따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 시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목소리를 제한하여 둘을 불렀다. 그 부름에 시엘이 후다닥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본가 모든 사람들과 백사자, 흑사자, 방계까지 서임을 받았다. 오직 시엘만이 아직 서임을 받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이따가 해줄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뒤로 물러섰었다. 굳이 마지막까지 미룬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일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드디어 내 차례인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눈을 빛내면서 배시시 웃었다. 사뿐사뿐 다가온 크리스티나도 시엘의 곁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 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최대한 오해를 사지 않게 차분한 얼굴로, 그리고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회가 끝나면 내 방으로 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열심히 노력했지만, 오해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말을 해도 그딴 식으로 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저택 복도를 걸으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회가 끝나고 난 뒤의 새벽. 이 늦은 시간에 방에 찾아오라니, 오해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는 말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저 말을 한 사람이 비교적 멀쩡하고 평범한 남자라면, 시엘도 혹시, 싶은 오해를 조금이라도 강하게 품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상대는 유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유진에 대해 이런저런 아는 것이 많았고, 이전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매몰찬 거절까지 들어본 몸. 그렇기에 도저히 오해할 수도, 기대를 품을 수도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새끼는 마왕을 죄다 죽이기 전까지는 고자처럼 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시엘은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가 뭘까?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어서? 오히려 그러니까 더 활활 불태워야 하는 것 아닌가? 죽을 때는 죽더라도 죽기 전에 후회 없이 불꽃을 태워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차피 유진이 죽는다면 유폐의 마왕에게건 멸망의 마왕에게건 세상이 끝장난다. 남은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쓰건 저 마왕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더더욱, 모든 것이 허무히 끝나기 전에 미련이라도 남지 않도록 활활 타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없이 이어지려는 엄한 상상을 억지로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시엘은 유진이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은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그냥…… 절대로 멸망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의 날을 세우고 멸망을 막으러 나설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녀석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초에 유진 그 녀석이 정말로 사적인 이유로 방에 부른 것이라면, 나 혼자만 불렀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애당초 나를 부르기나 할까? 울적한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시엘은 필사적으로 그쪽을 무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만 부른 것이 아니잖아. 크리스티나 성녀 언니도 같이 불렀으니, 뭐…… 나름 중요한 일이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장소도 아니고, 방 안에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일단, 오해는 하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만약이란 것이 있으니까. 그래서 시엘은 연회가 끝나자마자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향수도 살짝 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굳게 닫힌 유진의 방문 앞.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제 뺨을 꼬집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둥 이상한 짓을 하는 크리스티나를 보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인지. 직접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쪽으로 흐르는 바람에서 술 냄새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은은하고 산뜻한 비누 향기. 저쪽도 만약에 만약을 대비해 목욕 재개를 한 것은 틀림없었고, 지금은 ‘누가’ 방문을 열고 들어갈지를 두고서 두 개의 인격이 한창 다투는 모양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흠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다툼이 얼마나 격렬한지 자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엘은 더는 보기가 괴로워서 몇 번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성녀는 쥐어뜯던 머리를 조용히 놓더니, 손가락을 빗 삼아 헝클어진 머리를 몇 번 쓸어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뭡니까? 옷을 새로 갈아입고, 향수까지 뿌리고. 대체 무슨 발칙한 기대를 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홱 돌아본 시선이 예리하다. 아니스다. 시엘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어깨를 으쓱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회가 꽤 길어졌잖아요? 씻고, 옷을 새로 입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이치고 꽤 묵은 향을 즐기는군요. 취향입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쓰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요즘 유행인 향이에요. 성녀님은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셔서 그런가, 아니면 성직자라서 그러신가요? 촌스러운 향이 나네요. 좋게 말하면 풋풋한 향이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표독스러운 말에도 시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 동안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흥.”&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꼬마 아가씨. 당신이 어떤 발칙한 기대를 품은 것인지는 뻔하지만, 기대처럼 되지는 않을 겁니다. 애당초 그럴 것이라면 하멜이 저와 당신을 같이 불렀을 리가 없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저는 아무 기대도 안 했어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아니스는 영 고깝단 눈으로 시엘을 흘겨보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건 결국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아니스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변명할 여지가 있긴 했다. 기대와 흥분으로 몸을 씻은 것도, 새 옷을 꺼내 입은 것도, 점잖지 않은 뛴 걸음으로 방문 앞에 선 것은 크리스티나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라며 당연히 나서려던 아니스에게 꽥 소리를 지르며 머리채를 잡은 것도 크리스티나다……. 아니스가 생각하기에, 그녀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들어갑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릿속에서 들리는 서러운 울음은 애써 무시했다. 아니스는 단 한 점의 기대도 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같이 들어갈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 둘을 같이 불렀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일단 제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보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저희 둘이 같이 불렀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물러서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추해지기만 할 뿐. 아니스는 쯧 혀를 차면서 문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방안의 풍경은 셋의 얕은 기대와는 판이했다. 로맨틱한 조명도 없었고, 가볍게 즐길 와인 같은 술도 없었다. 유진도 목욕가운 따위는 걸치고 있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 앞에서 뭐 그리 오래 있던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편해도 너무 편해 보였다. 그는 답답한 예복은 벗고 헐렁한 반팔 상의를 입었고, 한 손에는 큼직한 고기의 뼈를 들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유진은 연회 내내 고기만 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레이드는 결투가 끝난 뒤 유진이 부탁했던 말을 그대로 니나에게 전해주었고, 오늘 연회에는 오직 유진만을 위한 식탁이 따로 준비되었다. 많아도 너무 많은 고기의 산…… 유진은 그곳에서 챙겨둔 고깃덩어리를 한 입 더 크게 베어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그러고 있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더듬더듬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의 양 손목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직접 손목을 베은 것이다. 저렇게 많이 흐르는 피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으니 반팔을 입은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혈(聖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라스에도 성혈에 관련된 성유물은 있다. 화신, 혹은 성녀의 피. 그 피를 담았다는 술잔이나…… 물론 아니스는 그런 성유물 대부분이 가짜라는 것을 안다. 드물게 존재하는 ‘진짜’도 도저히 성유물이라곤 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저것은 다르다. 유진은 ‘진짜’ 신이고, 저것은 틀림없는 신의 피. 성혈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도 더 이상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긴 탄식을 흘리며, 유진의 등 뒤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그마한 욕조. 안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그 안을 채운 것이 단순한 물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직접 파괴했던 샘을 이제 와서 다시 만든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가짜고, 이건 진짜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라스에서 파괴했던 빛의 샘. 그것은 역대 성녀들의 성유물을 여과기로 삼아 정제한 성수를 담아서 만들었다. 성녀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반복될수록 빛의 샘의 ‘성능’은 강해졌고, 역대 성녀들은 전신에 상처를 내고 빛의 샘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성수’를 받아들였다. 유라스는 그런 방법으로 성녀를 신성병기로 육성해 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유진이 만든 것은 ‘다르다’. 저 자그마한 욕조는 성녀의 유해 따위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 방울로도 용혈(龍血)이나 엘릭서보다 값진 성혈을 아낌없이 사용한 ‘진짜’ 빛의 샘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기사의 서임은 대충 끝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적. 유진은 달라붙은 고기를 뼈채로 씹어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그가 신다운 불사력을 갖게 되었어도, 신력의 정수와 성혈을 왕창 쏟아낸 것은 피로가 극심했다. 먹어도 먹어도 아직 배가 고프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성녀를 새로 세례하지는 않았잖아. 그렇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도 느끼고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나나 세냐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 그리고 모론과도 다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압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의 능력과 힘은 신에 따른 것.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한들, 저희는 당신들처럼 강해질 수는 없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사라면, 마법사라면 몰라도 성직자는 홀로 강해지기 힘들다. 결국 성직자가 사용하는 힘은 신성력이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당신이 먼저 권해 올 줄은 몰랐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 저희의 자존심을 배려해 준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직접 찾아와 청하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준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저희에 대한 배려인 것을 압니다. 당신은 항상 그랬죠, 하멜. 내지 않아도 될 생색을 내면서, 내 마음을 배려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이 아닌 유진의 성녀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크리스티나의 육체에는 성흔이 늘었다. 그리고 이제는 유진이 빛의 신성마저 갖게 되었으니, 당연히 둘의 ‘성녀’의 능력도 커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끼고 있다. 이제 두 성녀는 한 번의 기도로 수십, 수백 명의 병자를 일으킬 수 있다. 잘린 팔다리와 부서진 내장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재생시킬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성녀의 능력이 커졌을지라도, 그 힘은 결국 유진에게서 받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이 성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앞으로의 전투에서, 성녀들은 유진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우리가 당신에게 새로 세례를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도 봐서 알겠지만, 나는- 빛의 모든 신력까지는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빛’을 담아내기 위해 제련한 것이 레반테인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사르는 레반테인의 불꽃은 너무나도 강해서, 유진조차도 전력을 끌어내기가 힘들다. 이그니션을 쓰지 않고서는 제대로 쓰는 것이 힘들다. 극한까지 뽑아내는 것은 이그니션을 쓰고서도 부담이 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으로는 부족한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기사와 성녀는 역할이 다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성흔의 욱신거림을 느꼈다. 이 성흔은 ‘진짜’다. 예전처럼, 빛의 샘에서처럼, 교황이나 추기경의 것처럼 억지로 새긴 것이 아니다. 신실하고 신앙하여 절로 새겨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은 강하다. 그는 빛과 전쟁신의 첫 번째 성기사가 되었고, 신의 대전사가 되었다. 하지만 유진이 말한 것처럼 성기사와 성녀는 역할이 다르다. 결국 모론에게는 성녀와 같은 ‘신앙’이 없기에, 성흔은 새겨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은- 나를 새로운 천사로. 크리스티나를 새로운 성녀로. 그렇게 우리 둘을 화신으로 삼으려는 것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빛의 신력은 너무 거대해서, 신성을 얻은 나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워. 나는, 내가 쓸 수 없는 신력을 너희에게 연결할 거다. 그리고 양손의 성흔을 문으로 삼아 신력을 뽑아낼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 너는…… 300년 전에 겪어봤으니 알겠지. 세례를 받으면, 기적을 쓸 때 아플 거야. 피를 흘릴지도 모르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은 300년 전 제가 성흔에서 피를 쏟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실 때마다 찾아와 상처를 돌봐주었지요. 그럼에도 당신은 제게, 크리스티나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온 질문에 유진은 한 번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뜨고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도 닦아주고 상처에 연고도 발라줄 테니까. 마왕을 다 죽일 때까지만 참아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핫.”&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아니스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옛날처럼 직접 상처를 돌봐준다면 얼마든지 고통은 감내하겠습니다. 애초에 이번 생에서, 당신은 항상 죽기 직전까지 고생했죠. 그런데도 성녀인 저희는 큰 고통 없이, 뒤에서 기도만 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것이 성녀의 역할일지라도, 유진 님만을 가혹한 사선에 세우는 것이 싫었습니다. 저도 유진 님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함께 싸우고 싶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저희는 이 세례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신이여, 감히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마왕을 죽일 때까지라고 하셨지요. 아니, 부족합니다. 모든 마왕을 죽이고, 베르무트 님과 세상을 구할 때까지. 저희는 웃으며 피를 흘리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욕실에서 뜯어 온 욕조에는 금색의 물이 고요히 담겨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핏물일 줄 알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물이랑 섞으니 저렇게 되더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성녀들을 빤히 보았다. 욕조 앞에 선 성녀들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 쯧 혀를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계속 보고 있을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욕조에 들어가는데, 옷은 벗고 들어가야 할 것 아닙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입고 들어가도 상관없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찝찝해서 싫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근데…… 몸만 담그고 끝은 아니란 말이야. 내가 너희 성흔을 좀 만지면서 조율도 해야 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답에 아니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300년 전에야 등만 보여주고 말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하멜에게 알몸을 선뜻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는 상관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크리스티나는 그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이건 굉장히 성스럽고 순결한 의식입니다……! 시스터께서는 대체 무슨 음탕하고 마귀스러운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스는 이제는 익숙한 음해를 무시하고서 욕조에 발부터 밀어 넣었다. 찰랑거리는 금색 물결이 발목을 지나 종아리를 적셨을 때. 아니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뜨거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부를 가르고 불길이 스며드는 것만 같다. 아니스는 한 번 호흡을 고르고서 욕조에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읏…….”&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크리스티나도 똑같았다. 분담하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우두커니 서서 그 모든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몸을 씻고, 향수를 뿌리고, 옷을 새로 입은 것이 멍청한 짓이란 것은 받아들였다. 지금 성녀들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쁜 호흡을 이어가고 있고, 유진은 그런 성녀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슬며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나는 갈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럴 거면 나는 왜 부른 거야? 시엘은 내심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이 그럴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란 것은 코흘리개도 알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긴 어딜 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닫힌 문으로 물러가던 시엘의 몸이 멈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리 가까이 와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빨리 와.”&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소답지 않은 고압적인 태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알 수 없는 설렘을 느끼며 슬금슬금 유진에게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둥실 떠오른 의자가 유진의 앞에 놓였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시엘은 침을 꼴깍 삼키며 의자에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릎과 무릎이 맞닿는 거리. 시엘은 코앞에 있는 유진의 얼굴을 보며 콩닥거리는 두근거림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과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시엘은 땀이 찬 손을 꾹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시엘의 눈에 유진의 오른쪽 뺨에 사선으로 그인 흉터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 흉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 린드먼과의 결투에서 남은 흉터다. 결투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팔다리는 순식간에 복원한 주제에, 저 뺨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작 유진은 뺨의 흉터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멜일 적에는 얼굴과 전신에 흉터를 가득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아주 조금, 흉터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런 흉터는 전사로서의 관록을 더해주기도 하고, 본판이 잘나도 너무 잘난 탓에 흉터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의 감상도 유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년 전에 비해 덥수룩해진 머리와, 오른쪽 뺨에 사선으로 그인 흉터와, 조금 더 날카로워진 눈매와, 오똑한 콧날…….&lt;/p&gt;&lt;p&gt;&lt;br /&gt;&lt;/p&gt;&lt;p&gt;13살 적부터 셀 수 없이 많이 봐온 얼굴이지만,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서 보고 있으니 묘한 감흥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아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흉터를 두고서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미 다 아물었는데 왜 아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환상통이라는 게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렇지도 않아. 간지럽지도 않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었다. 가뜩이나 가까운 거리가 더욱 좁혀지고, 시엘의 시야는 유진의 얼굴로 가득 찼다. 훅 다가오는 숨결. 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뒤로 몸을 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만히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큼직한 손이 시엘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거리를 벌릴 수가 없었다. 이 상황. 시엘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설마? 이 묘하게 강압적인 태도. 진지한 표정. 어깨를 잡은 손아귀의 악력. 이렇게 사로잡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시엘에게 간질거리고 알 수 없는 설렘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 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입술이 찰싹 닿는다. 설마, 설마. 수백 수천 번 품었던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일까? 시엘은 혹시 모를 기대를 느끼고서 입술을 슬며시 내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뒤에 놓인 욕조에서는 성녀들이 성수에 잠겨 고통을 참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서 흘러나온 신음은 시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 시엘의 눈에는 오직 유진만이 보였고, 귀는 유진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 크게 떠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 눈은 갑자기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긴 왜야, 마안 좀 보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새끼가 그럴 리가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엘은 은근히 내밀고 있던 입술을 집어넣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유진이 시킨 대로 왼쪽 눈을 크게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안 검사는 저번에도 했잖아. 이제 와서 또 하는 이유가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다르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러셔. 참 잘 나셨네. 그런데 네가 하는 거야? 세냐 님은 어디 가셨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걔는 숲의 엘프들한테 갔어. 1년 만에 다시 보는 것이기도 하고, 세계수에서 겪은 일들도 보고할 겸.”&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재 라이언하트의 숲에 사는 엘프들 중에는 마병(魔病)에 걸린 엘프들이 많다. 당장 엘프들의 대표 역할을 맡은 시크나드도 마병에 걸렸다. 그들은 자의와 상관없이 이 숲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세냐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300년 전 전쟁이 끝났음에도 마병은 사라지지 않았고, 유폐의 마왕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손을 뗐다. 과연 그것이 진실일지 아닐지는 모를 일이지만, 엘프를 가족으로 여기는 세냐로서는 마병만큼은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에도 몇 번이나 치료를 시도했지만 성공한 적은 없다. 마법으로도, 신성마법으로도 엘프의 마병은 고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법의 신성에 도달한 지금이라면 혹시 모를 일. 그래서 세냐는 지금 엘프의 마을에 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 좀 더 크게 떠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이상 어떻게 더 크게 떠? 이거보다 크게 뜨려면 눈 찢어야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근히 눈이 작네……. 어릴 때는 되게 컸던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중얼거리는 말에 시엘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는 참지 않고 발끝을 세워 유진의 다리를 걷어찼다. 효과는 없었다. 유진의 다리는 고목처럼 단단해서, 걷어찬 시엘의 발만 아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만히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자가 덜컹, 흔들렸다. 유진은 시엘의 어깨를 조금 더 강하게 쥐면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자 둘은 정말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또다시 시엘의 시야에 유진의 얼굴이 가득 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피부…… 피부 괜찮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매일 땀 흘려 수행하는 몸.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탱글탱글하고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지만, 시엘은 괜한 걱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진은 시엘의 피부 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집중해서 시엘의 왼쪽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유진의 오른손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엷은 불꽃에 휘감긴 손이 시엘의 뺨을 지나, 왼쪽 눈동자로 향했다. 시엘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대로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시엘의 왼쪽 눈동자에 닿았다. 홍채에 불꽃이 닿았음에도 화끈거림은 없었다. 오히려 눈을 씻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직.&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꽃을 이룬 신력이 시엘의 눈동자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이리스 전 이후로 시엘의 눈동자에는 2개의 마안이 깃들었다. 아이리스가 가졌던 암전의 마안과, 누아르가 이름 붙인 부동의 마안.&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마안들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시엘에게 문제없이 깃들었다는 것은 그때 확인했다. 그러니 치료할 필요는 없다. 그러고 싶어도 치료할 수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마안을 갖게 된 경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유진은 월광검의 폭주에 휘말렸다. 의식은 어딘지 모를 허무로 날아갔고, 육체는 월광검과 동화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유진을 구한 것이 시엘이다. 라이언하트의 피가 월광검에 감응했고, 시엘의 의식은 유진과 마찬가지로 허무로 날아갔다. 그렇게 시엘은 베르무트와 잠시 만났고, 유진과 함께 허무를 빠져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마안은…… 아마 베르무트가 준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시 베르무트는 유진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상황 자체는 인지하고 있던 모양이다. 마왕과의 전투. 고전을 면치 못하던 전황.&lt;/p&gt;&lt;p&gt;&lt;br /&gt;&lt;/p&gt;&lt;p&gt;왼쪽 눈동자를 부수고 들어 온 어둠이 눈동자에 녹아들어 암전의 마안이 되었다. 그렇다면 부동의 마안은? 그때 판단하기에, 저 부동의 마안은- 시엘의, 정확히 말하자면 시엘이 가진 라이언하트의 피에 처음부터 깃들어 있던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언하트는 인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허무 속에 앉은 베르무트와, 라이언하트의 시조와 만난 것으로 시엘의 마안이 발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 시엘의 마안을 없앨 수는 없다. 부동의 마안은 몰라도, 암전의 마안은 바벨에서 모론을 불러올 때 필요하다. 만약 시엘을 성기사로 서임한다면 마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유진은 우선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이 마안을 통해 다시 한번 베르무트와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여태까지 몇 번이나 베르무트와 만났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상태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프면 말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시엘의 눈동자를 더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프지는 않다. 화끈거림도 없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처음에야 눈이 시원했지만, 불꽃이 스며들수록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참을 만했다. 시엘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무릎을 움켜쥐었다. 유진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의식이 불꽃에 녹았다. 그는 육신을 떠나 시엘의 마안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마안의, 시엘의 심부로 잠수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과정에서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성기사로 서임할지라도 이 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것은 마족의 마안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 시엘만의 권능이 되어 있다. 설령 그 근원이 마(魔)에 의한 것이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불안정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낄 수 있었다. 라이언하트의 피에 존재하는 인자는 300년이 지났는데도 희석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오드 라이언하트가 떠올랐다. 가문의 수치. 마왕의 잔재에 홀려, 형제와 친척을 제물로 바쳐 마왕이 되려 했던 병신. 이오드가 극히 적은 제물로 의식의 완성을 목전에 둘 수 있었던 것은, 마왕의 잔재의 도움 때문만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오드가 라이언하트기 때문이다. 놈이 제물로 고른 것이 라이언하트였기 때문이다. 용사의 후손이라는 라이언하트의 피는 역설적이게도 마왕과 가깝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황하지 않았다. 베르무트의 근원이 멸망의 마왕과 밀접하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 하지만 라이언하트의 피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유진에게 여러 경각심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세상을 구하기를 원했다. 그런 것쯤은 300년 전부터 알았다. 놈은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았지만, 당시의 동료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 모두도 알고 있었다. 빛이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 베르무트는 용사다. 끝까지 성검은 놈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베르무트는 성검을 쥐고 마왕을 죽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놈이 왜…… 이렇게나 불안한 피를 남겼는가. 왜 어울리지 않게 열중하여 후손을 늘렸는가. 답은 알고 있다. 하멜을 후손으로 환생시키기 위해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염식을 계승시키기 위해? 가문을 통째로 넘겨주고 싶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육신이라는 시작을 주기 위해? 그런 이유도 있겟지만, 유진은 더욱 본질적인 이유에 주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는 단순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라이언하트의 피가 필요하다. 그래서 베르무트는 피를 남겼다. 3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유진 라이언하트’라는 그릇에 ‘아가로트’라는 내용물을 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편법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상했던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거리는, 익숙한 사슬 소리. 유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식으로 만난들 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의 옥좌에 앉은 유폐의 마왕이 보였다. 옥좌의 뒤. 마찬가지로 사슬에 칭칭 감긴 ‘문’이 보였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에는 유폐의 마왕과, 옥좌와, 문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곳은 유진의 방도 아니고, 시엘도, 성녀들도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식만이 날아왔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것을 바라였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참으로 집요하구나. 네가 ‘편법’으로 베르무트를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기억하고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월광검에 용언 마법을 썼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도 내가 너를 가로막았지. 그리고…… 월광검이 폭주했을 때. 생각해 보면 너에게 감사를 듣지 못했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큭큭 웃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내가 너를 붙들지 않았다면, 너의 혼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3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너의 아집과 실수에 의해 모든 것이 실패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작 너는 내 실패를 바라지 않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를 죽이지 않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약속에 공을 들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니. 이렇게나 공을 들였으니…… 기왕이면 나도 만족을 얻고 싶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자살이라도 하지 그러냐. 네가 혼자 죽어준다면 좋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조금 더 큰 소리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만족이 무엇인지 홀로 짐작하는 모양이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충 생각은 해봤지. 남들은 다 뒈지는데 혼자만 뒈지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세상을 정복해도 군림하지 못하고 멸망에 죄다 휩쓸리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네가, 왜, 베르무트와 약속을 맺어 300년이란 유예를 주었는지. 그로 인해 네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말없이 웃었다. 유진은 그 미소를 마주하고서 입술을 비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멸망을 끝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네가 아무리 강한 대마왕이라고 해도 멸망은 끝낼 수 없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든 것이 사라진 바다에서 혼자 남는 것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 앞으로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런 경험은 해본 적 없지만,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지. 아주 끔찍한 기분일 거야. 수십 년 주기로 겪는 것도 아니고 수백 수천 년을 반복해 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너에 대한 경외가 들더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멈추지 않고 유폐의 마왕 앞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대체 얼마나 죽고 싶어 했던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말없이 유진을 응시했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허무히 죽을 수는 없는 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갈망을 섣불리 결정하지 마라, 유진 라이언하트. 나는 네게 많은 자비를 베풀었지만…… 내가 평생에 걸쳐 품은 갈망을 속단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지나친 모독이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살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로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수 있다면 아주 오래전에 그러했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마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에 대해 말하고, 너의 감상을 끌어내고, 이해시키는 것은 내가 살아온 영겁에서도 손에 꼽을 즐거움이겠지만…… 지금의 네게는 그리 해 줄 이유가 없구나. 이곳은 바벨도 아니고, 너는 내 앞에 설 자격을 얻지 못했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는 것이 자격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를 죽이고서 바벨에 오르겠다 결정한 것은 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좋아. 널 이해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바벨에서 널 죽이기 전에 사연 정도는 들어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유폐의 마왕을 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나치려고 했지만, 치솟은 사슬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으로 들어가길 원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기 위해 여기 온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만난들 베르무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화가 가능할지도 확실하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사슬에 감긴 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그 새끼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온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끝낼 거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을 가로막았던 사슬이 천천히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지막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만남이, 내가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온정이다. 동시에 이건, 나 유폐의 마왕이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에게 갖는 동정이기도 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을 감은 사슬의 일부가 풀렸다. 그렇게 문이 살짝 열렸고, 유진은 그 틈을 향해 발을 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고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틈으로 들어가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한 번 감고,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에도 보았던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무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삭막한 세계.&lt;/p&gt;&lt;p&gt;&lt;br /&gt;&lt;/p&gt;&lt;p&gt;깊게 파인 상처의 중심.&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에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베르무트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러 감정이 북받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이나 지금의 베르무트를 보았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진짜’ 베르무트와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늦게 만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생각이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 라이언하트. 저 새끼와는 진즉에, 어떻게 해서든 한 번은 만났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잠깐이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아니.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상태일지라도. 환영이나 남의 기억에서가 아닌, 직접 한 번은 봐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허무로 나아갔다. 이곳은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세계다. 라이자키아가 처박히고 망령과의 전투에서 빨려 들어간 차원의 틈새와는 다르다. 이곳은 살아 있는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허무를 만든 멸망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지만 베르무트는 이곳에 있다. 유진도 의식일 뿐이지만 이곳에 도달했다. 유진은 그 사실을 굳이 해석하려 들지 않았다. 이미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는 일이고,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만에 이룬 해후를 잡스러운 생각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다시 한번 베르무트를 불렀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의식이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달은 했다지만 중심까지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멸망의 마왕을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다. 놈이 그저 바라만 본 것으로 절망과 광기를 끌어냈듯이, 이곳은-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절망과 광기가 치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억누를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 생전 처음 와본 것이 아니니까. 머나먼 과거. 유진이 유진이 아니고, 하멜이 하멜이 아니던 옛날.&lt;/p&gt;&lt;p&gt;&lt;br /&gt;&lt;/p&gt;&lt;p&gt;전쟁신 아가로트는 이곳에 왔었다. 신군에게 죽음을 명령하고, 그 모든 죽음을 본 뒤에, 아가로트 본인도 죽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이곳에서 죽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이곳이 어디인지 확신했다. 이곳은 아가로트가 죽었던 멸망의 마왕의 배 속. 멸망의 중심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베르무트가 앉은 곳을 주목했다. 움푹 파인 상처. 먼 옛날, 아가로트가 베었던 곳. 베르무트는 그 중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면 죽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까이 다가갈수록 말을 잇기가 힘들어진다. 걸음걸이도 무겁다. 간신히 쥐어 짜낸 목소리가 과연 베르무트에게 닿았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아무 말이라도 해야 했다. 베르무트가 듣고 있는 것인지, 대답할 수 있는 것인지는 당장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개새끼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왕이면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놈이 정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라면 어쩔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유진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베르무트에게 욕을 퍼붓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X새끼야. 내가 씨X, 너 때문에 얼마나 X같이 힘들었는지 아냐? 아오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이 개새야, 네가 진즉에 뭐라도 말했으면 지금 이 꼴도 안 났을 것 아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저 새끼는 그 계획을 정말로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꼭꼭 숨기고 있었다. 바벨에 오르기 전. 베르무트가 최소한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씹새야, 그때 네가 나한테, 절대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뒤에서 얌전히 숨이나 쉬라고 했으면 됐잖아. 어? 괜히 자살하려 들지 말고! 그냥 얌전히! 따라만 와서! 그냥! 같이 올라가자고만 하면! 됐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하고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당연히 유진은 화를 참지 않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그랬으면! 나도 병신처럼 자살하려고 들지 않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그랬을 것 같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갈라지고, 쉬어버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쏘아붙이던 외침을 뚝 멈췄다. 사슬에 묶인 의자. 어깨와 머리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베르무트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고 있던 눈동자가 뜨였다. 탁하고 바랜 금색 눈동자가 유진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유진의 숨이 멎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하멜이 기억하는 베르무트의 눈동자는 저렇게 탁하지도, 바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눈동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300년 동안 베르무트가 보낸 시간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고문이었는지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내가, 그때, 네게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하멜. 너는 정말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나는, 그때 네가 무슨 말을 했어도 듣지 않았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욱해서 쏘아붙이기는 했다만, 사실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바벨에 오르기 전 베르무트에게 언질을 들었다면. 가령, 바벨에서 무리하지 말라거나…… 반드시 살아서 유폐의 어전에 올라가야 한다거나…… 이런 말을 들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아주 조금. 듣는 시늉은 했을 거다. 그리고 베르무트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멋대로 해석했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리하지 말라고? 그런 얘기는 항상 들었던 말. 반드시 살아서 유폐의 어전에 올라가야 한다고? 그래, 뭐, 여기까지 5명이 영차, 영차 힘내서 왔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결국 거기서 죽었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거다. 당시 하멜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몸뚱어리로 더 이상 바벨을 오를 수는 없다. 동료들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 남들이 다 괜찮다고 말해도, 하멜 본인이 그런 처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하멜은 자살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 봐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입술이 움직였다. 메말라 갈라져 색이 없는 입술이 엷은 곡선을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어도…… 너는 듣지 않았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새끼야. 그럼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했으면 됐잖아. 그때 내 몸 상태도 병신이라 저항도 할 수 없었는데, 네가 나를 억지로 끌고 갔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해 봐라.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때…… 모든 것의 결말을, 추구하던 끝의 완성을 목전에 두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주 조금이었지. 아주 조금. 유폐의 방패는 죽였고, 유폐의 지팡이도 죽이기 직전. 남은 것이라고는 유폐의 칼뿐.”&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칼은 강하지만, 그는 정통적인 검사였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온갖 함정과 저주를 퍼붓던 유폐의 지팡이보다는 덜 까다로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베르무트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짓고서 유진을 향해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매사 철저했다고 생각한다만, 그 순간에는 아주 조금 긴장이 풀렸다. 이제 정말로 머지않았다고. 정말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는 생각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지팡이가 발악처럼 남긴 저주가 나에게 쇄도했을 때. 나는, 반응이 조금 느렸다. 하지만 피하거나 방어하지 못할 만큼 늦은 것은 아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순간에 네가 움직인 거다.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바벨에서부터 쭉 너의 움직임을 주목했다. 네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유폐의 지팡이와 싸웠을 때의 이그니션에 네 마지막 전투가 되리란 것도 알았다. 그래서 더욱, 그 순간에 너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내 판단으론 너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그 순간, 그 상태의 네가 움직여서 내 앞을 막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지. 그것이 300년 전, 내 두 번째 실수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그렇게 말하고서 눈을 감았다. 유진은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괜히 입술만 우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말은 대부분 옳았다. 유폐의 지팡이, 베리알과의 전투에서 하멜의 몸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부축이 없다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움직였다. 베리알의 저주가 베르무트에게 쇄도했을 때.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몸뚱이가 움직였다. 베르무트는 저 저주에서 죽지 않을 거다. 상처도 입지 않을 거다.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나는, 앞으로 계속, 이 병신같은 몸뚱이로, 모두의 등을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무트가, 모론이, 세냐가, 아니스가, 가비드 린드먼과 싸우고,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마왕성 바벨. 제 몸도 가누지 못할 병신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병신이 가만히 후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방해가 된다. 동료들은 절대로 하멜을 버리려 들지 않을 거다. 아무리 치열한 전투에서도, 하멜이 휘말리지 않도록 후방을 신경쓸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은 도저히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병신같은 몸뚱이를 들고서 동료들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미안.”&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알겠지, 베르무트. 그때 내가 몸을 던진 것은- 너를 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야. 그냥, 나는…… 죽고 싶었던 거다. 너를 구하고 죽는다는, 그런 등신 같은 만족을 얻고서 죽으려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감았던 눈을 뜨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은 네가 사과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너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나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된 자신의 삶을 끝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 너는…… 그런 성격이었지. 내가 방심했고, 판단이 느렸을 뿐이다. 최후에 네게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그 뻔뻔한 대답에 베르무트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베르무트는 마른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는…… 변하지 않은 것 같군.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오히려 300년 전보다 뻔뻔해진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뜸 한 살배기 애새끼로 환생해서 맨정신으로 코흘리개들이랑 어울리려면 뻔뻔해져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하. 네 환생을 안배할 때. 네가 아직 어린 나이에, 많은 것들을 참지 못하고 날뛰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가장 걱정되기는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마지막에 감정적으로 자살하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꽤 냉정한 사람이야. 내가 300년이나 흘러서 네 후손으로, 멀쩡히 전생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도 생생하다. 하멜로 죽고, ‘응애’ 소리를 내며 깨어났을 때. 멋대로 울음이 터져 나오는 목과, 뜻대로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의 몸뚱이. 그러던 중에 들었던 목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건강한 아들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름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출산을 갓 마친 어머니의 목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라이언하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감정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하멜 다이너스의 삶이 끝나고, 유진 라이언하트의 삶이 시작된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저히 참을 수 없던 때는 있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르게 걸음마를 떼고, 그럭저럭 생각한 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대한 베르무트’가 유폐의 마왕과 약속을 맺어 전쟁을 끝냈고, 아직 세상에 2명의 마왕이 살아 있으며, 마경은 헬무드 제국이 되었고, 베르무트와 아니스는 죽었고, 세냐와 모론은 은거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이 쉴 때까지 오열했다.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때려 부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베르무트를 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너를 만났을 때. 너와 대화하게 되었을 때. 대체 무엇을 물어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왜 약속을 맺은 거냐. 약속이란 대체 뭐냐. 왜 너는 나를 환생시킨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너는 약속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네가 유폐의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 가능하고 불가능하고와 상관없이, 네가 그렸던 결말에는 무조건 내가 필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약속의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추측뿐이지. 이 세상은 300년 전에 멸망해야 했다. 하지만 네가 약속을 맺어서, 멸망이 지금까지 미뤄졌다. 유폐의 마왕은…… 전쟁을 멈췄고, 너는 멸망의 마왕을 붙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나를 환생시켰나. 그 이유도 안다. 너는 내가 아가로트의 환생이란 것을 처음부터 알았지. 그래서 나를 동료로 만들었어. 하지만 내가 병신같이 뒈져 버렸으니, 나를 다시 환생시킬 수밖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말한 것들은 옳다. 네가 가졌던 의문들. 너는 이제 대부분의 답을 알고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네가 아직 묻지 않은 것이 있다. 너는, 지금, 물어볼 수 있다. 내가 네 앞에 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누구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사슬에 묶인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손을 움직였다. 손목에 걸린 사슬 족쇄가 철그럭 소리를 냈고, 베르무트의 손이 가슴에 얹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가 대체 누구인지. 정말로 인간이 맞는지. 너는 내가 인간이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내 본질이 무엇인지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라도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잖아. 그거로 충분해. 모론도, 아니스도. 심지어 너한테 가슴에 바람 구멍이 나서 뒈질 뻔한 세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한테는 그것으로 충분해. 네가 베르무트라면, 우리도 너를 베르무트라고 여기는게 당연한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심했단 말이야. 너 세냐한테 뭐 악감정이라도 있었냐? 왜 애 가슴에 구멍을 뚫어, 구멍을. 그래서 세냐가 뒈질 뻔…… 아니, 아니지. 세냐가 말하길, 자길 공격했을 때의 너는 많이 이상한 상태라고 했어. 네가 아닌, 다른 존재 같았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꾸욱. 베르무트는 가슴을 움켜쥐며 입술을 씹었다. 유진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뭐,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니야. 지금도 그렇지만 300년 전의 세냐는 진짜 한 대,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을 때가 많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가슴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나도 가끔, 화가 너무 머리끝까지 나면 이성을 잃고 날뛴 기억이 있고…… 월광검이 폭주했을 때도, 내가 싸우는 것인데 내가 아닌 것 같았지. 뭐, 너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도 알고 있지 않나. 네가 지금 하는 말은 결국 나를 억지로 외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게 씨X 뭐 어쨌다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한테는 그걸로 됐다는 거다. 우리는 네가 뭐하는 새끼인지 굳이 네 입으로 듣고 싶은 생각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외면하여 끝날 문제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나중에 듣지. 나중에, 나중에…… 전부 다 끝나고. 너를 그 개 같은 의자에서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우리가, 전부 다 같이, 널 둘러싸고서, 흠씬 두들겨 팬 뒤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들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입술을 닫고 침묵했다. 저 말이 진심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건 하멜은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변하지 않았구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닫혔던 입술이 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너와…… 세냐와, 아니스와, 모론에게…… 내가 누구인지. 약속이 무엇인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전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전하지 못했던 것은, 나의 함구(緘口)조차 약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 하멜, 네가 나의 정체에 대해 물을지라도……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대답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폐의 마왕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새끼는 왜 그딴 약속을 건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은 몇 번이나 운명의 시작과 끝을 보았고, 셀 수없이 많은 인과를 사슬에 묶어 유폐했다. 그에게 있어서 멸망이 유예된 300년은 존재해서는 안 될 이상(異常)이며, 그 자체를 관측하길 원하는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작 유폐 그 새끼는 은근슬쩍 이런저런 일에 간섭하던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운명에 어긋난 가능성마저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서지. 나와 약속을 맺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처절하고 피폐한 자는 수많은 인과를 매었기에 운명에 애증을 갖고 있다. 어떻게든 운명의 바뀜과 결말을 원하면서,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절망하고 있지. 동시에 그는 존재의 의지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본인이 그러지 못하기에, 더더욱, 운명을 벗어난 존재의 자유를 사랑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유폐의 마왕은 내 입을 틀어막았다. 멸망이 유예된 300년. 나는 함구했고, 세냐는 마법에 매진했다. 모론은 왕국을 세웠고, 아니스는 죽음을 택했다. 그 모든 것이 지금에 도달하는 흐름이 되었다. 만약 내가, 함구하지 않았다면. 모두에게 내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말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유진을 똑바로 보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있을까. 어모든 진실을 미리 알고 철저하게 준비된 네가 지금의 너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나? 너는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얻었으며, 지금 여기에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그럭. 족쇄에 붙들린 손이 가슴을 떠났다. 베르무트는 의자에 팔을 걸치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존재. 약속. 300년 전의 목적. 그 모든 것은 바벨의 어전에서 유폐의 마왕이 말할 거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 네가 결정하는 것이 ‘마왕’이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새끼 아주 변태 새끼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을 칭칭 감고 다닐 때부터 예상해야 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8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투덜거림에 베르무트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의 진지한 분위기의 대화에서 튀어나온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붕 뜨고 저렴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큭큭.”&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뒤, 베르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을 때마다 팔다리를 구속하고 의자까지 붙들어 맨 사슬이 흔들리며 철걱 소리를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듣고 보니 그렇군. 유폐의 마왕의 성격은 변태 같은 구석이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유폐의 마왕은 취향적인 이유 때문에 사슬을 두르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유폐의 마왕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사슬이 연결되고, 그를 상징하는 권능이 사슬인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웃음이 잦아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내 본질과, 약속에 대한 모든 진실을 네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으로 끝나서 이어지는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베르무트는 ‘함구’라는 약속을 피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해도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아까 했던 말을 기억하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 더 안 해도 된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죽음을 가로막지 못한 것이 내 두 번째 실수였다는 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첫 번째 실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듣고 싶지 않다. 유진은 주먹을 꽉 쥐고서 베르무트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세상에 태어난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베르무트는 결국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태어났기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소리하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참지 못하고 걸음을 떼었다. 그렇지만 베르무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더 이상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거 안 치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가침의 봉인이다. 아무리 너라도 육신 없이는 이 봉인을 지날 수 없다. 그러니 하멜, 너는 그 자리에 서서 내 말을 들어라.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리 닥쳐.”&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는 것 자체가 유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베르무트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놈이 멸망의 마왕과 관련된 존재라는 것은 진즉부터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정체? 그게 뭐가 중요한가. 유진에게, 세냐에게, 아니스에게, 모론에게는, 베르무트의 정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다. 인간이건 무엇이건,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란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놈은 300년 전에 용사였다. 비록 빛이 베르무트를 인정하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에게, 모두에게, 베르무트는 용사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우둔한’ 하멜이라는 별명을 싫어한다. 신실한 아니스니, 현명한 세냐니, 용감한 모론이니, 그런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어린 나이의 유진은 배를 잡고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아는 세냐는 현명한 구석보다는 감정적이고 멍청했다. 아니스는 마냥 신실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매일 술을 마셨고, 세상을 구하지 않는 빛에 애증을 가졌다. 모론? 놈이 용감하게 굴었던 것은 그냥 등신이었기 때문이다. 우둔한 하멜? 그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베르무트는 다르다. 그리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베르무트는, 녀석은, 정말로 위대했다. 위대한, 용사였다. 300년이 흘렀다. 지금 시대의 용사는 유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해서 베르무트가 용사가 아니게 되는가? 300년 전 용사였고, 약속으로 전쟁을 끝냈으며, 그때 왔어야 할 멸망을 300년이나 유예시킨 것은 베르무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넌 베르무트 라이언하트고, 용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전히 침묵하는 베르무트를 향해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우리의 동료지. 낯 간지러운 얘기라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하고 싶지 않다만, 넌 이런 것을 두고 놀릴 성격도 아니니 직접 말해줄게. 넌, 친구야. 우리들의 친구. 내 친구.”&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유진은 계속해서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여기 온 이유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세상이 흔들렸다. 베르무트를 중심으로 한 불가침의 봉인이 유진을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악물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치미는 분노에 유진의 이마에 혈관이 불룩 솟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뚜둑. 유진과 베르무트의 거리가 좁혀졌다. 불가침의 결계는 결국 유진을 밀어내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유진은 억지로 다가가, 베르무트의 앞까지 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반드시 구하겠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고개를 들어 유진의 얼굴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잿빛 머리카락 아래, 핏발 선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똑같이 유진도 베르무트를 보았다. ‘라이언하트’라는 성이 어울리던, 사자와 같던 위용은 지금의 베르무트에게는 희미했다. 녀석은 마모되고 피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런 베르무트에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언젠가, 반드시, 베르무트를 만나면. 꼭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베르무트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버리겠다는 다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정작 베르무트의 앞에 오니 그럴 수가 없었다. 색이 바래고 탁해진 눈동자를 보았다. 핏기없는 얼굴을 보았다. 유진은 입술을 뿌득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새끼. 한 대 때리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은 낯짝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면서 주먹을 내렸다. 툭. 힘을 뺀 주먹이 베르무트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마 얼굴은 때리지 못하고 어깨를 두드린 것인데, 막상 두들겨 보니 아차 싶었다. 한 대 때리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은 것은 낯짝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니, 초췌한 것은 몸뚱이도 마찬가지였다. 어깨도 푹 꺼져 있고, 팔다리도 비실비실해서 앙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 방금 그거로 뼈 부러진 건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어깨에 얹었던 손을 슬며시 들어 올리며 물었다. 베르무트는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유진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의 침묵 뒤에 베르무트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는 손을 떨림을 주먹을 쥐는 것으로 감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하겠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의 떨림은 감출 수 있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말 자체는 망령에게도 들었었다. 베르무트가 이용했고, 그래서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하멜에서 태어나 하멜이 아닌 존재. 그는 자신이 죽는 순간에 베르무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무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언젠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언젠가 동료들이 구하러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베르무트는 망령에게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저 말에 대한 대답조차도 베르무트에게는 금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베르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 입술을 열어서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아무리 바라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끼긱.&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슬이 점점 강하게 죄어왔다. 베르무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바라는 목소리 대신에 가쁜 호흡이 뱉어졌다. 베르무트는 이를 꽉 물고서 주먹을 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구구궁……&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레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뜩이나 괴롭던 멸망의 마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마치 그에 동조하듯이 베르무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저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자기 뭐야? 유폐의 마왕이냐? 그 새끼가 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며 숨을 헐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뜨려는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이…… 눈을 뜨려는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체 모를 짐승이 울부짖는 것만 같은 소리가 세상을 뒤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소리만 들린 것뿐인데 전신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300년 전에 하멜이 처음으로 멸망의 마왕을 보았을 때. 그리고 먼 과거 아가로트가 처음으로 멸망의 마왕을 보았을 때. 그때와 같은, 감당하기 버거운 공포가 유진의 심지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들어라.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전과 눈빛이 달랐다. 보다 탁하고 초점이 없는 눈동자는, 도저히 베르무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유진은, 저 ‘눈’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년 전. 세냐가 자신의 기억을 마법으로 보여주었을 때. 200년 전의 무덤에서, 베르무트에게 공격받았을 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베르무트의 눈동자가 저랬다. 분명히 베르무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도저히 베르무트가 아닌 것만 같은. 유진은 그때 세냐가 했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렇게’ 되어버린 베르무트에게는 이성이 희미하다. 그렇게 희미해진 이성의 공백을 멸망의 광기가 채워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길어야 1년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가 핏발 선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멸망은, 즉시 세상을 멸망시킬 거다. 그때는 누구도 멸망을 막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내가, 잡고 있는 사이에. 끝내야 한다. 모든 것이 늦기 전에, 바벨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았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는 말하지 마라, 베르무트. 그냥 듣기만 해. 우리는 늦기 전에 바벨을 오르고, 유폐의 마왕을 죽일 거다. 그리고 너를 구하러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대로 그걸 잊지 마. 정 버티기 힘들고 X같을 때, 지금 내가 한 말을 떠올려라. 우리는 반드시, 널 구할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소리가 더욱 강해졌고, 세상의 흔들림이 거세어졌다. 지면이 들썩거리며 요동쳤지만, 베르무트가 앉은 의자와 오래전의 흉터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저곳만이 들끓는 멸망 속에서도 고요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그런가? 베르무트의 얼굴을 보았다. 덜덜 떨리는 몸. 점점 충혈되어 붉어지는 눈동자. 그 안에 스멀스멀 번지는 광기. 유진은 뿌득 입술을 씹었다. 저 흉터와 의자가 고요할지라도, 베르무트는 고요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더더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베르무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 공간의 폭주에 휘말리지 않도록 물러서려 했지만, 도저히 지금의 베르무트를 외면하고 물러설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방법이 없나? 당장 멸망의 마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베르무트의 괴로움을 덜어 줄 방법이라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광기에 시달리던 모론을 떠올렸다. 그때는 월광검을 통해 모론의 광기와, 레헤인야르 이면의 마력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월광검이 멸망의 검이고, 유진이 완벽하게 월광검을 다뤄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의 마력과 광기는 레헤인야르의 이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월광검 대신 레반테인을 꺼낸들 이곳의 마력은 지워낼 수 없다.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칫하다가는 그러한 시도가 자극이 되어 멸망의 마왕이 깨어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유진의 눈동자에 어린 미련을 읽었다. 그것이 지금 당장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직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베르무트는 매몰찬 어조로 내뱉었다. 그는 간신히 손을 들어서 유진을 향해 펼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악!&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의식이 뒤로 밀려났다. 과거 누아르의 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유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베르무트가 바란 대로 그곳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거대한 흉터 위에 앉은 베르무트의 모습이 멀어졌다. 유진은 부릅뜬 눈으로 베르무트를 보았다. 아직 하고 싶은 욕도 많았고, 나누고 싶은 대화도 많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음이 있다. 이 짧은 해후를 아쉽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떠났다. 다시 이곳에는 베르무트 혼자만 남았다. 베르무트는 자신의 텅 빈 안을 채워가는 광기와 마력을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300년의 긴 잠은 진즉에 선잠으로 바뀌었다. 언제고 멸망의 마왕이 눈을 떠도 이상하지 않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직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유폐의 마왕조차도 멸망의 마왕이 완전히 눈을 뜨는 것이 언제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베르무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흐려지는 이성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질끈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남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체이니 본질이니 하는 것이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냥, 베르무트 라이언하트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베르무트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늘 하멜에게 들은 대부분의 이야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날 구한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자조적으로 뇌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불가능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또다시 세상이 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의 대화에서 미련이나 희망 같은 것을 갖고 싶지 않다. 그러한 감정으로 과거 얼마나 큰 후회를 했던가. 유진은 진심으로 분노하며 베르무트의 말을 부정했지만, 도저히 베르무트는 그럴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는, 이 세상에 태어나 버린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 태어나서 미련과 희망이란 것을 가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라리 태어나지 않고, 이곳에 있었더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는 팔걸이를 움켜쥐고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49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헉하고 숨을 삼키면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시엘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전신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반쯤 녹아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기겁하고서 시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의도했던 대로 베르무트에게 도달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 자체가 시엘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휴.”&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행히 시엘은 탈진했을 뿐. 후유증이 남을 내상 같은 것은 입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유진은 가까이 다가가서 시엘의 얼굴을 붙잡았다. 마안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되어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눈동자가 뒤집혀 있는 것이 문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면 다시 뒤집을 수밖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손끝에서 화륵 불꽃이 올랐다. 유진은 조심스레 시엘의 눈동자를 어루만졌다. 데굴 구른 눈동자가 본래 위치로 돌아왔다. 유진은 초점 없는 눈동자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제는 없었다. 마안도 멀쩡했다. 그냥 정신을 잃었을 뿐인가.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동자에서 손가락을 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던 차에 시엘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시야가 흐릿하긴 했지만, 시엘은 정신을 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유진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황하고 민망해서 헛기침을 내뱉었는데, 곧장 후회감이 들었다. 비몽사몽을 핑계로 삼아 입술이라도 내밀었다면, 살짝이라도 닿지 않았을까? 거리는 그만큼 가까웠으니 충분히 닿기는 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생각하니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가까이 있는 유진의 얼굴을 보니 생각이 휙휙 바뀔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의 눈동자는-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시엘은 저 모든 감정을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저것들이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란 것은 느낄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왜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표정과 눈빛은 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엘은 더듬거리며 물어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내가 뭘.”&lt;/p&gt;&lt;p&gt;&lt;br /&gt;&lt;/p&gt;&lt;p&gt;“표정이 슬퍼 보여.”&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씨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슬퍼 보인다니. 유진은 쯧 혀를 차면서 괜히 뺨을 어루만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금 경직되기는 했다. 코끝도 시큰한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뚱이는 싸움 관련된 재능 외에는 문제가 많다. 특히 눈물샘 쪽에는 뭔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졸려서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이 늦었잖아. 나는 진즉에 잘 시간이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투덜거리다 말고 보란 듯이 하품을 했다. 그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시엘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한테 뭐 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에서와는 달랐다. 그때 시엘은 유진과 함께 베르무트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보지 못했다. 몸 안에 불꽃이 스며들고, 그런데도 뜨겁기보단 시리고, 허한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 시엘의 기억은 거기서 뚝 끊어져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깊이 들어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르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시엘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베르무트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다. 그리고 앞으로는 시엘의 눈을 문으로 삼을 일은 없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서임은 했어. 네가 기절한 사이에.”&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나는 칼로 어깨 두드리고 그런 것 안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신 네 눈동자를 어루만졌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이 말하길, 서임이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진이 그러고자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서임은 이뤄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잠시 머뭇거리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방금 말을 들으니 서임이 끝났다는 것은 체감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시엘의 안에는 백염식의 마나 외에 다른 빛이 깃들어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유진이 보는 앞에서 신성력을 꺼내 보이며 시시덕대겠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자꾸 눈치를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눈치 보지 말고 뻔뻔하게 굴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릴 때는 그랬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네가 기억하는 어릴 때의 나는 뭐였던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재수 없고 건방지고 자기 예쁜 거 잘 써먹는 그런 꼬마였지. 남 눈치 안 보는 대신 남이 자기 눈치 보게 만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막힘없이 이어지는 말에 시엘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모두가 시엘이 반박할 수 없는 옳은 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래도 네 눈치는 많이 봤던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너 본 지 10년이 넘었는데 오늘 처음 알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나는 네 눈치 많이 봤어. 지금도 보고 있고. 그런 표정 짓고 있는데 어떻게 눈치를 안 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갈 거야. 지금 네 표정이 너무 울적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나와 이야기라도 하면서 풀 수 있는 감정도 아닌 것 같으니까. 알겠어? 내가 널 배려해 주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얼씨구.”&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싫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좋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그제야 시엘은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 언…… 으흠, 성녀님들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글쎄. 나도 이런 경험은 없어서. 그래도 하루는 꼬박 걸리지 않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온종일 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하는 거야? 춥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물도 아니고 성수인데 춥지는 않을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없는 사이에 뭐 이상한 일 하는 것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상한? 이상한 일이 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녀가 같은 방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이 키득키득 웃으며 이죽댔다. 유진은 그 말에 눈을 껌벅거리다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이건 신성한 의식이야. 세례라고. 이거 신성모독인 거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독이랄 것까지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인 내가 모독이라 느끼면 모독인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좋겠다, 신이라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혀를 베 내밀고서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난삼아 말했을 뿐, 시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녀들은 내심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유진 본인은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짜 고자일지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마지막으로 유진을 힐긋 돌아보았다. 여전히 울적하고 심각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턱을 괴고 있던 유진은 시선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아무것도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은 다시 몸을 돌려 방문을 열고나갔다. 그렇게 방 안에는 유진과 성녀들만이 남았다. 유진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뒤편에 있는 욕조 앞으로 다가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은은한 빛을 발하는 성수. 욕조에 몸을 담근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 보였다.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양손에 새겨진 성흔에 주목했다. 욕조를 채운 성수의 빛이 조금씩 성흔으로 옮겨지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할 수 있는 건 다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론을 성기사이자 대전사로 삼았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기사와 전사들도 서임했다. 이것으로 유진 고유의 성기사단은 완성되었다. 바벨로 진군할 때, 그들은 유진의 신군(神軍)이 되어 판데모니엄의 마족과 싸울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을 죽이고, 바벨을 정복하고 나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다음은 멸망의 마왕이다. 라비스타에 은둔하던 멸망의 권속들은 하우리아에서 대부분이 죽었다. 라비스타에 권속이 조금 남아 있기야 하겠지만, 그들은 전력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일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해서 변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당장 하우리아 때만 하더라도, 망령은 인간과 마족을 사용해 수백 수천 마리의 누르를 만들었다. 바벨 정복 이후 신군이 해야 할 것은, 만약의 경우에 쏟아져 나올 누르를 막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서 나올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구르야란이나 레헤인야르? 멸망의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모론의 도움은 필요하다. 세냐의 마법으로 누르의 출현을 잠시 억누를 수 있는 것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맹신할 수는 없다. 그곳에 출현하는 누르는 어디까지나 ‘징조’일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징조.’&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의 마왕은 현재 봉인된 상태다. 하지만 그 봉인이 불완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게 될 것은 방금 베르무트와의 만남에서 확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길어야 1년.&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이려고 덤비는 중에도 얌전히 자고 있을 리는 없지. 자극하면 깨어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되면 세냐의 마법으로도 라구르야란과 레헤인야르의 누르를 억누를 수 없으리라. 그러니 신군의 일부는 그쪽에 배치하여 누르의 창궐을 막아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쪽은 루하르 왕국군에게 맡기면 될 거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장 연회에서 아만과 정예 기사단에게도 서임을 내렸다.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겠지만, 루하르 왕국군만으로 부족하다면 시무인 왕국군이나 슬라드 용병단까지 동원하면 될 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생각하고서,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지금 유진이 가볍게 떠올리는 전력들은 모두가 일국의 정예군이다. 거기에 유진이 바란다면 정예군에 그치지 않고 징집병들까지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많이 컸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하멜이 아무리 명성이 높았어도 일국의 왕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유진은 할 수 있다. 유진이 진심으로 바란다면, 일개 국가 정도가 아니라 대륙 전체의 병력이 집결하고 움직일 것이다. ‘유진 라이언하트’는 고작 10년도 되지 않아 그만한 존재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존재여야만 했다. 신성과는 관계없이, 지금 유진에게는 세상의 결말이란 것이 달려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멸망할 것인지, 살아남을 것인지. 살아남는다면 어떤 형태의 미래를 갖게 될 것인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무거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툴툴 웃으면서 망토에서 술을 꺼냈다. 연회에서 몇 병 챙겨둔 술을 테이블에 가득 올려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이라면 좋아죽는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침묵하고 있다. 그녀들만큼은 아니어도 술은 꽤 좋아하는 세냐는 숲에 가 있고, 모론은 머나먼 북쪽 끝에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할 수 있는 건 다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미 신성을 얻었으니 더 이상 신앙을 늘릴 필요는 없다. 애당초 빛이 유진에게 깃든 순간부터, 신대(神代)부터 안배하여 축적한 모든 신력은 유진의 것과 다름없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는 끝냈고, 남은 것은- 각오뿐이다. 각오를 마치고, 도전할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먹고 저질러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시간도 많지 않다. 실패하면? 죽는다면? 죽을 자리도 잘 찾아야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령이 떠올랐다. 최후에, 놈의 손을 거머쥐면서 했던 말.&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말했다. 유폐의 마왕을 죽이겠다고. 세상을 구하겠다고. 유폐의 마왕에게 죽는다면 영혼이 붙들린다. 다음 시대는 볼 수도 없게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폐의 마왕에게 죽건, 멸망의 마왕에게 죽건,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가 있는 것은, 고신들이 아가로트를 환생시켰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고신들은 거신에게 잡아먹혀 하나의 신이 되었고, 그들이 준비한 힘은 레반테인에 이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지금 세상이 멸망하고, 다음 세상이 열린다면. 그때는 지금과 같은 희망조차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반복될 뿐. 이후로 세상은 몇 번이나 멸망할까. 그때도 유폐의 마왕은 홀로 살아남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각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술병을 채운 술을 노려보았다. 사실은 유진도 알고 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각오는, 유폐의 마왕이나 멸망의 마왕과 싸우는 것에 대한 각오가 아니다. 그 둘을 죽이는 것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유진이 간절히 바라는 것. 각오야 진즉에 끝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에게 필요한 각오는, 누아르 제벨라를 죽이는 것이다. 살의는 있다. 죽이고 싶다. 죽여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순간에 정말로 나는 그녀를 죽일 수 있을까. 아무리 각오하고, 살의를 품고, 죽이기 직전까지 간다고 해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 순간에 정말로 누아르를, 아리아를 죽일 수 있나? 유진 라이언하트는 할 수 있다. 하멜 다이너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가로트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억지로 해야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죽인 뒤에 많이 후회하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남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술잔을 드는 대신, 오른쪽 뺨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가비드 린드먼이 남긴 흉터다. 이 흉터는 앞으로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죽음은 유진이 몸이 아닌 마음에 흉터를 남길 것이다. 유진은 그녀의 죽음에서 미련을 갖고,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될 것이 두렵고 싫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을 알면서도 내뱉었다. 다시 결의했다. 더 이상 할 준비는 없다. 각오만 다지면 된다. 지금, 유진은 다시 각오했다. 그러니 오랜 시간은 필요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이 눈을 뜨고, 세냐의 준비가 끝난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에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신군은 대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아르 제벨라와의 전투에서 신군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의 누아르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 병력의 우위는 무의미하다. 어쩌면 데려간 병력이 오히려 누아르의 힘이 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누아르 제벨라는 이미 마왕의 규격마저 넘었다. 도시 전체를 공장 삼아 정기를 수급할 때도 무한히 강해지고 있었는데, 지금의 누아르는- 정기가 아닌 환상 그 자체를 수급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는 신대에 아리아가 바랐던 신성에 도달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악신(惡神)이고, 제벨라 파크는 악신의 영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날 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술을 마시는 것은 유진뿐만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조용히 가라앉은 도시. 밤이 존재하지 않던 이 도시는 며칠 전부터 밤이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랜 벗을 추모하고자, 도시를 통째로 소등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휘황한 보름달 아래에 누웠다. 그녀는 불 꺼진 도시를 요람 삼아 누워서 다리를 까딱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생각을 하고 있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빙긋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술의 경계에 보름달이 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요한 도시에서 잠든 수백만의 염원 어린 환상. 그 모든 것보다, 머나먼 곳에서 전해지는 살의와 갈망이 누아르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살의.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초대장을 보내야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보름달에 걸친 술을 흔들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0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초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짹짹…….&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른 아침. 창가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크리스티나의 정신을 깨웠다. 그녀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만 같은 상쾌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찰랑거리는 물소리. 크리스티나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어깨를 움츠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기억났다. 유진의 세례. 욕조에 잠긴 물은 아직도 따스했지만, 처음과 같은 ‘빛’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났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깨어나 계셨던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도 방금 깨어났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은 나른하지 않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는 것이 껄끄러울 뿐, 그 외에 불편함은 없었다. 없는 수준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좋았다. 평소에도 몸이 무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정도를 넘어 마치 깃털처럼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 아침이기는 합니다만, 저희는 한 번의 새벽을 지낸 것이 아닙니다. 아마 며칠은 의식을 잃고 있었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공복감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몸 안을 가득 채운 충만함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촤악!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욕조를 채우고 있던 물이 모조리 증발하여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은 보지 못하셨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당신보다 먼저 깨어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래 봤자 간극은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하멜은 방에 없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고서 아니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그것이 불안하군요. 하멜의 성격상, 이런 저희를 방 안에 홀로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하멜이 방에 없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유진 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요? 저희를 위해 피를 많이 흘리셨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크리스티나, 저는 더 이상 하멜이 과다출혈로 정신을 잃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시스터께서는 지금 유진 님의 신변을 걱정하시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 걱정하고 있지요. 저희가 정신을 잃은 시간 동안 간악한 것들이 하멜을 꾀어낸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크리스티나, 세례를 받기 전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이 방에 있던 것은 저희와 하멜뿐만이 아니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들으니 크리스티나의 표정도 굳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나 지났을지는 모르지만, 그때 이 방에는 시엘도 있었다. 말끔하게 목욕하고 향수까지 뿌린 시엘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엘만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1년 만에 만났는데도 자신에게 아무런 행위도 해주지 않았으니, 세냐 그 계집애도 마음에 독기를 품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억…….’&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가 잠든 것을 기회로 삼아 뭔가 개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 싫다는 하멜을 억지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히 하멜 님의 동정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외침에 아니스는 순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생각한 ‘억지로’의 다음으로 이어질 행위는 데이트나 포옹 정도였는데, 크리스티나의 발언 수위에 너무 큰 비약이 일어났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외침에서 아니스는 잠시 복잡한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에게 동정이란 말이 과연 옳은가? 아니스가 알기로 하멜은 용병 시절 성적인 경험이 제법 있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야 용병은 대개 그런 법이라 아니스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아무튼 하멜이 동정은 아니지 않은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시스터. 지금 유진 님은 하멜 님이 아니라 유진 님이잖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육체가 다르고 이름이 다릅니다. 그리고 용병 시절의 불장난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의 정신과 육신은 순결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치 있고 지켜야만 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그렇게 내뱉고서 대뜸 옷을 벗어 던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옷을 벗는가? 옷이 젖었기 때문이다. 갈아입을 옷은 있는가? 있다. 말끔히 이불이 깔린 침대의 위, 성녀들을 위한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젠가 정신을 차릴 때를 위해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한 것이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 옷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의를 다지고서 알몸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이곳은 유진의 방이다. 넓은 방 한쪽에는 드레스룸으로 이어지는 문이 따로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지금 크리스티나가 떠올린 악마적이고 파렴치한 생각과, 그에 대한 망설임을 빠르게 덜어낸 과감한 행동력에 경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크리스티나는 세냐도, 그리고 10년 전부터 유진과 같은 저택에 살았던 시엘조차 발을 들이지 못한 금단의 장소. 유진이 어린 시절부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원초적 모습으로 드나들던 드레스룸에 침입하고 있다. 이 방에 침입한 여자는 성녀들이 처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처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시종이라면 몰라도, 유진이 어렸을 때부터 전속으로 두었던 니나는 몇 번이고 드나들었을 터. 하지만 그녀는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드나들었던 것이니, 크리스티나는 빠르게 니나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맙소사, 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젖은 옷을 미련 없이 벗은 크리스티나는, 새하얀 나신에 유진의 셔츠를 걸쳤다. 신장의 차이가 제법 되었기에 셔츠의 끝단이 허벅지까지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설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아니스는 성직자라면 절대, 성녀라면 더더욱 해서는 안 될 음란하고 악마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 상스러운 복장에서 인간의 도리란 것을 한 꺼풀 더 내려놓는다면 다른 의미로 성스러운 모습이 되어버린다. 성녀가 성녀가 아닌 다른 성녀가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행히 크리스티나에게는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을 떠돌던 엄한 생각을 떨쳐내고, 얌전히 셔츠 단추만 채우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침대 위에 잘 접힌 속옷과 바지를 입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 잘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니스는 그중 하나로 의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정말로 이성과 도리를 저버려 타락하였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하멜이 보았다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아주 조금 궁금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 님을 찾으러 갑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이곳이 라이언하트의 저택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유진과 크리스티나만의 보금자리였다면, 크리스티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건 이성과 도리와 관계없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곳은 라이언하트의 저택. 유진 외에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다. 유진에게만 보여주는 것이라면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과 1시간 전만 해도 유진은 자신의 방에서 성녀들이 깨어나는 것을 기다렸지만, 지금은 라이언하트의 회의실에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똑똑 문을 두드린 뒤에 들어간 회의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의 복장으로 회의실에 들어왔다면 처지가 무척 난감해졌을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어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던 유진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크리스티나가 정신을 차린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유진의 성녀다. 기척을 느낄 필요 없이 알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문이 막힌 것은, 우선 크리스티나의 ‘변화’ 때문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한층 더 깊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크리스티나에게는 그런 것보다 노골적인 변화가 존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크리스티나의 주변에는 은은한 빛의 아우라가 감돌았다. 그리고 머리 위. 처음으로 아니스가 천사로 현신했을 때처럼 빛의 고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고리는 희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말문이 막힌 것은 아우라와 빛의 고리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침대 위에 갈아입으라고 옷을 올려두었다. 하의를 입은 것을 보면 옷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상의로 저런 셔츠를 입고 있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옷 꼬라지가 그게 뭐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옆에 앉아 있던 세냐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당연히 세냐는 저 셔츠가 유진의 것임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준비해 주신 옷이 제게는 조금 작더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손가락 아래로 내려오는 소매를 접어 올리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다고? 작을 리가 없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작았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디가 어떻게 작았다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님은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제 입으로 부끄러운 대답을 하기를 강요하시다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당돌한 대답에 세냐의 입술이 꿈틀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세냐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재빨리 선수를 친 질문에 유진이 표정을 가다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흘.”&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 오래도 잠들어 있었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든 게 아니라 기절해 있던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숲의 엘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도는 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완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병의 병원은 마력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마력이 유폐의 마왕의 것이 아니란 것은 확인했어. 그러니 유폐의 마왕도 마병을 거둘 수 없던 것이겠지. 마병의 병원은 멸망의 마력이야. 아마…… 마병도 누르와 마찬가지로 멸망의 징조라고 생각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 전쟁이 시작하고서 엘프에게 마병이 발병했다. 당시에는 전쟁 자체가 유폐의 마왕의 야욕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전쟁의 진실을 안다. 애초에 세상은 그 즈음에 멸망해야 했다. 전쟁 자체가 멸망의 효시였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멸망의 마왕을 죽이면 마병도 사라진다는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진의 옆에 앉았다. 반대쪽에 앉은 세냐는, 유진에게 바짝 붙어 앉은 크리스티나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좀 떨어져 앉…….”&lt;/p&gt;&lt;p&gt;&lt;br /&gt;&lt;/p&gt;&lt;p&gt;“차도가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어떤 식의 차도가 있던 겁니까. 마병의 진행 자체는 진즉에 막았을 텐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번에도 크리스티나는 세냐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질문을 먼저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어, 음, 마병에 걸린 엘프들에게서 멸망의 마력을 뽑아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을 뽑아냈는데도 완치는 불가능한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도 몸 가누기 힘든 중환자를 거의 멀쩡하게 만들 정도는 돼. 밖에 나가면 다시 마병이 진행하겠지만. 그런데 너, 너무 가까이 앉…….”&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데 왜 두 분은 회의실에 계신 겁니까? 제가 들어오고서 느낀 분위기가 몹시 무거웠는데, 혹 두 분이서 싸움이라도 하신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얘랑 싸울 일이 뭐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리감을 두고서 따지는 것을 포기한 세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초대장이 왔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대답했다. 그는 혀를 쯧 차면서 품 안에서 편지봉투를 하나 꺼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밀랍 봉인은 뜯어졌지만, 편지봉투에 적힌 글자는 선명했다. 누아르 제벨라의 이름…… 크리스티나의 표정도 똑같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초대장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접 보는 게 빠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편지지는 단 한 장. 내용이 빼곡히 적힌 것도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들은 편지지 중심에 새겨진, 매혹적인 붉은색의 키스마크를 보았다. 누아르 제벨라가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남긴 키스마크. 그것에 대한 역겨움을 말할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행위 자체가 무의미했다. 애당초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공간마저 뒤바뀌었다. 키스마크를 보기 직전까지만 해도 크리스티나는 라이언하트의 저택 안의 회의실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티나가 선 곳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붉은 황혼의 앞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움찔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발아래에서 ‘찰박’하는 물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뒤에 펼쳐진 광경은, 크리스티나가 잘 아는 것이었다. 빛의 샘. 유라스에서 유진이 직접 파괴했던 그 빛의 샘이, 멀쩡한 모습으로 크리스티나의 뒤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샘은 크리스티나의 기억과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더욱 끔찍했다. 은은한 빛을 발하던 샘물의 색이 변했다. 점점, 점점 붉은 핏빛으로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샘 밑에 있는 것들을 보았다. 그건- 무수히 많은 백골이었다. 빛을 샘을 위한 성유물. 역대 성녀들의 유해. 그 새하얀 백골은 모두가 크리스티나를 보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딱딱딱.&lt;/p&gt;&lt;p&gt;&lt;br /&gt;&lt;/p&gt;&lt;p&gt;백골들이 턱관절을 까딱대고 이빨을 부딪쳤다. 눈동자가 없어 움푹 파인 눈구멍들에서 희미한 귀기가 번득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너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절망과 원독으로 점칠 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오싹 돋은 소름에 심부가 시렸다. 샘에 가라앉은 백골 무더기가 들썩거렸다. 꼬륵거리는 물거품 아래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 크리스…… 티…… 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썩어 문드러진 얼굴.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저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했다. 세르지오 로게리스. 크리스티나의 양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양부를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를 아비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세르지오 역시 크리스티나에게 부성애를 가진 적은 없다. 크리스티나에게 있어서 양부는 원망의 대상이자 억압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세르지오에게 있어서 크리스티나는 잘 만들어 완성해야 할 성녀일 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네가…… 없었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뿐인데, 저 모습은 크리스티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완전히 떨쳐냈을 양부에 대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가슴 밑바닥을 기어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평소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세르지오의 죽음은 크리스티나에게 정말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절망적인 유년기와 성녀로 만들어지면서 심어진 여러 감정과 의무들은, 유진과 함께 보았던 불꽃놀이와 이후의 여정에서 말끔히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털어냈어도 크리스티나는 인간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아주 조금의 감정이 다시 만들어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대 성녀들의 유골이 토해내는 절망과 원독. 썩어 문드러진 양부의 저주. 그로 인한 작은 감정이, 크리스티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증폭되었다. 그렇게 크리스티나의 정신은 찰나의 악몽에 사로잡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모습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당신의 악몽은 참 뻔하고 재미없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황혼을 등지고 선 누아르는 팔짱을 끼고 서서 방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너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마요. 악몽을 꾼 것은 당신만이 아니니까요. 먼저 초대장을 보았던 나의 하멜도, 세냐 메르데인도, 그리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미소가 짙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과 섞여 있는 아니스 슬리우드도 악몽을 꾸었어요. 모두가 다른 악몽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아니스가 크리스티나의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똑바로 서서, 누아르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갈X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직접 들으니 반갑고 각별하네요. 오랜만이에요, 아니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게…… 대체 뭐 하는 수작이지? 왜 하멜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굳이 초대장을 보여준 것이냐구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은 크리스티나가 차마 뱉지 않은 말이었다. 이 불쾌한 악몽은 초대장에 의한 것.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내가 당신들을 몰랐으리라 생각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래요. 솔직히 말해주죠. 결투장에서 당신들을 보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어요. 어느 정도 심증은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어. 하지만 결투장에서는 보고서 바로 알았어요. 당신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이 초대장이 이런 형태인 것은, 흐흥, 나의 상냥한 배려심 때문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요, 배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까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누아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과는 달라요, 아니스 슬리우드. 그때 나는 하찮고 나약했어요. 나는 몇 번이나 악몽을 보여줬지만, 당신들을 절망시키고 정신을 부수지는 못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한 걸음 걸었다. 우우우……! 그녀가 등진 황혼에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당신들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악몽을 보여줄 수 있어요. 당신과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성녀로서 얼마나 완성되었건, 세냐 메르데인이 인간을 초월했건,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단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이 일그러졌다. 흘러넘친 붉은색이 하늘을 뒤덮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지 않다면 내 영지에 오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모습이 붉은 배경과 뒤섞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 하멜의 마지막을 방해하러 오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1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해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에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말은 결코 장난도 허세도 아니다. 누아르 제벨라는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악몽은 누아르 제벨라가 직접 앞에 나타나서 만든 것이 아니다. 편지지에 담은 마력에 노출된 것만으로 이렇게 악몽이 만들어졌다. 시야에 포착하고 바란 순간에 상대를 강제로 잠들게 만드는 ‘강제수면’, 그리고 한 번 잠에 빠진 순간 거듭되고 무한한 꿈의 세계로 끌고 가는 ‘몽중몽’.&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위 몽마라면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권능. 당연히 몽마의 여왕인 누아르는 저 두 개의 권능에도 통달하여, 시야에 포착만 한다면 수백, 수천, 수만이건 즉시 잠에 빠트릴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제는 그 범주마저 아득히 초월했다. 시야에 포착할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누아르 제벨라, 그녀는 이제 마력의 잔향만으로 상대의 의식을 파고들어, 깊은 곳의 트라우마를 발굴하고, 지독한 악몽을 만들어낼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 아니스도 ‘악몽’을 꾸었다. 그녀의 악몽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의 전장. 그녀가 구하지 못했던 이들이, 아니스에게 원망을 쏟아내던 것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눈앞에서 죽던 것. 그 순간에 성녀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것. 죽어가는 하멜을 소생시키지 못했던 것. 그런 모든 것들이 뒤섞이고 증폭되어 거대한 절망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아니스가 맞이했던 최후. 역대 유라스의 모든 성녀는, 다음 성녀를 위해 성유물이 되었다. 아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역대 성녀 중 가장 완전에 가까웠던 아니스야말로 반드시 성유물이 되어야만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타깝게도 아니스에게는 모론과 세냐와 같은 장생은 허락되지 않았다. 완전에 가깝다는 것은 결국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인간인 아니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결함이 여러 개 존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더더욱, 아니스는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려 했다. 평생을 성녀로 살았다. 평생을, 빛을 위해 살았다. 그러니 마지막 정도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다. 평생을 섬긴 빛에 대한 최후의 반항을 해보고 싶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멜의 무덤을 봐볼 겸 갔던 사막에서- 홀연히 깨달아 버렸다. 숭고하다고는 할 수 없을 추한 죽음이지만, 그래도 하멜은 세상을 구하는 것을 원했다. 모든 마왕을 죽여달라는 유언을 남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국 아니스는 바라던 대로 은둔하여 홀로 죽겠다는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스는 자신을 찾아온 성기사와 성직자들과 함께 유라스로 돌아가, 다음 성녀를 위한 성유물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최후가 악몽과 연결되었다. 성유물이 되기 직전에 가졌던 ‘공포’.&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한 행위가 결국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냥 허무하게 죽는 것은 아닐까. 그 공포는 ‘지금’ 아니스의 존재로 모순되는 것이나, 누아르가 만들어낸 악몽에 인과관계란 무의미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조금의 공포. 심지어 그 공포가 이미 극복해 낸 과거의 것일지라도. 약간의 빌미만 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포란 으레 그런 법이다. 불 꺼진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도, ‘무섭다’라고 생각해 버리면 있을 리 없는 것을 제멋대로 상상해 버린다. 한번 악몽을 꾸다 깨어나면 다시 악몽을 꿀까 두려워 잠을 설쳐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공상.’&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누아르의 악몽은 존재가 갖는 공상을 부풀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고 싶지 않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기에 누아르의 저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잘 안다. 지금은 이 정도에서 끝났지만, 만약 누아르가 ‘직접’ 앞에서 공상을 악몽으로 바꾼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처럼 입을 틀어막고, 몸을 떨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악몽. 공포란 감정을 가질 때마다 커지는 악몽은 결국 정신을 붕괴시키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지 말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와, 하멜의 마지막을, 방해하지 말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아니스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누아르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다. 악몽과, 정신의 붕괴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히.”&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입술을 뿌득 씹으며 누아르를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두 성녀는 똑같은 분노를 느꼈다. 이건 모독이다. 감히, 감히 공포 따위로 성녀를 억압하는가? 이 경고로 성녀가 두려움에 떨어 오지 않기를 종용하는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흐응.”&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그러졌던 황혼과 흘러넘쳤던 붉은 색은 어느새 사라졌다. 성녀들의 분노에 누아르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그녀는 처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도 뻔한 반응이네요. 하지만 세냐 메르데인보다는 점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래. 세냐 메르데인이 어떤 악몽을 꾸었는지 알아요? 아마 당신들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하멜의 죽음. 베르무트의 배신. 엘프들의 몰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저항은 격렬했죠. 당신들보다는 훨씬 격렬했어. 그녀는 스스로 악몽을 부수고 나를 찾아 죽이려 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곳의 나는 악몽 속의 환상일 뿐인걸. 아하하, 그거 알아요? 오히려 세냐 메르데인은 그 사실에 더욱 절망하고 공포를 느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환상뿐인 나에게도 정신적으로 잠깐이나마 몰린 것에 대해. 지금이 세냐 메르데인은 너무 뛰어난 마법사이기에, 내가 만든 악몽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끔찍한지를 이해한 거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말하던가? 무서우니까, 가지 않겠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랬다면 좋았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들과 똑같이 반응했어요. 나를 모욕하지 말라면서 화를 냈죠. 이거 참, 내가 기껏 배려해 줬는데 말이야. 설마 질투인가요? 나와 하멜의 마지막을 질투해서 방해하고 싶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투?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우리가 당신을 질투할 이유가 어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크리스티나 로게리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눈매와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얇게 뜬 눈매 사이에서 보라색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당신이나 아니스 슬리우드, 세냐 메르데인이 절대로 할 수 없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그것만으로 당신들이 나를 질투할 이유는 충분하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헛소리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헛소리라니, 나는 진심이에요. 아, 그래. 질투라는 단어가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 그렇다면 다르게 말해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성녀들의 매서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말이에요, 하멜과 서로 죽이고, 서로의 마지막이 될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너무나 당연해서 어이없게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 죽일 수 있다고? 크리스티나와 세냐, 아니스는 당연히 저런 일을 하지 않는다. 대체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누아르는 장난이나 농담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하멜과 그럴 수 있어요. 이것은 오직 나만이 가진 특혜에요. 나는 하멜과 서로 죽고, 죽이고, 서로의 마지막이 되어서, 서로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핥을 수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는 누아르의 목소리에는 가느다란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광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희열에 의한 떨림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들이 그럴 수 있나요? 아니, 그럴 수 없어요. 당신들에게는 사정도 명분도 감정도 없으니까.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멜의 등 뒤나 옆에 서서 바라보는 것뿐. 그래, 조금 더 말해주죠. 함께 가거나, 사는 것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떨리는 목소리에 질척질척한 감정이 더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나는 달라요. 나와 하멜, 둘 중 누가 죽고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신할 수 있어요. 우리는 죽거나 죽이는 순간의 후회와 미련과 망설임, 그 외 모든 감정을 독점하고, 결국 서로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와 아니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격정 가득한 목소리가 악몽을 뒤흔들고 있다. 질척하고 무거운 감정이 성녀들의 말문을 틀어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뒤흔들리는 황혼이 또다시 악몽을 잠식했다. 황혼을 등진 누아르에게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성녀들에게 밀어닥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 반복한 삶 중에서 오직 나만이 유일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말투가 또다시 바뀌었다. 그녀는 성녀들에 대한 존중을 집어치웠다. 순수한, 정말로 순수한 감정만을 남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가 가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사랑과는 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의 형상을 한 거대한 악의를 등진 누아르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다. 그 시커먼 얼굴에서 눈매와 입술의 곡선만이 확연한 색을 띠었다. 붉은 입술. 그리고 보라색 눈동자.&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에게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누아르가 드러내는 감정. 경멸, 멸시, 분노.&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격이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질투가 아니다. 응당 주장해야 할 권리다. 누아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우리의 마지막을 방해하겠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림자가 넘실거리며 춤을 췄다. 밀어닥친 그림자는 성녀들의 앞에서 멈춰서, 더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히 침범하겠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악몽에서, 저 그림자에 침식당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저 질척질척한 광기와 희열에 삼켜져 버리면, 정신의 오염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기지 마. 너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그래서 내가 친히 경고해 주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지독한 감정은 크리스티나와 아니스를 강하게 압박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하멜과 뒤나 옆에 설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하멜의 앞에 설 수 있지. 만약 내가 하멜에게 죽게 된다면, 하멜은 일평생, 그 손으로 직접 죽인 ‘누아르 제벨라’를 생각하며 살게 될 거야. 나도 똑같아. 내가 하멜을 죽이게 된다면, 평생 하멜을 그리며 살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정이 잦아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해. 그를 허용하는 것조차도 내 자비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스멀거리던 그림자가 다시 누아르에게 돌아왔다. 누아르는 조금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진심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라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잠식하던 황혼도 돌아갔으며, 누아르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도 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섬뜩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지금 누아르의 얼굴에 있는 것은, 성녀들이 예전에 몇 번이나 보았던- 그런, ‘평범’의 범주에 들어가는 미소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말이에요. 당신들이 제법 상식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방금은 일부러 과격하게 경고했어요.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누아르의 경고는 쉽고 노골적으로 힘과 격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한테도 전해줘요. 아,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겠죠? 아마 설득해야 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속삭임을 남기고서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르르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이윽고 그 진동은 땅을 넘어 하늘까지 흔들었고, 그렇게 세상을 통째로 흔들었다. 새빨간 황혼의 빛이 누아르를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황혼이 사라지고, 세상이 밤이 되었다. 악몽은 끝났고 꿈이 무너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덜컹!&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자가 흔들렸다. 그대로 뒤로 넘어가려는 찰나, 유진의 손이 크리스티나의 등을 받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지금이 과연 현실인지 꿈인지 명확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한 번 꼬집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통증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통증이 현실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나? 평범한 꿈이나 악몽이라면 이 정도로 분간이 되겠지만, 누아르 제벨라가 직접 만드는 꿈에는 통증도 실재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이건, 현실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의 감정은 저희의 것입니다. 악몽에 의해 증폭되지도, 그 씹어 죽일 갈X에게 지배되고 있지도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탄식을 흘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의자와 함께 성녀의 등을 받치고 있던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찮을 리가 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어본 순간에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스였다. 그녀는 짜증과 분노, 굴욕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가 왜, 이런 초대장을 보낸 것인지는 알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이건…… 아주, 끔찍하더군요. 저와 크리스티나가 보았던 악몽. 우리가 직접 꾸는 꿈이라면 악몽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하찮은 것인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그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까놓고 말해서, 그년이 보여준 악몽은 내가 300년 전에 질리도록 꾸었던 악몽이야. 뭐 그때보다 몇 개 더 생겨나기는 했지만, 아무튼. 진짜 나한테는 악몽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들이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세냐에게 보여주었던 악몽은 하멜의 죽음이다. 엘프의 멸족이다. 베르무트의 배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세냐에게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끌어낼 수 없다. 세냐는 베르무트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하멜이 죽지 않고 환생한 것을 안다. 엘프가 마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아르의 ‘악몽’에서는 현실처럼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악몽은 감정까지 지배해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마법의 여신님조차도 처음에는 압도당했어. 도중에 어찌어찌 떨쳐내기는 했지만…… 저항은 불가능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얘기는 갈X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세냐. 당신이 누아르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년이 뭐라고 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절망과 공포를 느꼈다고 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대답에 세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지만, 무어라 말을 토해내지 못하고 입술만 몇 번 뻐끔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윽고 세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 나는 절망과 공포를 느꼈어. 나로서는 악몽을 파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은 어떻습니까? 세냐. 악몽에서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갈X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악몽을 빠져나온 지금이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똑같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표정을 찌푸리며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몽에 들어가 버리면 그년과 싸움이 성립되지 않아. 그년을 죽이기 위해서는, 악몽이 아닌 현실에서 싸워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가능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대답했다. 그는 아직까지 손으로 받치고 있던, 성녀들의 기울어진 의자를 조심스레 바로 세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편지에 담은 마력만으로 정신을 악몽으로 끌고 갔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불가능하다는 말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인정할 건 인정한다고. 정신계열의 공격에서 누아르는 압도적이다. 아무리 네가 마법의 여신이고, 아니스와 크리스티나가 정신 결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누아르가 ‘직접’ 간섭하려고 든다면 허무히 뚫릴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반박하지 않고 입술을 씹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에도 그랬다. 세냐와 아니스가 아무리 결계를 만들어도, 누아르는 기어코 꿈을 파고들었다. 그때의 꿈은 지금처럼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전투와는 전혀 다른 피로감을 축적 시키며 일행의 정신을 깎아내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당신이 왜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여준 것인지. 왜 우리에게 굳이, 갈X의 경고를 전한 것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처음 회의실에서 들어왔을 때 분위기가 왜 그리도 무거웠는지. 세냐가 왜 그토록 분노와 짜증을 보였는지도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울적한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혼자 갈 생각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제벨라 시티에는 나 혼자 들어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2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득.&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냐가 이를 갈았다. 쿵! 자그마한 주먹이 책상을 두드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고집 좀 꺾어봐!”&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유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아니스는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이미 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설전이 오갔을지를 예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고집을 제가 대체 어떻게 꺾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멜이 고집불통이란 것은 300년 전부터 알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남이 말해서 꺾일 고집이라면 하멜이 그렇게 뒈지지도 않았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거 참, 대체 300년 전 얘기를 얼마나 우려먹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얘기는 당신이 300살이 될 때까지 우려먹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이야기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쩝 입맛을 다셨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 뭐, 내가 고집이 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너희가 가장 잘 알지. 그러니까, 너희가 무슨 말을 하건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 이유부터 들어봅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야! 아니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빽 고함을 질렀다.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니스가 마치 유진의 편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그 자체가 세냐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세냐. 다른 사람이 놀라서 들어오기라도 하면 무슨 변명을 할 생각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론 이 방에서 어떤 난장판이 벌어져도 밖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만, 아니스는 눈을 흘기며 세냐의 말문을 틀어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흥분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하멜은 고집불통에 병신이고 감정적이며 무모하지만, 그래도 정도란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편을 들어주는 거냐, 욕을 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닥치고 듣기나 하십시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아무튼, 저는 하멜이 고집을 부리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싸늘한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그 시선만으로 대답에 대한 압박이 밀려왔지만, 아니스는 직접 입술을 열어 쐐기까지 박아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겠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아니스를 마주 보았다. 그런 구도가 되어버리니,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던 세냐만 괜히 어색하고 민망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냐는 어흠 헛기침 소리를 내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유야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단적으로 말해서, 나 혼자 가는 편이 낫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깔끔한 대답에 세냐의 시선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아니스도 입술을 꾹 닫고서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그렇게들 보지 마. 나 혼자 가는 편이 나은 이유는 더 있어. 우선, 나는 누아르의 꿈에서 저항할 수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가진 신성 때문이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안 되던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억울하단 표정으로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저항할 수 없던 것은 아니라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간신히 정신만 차린 것을 저항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그렇긴 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히려 이게 당연하지 않냐? 내 신성은 아가로트와 빛이야. 세냐 네가 마법사들한테 숭배받는 건 알겠는데, 나에 비할 것은 아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는 말인데 왜 이리도 재수 없게 들리는 것일까. 세냐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합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시선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녀는 차분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하며 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확실해. 당장 내가 신성을 자각하기 전에도 누아르의 꿈에서 벗어났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라비스타에서의 경험을 꿈으로 보여주었을 때. 유진은 그 꿈속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누아르가 얼마나 경악했던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악몽에 휘말리지 않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정을 감추고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대답했는데도 세냐와 아니스는 유진의 속내를 간파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동요는 있던 모양이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중얼거렸다. 세냐도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꿈을 꾼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듣지 못한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물어봤는데 대답 안 해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아니스도 유진에게 바짝 몸을 기울이며 눈매를 치켜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꿈을 꾼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꿈이기는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꿈인데 그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의 마지막.”&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몇 번이나 떠올렸던, 시체가 그득한 황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보았던 꿈은, 아가로트가 느꼈던 절망의 반복이었지. 그때 아가로트는, 자신을 따르는 신군 전원에게 죽음을 명령했다. 그리고 명령대로 모든 신군이 죽었지. 아가로트 본인도 죽었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죽기 전, 아가로트는 성녀의 목을 스스로 부러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꿈이었어. 가공은 전혀 없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가 꾸었던 꿈과는 다르다. 그녀들의 악몽은 추가적인 가공이 있었다. 감정조차도 누아르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유진이 꾸었던 꿈은 다르다. 그 꿈은, 지독한 현실만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의 실패. 절망. 패배. 그 모든 것이 반복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감정은 지배되지 않았어. 누아르가 그럴 의도였을 지는 모르지만, 나는 강압을 느끼지는 않았다. 벗어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쉽게 벗어날 수도 있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 않았을 뿐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대답하고서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그는 넘어질 듯 기울인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왜 하지 않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lt;/p&gt;&lt;p&gt;&lt;br /&gt;&lt;/p&gt;&lt;p&gt;“고통을 느끼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절망을?”&lt;/p&gt;&lt;p&gt;&lt;br /&gt;&lt;/p&gt;&lt;p&gt;“별로 고통을 느끼고 싶었던 것은 아니야. 받아들이려고 했던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의미는 있었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동요는 있었다. 하지만 그 동요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고, 내가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도 전부 다 나의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나 혼자 간다는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와 성녀들과 달리 꿈에 저항할 수 있다. 누아르가 보여주는 악몽은 유진의 감정을 지배할 수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를 상대로 머릿수의 우위는 무의미해. 우리는 이미 300년 전에 그것을 학습했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함께 가봤자 꿈으로 끌려간다면 각개격파 당할 뿐이다. 당연히 이 전투에는 유진의 성기사단도 대동할 수 없다. 오히려 악몽에 끌려간 그들의 공포가 누아르의 양식이 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이거야. 나는 누아르의 꿈에서 멀쩡히 싸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너희는 다르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저와 크리스티나는 당신의 성녀입니다. 이번에는 ‘따로’ 악몽에 삼켜졌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저항할 수 있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확신할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뇨, 확신은 없습니다. 당신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신이 그렇게 명하시는데, 성녀가 어찌 저항하오리까. 얌전히 따를 수밖에 없지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꼬라고 한 말은 아닌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멜. 저는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저희는 당신의 방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보면 진짜 나 혼자 싸우는 줄 알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의자를 똑바로 세웠다. 그 대답에 세냐가 눈을 깜빡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혼자 싸운다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언제 혼자 싸운다고 했냐? 도시 안에 나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 어어, 그게 그 뜻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진짜 마법의 여신 맞아? 하긴, 현명한 세냐라는 이름도 네가 직접 붙인 거였는데. 어쩌면 넌 마법의 여신이 아니라 빡…….”&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내뱉지 않고 일단 입을 다물었다. 세냐가 눈에 불을 켜고서 유진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빡, 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빡 다음에 뭔데. 뭐냐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빡빡이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지만 유진은 저 말만을 반복했다. 여기서 사실 넌 빡대가리의 여신 아니냐는 말을 내뱉어버렸다간, 어쩌면 오늘 유진과 세냐 둘 중 한 명은 죽게 될지도 모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저는 도시 밖에서 당신을 지원할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를 한심하단 듯이 흘겨본 아니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레반테인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저와 크리스티나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비록 저는 당신과 함께 도시에 들어가서 악몽과 맞설 수는 없지만, 도시 밖에서 당신의 승리를 기도하겠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도 일단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떠한 묘수를 떠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엿 같은 도시에 메테오를 처박는 것은 어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옛날에야 마법사 수백 명을 모아서 메테오를 떨궜지만, 이 마법의 여신님에게 더 이상 그런 사전작업은 필요 없다는 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메테오, 유폐의 마왕 손짓 한 번에 막히지 않았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으흠! 손짓 한 번은 아니야. 사슬로 막았다고. 유폐 그 자식도 메테오가 바벨 위로 떨어질 때는 식겁했을걸? 그러니까 부랴부랴 튀어나와서 막은 거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그 메테오라는 거 영 믿음이 안 가. 요란하기만 하고 위력은 별로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네가 메테오의 뭘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만큼은 알지, 나도 대마법사야 임마. 아무리 생각해도 메테오 떨구는 것보다 내가 칼 휘두르는 게 더 셀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메테오에는 로망이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유진은 헛웃음을 뱉을 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로망은 개뿔.”&lt;/p&gt;&lt;p&gt;&lt;br /&gt;&lt;/p&gt;&lt;p&gt;“메테오에서 로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는 결국 마법사가 아닌 거야. 모든 마법사는 메테오에 로망이 있어. 어떻게든 메테오를 한번 떨어트리고 싶어 한다고. 나는,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당장 아롯 마탑주들 전원 불러놓고 물어보면, 다들 메테오를 떨어트리고 싶어 할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왜 하필 메테오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있잖아! 우주에서 운석을 떨어트린다! 단 한 명의 마법사가! 마법으로! 그래서 메테오는 로망 그 자체인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긴. 다른 마법이라면 몰라도 그런 마법을 해보고 싶어도 좀처럼 할 기회가 없으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치? 이해할 수 있지? 그리고 메테오는 바다나 황야 같은 곳에 떨어트리면 안 돼. 도시에 떨어트려야 한다고. 그, 무지막지한 질량체가 도시에 처박히면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 우주적 에너지 앞에서는 허무히 소멸하는…… 그런 종말적인 로망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눈이 몽롱히 젖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 종말적 로망이란 것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무지막지한 질량체를 처박는다는 것에는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용마성을 통째로 추락시켰을 때가 떠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메테오, 어때?”&lt;/p&gt;&lt;p&gt;&lt;br /&gt;&lt;/p&gt;&lt;p&gt;“막힐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해 봐야 아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에 효과가 있어도, 그 안에 있는 나는 어떡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왜 당신 생각만 하는 겁니까? 제벨라 시티에는 자발적으로 찾아간 인질 수백만이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마 지금은 모두 다 제벨라 시티를 떠났을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예전 제벨라 시티에서 유진과 누아르는 그런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때 누아르는, 유진이 올 때는 도시의 모든 관광객을 내보내겠다고 말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미친 갈보는 하멜, 당신과 ‘단둘’인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포로는 그 순간에 있어서 방해일 뿐이겠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메테오 처박아도 되는 것 아냐? 유진 네가 메테오 맞고 죽지는 않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상한 짓 말고 다른 마법으로 해. 도시 밖에서 누아르의 권능을 방해한다든가 하는 식으로.”&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말하니 세냐도 더 이상 의견을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적잖이 아쉬운 것인지 입술은 삐죽 내밀었지만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면, 언제쯤 제벨라 시티에 갈 생각입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당장도 상관없기는 한데, 마지막 조정은 해야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의 세례는 끝났다. 레반테인의 힘도 안정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정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나 혼자 하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표정과 감정을 능숙하게 감출 수 있었기에, 성녀들과 세냐에게 들키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으로 돌아가는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호수 밑의 영맥에 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계수 묘목의 뿌리와 이어진 곳. 유진이 백염식의 수행과 명상을 위한 장소로 애용하던 곳이다. 지금의 유진에게 더 이상 백염식의 수행이나 명상은 필요 없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몰두할 수 있는 장소는 라이언하트에서 저곳이 제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서는 쓰고 싶지는 않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확히 말하자면 유서로 쓰일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준비는 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누아르는 강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이리스, 망령, 가비드, 그들과의 전투에서 ‘죽음’까지는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라이자키아 때 이상으로 죽음에 대한 실감을 느끼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유서는 적어 둘 생각이다. 만약, 패배해서 죽을 지라도. 어떻게든 다음을 도모하기 위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스터.]&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저 회의실을 떠나는 유진의 등을 보고 있던 아니스에게 크리스티나가 말을 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님께는, 누아르 제벨라의 망언을 전하지 않으실 겁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문에서 이미 답이 있습니다. 그 갈보의 지껄임은 망언일 뿐. 전할 이유가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질투?&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언이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는, 세냐는, 누아르에게 질투란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자격? 그것도 우습다. 누아르에게는 성녀들과 세냐에게 자격을 물을 자격이란 것이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망언 중에서, 유일하게 아니스에게 파고들었던 말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만약 누아르가 죽는다면, 하멜은 평생 누아르를 추억할 것이다. 누아르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비웃던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독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사리오를 움켜쥐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3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몽&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생각했던 대로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근 1년 동안 자발적으로 제벨라 시티를 찾아갔던 관광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관광객들은 저번과는 달리, 꿈과 추억에 흠뻑 빠진 폐인이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제벨라 시티에서 보낸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철창에 가두면 머리를 들이박는 등의 자해까지 했던 주제에, 이제는 자신들이 ‘왜’ 제벨라 시티에 찾아간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도시에서의 기억이 통째로 도려내어져 있긴 합니다만, 그에 대한 후유증은 없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건물의 옥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았다. 널따란 공터에 많은 사람이 모여 앉아 웅성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격리소에 격리된 사람들은 모두가 키옐의 제국민으로, 제벨라 시티에서 돌아온 관광객들이다. 그들은 검사를 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격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이런 대대적인 조치는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키옐은 제국인 만큼 인구수가 많고, 당연히 제벨라 시티에서 돌아온 관광객 중에서도 키옐의 제국민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유진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제와 제국 관료들은 관광객들이 세뇌를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게다가 전례도 있지 않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들은 한 번 제벨라 시티에서 나왔었고, 그곳에서의 꿈을 잊지 못해 다시 제벨라 시티로 돌아가겠다고 발광했던 사람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걸 세뇌라고 할 수 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신을 이상하게 만들기는 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후유증은 없다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전에 돌아왔을 때도 처음에는 이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갑자기 변할 수도 있죠. 이만큼의 사람들이 폭주한다면 골치 아플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년 전. 나이트마치에 참석하기 위해 설원을 가로질렀을 때. 시무인의 공주 기사, 스칼리아와 부관인 디오르와 마주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이야 스칼리아는 유진의 열렬한 신도가 되어 시무인에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설원에서 만난 스칼리아는, 누아르에 의한 불면증과 악몽 등으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녀는 설원에서 마주친 용병단을 몰살했고, 그 후에는 환각까지 보며 유진 일행을 공격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저들이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가끔 보면, 당신은 누아르 제벨라를 너무 과하게 신용합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악몽에서 보았던 누아르의 망언이 자꾸 머리를 떠돌았다. 그래서인지 아니스는, 누아르에 대한 옹호를 듣는 것에 짜증이 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게 죽기 전 발악 삼아, 돌려보낸 관광객들을 폭주시킨다. 그게 누아르의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뿐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대는 어떻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패배해 죽으면. 그 갈X는…… 아마…… 세상에 대한 흥미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저는 당신이 패배해 죽는다면 이번 세상은 ‘실패’라고 생각합니다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패배해 죽었을 때를 대비한 유서는 이미 적어놓았다. 그리고 그 유서는, 지금은 제하드의 호위역을 맡고 있는 라만에게 맡겨 놓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니저러니 해도 라만은 유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다. 만약 유진이 누아르 제벨라에게 패배해 죽는다면, 라만은 당부했던 대로 행동할 것이다. 5개의 유서는 모론에게, 길레이드에게, 제하드에게, 세냐에게, 아니스에게 보내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에 대한 흥미가 없어진 갈X가, 꿈으로 접촉했던 이들을 사용해 폭동을 일으킨다. 그것도 있을 법한 일이죠. 하멜, 저는 당신과는 달리 누아르 제벨라에게 신용이란 것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 갈X는…… 제가 여태껏 보았던 마족 중에서 가장 괴짜이며,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입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별로 신용하는 것은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짓말. 아니스는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굳이 뱉지 않고 삼켰다. 그녀는 잠시 유진을 응시하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슬슬 세냐도 도착했겠죠. 갑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의 말대로 워프 게이트에는 이미 세냐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메리를 한 손에 쥐고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세냐의 주변에 검은 기류가 떠돌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잘 된 모양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피식 웃으며 세냐에게 다가갔다. 세냐는 마력을 조작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한쪽 눈만 살짝 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잘 됐지. 이 마법의 여신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잘난 마법의 여신님도 마력은 만들 수 없나 보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못 만들지. 마족도 아니고 흑마법사도 아닌 내가 어떻게 마력을 만들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영력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하다. 세냐가 선택한 방법은 아멜리아를 마력 배터리로 삼는 것. 대수림에 갔을 적만 해도 인형이나 다름없게 된 아멜리아를 직접 데리고 다녀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는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멜리아 머윈은 흑색 마탑에 처박아 놨어. 어차피 그곳은 더 이상 쓰이지 않으니까. 봉인도 잘해놨고. 멜키스가 매일 밥도 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크리온에 흑마법 교본으로 박제해 두는 것도 후보 중 하나였지만, 아직 아멜리아의 마력은 필요한 곳이 많다. 흑색 마탑에 봉인된 아멜리아는 앞으로 세냐가 바랄 때 마력을 뽑아서 메리로 전송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 루드베스는 역시 없었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적도 없던걸.”&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투덜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우리아 해방전 이후로 발자크는 다시 종적을 감췄다. 이전에야 아멜리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유진과 세냐가 은둔한 1년 동안 발자크도 똑같이 세상에서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쩌면 바벨에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가 정말로 유폐의 마왕과 함께 우리를 가로막을 거라고 생각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 당신 설마 그 흑마법사에 정이라도 들은 겁니까? 발자크 루드베스가 당신을 굉장히 존경한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만. 결국 발자크 루드베스는 흑마법사입니다. 그것도 유폐의 마왕과 직접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 우리가 바벨을 오르려는 이상, 발자크 루드베스는 무조건 저희의 앞을 막을 겁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발자크의 비원은 마법사로 역사에 남을 만한 위업을 남겨 전설이 되는 거였지. 세냐 너를 죽인다면 뭐, 전설이 되기야 하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를 죽이는 것보다, 흑마법사로 마왕을 죽이는 것이 훨씬 더 전설적인 위업 아니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그 말에 유진과 아니스는 똑같이 헛웃음을 흘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적어도 가능한 범주의 이야기를 하십시오. 다른 마왕과 계약한 것도 아니고,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발자크 루드베스가 어떻게 주인을 배신하겠습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이 직접 손쓸 것도 없이 ‘생각’만 해도 발자크는 피를 토하며 죽을걸. 그리고 유폐의 마왕은 발자크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잖아. 그런데 배신을 어떻게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그게 될 리가 없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주 조금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세냐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튼. 나는 준비 다 끝났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와 크리스티나의 준비도 끝났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유진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럼 가면 되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현시점에 살아 있는, 헬무드의 유일한 공작. 영지 드리무어와 제벨라 시티의 주인.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족. 몽마의 여왕.&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폐의 마왕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마족이지만, 그런 누아르를 토벌하러 가는 인원은 고작 3명뿐. 대군은 끌고 가지 않는다. 성기사단도, 대마법사들도 없다. 누아르 제벨라 토벌에 참전하는 것은 유진과 세냐, 크리스티나, 아니스뿐이다. 심지어 누아르 제벨라와 ‘직접’ 싸우는 것은 유진 혼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충분하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높다란 성벽에 둘러싸인 대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있다. 예전에 유진이 처음으로 제벨라 시티에 왔을 때. 워프 게이트에서 성문까지 길고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저 환상적인 유흥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성문까지의 길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워프게이트 시설 안에는 몇 명의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길드 소속의 게이트 관리 마법사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괜히 휘말리기 싫으면 도망…….”&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리더니,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고 일렬로 줄을 서서 워프 게이트를 통과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의 마법사들도 진즉에 누아르의 꿈에 사로잡힌 것이다. 유진은 빛이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꺼져 버린 워프 게이트를 보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리가 마지막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가 더 넘어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 시설은 부서지면 안 됩니다. 저는 걸어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유진은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는 굳게 닫힌 성문을 노려보며 망토 안에 양손을 넣었다. 유진은 덩달아 긴장해서 경직된 메르와 라이미르아의 손을 잡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른 전투라면 망토 안까지 피해는 들어오지 않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메르와 라이미르아도 그것에 대해서는 미리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였기에, 얌전히 유진의 손을 잡고 망토 밖으로 나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걸어 나온 둘의 눈동자는 유진에 대한 걱정과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펑펑 울어버릴 것 같은 둘의 얼굴을 보니,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가 뭐 죽으러 가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그런 불길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느니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겁하는 두 꼬마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면서 세냐와 성녀들을 보았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세냐는 손톱까지 잘근잘근 씹어대며 유진과 제벨라 시티의 성문을 번갈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기분은 굉장히 오랜만이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라이자키아도, 아이리스도, 망령도, 가비드 린드먼도 이런 느낌은 주지 않았었는데. 저 굳게 닫힌 성문 너머에 있을 도시가, 세냐에게는 전혀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저 너머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나, 세냐는 저 너머를 지옥이자 마경으로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도망치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스가 로사리오를 움켜쥐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야만 한다면 언제든지 저희께 도움을 청해주십시오.”&lt;/p&gt;&lt;p&gt;&lt;br /&gt;&lt;/p&gt;&lt;p&gt;크리스티나는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유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크리스티나가 말하는 ‘도움’이 어떤 것인지 느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녀에게 나 대신 죽으라고 말하는 신이 어디 있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갔다 올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외에 다른 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호흡과 표정을 가다듬고서 제벨라 시티의 성문을 향해 걸었다. 뒤는 더 돌아보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문에 가까이 갈 때까지 누아르 제벨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 제벨라페이스가 나타나지도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성문 앞에서 일단 걸음을 멈췄다. 알아서 문이 열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으로 일단 문부터 박살 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품 안에서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품속에서 진동하는 편지 봉투를 꺼냈다. 며칠 전 받았던 초대장. 뭔가 싶어서 봉투를 열어보니, 키스마크뿐이던 편지지 대신 전혀 다른 물건이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열쇠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미친.”&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고,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큼직한 성문이 어느새 평범한 문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미 꿈으로 끌려 온 건가? 순간 유진은 그런 의문을 느꼈고, 스스로 부정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현실을 꿈처럼 주무르고 있을 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은 바뀌었지만 닫혀 있다는 것은 똑같다. 유진은 문손잡이를 노려보았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유진은 일단 손잡이를 돌리고, 밀고, 당겨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열쇠를 써서 들어오라는, 노골적이고 뻔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유진은 누아르의 농간에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불꽃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발을 들어 올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꽈앙! 일직선으로 뻗어 찬 발길질이 문을 박살 냈다. 박살 난 문은 뒤로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불타서 재가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문을 발로 차서 부쉈는데 도시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고약하고 짜증스럽게도, 부순 문의 안쪽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러면 내 각오와 결의가 병신같아지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번 더 발로 차버릴까, 아니면 그냥 레반테인으로 베어버릴까. 둘 모두 소용은 없을 것 같다. 이 열쇠를 쓰지 않고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힘 싸움을 벌여야 할 것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혀를 차며 문손잡이를 향해 열쇠를 가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딸칵.&lt;/p&gt;&lt;p&gt;&lt;br /&gt;&lt;/p&gt;&lt;p&gt;손잡이를 돌리는데 더 이상 저항감은 없었다. 유진은 그대로 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한걸음 걸어 들어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한 걸음 더.&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한 걸음 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벽난로. 장작. 따스한 주황색의 불꽃.&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찍한 식탁. 벽 한쪽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 아니, 사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식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찍 왔네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엌에 선 누아르의 등이 보였다. 그녀는 요리를 잠시 멈추고서 유진을 돌아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욕조에 물은 받아놨는데, 목욕 먼저 할 건가요? 아니면 식사부터? 아니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앞치마를 두른 누아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4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저 말을 곧장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누구나 그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오늘 유진은, 많은 각오와 결의를 다지고 이곳에 왔다. 며칠에 걸쳐 감정을 가다듬고,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여 손수 유서까지 적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들어버리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유진은 지금 이 상황, 누아르의 저러한 태도 자체가 그녀답다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라면, 뭘 말하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 어머, 아이, 부끄럽게 참. 하멜. 나한테 직접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짓궂지 않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후후 웃었다. 그녀는 골반을 살랑살랑 흔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곁눈질로 유진을 힐긋힐긋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궁금해요? 내 입으로 직접, 대답하기를 바라나요?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흐흥, 나는 기왕이면 당신이 직접 말했으면 좋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옷차림이 살짝 바뀌었다. 평상복에 두른 앞치마에서 알몸의 앞치마로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녁 식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허리에 두른 앞치마의 매듭을 풀어 내리며, 사뿐사뿐 걸어 부엌에서 멀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해 보니, 나는 당신이 어떤 식사를 좋아하는지는 잘 몰라요. 흔하고 평범하지만 따스한, 그런 가정식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호쾌할 정도로 재료를 통째로 구워 버린 바비큐? 특별한 재료와 조리 기술이 필요한 고급 요리? 후후, 요리란 것은 종류가 워낙 다양하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풋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의 요리는 당신 취향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왜냐면, 이 배경과 상황에는 가정식이 어울리거든요.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글보글. 냄비에서 스튜가 끓었다. 탁탁탁. 진즉에 손을 떠난 식칼이 제멋대로 도마를 두드리며 야채를 손질했다. 치이익. 충분히 열이 오른 팬에 올라간 고기가 기름에 끓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욕.”&lt;/p&gt;&lt;p&gt;&lt;br /&gt;&lt;/p&gt;&lt;p&gt;펑!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 옆에 욕조가 나타났다. 서너 명은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욕조, 출렁 차오르는 온수 위에 풍성한 거품이 얹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 나는 거품 목욕을 좋아하는데. 당신 취향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이쪽이 더 로맨틱할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한쪽 눈을 찡긋였다. 그러자 욕조의 거품이 가라앉고, 물의 색깔이 바뀌었다. 엷은 금색의 물 위에 장미의 꽃잎이 가득 떠올랐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욕조 옆에 자그마한 탁자와 아이스 버켓, 와인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실 나는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하멜, 당신과 함께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떡해, 살짝 상상해 봤는데 너무 즐거울 것 같아. 당신은 어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옷차림이 다시 바뀌었다. 큼직한 목욕가운이 누아르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가운의 매듭을 어루만지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와, 저 커다란 욕조에, 함께 알몸으로 들어가서. 내가 당신의 얼굴에 먼저 거품을 묻힐 거야. 아니면 장미꽃잎을 끼얹던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 죽이겠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그것도 멋지고 사랑스러워. 아무튼, 이건 ‘목욕’의 이야기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한 걸음 걸었다. 또다시 옷차림이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가운을 두르지도, 알몸에 앞치마를 두르지도 않았다. 처음 이 ‘부엌’에서 보았던- 평소의 누아르라면 입지 않을, 화려함과 노출은 일절 배제한 평상복.&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말이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벽난로의 불꽃이 발하는 따스한 주황빛이 누아르의 얼굴을 비추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 나를 선택해 줬으면 좋겠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긋 웃는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시 동안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벽난로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의 소리. 흔들리는 불꽃과 주황색 빛깔의 온기. 보글보글 끓고,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식욕을 돋우는 요리의 냄새. 욕조의 장미향.&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한가운데에 선 누아르 제벨라.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있었다. 화려함이라곤 없는, 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은 오래전 하멜이 그렸던 ‘미래’다. 언젠가 모든 마왕을 죽이고, 마경을 떠나게 된다면- 이렇게 살고 싶었다. 그것이 당시 하멜이 바라던 ‘꿈’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시절 하멜이 그리던 꿈에 ‘누아르 제벨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해서는 안 됐다. 그러니 지금의 꿈은 악몽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악몽을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하멜과 달리 아주, 아주 잠깐 망설임을 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일 뿐이었다. 망설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유진의 몸에서 치솟은 불꽃이 사방을 휩쓸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까운 곳에 있던 욕조가 박살 나고 물이 증발하고 장미꽃잎이 재가 되었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던 따스하고 작은 불꽃이 열화에 삼켜졌다. 서로를 마주 보던 의자와, 반짝이는 접시와 깔끔한 식기가 놓인 식탁이 불길에 뒤덮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그 너머에 있다. 저녁 식사를 앞두어 평화롭던 부엌이 겁화(劫火)에 휩쓸리고 있지만 누아르의 얼굴은 태연했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누아르를 삼키려는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 바뀌었다. 불꽃도 사라졌다. 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 이곳은 평범한 가정집의 부엌이 아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널따란 홀. 나선 형태의 계단. 붉은 카페트. 화려한 대저택의 중심.&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이 보였다. 배경이 바뀌었다. 사진도 조금 바뀌었다. 유진은 무뚝뚝한 얼굴로 사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에는, 환히 웃고 있는 유진과 누아르가 있었다. 방금의 꿈에서 둘은 소박한 차림었지만, 지금 꿈의 사진은 달랐다. 사진 속의 유진은 말끔한 턱시도를 입었고, 누아르는 아름다운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잠시 사진 속의 누아르를 보았다. 저 흰색 드레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웨딩드레스. 커다란 부케를 가슴에 안은 누아르의 미소는 ‘행복’이란 단어를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 속의 유진도 마찬가지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개인적인 취향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선의 계단에서 누아르가 걸어 내려왔다. 방금의 꿈과 옷차림이 달랐다. 역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누아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대저택이나 성에서 사는 거예요. 여태까지 나는 항상 그랬었고, 이러한 곳이 내게 어울려.”&lt;/p&gt;&lt;p&gt;&lt;br /&gt;&lt;/p&gt;&lt;p&gt;느긋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누아르가 유진을 향해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아까와 같은 초라하고 작은 집도 좋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의견은 듣지 않는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 당신의 의견이라니, 그건 아까의 꿈으로 보여주었잖아요? 설마 나한테 거짓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촥. 누아르는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의 꿈. 그 풍경은 하멜, 당신이 바라던 것이에요. 나는 그것을 300년 전부터 알았죠. 기억하죠? 하멜. 내가 처음으로 당신의 꿈에 파고들었을 때. 당신이 얼마나…… 후후, 설마 몰살의 하멜이라고 불리며 마족에게 두려움을 받던 자가, 이렇게나 평화롭고 귀여운 꿈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화난 표정은 짓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꿈을 보여주었을 뿐이에요. 아, 혹시, 내가 마음대로 꿈을 바꾼 것이 불쾌해서 그런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탁. 펼쳤던 부채가 접혔다. 곧게 세운 부채가 누아르의 얼굴을 둘로 갈랐다. 행복해 보이던 미소가 얼음 같은 냉소로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바꿔야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하멜이 바랐던 ‘꿈’에서의 반려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 평화롭고 작은 집에서, 누가 자신을 기다리기를 바랐는지를 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꿈도, 내 꿈도 싫다면. 이런 꿈은 어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아악! 또다시 꿈이 바뀌었다. 화려한 저택이 무너져내렸다.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사진이 사라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배경이 바뀌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그마한 집은 싫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저택이 좋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와르르르! 텅 비었던 세계에서 저택이 세워졌다. 유진은 조금 떨어진 하늘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숲이 많고 공기가 좋은, 하늘이 높고 푸르른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뚝 선 저택의 주변에 나무들이 돋아나 숲이 되었다. 텅 비었던 하늘에 그림처럼 예쁜 구름이 나타나고 빈자리를 푸른색이 칠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밤이 되면 별이 잔뜩 뜨는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구름이 사라졌다. 푸른색 위에 검은색이 덧칠되었다. 콕콕 점을 찍은 것만 같은 별이 잔뜩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짠 바람 부는 바다보다는 완만한 강줄기가 흐르는 곳.”&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르! 숲이 통째로 흔들리더니 지면이 쩍쩍 갈라졌다. 그렇게 강이 만들어졌다. 숲을 구불구불 가르는 강줄기가 저택의 뒤를 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별채 하나는 통째로 서재로 삼고 싶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저택 옆에 별채가 불쑥 나타났다. 그것을 본 순간, 유진은 어느새 별채의 안으로 이동해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누아르의 의지를 따르고 있다. 그녀가 ‘서재’를 말했기에, 꿈속의 별채에는 즉시 서재가 생겨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해가 저물면 벽난로를 피워, 따스한 주황 불로 서재를 밝힐 거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것도 없던 벽에 벽난로가 나타났다. 최초의 꿈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불꽃이 서재를 밝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곳에서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를 제외하고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누아르가 나타났다. 그녀는 커다란 담요를 몸에 두르고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끼익, 끼익. 의자와 누아르가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흔들면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언가를…… 적을까요? 내가? 아하하,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책이 사라졌다. 누아르는 책 대신 나타난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꿈에서, 당신은 어떨까요? 하멜. 여러 무기나 휘두르고 땀을 잔뜩 흘리고 와서. 혼자서 마음대로 씻고, 젖은 머리를 털며 서재에 들어올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나는 당신의 태도를 문제 삼아 핀잔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조금 투덜거리기는 하겠죠. 하멜, 설마 혼자 씻은 거예요? 목욕은 언제 어느 때건 함께! 둘이서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하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깔깔 웃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즐거움’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표정도 마찬가지다. 그저 곡선일 뿐인 웃음이 섬뜩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고 나서, 우리는 가끔 옛날 추억을 떠올리는 거죠. 야외에서 캠핑? 싫어, 나는 당신과 함께 침대에 누워서 속삭일 거야. 아니스? 모론? 베르무트? 내가 왜?”&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내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하멜,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돼. 나도 당신의 곁에 있을 거고. 우리는 그렇게…….”&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의 꿈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게, 세냐의 꿈이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의자가 삐걱거렸다. 누아르는 의자와 함께 몸을 젖히면 배를 잡고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맞아요! 이 풋풋하고 귀여운 꿈은 세냐 메르데인의 꿈이에요. 왜요? 이것도 싫어요? 그렇다면 아니스의 꿈을 보여주죠. 그거 알아요? 하멜. 그 뱀 같던 성녀가, 당신과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여자는 말이에요, 전쟁이 끝난 후에! 당신과 세냐의 결혼을 축복하고, 홀로 사라질 생각이었어요. 표면은 그랬죠. 하지만 심부는 그렇지 않았어. 성녀니 뭐니 해도 결국은 여자니까! 그 여자는 말이에요, 사실은 세냐에게 당신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 했어요. 어디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서, 술과 음식을 파는 여관이라도 세워서! 당신과 살다가 죽고 싶어 했다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뚝.&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목소리가 멈췄다. 저만큼 감정을 담아 외쳤지만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아르는 굳이 한 번의 침묵을 가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안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흔들의자에서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이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하멜, 당신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한 이유는 보통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또각. 높은 구두굽이 바닥을 밟는 소리. 그것뿐인데도 ‘소리’는 굉장히 커다랗게 유진을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년 전의 나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죽었던 당신이 환생하고, 다시 만나게 된 것에 운명적인 설렘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랑은 내가 일방적이었잖아요? 응, 그러니까, 당신이 누구를 가슴에 품고,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쿵. 이번의 발소리는 울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서재가, 별채가, 아니, 꿈 전체가 천근이 되어 유진을 짓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제는 달라. 오늘은 안 돼. 당신의 꿈, 나의 꿈, 세냐의 꿈, 아니스의 꿈, 그 어떤 꿈이건 상관없어. 오늘, 지금 이 순간은 오직 우리 둘만의 것이야. 당신이 꾸는 모든 꿈에는 오직 나, 누아르 제벨라만이 존재하고 내가 중심이어야 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독하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바람과 꿈을 물었던 주제에, 결국 네 멋대로 하는 거냐, 누아르 제벨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망토가 열렸다. 투명한 유리의 칼날을 가진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월광검 레반테인. 누아르는, 오랜 벗의 목숨을 끊은 검을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꿈이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별채는 이미 무너졌다. 숲이 흔들리고 강줄기가 치솟았다. 높은 밤하늘에 떠오른 달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별들은 모두가 눈동자로 바뀌어 유진을 내려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도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지 않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하지 않았다. 옆으로 들어 올린 레반테인. 유리의 칼날 안쪽에서 불씨가 피어났다. 빠지지직! 검붉은 불꽃이 칼날을 집어삼켰다. 그것만으로도 꿈이 통째로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역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그러진 달 아래에서 누아르가 몸을 기울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식사나 목욕이 아닌 나를 선택하는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의 불꽃이 밤을 갈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5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연속된 꿈에서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감정은 유진의 것이다. 지금 이곳이 누아르가 지배하는 꿈의 한가운데라고 해도, 유진의 감정은 누아르에게 지배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찬가지로 유진의 존재는, 꿈속에 존재할지라도 누아르에게 지배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은 배경과 상황으로 존재할 뿐. 유진 본인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꿈 자체를 내 간섭은 받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몇 번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꿈을 꿈이라 자각해도, 꿈 자체는 누아르가 쥐고 있다. 꿈에 대한 지배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국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무식한 것부터 시도해야 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것이 올바른 답이란 확신은 없지만, 지금 유진이 할 수 있는 방법 중 최선은 꿈 자체를 부숴 버리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유리의 칼날을 휘감은 불꽃이 격렬히 몸을 떨었다. 유진은 칼자루를 거머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뒤흔들리는 밤하늘. 일그러진 달을 등진 누아르가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일단은 말이에요. 나도 정말 궁금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모습은 아까의 대저택에서 변하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전투’에는 도저히 맞지 않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는 풍성한 프릴이 달렸다. 양팔은 팔뚝까지 올라오는 길고 하얀 장갑을 꼈고, 왼손에는 접힌 부채를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천천히 들린 부채가 누아르의 얼굴 앞에 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악. 부채가 펼쳐졌다. 드레스만큼이나 화려한 부채가 누아르의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눈동자는 가리지 않았다. 빙그레 곡선을 그린 눈동자가 등진 달이 만든 그늘에서 빛을 발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정말로, 이 꿈에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유진은 옆으로 든 레반테인을 당겼다. 칼날이 하늘을 향하고, 넘실거리는 불꽃이 달을 삼킬 듯 혀를 날름댔다. 찌직, 찌지직…… 백염식의 불꽃이 레반테인과 공명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길 수 있냐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지만. 유진은 입을 열어 대답해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한 대답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네게 패배하고 죽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네 미쳐 버린 집착에 어울려 주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야. 나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점점 번져가는 불꽃이 꿈의 흔들림을 보다 격렬히 바꾸었다. 레반테인과 백염식의 공명은 확실하게 꿈의 영향을 주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흩날리는 불티가 유진의 등에 모이더니 불꽃의 날개가 되었다. 꿈속 밤의 어둠에서 프로미넌스의 검은 불꽃은 확연히 다른 색을 띠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를 죽이러 온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말을 내뱉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됐다. 누아르는 오싹한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부채에 가려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응, 알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저 표정, 감정, 대답, 모든 것에서 하멜의 의지를 느꼈다. 저 의지는 의연하고 필사적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감정이 매몰되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지금의 하멜이 레반테인과 닮았다고 느꼈다. 저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의 칼날은 살짝 두드리기만 해도 깨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되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연약해 보이는 유리의 칼날에는 세상을 모조리 불사르고도 남을 겁화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얼마나 많은 각오를 하고 이곳에 왔는지, 나는 알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쩌저적……! 일그러진 보름달에 균열이 일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은 나를 죽이러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뿐만이 아니죠. 당신은 나에게 죽을 각오도 하고 왔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름달의 균열이 점점 크게 번져갔다. 균열에서 갈라져 나온 파편과 부스러기가 누아르의 뒤에서 흩날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은 내가 만들어 지배하는 꿈. 인정하죠, 하멜. 나는 이 꿈에서 당신의 존재와 감정만큼은 지배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감정과 기억은 볼 수 있어요. 나의 하멜. 당신은, 유서를 남겼군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보름달의 붕괴가 가속되었다. 이제 누아르의 뒤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보름달이 아니었다. 산산조각이 난 달의 파편들이 누아르의 뒤에서 원을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나로서는 그 유언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멜,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이 죽은 뒤에, 과연 모론 루하르가 당신을 대신해 그 레반테인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유폐의 마왕이 ‘특별하게’ 여기며 기회를 주는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아니라면 유폐의 마왕은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넓게 펼쳐지는 달의 파편에 별들이 호응했다. 출렁거리는 밤의 어둠에서 벗어난 하늘의 모든 별이 누아르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과연, 당신을 대신해서 라이언하트가 멸망의 마왕 앞에 설 수 있을까? 길레이드 라이언하트? 기온 라이언하트? 카르멘 라이언하트? 아하하, 설마 어리고 나약한 쌍둥이가 멸망의 마왕과 대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몰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인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어떻게든 할 거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허무히 끝날 만큼, 나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이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믿고 유서를 적은 거다. 내가 죽으면, 모론이, 세냐가, 아니스가, 나 대신에 유폐의 마왕을 죽일 거다. 멸망의 마왕의 앞에 서는 자격이 라이언하트의 피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투욱.&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의 발이 가볍게 지면을 밀었다. 그렇게 유진은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행히도 라이언하트는 식구가 굉장히 많아서 말이야. 필요한 자격을 충족하는 식구는 넘치도록 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 그 말이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알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런 유서라도 남겨야 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어떻게든 살 생각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쉽지 않을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 쉽고 간단해. 내가 죽기 전에, 누아르 제벨라, 너를 죽이면 어떻게든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모하다. 가능성이 적다. 그래서 필사적이다. 프로미넌스가 더욱 활활 타올랐다. 저 불꽃의 외날개는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유진에게 성역을 두른다. -키이잉! 누아르가 만든 꿈속에서 유진의 성역이 존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성역과 꿈이 충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누아르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깨를 감싸안은 왼손이 움직였다. 새하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며 빙글 원을 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이 하는 말은 조금도 쉽고 간단하지 않아. 나를 죽인다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우우우! 밤이 울부짖었다. 본격적으로 붕괴가 시작되었다. 산산조각이 난 달과 별이 밤의 어둠을 갈기갈기 찢으며 추락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없이 펼쳐지고 높고 먼 밤하늘. 그곳에 뜬 달과 별은 손바닥으로 가리고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만큼 작다. 하지만 추락하여 가까이 다가오니 더 이상 작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냐가 ‘로망’이라며 떠들었던 메테오. 그 압도적 질량의 대마법을 메테오 ‘따위’라고 취급할 수 있을 폭력이 유진에게 집중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현실이 아니다. 절대로 현실일 수가 없다. 현실에서 이렇게나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산산조각이 난 달이 추락한다면 세상이 통째로 멸망해 버릴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이 가능하다. 모든 것은 악몽의 한순간일 뿐. 세상을 통째로 멸망시킬 별과 달의 폭격에서도 누아르의 꿈은 끝나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유진은 죽을 것이다. 유진의 신성과 직관이 그러한 경고를 느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로망이라.’&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이기에, 현실에서 불가능한 폭력이 가능하다. 그것이 무조건 누아르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존재라면 꿈에 끌려들어 온 순간 저항이 불가능하겠지만, 유진은 저항이 가능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래서 프로미넌스를 펼친 것이다. 확장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방어와 강화로서 몸에 두른 성역. 꿈과 충돌하며 섞여 들어간 성역이, 유진이 바라는 ‘꿈’을 실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르르르! 레반테인의 칼날이 덜덜 떨렸다. 유진은 호흡을 삼키며 왼손을 들었다. 칼날에서 옮겨간 신화(神火)가 왼손을 감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곳이 현실이라면 절대로 벌써 이그니션은 쓰지 않는다. 전투를 결정지을 국면도 아니고, 한번 써버리면 신력이 봉인되어 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맙소사.”&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역으로 꿈을 이용할 줄이야! 누아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렇지만 감탄과 상관없이 달과 별은 추락하고 있다. 기어코 찾아온 대재앙적인 폭력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비현실의 광경은 하늘이 완전히 무너져서 지면과 하나가 되는 것만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그니션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꿈에 녹아든 성역이 계속해서 유진의 바람을 실현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잠깐.”&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란 감정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이곳이 꿈이라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환상의 마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거기에 지금의 나는 위신의 마안까지 가지고 있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꿈의 지배자는 나예요.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감당할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몽을 꾸고 일어난 뒤에 식은땀을 흘리고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처럼. 꿈속에서 추락하여 현실에서도 똑같은 추락감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는 것처럼.”&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이 꿈에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의 당신에게도 영향이 갈 거예요. 이그니션은 괜찮아. 그건, 당신이 몇 번이고 겪어서 익숙하니까. 하지만 이건 달라요. 이건, 현실의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하나 더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니.”&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내뱉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감당할 수 있다. 과부하에 뇌가 터져버린다면, 내 성녀가 어떻게든 해 줄 거다. 꿈에 정신이 박제된다면 세냐가 어떻게든 해줄 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레반테인이 계속해서 늘어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현실의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그게 지금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냐. 이 꿈에서 죽어버린다면 현실이 무슨 소용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개로 늘어난 레반테인의 불꽃이 하늘과 지면의 사이를 가득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버틸 수 있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멸망의 마왕, 그 중심에서도 버텼던 정신이다.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꼴사납고, 가능성 희박한 이야기만 적은 유서가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숨을 삼키며 ‘진짜’ 레반테인을 쥐었다.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이 똑같이 불을 뿜었다. 세상을 통째로 멸망시킬 대재앙에 맞서 겁화가 피어올랐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소리조차 소멸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레반테인에 재가 되었다. 추락하던 달의 파편이 모조리 불탔다. 더 이상 꿈속 하늘은 밤이 아니었다. 레반테인의 불꽃은 밤의 어둠마저 소멸시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커멓던 밤에 불꽃이 녹아든다. 그렇게 세상이 황혼과 같은 빛으로 바뀌었다. 누아르는 여전히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파괴에도 누아르는 휩쓸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이 황혼의 빛깔은 누아르에게 작은 동요를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멋져.”&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멜이 역으로 꿈에 간섭하여 저지른 터무니없는 짓. 그건 확실하게 누아르를 당황시켰다. 설마 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장을 이점으로 삼을 줄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부족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상과 하늘을 모조리 지워 버린 겁화가 누아르를 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이 정도로 죽음을 느낄 수 없게 됐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입가를 가리던 부채가 접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하나의 꿈이 접혔다. 하지만 꿈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의 꿈으로 바뀔 뿐이다. 끝나고 바뀌어 시작하는 것에 간극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십 자루의 레반테인. 유진의 성역으로 존재하던 꿈이, 보다 커다란 꿈에 잡아먹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펑, 펑, 펑, 펑! 끔찍하던 겁화가 흔들어 열은 샴페인의 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날아간 코르크가 천장에 부딪히고 떨어졌다. 유진의 몸이 한 번 휘청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갑작스레 세상이 바뀌었고, 어느새 유진은 땅에 서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더 이상 이곳은 세냐가 꿈꾸던 저택이 아니다. 공기가 좋고, 하늘이 높고 푸르고, 완만한 강줄기가 흐르는 숲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세상 어딘지 모를 한적한 곳. 워프게이트 대신에 마차와 수레가 다니는 곳. 가을에는 논밭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시골 마을. 여행자를 상대하는 자그마한 여관.&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머, 당신.”&lt;/p&gt;&lt;p&gt;&lt;br /&gt;&lt;/p&gt;&lt;p&gt;개방된 부엌에서 걸어 나온 누아르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양손에 든 맥주를 흔들며 방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카운터에 서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 거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아니스의 꿈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무리 우리 여관이 장사가 잘되지 않아도, 주인이라면 손님을 기다려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끝까지 듣지 않았다. 유진은 앞으로 달려들어 누아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퍼벅! 누아르의 머리가 토마토처럼 펑 터졌다. 아니, 비유로 끝나지 않았다. 누아르의 머리는 정말로 토마토가 되었다. 터진 토마토의 과육이 철푸덕 아래로 떨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말했잖아요, 하멜.”&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바닥의 과육을 밟아 으깨면서, 양손에 들고 있던 맥주 한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굉장히 어렵고 힘들 거라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 이그니션이 켜졌다. 콰르르르! 불꽃의 폭풍이 여관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맥주를 홀짝거리던 누아르도 불꽃에 휩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격렬하던 불꽃이 모조리 찻잔 속 태풍이 되었다. 유진은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는 어느새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룰렛. 건너편에서 딜러를 보던 누아르가 수북하게 쌓인 칩에 눈짓을 보내며 배시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베팅?”&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직! 유진의 발이 룰렛을 찍어 부쉈다. 그대로 누아르의 멱살을 쥐고 레반테인을 처박으려는 찰나. 다시 지금의 꿈이 접히고 새로운 꿈이 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도회다. 이번 꿈에는 누아르와 유진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남녀가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춤을 추는 모든 여자가 누아르다. 남자는- 얼굴만이 깔끔하게 지워진 유진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춤도 괜찮지 않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수십 명의 누아르가 유진에게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시무인이 생각나네요. 나는 그때 당신과 춤을 추고 싶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트너가 없는 진짜 누아르가 유진을 향해 사뿐사뿐 다가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당신은, 나를 보내고 세냐 메르데인과 춤을 추었지.”&lt;/p&gt;&lt;p&gt;&lt;br /&gt;&lt;/p&gt;&lt;p&gt;부채를 펼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낀 하얀 장갑을 천천히 벗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가 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벗은 장갑을 유진의 얼굴에 던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 결투를 하죠.”&lt;/p&gt;&lt;p&gt;&lt;br /&gt;&lt;/p&gt;&lt;p&gt;웃음기 가득한 속삭임.&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냥 던졌을 뿐인 얇은 장갑이 유진의 머리를 박살 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6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전생과 현생을 살며 이런저런 일을 겪고, 다양한 부상도 입어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유진조차도 머리가 통째로 박살이 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족의 머리는 셀 수 없이 많이 부숴보았지만, 유진 본인의 머리가 부서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머리가 부서지면 죽는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존재는 머리가 부서지면 죽어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죽지 않았다.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기묘하고 역겨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은 박살 나서 흩어지는 머리뼈와 뇌의 파편을 보고 있다. 피인지 뇌수인지 모를 액체가 촥, 터지는 것을 보고 있다.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 눈동자에 따라 시야가 엉망으로 뒤흔들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가 부서진 것에 대한 통증. 어지럽게 섞이는 시야.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는 기묘하고, 역겹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이 아닐지라도, 지금 유진이 느끼는 감각은 현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현실에서도 머리가 부서진다면 지금 같은 감각을 느낄 것 같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윽고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통제를 벗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촥, 촥! 지저분한 목의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광경은 유진에게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해자의 입장에서였다. 유진 본인이 이런 꼴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신성을 얻었다고 해도 근본이 인간인 이상, 머리가 날아가면 죽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살아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빠르게 생각했다. 머리가 부서졌지만 사고는 이어지고 있다. 복합적이고 끔찍한 통증이 이성을 날려버리려 하고 있지만, 유진은 고통에 휘말리지 않고 차분히 버텨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휘둘리지 마.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마.’&lt;/p&gt;&lt;p&gt;&lt;br /&gt;&lt;/p&gt;&lt;p&gt;자기암시처럼 되뇌었다. 머리가 부서진 것은 사실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휘둘려 매몰되어 버리면, 곧장 누아르 제벨라의 악몽으로 이어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를 잃은 몸이 자리에 주저앉아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고 있지만, 프로미넌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의 성역은 여전히 이 터무니없는 꿈속에서 유진을 지키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다시.’&lt;/p&gt;&lt;p&gt;&lt;br /&gt;&lt;/p&gt;&lt;p&gt;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라라락! 흩어진 뇌수가 돌아가고, 뇌가 모이고, 머리뼈가 달라붙고, 데굴데굴 구르던 눈동자가 본래 있던 구멍으로 되돌아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 유진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진은 헉하고 숨을 삼키며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지면을 밀어서 일어서려는 순간.&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하하.”&lt;/p&gt;&lt;p&gt;&lt;br /&gt;&lt;/p&gt;&lt;p&gt;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아르의 웃음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무도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하자며?”&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춤을 추던 수십 명의 누아르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널따란 무도회장에는 오직 유진만이 서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리고 누아르는 높은 곳에서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유진은, 보름달만큼이나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무도회장에서 유진이 볼 수 있는 것은 누아르의 ‘눈동자’뿐이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장난이에요, 장난. 하멜, 제가 당신과 결투하고 싶을 리가 없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쿠르르르! 눈동자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거대한 ‘손’이 유진을 향해 내려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투 말고, 인형 놀이는 어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거대한 손가락이 유진을 잡으려고 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커진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이 작아진 것일까?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콰르르! 레반테인의 불꽃이 누아르의 손가락을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음.”&lt;/p&gt;&lt;p&gt;&lt;br /&gt;&lt;/p&gt;&lt;p&gt;커다란 손가락이 불꽃을 피했다. 움직임 자체는 가볍고 동작도 크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일그러지고 멀어지는 공간 때문에 불꽃은 손가락에 닿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그 불꽃이 싫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지지지직! 멀어졌던 공간이 구겨지면서 유진을 압박했다. 아주 잠깐 유진의 움직임이 멈췄고, 누아르의 엄지손가락이 검지손가락을 구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닿고 싶지 않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뻐어억! 튕겨 나간 손가락이 허공을 강타했다. 구겨지며 압박하던 공간이 유진과 함께 통째로 뜯겨 날아갔다. 유진은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모든 공간이 누아르의 지배를 받는 이상 프로미넌스의 공간도약을 사용이 불가능하다. 성역의 권능도 꿈속에서 유진을 보호하는 것이 한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반면에 누아르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현실에서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데, 이곳 꿈속에서 누아르는 전지전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레반테인의 불꽃은 유효한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 본인이 방금 내뱉은 것과는 관계없이, 유진이 판단하기에도 레반테인은 누아르에게 유효하다. 애당초 레반테인마저 무효한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신성월광검은 신대의 마지막과 지금의 시작부터 존재한 모든 신들의 염원을 녹여낸 검이다. 유폐의 마왕과 멸망의 마왕을 죽이기 위한 결전병기란 말이다. 아무리 누아르 제벨라가 악신이 되었다고 해도, 레반테인이 무효할 리가 없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문제는, 레반테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직접 닿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가비드와의 결투에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베르무트도 말했듯이, 가비드는 정통적인 검사다. 위신의 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가비드의 전법은 정면승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누아르는 다르다. 애당초 그녀는 ‘정면승부’라는 것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레반테인을 아무리 휘두른들 누아르에게는 닿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화륵. 레반테인이 다시 증식하기 시작했다. 구겨지고 펴지는 것이 반복되던 공간에 수십 자루의 불꽃이 나타났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까는 놀랐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먼 천장 위에서 누아르가 코웃음을 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력 자체는 복제되어도 신성은 복제할 수 없어요. 이곳은 내가 만든 꿈이니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우직, 우지지직! 불꽃에 휩쓸리던 무도회장이 뒤흔들렸다. 공간 자체가 종이로 만든 인형의 집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붉은 커튼에 가려져 있던 창문이 박살이 났다. 휑하니 뚫린 창문에서 누아르의 눈동자가 보였다. 요악한 빛을 발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뭐, 신성이 없다고 해도 위력은 대단하지만. 하지만 나를 죽일 정도는 아니야. 지금 꿈이 모조리 불타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사삭! 무도회장과 저택이 사라졌다. 그 즉시 프로미넌스가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아까는 꿈이 끝나고 새로 열리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포착할 수 있었다. 지금껏 펼쳐졌던 꿈이 말끔하게 소멸하고 새로이 구성되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촤아아아악! 거대한 파도가 유진을 덮쳤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파도였다. 짭짤한 소금기 어린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의 우짖음. 유진은 일단 레반테인을 휘둘러 파도를 베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타 버린 꿈을 뒤로하고, 새로운 꿈을 꾸면 돼.”&lt;/p&gt;&lt;p&gt;&lt;br /&gt;&lt;/p&gt;&lt;p&gt;파도를 베자마자 평온히 가라앉은 바다가 나타났다. 육지라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광활한 바다의 한가운데. 거대한 플라밍고 튜브 위. 커다란 파라솔 아래의 썬베드에 누아르가 누워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가릴 만큼 커다란 선글라스를 위로 올리며 방긋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기왕 바다에 왔는데, 일단 여유를 즐기는 것은 어떨까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오일 병을 내밀며 속삭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서로 오일이나 바르면서.”&lt;/p&gt;&lt;p&gt;&lt;br /&gt;&lt;/p&gt;&lt;p&gt;“허.”&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쯤 되니 유진도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드넓은 바다의 끝을 헤아려보며 중얼거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 대체 어디까지 가능한 거냐?”&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에서라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불가능한 것이 없죠. 당신이 생각한 대로에요, 하멜. 저는 꿈속에서는 전지전능하다고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여유는 허세가 아니다. 지금의 꿈은 여태까지보다 훨씬 넓다. 오두막, 숲, 저택, 무도회장, 그렇게 배경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곳은 정말로 무한히 펼쳐진 바다다. ‘끝’까지 보다도 육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진이 관측하려 하면 오히려 바다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런 꿈이다. 꿰뚫어 보려 할수록 오히려 압도되어 버린다. 이 무한히 펼쳐진 몽중에서 유진의 성역은 너무나도 작아 초라할 정도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상상 이상이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가늠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유진을 납득할 수 없게 만들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가 300년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최적의 효율을 추구하여 정기를 모았다고 해도. 최근 몇 년 동안 제벨라 파크를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정기와 욕망을 수급했다고 해도, 이건…… 납득이 되지 않을 만큼 과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찌릿. 유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누아르의 왼쪽 눈동자.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마안. 가비드에게 직접 넘겨받은 위신의 마안. 다시 생각하고 꿈을 보았다. 이윽고 유진은 납득할 수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위신의 마안을 사용해 ‘꿈’을 통째로 유폐해 버렸다. 바깥 세상과, 현실과 완전히 단절하고 그 안을 환상으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구성한 ‘꿈’에 현실의 구분은 없다. 이 세계에서 누아르가 바라는 모든 환상이 현실이 된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해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왼손에 오일을 듬뿍 짜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알겠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예요. 꿈속에서의 나는 300년 전부터 무적에 준했어요. 지금은? 아하하, 말할 필요가 있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락. 어깨에 두르고 있던 비치타월이 흘러내렸다. 살랑거리던 꼬리가 누아르의 등 뒤로 올라가더니, 가슴을 가린 비키니 수영복의 끈을 당겼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의 발악과 저항은 즐겁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 그러니 지금은…… 다른 것을 즐겨보자고요. 서로 오일을 바르고, 함께 누워 일광욕을 하고.”&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아…… 오해는 말아요, 하멜. 나는 당신과 ‘다른’ 결말을 바라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죽일 거고, 당신도 나를 죽여야 해.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과정인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눈을 감고 생각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러니까, 당신도 잠깐은 즐기는 것이 어때요? 여태까지 많이 힘들었잖아요. 하멜. 원치도 않는 환생을 반복하고. 수많은 기대에 따르면서. 아, 물론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누구의 기대가 없었어도 지금처럼 했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 완전한 세계를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을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가로트를 몰랐어도. 하멜의 환생인 이상, 당신은 지금처럼 했을 거야. 라이언하트가 아닌 평범한, 아니, 그만도 못한 비루한 가문에 태어났어도. 당신은…… 어떻게든 내 앞에 왔을 거야.”&lt;/p&gt;&lt;p&gt;&lt;br /&gt;&lt;/p&gt;&lt;p&gt;위신의 마안으로 유폐해 버린 세계. 환상의 마안으로 구축한 꿈. 이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연료는 누아르가 여태까지 쌓아 올린 모든 힘. 거기에 제벨라 시티의 염원을 꿈으로 이뤄준 것으로 얻어 낸 숭배와 신앙. 이 꿈은 누아르 제벨라의 성역이다. 아가로트와 빛의 신성을 지녔다고 해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고작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런 말은 잔혹하게 들리겠지만, 하멜. 이곳이 당신의 종착지예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속에서 누아르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반테인은 닿지 않는다. 꿈 자체를 파괴하는 것을 반복하더라도 누아르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꿈을 다시 시작해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나를 이길 수 없어요. 당신이 나를 죽이기 위해 준비했듯, 나도 당신을 죽이기 위해 준비했어요. 당신은 여유를 부리지 않고 나를 죽이러 왔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늦었던 거예요. 나는 언제고 하멜, 당신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lt;/p&gt;&lt;p&gt;&lt;br /&gt;&lt;/p&gt;&lt;p&gt;꿈을 부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부수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의미가 있나?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해 버리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알고는 있다. 이그니션을 반복하고, 레반테인을 증식하고, 휘둘러도, 지치지는 않는다. 그건 누아르도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이 싸움은 누군가의 정신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는지. 누가 끝나지 않을 반복에 마모되어 포기하는지로 승패가 갈려 버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하멜. 끝나기 전에 잠깐 즐기면, 서로 미련이 덜할지도 모르잖아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사라락. 끈이 풀린 수영복이 내려왔다. 누아르는 투명한 오일을 양손으로 받치며 배시시 웃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감은 눈을 떴다. 동요라곤 없는 금색 눈동자. 굳게 다물린 입술. 그 얼굴을 보고서, 누아르는 눈썹을 찌푸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가 싫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결론은 내렸다. 유진 혼자서 꿈을 파괴하고 현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 수백 수천 번, 얼마든지 시도해 볼 수는 있다. 꿈을 깎아가며 누아르에게 도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유진은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지금 유진이 취할 방법은 저것만이 유일하지 않다. 유진은 꿈속에 있지만, 꿈 밖의 현실에는 세냐와 성녀들이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목소리는 닿지 않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성녀와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진이 성녀들과의 연결을 느끼듯, 성녀들도 유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자체가 좌표가 된다. 누아르가 아무리 꿈을 재창조해도 유진은 지울 수 없으니, 이 좌표는 불변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무의미해.”&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제벨라 시티의 밖. 세냐 메르데인과 크리스티나 로게리스, 아니스 슬리우드가 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들어왔다면 죽였을 텐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킥킥 웃으며 오일에 젖어 미끌거리는 손가락을 문질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당신이 안에서 부수고. 세냐 메르데인과 아니스 슬리우드, 크리스티나 로게리스가 밖에서 꿈을 부순다. 좋아요, 멋지네요, 생각대로 된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죽다 살아난 마법사의 송장과, 정말로 죽어서 추하게 이승에 달라붙은 망령과, 그 망령의 시체를 누덕누덕 기워 만든 썩은 인형 따위가.”&lt;/p&gt;&lt;p&gt;&lt;br /&gt;&lt;/p&gt;&lt;p&gt;치직, 치지직……! 문지르는 손가락이 점점 빠르고 강해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내 꿈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어.”&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유 따위는 말하지 않았다. 믿는 것에 이유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유진의 대답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아, 그래요?”&lt;/p&gt;&lt;p&gt;&lt;br /&gt;&lt;/p&gt;&lt;p&gt;누아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풀려 내려간 수영복의 끈이 다시 묶였다. 오일에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매끈하게 돌아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짜증 나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ㅡ퍼어어엉! 누아르를 태우고 있던 플라밍고 튜브가 폭발했다. 그와 함께 바다가 폭발했다. 하늘까지 치솟은 파도가 사방에서 유진을 덮쳤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 믿음이 짜증 나.”&lt;/p&gt;&lt;p&gt;&lt;br /&gt;&lt;/p&gt;&lt;p&gt;비처럼 쏟아지는 물방울 아래에서 누아르가 속삭였다.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넘기며 유진을 노려보았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나는 하멜, 당신과 좋은 꿈을 꾸고 싶었는데.”&lt;/p&gt;&lt;p&gt;&lt;br /&gt;&lt;/p&gt;&lt;p&gt;촤아아악! 불꽃이 유진을 중심으로 원이 되어 퍼져 나갔다. 양단된 파도가 모조리 증발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누아르는 손가락을 들어 유진을 가리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이 좋은 꿈을 원하지 않는다면.”&lt;/p&gt;&lt;p&gt;&lt;br /&gt;&lt;/p&gt;&lt;p&gt;콰지지직! 손가락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안개를 꿰뚫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레반테인을 들어 앞을 막았지만, 누아르의 마력을 베거나 튕겨내지는 못했다. 마력은 레반테인과 함께 유진을 날려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마력과 충돌해 뒤로 날아갔다. 그렇게 두었다. 대신 누아르는 세상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발아래에 있던 바다가 통째로 유진의 뒤로 옮겨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악몽을 보여줄 수밖에 없잖아.”&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어야 할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목소리와 함께 물거품이 끓는 소리가 유진의 귀를 가득 채웠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바다가 유진을 집어삼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빌어먹을 환생 557화&lt;/p&gt;&lt;p&gt;&lt;br /&gt;&lt;/p&gt;&lt;p&gt;300년 전. 누아르 제벨라가 ‘환상의 마안’의 위력을 가장 정확하게 과시한 전투, 아니, 학살은, 튜라스 왕국군 정예 3만 명을 평원에서 익사시킨 것이다. 정신 공격에 내성이 없던 그들은 물 한 방울 없는 평원에서 바다를 보았고, 지면에서 허우적댔다. 있지도 않은 바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벗고 무기마저 집어 던졌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그렇게까지 했지만, 3만 명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평원에서 익사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지금 유진이 처한 상황은 300년 전보다 지독했다. 이 바다는 환상이되 환상이 아니다. 꿈속이지만 현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진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최악의 경우, 익사가 반복된단 말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씹었다.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작정한다면 숨을 쉬지 않고 수십 분은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 멈출 수는 없다. 그리고 숨을 오래 멈추고 있다면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끊어질 것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마저 잘되지 않았다. 무한대의 바다가 모조리 유진을 향해 흐르고 있다. 그 어마어마한 무게가 유진의 전신을 짓눌렀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쉬리릭…….&lt;/p&gt;&lt;p&gt;&lt;br /&gt;&lt;/p&gt;&lt;p&gt;격류 속에 다른 흐름이 나타났다. 꽈배기처럼 꼬인 물이 송곳이 되어 유진에게 쏘아졌다. 진즉에 알아채고 피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바다가, 꿈 자체가 유진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퍼억! 유진의 몸이 뒤틀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폐.’&lt;/p&gt;&lt;p&gt;&lt;br /&gt;&lt;/p&gt;&lt;p&gt;송곳에 관통당했다. 기껏 멈추고 있던 호흡이 말을 듣지 않는다. 순식간에 의식이 멀어졌다. 구멍 난 폐에 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폐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다. 온몸이 뻥 터질 것만 같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이건 못 버티겠네.’&lt;/p&gt;&lt;p&gt;&lt;br /&gt;&lt;/p&gt;&lt;p&gt;멀어진 의식이 흐려지고 끊어지려는 순간. 유진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일단 숨을 참으면서 기회를 볼까 했는데 이건 안 되겠다. 현실의 바다라면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꿈속의 바다에서 지금 같은 꼴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최선이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온몸이 뻥 터질 것 같은 기분.&lt;/p&gt;&lt;p&gt;&lt;br /&gt;&lt;/p&gt;&lt;p&gt;실제로 뻥 터트렸다. 백염식이 폭주하고, 우주가 폭발했다. 유진이 가진 모든 마나가 불꽃이 되어 튀어 나갔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lt;/p&gt;&lt;p&gt;&lt;br /&gt;&lt;/p&gt;&lt;p&gt;바다 위에서 그걸 보던 누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유진이 한 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폭이다. 다른 수단을 강구하지 않고 그냥 자포자기로 몸을 터트려 버렸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지만 그 위력은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공검, 이클립스, 그런 것보다 훨씬 커다란 위력이 무한한 바다에 뻥 구멍을 뚫었다. 목숨을 모조리 터트린 것이니 다른 기술보다 위력이 월등할 수밖에 없었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하멜, 이건 굉장히…… 새삼스러운 말이지만.”&lt;/p&gt;&lt;p&gt;&lt;br /&gt;&lt;/p&gt;&lt;p&gt;방금까지 분노와 짜증을 드러낸 주제에. 누아르는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거리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lt;/p&gt;&lt;p&gt;&lt;br /&gt;&lt;/p&gt;&lt;p&gt;“당신은 참, 무식하게 미쳤네요.”&lt;/p&gt;</content><link rel='replies'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feeds/2521924854985069867/comments/default' title='Post Comments'/><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2023/02/ch18.html#comment-form' title='0 Comments'/><link rel='edit'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www.blogger.com/feeds/5499307429964195877/posts/default/2521924854985069867'/><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www.blogger.com/feeds/5499307429964195877/posts/default/2521924854985069867'/><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asgtwarrior.blogspot.com/2023/02/ch18.html' title='Ch18'/><author><name>ADMIN</name><uri>http://www.blogger.com/profile/02638522785814696466</uri><email>noreply@blogger.com</email><gd:image rel='http://schemas.google.com/g/2005#thumbnail' width='16' height='16' src='https://img1.blogblog.com/img/b16-rounded.gif'/></author><thr:total>0</thr:total></entry></feed>